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린네 7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나한테 돌아오는 말
 [만화책 즐겨읽기 182] 다카하시 루미코, 《경계의 린네 (7)》

 


  누구나 밥을 먹은 대로 똥을 눕니다. 누구나 밥을 먹는 만큼, 누구나 목숨을 먹습니다. 내가 받는 밥상은 내가 받아들일 목숨입니다. 내가 차리는 밥상은 내가 다루는 목숨입니다.


  내가 푸른 목숨을 밥으로 삼아 먹으면, 나는 푸른 빛깔과 내음 짙은 똥을 눕니다. 내가 가공식품을 밥으로 삼아 먹으면, 나는 가공식품 빛깔과 내음 짙은 똥을 눕니다. 똥내음이 고약하다면 고약하구나 싶은 밥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똥내음이 구수하다면 구수하구나 싶은 밥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푸른 바람을 쐬면서 푸른 숨결을 마시는 사람은, 온몸을 돌고 돈 푸른 바람이 푸른 숨결 되어 밖으로 나옵니다. 숲은 사람한테 푸른 숨을 베풀고, 사람은 숲한테 푸른 숨을 돌려주어요. 서로서로 애틋한 사이요 삶이며 이웃입니다.


  내가 마시는 물 또한 목숨입니다. 내가 마시는 물 그대로 내가 누는 오줌이 되고, 내가 누는 오줌이 땅으로 스며들고 바다로 흘러들어 다시금 내가 마시는 물이 돼요. 빗물이 내 몸으로 스며듭니다. 오줌이 흙을 거치고 바다를 거쳐 빗물로 됩니다. 하늘을 흐르는 구름은 내 몸이 바뀌어 이루어진 모습이요, 내 몸은 하늘을 흐르는 구름이 스며들어 이루어진 모습입니다.


- ‘그동안 로쿠도는 한 번도, 나츠미와 데이트할 때처럼 즐거운 얼굴은,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건 영업용 미소야.” ‘그렇구나.’ “로쿠도, 혹시 지금 즐겁니?” ‘즐겁다.’ (41∼42쪽)
- “단념하고 성불했구나.” “좀 안 됐긴 하네. 가장 상처 안 줄 만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서 했지만.” (60쪽)


  내 모습이 내 아이 모습으로 스며듭니다. 아이들 모습이 어른들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사회에서는 으레 청소년 범죄라느니 청소년 문제라느니 떠드는데, 청소년이 저지르는 범죄나 일으키는 문제는 없어요. 모두 어른들이 저지르는 잘못이요 어른들이 일으키는 말썽입니다. 어른들 슬프거나 얄궂거나 못난 모습이 ‘아이들이라 하는 거울’에 비추어 나타나는 셈입니다.


  곧, 아이들 눈망울이 맑고 환하다면, 어른들 또한 눈망울이 맑고 환하다는 뜻이에요. 아이들과 함께 어른들 누구나 맑고 환한 눈망울로 살아가고 싶은 꿈이라는 뜻이에요. 비록 어른들이 흐리멍덩한 눈망울이 되고 말았다 하더라도, 어른들 가슴 한켠에는 맑고 환한 눈망울을 바라는 꿈이 있다는 뜻이에요.


  아침에 물을 마시고, 낮에 물을 마시며, 저녁에 물을 마십니다. 물을 마시기 앞서 물병을 들여다봅니다. 물병에 담긴 물을 바라봅니다. 너는 그예 물이면서 사랑일 테지. 너는 그예 물이면서 사랑이요 내 몸일 테지. 내 몸은 사랑이면서 숨결이고 푸른 빛살이라면, 내 몸을 거치고, 내 몸을 이루며,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들 또한 사랑이요 숨결이며 푸른 빛살이 될 테지.


  생각하는 대로 물방울이 결을 이룹니다. 생각하는 대로 물방울이 내 몸으로 스며듭니다. 씩씩하고 튼튼하게 하루를 맞이하면서 누리자 하고 생각할 때에는, 물방울 결이 곱고 정갈한 무늬를 이룹니다. 내 몸은 새로 받아들이는 물방울 결에 따라 한결 씩씩하고 튼튼한 몸을 이룹니다. 스스로 삶을 빚습니다.

