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글게 쓰는 우리 말
 (1528) 차모임

 

레니와 헤크마이어는 오후의 차모임에 초대받았다
《오드리 설킬드/허진 옮김-레니 리펜슈탈 : 금지된 열정》(마티,2006) 425쪽

 

  “오후(午後)의 차모임에”는 “낮에 있을 차모임에”나 “낮에 있는 차모임에”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초대(招待)받았다’는 그대로 두어도 되고, “부름을 받았다”나 “가게 되었다”로 손볼 수 있어요. 차근차근 생각을 기울여 한결 알맞고 사랑스레 쓸 수 있는 말입니다. 제도권교육에 길든 말투대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쓴다 하더라도, 둘레 사람들은 뜻을 헤아릴 수 있다지만, 사랑스러운 결을 헤아리며 글을 쓴다면,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뜻읽기뿐 아니라 사랑읽기를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문득 궁금해서 국어사전을 뒤적입니다. ‘티타임(teatime)’이라는 낱말이 국어사전에 실렸을까 궁금했는데, 참말 실립니다. 어, 이런 영어를 국어사전에 실어도 되나 아리송한데, 아무튼 ‘티타임’ 말풀이는 “차 마시는 시간. ‘휴식 시간’으로 순화”라 적힙니다. 곧, ‘국어순화’를 해야 하는 낱말인 ‘티타임’인 셈인데, 고쳐써야 할 낱말이라면 국어사전에 안 올려야 마땅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낱말은 국어사전이 아닌 ‘국어순화사전’에 올릴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티브레이크(Tea Break)’ 같은 영어는 국어사전에 안 실립니다.


  다만, ‘차모임’ 같은 낱말도 국어사전에 안 실려요. 차를 마시는 모임이라는 뜻에서 쓰는 ‘차모임’일 텐데, 국어사전에는 ‘티타임’이 아닌 ‘차모임’ 같은 낱말을 실으면서, 사람들 말매무새를 예쁘게 추스르도록 도와야 아름답지 않겠느냐 싶어요.


  그나저나, 책을 읽다가 깜짝 놀라서 밑줄을 긋고 책을 덮습니다. ‘차모임’이라는 낱말 하나 만나면서 ‘그래,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래, 참말, 이렇게 써도 되지. 더구나 이렇게 책에까지 어엿하게 실린 낱말이니, 우리도 이제는 이와 같이 말하면 되겠네.’ 하고 생각을 잇습니다.


  다시 책을 펼쳐 읽습니다. 한동안 책을 기쁘게 즐기다가 또다시 덮고는, 이제 셈틀을 켜고 인터넷에 들어가서 찾기창에 ‘차모임’이라는 낱말을 넣습니다. 자동차를 타는 사람들 모임을 가리키는 ‘차모임’이 더러 눈에 뜨이지만, 거의 모든 ‘차모임’은 ‘계모임’과 마찬가지로, 퍽 예전부터 꽤 많은 사람들이 즐겨쓰는 낱말입니다. 나는 여태 몰랐지만, 사람들은 참 자주 흔히 으레 쓰는 낱말인 줄 처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차 마시는 모임 / 차 즐기는 모임
 차 마심이 모임 / 차 즐김이 모임

 

  인터넷에서 언제 글까지 찾아볼 수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1998년에 쓰인 ‘차모임’까지는 찾아보기가 됩니다. 아마, 1998년이 아닌 1991년에도 이 낱말을 쓴 사람이 있지 않았으랴 싶고, 1981년이나 1971년에도 이 낱말을 쓴 사람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아마 예전에는 ‘차모임’처럼 붙이지 않고 ‘차 모임’처럼 띄어서 적었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띄어서 ‘차 모임’이라 적으면, ‘보기글 모으기(용례 수집)’에 걸려들지 않아, 국어사전을 엮으며 새 낱말을 넣으려고 할 때에 그물에서 벗어나고 맙니다.


  ‘신나다’ 같은 낱말은 아직까지도 국어사전에 오르지 못합니다. 어떻게 보면 ‘차모임’이나 ‘신나다’나 서로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은데, 처음부터 이 낱말을 한 낱말로 삼아 국어사전에 싣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책과 신문에서 ‘신 나다’처럼 띄어서 썼습니다. 이러다 보니 ‘신 나다’로는 퍽 자주 쓰이기는 하나 ‘신나다’로 적힌 보기글이 없어서, 국어학자들은 “이 낱말 ‘신나다’는 쓰임새를 찾아볼 수 없으니 한 낱말로 삼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참으로 뚱딴지 같은 이야기이지만, 오늘날까지 버젓이 이어지는 우리 모습입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북돋우는 길을 가로막은 모양새이고, 새롭게 한국말을 빚어내어 쓰지 못하도록 하는 노릇입니다.

