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일반판) 문학동네 시인선 2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와 글쓰기
[시를 말하는 시 3]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 책이름 :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 글 : 허수경
- 펴낸곳 : 문학동네 (2011.1.20.)
- 책값 : 8000원

 


  어떻게 살아가는 재미로 시를 쓸까 생각해 봅니다. 어떻게 생각하는 사랑으로 시를 쓸까 헤아려 봅니다.


  누군가는 시를 머리로 쓰겠지요. 누군가는 시를 이리저리 글과 지식을 엮어서 쓰겠지요. 누군가는 살아가는 하루가 고스란히 시로 태어나겠지요. 누군가는 꿈꾸는 삶이 하나둘 시로 거듭나겠지요.


  시 아닌 다른 글이라 해서 이러쿵저러쿵 찧고 빻듯 쓰지 못합니다. 시험문제를 만들면서 문제 글을 쓸 적이라 하더라도 아무렇게나 글을 만들거나 쓰지 못합니다. 아이들마다 따분하다고 일컫는 ‘교장선생님 아침모임 말씀’이라 한들 아무렇게나 만들거나 써서 읽지 못합니다. 대통령이 내놓는 글이나 경찰총장이 내놓는 글이나 대법원 판결글이라 해서 아무렇게나 만들거나 쓰지 못해요.


  그리운 벗한테 띄우는 글월을 아무렇게나 꾸미거나 쓰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어버이한테 띄우는 글월을 아무렇게나 짜깁기하거나 쓰지 못합니다. 반가운 옆지기한테 띄우는 글월을 아무렇게나 때우거나 쓰지 못합니다.


  어떤 글이라 하더라도 내 모든 삶을 기울여서 씁니다. 어떤 글이라 하더라도 내 모든 마음이 찬찬히 스며듭니다.


.. 유전인자 관리하던 실험실도 잠기고 그 안에서 태어나던 늑대들도 잠기고 / 나의 도시 나의 도시 울고 그 안에서 그렇게 많은 전병이나 만두를 빚어내던 이 방의 식당도 젖고 ..  (나의 도시)


  밤과 새벽에 빗줄기가 들었습니다. 밤에는 잠결에 빗소리를 들으며 생각합니다. 마당에 뭐 내놓아서 비에 젖을 만한 무언가 있나, 하고. 없지? 하고 생각하며 다시 차분히 꿈나라로 접어듭니다. 새벽에는 잠결에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새벽에 비가 와서 마당이 젖으면 빨래를 해서 널기 나쁜데.


  하늘에 낀 먼지를 씻고, 나무들 잘 자라라며, 비가 내려요. 하늘을 덮은 때를 벗기고, 풀들 잘 크라며, 비가 찾아와요.


  사람들은 나무와 이웃하면서 비를 즐깁니다. 사람들은 풀과 벗삼으며 비를 누립니다.


.. 차비 있어? / 차비는 없었지 / 이별은? / 이별만 있었네 ..  (수수께끼)


  오늘은 모처럼 빨래기계를 씁니다. 여러 날 바깥마실을 마치고 돌아온 터라 빨래감이 많습니다. 내 어버이와 옆지기 어버이, 곧 아이들 할머니랑 할아버지를 만나러 멀디먼 길을 버스와 기차에서 시달리느라 모두들 고단하고 지칩니다. 손빨래를 하며 몸을 풀고 마음을 가다듬을 만합니다만, 오늘은 늦잠을 자고 싶어요.


  늦잠을 자더라도 새벽에 쌀을 씻어서 불립니다. 게으름을 부리더라도 아침에 마른표고버섯 냄비에 넣고 물에 불립니다. 음성 할머니가 표고버섯을 손수 길러 따고는 예쁘게 말려서 봉지에 담아 주셨습니다. 마른표고버섯을 한손으로 움켜쥐어 냄비에 넣으며 내 할머니 손길을 떠올립니다. 내 할머니는 어떤 마음을 이 표고버섯에 담아서 기르고 따서 갈무리했을까요. 어떤 꿈을 지으면서 이 표고버섯을 예쁘게 말리셨을까요. 내 할머니가 품은 마음과 빚은 꿈은 옆지기와 아이들한테 솔솔 스며들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별도 구워 먹으리라 했어요 / 70년대 초반 / 가장 어린 나 가운데 하나가 별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어요 / 뒤에서 내려다보면 먹다 만 고구마 형상이었어요 /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곰별자리였어요 ..  (고구마별)


