12. 한글을 왜 어렵게 만들었나요
 : 한글은 어렵게 만든 글이 아닙니다. 한글은 아주 쉽게 만든 글입니다. 한글은 ‘중국말을 우리 겨레가 글로 쉽게 담으려’는 마음으로 만들었는데, 옛 임금이나 관료나 지식인이 애써 한글을 만든 까닭은 ‘어차피 임금이나 관료나 지식인은 한문으로 말하고 한문으로 생각하면 그만’이었으나, 임금이나 관료나 지식인이 펼치던 정책을 이 나라 95%가 넘는 여느 사람들한테 알려주자면 ‘여느 사람이 쓰는 쉬운 말’로 풀어서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쉽게 배워서 아주 쉽게 쓸 수 있는 글’로 한글을 만들었습니다. 한글이 어렵다고 느낀다면, 맨 처음 한글을 만든 뜻은 쉽게 배워 쉽게 쓰도록 하는 데에 두었으나, 오늘날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나 말법이 너무 딱딱하거나 어렵게 틀에 박히는 바람에, 말사랑벗이 쉽고 즐겁게 배우기 힘든 탓입니다.

 13. 한글이 과학이라 말하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 한글은 ‘중국사람이 중국말로 읊는 소리’를 빈틈없고 빠짐없이 담아낼 수 있게끔 만들었습니다. 말사랑벗이 중국말을 배워 보았는지 궁금한데, 중국말 소리는 아주 많습니다. 중국사람은 영어를 꽤 잘합니다. 중국사람 말소리는 그야말로 온갖 소리가 다 있다 하도록 넓습니다. 이와 같은 중국말을 아주 꼼꼼하면서 대단히 쉽게 담아내어 누구나 수월하게 배울 수 있도록 만든 글이 한글입니다. 그 어느 글도 한글처럼 온갖 소리를 쉽게 알뜰히 담을 수 있게끔 만들지 않았고 만들지 못했어요.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 한글은 아주 과학이요 잘 짜였고 훌륭하다 이야기할 만합니다. 처음 만든 뜻은 ‘그리 과학답지 못한 뜻’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만,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겨레는 ‘우리 겨레 삶을 북돋우는 글’로 한글을 알뜰히 살리거나 살찌운다면, 우리 스스로와 다른 겨레한테도 좋은 글 선물을 베풀 수 있습니다.

 14. 무엇 때문에 한글이 생겨났나요
 : 한글은 한겨레가 쓰려고 만든 글입니다. 다만, 맨 처음 이 한글을 만든 까닭은 ‘여느 사람’이 아닌 ‘양반 계급 지식인’하고 ‘궁궐사람과 권력자’가 쓰도록 만든 글이었습니다. 한겨레 누구나 기쁘게 쓰려고 만든 글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누구나 쓰도록 만든 글이 아니었대서 한글을 만든 뜻이 바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난날 1400년대나 1500년대 같은 조선 때에는 권력과 계급과 신분이 또렷하게 갈렸어요. 이무렵에는 양반 아니고서는 글(한문)을 배울 수 없었습니다. 여느 사람인 평민은 흙을 일구기만 해야 했습니다. 흙을 일구는 여느 사람은 논밭일이 많으니 따로 글을 배울 겨를이 없어요. 곧, ‘평화와 평등과 통일을 꿈꾸는 글’인 한글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조선 때를 지나 일제강점기를 맞이하고 나서 비로소 우리 스스로 우리 한글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고마운가를 처음으로 깨닫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한글을 배울 수 있던 사람은 돈과 계급과 신분이 있던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겨레가 독립을 하자면 지식인만 한글을 알아서는 안 되었어요. 이 나라 모든 사람이 한글을 깨우치며 슬기롭게 살아야 비로소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리하여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온 나라 모든 사람이 한글을 배우도록 하는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고, 우리 나라는 온누리에 드문 ‘글장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15. 한글에서만 찾아보는 모습은 무엇인가요
 : 한글은 거의 모든 소리값을 담을 수 있습니다. 다른 어느 글도 한글처럼 거의 모든 소리값을 담지는 못합니다. 한글은 소리값뿐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빛깔과 무늬와 냄새와 모습까지 거의 그대로 담을 수 있습니다. 이런 데에서 한글은 참으로 돋보이는 글입니다.

