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을 이야기 2
오제 아키라 지음, 이기진 옮김 / 길찾기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10년 걸린 밭, 10년 흘린 밥
 [만화책 즐겨읽기 142] 오제 아키라, 《우리 마을 이야기 (2)》

 


  해 떨어진 저녁나절, 시골마을은 조용하고 어둡습니다. 깜깜한 밤에 빛나는 별을 올려다보며 개구리 우는 봄날을 누립니다. 시골자락 밤나절, 멀고 가까운 멧자락에서 맑으며 그윽한 멧새 소리가 울려퍼집니다. 이른저녁부터 깊디깊은 밤을 거쳐 이른새벽까지 맑으며 그윽한 멧새 소리는 그치지 않습니다. 나는 이 멧새 소리가 궁금하지만 마땅히 여쭐 어른이 없습니다. 혼자 여러 해 끙끙 앓습니다. 멧새 소리가 들릴 때에 이웃 어른이 함께 있으면 여쭐 만하지만, 이렇게 밤을 함께 보낼 길이 없으니 그저 답답합니다. 이러다가 아주 뜻밖인 곳에서 밤에 우는 멧새 소리를 압니다. 일본만화 《게게게의 기타로》를 만화영화로 새로 빚은 작품을 보다가 이 멧새 소리를 들었어요. 만화영화에 나오는 기타로와 동무들이 ‘아름답다 하는 소리를 갈무리해서 찬찬히 즐겨듣는’ 대목에서 소쩍새 울음소리가 나왔고, 만화영화에 나오는 기타로와 동무들이 ‘부엉이 소리’라 말하기에 곧바로 알아챘습니다.


  그렇구나, 소쩍새 소리였구나. 이때부터 밤마다 멧새 소리를 귀기울여 다시 듣습니다. 한겨레 옛사람은 소쩍새라 하는 이름을 ‘솥쩍다 솥쩍다’라느니 ‘소쩍 소쩍’이라느니 하고 운대서 소쩍새라 지었다고 했어요. 참말 그런가 하고 귀를 기울이니까, ‘소쩍 소쩍’ 하는 소리하고 딱 들어맞습니다. 다만, 내 귀에는 ‘소쩍 소쩍’보다는 ‘소소쩍 소소쩍’이지 않나 싶어요.


  아마 2004년이나 2005년이 아닌가 싶은데, 처음으로 소쩍새 모습을 보았습니다. 멧길을 걷다가, 전깃줄에 앉은 소쩍새를 아주 가까이에서 보았어요. 소쩍새는 사람 삶터 가까이로는 안 온다 했는데, 아주 드물게 볼 수 있던 셈이었어요.


  말로만 듣던 소쩍새를 두 눈으로 바라보던 이날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샛노랗게 눈부신 꾀꼬리를 두 눈으로 바라보던 날에도 밤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얼마나 곱고 얼마나 빛나는지 몰라요. 소쩍새나 꾀꼬리는 이녁 모습으로도 내 가슴을 한껏 부풀려요. 이를테면, 몇 백 해를 살아온 우람한 나무를 바라보다가는 살며시 끌어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몇 만 몇 십만 몇 백만 해를 고이 이어왔을 들판 풀숲에 드러눕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 ‘아버지고 어머니도 형도 우리 집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거다. 그래서 쓸쓸해도 견딜 수는 있지만, 왜 우리는 싸워야 하는 걸까? 마을도 목장도 학교도, 나는 다 너무 좋은데.’ (11쪽)
- “도깨비가 우리 편이면 든든한데!” “도깨비뿐만이 아냐. 숲 속에 사는 원령들과 나무와 물의 정령들, 부엉이, 하늘다람쥐, 뱀들도 모두 우리 편이다.” (72∼73쪽)


  ‘부엉이’라는 새는 없습니다. ‘수리부엉이’라는 새는 있으나, ‘부엉이’는 없습니다. ‘부엉이’는 갈래만 있어요. 그러나, 여느 도시사람은 ‘부엉이’라는 새가 있는 줄 잘못 압니다. 올빼미라든지 소쩍새라든지 여러 새들을 아울러 ‘부엉이’라고만 할 뿐이에요.