  먼 바깥마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택시길에 참으로 홀가분합니다. 기차길을 끝내고 버스길을 끝낸 우리 식구는 읍내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옵니다. 짐이 무겁고 몸이 무거우며 군내버스가 끊기기도 합니다. 시골에서 택시를 타는 사람은 으레 할머니랑 할아버지라 하지만, 우리 식구는 자가용을 굴리지 않으니 즐겁게 택시를 탑니다. 굳이 우리가 자가용을 몰 까닭은 없으니까요. 애써 우리가 자가용을 굴리느라 이쪽에 마음을 기울일 까닭은 없으니까요.


  택시에서는 에어컨 아닌 창문바람을 쐽니다. 오랜만이로구나 싶습니다. 여러 날 기차와 시외버스에서 에어컨바람에 시달린 탓인지 창문바람이 더없이 싱그럽습니다.


  택시는 고흥읍을 벗어나 포두면을 달립니다. 포두면을 벗어나 도화면으로 접어듭니다. 포두면을 달릴 적까지도 창밖 풀숲에서 풀벌레 노랫소리를 못 듣습니다만, 도화면으로 접어드니 바야흐로 풀벌레 노래잔치입니다. 달리는 택시에서도 풀벌레 노랫소리가 온몸과 온마음으로 훌훌 스며듭니다.


  눈을 틉니다. 귀를 틉니다. 마음을 트고 몸을 틉니다. 그동안 갇히거나 막히거나 닫힌 구멍을 틉니다.


.. 석유를 찾기 위해 피곤한 사내들이 바닷속으로 철의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구멍을 뚫어야 지속되던 문명이 있었다고, 우주의 먼 곳에서 우주의 역사를 기록하던 빛이 있었다 // 콩나물시루도그곳에두었어요어떤콩은썩어서뿌리조차아기처럼젖을보채다잠이들었지만 ..  (오후)


  옆지기는 아이들을 씻깁니다. 나는 배앓이를 합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밥을 차리기 힘들 듯해 읍내 중국집에 들렀는데, 옆지기가 건넨 찬콩국수 가락이 속에서 부글거리며 괴롭힙니다. 찬국수도 동치미도 안 받는 내 배는 여러 날 바깥밥·바깥바람에 휘둘리다가 마지막에 찬기운 머금은 국숫가락을 만나니 펑 하고 터진 듯합니다.


  아이고 배야 하며 똥을 누다가 문득, 이렇게 뱃속을 시원스레 털면 한결 느긋하게 잠들면서 새 하루를 반가이 누리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그렇구나, 배앓이는 나를 보살피려고 찾아오는구나.


  아이들은 몸을 씻고 나서도 뛰어놉니다. 아이들도 고단한 몸일 텐데, 새롭게 땀이 돋을 만큼 뛰어놉니다. 참 놀라운 아이들이네, 하고 생각하다가, 나도 아이들 나이였을 적에는 그야말로 놀라운 아이들답게 끝없이 놀고 뛰고 날고 기며 살았잖니, 하고 떠오릅니다.


  놀 수 있을 때까지 놉니다. 놀다가 까무룩 잠들 때까지 놉니다. 놀 수 있는 모든 힘을 씁니다. 놀다가 까무룩 잠들도록 힘이 다 떨어질 때까지 놉니다.


.. 무리를 이루며 사는 우리들은 무엇보다 무리에 속할 이들의 안녕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살아남기 위한 미덕. 흩어지면 육식동물의 표적이 되므로 우리라는 종이 이 지상에서 태어나던 처음부터 배려라는 미덕을 우리는 본능처럼 갖는다. 그 본능은 인간이 우리를 사육화했던 역사 속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  (카라쿨양의 에세이)


  시를 쓰는 마음을 헤아립니다. 아이들과 같은 넋이 되어 시를 쓰는 이라면, 아이들이 온힘을 다 내어 놀듯, 온힘을 다 내어 시 한 줄을 쓰겠지요. 아이들 보살피는 어버이와 같은 넋이 되어 시를 쓰는 이라면, 아이들 노는 양을 말끄러미 지켜보며 하루를 더 기운내어 열고 누리듯, 씩씩하고 다부지게 시 한 줄을 쓰겠지요.