 

 

 


- “생각해 보면 딱한 놈들이야.” “로쿠도.” “린네 님 멋지셔.” “예, 반성하고 있어요.” “저, 사과의 표시라기엔 모자랄지 몰라도, 1000엔 드릴 테니 용서해 주세요.” “옛! 정말이십니까, 도련님들!” “린네 님, 볼썽사나워요.” (116쪽)
- “아무리 제령 때문이라지만, 처음으로 로쿠도가 내 방에 들어오는 거니까.” ‘그보다, 남자애가 내 방에 오는 것도 처음이네.’ (125쪽)


  시골에 깃든다 하더라도 누군가한테는 들새나 멧새 노랫소리가 안 들린다고 합니다. 누군가한테는 풀벌레 노랫소리나 개구리 노랫소리 또한 안 들린다고 합니다. 누군가한테는 아이들 울음소리가 안 들리기도 합니다. 누군가한테는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텔레비전 켜진 소리가 들리겠지요. 어떻게 살아가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귓결을 스치는 소리가 달라요. 어떻게 사랑하고 꿈꾸느냐에 따라, 귓속으로 파고드는 소리가 달라요.


  잠자리에 드러누워 아이들을 토닥이다가 손을 가만히 둡니다. 내 손바닥을 거쳐 내 숨소리가 아이들한테 옮습니다. 내 손바닥을 거쳐 아이들 숨소리가 나한테 옮습니다. 아이들 가슴이 콩콩 뛰는 소리를 듣습니다. 내 가슴이 콩콩 뛰는 소리를 듣습니다.


  손바닥을 거치는 소리만 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손바닥을 거쳐 두 사람 마음이 흐릅니다. 내가 곱게 품는 마음일 때에는 고운 숨결이 손바닥을 거쳐 이어집니다. 내가 밉게 품는 마음일 때에는 미운 숨결이 손바닥을 거쳐 이어집니다.


  하늘이 푸르구나, 들판이 누렇구나, 생각하고 말할 적에, 하늘은 한결 푸르게 빛나고 들판은 더욱 누렇게 무르익습니다. 아이들을 바라보며 예쁘구나, 사랑스럽구나, 생각하고 말할 적에, 아이들은 한결 예쁘고 더욱 사랑스레 빛납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생각하고 마주할 적에도 고운 마음이요 따순 생각일 수 있어야지 싶어요. 내가 나를 사랑할 때에 살붙이와 이웃을 사랑하겠지요. 내가 나를 아낄 때에 둘레 동무를 아끼겠지요.


  즐거이 노래하며 부엌칼 쥔다면 즐거운 노랫결이 밥과 반찬과 국에 스며듭니다. 따분하거나 지겹다는 마음이 되어 부엌칼 쥔다면 따분하거나 지겹다는 어두움이 밥과 반찬과 국에 스며들어요.


- “저승에 가서 다시 샘플 받아다 줄게.” “응.” … “제령 모래시계? 아아, 그거 말이지? 웬일로 평이 좋아서 이달부터 상품화됐단다.” “엥?” “자, 2만 엔.” … “고마워, 로쿠도. 정말 듬직하다니까.” “기뻐하는 거냐, 마미야 사쿠라.” “생돈 주고 샀다고는 죽어도 말 못하네요.” (152쪽)


  다카하시 루미코 님 만화책 《경계의 린네》(학산문화사,2012) 일곱째 권을 읽습니다. 《경계의 린네》 일곱째 권에서는 ‘나한테 돌아오는 말’을 다룹니다. 이른바, ‘저주’가 되든 ‘사랑’이 되든 언제나 나한테 돌아와요. 무엇을 바라거나 생각하든, 내가 내놓는 말은 늘 나한테 내놓는 말이 돼요.


  어느 한 사람을 콕 집어 ‘너 참 미워!’ 하고 말한다면, 바로 ‘나란 놈 참 미워!’ 하고 말하는 셈입니다. ‘저 녀석 왜 저러지!’ 하고 생각한다면, 바로 ‘나란 놈 왜 그러지!’ 하고 생각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나를 북돋우거나 살찌우고자 남한테 듣기 좋은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듣기 좋게 하는 말은 겉치레일 뿐이기에, 남도 나도 살찌우지 못해요. 겉발림으로 읊는 말은 남도 나도 사랑하지 못해요.


- “그래, 저주를 걸 경우,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어. 저주란 원래 이루어지더라도 반드시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지. 이모토는 그게 그림자 모양으로 나타난 거야.” (162쪽)
- ‘사랑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저주는 효력을 잃었습니다.’ “무서운 아이템이구나.” “통판 하는 물건도 1000개에 하나쯤은 진짜가 섞여 있곤 하거든요.” (188쪽)


  고운 말이든 미운 말이든 누구나 환하게 알아챕니다. 입으로 꺼내어 말해도 알아채고, 입밖으로 안 꺼내어도 알아채요. 말을 해야 안다고들 말하지만, 말을 안 해도 알 것은 다 알기 마련이에요.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 하는 마음은, 그네들끼리 못 알아챈다 하더라도 둘레에서 뻔히 알아채요. 말을 안 해도 알아채요. 누가 누구를 꺼린다 하는 모습은, 그네들끼리 못 느낀다 하더라도 둘레에서 똑똑히 알아채요. 말이 없어도 알아채요.


