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우리 말 87] 새봄맞이 균일가전

 편의점에서 쓰는 말이 아름답거나 싱그럽거나 깨끗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편의점 이름치고 아름답거나 싱그럽거나 깨끗하다 싶은 이름이란 찾아볼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알파벳으로 적는 서양 이름을 붙이는 편의점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편의점에서 봄을 맞이해서 뭔가를 벌이며 “새봄맞이 균일가전”이라고 이야기한다. 참으로 뜻밖이면서 참으로 놀랍다. 그렇지만 모르는 노릇이지. 올 한 해에만 이렇게 ‘새봄맞이’를 말하고, 이듬해부턴 다시금 영어사랑으로 돌아갈는지 모르리라. (4344.4.1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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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1.4.12.
 : 자전거수레 달고 달리기



- 어제 들은 옆지기 말을 곱씹으며 자전거를 달린다. 수레를 달면 아버지는 한결 느리게 달릴밖에 없다. 느리게 달리지만 더 힘들다. 더 힘들기는 한데, 차분하게 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 길바닥을 더 살피고 더 좋은 길을 달리려고 한다. 시골길을 달리는 자동차이든 도시 시내를 달리는 자동차이든, 자전거는 아랑곳하지 않기 일쑤이다. 맨몸뚱이 자전거라면 옆에 바싹 붙어 달리는 자동차가 많다. 자전거에 수레를 달아도 어슷비슷하게 바싹 붙으며 차에 치일락 말락 으르렁거리는 자동차는 어김없이 있다. 그래도 자전거로만 달릴 때하고 견주면 훨씬 홀가분하다. 옆지기가 수레 달고 나간 아버지를 덜 걱정하는 마음은 알 만하다. 자전거를 몰며 몸이 찌뿌둥하기는 하지만, 나 또한 아이와 함께 달린다는 생각에 더 신나게 자전거를 몰 수 있기도 하다. 아이하고 이 길을 걷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 그저 싱싱 달릴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수레를 달 까닭이 없다. 그냥 빨리만 달리려 했다면 굳이 시골로 살림집을 옮길 까닭이 없다. 도시에서 살던 때에도 돈을 많이 준다는 일자리를 찾아 일하면 되고, 아이 돌보는 몫은 오로지 옆지기한테 떠맡기거나 어린이집에 넣을 노릇이겠지. 빨리빨리가 내키지 않을 뿐 아니라 못마땅하니까, 내 삶과 옆지기 삶과 우리 식구 삶은 빨리빨리가 아닌 알맞으면서 즐거운 나날이 되기를 바라니까, 나는 이러한 내 삶결대로 내 자전거를 몰아야 좋다.

- 빨리빨리 달릴 생각이라면 자전거는 아예 생각할 일이 없다. 자가용 한 대 뽑으면 되잖아. 자가용 값과 기름 넣을 값을 벌자며 아주 마땅히 큰돈 주는 일자리에서 번듯하게 양복 빼입으며 흐느적거릴 노릇일 테고.

- 나는 돈보다 내 삶이 좋다. 나는 이름값보다 우리 식구들과 복닥이는 나날이 좋다. 나는 새소리와 바람소리와 물소리가 좋다. 나는 햇볕이 좋고 흙이 좋으며 푸나무가 좋다. 두 다리를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천천히 거닐 때에 즐겁고, 두 다리로 자전거 발판을 밟으며 시원스레 바람을 맞으면 기쁘다.

- 사진찍기와 글쓰기를 하는 나는 늘 한 가지를 생각한다. 달리는 자가용에서는 사진을 못 찍고 글을 못 쓰며 책을 못 읽는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사진이고 글이고 책이고 없다. 사랑이고 삶이며 사람 또한 없다. 운전대 잡은 사람이 길가 자전거라든지 골목길 뛰노는 아이를 살피기를 바랄 수 없다. 운전대 잡은 사람은 그예 앞으로 더 빨리 나아갈 뿐이다. 사진찍기와 글쓰기를 하면서 살아가자면, 여기에 책읽기를 하면서 살아가자면, 나로서는 두 다리로 즐겁게 거닐다가 자전거를 타고 느긋하게 달리면 넉넉할 뿐이다. 자전거에는 수레를 달고 틈틈이 아이와 함께 마실을 다녀야지.