  생각해 보면, 새이름 하나 잘못 아는 일은 대수롭지 않은 오늘날입니다. 둘레에서 새 한 마리 보기 어려운 삶터잖아요. 소쩍새이든 올빼미이든 두 눈으로 본다든지, 이 새들이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데, 이름만 훤히 헤아리지 못합니다. 이름을 알더라도 제대로 안다 할 수 없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소리도 모르는 오늘날 도시입니다. 이름이든 소리이든 삶이든 하나도 모를 뿐 아니라 눈길조차 두지 않는 오늘날 도시입니다. 그래서, 도시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시골 땅뙈기를 갈아엎거나 파헤치는 건설업체 일꾼들은 아무렇지 않게 국립공원 멧자락에 구멍을 뚫거나 케이블카를 놓으려 합니다. 아무렇지 않게 한강·영산강·낙동강·금강 둔치나 모래밭이나 갈대밭을 삽차로 파헤치고는 시멘트를 들이부어 반듯하게 쭉쭉 폅니다. 냇물에서 어떤 목숨이 살아가는지 헤아리지 않거든요. 물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살피지 않거든요.


  나라에서 하는 일에 붙이는 이름부터 생각해 봐요. ‘4대강 살리기’라 했다가 ‘4대강 사업’이라고 해요. 냇물에 시멘트를 들이부으면서 ‘살리기’라고 속였어요. 구비치는 냇물을 반듯하게 펴면서 ‘사업’이라고 내세워요.

 

 


- “아버지나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우리 반에서 공항부지 내에 사는 건 나뿐이야. 다들 동정해 주지만, 그렇지만 그뿐, 사실은 선생님도 친구들도 다 공항이 들어서길 학수고대하고 있어.” (21쪽)
- 일본은 그 전쟁(베트남전쟁)에 가담하고 있어. 이 나라도 가해자란 거지. 그러니까, 이 나라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 우리도, 베트남의 어린이들을 죽인 가해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 이 전쟁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일본인 모두가 B52에 폭탄을 채워 넣고 있는 건지도.” (169∼170쪽)


  개발은 없다고 느낍니다. 허울좋게 ‘개발’ 이름을 붙일 뿐, 언제나 ‘돈벌이’ 한 가지만 할 뿐이라고 느낍니다. 돈벌이를 할 생각이면서, 겉으로는 삶터를 나아지게 한다(개발)고 입발린 말을 내놓습니다.


  돈을 버는 일이 나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돈을 벌어 즐겁게 쓸 수 있다면 나쁠 까닭이 없습니다. 오직 돈만 벌려 하거나 그저 돈만 쌓아두려 할 때에는 나쁘며 슬프기까지 하다고 느낍니다.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는 돈벌기가 아닐 때에는 나쁩니다. 이웃을 괴롭히는 돈벌기가 되면 슬픕니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이든 군부대를 새로 만들려 하는 움직임이든 모두 나쁘며 슬프구나 싶어요.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는 한미자유무역협정이 아니거든요. 삶터를 나아지게 하는 군부대 새로 만들기도 아니에요. 그저 돈을 더 많이 벌려 하는 움직임입니다. 오로지 돈만 바라보는 몸부림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길을 살피지 않으니 나쁘고 슬픕니다. 서로 따사로이 보듬는 길하고 어긋나기에 괴롭고 아픕니다.


  사랑하며 살아야 즐거울 하루예요. 믿으며 어깨동무해야 아름다운 삶이에요. 밝은 꿈을 이루면서 기쁜 빛을 누려야 좋은 이야기를 빚어요.

 

 


- “공항은 어른들 문제다! 애들은 공부나 해라! 그런 소리 이제 지긋지긋해요! 하지만, 공항이 생기면 사라지는 건 우리 집이라고요! 우리 마을이라고! 우리 학교라고요!” (39쪽)
- “이런 시국에 부모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로 키우고 싶지 않네. 농사꾼은 늘 가족이 함께여. 농번기에는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아이들도 총출동해서 일하지. 그렇게 몸으로 일을 배우는겨.” (81쪽)


  길을 닦는다고 내 삶이 더 좋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동차가 드나들기에 좋고, 자전거가 달리기에 괜찮으니 내 삶이 더 나아지는지 알쏭달쏭합니다.


  맨발로 아스팔트길을 오 킬로미터 남짓 달렸습니다. 시골마을 면 잔치가 열렸고, 이 잔치날 체육대회에서 오래달리기가 있어, 우리 마을에서 젊다 하는 내가 달리기에 나갔습니다. 나는 늘 고무신을 신으니 고무신 차림으로 달리는데, 처음 달리기를 하려 하다 보니 자꾸 벗겨집니다. 문득 생각하니 내 고무신은 꽤 닳아 달리기에는 알맞지 않습니다. 나는 따로 달리기를 하지 않으며 살아가니 달리기를 할 때에 신이 벗겨지는 줄 몰랐습니다. 아이들하고 천천히 걷고, 아이들을 수레에 태워 자전거를 달릴 뿐이었으니, 맨몸으로 훅훅거리며 아스팔트길을 달릴 때에 고무신이 얼마나 잘 벗겨지는 줄 몰랐어요.


