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생활 (시골과 도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놀이공원에 가거나 찻집에 들르거나 옷집에서 구경하는 일이 ‘문화생활’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이러저러한 ‘돈 쓰는 일’이 문화생활이라고 합니다. 참 마땅한 노릇이리라 느낍니다. 돈을 쓰기에 ‘문화생활’입니다. 그래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문화생활을 누리려고 애씁니다.


  흙을 만지거나 숲바람을 느끼거나 냇물을 마시거나 풀을 뜯거나 나무한테서 열매를 얻는 일은 ‘삶’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이러저러한 ‘하루를 일구는 이야기’는 먼먼 옛날부터 누구한테나 삶이었습니다. 더없이 마땅하다고 느낍니다. 하루를 일구며 온갖 이야기를 길어올리기에 삶입니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삶을 누립니다.


  시골 살던 사람이 도시로 나아가는 까닭은 삶보다 문화생활을 가까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푸름이로 지내며 중·고등학생 때에 도시를 그리다가, 고등학교를 마치거나 대학교로 가면서 도시로 가는 까닭은 삶과 견주어 문화생활이 재미있거나 즐거우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부터 삶을 누리지 못했거나 삶하고는 동떨어진 채 도시 아이들과 똑같이 시험공부만 했기 때문이에요. 틈틈이 삶을 누리며 하루를 빚지 못하면서, 꾸준히 문화생활을 즐기려고 도시로 나들이를 다녔기 때문이에요.


  거꾸로, 도시 살던 사람이 시골로 나아가는 까닭은 문화생활보다 삶을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는 동안 문화생활이 이녁 넋이나 얼을 살찌우거나 북돋운다고는 느끼지 못하고, 바로 삶을 누려야 이녁 넋이나 얼을 살찌우거나 북돋우는구나 하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시험공부만 하는 중·고등학교 나날이 고단합니다. 삶을 등진 채 시멘트 건물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교과서와 문제집만 파고들어야 하잖아요. 풀 한 포기 자라는 아주 작은 틈에서 빛을 느끼고, 꽃 한 송이 피어나는 풀섶에서 빛을 깨달으며, 나무 한 그루 서는 흙땅에서 빛을 찾아요. 돈을 벌어 돈을 쓰는 굴레 아니라, 삶을 일구며 삶을 짓는 꿈을 마음껏 누리고 싶어 도시를 떠나 시골로 들어서요.


  그런데, 도시를 떠나 시골로 와서 살아가고 보니, 책도 영화도 한껏 느긋하게 즐깁니다. 외려 도시에서 살 적에는 책도 영화도 그닥 느긋하게 못 즐겼구나 싶습니다. 도시에서는 집삯을 벌고 무슨무슨 돈을 버느라 한결 빡빡하고 바쁘며 얽매여요. 보드라운 바람소리나 상긋한 풀벌레 노래나 해맑은 들새 노래를 듣지 못하는 도시예요. 자동차 오가는 소리로 시끄러운 데에서는 책도 영화도 살살 녹아들기 힘들어요. 시골에서 흙을 더 자주 더 오래 만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늘 흙 곁에서 흙내음을 맡아요. 흙내음 풍기는 햇볕을 실컷 느끼며 책을 읽고, 종이책을 안 읽어도 나무와 풀과 꽃과 멧자락과 들과 냇물에서 ‘삶을 이야기하는 숨결 같은 책’을 읽어요.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다르다지만, 창호종이문 바깥으로 흐르는 바람을 느끼며 컴퓨터로 영화를 볼 수 있어요. 밤하늘 별무리를 등에 지고 영화 보는 맛은 극장에서 뻑뻑한 숨을 참으며 영화 보는 맛하고 새삼스레 달라요.