- 다른 사람들도 자전거에 수레를 달아 아이를 태우라고 말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한테 자가용 좀 제발 버리라고 말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보고 도시를 떠나거나 도시에서 살더라도 돈을 적게 벌며 조용히 살아가는 길을 찾자고 말할 수 없다. 다들 생각이 있고 사랑이 있을 테니까, 제 생각과 사랑을 살찌울 노릇이다.

- 쌀을 사러 보리밥집에 간다. 우리 집은 풀무학교생협에서 쌀을 받는다. 한 달은 우리가 받아서 먹고, 한 달은 일산 옆지기네로 보내곤 했는데, 이달에 처음으로 집쌀이 다 떨어졌다. 두 달이 좀 안 되었는데 세 식구가 쌀 10킬로그램을 다 먹었다. 아이가 밥을 꽤 잘 먹어 주었기 때문에 쌀이 벌써 떨어졌구나 싶다. 여태껏 아이가 밥을 잘 안 먹어 주어 꽤나 골머리를 앓았는데, 이제는 이렇게 잘 먹고 잘 크는구나. 아이한테 “아빠 쌀 사러 자전거 타고 나가는데 같이 갈래?” 하고 묻는다. 아이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고개를 홱 돌린다. 졸음이 가득한 얼굴로 어머니랑 셈틀 앞에 앉아서 영화를 보겠단다. 자전거 태워 준다는데 안 가는 날이 다 있네, 하고 놀라며 혼자서 길을 나선다. 그런데 지갑을 집에 놓고 나왔다. 외상을 걸고 이듬날 다시 와서 쌀값이랑 이것저것 장만한 먹을거리 값을 치르기로 한다. 집으로 돌아오니, 옆지기가 나를 두고 참 바보라고 말한다. 바보 맞지. 바보 맞아.

- 저녁에 해 기울 무렵 집을 나섰기에, 오늘은 사진기를 안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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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1.4.11.
 : 졸린 아이 데리고 나오기



- 아이 어머니가 피자를 먹고 싶다 말한다. 피자라는 먹을거리는 아이한테나 아이 어머니한테나 몸에 안 좋으니까 먹지 말자는 이야기는 못한다. ‘몸에 안 좋은 먹을거리’라는 대목에서 딱히 할 말이 없다. 아이를 함께 돌보는 아버지로서 집에서 어떠한 먹을거리를 마련해서 함께 먹는가.

- 읍내로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일찍 일어나서 낮잠이 없이 보내는 아이는 아버지하고 함께 가고 싶다며 눈물을 비친다. 저녁나절 퍽 고단할 텐데 괜찮을까 걱정스럽다. 그러나, 울먹울먹하는 아이를 놓고 갈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제아무리 고단한 몸이더라도 자전거에 수레를 달고 아이하고 함께 마실을 할밖에 없다.

- “같이 갈 테니까 뚝 그쳐요. 뚝 안 그치면 같이 안 가요.” 아이는 끄윽끄윽 하면서 울음을 삼킨다. 양말을 신고 옷을 갖춰 입는다. 자전거에 수레를 달고 마당 앞으로 꺼낸다. 아이가 방글방글 웃으면서 마당에서 뛴다. 아이를 번쩍 들어 수레에 앉힌다. 졸음이 가득한 아이 얼굴이지만 웃는다. 그리도 좋니?

- 자전거도 아이 아버지 몸도 삐끄덕삐끄덕 소리를 내며 달린다. 아이는 길가에 스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수레에 앉아 노래노래 부른다. 오르막을 오른다. 집에서 음성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이고, 숯고개 언덕받이부터는 내리막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거꾸로 오르막에 내리막이다. 아이는 오르막이 거의 끝날 무렵부터 꾸벅꾸벅 존다. 오르막을 오르는 동안에는 길가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이럭저럭 있느라 인사하며 말을 건다며 깨었다면, 이제는 멧자락과 논밭만 펼쳐지니 슬슬 졸음이 오는가 보다.