 16. 속담이 있어 무엇이 좋은가요
 : ‘속담’이란, 여느 사람들이 살아오며 몸으로 깨달아 이룬 말입니다. 예전 지식인은 여느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을 깎아내리며 ‘속담’이라는 한자말을 지었는데, 여느 말로 하자면 ‘옛이야기’이거나 ‘삶이야기’라 할 만한 ‘속담’이란 오랜 나날에 걸쳐 온몸과 온마음으로 부대끼며 배우거나 일깨운 슬기를 갈무리합니다. 중국사람은 고사성어라는 말을 지어서 중국사람 슬기를 아이들한테 물려줍니다. 우리는 우리 옛이야기나 삶이야기인 속담을 아이들한테 물려주면서 우리 겨레 슬기가 오래오래 빛나도록 이끕니다.

 17. 준말을 쓰면 안 되나요
 : 엉뚱하게 줄이거나 억지로 줄이는 말은 사람들이 널리 알아듣기 힘듭니다. 엉뚱하게 줄이거나 억지로 줄이는 말은 안 쓸 때가 한결 나아요. 그러나 사람들이 한결 알뜰히 알아듣도록 줄인 말이라든지, 조금 더 수월하게 쓰기 좋게끔 줄인 말이라면 얼마든지 쓸 만하며, 퍽 괜찮은 낱말입니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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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순우리말을 알려주셔요
 : 순우리말이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흔히 ‘순우리말’이라 할 때에 ‘純’은 ‘깨끗한’이나 ‘티없는’을 뜻하는 한자로 적는데, 우리말에도 ‘순’이라는 낱말이 있어요. “순 거짓말”이나 “순 바보”라 할 때에 쓰는 ‘순’이에요. 우리말 ‘순’은 좋지 않은 무언가를 가리키는 자리에만 쓴다고 하지만, 우리 말사랑벗부터 이 토박이말을 알뜰히 북돋우면서 ‘순 우리말’처럼 써 볼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 “아주 우리말”이란 소리가 되고, 한자나 영어나 일본말 따위가 깃들지 않은 낱말, 곧 이 나라에서 예부터 옛사람이 익히 즐겁게 써 오던 낱말을 가리킬 수 있어요. 아무튼, ‘순 우리말’로는 “하늘, 바람, 땅, 흙, 물, 햇볕, 그림자, 손, 얼굴, 몸, 사랑, 발바닥, 발톱, 꿈, 잠, 밥, 옷, 일, 놀이, 이야기, 말, 웃음, 눈물, 슬픔, 괴로움, 고단함, 참다, 먹다, 베풀다, 나누다, 믿다, 보다, 쓰다, 찾다, 걷다, 바다, 길, 동무, 어른, 어린이, 계집, 사내, 장사, 돈, 밑, 위, 오른쪽, 왼손, 가운데, 한복판, 동그라미, 네모, 물결, 이랑, 고랑, 논밭, 수수하다, 투박하다, 여느, 온, 즈믄, 날, 달, 해, 하나, 둘, 셋, 읽다, 받다, 주다, 챙기다, 빼앗다, 싸우다, 맑다, 곱다, 환하다, 똑똑하다, 어리석다, 방귀, 똥, 자지, 보지, 젖, 배, 엉덩이, 아기, 뚱뚱하다, 마르다, 홀쭉하다, 파리하다, 살결, 목, 털, 수염, 손톱깎이, 신나다, 재미나다, 맛있다, 쓸모있다, 값어치, 기름, 종이, 하양, 빨강, 풀, 나무, 꽃, 잎, 주머니, 보름, 이태, 그믐, 어머니, 동생, 누이, 언니, 할아버지, 바구니, 그릇, 돌, 깨, 가시, 물고기, 돌보다, 살피다, 보살피다, 안다, 어울리다, 예쁘다, 밉다, 고맙다, 구름, 비, 눈, 별, 무지개, 미리내, 골짜기, 냇물, 멧토끼, 도랑, 도토리, 울타리, 징검다리, 지게, 땔감, 밥, 숟가락, 비녀, 댕기, 목도리, 바느질, 길쌈, 바늘, 실, 빨래, 옹알이, 줄, 금, 그림, 글, 예전, 오늘, 어제, 앞, 뒤, 사람, 빠르다, 누비다, 개, 고양이, 새벽, 아침, 반갑다 ……” 들이 있습니다.