  말이란 무엇일까요. 말은 어떤 몫을 할까요. 우리들은 말 한 마디에 무엇을 담을까요. 우리들이 주고받는 말은 어떤 빛이나 무늬나 결이 될까요.


  나한테 돌아오기 때문에 예쁘게 꾸미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한테 돌아오는 말인 줄 또렷이 헤아리면서, 나와 이웃을 고루 사랑하고 아끼는 길을 생각하자는 뜻입니다. 논밭에 풀약을 치면, 뻔히 이 풀약을 내가 먹겠지요. 자가용을 몰며 돌아다니면 자가용 배기가스가 뻔히 내 입을 거쳐 들어오겠지요. 핵발전소이든 화력발전소이든 자꾸자꾸 지으려 하면, 우리 삶터를 우리 스스로 망가뜨리는 꼴이 되겠지요.


  ‘발전’이란 없어요. 숫자놀음이에요. 숫자가 올라가는 일은 그저 ‘숫자놀음’이지 발전도 발돋움도 아니에요. 참말 발돋움을 꿈꾸고 싶다면, 날마다 새로 맞이하는 하루를 새로운 몸가짐으로 기쁘며 예쁘게 맞아들여 사랑으로 누리는 길을 헤아려 보셔요. (4345.10.3.물.ㅎㄲㅅㄱ)

 


― 경계의 린네 7 (다카하시 루미코 글·그림,서현아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0.6.25./45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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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찍기놀이 어린이

 


  마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 순천 기차역에서 2000원 넣고 돌리는 뽑기에서 ‘뽀로로 도장 꾸러미’가 나온다. 그런데 도장만 있고 인주가 없다. 읍내로 와서 문방구에서 도장놀이 꾸러미를 더 장만한다. 집에 닿은 아이들은 고단할 텐데, 끝없이 더 놀려 한다. 땀내음 물씬 밴 한복을 굳이 더 입겠다고 하는 큰아이는 덥다며 저고리는 벗고 치마만 입은 채 찍기놀이에 빠진다. 밤은 깊어 열두 시가 넘는다. 작은아이는 곯아떨어지고, 큰아이는 아직 멀쩡하다. (4345.10.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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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들보라 군내버스 불러

 


  마실을 나가는 군내버스 들어온다. 어머니 등에 업힌 산들보라가 버스를 바라보며 손을 든다. 저기, 저기, 버스 와, 하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 저기 버스야. 저 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가지. 산들보라도 사름벼리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저 버스를 타고 시골을 한 바퀴 휭 돌지. (4345.10.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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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씩씩한 아이들

 


  마실 가는 길에 큰아이더러 마을 어귀 샘가에서 낯을 씻으라고 이야기한다. 큰아이는 “네!” 하고 씩씩하게 외치며 달린다. 곧이어 작은아이가 큰아이 뒤를 따른다. 두 시간에 한 차례 지나가는 군내버스도 뜸하지만, 여느 때 여느 자동차도 거의 지날 일 없어, 마을 어귀 앞 찻길이 그리 걱정스럽지 않다. 큰아이 작은아이 모두 시골마을 시골집에서는 누구보다 씩씩하고 튼튼하다. 자동차를 근심하거나 살필 일이 없으니 씩씩할 수 있다. 아이들이 거리껴 하거나 두렵게 여길 걸림돌이 없으니 튼튼할 수 있다.


  아이들이 살아가기에 마땅한 터라면 어른들 또한 오순도순 즐겁게 살아가기에 마땅한 터가 된다고 느낀다.


  곰곰이 돌아본다. 나한테 아이들이 찾아오기 앞서도 이 같은 대목을 알았을까. 나 혼자 살아가던 때에도 이러한 대목을 슬기롭게 헤아렸을까. 아이들이 나한테 찾아오면서 조금 더 깊이 돌아보거나 한결 넓게 생각할 수 있을까. 모두 아는 이야기였으나 오래도록 잠들었을 뿐일까. 무엇을 알 때에 참으로 기쁜 앎이요, 무엇을 헤아릴 때에 더없이 사랑스러운 생각이라 할 만할까.