- 오르막을 다 오른 다음 자전거를 멈춘다. 수레 덮개를 씌운다. 아이는 한쪽으로 엎드러졌다. 자전거를 천천히 달린다. 피자집에 닿는다. 피자를 시킨다. 피자를 받아 수레 한쪽에 놓는다. 아이는 안 깬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집에서 나설 때보다 퍽 고단하다. 바람이 그닥 세게 불지 않으니 맞바람이라고 하더라도 천천히 발판을 밟는다. 아이와 함께 달리는 만큼 더 빨리 달릴 수는 없겠지. 그저 느긋하게 달리면서 집으로 가뿐하게 돌아와야지. 등판에 땀이 송글송글 돋는다고 느끼면서 오르막을 낑낑댄다. 숯고개 즈음 해서 오른쪽 비탈논을 펄쩍펄쩍 뛰며 가로지르는 고라니 두 마리를 본다. 어스름이 깔리는 때라서 고라니가 돌아다니는가 보다. 새벽과 어스름은 사람 눈에 잘 안 뜨이는 때일 테지. 수레를 돌아본다. 아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이가 깨었다면 고라니를 함께 볼 수 있을 텐데. 아이는 아직 고라니를 보지 못했다. 아이와 함께 다니며 고라니를 더러 마주치지만 “저기 고라니 있네?” 해도 고개를 늦게 돌리느라 못 보곤 한다.

- 고갯마루를 다 오른다. 드디어 살 만하다고 생각하며 시간을 살핀다. 집에서 나올 때에는 고갯마루까지 12분 걸렸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읍내에서 고갯마루까지 19분.

- 고갯마루에서 읍내까지는 15분 걸렸다. 고갯마루에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9분 걸린다. 시간을 살피다가 오늘은 집으로 돌아올 때에 그리 오래 안 걸렸다고 느낀다. 어쩌면, 집에서 나올 때부터 좀 느긋하게 나왔기 때문일까. 하긴, 수레를 안 달고 읍내로 나갈 때에는 모두 16∼17분이 걸렸으니까, 처음 나갈 때부터 꽤나 걸린 셈이다.

- 집에 닿아 피자와 가방을 내려놓고 아이를 살짝 안는다. 아이는 얼핏 잠에서 깨는데, 더 잘 듯 더 안 잘 듯 망설이다가 일어난다. 피자를 먹을 때 옆지기가 말한다. ‘자전거만 타고 나갈 때에는 걱정스러운데, 자전거에 수레를 달고 나가면 걱정스럽지 않다’고 한다. 수레를 달고 달리면 덩치 큰 녀석이 잘 보이니까 자동차가 한결 잘 비켜 줄 테니 차에 치일 걱정이 덜하다고 한다. 그러나 수레를 달면 수레 무게이며 아이 무게이며 아버지 몸이 훨씬 고단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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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숲 19 - 신장판
이시키 마코토 지음, 손희정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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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 고운 만화책 하나란
 [만화책 즐겨읽기 38] 이시키 마코토, 《피아노의 숲 (19)》



 글책이나 그림책이나 사진책을 볼 때뿐 아니라, 만화책을 볼 때에도 늘 느끼며 생각합니다. 말만 예쁘다 해서 예쁜 글책이 되지 않습니다. 예쁘장한 말을 잔뜩 넣는다 해서 읽을 만한 글책이 아닙니다. 빼어난 글솜씨를 선보인다든지 새로운 글재주를 부린다 해서 돋보이는 글책이 되지 않아요. 글 한 줄에 글쓴이 삶을 얼마나 땀흘려 녹여냈는가에 따라 글책이 달라집니다.

 그림책이라면 그림 하나에 그린이 넋과 숨결이 어느 만큼 짙게 배었는가에 따라 그림책이 달라집니다. 사진책이라 할 때에는 사진 하나에 사진쟁이 얼과 숨소리가 어느 만큼 깊이 스몄는가에 따라 사진책이 달라져요.

 말이나 그림만 예쁘장하게 꾸민다 해서 예쁜 만화책이라 할 수 없습니다. 천재들이 돋보이는 이야기로 꾸민다 해서 좋은 만화책이 되거나 재미난 만화책이 되지 않아요.

 만화이기에 어느 매체보다 생각날개를 펼쳐 꿈과 같은 이야기를 펼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화이기 때문에 섣불리 생각날개를 펼친다거나 아무렇게나 생각날개를 퍼덕인다면, 그닥 재미나지 않을 뿐 아니라 싱겁거나 어이없다고 느끼곤 합니다.