  어기적거리며 뒤뚱뒤뚱 달리다가 신을 벗습니다. 길 한쪽에 고무신을 놓습니다. 맨발로 아스팔트길을 달립니다. 이 길이 아스팔트 아닌 흙이었으면 얼마나 느낌이 좋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봄을 맞이해 새 풀 한껏 돋은 숲길이나 들길이었으면 얼마나 기뻤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맨발로 아스팔트 바닥을 달리며 자꾸자꾸 생각합니다. 왜 마라톤이든 육상이든, 숲길을 맨발로 달리는 일은 없을까요. 운동경기라서? 기록경기라서? 1등을 가려야 해서? 여러 회사한테서 돈을 받아야 하니까? 운동화를 광고하고 무엇무엇을 홍보해야 해서?


  아스팔트 바닥에 뒹구는 자잘한 알갱이가 발바닥에 닿습니다. 따끔합니다. 아프기도 합니다. 갓난쟁이가 맨손으로 시멘트 바닥을 기어다닐 때에 손바닥이 어떤 느낌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갓난쟁이들이 마음껏 기어다니며 냄새를 맡을 수풀이 도시나 시골에 얼마나 넉넉히 있나 생각합니다. 시골에는 수풀이 있다지만, 자꾸 풀약을 치니 논둑이나 풀섶에조차 아이들을 풀어놓기 힘들지 않나 하고 생각합니다.

 

 


- 2천 명의 기동대가 동원되어 세 군데에 말뚝이 박히고 콘크리트로 덮였다. 경비가 지키고 서 있지 않았다면 거기에 말뚝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이제 확실해졌어. 이게 바로 정부의 수법이다. 마지막엔 역시 힘으로 밀어붙이기. 힘으로 눌러 버리는겨.” (112쪽)
- “뭐가 대성공이여. 겨우 세 개 박는데 일곱 군데에 기동대 부대를 보내서는, 반대하는 사람들을 완력으로 떠밀어내고, 그러고서는 대성공이라 떠드는 짓은 아주 악질적인 깡패들도 안 하는 짓이여! 나는, 평생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긴 처음이여!” (118쪽)


  따끔거리는 발바닥을 생각하다가, 아스팔트 밑에 깔린 흙바닥을 떠올립니다. 아스팔트가 아니던 흙바닥은 어떤 삶일까요. 아스팔트가 위에 덮은 다음 온갖 자동차가 싱싱 달리며 내리누르는데, 밑에 깔린 흙바닥은 어떤 느낌일까요.


  지구별은 어떤 느낌일까요. 지구별은 아스팔트 바닥을 좋아할까요. 아스팔트가 깔리며 크고작은 자동차가 끝없이 달리며 눌러대는데, 지구별은 어떤 느낌일까요. 게다가, 자동차마다 내뿜는 배기가스 때문에 지구별이 앓습니다. 건물을 우람하게 세우며 지구별에 큰못을 박습니다. 시멘트와 쇠기둥으로 엮은 큰못을 지구별에 끝없이 박습니다. 지구별 살갗에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두껍게 덮습니다.


  지구별은 숨을 못 쉽니다. 지구별은 온몸이 멍듭니다. 지구별은 슬퍼 웁니다. 지구별은 끙끙 앓다가 죽을 판입니다. 자잘한 ‘아스팔트 조각’ 하나 내 발바닥에 닿을 때마다 따끔하면서 아프듯, 사람들이 이룩했다는 문명으로 지구별을 뒤덮을 때에 이 지구별은 얼마나 아프고 괴로우며 슬플까 하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무슨 짓을 벌이는가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는가요. 사람들은 무슨 삶을 꾸리는가요. 사람들은 스스로 가장 좋아하며 가장 빛나고 가장 슬기로운 꿈을 펼치는 나날인가요.

 

 


- “근데, 우리 마을, 우리 집, 우리 밭이 사라진다고, 빼앗겨 버린다고 생각하니, 지금까지 대수롭지 않던 우리 보리밭이랑 땅콩밭들이 굉장히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 그렇게 싫어했던 밭일도 더는 싫지 않고. 이 싸움이 논밭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그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비료를 주고 잘 키워서 수확하고, 하는 것이 가장 커다란 반대운동이 아닐까 생각했어. 땅에 대한 애착이나 그런 건 아직 모르겠지만, 내가 지켜야 할 것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면 이 싸움은 의미가 없지.” (130∼131쪽)
- “논, 밭, 숲, 개울, 그리고 목장. 8킬로의 여정이 참 즐거웠어. 이런 시골에서 데모한 건 처음이야.” (172쪽)
- “미안. 별로 도움이 안 되지?” “뭐, 괜찮아. 당근 뽑는 게 그렇게 재밌니?” “처음이니까. 밭에 들어오기는 처음이야. 흙이 이렇게 부드럽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 (229쪽)


  오제 아키라 님 만화책 《우리 마을 이야기》(길찾기,2012) 둘째 권을 읽습니다. 책을 덮으며 한 가지가 떠오릅니다. ‘10년 걸린 밭에, 10년 흘린 밥이로구나.’ 하고 떠오릅니다.