 

 찻집 . 찻값 . 찻잔
 차모임 . 차즐김 . 차때

 

 인터넷에서 ‘차모임’을 찾아니, ‘차모임(Tea Break)’처럼 적는 분들이 곧잘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티타임’이나 ‘티브레이크’라고 말하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예전에 함께 어울리던 동아리 동무 하나는, “야, 우리 티타임 하자.” 하고 말하다가, “어? 우리, ‘우리 말 동아리’였잖아. ‘티타임’ 같은 말은 쓰면 안 되지. 그런데, 그럼 뭐라고 하지? ‘차 시간’? 그럼 버스 기다리는 시간하고 헷갈리잖아? ‘차 때’? 음, 이건 좀 이상한데. 아무래도 ‘티타임’은 그냥 ‘티타임’이라고 해야겠다. 안 그러냐?” 하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티타임’을 걸러낼 마땅한 낱말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차때’라는 말마디를 혀에 얹어 굴려 보지만, 영 와닿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말마디를 쓰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쓸 수 있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은 ‘티타임’이나 ‘티브레이크’를 아무렇지 않게 쓰는데, ‘차때’ 같은 말마디를 쓸 일은 거의 없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적잖은 사람들이 ‘차모임’이라 쓴다면, 조금씩 가지를 치고 줄기를 뻗을 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해 봅니다. 차를 즐기는 사람들 스스로 ‘차즐김이’라 말하고, 차를 즐기는 일을 가리켜 ‘차즐김’이라 해 볼 수 있다고 느낍니다.


  만화를 좋아하는 어느 분은 스스로를 ‘만화즐김이’라고 일컫습니다. 이런 이름 그대로, 저는 저 스스로를 ‘사진즐김이’나 ‘책즐김이’라 일컬을 수 있고, ‘골목즐김이’나 ‘헌책방즐김이’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우리말즐김이’처럼 제 삶을 이야기해도 어울릴 테지요.

 

 -모임 : 차모임 . 책모임 . 시모임 . 영화모임 . 춤모임 . 노래모임
 -즐김이 : 차즐김이 . 책즐김이 . 시즐김이 . 영화즐김이 . 춤즐김이 . 노래즐김이

 

  한 마디를 곱씹으면서 두 마디를 헤아려 봅니다. 두 마디를 헤아리며 세 마디를 되뇌어 봅니다. 세 마디를 되뇌면서 네 마디를 꿈꿉니다. 우리한테는 우리 말과 생각과 삶을 빛낼 시원하고 깊은 샘물이 깃들어 늘 맑게 솟는다고 느낍니다. 사람들 누구한테나 제 겨레 글과 넋과 삶터를 북돋울 싱그럽고 너른 숨결이 잠든 채 깨워 주기를 기다린다고 느낍니다.


  따순 손길을 기다리는 말이 있습니다. 고운 마음길을 기다리는 글이 있습니다. 맑은 생각길을 뻗치면 맑은 말길 또한 뻗어나가고, 착한 삶길을 일구면 착한 글길 또한 기름지게 일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4342.8.25.불./4345.6.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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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를 혼자 차지하는 마음

 


  면소재지에서 택시삯 고작 오천 원 들여 오 킬로미터 떨어진 발포 바닷가로 마실을 갈 수 있습니다. 걸어서 찾아간다든지 늘 집 앞에서 창문만 열면 바라볼 수 있다든지 하지는 않으나, 이렇게 가까운 곳에 다도해국립공원 바다를 만날 길이 있으니 좋습니다. 마땅한 일이기는 한데, 우리 식구는 이렇게 시골 터전을 신나게 즐기고 싶기에 시골에서 살아갑니다. 이제껏 따로 꿈꾸지는 못했지만, 이제부터 우리 또다른 보금자리가 바닷가에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고 꿈꿉니다. 고즈넉한 멧자락 사이에 포근하게 안긴 호젓한 보금자리에서 살다가, 때때로 바다가 그리우면 바닷가에 건사한 좋은 보금자리로 옮겨 며칠이고 지낸다면 무척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바닷마을 한켠에 저희 보금자리를 따로 마련할 수 있어요. 이렇게 되면, 우리는 서로서로 오가면서 좋은 삶을 가없이 누릴 수 있겠지요.