 글책도 그림책도 사진책도 만화책도 오직 이 삶터에 뿌리내립니다. 이 삶터에 두 발을 씩씩하게 디디며 태어납니다.

 글책은 글을 읽으면서 내 생각날개를 펼칩니다. 그림책은 그림을 읽으면서 내 생각날개를 뻗습니다. 사진책은 사진을 읽으면서 내 생각날개를 보듬습니다. 만화책은 만화를 읽으면서 내 생각날개를 여밉니다.

 《피아노의 숲》 19권을 읽습니다. 드디어 19권째에 ‘이 만화 주인공’ 이찌노세 카이 피아노가 나옵니다. 만화쟁이 이시키 마코토 님은 《피아노의 숲》을 몇 권쯤 그릴 생각으로 ‘이 만화 주인공’이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이토록 더디 조금만 그리는지 궁금합니다. 설마 《유리가면》처럼 그릴 생각으로 앞으로 스무 해쯤 더 그리지는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 ‘어쩜 이렇게도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피아노가 있었다니.’‘설마 이 정도의 연주를 들을 수 있을 줄은 몰랐어.’‘이건 타고난 음악성인가.’ ‘이제 이 이상의 쇼팽은.’ “여보, 레프가 이렇게 멋진 연주를 하고 있어요.” ..  (7쪽)
- ‘이찌노세가 연주하는 음악은 어쩜 이리 자연스러운 걸까. 따뜻하고 그리워. 기분 좋은 리듬 때문에? 아니면 칸타빌레? 하모니의 센스?’ ‘아, 이건 폴란드 초원의 유채꽃밭인가?’‘봄에 일제히 싹을 틔우고, 노란색으로 땅을 물들이는 우리 폴란드의 유채꽃이란 말인가?’ (45∼46쪽)



 쇼팽을 기리는 피아노잔치에서 이찌노세 카이는 이찌노세 카이가 태어나서 자라온 나날을 피아노 하나에 고이 싣습니다. 이찌노세 카이가 선보이는 피아노는 ‘쇼팽을 기리는 넋’을 보여주되 ‘쇼팽을 기리며 피아노를 치는 이찌노세 카이’가 ‘이찌노세 카이대로 살아온 제 삶을 기리며 사랑하는’ 손길로 보여줍니다.

 쇼팽이라는 사람이 빚은 피아노 연주는 ‘쇼팽이라는 한 사람이 나고 자란 터전을 아끼고 사랑하며 보듬는’ 손길로 태어났습니다. 쇼팽이 죽고 나서 쇼팽을 피아노로 선보이는 사람이라면 아주 마땅히 ‘쇼팽이 나고 자라며 느낀 숱한 삶과 이야기와 웃음과 눈물’을 피아노로 담도록 애써야겠지요. 그리고 이 쇼팽 연주에 ‘쇼팽을 연주하는 내 삶과 이야기와 웃음과 눈물’을 함께 담아야 합니다.

 나는 ‘쇼팽을 피아노로 들려주는 나’이지 ‘쇼팽을 똑같이 보여주는 쇼팽’이나 ‘쇼팽을 되풀이하듯 보여주는 녹음기’가 아니니까요.

 살아숨쉬는 한 사람으로서, 펄떡펄떡 뛰는 가슴으로 피아노 앞에 선 한 사람으로서, 쇼팽이 지난날 들판을 거닐며 당신 품에 안은 따사로운 너른 흙과 꽃과 바람과 마찬가지로 내가 오늘날 들판을 거닐며 내 품에 안는 따사로운 너른 흙과 꽃과 바람을 소리마디 하나하나에 사뿐히 싣습니다.