  어느 넋이 좋고 어느 넋이 나쁘다고 따질 수 없습니다. 그저 저마다 스스로 즐기는 삶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가난을 즐기고 재산을 즐깁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쳇바퀴를 즐기고 한갓짐을 즐깁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바쁜 톱니바퀴를 즐기고 따사로운 사랑을 즐깁니다. 즐기는 결이 고스란히 시로 태어납니다. 즐기는 꿈이 하나하나 시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즐기는 넋이 시나브로 시라는 옷을 입고 환하게 빛납니다.


.. 아마도 내가 당신을 잊어버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야 이렇게 잠 속에 든 당신 옆에 내가 누워 있겠는가. 이제 당신을 나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  (여기는 그림자 속)


  허수경 님은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2011)이라는 시집 하나 내놓습니다. 책이름에 ‘빌어먹을’이라니, 스스로 무엇을 ‘빌어먹을’이기에 이렇게 시를 내놓을까 아리송합니다. 그러나, 참말 허수경 님으로서는 ‘빌어먹을’밖에 없어 이렇게 시를 쓰고 시집을 내겠지요. 스스로 ‘차가운 심장’이라 느끼며 삶을 맞아들여 누리니까 ‘차가운 심장’ 이야기를 시로 쓰고 책으로 내겠지요.


.. 저녁에 흙을 돋우다가 나비를 보았네 / 저녁에 흙을 부드럽게 만져 / 막 나오는 달리아를 편하게 하려다가 / 나비를 보았네 ..  (저녁에 흙을 돋우다가)


  허수경 님 스스로 흙을 만질 때에는 ‘흙을 만지는’ 시를 씁니다. 허수경 님 스스로 누군가와 헤어질 때에는 ‘헤어지는’ 시를 씁니다. 눈물을 흘리는 날에는 ‘눈물 흘리는’ 시를 씁니다. 공항에 머물 적에는 ‘공항에 머물던’ 시를 써요.


  더 좋은 삶이란 없고 더 나쁜 삶이란 없습니다. 스스로 즐기는 삶일 뿐입니다. 스스로 즐기는 삶이 스스로 즐기는 시로 태어납니다.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리기에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리는 시를 쓰겠지요. 그리운 누군가를 잊기에 ‘그리운 누군가’를 잊는 시를 쓰겠지요.


  나는 고즈넉한 시골마을에서 두 아이랑 복닥이면서 요모조모 살림을 꾸립니다. 곧, 내가 시를 쓸 적에는 고즈넉한 시골마을 삶을 드러내고, 두 아이랑 복닥이는 사랑을 드러내며, 요모조모 꾸리는 살림을 빛냅니다. 그래요, 나는 이 삶을 좋아하기에 이렇게 살아요.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삶을 마음껏 누리면서 내 웃음꽃을 이곳에서 길어올려요. 내가 바라는 꿈은 내가 좋아하는 삶터에서 누리는 이야기 그대로 이루어져요. 시를 쓰는 사람은 삶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4345.9.5.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들보라 사진기로 전화 하기

 


  사진기를 귀에 대고 전화를 하는 듯 논다. 그래, 이 사진기는 전화기하고 크기가 비슷해. 생김새도 비슷한가? 아무튼 네가 전화기라 여기면 전화기가 되겠지. 네 마음껏 하고픈 이야기를 종알종알 늘어놓아 보렴. (4345.9.5.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서울 기차표

 


  한가위 기차표를 집에서 인터넷을 켜고 끊으려 하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조치원에서 서울 가는’ 표는 다 팔리고 없다. 참 빠르구나 싶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로구나 싶다. 나는 고흥에서 길을 나서 순천부터 기차를 타고 조치원을 거쳐 음성에 닿은 다음, 음성에서 며칠 묵고 일산 옆지기 어버이한테 가자면 조치원을 거쳐 용산으로 가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으레 전라도 어느 시골에 있는 고향으로 간 다음 서울로 돌아갈 테지. 그러니까 한가위 기차표란,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울 아닌 곳으로 찾아가서 서울로 돌아오기 좋도록 마련하는 기차표라고 느낀다. 시골에서 시골 사이를 오가는 사람이 끊는 기차표는 아닐 테지. 모르는 노릇이지만, 순천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길이랑 조치원에서 순천으로 가는 길은 하나도 안 붐비리라 생각한다. 오늘날 사람들 움직이는 길하고는 엇갈리는 길이 되리라 생각한다. 즐겁게 살자. 즐겁게 마실하자.