  그리 이르지 않은 아침이지만, 발포 바닷가에 아무도 없습니다. 택시에서 내리니 오직 우리들만 있습니다. 사람도 없고 자동차도 없습니다. 물결이 일렁이며 내는 솨솨 촤르르 소리만 가득합니다. 바다를 우리 네 식구만 한껏 누리네, 하고 생각합니다. 이 둘레에서 바다를 누리는 사람은 우리뿐이네, 하고 생각합니다.


  바닷가 모래밭을 따라 빙 두룬 후박나무와 소나무도 언제나 이 바다를 누리겠지요. 논밭 가득한 마을 한복판에서는 바람이 거의 안 불지만, 바닷가에서는 바닷바람이 그치지 않습니다. 낮밥을 먹으며 후박나무를 올려다봅니다. 열매가 까맣게 잘 익었습니다. 바닷가 둘레에서 살아가는 멧새는 틈틈이 후박나무로 찾아들어 까만 열매를 맛나게 먹겠지요. 새들도 후박열매를 먹는 동안 기쁘게 바다를 누릴 테지요.


  신을 벗습니다. 맨발로 모래밭을 걷습니다. 바닷물 앞에 섭니다. 스스럼없이 발을 담급니다. 찌르르 시원한 바닷물 느낌이 발가락 끄트머리부터 머리카락 끄트머리까지 올라옵니다. 이 바닷물은 이곳부터 어디까지 이어졌을까요. 이 바닷물은 지구별을 어떠한 품으로 곱게 안아 줄까요. 이 바닷물에 깃들어 숨을 쉬는 목숨은 얼마나 많을까요.


  너른 바다는 사람들 누구나 너른 넋이 되고 너른 사랑이 되어 너른 꿈을 빚으라고 속삭입니다. 따순 바다는 사람들 모두 따순 얼이 되고 따순 마음이 되어 따순 이야기를 나누라고 노래합니다.


  내 좋은 이웃과 동무들이 좋은 바다를 가까이할 수 있기를 빕니다. 내 좋은 곁사람들이 텔레비전이나 셈틀이나 보고서나 자동차나 고속도로나 높은 건물이나 아파트만 들여다보지 말고, 상큼하고 해맑으며 파랗게 빛나 하늘과 하나되는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기를 빕니다. (4345.6.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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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흘 만에 다시 바다로

 


  사흘 만에 다시 바다로 간다. 아이들 재채기는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사흘 앞서도 아이들이 갤갤거리기는 하나, 맑은 해님을 믿으며 마실을 갔다. 오늘도 맑은 해님을 믿으며 마실을 간다.


  군내버스 때에 맞추어 짐을 꾸려 나오는데, 버스 타는 데에 닿기 앞서 그만 버스가 훌쩍 떠난다. 사흘 앞서보다 3분이나 일찍 왔다. 우리가 더 일찍부터 짐을 꾸렸으면 안 놓쳤을 테지만, 어쩐지 서운하다. 그러나 대수로이 여기지 않는다. 면소재지까지 버스삯 2200원이지만, 택시를 불러서 타도 4000원. 네 식구 타는 택시이니까 비싸다는 생각을 안 한다.


  이제 한창 물놀이철이 될 테니 사람들이 제법 찾아올는지 모르겠구나 싶다. 칠월을 넘어서면 아마 발디딜 틈이 없을는지 모른다. 사람들이 마구 찾아와서 복닥거리기 앞서 우리 마을 바닷가를 실컷 즐기자고 생각한다.


