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쓰고 싶은 글, 더 읽고 싶은 책

 


  두 아이 잠들었을 때, 글 한 줄이라도 더 쓰고 싶다. 두 아이 새근새근 꿈누리를 날아다닐 때, 책 한 줄이라도 더 읽고 싶다. 그러나, 색색 소리내며 깊이 잠든 아이들이 뒤척이며 아버지를 부른다. 예쁘게 잠든 아이들이 기저귀에 쉬를 하든, 자다가 쉬가 마렵다 하든, 또 곁에서 아버지 손을 잡거나 품에 안겨 자고 싶다 하든, 아버지를 부른다. 나는 모처럼 한갓지게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수 있네 하고 마음을 놓다가도, 못내 아쉬운걸 하고 생각하지만, 이내 이 마음을 접는다. 아버지인 내가 쓰는 글은 너희들 손을 가만히 쥐며 이마로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쓰다듬는 삶인걸. 아버지인 내가 읽는 책은 너희들 작은 몸뚱이를 구석구석 주물러 뭉친 데 풀어 주면서 곱게 목소리 가다듬어 자장노래 부르는 삶인걸. (4345.5.2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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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마친 빨래
마당에 널자
생각하는데

 

눈 발갛게 졸린
둘째 아이
엉금엉금

 

너부터 재워야겠네
기저귀 살펴 갈고
가슴에 눕히며
나도 눕는다

 

자장 자장 코코 자장
예쁜 아기 잘도 잔다
코코 자고 배꼽 자고
또또 먹고 또또 놀자

 


4345.4.2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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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82 : 고향이 되는 책

 

 

  2006년에 처음 나온 《열네 살의 철학》(민들레)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일본 푸름이 가운데 30만 남짓 이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뭐 그리 대단하기에 그리 많이 읽는가 생각하다가는 그만 이 책을 잊은 채 여러 해 흐릅니다. 지난날을 돌이켜봅니다. 나는 2006년 3월에 이 책이 나올 무렵 삶터를 옮겨야 했습니다. 이무렵부터 책짐을 싸서 이듬해 봄에 새 삶터로 옮겼지만, 혼자 책짐을 꾸리고 새 삶터를 알아보러 다니느라 이무렵 갓 나온 이 책은 끈으로 친친 묶인 채 한 해를 넘겼고, 새 삶터로 옮긴 뒤에도 끈에서 좀처럼 풀리지 못하다가 또 두 차례 더 삶터를 옮깁니다. 느긋하게 책을 펼칠 겨를 없이 하루하루 보냈어요. 이제 우리 식구는 고즈넉한 시골마을에 기쁘게 집을 얻어 지내기에 다시는 책짐을 꾸리지 않아도 되리라 생각합니다. 자그마치 여섯 해만에 《열네 살의 철학》이라는 책을 ‘갓 나온 책’으로 삼아 읽습니다.


  “나와 인류 전체는 다른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좋아지지 않으면 인류는 좋아지지 않는 거야(170쪽).”라든지 “부모님은 일을 하기 위해 사는지, 아니면 살기 위해 일하는지, 과연 어느 쪽일까(131쪽)?”라든지 “관념이 현실을 만들지, 현실이 관념을 만드는 건 결코 아니야(92쪽).”라든지, 천천히 밑줄을 그으며 찬찬히 되새깁니다. 사람들이 쓰는 말은 어떻게 해서 태어났을까를 생각해 보자(40쪽)는 대목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서 내가 오늘 적바림하는 글 한 줄에는 어떠한 사랑과 꿈이 깃드는가를 되새깁니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아버지더러 ‘책 그만 읽’고 ‘저희랑 같이 놀’자고 합니다. 책을 덮습니다. 아버지라고 책만 읽는 사람이 아니라, 이른새벽부터 늦은밤까지 너희랑 복닥이고 또 너희 밥을 먹이고 또 너희 옷을 빨고 또 너희 잠잘 집을 치우고 또 너희 누릴 온갖 것 건사한다며 땀흘리다가, 등허리 두들기며 살짝 허리 펴자면서 이렇게 몇 분쯤 책을 쥘 뿐인데, 요만큼이나마 봐주면 안 되겠니, 하는 말이 슬며시 새어나려다가 맙니다. 새삼스레 이런 말 한 마디 다시금 돌아봅니다.