  9월 2일 음성 할아버지 생일에 맞추어 여러 날 바깥마실을 하고는 일산 옆지기 어버이 댁에까지 들러 용산부터 순천까지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기찻간이 아주 널널해서 우리 식구는 여덟 자리를 누렸다. 두 아이는 저마다 두 자리에 드러누워 여러 시간 뻗어서 자고, 나랑 옆지기도 두 자리씩 맡아서 느긋하게 쉰다. 아이들 옷가지는 짐칸이랑 걸상받이에 걸쳐서 말린다. 여러 시간 뻗어 자는 아이들을 여러 시간 바라본 역무원은 “자녀 분들이 무척 고단한가 봐요.” 하고 빙긋 웃으며 이야기한다. 아이들은 먹고 마신 한 시간 남짓 팔팔하게 뛰다가, 세 시간 오십 분 동안 고요히 잤다. 아이들이 잠드니 아주 조용하며 호젓한 기찻길이 된다. (4345.9.5.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법·건널목·삶

 


  법이 있어 사람 스스로 이웃을 지키는가? 법이 없으면 서로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법이 있으나 서로를 보살피지 않고, 돈이 있으나 서로를 사랑하지 않으며, 지식이 있으나 서로를 일깨우지 않는다면, 이러한 나라는 얼마나 살기 좋거나 아름다운가?


  건널목이 있어야 할까? 신호등이 있어야 할까? 규칙이나 예절이 따로 있어야 하는가? 전라남도 고흥에는 읍내 고흥동초등학교 앞문 앞 네찻길에 건널목이랑 신호등이 하나 있다. 다른 데에는 따로 건널목이나 신호등이 없다. 자동차도 사람도 자전거도 따로 건널목이나 신호등 없이 서로 알맞게 오간다. 굳이 불빛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서로를 가만히 살피면서 알맞게 움직인다.


  한국사람이 많이 찾아가는 인도나 티벳이나 네팔에 건널목이나 신호등은 얼마나 있을까? 건널목과 신호등은 왜 있어야 할까? 사람을 생각해서 놓는 건널목이나 신호등일까? 사람을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건널목이나 신호등을 안 놓을까?


  법을 만드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일까? 참으로 사람을 생각하면서 법을 만들까?


  스스로 삶을 누리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인가? 스스로 삶을 누린다고 옳게 깨달으면서 삶을 지을 줄 아는가, 아니면 바람이 부는 대로 휩쓸리거나 끄달리면서 남들 눈치에 따라 삶을 흘려 보내는가?


  법은 사람을 지키지 않는다. 건널목은 사람을 지키지 않는다.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 제 삶을 지킨다. 사람은 언제나 스스로 제 삶을 짓는다.


  책은 길을 밝히지 않는다. 책을 읽는 사람이 스스로 길을 밝힌다. 책은 길을 보여주지 않는다. 책을 읽는 사람 스스로 길을 바라보면서 걷는다. 책은 길을 이끌지 않는다. 책을 읽는 사람 스스로 씩씩하게 제 삶을 찾아 제 길을 걸어간다. (4345.9.5.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지구에서 단 하나뿐인 하루들 - 리지앙에서 라다크까지 이어지는 시간
박정호 글.사진 / 플럼북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굳이 사진으로 안 찍어도 돼요
 [찾아 읽는 사진책 109] 박정호, 《지구에서 단 하나뿐인 하루들》(플럼북스,2009)

 