 8. 한자말이 우리말 가운데 절반이 넘나요
 : 한자말이 우리말 가운데 절반을 넘지 않습니다. 다만, 국어사전에 실린 한자말 숫자는 절반을 넘습니다. 그런데, 국어사전에 실린 한자말 가운데 말사랑벗이 알 만하거나 쓸 만한 낱말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세어 보셔요. 국어사전에는 말사랑벗뿐 아니라 어른이나 전문가조차 알 수 없는 낱말이 잔뜩 실렸습니다. 우리가 안 쓰는 한자말이 너무 많이 실렸을 뿐 아니라, 예전 조선 때에 궁궐사람이나 지식인만 주고받던 한문 낱말을 아무렇게나 싣기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쓸 까닭이 없으며 모르는 군더더기 한자말을 국어사전에 덜고 나면, 국어사전에 실릴 한자말은 아마 1/4쯤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또 국어사전에 제대로 안 실은 우리말을 차근차근 싣는다면, 국어사전에서 한자말이 차지할 자리는 1/10쯤 되겠지요.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대목이 있어요. 요즈음 사람들이 흔히 쓰는 ‘한자말’은 그냥 한자말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자 때문에 흘러든 ‘일본말’입니다. 지난날에는 중국사람이 쓰던 중국 한자말을 양반이나 권력자가 즐겨썼고, 요즈음에는 일본사람이 쓰는 일본 한자말을 누구나 아무렇게나 즐겨씁니다. 겉보기로는 한자말이지만, 속알맹이를 살피면 예전에는 중국말이고 오늘날에는 일본말을 쓴다고 해야 맞습니다.

 9. 왜 우리는 한자로 이름을 지어야 하나요
 : 왜 그럴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셔요. 우리가 한자로 이름을 지은 지는 기껏해야 백 해가 채 안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지난날에는 양반만 이름을 지을 수 있었고, 양반은 모두 한자로 이름을 지었어요. 더구나, 양반 가운데 남자한테만 항렬을 따지고 십이지를 따지며 한자로 이름을 지었고, 양반 가운데 여자한테는 아무 이름이나 붙이곤 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이 ‘양반 계급과 권력이 무너지’면서 여느 사람들도 권리를 찾자면서 여느 사람들 또한 이름을 한자로 붙였어요. 이때부터 비로소 한자이름이 막 퍼졌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한자로 이름을 지어야 할 까닭이 없기도 하고, 이름이란 내 아이한테 가장 사랑스러우며 어버이로서 가장 아끼거나 좋아할 낱말을 살펴서 붙여야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10. 욕을 써서는 안 되는 까닭은 뭔가요
 : 욕을 써서 안 되는 까닭은 없습니다. 욕을 안다면 욕을 할 수 있고, 욕이 나오는 때라면 욕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욕이 나와서 욕을 할 때에는 나한테서 욕을 듣는 사람 마음이 다칩니다. 그리고, 내 욕을 듣는 사람이 나 때문에 마음이 다칠 뿐 아니라, 욕을 하는 사람 스스로 마음을 갉아먹습니다. 다른 사람 마음을 다치게 하는 말을 할 때에는, 이러한 말을 하는 사람부터 스스로 제 마음을 갉아먹기 마련입니다. 듣는 사람 마음을 다치게 하니까 욕이 안 좋다고도 하지만, 이에 앞서 말하는 사람부터 착하거나 참답거나 고운 마음을 북돋우는 길하고는 사뭇 동떨어지기 때문에 욕을 쓰지 말자고 이야기합니다.

 11. 욕은 언제 생겼나요
 : 욕이 언제 생겼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욕이란 거친 말입니다. 거친 말이란 사랑하며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하며 서로를 감싸는 말이 아닌 욕인 만큼, 이런 말이 처음 생긴 때라면,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거나 아끼는 때가 아닌, 사람들이 서로를 미워하거나 괴롭히는 때였겠지요. 이를테면 전쟁이 터지는 때에는 사람들 삶이 팍팍하며 괴롭습니다. 우리 쪽에서 전쟁을 일으키든 바깥에서 전쟁이 찾아들어 고달프든, 사람들 마음에서 저절로 욕이라고 하는 거친 말을 내뱉고 싶어질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제 손으로 흙을 일구어 살림을 꾸리던 조촐하며 아늑하던 나날에는 욕이 생기지 않습니다. 무기를 만들어 이웃사람 살림이나 곡식을 빼앗는다든지 땅을 넓히려 할 때에 비로소 욕이 생깁니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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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봄 새 나비와 새 개구리


 오늘부터 드디어 이불 빨래를 한다. 손으로 빨까 생각했는데 옆지기가 이오덕학교에서 빨래기계를 빌려서 쓰자고 말한다. 요즈음 가뜩이나 기운이 많이 떨어졌다고 느끼기에 옆지기 말을 듣기로 한다. 빨래기계를 빌리는 김에 이불을 두 채 빨자고 생각한다.

 가장 때 많이 탄 이불부터 두 채를 안고 빨래감과 설거지거리를 안고 멧길을 오른다. 계단논 얼음은 아직 다 안 녹았다. 학교 헤엄터에도 얼음이 아직 그대로이다. 이러니 우리 집 물도 아직 안 녹을 테지. 그런데 나비 한 마리가 팔랑거린다. 어, 어, 벌써 나비인가? 저녁이 되면 퍽 쌀쌀한데 나비가 이렇게 팔랑거려도 괜찮은가.