  아이랑 손을 잡고 달립니다. 아이를 안고 간지럼 피웁니다. 같이 노래하고 같이 풀내음 맡습니다. 아이들 모두 가까스로 재우고 나서 살짝살짝 넘기던 《어머니전》(호미,2012)에 나오는 이 나라 섬마을 어머니들 삶이 떠오릅니다. 《어머니전》을 쓴 강제윤 님은 섬마을에서 만나는 할머니(어머니)들한테서 얘기를 찬찬히 듣고는 책 하나로 갈무리했는데, 어느 섬마을을 찾아가든 “이제는 할머니가 스스로 고향이 되었다(39쪽).”고 느낀다는 생각자락을 적바림합니다. 그래, 이런 말마따나 우리 식구들은 ‘아버지네 어머니랑 아버지’하고 ‘어머니네 어머니랑 아버지’를 뵈러 먼먼 마실을 다닙니다. 아이들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보려고 먼먼 길을 기꺼이 찾아오십니다. 내 어머니와 옆지기 어머니는 당신 스스로 ‘고향’입니다. 나와 옆지기는 우리 스스로 아이한테 ‘고향’입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와 옆지기 아버지한테 우리 집 두 아이는 ‘또다른 고향’이 됩니다. 먼먼 길 고단히 달려오면서 싱긋 웃을 수 있습니다. 먼먼 길 바쁜 틈 쪼개어 찾아오면서 맑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4345.5.2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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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늘쫑을 뽑은 손으로

 


  마늘쫑을 뽑는다. 마늘쫑은 마늘잎 사이에 굵게 비죽 솟은 줄기이다. 나는 아직 마늘을 심어 기르지 않았으니 모르지만, 마늘쫑을 안 뽑으면, 이 끝에서 꽃봉우리가 피어나지 않으랴 싶다. 배추도 배추포기 한복판에 굵다랗고 길게 줄기가 올라오며 꽃이 핀다.


  이웃 할머니가 마늘밭을 돌며 마늘쫑을 뽑는다. 당신 드실 만큼만 뽑으며 우리더러 얼마든지 뽑아 가라 말씀한다. 아마 다른 마늘밭에서도 이와 비슷비슷하리라 느낀다. 마을 할머니 할아버지 들은 일이 많고 힘들며 손이 모자라니, 마늘쫑을 하나하나 다 뽑지 못한다. 마늘쫑이 남은 채 밭뙈기로 마늘을 팔 테고, 마늘쫑이 뽑히든 안 뽑히든, 마늘을 밭째 사들이는 이들은 마늘을 주렁주렁 엮어 다시 내다 팔겠지.


  그런데, 나는 마늘을 심은 적이 없을 뿐더러 마늘쫑을 뽑아 본 일이 없다. 어떡해야 할까. 이웃 할머니가 밭 사이 누비며 한손으로 톡톡 잰 손놀림으로 마늘쫑 잡아빼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늘쫑이 어떤 줄기인가 곰곰이 들여다본다. 이 녀석인가. 한손으로 잡는다. 얼마나 세게 잡아당겨야 할까. 마늘이 뽑히지는 않을까. 자칫 마늘쫑이 끊어지지는 않을까.


  살며시 그러쥐어 살짝 당긴다. 뽕 뽕 아주 조그맣게 소리 난다. 천천히 천천히 뽑는다. 마늘쫑을 뽑을 때마다 마늘내음과 풀내음과 물내음이 얼크러져 퍼진다. 마늘밭에서 김을 매고, 마늘쫑을 뽑으며, 마늘을 캐는 할머니들은 어떤 마음이 될까 헤아려 본다. 할머니들은 마늘밭에 폭 주저앉아 두 손으로 척척 마늘을 잡아뽑는다. 따로 호미로 ‘캔다’기보다, 그냥 손으로 ‘뽑는다’고 해야 옳은데, 모두들 ‘마늘을 캔다’고 말씀하신다. 마늘을 밭에서 뽑노라면 허리가 끊어질듯 아플 테니까, 모두들 밭자락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잡아뽑으시는구나 싶다. 이렇게 주저앉아 마늘을 잡아뽑더라도 허리는 끊어질듯 아프겠지.


  “힘들어서 이걸 어떻게 도와?” 하고 말씀하시는데, 할머니들 스스로 힘들다 여기는 밭일을 예순 해이고 일흔 해이고 여든 해이고 내처 하셨다. 이른새벽부터 늦은저녁까지, 밭자락에서 흙이랑 뒹굴며 기나긴 나날이 흘렀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해마다 감꽃은 새로 피고 감알은 새로 맺는다. 제비는 새봄에 다시 찾아들고, 재비집은 봄이 되면 다시금 튼튼하게 빛난다.