  누군가는 밭 한 뙈기 일구려고 열 해에 걸쳐 땀을 흘립니다. 누군가는 밥 한 그릇 사다 먹거나 얻어 먹으며 아무렇지 않게 반찬이나 밥을 남겨서 버립니다.


  누군가는 쓰레기 흘리거나 버리지 않는 삶이요, 누군가는 끝없이 쓰레기를 내놓는 삶입니다.


  공항을 왜 지을까 생각해 봅니다. 비행기를 타고 어디를 찾아가야 하니까 공항을 지을까요.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돌아다니도록 하면 큰돈 벌이가 되니까 공항을 지을까요. 문화와 문명과 개발이 되니까 공항을 짓는가요. 공항을 짓느라 논과 밭과 들과 메와 내를 모두 갈아엎으면서 큰돈 벌이가 될 뿐 아니라, 건설업이 크게 발돋움하니까 공항을 짓는가요.


  고속철도는 왜 놓여야 할까요. 고속도로는 왜 생겨야 할까요. 전남 고흥에서 서울까지 가야 할 까닭이 있을까요. 충남 아산에서 강원 강릉까지 가야 할 까닭이 있을까요. 여행은 무엇이고 관광은 무엇이며 문화와 문명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떤 여행을 할 생각인가요. 사람들은 어떤 관광이 즐거운가요. 나라와 정부와 지자체는 어떤 문화와 문명을 일굴 생각인가요.


  우리 집이 있을 때에 우리 마을이 있습니다. 우리 마을이 있을 때에 우리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있을 때에 우리 지구별이 있다 할 텐데, 찬찬히 돌이키면, 나라나 정부는 없어도 됩니다. 우리 마을은 서로서로 어깨동무할 만한 크기이면 넉넉합니다. 몇 천 몇 만이 바글거리는 커다란 도시가 될 까닭이 없습니다. 알맞춤한 작은 마을에, 알맞춤한 작은 보금자리이면, 밥과 옷과 집이 흐뭇합니다. 앞으로 백 해 땀을 들일 밭입니다. 앞으로 천 해 깃들어 꿈을 피울 집입니다. 앞으로 만 해 뿌리내려 우리 아이들이 새롭게 태어나 새롭게 사랑할 마을입니다. (4345.4.18.물.ㅎㄲㅅㄱ)


― 우리 마을 이야기 2 (오제 아키라 글·그림,이기진 옮김,길찾기 펴냄,2012.3.31./8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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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나는 꽃송이

 


  새벽에 내린 이슬이 아직 걷히지 않은 아침나절, 아이하고 논둑길을 걷는데, 아이가 “비가 내려서 바지가 젖네.” 하고 말합니다. 아이한테 “비는 안 왔어. 이 물방울은 이슬이야.” 하고 대꾸합니다. 아이는 “이슬이야?” 하고 되묻습니다.


  문득 발걸음 멈춥니다. 이슬방울 알알이 맺힌 들풀을 들여다봅니다. 권정생 할아버지가 쓴 동화 〈하느님의 눈물〉에 나오는 토끼가 떠오릅니다. 〈하느님의 눈물〉에 나오는 토끼는 풀잎을 뜯어먹으려 하다가 풀잎이 바르르 떠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 슬프고 스스로 괴로운 나머지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예 굶습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느님더러 왜 토끼 저는 이슬을 먹고 바람을 마시며 살아가도록 만들지 않았느냐고 하소연을 합니다. 풀잎 하나 건드릴 수 없다고, 아프고 슬프다 하는 토끼 하소연을 듣던 하느님도 토끼마냥 그저 눈물을 흘립니다.


  목숨을 먹는 일은 목숨을 빼앗는 일입니다. 목숨을 먹는 일은 두 목숨이 서로 하나되는 일입니다. 무엇을 먹느냐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고 얽힙니다. 이웃을 한껏 사랑하고 지구별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밥차림과 밥먹기가 아주 다를밖에 없습니다.


  목숨을 먹는 일은 내 몸과 하나될 좋은 님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고기로 삼으려고 집짐승을 기르며 모질게 굴거나 값싼 사료와 항생제로 살점을 키운다면, 이렇게 키운 고기가 내 몸을 얼마나 살찌우거나 좋게 하겠습니까.