 빨래기계 앞에 선다. 이불을 한 채씩 넣고 대야로 물을 부으며 비누를 골고루 문지른다. 단추를 누르고 가만히 지켜보다가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를 마치고 빨래기계를 들여다보니 멈췄다. 왜 멈추었을까. 다시 단추를 누른다. 돌아간다. 씻는방에 가서 빨래를 한다. 빨래를 하고 나서 능금을 씻는다. 능금과 빨래를 통에 담고 빨래기계 있는 데로 간다. 빨래기계가 또 멈췄다. 빨래기계를 만진 지 너무 오래된 탓일까. 아니, 나는 빨래기계를 만진 적이 없나. 요새 빨래기계는 단추 몇 번 누르면 다 되는 듯한데, 아닌가. 다시 단추를 이래저래 누른다. 이번엔 제대로 돌아가려는 듯하다. 한 시간 육 분 걸린다고 불이 깜빡인다. 가슴을 쓸어내린다.

 다 마친 빨래감을 들고 집으로 내려온다. 옆지기가 수제비 반죽을 한다. 아이가 옆에서 알짱알짱하면서 거들겠다고 나선다. 함께 밥을 먹고 나서 아이가 또 더럽힌 옷 두 벌을 벗겨 빨래하러 올라간다. 빨래기계 있는 데로 가니 빨래가 다 되었다. 아이들이 노는 철봉대에 이불을 하나씩 펼쳐서 넌다. 아이 옷가지 두 벌을 새로 빤다.

 아침부터 해바라기를 시킨 이불은 방으로 들인다. 방과 마루를 옆지기하고 함께 치우고 이래저래 쓸고 닦기를 더 한 다음 자전거를 타고 읍내로 나가기로 한다. 오늘은 장날이라서 반찬감을 좀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읍내로 가는 오르막길에서 숨을 헐떡이는데 왼편 비탈논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린다. 어, 이곳에서는 벌써 개구리가 깼나.

 어제 집식구들 다 함께 읍내마실을 나올 때에는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시골버스라 할지라도 차에 타면 멧개구리 깨어나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구나. 이렇게 자전거를 타거나 두 다리로 걷지 않고서야 이른봄 첫 개구리 울음소리를 맞아들이지 못하는구나.

 읍내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오르막에서 다시금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는다. 구불구불 멧길을 걷는 아저씨 하나 보인다. 아저씨도 개구리 소리를 함께 듣겠구나. (4344.3.1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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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에서 휴가 나와 책읽기


 군대에 들어가서 책을 읽는 아이가 더러 있다. 군대에 들어간 다음 휴가를 얻어 나왔을 때에 책을 읽는 아이가 아주 더러 있다. 군대에 들어가기 앞서 책을 읽는 아이가 몹시 더러 있으며, 군대에서 나온 뒤에 책을 읽는 아이가 참으로 더러 있다.

 읍내에 식구들이 함께 나간다. 가락국수집에 들어가서 늦은 낮밥을 먹는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듯한 한 사람과 또래동무 한 사람이 들어온다. 밥집에 들어설 때부터 입에 욕지꺼리를 붙인 아이 둘은 손전화를 켜고 군대에 있는 다른 또래동무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첫인사부터 욕으로 열어 이야기 거의 모두를 욕으로 채우는 아이들은 둘레에 저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어른만 있는 줄 생각하지 않는다. 얼굴을 마주보는 둘하고 손전화로 얘기 나누는 다른 하나만 생각한다.

 아이들은 군대에 들어가기 앞서부터 욕을 했을까. 아이들은 몇 살 적부터 욕을 들었을까. 아이들은 언제부터 모든 말끝마다 욕을 붙일까. 이 아이들은 제 어버이 앞에서도 욕을 일삼을까. 이 아이들은 할머니나 할아버지하고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욕을 달까. 어쩌면 제 어버이나 할머니나 할아버지하고는 마주하거나 마주보거나 어울리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러면 제 여자친구하고는 어떤 말을 섞을까. 여자친구한테도 욕을 쉬 내뱉으며, 여자친구도 이 아이한테 욕을 거침없이 쏘아붙일까.