  면소재지에서 5.1킬로미터 떨어진 바다까지 금세 닿는다. 바닷가에는 아무도 없다. 그야말로 아무도 없다. 아침 열한 시 반 즈음 바다로 와서 노는 사람은 없으려나. 꾸려 온 도시락이랑 면소재지에서 장만한 먹을거리를 내놓는다. 천천히 신나게 먹으며 바닷바람을 쐰다. 물결이 들려주는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바다로 뛰어든다. 모두를 따사로이 품는 바다라 하지만, 오늘만큼은 온통 우리들 품에 안긴다. (4345.6.29.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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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뒷모습>이라는 한국 번역책에는 아무 점수를 주고 싶지 않다. 이제 이만큼 팔렸으면 표지갈이를 해야 할 노릇 아닌가 생각한다. 벌써 표지갈이를 했는지 모르겠다만, 표지갈이를 했으면, 인터넷책방 표지 사진을 바꾸어 주길 바란다. 참말, 한국 출판사는 무슨 생각으로 사진책 표지를 함부로 바꾸어 붙이며 장삿속에 눈이 멀어야 하는가. 내가 붙인 '별 셋'은 한국 번역책에 붙이는 점수일 뿐, 프랑스 사진책 《Vues de dos》에는 아주 마땅히 '별 다섯'을 붙인다.

 

..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빛과 그림자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59] 에두아르 부바(Edouard Boubat), 《Vues de dos》(Gallimard,1981)

 


  《뒷모습》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이 2002년에 한국말로 나옵니다(현대문학북스 펴냄). 이 책은 1923년에 태어나 1999년에 숨을 거둔 프랑스 사진쟁이 에두아르 부바(Edouard Boubat) 님이 찍은 사진에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 님이 글을 붙여 1981년에 처음으로 태어납니다. 한국에는 미셸 투르니에 님 ‘글이름’이 매우 높습니다. 퍽 예전부터 미셸 투르니에 님 책이 옮겨지고 읽혔습니다. 이와 달리 에두아르 부바 님 ‘사진이름’은 무척 낮습니다. 먼 옛날이든 가까운 오늘날이든 에두아르 부바 님 사진책이나 사진밭이나 사진넋이나 사진삶을 다루는 글이나 책은 좀처럼 선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한국에서 바라보기에는 이와 같을 뿐, 프랑스에서는 에두아르 부바 님 사진책이나 사진밭이나 사진넋이나 사진삶을 찬찬히 헤아리면서 널리 북돋우리라 생각합니다.


  사진책 《Vues de dos》(Gallimard,1981)가 프랑스에서 처음 나올 적에는 ‘발레하는 가시내가 나비 같은 날개를 붙인 옷을 입고 춤추는 모습’이 책겉에 나옵니다. 《Vues de dos》가 《뒷모습》이라는 이름으로 2002년에 한국에 옮겨질 적에는 ‘웃몸 벗어 젖가슴 훤히 드러난 사람 뒷모습’이 책겉에 나옵니다. 사진을 찍은 에두아르 부바 님은 1999년에 벌써 숨을 거두었으니, 당신 사진책이 다른 나라에서 옮겨질 적에 어떤 모습으로 옮겨지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허락도 못 하고 반대도 못 합니다. 그저 나올 뿐입니다. 한국땅에서는 ‘웃몸 벗어 젖가슴 훤히 드러난’ 사진을 책겉에 내세워야 한결 돋보이면서 더욱 눈부시게 팔린다 할 만한지 모릅니다. 이렇게 도드라지도록 하지 않고서야 사람들이 이 사진책을 손에 쥘 일이 없을는지 모릅니다. 제아무리 아름답다 싶은 사진도, 제아무리 사랑스럽다 싶은 사진도, 제아무리 훌륭하다 싶은 사진도, ‘읽어 주는 사람’이 없다면 쓸쓸할는지 모르잖아요.

 

 

 

 

 


  나는 한국판 수필책 《뒷모습》은 장만하지 않습니다. 나는 프랑스판 사진책 《Vues de dos》를 장만합니다. 한국에서는 《뒷모습》을 ‘수필’ 갈래로 나눕니다. 아니, ‘수필’ 아닌 ‘에세이’ 갈래로 나누더군요. 아무래도 미셸 투르니에 님 글이름 때문에 수필, 아니 에세이 갈래로 나누었구나 싶어요.


  그러나 나는 《Vues de dos》를 수필책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나한테 《Vues de dos》는 사진책일 뿐입니다. 미셸 투르니에 님은 에두아르 부바 님이 찍은 사진을 보면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글을 붙였다고 합니다. 곧, 에두아르 부바 님이 찍은 사진이 없다면 미셸 투르니에 님은 《뒷모습》에 실리는 글을 쓸 수 없었어요. ‘글이 있어 이 글에 맞추어 찍는 사진’이 아니라, ‘사진이 있어 이 사진에 맞추어 쓰는 글’이에요. 곧, 어느 모로 보나 사진책입니다.