  사진을 찍는 까닭이 있다면, 굳이 사진으로 찍으면서 즐겁거나 좋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안 찍는 까닭이 있다면, 굳이 사진으로 찍지 않아도 즐겁거나 좋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아이들하고 살아가며 누리는 모든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들과 살아가며 누리는 숱한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이야기는 내 눈을 거치고 내 마음을 지나 내 사진으로 태어납니다. 내가 스스로 누리는 삶은 내 몸을 거치고 내 가슴을 지나 내 이야기로 거듭납니다. 사진으로 몇 장 찍어서 남기기에 한결 돋보이는 모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름답게 누리는 삶일 때에는 사진으로 찍거나 안 찍거나 언제나 아름답다 느낄 삶이에요. 사진으로 보기에 예쁘장하대서 ‘아름다울 내 삶’이 되지는 않아요. 사진으로 남기기에 오래오래 이어가는 ‘좋은 기록’이 되지는 않아요.


  사진을 찍는 까닭은 내 삶을 예쁘게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진을 찍는 까닭은 내 삶을 오래오래 남기고 싶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진으로 함께 찍으며 즐겁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과 함께 지내며 흐뭇하기에 사진기 단추를 꾸준하게 누릅니다.

  큰아이가 글씨 쓰기를 날마다 꾸준히 한 끝에 이제 아이 이름을 스스로 또박또박 적을 줄 압니다. 아이 스스로 아이 이름을 예쁘게 적고 나니 아이 손에는 연필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손에 연필을 쥐고, 어디에다가도 연필로 무언가를 끄적입니다. 아이는 손으로 빚는 꿈과 삶과 사랑을 느끼며 즐겁습니다.

 

 

 


  박정호 님 여행사진책 《지구에서 단 하나뿐인 하루들》(플럼북스,2009)을 읽습니다. 박정호 님은 지구별 곳곳을 오래도록 돌아다닙니다. 무엇을 보고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기에 이렇게 지구별 곳곳을 오래도록 돌아다니는지 궁금합니다. 예쁜 모습을 보고 싶을까요? 이제껏 안 알려진 모습을 보고 싶을까요? 오래된 삶을 오늘날까지 고이 잇는 모습을 보고 싶을까요? 스스로 삶을 아름답게 짓는 사람들 모습을 보고 싶을까요?


  박정호 님은 “하루 종일 자금성을 돌았지만 남는 건 입장권분. 고궁이 따분하다는 건 세계 어디나 똑같아(25쪽).” 하고 말합니다. 한국에서 경복궁을 거닐 때에도 똑같이 따분하다고 느낄까 궁금합니다. 가만히 보면, 누군가는 옛궁궐에서 아름다움을 읽으며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그리고, 박정호 님처럼 누군가는 옛궁궐에서 따분함을 읽으며 아무것도 사진으로 안 담아요. 옛궁궐을 짓도록 숱한 사람을 부리던 권력자들 삶과 넋에서도 아름다움을 읽는 사람이 있고, 옛궁궐을 으리으리하게 지으며 권력을 부리던 이들 삶과 넋에서는 아름다움 아닌 슬픔이나 어리석음을 읽는 사람이 있을 테지요. 중국 자금성이 돌로 지은 권력자 앞마당이 아니라 사람들 누구나 즐겁게 쉬거나 놀며 살아가는 숲이었다면, 권력자 아니고는 발을 디딜 수 없던 땅이 아니라, 사람과 풀과 나무와 짐승 모두 홀가분하게 드나드는 숲이었다면, 이때에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었을까요.


  박정호 님은 “좋은 산을 만나면 걸었다. 어디를 간다는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85쪽).” 하고 말합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대수롭지 않다 하지만 ‘좋은’ 산을 따로 살핍니다. 그러면, 박정호 님한테 ‘좋은’ 산은 어떤 산이 될까요. 어떻게 이루어진 숲이 있을 때에, 어떤 사람들이 깃들어 살아갈 때에, 어떤 나무가 자라고 어떤 새가 살며 어떤 해와 달이 뜰 적에 ‘좋은’ 산이라 가리킬 만할까요.