- ‘야폰칙(일본인)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니.’ ‘쇼팽을 동경하고 폴란드에 유학 온 일본인도 좀처럼 잡기 힘든 이미지인데, 유학 경험도 없이 어떻게 이런 마주르카를 칠 수 있는 거지?’ (47쪽)
- “왜냐면 이찌노세의 피아노만이 이 대회에서 규격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같은 열에는 세울 수 없게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찌노세를 남게 하려면 나머지 다른 참가자들을 전부 떨어뜨려야 할 정도입니다. 그러니 이찌노세를 여기서 제외시키고 아마미야를 넣는 건 어떨까 합니다. 무엇보다도 아마미야에게는 훌륭한 이력이 있습니다. 이찌노세의 이력을 보면 어느 음악 전문학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콩쿠르 이력도 없습니다! 국제콩쿠르도 전무합니다!” (163∼164쪽)
- “이 쇼팽 콩쿠르에서는 유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쇼팽을 연주해 내는 인재를 발굴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예비예선을 심사한 선생님들, 그리고 심사위원 여러분의 귀를 믿고 규정을 변경했습니다. 일본인 파이널리스트가 3명이 되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12명 중 대다수를 차지한다면 재고할 여지가 있겠지요 …… 부다 자신이 심사위원에 뽑혔다는 긍지와 자각을 갖고 올바르다고 믿는 평가를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84∼187쪽)


 내 삶을 나 스스로 예쁘게 가꿀 때에 내 글이 예쁩니다. 내 삶을 내 손으로 예쁘게 일굴 때에 내 그림이 예쁩니다. 내 삶을 내 몸뚱이로 예쁘게 껴안을 때에 내 사진이 예쁩니다. 내 삶을 내 다리로 튼튼히 딛고 서며 부둥켜안을 때에 내 만화가 예쁩니다.

 이찌노세 카이가 들려주는 피아노는 다른 ‘콩쿠르 참가자’ 피아노하고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온 터전이 달라서만은 아닙니다. 피아노 앞에 서며 연습을 하거나 나 스스로 피아노를 즐길 때에 내 매무새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피아노잔치에서 1등 연주를 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피아노잔치이니까 말 그대로 ‘피아노로 잔치판을 벌여’야지요. 내 모든 솜씨를 아낌없이 펼쳐 보이면서 나부터 내 피아노를 즐기고 내 피아노 소리를 듣고자 모인 사람들한테 가없이 눈물과 웃음을 선사해야지요.

 더 많은 손님을 끌어모아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노래잔치란 부질없습니다. 더 사랑을 나누고 더 사랑을 받으며 함께 기쁠 노래잔치여야 합니다. 더 눈길을 받거나 더 이름값을 올릴 사진잔치란 덧없습니다. 자랑을 하는 사진잔치가 아니라, 사진 하나로 사랑과 믿음과 꿈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백일장이든 신춘문예이든 참 쓸데없습니다. 글잔치란 상금과 이름값을 거머쥐는 잔치가 될 수 없어요. 상금과 이름값이 나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글잔치라 하면서 막상 글꽃 글숨 글빛 글무지개가 드러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백일장이든 신춘문예이든 참 쓸데없어요.


- (이찌노세의 피아노는 도입부만으로도 대회장의 색을 바꿔 버렸다.) (41∼42쪽)
- ‘카이는, 카이는 어릴 적부터 대지에서 태어난 것 같은 작품에 뛰어났다. 숲의 피아노로 자란 카이는, 나도 알 수 없었던 마주르카의 마음과 한몸이 된 건지도 모르지. 자연의 대지는 폴란드만의 특권이 아니라, 온 세상에 다 있는 거니까.’ (51∼52쪽)
- ‘“숲의 피아노”로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카이만이 낼 수 있는 소리.’ (86쪽)



 《피아노의 숲》 주인공인 이찌노세 카이는 ‘숲 피아노’를 들려줍니다. 왜냐하면 이찌노세 카이는 숲에서 태어나 숲에서 자라며 숲에서 먹고살았거든요. 숲에서 어머니하고 둘이 아름다이 살았거든요. 숲에서 숲 피아노를 사랑하며 숲 노래를 즐겼거든요. 숲에서 숲을 느끼며 쇼팽을 알았고 슈베르트를 보았거든요.


- “카이, 네 자신을 믿어라.” “네! 그럼, 치고 올게요.” (30쪽)
- (숲으로!!!) (62쪽)


 숲이란 이찌노세 카이한테 보금자리요 삶입니다. 숲에서 숲아이로 살아가며 숲노래를 피아노로 옮깁니다.