  더없이 마땅한데, 풀을 먹는 사람이라면 풀에 풀약이나 비료나 항생제를 칠 수 없습니다. 풀약과 비료와 항생제가 고스란히 내 몸속에 들어오잖아요. 고기를 먹는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가 되어야 옳지 않을까요. 너른 들판에서 너른 햇살과 바람과 비를 먹으며 자라나는 풀이 더 맛나고 싱그러우며 좋은 밥이 되듯, 너른 들판에서 풀을 뜯고 마음껏 달리며 햇살이랑 바람을 누리는 짐승을 잡아 고기로 마련해야 비로소 ‘고기를 먹어도 내 몸을 살리는 고기’가 되리라 느껴요.


  값싸게 먹는 밥은 내 몸을 값싸게 내동댕이칩니다. 더 적은 돈으로 끼니만 얼추 때우면 그만이 될까요. 그러면, 내 품값도 더 값싸게 쳐도 될까요. 나를 일꾼으로 부리는 사람이 내 품값을 값싸게 후려쳐도 좋을까요.


  값싸게 장만해서 읽는 책은 내 마음을 살찌우지 못합니다. 내 마음을 살찌우려고 읽는 책은 값싸게 장만하는 책이 될 수 없습니다. 제값을 알맞게 치러 장만하는 책이어야 하고, 제값을 알맞게 치러 마련한 책꽂이에 즐겁게 꽂아야 합니다.


  새벽에 내린 이슬에 젖은 풀꽃을 아이랑 나란히 바라봅니다. 집으로 돌아와 우리 집 풀도감 꽃도감을 뒤지지만, 이 꽃이름을 알아내지 못합니다. 풀도감 꽃도감을 뒤져 ‘자운영’ 한 가지를 새로 압니다. 이슬 머금은 하얀 꽃송이 이름은 알아내지 못했지만, 옆에 나란히 자라는 옅은보라 꽃송이 이름은 알아냅니다. 자운영은 이름을 알고 나서 더 즐겁게 풀잎을 뜯어서 먹습니다. 아직 봉우리 터뜨리지 않은 줄기를 꺾어 냠냠 씹어 보기도 합니다. 풀잎을 뜯고 몽우리를 따면서 스스럼없습니다. 내 몸으로 스며들어 또다른 내 모습이 될 풀이요 꽃이며 목숨이거든요.


  빛나는 꽃송이를 바라보며 빛나는 내 눈길이 되도록 합니다. 빛나는 풀잎과 몽우리를 고맙게 먹으며 빛나는 내 몸과 마음이 되도록 합니다.


  나 스스로 빛나는 생각을 품을 때에 빛나는 내 삶이 될 테지요. 나 스스로 옆지기랑 아이하고 빛나는 이야기를 나눌 때에 빛나는 내 살림을 꾸릴 테지요.


  사랑을 들려주기에 사랑이 자랍니다. 사랑을 속삭이기에 사랑이 피어납니다. 사랑을 꿈꾸기에 삶이 아름답습니다. (4345.4.1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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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풀 책읽기

 


  빈 논에 풀이 가득하다. 빈 논이라 말하지만, 정작 빈 논은 아니다. 논에 볍씨를 심어 벼를 거두기에 벼가 자라지 않을 때에는 빈 논이라 말하는데, 벼를 베고 나서 겨울을 지나고 봄을 맞이한 논에는 숱한 들풀이 자라고 들꽃이 핀다.


  아직 괭이질이나 가래질을 받지 않은 논을 바라본다. 논자락 가득 메운 들풀을 바라보고 들꽃을 바라본다. 이렇게 수많은 들풀과 들꽃이 피어난 다음 논을 갈아엎으면 이 풀기운이 흙으로 스며들어 거름이 될까.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한다기에 논풀을 몽땅 뒤엎어 벼 한 가지를 심어 기르는데, 풀은 이 논에 얼마나 뿌리를 내리고 싶었을까. 문득, 참말 ‘빈 논’이라 하는 ‘묵은 논’을 떠올린다. 시골에 깃들던 사람이 숨을 다해 흙으로 돌아가고 나면 더는 손길을 타지 않아 묵는 논이 곳곳에 생기는데, 묵은 논은 한 해만 지나도 온통 풀밭으로 바뀐다. 묵은 논은 세 해쯤 지나면 제법 큰 나무가 자란다. 묵은 논은 열 해쯤 지나면 자그마한 숲이 된다.


  정원사나 조경사가 일구지 않아도 묵은 논은 다시 ‘자연’이 되어 천천히 숲을 이룬다. 사람이 따로 씨앗을 심거나 뿌리지 않아도 묵은 논은 싱그러운 풀과 꽃과 나무가 깃들며 새와 짐승이 보금자리를 틀 ‘자연’이요 ‘숲’으로 다시 태어난다.