  찻길이 생긴 지 얼마 안 된다. 자동차가 드넓은 찻길을 씽씽 달린 지 얼마 안 된다.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갈 뿐이었지, 자동차에 기대거나 길들여진 목숨이 아니었다. 사람들 누구나 씩씩한 다리로 씩씩한 삶을 꾸렸다. 사람들 모두 튼튼한 몸으로 튼튼한 마음을 아꼈다.


  씩씩한 아이들이듯 씩씩한 어버이로 살아가는 길을 생각한다. 나 또한 튼튼한 몸과 마음이 되어 하루를 누리자고 생각한다. 아이들아, 마음껏 뛰렴. 나도 너희하고 나란히 마음껏 뛰며 살아갈게. (4345.10.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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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43) 발견의 1 : 발견의 예술

 

사진은 발견의 예술이다. 그렇다면 사진을 통해서 무얼 발견할까
《임동숙-사진일기, 날마다 나를 찾아가는 길》(포토넷,2012) 41쪽

 

  “사진을 통(通)해서”는 “사진으로”나 “사진을 보면서”로 손질해 줍니다. 한자말 ‘발견(發見)’은 “미처 찾아내지 못하였거나 아직 알려지지 아니한 사물이나 현상, 사실 따위를 찾아냄”을 뜻한다 합니다. 곧, “사진을 통해서 무얼 발견할까”는 “사진으로 무엇을 찾아낼까”로 손질하면 되고, “사진을 보면서 무엇을 찾을까”로 손질할 수 있어요.

 

 사진은 발견의 예술이다
→ 사진은 찾아내는 예술이다
→ 사진은 새로보는 예술이다
→ 사진은 새롭게 찾는 예술이다
 …

 

  말뜻을 헤아리면, 한국말은 ‘찾아내다’이고 한자말은 ‘發見’입니다. 한국사람은 ‘찾아내다’라 이야기하며, 한자를 쓰는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은 ‘發見’이라 이야기하는 셈이에요. ‘發見’을 소리값 ‘발견’이라 적는대서 한국말이 되지 않아요. 요즈음은 ‘사진’을 ‘포토’라든지 ‘photo’라 적는 이가 많고, ‘사진관’도 ‘스튜디오’나 ‘studio’로 적는 이가 많은데, ‘포토’나 ‘photo’는 한국말이 아니에요. ‘스튜디오’나 ‘studio’도 한국말이 아니에요.


  생각을 기울여 ‘사진관’을 ‘사진집’이나 ‘사진가게’로 새롭게 적을 수 있어요. ‘사진마당’이나 ‘사진터’나 ‘사진누리’처럼 적어도 어울려요.


  새롭게 바라보는 눈길을 틔우면 됩니다. 새롭게 느끼는 가슴을 열면 됩니다. 새롭게 생각하는 마음을 추스르면 돼요.


  인터넷을 할 때에 어느 글쇠를 누르면 ‘새로고침’을 합니다. 예전에 어떤 영어로 이 말마디를 나타냈는지 모르겠으나, 이제 누구나 ‘새로고침’이라고 말해요. 2012년까지 아직 국어사전에 이 낱말이 안 실렸으나, 어엿하고 떳떳하며 씩씩하게 쓰는 예쁜 한국말이에요.


  ‘새로고침’을 발판 삼아 새롭게 다른 낱말을 헤아립니다. 새롭게 바라본다 할 때에는 ‘새로보기’나 ‘새로보다’를 헤아립니다. 새롭게 알아보려 할 때에는 ‘새로알기’나 ‘새로알다’를 헤아립니다. 새롭게 읽는다 할 때에는 책이나 글이나 사회나 흐름을 ‘새로읽기’나 ‘새로읽다’로 헤아립니다.

 

 발견의 즐거움 → 새로찾는 즐거움 / 새로보는 즐거움
 발견의 순간 → 새로찾는 때 / 새로보는 그때

 

  ‘새로쓰기’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새로맺기’라든지 ‘새로살기’나 ‘새로가기’나 ‘새로걷기’처럼, 숱한 새말이 하나둘 태어날 수 있습니다. ‘새로사랑’이나 ‘새로믿음’이나 ‘새로꿈’이나 ‘새로마음’처럼 적어도 돼요. 스스로 새 뜻과 넋과 이야기를 담으면 돼요. 보기글도 이러한 흐름을 살펴 “사진은 새로보는 예술이다. 그렇다면 사진으로 무엇을 새로볼까.”처럼 다시 적어도 되겠지요. (4345.10.3.물.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사진은 새롭게 보는 예술이다. 그렇다면 사진으로 무얼 새롭게 볼까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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