  놀이공원이란 무엇일까요. 기계에 몸을 맡기어 움직여야 놀이가 될까 궁금해요. 내 몸을 내가 써서 움직이고, 내 팔다리를 나 스스로 움직이는 하루하루가 일이면서 삶이고 놀이가 되리라 느껴요. 바다가 놀이터예요. 골짜기가 놀이터예요. 들판과 논둑과 밭둑이 놀이터예요. 마당이 놀이터예요. 마루와 부엌이 놀이터예요. 어느 곳이나 놀이터이면서 일터예요. 그리고, 삶터예요. (4345.10.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색깔을 부르는 아이 풀빛 그림 아이 25
디터 콘제크 글 그림, 김경연 옮김 / 풀빛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사랑을 불러 서로 누리는 삶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00] 디터 콘제크, 《색깔을 부르는 아이》(풀빛,2002)

 


  새벽에 살짝 빗방울 듣던 하늘인데, 낮을 지나며 구름이 살그마니 걷히며 해가 듭니다. 하루에도 날씨는 수없이 바뀌는구나 싶으면서, 한가을로 접어든 뒤 빗방울 한 차례 안 들으니 새삼스레 고맙습니다. 우리 식구한테는 아직 땅이 없이 논일도 밭일도 따로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식구 깃든 시골마을에서는 모두 논일이랑 밭일로 부산해요. 나락을 베어 말리고, 나락을 벤 빈논에 거름을 내어 마늘 심을 채비를 합니다. 하루쯤 말린대서 다 마르는 나락이 아니에요. 콩을 털어 말릴 때에도 하루이틀만 말리지 않아요. 퍽 여러 날 바싹바싹 말려요. 나락을 말릴 때에는 길 한켠에 길게 펼치고는 틈틈이 섞습니다. 아래에 있는 나락과 위에 있는 나락에 골고루 말라야 할 테니까요. 부지깽이도 가을일 거든다는 말이 떠오르는 시골마을이에요. 그런데 이런 가을 시골에서 들일을 하는 사람은 거의 모두 할머니와 할아버지뿐입니다.


  빗방울이 들지 않기에 나락을 말리기에 알맞습니다. 바람은 우수수 소리를 내며 풀잎과 나뭇가지와 볏포기 흔들리는 노래를 들려줍니다. 바람결 따라 이웃마을 논배미 무르익는 내음이 찾아듭니다. 또한, 우리 마을 논배미 무르익는 내음이 바람에 실려 이웃마을로 찾아가요.


  구름이 걷히다가 퍽 엷게 드리웁니다. 구름이 엷다 보니 가을햇살은 온 들판과 마을을 하얗게 비춥니다. 언뜻선뜻 노란 기운이 서린 햇볕이 아닌 마알간 흰빛으로 눈부십니다.


  가을이기에 이 같은 하늘빛과 햇빛을 누릴 수 있을까. 내가 도시에서 내처 살았을 때에도 이 같은 하늘빛과 햇빛을 느낄 수 있을까. 옆지기와 내가 아이들 어버이로서 시골로 삶터를 옮겨 살아가니, 어버이부터 이 빛을 느끼고, 우리 아이들도 이 빛을 느끼도록 하는 셈 아닐까.


  이래저래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저 하늘 저 구름한테는 어떤 이름을 붙이면 어울릴까 헤아립니다. 이 고운 빛살은 우리 시골마을에만 내리쬘는지, 이웃 시골마을에도 내리쬘는지, 또 이웃 도시나 이 나라 커다란 도시에도 내리쬘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저 구름은 우리 마을 머리 위로만 지나가며 흩뿌리는 빛살이 될 수 있겠지요. 다른 마을이나 도시에서는 다른 구름이 드리우면서 다른 빛쌀을 흩뿌릴 수 있겠지요.


.. 소년 마법사 빈센트는 마법이 전혀 재미가 없었어요. 어떤 마법도 잘 되지 않는 거예요. 하지만 다른 소년들은 마법을 아주 잘 부렸어요. 마술 지팡이를 들면 쥐가 갑자기 코끼리처럼 커지기도 하고, 물이 돌처럼 딱딱해지기도 했어요. 빈센트는 차라리 호숫가에 앉아, 물고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헤엄치는 모습을 쳐다보는 것이 더 좋았어요. 빈센트는 딱딱해지지 않은 부드럽고 시원한 물이 좋았고, 코끼리처럼 커져 버린 쥐는 조금 무서웠어요 ..  (6쪽)


  환한 빛살은 마당을 거쳐 집안으로 스밉니다. 칭얼대던 작은아이를 살살 달래 재운 방안으로도 빛살이 환하게 스밉니다. 작은아이는 어릴 적부터 낮잠 자는 버릇을 잘 들였기 때문인지 낮에는 어김없이 낮잠을 잡니다. 큰아이는 어릴 적부터 낮잠을 못 자 버릇했기 때문인지 낮에 낮잠 자는 일이 아주 드뭅니다. 고개 까딱 않고 달게 자는 작은아이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이 아이가 먹을 밥이란 사랑이 담긴 밥일 때에 맛나고, 이 아이가 누릴 놀이란 사랑이 서린 놀이일 때에 신나겠지요. 어버이인 내가 아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랑이 듬뿍 배인 말일 때에 반갑기 마련이에요.