  사람은 무슨 책을 읽는가. 사람은 어떤 삶을 꾸리는가. 사람은 어디에서 사랑을 속삭이는가. 논자락 풀들 앙증맞게 바람에 살랑이며 짙은 내음과 숱한 이야기를 흩뿌린다. (4345.4.1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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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4-17 13:44   좋아요 0 | URL
정원사나 조경사가 필요하지 않은, 자연의 생명력에 감탄하며...

파란놀 2012-04-17 21:20   좋아요 0 | URL
도시 공원도
자연 그대로 잘 살아가도록
예쁘게 보살피고 사랑한다면
참 좋으리라 생각해요
 
이자벨라의 리본 풀빛 그림 아이 8
이치카와 사토미 글 그림, 김경연 옮김 / 풀빛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아이는 어떻게 놀고 싶은가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57] 이치카와 사토미, 《이자벨라의 리본》(풀빛,2004)

 


  유채 잎사귀를 뜯어서 먹습니다. 자운영 잎사귀를 뜯어서 먹습니다. 토끼풀 잎사귀를 뜯어서 먹고, 질경이 잎사귀를 뜯어서 먹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합니다. 너희가 내 손을 거쳐 내 몸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이름을 모르는 풀잎을 조금 뜯어 입에 넣습니다. 무척 시원하며 상큼하다고 느껴 한 번 먹을 만큼 한 주먹 뜯습니다.

  아이와 함께 들꽃을 바라보면 아이는 가만히 들꽃을 바라보며 느낍니다. 아이와 함께 들풀을 바라보다가 잎사귀를 똑 따서 입에 넣고 씹으면 아이도 어버이처럼 잎사귀를 똑 따서 입에 넣고 씹으며 맛을 느낍니다.


  봄날 들판은 온통 푸르게 빛나는 밥상이라 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풀이든 내 몸에 좋은 기운 북돋우는 목숨입니다. 어느 풀이든 내 마음에 좋은 이야기 살찌우는 동무입니다.


.. 이자벨라는 숨바꼭질을 가장 좋아했어. 사만다하고도 숨바꼭질을 했지, 사만다는 개 이름이야. 어떤 때는 분홍 히비스커스 사이에 숨었어 ..  (6∼7쪽)

 

 


  중국에서 왔다는 자운영 풀을 헤아립니다. 중국사람은 한자로 ‘紫雲英’이라 적었을 테지만, 한국사람은 다른 풀이름을 말하지 않았을까 하고 헤아립니다. 학자들이 일컫는 이름 아닌, 시골에서 흙이랑 살아가는 사람들 눈길에 이 꽃송이와 풀잎은 어떤 이름이었을까 하고 헤아립니다.


  한자를 풀면 ‘보라구름송이’쯤 될까요. 한자로 지은 이름을 가만히 곱씹으며 자운영 꽃송이를 바라보면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앙증맞은 보라구름송이’처럼 생각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런 꽃송이 모습만으로 이름을 붙이지는 않습니다. 시골 흙사람이라면 꽃 모습보다 풀잎 모습을 보며 이름을 붙이곤 해요. 풀잎을 똑 따서 입으로 씹어먹으며 이름을 떠올립니다. 괭이밥 같은 이름은, 씀바귀 같은 이름은, 틀림없이 풀을 먹으며 어떠한 맛과 느낌이었다 하는 생각을 담았구나 싶어요. 아마 마을과 마을마다 다 다른 삶에 따라 다 다른 눈길과 손길로 다 다른 이름을 붙이며 풀 한 포기 바라보았으리라 생각해요.


  때로는 꽃도감이나 풀도감을 살피며 이름을 떠올립니다. 때로는 그냥 이름을 모르는 채 꽃과 풀을 맞이하고, 때로는 내 마음 움직이는 결에 따라 풀이름을 짓습니다. 나는 아이들 어버이로서 풀과 꽃을 맞이하며 이름을 짓습니다. 나는 내 다리로 지구별에 튼튼하게 선 삶을 더듬으며 이름을 붙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하루하루 자라나며 저희 깜냥과 삶과 꿈에 따라 이름을 살필 수 있으리라 봅니다.