  사진책 《Vues de dos》를 장만하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프랑스말을 읽지 못하기에 사진책 《Vues de dos》를 장만하면, 미셸 투르니에 님이 붙인 글은 한 줄조차 못 읽습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하나도 아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로서는 에두아르 부바 님 사진을 읽고 싶을 뿐이요, 사진읽기를 하려고 《Vues de dos》를 장만했어요. 에두아르 부바 님이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에두아르 부바 님이 바라본 삶을 하나하나 헤아립니다. 사진읽기를 즐기며 삶읽기를 누립니다. 삶읽기를 하면서 넋읽기를 하고 마음읽기를 합니다. 넋과 마음을 가만히 읽으면서 사랑과 꿈을 읽습니다.

 

 

 

 


  뒷모습은 뒷모습입니다. 뒷모습은 앞모습이 아닙니다. 앞모습도 뒷모습도 옆모습도 사람들 모습입니다. 일하는 모습과 놀이하는 모습과 밥먹는 모습과 잠자는 모습 모두 사람들 모습입니다. 어느 한 가지 모습만 ‘그이 모습’이라고 못박을 수 없습니다. 모든 모습이 알뜰살뜰 모여 ‘그이 모습’을 이룹니다. 앞모습을 바라보며 이러한 삶을 살핀다면, 뒷모습을 들여다보며 저러한 삶을 돌아봅니다. 춤추는 모습이나 노래하는 모습을 마주하며 새삼스럽구나 싶은 삶을 느낍니다. 사진마다 다 다른 이야기가 담기고, 다 다른 이야기는 다 다른 우리들한테 다 다른 빛을 베풉니다.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빛을 읽습니다. 사람들 둘레를 맴도는 그림자를 읽습니다. 해가 비치면서 그림자가 집니다. 사람도 그림자를 빚고, 벼포기도 그림자를 빚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도 땅바닥에 조그맣게 그림자를 빚습니다. 나무도 자동차도 풀도 아파트도 그림자를 빚습니다. 어느 그림자는 서로를 따스히 보듬고, 어느 그림자는 으스스하게 추운 바람을 일으킵니다. 어느 그림자는 고개를 땅바닥에 붙여야 겨우 알아볼 만하고, 어느 그림자는 멀디먼 데까지 꼬리를 잇습니다.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어 아름다운 꿈을 꿉니다. 사랑스럽게 살아가고 싶어 사랑스러운 꿈을 꿉니다. 스스로 바라는 대로 꿈을 꿉니다. 스스로 누리고픈 삶을 좇아 하루하루 살림을 일굽니다. 누군가는 사진쟁이로 이름을 날리고 싶어 미국 뉴욕으로 달려갑니다. 누군가는 ‘사진쟁이로 이름을 날리’는 뜻이 아니라, ‘내 가슴부터 촉촉히 적실 사진을 누리’고 싶어 내 삶을 촉촉히 적시는 길을 걷습니다. 세계사진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겨야 ‘사진쟁이로 이름을 날리’는 일이 되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사진쟁이로 이름을 날린들 하나도 대수롭지 않다고 느낍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부터 스스로 좋아할 만하고, 내 둘레 고운 벗님 한 사람한테 웃음과 눈물을 나눌 수 있다면 넉넉할 만한 사진이 되리라 느낍니다.

 

 

 

 

 


  이름난 비평가나 교수한테서 추천글을 받아야 멋진 사진책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비평이나 저런 평론에 다루어져야 훌륭한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따순 햇살은 어떤 비평이나 평론이 없어도 언제나 따숩게 모두한테 찾아옵니다. 새와 개구리와 벌레가 들려주는 고운 노래는 이런 비평이나 저런 평론이 없어도 늘 맑게 모두한테 찾아옵니다.