 내가 군대에 끌려들어가 스물여섯 달을 지내는 동안 내가 있던 강원도 양구 깊은 멧골짜기 군부대로 면회롤 오는 숱한 사람들을 보았다. 나한테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너무 외진 곳이라 아버지 어머니한테 오지 말라고 하셨지만 아버지 어머니는 한 번 찾아와 주셨다. 이때에 나도 한 번 외박을 할 수 있었는데, 외박을 한 번 나와 보니 외박이나 외출이라는 제도가 왜 있는지를 알 만했다. 다른 군부대는 어떠한지 모르나, 내가 있던 군부대에서는 아버지나 어머니나 애인이 찾아올 때에만 외박을 시켜 준다. 여느 ‘남자’친구가 오면 외출만 되는데, 양구 읍내에서 내가 있던 군부대까지는 한참을 들어와야 한다. 우리가 휴가를 받아 밖으로 나가자면, 새벽 여섯 시 십 분에 중대장신고를 하고 여섯 시 반에 대대장신고를 한 다음, 여섯 시 사십 분에서 오십 분쯤에 연대본부로 편지나 물품을 받으러 떠나는 짐차에 얹혀 타고 나가야 한다. 이때에 대대 짐차 짐칸에 짐짝으로 실려 연대에 닿으면 한 시간인가 두 시간에 한 대 지나가는 시골버스를 기다린다. 연대본부에 닿는 때는 으레 일곱 시 반이나 사십 분쯤이고, 여덟 시인가 여덟 시 반에 시골버스를 탔으며, 읍내에 닿기까지 한 시간 즈음 달린다. 읍내에서 서울 가는 버스를 타자면 열 시 반 차였고, 새벽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 늦은아침이나 이른낮밥을 먹어야 할 텐데, 이무렵 문을 연 밥집이란 거의 없다. 쭐레쭐레 읍내를 돌아다니다가 구멍가게에 들러 술 몇 병과 과자부스러기를 사서 버스를 기다리며 마시다가는, 고참들이 열한 시 반이나 열두 시 반 버스를 타자 하면서 이곳에서 밥 먹으며 술 한잔 하자면 이렇게 하곤 한다.

 서로서로 욕밖에 할 말이 없나 싶은 아이 둘 말소리가 꽤 크게 들리는 바람에 지난날 군대에 붙들리며 지내던 나날 일 몇 가지가 떠오른다. 나는 군대라는 데에 끌려가지 않았으면 욕지꺼리를 한 마디도 안 하거나 못 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 사회도 군대하고 마찬가지이니까, 사회살이를 하면서도 얼마든지 욕지꺼리를 배워 내 입과 손을 욕지꺼리로 물들였을 테지 싶기도 하지만, 슬픈 사회 슬픈 사람들하고는 등을 진 채 착한 사회 착한 사람을 찾아 조용한 곳으로 숨어들지는 않았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이 사회 이 나라에서 살아가자면 군대에 끌려가서 욕지꺼리를 실컷 배우거나 욕지꺼리판에서 살아남는 길을 익혀야 하는지 모른다. 나 스스로 더 모진 욕지꺼리를 내뱉는 사람이 되든지, 둘레에서 온갖 욕지꺼리를 퍼붓더라도 그러려니 하며 한귀로 흘리도록 마음을 닦을 노릇인지 모른다.

 한 걸음을 떼고 두 걸음을 떼면서도 모든 말마디에 욕이 붙는 아이들로서는 욕이 욕 아닌 여느 말투인지 모른다. 이 아이들한테 욕이란 아주 다른 말씨이거나 훨씬 거칠며 끔찍한 말마디로 튀어나올는지 모른다.

 이 아이들은 제 짝꿍하고 사랑놀이를 해서 아이를 낳을 때에 제 새끼를 보면서 “야 이 개새끼 존나 더럽게 귀엽네.” 하고 말하려나. 욕하는 아이들은 어떤 집에서 어떤 살붙이하고 어떤 살림을 꾸리면서 살아가려나. 욕하는 아이들은 학교를 다니는 동안 어떤 교과서를 배우고 어떤 책을 읽었으며 어떤 동무나 어른을 사귀었으려나. 욕하는 아이들 마음을 따사로이 보듬으며 씻어 줄 책을 조용히 일굴 어른은 우리 둘레에 있을까. (4344.3.12.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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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더스의 개 - 산하명작만화 3
위더 원작, 이향원 글 그림 / 산하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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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만화로 다시 태어나는 예쁜 이야기
 [만화책 즐겨읽기 31] 이향원, 《플랜더스의 개》(산하,2002)