.. 그런데 하루는 아무도 이자벨라랑 놀아 주지 않는 거야. 할머니에게는 친구들이 찾아왔고, 패트리아 아주머니는 친구들과 쇼핑을 갔어. 심지어 사만다도 함께 놀 친구가 있지 뭐야 ..  (13쪽)

 

 


  손가락에 닿는 흙을 느낍니다. 발바닥에 닿는 땅을 느낍니다. 온갖 풀이 가없이 자라는 흙땅은 아주 보드랍고 보송보송합니다. 스폰지나 솜으로는 이처럼 보드랍거나 보송보송한 결을 만들지 못합니다. 아무 풀이 자라지 못하는 흙땅은 꽤 딱딱합니다. 목숨이 깃들지 못하기에 그만 딱딱하다 할 텐데, 도시문명을 이루려는 오늘날 사람들은 땅바닥이 아주 딱딱하게끔 합니다. 무겁고 커다란 기계로 흙땅을 자근자근 짓밟고 내리누릅니다. 시멘트 사이에 쇠막대 박은 커다란 기둥을 흙바닥에 촘촘히 박습니다. 시멘트를 개어 흙바닥을 덮습니다. 커다랗고 무거운 쇠기둥을 세우고 다시 시멘트로 겉을 감싸며 기둥을 삼습니다.


  하늘을 찌를듯이 서지만 정작 하늘을 찌르지는 못하는 높다란 건물을 올려다볼 때면, 이 우람한 건물이 무너진 다음, 이 건물이 서던 자리에 풀이 자랄 수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해 봅니다. 밑흙도 겉흙도 없이 온통 시멘트덩이뿐인데, 이런 자리에 어떤 풀씨나 꽃씨나 나무씨가 깃들어 뿌리를 내릴까 궁금합니다. 덩굴풀이 자라기도 하고, 아주 억세거나 드센 풀이 시멘트 사이에 뿌리를 박으며 자라기도 합니다. 아마 삼천 해도 삼만 해가 지나면 제아무리 우람하다 하던 건물이라 하더라도 밑바닥까지 가루를 내어 흙으로 돌아가도록 할는지 모르지요. 삼십만 해나 삼백만 해가 지나면 시멘트이든 쇠기둥이든 모래알로 바뀔는지 모르지요.


  꿈을 꿉니다. 저마다 싱그럽게 살아가는 꿈을 꿉니다. 누구나 어여삐 숨쉬는 꿈을 꿉니다. 자동차가 다니기 좋은 길이 아닌, 사람이 다니기 좋은 길을 꿈꿉니다. 건물이 서기 좋은 땅이 아닌,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을 꿈꿉니다.


  내 삶을 돌아봅니다. 내 마음과 사랑을 빛낼 삶을 돌아봅니다. 나 스스로 오늘 하루 즐겁고, 아이들 또한 오늘 하루 즐거울 삶을 돌아봅니다.

 


.. 그때 어디선가 꽥 소리가 났어. 망고를 먹으러 온 앵무새였어. 이자벨라는 너무나 기뻤어. “안녕, 앵무새야. 나랑 숨밖고질 안 할래? 내가 먼저 숨을게, 빨리 저리 가.” 이자벨라는 손을 흔들어 앵무새를 쫓았어 ..  (20쪽)


  이치카와 사토미 님 그림책 《이자벨라의 리본》(풀빛,2004)을 읽습니다. 바닷마을에서 살아가며 날마다 신나는 놀이를 생각하는 이자벨라가 예쁜 댕기를 머리에 묶는 하루하루를 그림책으로 들여다봅니다.


  이자벨라는 따로 예쁜 댕기가 없더라도 즐겁게 놀 수 있습니다. 이자벨라는 티없이 꿈꾸고 가없이 생각하며 언제 어디에서라도 즐겁게 놀 수 있습니다.


  함께 꿈꾸고 서로 사랑할 동무가 있어 재미나게 놀아도 즐겁습니다. 홀로 꿈꾸고 혼자 사랑하는 나날이라 해서 꼭 심심하달 수 없어요.


  물속을 헤엄칠 수 있습니다. 가만히 꿈을 꾸며 물속놀이를 그릴 수 있습니다. 나무를 타고 오를 수 있습니다. 나무그늘에 누워 나무타기 하는 놀이를 그릴 수 있습니다. 모래밭에서 뒹굴 수 있습니다. 풀밭에서 구를 수 있습니다. 마음껏 놀면 됩니다. 사랑껏 즐기면 됩니다.

 


.. 이자벨라와 물고기들은 모두 함께 바다 한가운데로 헤엄쳐 갔어. 산호초들을 따라 숨은 섬들을 지났지. 그때 저 멀리 밝은 빛이 보였어. 아이들이 빛 속에서 즐겁게 놀고 있었어 ..  (27쪽)


  이자벨라한테 댕기가 많대서 더 즐거운 나날이 되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이자벨레한테 알록달록 온갖 댕기를 선물한대서 이자벨라가 댕기놀이에만 빠질 수 없습니다.