  사진도 그림도 글도 모두 같다고 느껴요. 사진도 밥도 사랑도 모두 같다고 느껴요. 삶에서 우러나와 즐겁게 찍습니다. 삶에서 우러나와 기쁘게 누립니다. 사랑 담은 밥 한 그릇처럼 사랑 담은 사진 한 장이 어여쁩니다. 사랑 담은 손길처럼 사랑 담은 사진 한 장이 따사롭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빛과 그림자가 예쁘게 섞입니다. 저기 씩씩하게 걸어오는 아이 발 밑으로 고운 그림자가 씩씩한 빛무늬처럼 나란히 움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난하지도 않고 가멸차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슬프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착하고 참다우며 예쁩니다. (4345.6.29.쇠.ㅎㄲㅅㄱ)

 

 

 

 

 

 

 

 

 

 

 

 

 

 

 

 

(사진책 읽는 즐거움 . 최종규 / 2012)

 

덤 하나. 아마존에서 48달러에 살 수 있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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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글게 쓰는 우리 말
 (1535) 손맛

 

“맛있어. 엄마가 절여 주던 게 생각나네.” “어머니 손맛이라. 우리 집은 훨씬 새콤했던 것 같은데.”
《오사무 우오토/최윤선 옮김-현미 선생의 도시락 (1)》(대원씨아이,2010) 41쪽

 

  “절여 주던 게”는 “절여 주던 일이”나 “절여 주던 먹을거리가”로 다듬습니다. “새콤했던 것 같은데”는 “새콤했던 듯한데”나 “새콤했구나 싶은데”로 손봅니다.

 

  골목마실이나 동네마실을 하다 보면 가끔 ‘엄마손 분식’이라는 이름을 단 밥집을 만납니다. 바깥에서 사먹을 때에도 ‘집에서 엄마가 손수 해 주는 맛’을 찾는 사람이 많기에 이와 같은 밥집 이름이 나오겠구나 싶은데, 이제까지 ‘아빠손 분식’이라는 이름은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은 손맛이라 할 때에 으레 ‘엄마 손맛’이나 ‘할머니 손맛’이라고만 할 뿐, ‘아빠 손맛’이나 ‘할아버지 손맛’은 아예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같은 밥집 이름이란 ‘남녀차별’일 수 있고, 어느 한편으로는 ‘문화’라 여길 수 있습니다. 집일은 오로지 여자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우리 스스로 제대로 못 느끼는 말마디라 할 수 있으며, 집일을 누가 하느냐라는 테두리를 넘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밥을 하는 어버이 느낌’을 ‘엄마 손맛’이라는 말마디에 담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오늘날에도 ‘엄마 손맛’을 이야기할 만한 우리 삶터일까요. 먼먼 앞날에도 ‘엄마 손맛’을 남달리 떠올리거나 되새길 만한 이 나라 터전인가요.


  손을 놀려 먹을거리를 장만하는 일이 얼마나 되는가요. 손을 써서 흙을 일구는 사람은 얼마나 되지요. 찬거리를 마련할 때에 아이와 손을 잡고 오붓하게 걸어서 저잣거리를 다녀옵니까, 자가용을 타고 부릉부릉 달려서 짐칸에 가득 싣고 돌아옵니까. 집에서 먹을거리를 할 때에 온갖 전기제품을 써서 하는가요, 내 손을 써서 하는가요. 손을 잃고 몸을 잊은 오늘날인데, 말마디로만 ‘엄마 손맛’을 들먹이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내 삶을 내 온몸과 온마음을 바치며 꾸린다기보다 돈벌이와 도시 물질문명에 맞추는 판에, ‘손맛’이든 ‘엄마 손맛’이든 얼마나 찾아보거나 느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손맛 / 아버지 손맛
 누이 손맛 / 오빠 손맛

 

  국어사전에서 ‘손맛’을 찾아보면 모두 네 가지 뜻풀이가 달립니다. 첫째, “손으로 만져서 받는 느낌”입니다. 둘째, “낚시를 할 때에 고기가 미끼를 물어서 손으로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셋째, “먹을거리를 할 때에 느끼는 깊거나 더 좋은 맛”입니다. 먹을거리는 손으로 하기 때문에, 솜씨가 남다르거나 훌륭할 때에 쓴다 합니다. 넷째, “손으로 맞는 맛”이라 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다섯째 뜻풀이를 살짝 더하고 싶습니다. “손을 써서 일을 하며 몸으로 받는 느낌”이라고.