 이향원 님이 그린 《플랜더스의 개》에 나오는 개는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맞닿은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하고 한식구로 지내며 우유수레를 끄는 개’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향원 님 그림에 나오는 개라든지 사람은 ‘서양사람을 그려도 서양사람 아닌 이향원 님이 그리는 한국사람’으로만 보입니다. 아마 다른 분이 《플랜더스의 개》를 그리더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 보면 재미있으나 어찌 보면 모두들 ‘내 그림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내 그림틀이 있는데 내 그림틀을 벗어던지고 어수룩하게 ‘서양사람 모습을 잘 드러내는 모습’으로 그리려 하면 외려 어줍잖기 일쑤입니다. 그림이든 만화이든 정물그림이 아니요 판박이그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진으로 찍는다 할 때에도 한국사람이 서양사람을 찍을 때하고 서양사람이 서양사람을 찍을 때에는 느낌이 달라요. 서양사람이더라도 네덜란드사람이 네덜란드사람을 찍을 때하고 덴마크사람이 네덜란드사람을 찍을 때하고 미국사람이 네덜란드사람을 찍을 때는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벨기에사람은 벨기에사람 눈길과 손길에 따라 그림과 글과 만화와 사진을 빚으면 되고, 한국사람은 한국사람 눈길과 손길에 따라 그림과 글과 만화와 사진을 일구면 돼요.

 명작을 만화로 다시 그린다 할 때에 으레 ‘명작 느낌을 살린다’는 테두리에 갇혀 그만 ‘내 그림틀’을 잊거나 잃곤 하는데, 이렇게 하면서 명작 느낌을 살리려 해 보았자 명작 느낌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명작은 명작 그대로 둘 때에만 명작 느낌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명작을 누군가 만화로 다시 그린다 한다면, ‘만화로 다시 그리는 사람 숨결’에 따라서 새로운 작품이 되어야 합니다. ‘명작을 다시 그린 만화’는 ‘명작을 다시 그려서 좋은 만화’가 되어야지 ‘명작 느낌 살아나도록 하는 만화’가 되어서는 죽도 밥도 되지 않습니다. 이때에는 명작도 만화도 ‘명작 닮은 만화’도 되지 못합니다.

 이향원 님이 그린 《플랜더스의 개》는 다른 사람 아닌 이향원 님 빛깔과 숨결과 손길이 고스란히 묻어난 ‘이향원 만화’여야 비로소 아름다우면서 눈물겹고 사랑스러운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 “할아버지, 모두들 루뱅 쪽으로 가는데 우리만 반대쪽으로 가고 있네요.” “저 사람들은 루뱅 축제에 가고 우린 집으로 가니까.” (19쪽)
- “파트라슈, 잘 알려줘.” “멍멍.” “넌 영리하니까 배달할 집을 모두 알고 있겠지?” “멍멍.” “새벽 바람이 이렇게 매서운 줄은 몰랐네.” “멍멍.” “호, 호. 추워. 아! 호, 호. 얼어붙는 것 같구나. 이렇게 추울 수가. 그동안 할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42∼43쪽)


 늘 바지만 입던 ‘이향원 만화 여자아이’가 모처럼 치마를 입고 나온 《플랜더스의 개》를 보니 좀처럼 예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안 예쁘지는 않으나,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싶습니다. 이향원 님이 가끔은 ‘이향원 만화 여자아이’한테 치마를 입혀 주었다면 《플랜더스의 개》에서도 조금은 어울린다 느낄 수 있었을까 궁금하지만, 아무래도 원작을 생각하면서 치마를 입힐 수밖에 없었으리라 봅니다. 어쩌면, ‘치마 아닌 바지 입은 알로아’가 나오는 새로운 만화가 태어날 수 있었는지 모르고, 치마 아닌 바지를 입은 살짝 왈가닥이거나 말괄량이 알로아가 나오도록 그렸어도 퍽 재미났거나 아름답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아직 만화영화로 〈플랜더스의 개〉를 보지 않은 어린이라면 이 만화책 줄거리를 모르겠지만, 만화책 《플랜더스의 개》를 장만하여 읽을 어른이라든지 이 만화책을 아이들한테 읽히려 하는 어른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를 만화로 새로 마주하는 셈이라 할 만합니다.

 일본에서는 원작 하나를 놓고 여러 사람이 새롭게 만화영화로 담곤 합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 《우주소년 아톰》이나 《블랙잭》은 데즈카 오사무 님이 살던 때에 손수 만든 만화영화가 있기도 하지만, 데즈카 오사무 님이 죽은 뒤에 다른 사람이 새로운 느낌과 그림으로 새롭게 만든 만화영화가 있기도 합니다.