  아자벨라나 너자벨라한테 갖은 놀잇감을 선물한다면 어떠할까요. 고자벨라나 그자벨라한테 게임기나 비디오나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보여준다면 어떠할까요.


  놀이는 삶입니다. 놀이는 시간때우기가 아닙니다. 함께 놀이하는 삶이란 함께 누리며 빚는 삶입니다. 아이와 ‘놀아 주는’ 일이란 말 그대로 일입니다. 아이와 놀이하기란, 아이와 살아가기로, 아이와 꿈꾸기이며, 아이와 사랑하기입니다.


  그림책 《이자벨라의 리본》에 나오는 이자벨라뿐 아니라, 이 나라 모든 아이들은 즐겁게 놀고 싶습니다. 시험공부에 주눅들고 싶은 아이는 없습니다. 점수경쟁에 피튀기고 싶은 아이는 없습니다. 멋내기나 옷차림에 넋을 빼앗기고 싶은 아이는 없습니다. 오로지 즐겁게 살아가고픈 아이입니다. 오직 사랑스레 살아가고픈 아이입니다. 그예 넉넉하고 따사로운 꿈을 꾸고픈 아이입니다.


  아이는 어른으로 자랍니다. 아이도 어른도 사람입니다. 아이는 넉넉한 어른과 살아가며 넉넉한 아이 품을 건사합니다. 아이는 따사로운 어른과 꿈꾸며 따사로운 아이 사랑을 빛냅니다. (4345.4.17.불.ㅎㄲㅅㄱ)


― 이자벨라의 리본 (이치카와 사토미 글·그림,김경연 옮김,풀빛 펴냄,2004.4.10./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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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운영 책읽기

 


  너른 들판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시골집을 누릴 수 있기를 꿈꾼 적 있는가 곰곰이 돌아본다. ‘이렇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지.’ 하는 꿈은 틀림없이 꾸었다. 다만 ‘이렇게 살아가면 좋겠지만 집은 어떻게 얻나?’ 하는 마음이 으레 뒤잇곤 했다. 걱정하는 꿈이라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데, 왜 걱정을 뒤잇는 꿈을 꾸었을까. 꿈을 생각하는 삶을 스스로 찾지 않았기 때문일까. 제도권 학교를 탓하거나 누군가를 탓하면서 나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 아닌가.


  자운영 꽃잎을 바라본다. 봄 들판에 봄빛을 알리던 들꽃을 헤아리니, 맨 처음은 옅은파랑이었고(봄까지꽃), 뒤이어 하양이었으며(별꽃), 다음으로 옅은빨강(광대나물)이었다. 이윽고 보라였고(제비꽃), 노랑이었으며(유채꽃·갓꽃), 옅은하양이나 하양이 갈마들었다(매화꽃). 자운영꽃은 이 가운데 보라빛 제비꽃과 함께 찾아왔다.


  어느 꽃이든 꽃잎이 참 작다. 어느 들꽃이든 키가 작달막하다. 유채꽃은 좀 멀대 같다 할 만하지만, 그리 큰 키라 하기 어렵다. 흔히 유채꽃 흐드러진 들판을 헤아리지만, 사람들이 따로 씨앗을 잔뜩 뿌려 유채밭이 되지, 유채 스스로 처음부터 떼로 몰려 피어나지는 않았다. 아니, 유채도 먼먼 옛날에는 스스로 곳곳에 무리지은 보금자리를 마련했겠지.


  들꽃이 피어나는 자리는 다 다르지만, 차례차례 피어나는 꽃이 좁다란 흙뙈기에 나란히 어깨동무하곤 한다. 흙 한 줌은 수많은 들꽃한테 보금자리가 된다. 서로 즐거이 꽃잎을 벌린다. 언뜻 보자면 서로 제 씨앗을 더 많이 더 널리 퍼뜨리려고 애쓰는 듯 여길는지 모르나, 서로 알맞게 제 씨앗을 남길 뿐, 누가 더 넓게 이 땅을 차지하려 든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이 꽃이 피고 나면 저 꽃이 피고, 저 꽃이 피고 나면 그 꽃이 핀다. 숱한 들꽃이 찬찬히 피고 지면서 들판을 알록달록 어여삐 일군다.


  논둑과 도랑 둘레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자운영 꽃잎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너 자운영을 바라보며 무슨 빛깔이라 이름을 붙여야 하겠니. 어떤 빛이름이 너한테 어울리겠니. 별꽃이 흰빛이라 하더라도 아무래도 ‘별꽃빛’ 아니고는 도무지 나타낼 수 없듯, 자운영꽃 또한 그 어떤 빛이름보다 ‘자운영빛’ 아니고는 참말 나타낼 수 없겠지. (4345.4.1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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