 쇼팽 콩쿠르에 나온 다른 아이들은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도시에서 도시내기로서 도시사람다운 꿈을 키우며 도시살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도시내기로서 자연을 노래하거나 만나더라도 겉스치는 자연일 뿐, 내(사람) 몸을 이루는 자연이 무엇인가를 환히 깨닫지는 못합니다. 아무래도 다른 아이들을 낳아 키운 어버이부터 자연을 헤아리지 않으면서 살아가니까요. 스스로 자연스럽지 못한 어버이들이 당신 아이들한테 어떤 자연을 들려주거나 물려주겠습니까. 스스로 자연을 사랑하지 못하는 어버이들이 아이들한테 무슨 자연사랑을 이어주겠습니까.

 쇼팽이든 슈베르트이든 모차르트이든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쇼팽을 잘 친다 해서 이름값을 드높이지 못합니다. 슈베르트를 빼어나게 옮긴다 해서 천재이지 않습니다. 모차르트를 훌륭히 들려준다 해서 ‘내가 모차르트가 될’ 수는 없어요.

 팡웨이는 팡웨이를 칠 뿐이고, 안창수는 안창수를 칠 뿐이며, 슈우헤이는 슈우헤이를 칠 뿐입니다. 중국사람이라서 더 낫거나 한국사람이라서 더 좋거나 일본사람이라서 더 훌륭하지 않아요. 저마다 제 삶과 목숨과 사랑을 예쁘게 돌보면서 즐거울 수 있을 때에 ‘쇼팽으로 피아노잔치’를 하든 다른 무엇으로 피아노잔치를 하든 예쁜 노래꽃을 피웁니다.


- ‘카이가 친 마지막 음은 나를 가로질러 황금색 여운을 뿌리며 빛 속으로 사라졌다.’ (105∼107쪽)


 얌전뺑이로 자란 슈우헤이는 《피아노의 숲》 19권에서 피아노와 삶과 사랑이 무엇인가를 조금은 느꼈을까 궁금합니다. 슈우헤이 ‘재주’로는 콩쿠르에 붙을 수 없는 줄 깨달았을까 궁금합니다. 슈우헤이는 ‘붙느냐 마느냐 1등하느냐 2등하느냐’ 같은 어리석은 생각에서 홀가분하지 않고서야 슈우헤이 피아노를 찾을 수 없는 줄을 알아차렸을까 궁금합니다. 부끄러운 나머지 이제부터 ‘내(슈우헤이) 피아노’를 찾아 ‘내 삶’을 가꾸며 사랑하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내 길을 걸을 때에 나를 사랑하면서 내 이웃과 동무를 사랑합니다. 내 길을 걷지 못할 때에는 나조차 사랑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내 이웃과 동무를 참다이 사랑하지 못합니다.

 글도 그림도 사진도 만화도 모두 사랑이 밑바탕입니다. 피아노 또한 사랑이 밑바탕이에요. 예쁜 만화는 예쁜 사랑을 밑바탕으로 삼아 태어납니다. (4344.4.17.해.ㅎㄲㅅㄱ)


― 피아노의 숲 19 (이시키 마코토 글·그림,손희정 옮김,삼양출판사 펴냄,2011.4.2./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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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살 아이 호미질과 책읽기


 씨감자를 몇 심는다. 오늘 일요일을 맞이해 음성 읍내에서 열리는 장마당에서 씨감자를 아직 판다면, 씨감자를 더 사서 텃밭 골을 더 만들어 감자를 심어야지. 골 하나라고 하기에도 멋쩍은 골을 하나 만들어서 얼렁뚱땅 감자를 심는데, 네 살 아이도 일을 거들겠다며 호미를 들고 나선다. 아직 풀캐기라든지 고랑 만들기를 할 줄은 모르지만, 호미를 마치 곡괭이처럼 들고 땅을 콕콕 찍는다. 그래, 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도시에서 살던 때에는 이런 놀이나 일은 꿈조차 꿀 수 없었지. 제아무리 아파트나 번쩍거리는 도심지가 아닌 고즈넉한 골목동네에서 살았다 하더라도, 골목이든 아파트이든 똑같이 도시가 아니겠니. 도시에서는 너한테 호미질을 일러 줄 수 없구나. 그림책으로만 보여주거나 사진 몇 점으로 보여줄 뿐이지.