  지난날에는 없던 ‘손빨래’ 같은 낱말이 생기고 ‘손글씨’라는 낱말이 태어나며 ‘손품’을 가리키는 새말이 끝없이 나옵니다. 예전에는 모든 일이 ‘손일’이었지만, 이제는 ‘손일’이 거의 없습니다. 예전에는 마땅히 손일을 하며 ‘손맛(5)’을 느꼈으나, 이제는 손일이 거의 사라진 탓에 손맛을 따로 느끼고 맙니다. 아니, 따로 손맛을 찾아 기계나 전기제품을 멀리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자가용이든 대중교통이든 모두 멀리하며 자전거를 탄달지, 아예 두 다리로 걷기만 한다든지 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제주섬에 ‘올레’가 태어나듯, 지난날에는 따로 없던 ‘골목마실’이나 ‘동네마실’을 따로 즐기듯, 요즈음 우리 삶에서는 ‘손수’ 하는 일이 새삼스레 불거집니다. ‘몸소’ 땀을 쏟으며 부대끼는 일이 남다른 즐거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손맛 . 손질 . 손일 . 손품 . 손수 . 손길 . 손힘
  손자국 . 손빨래 . 손글씨
  손멋 . 손말 . 손글 . 손빛 . 손나눔 . 손내음 . 손사랑

 

  손으로 내는 맛이 손맛이기에, 손으로 내는 멋이라면 ‘손멋’입니다. 다른 사람 손을 빌지 않고 나 스스로 힘쓰면서 일구는 새로운 멋이라 할 때에 ‘손멋’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국어사전에는 이러한 낱말은 안 실립니다만.


  손으로 하니 손빨래요, 손으로 적어 손글씨인 만큼,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손짓으로 나누는 말은 ‘손말’입니다. 사람들이 손을 놀려 글을 쓴다면 ‘손글’입니다. 글쟁이들은 누구나 ‘육필(肉筆) 원고(原稿)’라 읊으며 글멋을 뽐내는데, 육필 원고란 한 마디로 ‘손글’입니다. 손수 쓴 글이니까요.


  손놀림이 아름답거나 손맵시가 고운 사람을 보노라면, 이네들 손매무새에서 맑고 밝은 빛깔을 느낍니다. 마치 무지개라도 드리운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손빛’입니다. 손에서 빛이 나듯 아리땁거든요.


  까마득한 일손이지만 서로서로 손을 맞잡으며 나눌 수 있습니다. 더디 가든 오래 걸리든 차근차근 나누면서 즐겁게 일동무가 되곤 합니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손나눔’을 합니다. 내 손품을 팔며 손나눔을 하고, 내 주머니를 털어 돈을 나누면서 손나눔을 합니다.


  좋은 사람하고 손을 잡고 거닐면 손에서 손으로 짜르르 하게 기쁘고 반가운 느낌이 옮아 옵니다. 어여쁜 사랑이 손과 손으로 옮겨 가고 옮겨 옵니다. 서로서로 손 하나로 사랑을 나누고, 나란히 손내음을 따스하게 받아들입니다.

 

 손 + (무엇)
 (무엇) + 손

 

  손을 덜 쓰는 새 누리라 할 만한 오늘날입니다. 손을 놀리지 않아도 돈벌이를 하고 밥을 얻어먹으며 집을 마련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거들먹거리기까지 하는 오늘날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리품을 안 팔거나 몸뚱이를 놀리지 않아도 잘 사는 사람이 많은 오늘날입니다. 그러나, 이런 오늘날이기 때문에 더더욱 손품과 다리품과 몸품이 알뜰하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이 생겨납니다. 손아귀에 꾸덕살이 배도록 힘쓰는 사람이 나타나고 손마디에 갖은 생채기가 나도록 애쓰는 사람이 곳곳에 보입니다.


  땅을 사랑하라는 내 손이요, 내 이웃과 동무와 식구 모두를 따숩게 껴안으라는 내 손입니다. 이 손은 총칼이 아닌 호미와 낫을 쥘 때에 더없이 아름답습니다. 이 손은 자판보다 옆지기 손을 맞잡을 때에 그지없이 곱습니다. 이 손은 돈뭉치보다 눈물과 웃음을 쓰다듬을 때에 참으로 어여쁩니다. 이 손은 가방끈보다 내 이웃 손을 붙잡을 때에 둘도 없이 아리땁습니다.


  손을 잊을 때에는 내 삶을 잊고, 내 삶을 잊을 때에는 내 넋과 말을 나란히 잊습니다. 손을 잃을 때에는 내 길을 잃고, 내 길을 잃을 때에는 내 꿈과 뜻을 다 함께 잃습니다. 손과 손을 마주 잡으면서 찬손인 이웃이 따신손이 될 때까지 아끼고 보듬을 수 있기를 꿈꿉니다. (4342.12.27.해./4345.6.2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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