 어느 작품이든 원작이 있되, 원작 멋과 맛을 살리면서 ‘새로 그리는 사람 손길과 이야기’가 살며시 깃듭니다. 원작은 원작대로 다시금 맛보는 즐거움을 누리고, 새로운 만화영화는 새로운 만화영화로 거듭 마주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 (네로 할아버지는 정직해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우유 배달을 맡겼다. 그러나 일이 힘든 만큼 보수는 많지 않았다. 두 식구는 한 번도 배불리 먹은 적이 없다.) (26쪽)
- (네로는 아주 가난하게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끼니를 굶는 고통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건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네로는 이를 악물었다. 우유 배달을 멈출 수 없었다.) (46쪽)
- (두 폭의 그림은 루벤스의 대표작이었다. 그 그림엔 휘장이 늘 처져 있었다. 많은 돈을 내지 않으면 그림을 볼 수 없었다.) (61쪽)



 만화책 《플랜더스의 개》에서는 네로와 알로아가 있으며, 네로네 할아버지와 알로아네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사이에 파트라슈라는 개가 있습니다. 네로와 알로아는 오랜 소꿉동무요 사랑을 꽃피우는 단짝이며, 네로네 할아버지는 착하며 바지런한 분이고 알로아네 아버지는 돈은 많으나 마음이 메마른 분입니다. 파트라슈는 이 사람들 사이에서 기쁘기도 하지만 슬프기도 하고, 네로네 할아버지처럼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기운이 줄어듭니다. 네로와 알로아가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파트라슈는 늙은 개가 되니까요.

 네로는 어버이를 여의고 할아버지하고 살아가면서 언제나 가난합니다. 가난하면서 굶주리고, 굶주리지만 착한 마음씨를 잃지 않습니다. 굶주리며 지내니 착한 파트라슈한테 줄 먹이도 모자라는데, 그래도 셋은 서로 아끼며 사랑하는 마음결을 예쁘게 잇습니다. 아무것 없는 살림이기에 집삯조차 내기 빠듯하고, 집삯조차 못 낼 뿐 아니라 밑천 하나 없으니 흙을 일군다든지 다른 어떤 일을 한다든지 꿈꾸지 못합니다.

 할아버지 뒤를 이어 우유배달 일을 하는 네로는 어느 때부터인가 ‘그림’을 봅니다. 배고픔을 잊게 해 주는 아름다운 그림을 물끄러미 보면서, 네로가 살아가는 시골마을 아름다운 터전을 그림으로 아름답게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꿈꿉니다. 밥과 따뜻한 집과 좋은 일자리보다, 힘들며 고단한 삶에 가느다랗지만 어여쁜 빛줄기처럼 스며든 착한 그림을 꿈꿉니다.

 마음이 절로 움직이고 손이 절로 움직이기에 그리는 착한 그림입니다. 돈을 받고 파는 그림을 그리려는 네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보금자리와 하늘과 들판을 그림으로 그리려는 네로입니다. 가난한 살림이어도 밝으며 씩씩한 네로 그대로, 누구한테든 따사로우며 애틋한 그림을 그리려는 네로입니다.


- “그림물감이 없으면 숯으로 그려도 되고요.” “숯은 금방 지워져 버릴 텐데. 화가는 돈을 벌지 못해. 늘 가난해.” “헤헷, 할아버지도. 돈은 일을 해서 벌면 되잖아요. 두고 보세요. 전 훌륭한 화가가 되고 말 거예요.” (51쪽)
- “출렁이는 저 파도를 색으로 칠할 수 있다면, 정말 멋질 텐데. 파트라슈, 나도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보고 싶어. 아! 그림물감만 있으면 저 고동 소리도 그림 속에 담을 수 있을 것 같은데.” (56∼57쪽)
- (네로는 틈만 있으면 숯부스러기로 눈에 띄는 것을 모두 그렸다. 하지만 그것들을 아름다운 색깔로 표현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63쪽)
- ‘알로아가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구나. 그냥 보고 말 수는 없어.’ “알로아, 그대로 가만 있어.” “나를 그리려고?” “아주 아름다워. 멋지게 그려 볼게.” (65쪽)
- (정성 들여 그린 알로아의 그림을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파트라슈, 그 돈을 받았으면 루벤스의 그림을 볼 수 있었는데. 하지만 알로아의 그림을 돈을 받고 판다는 건 이상해, 그렇지?” (68∼69쪽)


 만화책 《플랜더스의 개》는 네로가 네로네 할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착한 마음에다가 파트라슈라는 개를 아끼는 사랑스러운 마음과 그림 하나에 담는 고운 마음이 무엇인가를 돌아보도록 이끕니다. “파트라슈, 그 돈을 받았으면 루벤스의 그림을 볼 수 있었는데. 하지만 알로아의 그림을 돈을 받고 판다는 건 이상해” 하는 말처럼, 언제나 돈에 쪼들려 그림을 배운다든지 훌륭한 그림을 구경한다든지 엄두를 못 내는 네로인데, 정작 네로는 네로가 그린 그림을 돈을 받고 팔 엄두 또한 내지 않습니다. 네로한테는 네로라는 아이가 살아가며 익히거나 받아들인 사랑을 네로가 그리려는 그림에 살포시 담을 수 있으면 기쁩니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림이 아니라, 스스로 즐겁게 그릴 수 있는 그림이면 넉넉합니다. 남한테 내보이려는 그림이 아니라, 아름다움이 저절로 스며나오도록 온힘을 쏟아서 이루는 그림이면 됩니다.