 호미질을, 그러니까 그림책을 백 번 천 번 본다 한들 익힐 수 있는 호미질이겠니. 그림책 한 번 안 보았어도 호미 한 번 단단히 움켜쥐고 땅을 콕콕 파 보아야 비로소 무언가를 알 수 있지.

 네 아버지는 예쁜 그림책을 싫어하지 않는다. 네 아버지도 예쁘장한 그림책에 눈길이 간다. 그러나 예쁘기만 하고 알맹이는 없는 그림책은 반갑지 않다. 지식으로만 읽는 그림책은 내키지 않고, 재미난 웃음이 나오도록 이끌려 하는 그림책 또한 반갑지 않다. 땀흘리는 일은 땀흘리며 일하는 보람이 있기 마련인데, 요즈음 사람들이 스스로 땀흘리며 살아가려 하지 않는대서 땀흘리는 일을 억지로 그럴듯하게 껍데기를 씌우거나 재미난 놀잇거리라도 되는 듯이 꾸밀 수는 없어.

 빨래를 빨래놀이처럼 즐길 수 있겠지. 그러나 빨래는 빨래야. 걸레질은 걸레질이야. 걸레빨이는 걸레빨이야. 비질은 비질이지. 쌀을 씻어 티끌을 떨구는 일도 쌀씻기야. 나는 맛나구려 하고 보여주는 요리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맛나구려 하는 밥거리를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일구어 얻는가를 함께 밝히지 못한다면, 하나도 맛나구려 하는 밥거리라고 느끼지 못한다.

 네 어머니는 네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 곧 네 할머니가 마련해 준 김치를 맛있게 잘 먹는다. 네 할머니가 밭에서 손수 길러 거둔 배추로 마련한 김치이든 저잣거리에서 사들인 배추로 마련한 김치이든, 네 할머니 김치를 네 어머니가 맛나게 먹는다. 김치맛도 김치맛일 테고, 할머니 김치에는 이 김치를 마련하는 손길이며 땀방울이며 깃들었으니까.

 너는 세 살 아이일 때부터 호미질을 했다. 네 동생은 돌쟁이 무렵부터 호미질을 하겠지. 너는 네 아버지가 쓰는 삽이나 괭이를 들어 보겠다며 낑낑거린다. 네 동생은 돌쟁이 무렵부터 삽이나 괭이를 만지작거리겠지. 너는 요 조그마한 텃밭에서 노닥거릴 때이건 숲속을 거닐 때이건 신에 흘러든 모래알을 느낀다. 1분을 채 걷지 않았어도 시골 흙길에서는 신에 모래일이 깃든다. 도시에서는 여러 시간을 걸어도 신에 모래알이 깃들 까닭이 없다. 그저 먼지로 까맣게 될 뿐이다.

 모든 사람 삶은 흙에서 비롯한다. 어마어마하게 높이 세우는 건물이나 아파트이건, 사람들이 읽는 책이건, 사람들이 몰고 다니는 자동차나 기차나 버스이건, 어느 하나 흙에서 안 비롯할 수 없다. 사람들이 날마다 먹는 밥이건 빵이건 케익이건 과자이건 무엇이건 흙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내기들은 흙을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랑하거나 아낄 줄을 모른다. 우리 살림집이 도시에 깃들 때에는 우리 살림집 또한 흙을 생각하거나 사랑하거나 아끼기 힘들다. 흙을 밟고 들어서는 도시이니까. 흙을 울궈먹으며 뱃살이 디룩디룩해지는 도시이니까. 흙을 멀리해야 깨끗해지는 도시이니까.

 모든 책은 흙에서 비롯한다. 모든 책은 흙에 뿌리를 내린 나무를 베어 만든 종이에서 비롯한다. 모든 책은 흙에서 먹을거리를 얻어 목숨을 잇는 사람들이 종이에 글을 써서 비롯한다. 어제와 그제는 모처럼 네 살 너한테 그림책을 몇 권 읽어 주었으나, 요사이는 네 아버지가 참 고단해서 다른 날에는 그림책을 거의 못 읽어 주었다. 그래도 어제 낮에는 텃밭에서 호미질 놀이를 했으니, 우리는 어제 하루 흙책을 읽은 셈이다. 모레와 글피에도 흙책을 읽도록 오늘 장마당에서 씨감자랑 푸성귀 씨앗을 실컷 장만하자. (4344.4.1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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