 

 


  어디를 가더라도 대수롭지 않다면, 굳이 나라밖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한국땅 곳곳을 누벼도 좋습니다. 섬을 돌고 멧자락을 돌아도 좋습니다. 도시를 돌고 시골을 돌아도 좋아요. 아파트 사이를 걷거나 골목길을 걸어도 좋아요. 저잣거리나 장마당을 찾아다닐 수 있어요. 구멍가게나 막걸리집을 찾아다닐 수 있어요. 예쁜 밭이나 우람한 나무를 만나러 다닐 수 있겠지요.


  꼭 ‘이름난’ 산을 찾아가야 하지 않아요. 꼭 ‘세계 오지’를 찾아가야 하지 않아요. 나한테 ‘느끼는 가슴’이 있으면 어디를 가더라도 느껴요. 나한테 ‘생각하는 눈’이 있으면 어느 곳을 돌아다니더라도 생각이 샘솟아요.


  박정호 님은 “잘 모르니까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니까 주절주절 말이 길어지는 것이다. 사진도 말과 같다. 이해하지 못한 것은 찍히지도 않는다(243쪽).”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다른 여행사진을 일컫는 말이 될 수 있지만, 박정호 님 사진을 스스로 밝히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박정호 님은 왜 사진을 찍을까요? 박정호 님은 왜 여행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을까요? 박정호 님은 왜 여행을 다니면서 찍은 사진에 이런저런 말을 붙일까요? 박정호 님은 왜 여행을 다니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쓰면서 이렇게 책까지 내놓을 생각을 할까요?


  《지구에서 단 하나뿐인 하루들》은 어떤 사진책이라 해야 좋을까 헤아려 봅니다. 어떤 삶을 밝히고, 어떤 삶을 사랑하며, 어떤 사람을 들려주려는 사진책이라 해야 좋을까 가누어 봅니다. 박정호 님은 “누구나 라다크에 오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눈빛이 참 맑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이 어린 동자승이나 나이 지긋한 노승이나 그들은 모두 같은 눈빛을 가졌습니다(326쪽).” 하고 말합니다. 곧 ‘맑은 눈빛’을 찾아 지구별을 여행하려는 뜻이요, 맑은 눈빛을 사진으로 곱게 담아서 사람들한테 맑은 숨결을 북돋우고 싶은 꿈이 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이도 어른도 맑은 눈빛으로 살아갈 때에 가장 아름답다는 말을 하고 싶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진도 글도 맑은 눈빛으로 이야기 한 자락 펼칠 때에 더없이 빛난다는 뜻을 드러내고 싶을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내가 언제나 마주하면서 언제나 사진으로 담는 내 살붙이들 삶을 떠올리며 사진을 헤아립니다. 내가 우리 아이들을 사진으로 찍는대서 ‘이야기가 남지’는 않습니다. 사진을 안 찍더라도 고즈넉하게 바라보는 애틋한 눈길일 때에 이야기가 남습니다. 내가 우리들이랑 부대끼는 하루를 글로 적는대서 ‘이야기를 되새길’ 수 있지는 않습니다. 하루하루 고마우며 기쁜 나날인 줄 느끼거나 깨달으며 활짝 웃을 때에 비로소 새삼스러운 사랑이 샘솟고 아리따운 이야기가 펼쳐진다고 느낍니다.


  내 마음에 담습니다. 내 마음으로 읽습니다. 여기에서 살아가고 저기로 흐릅니다. 늘 같은 사람입니다. 서로 같은 사람입니다. 늘 같은 사랑입니다. 서로 같은 사랑입니다.


  저마다 다 다른 마을에서 저마다 다 같은 숨을 쉬면서 살아가는 예쁜 목숨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빛을 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가슴속에서 빛을 키웁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빛이 되어 사랑을 나눕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은 ‘그저 찍을’ 뿐입니다. 사랑스레 살아가면서 어느 날 문득 슬그머니 사진을 그저 찍을 뿐입니다. 멋진 모습을 따로 기다리지 않습니다. ‘이거다!’ 할 때에 놓치지 않고 찍지 않습니다. 그저 찍을 뿐입니다. 활짝 웃으면서 찍습니다. 싱그러이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저절로 찍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내 꿈이 참말 아름답다고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4345.9.5.물.ㅎㄲㅅㄱ)

 


― 지구에서 단 하나뿐인 하루들 (박정호 글·사진,플럼북스 펴냄,2009.5.10./148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