- ‘나의 그림 솜씨는 알로아 아버지의 재산에 비길 수 없는 숭고한 거야. 나는 반드시 훌륭한 화가가 되고 만다.’(82쪽)
- (그림을 접수시키고 난 네로는 힘이 쭉 빠졌다. 아름다운 물감으로 채색한 수많은 그림 속에서 송판 위에 그린 목탄 그림은 너무 초라했다.) ‘난 글도 모르고 겨울에 양말도 신을 수 없는 가난뱅이야. 이 주제에 그림을 그리겠다는 건 맞지 않는 건지도 몰라.’ (89쪽)



 ‘위다(Ouida/Marie Louise de la Ramee)’ 님은 1872년에 《A Dog of Flanders》를 쓰고, 일본사람은 1975년에 만화영화로 만들며, 이향원 님은 2002년에 만화책 한 권으로 《플랜더스의 개》를 내놓습니다. 소설과 만화영화와 만화책은 다 같은 이야기이면서 저마다 조금씩 다른 흐름으로 이야기를 펼칩니다. 모두들 한결같이 네로와 파트라슈가 얼마나 애틋하게 서로를 아끼며 보살폈는가를 보여주면서, 저마다 다 다른 빛깔과 흐름으로 둘 사이가 어떻게 따스한가를 밝힙니다.

 네로한테 젖을 얻을 소나 염소가 한 마리라도 있었으면 조금이나마 돈을 모을 만했을 테고, 조금이나마 돈을 모을 만했다면 할아버지이든 네로이든 파트라슈이든 끼니 한 번이라도 배불리 먹어 보고 숨을 거두었겠지요. 아니, 추운 겨울날 양말 한 켤레라도 신어 보았겠지요.

 그러나 가난과 굶주림과 추위를 온몸으로 껴안으며 시달린 네로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따스하며 사랑스러운 손길로 따스한 그림결과 사랑스러운 그림무늬를 베풉니다. 물감 한 번 써 보지 못한 네로인 만큼 나무판대기에 숯으로 그렸을 뿐이지만, 눈부신 그림빛을 길어올립니다. 네로가 물감을 쓸 수 있었다면 《로빙화》에 나오는 고아명처럼 무지개빛 아름다운 그림을 빚었을는지 모르지만, 네로는 네로대로 숯그림만 그릴 수 있었기에 ‘흑백 빛깔’로 이룰 수 있는 눈물겨운 그림꽃을 피웁니다.

 살림이 넉넉한 이들은 ‘넉넉한’ 마음결로 그림을 빛내지 못합니다. 살림이 넉넉한 이들은 ‘넉넉한’ 마음씨로 어려운 이웃을 돕지 못합니다. 살림이 쪼들리는 이들은 힘겨이 쪼들리는 마음결로 그림 하나에 사랑을 담고 매무새와 말씨 하나에 사랑을 싣습니다.


- (사람들은 지금 네로에게 모두 베풀어 주려 한다. 네로가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네로와 파트라슈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았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진실되게 살았다. 조용히 눈을 감는 순간에도 둘은 꼭 끌어안았다. 둘은 마치 한몸처럼 꼭 붙어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152∼153쪽)


 만화책을 그린 이향원 님은 책머리에 “책을 보고 운다는 것은 삶을 배워 가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면서, 당신 만화를 읽으며 눈물을 흘릴 사람이 있기를 꿈꿉니다. 만화책 《플랜더스의 개》를 읽으며 눈물을 흘릴 사람이라면 만화영화나 소설 《플랜더스의 개》를 마주하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있겠지요. 책 아닌 사람을 마주하는 자리에서도 아름다운 삶을 마주할 때에 눈물이 샘솟을 수 있을 테고요.

 한 사람이 살아가자면 돈은 얼마나 있어야 하고 사랑은 얼마나 있어야 할까요. 예쁘게 태어난 이야기가 백서른 해 만에 한국에서 만화옷을 새로 입으며 우리한테 예쁜 삶이란 어떤 모습인가를 가만히 들려줍니다. (4344.3.12.흙.ㅎㄲㅅㄱ)


― 플랜더스의 개 (이향원 그림·글,위다 원작,산하 펴냄,2002.2.27./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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