  내가 처음으로 뽑은 마늘쫑을 한손에 쥔다. 가게에서 파는 마늘쫑 값은 되게 싸다. 저잣거리에서도 마늘쫑 값은 참 싸다. 마늘쫑을 날로 먹든 삶아 먹든 데쳐 먹든, 아주 금세 훌러덩 먹을 수 있다. 마늘쫑을 먹는 이들이 스스로 씨마늘을 흙에 심고 김을 매다가는 마늘쫑을 뽑고 마늘을 하나하나 캐며 풀벌레랑 들새랑 하루 내내 어우러진다면, 지구별은 어떤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마늘쫑을 뽑은 손으로 아이들 머리칼을 쓸어넘기고, 기저귀를 빨며, 연필을 쥐어 글을 끄적인다. (4345.5.2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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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찔레꽃 책읽기

 


  지난주쯤부터 손톱보다 조금 크다 싶은 하얀 꽃송이 달린 자그마한 찔레나무를 보았다. 하얀 꽃송이가 달리고 나서야 비로소 찔레나무로구나 하고 알아채는 셈이지만, 하얀 꽃송이가 달린 모습을 보면서도 ‘응, 찔레 같은데?’ 하고 생각할 뿐, ‘이야, 찔레로구나!’ 하고 깨닫지 못한다. 네 식구 나란히 들길 마실을 다니면서 이 꽃송이를 바라보며 선뜻 ‘저기 보렴, 찔레꽃이란다!’ 하고 말하지 못한다. 요즈음 시골은 길이든 들이든 이웃을 만나기 어려우니, 막상 ‘찔레로구나 싶은 꽃을 보더라도 여쭈지 못한’다.


  어제 낮, 충북 음성에서 아이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찾아오셨다. 두 분이 하룻밤 주무시고 돌아가시기를 바라며 집 안팎을 며칠에 걸쳐 바지런히 치우고 쓸고닦았다. 그러나 두 분은 안 주무시고 바로 돌아가신다. 얼마나 서운하고 기운이 빠지는지 온 하루가 고단하고 슬프다. 그래도, 아이들 할머니한테 몇 가지 여쭈었다. 찔레꽃이 크기가 얼마만 하느냐 여쭙고, 요즈막 길에서 흔히 보는 하얀 꽃송이가 무슨 꽃이냐 여쭙는다. 아이들 할머니는 “아니, 찔레도 몰라?” 하면서 “바로 여기에도 있네. 저기에도 가득 폈네.” 하고 말씀하신다.


  어머니, 그럼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인천에서 찔레꽃을 구경했던 적이 떠오르지 않는걸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인천 골목동네에도 틀림없이 곳곳에 찔레꽃이 흐드러졌을 테지만, 찔레꽃이라 알려준 이웃 어른은 없었거든요.


  아이들 재우며 자장노래로 이원수 님 동시에 가락을 붙인 “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오. 누나 일 가는 광산 길에 피었다오. 찔레꽃 이파리는 맛도 있지. 남모르게 하나둘 따먹었다오.” 하는 노래를 날마다 불렀다. 정작 아이들 어버이로서 ‘얘들아, 우리 찔레잎 따먹을까?’ 하고는 얘기하지 못했지만, 새해에는 찔레꽃을 제대로 알아보아야지 하고 다짐하며 이 노래를 늘 불렀다. 아이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금세 돌아가셔서 못내 서운했지만, 이제부터 아이들하고 찔레꽃잎 같이 따먹고, 밥에도 찔레꽃잎 얹어서 먹으려 한다.

 

 ..


  요즈음 사람들은 봄을 맞이하며 봄꽃을 기다린다 하지만, 막상 벚꽃이니 진달래이니 개나리이니 하고 말하는 데에서 그친다. 먼먼 옛날부터 여느 시골 사람들하고 살가운 벗이던 찔레꽃 구경하거나 즐기는 일은 거의 생각하지 못하거나 않는다. 아무래도, 요즈음 사람들은 몽땅 도시사람이기 때문일까. 요즈음 사람들은 고작 쉰 해쯤 앞서만 하더라도 이 나라 거의 모두 시골 흙일꾼 딸아들로 태어나 살아온 줄 잊기 때문일까.


  나는 봄을 맞이하며 다른 어느 꽃보다 살구꽃을 기다린다. 살구꽃이 질 무렵이면 딸기꽃을 기다린다. 딸기꽃이 저물 무렵이면 찔레꽃을 기다린다. 찔레꽃이 저물 무렵에는 감꽃을 기다릴까. 감꽃이 저물 무렵이면 어느 꽃을 기다리려나. 들에서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씨앗을 틔우며 씩씩하게 자라나는 찔레나무가 우리 집 뒤꼍으로도 날아들 수 있기를 빈다. (4345.5.2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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