  자장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다스립니다. 아이한테만 고운 목소리로 불러 줄 자장노래가 아니라고 느껴요. 부르는 어버이 스스로 참 곱구나 하고 느끼며 즐길 수 있는 노래여야지 싶어요.


  그러니까, 어버이 스스로 좋아하고 즐기면서 자장노래를 부를 때에 아이 또한 좋아하면서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어버이 스스로 맛나게 먹으며 즐기는 밥일 때에 아이 또한 맛나게 먹으며 즐기는 밥이 되겠지요.


  들길을 걷든, 자전거수레에 아이들 태워 달리든, 언제나 같아요. 즐겁게 걷고 즐겁게 달릴 노릇이에요. 웃으며 걷고, 웃으며 달릴 노릇이에요.


  설거지를 하고 비질을 하며 빨래를 합니다. 낯을 찡그리면서 설거지를 하면 스스로 서운하고 슬프며 고단합니다. 이맛살 찌푸리며 비질을 하거나 빨래를 하면 스스로 골이 나고 아프며 힘겹습니다.
  밥을 먹는 뜻이 있어요. 하루에 두 끼이든 세 끼이든 네 끼이든, 때에 맞추어 밥을 먹는 뜻이 있어요. 잠을 자는 뜻이 있어요. 손발톱을 깎고 머리카락을 빗으며 기지개를 켜는 뜻이 있어요.


  삶을 누리며 즐겁거든요. 삶을 즐기며 빛나거든요. 삶을 빛내며 사랑이 태어나거든요.

 

 


.. 곧, 휘파람을 불어 색깔 마법을 부리는 작은 새와 빈센트의 피리에 대한 소문이 온 나라에 퍼졌어요. 그러자 여기저기서 많은 새들이 노래를 배우러 왔고, 오래지 않아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허공을 가득 채웠어요 ..  (16∼18쪽)


  아침나절, 바깥에서 빗방울이 들을락 말락 할 무렵, 큰아이와 작은아이는 맨발로 마당에 서서 놀았어요. 마음대로 뛰놀던 큰아이는 문득 부엌에 대고 아버지한테 외칩니다. “아버지, 비 와요.” 비가 올 듯 말 듯하기에 부디 빨래가 다 마를 때까지 비가 안 와 주렴, 하고 빌었는데, 아주 살짝 빗방울이 조금 떨어집니다. 거의 다 마른 빨래에 빗방울 묻히기 싫어 서둘러 빨래를 걷습니다. 큰아이가 “내가, 내가 걷을래.” 하면서 부산을 떱니다. 빨래를 다 걷어 집으로 들인 다음 옷걸이에 꿰어 거는 동안, 큰아이는 마당에 세운 빨래대를 걷어서 집으로 들이겠다고 낑낑거립니다. 아이야, 그 빨래대는 그냥 마당에 두어도 돼. 큰아이는 접어서 낑낑 들던 빨래대를 도로 마당으로 가져가서 펼칩니다. 밥 먹자 할 적에는 자꾸 딴짓을 하고 한눈을 파는 아이가 또 이럴 적에는 이런저런 심부름을 스스로 알아서 합니다.


  바람은 불다가 멎습니다. 빗방울은 더 들지 않습니다. 먼지잼조차 아니구나 싶습니다. 거의 다 마른 빨래는 그대로 집안에 두고, 두꺼운 천이라 촉촉한 빨래는 바깥에 내놓습니다.


  구름결 따라 햇살은 반짝이다가 흐리다가 되풀이합니다. 아이는 맨발로 집안에서 놀다가 마당에서 놀다가 되풀이합니다. 따순 가을 날씨에 나무마다 일찌감치 새 잎이 돋습니다. 봄에 돋아야 할 잎일 텐데 늦가을 앞두고 벌써 읻이 돋습니다. 너희는 벌써 잎이 돋는 바람에 한겨울 추위를 견디어야겠구나. 그러나, 너희는 한겨울 추위를 견딜 마음으로 이 가을에 일찌감치 바깥으로 나온 셈일 테지. 너희가 한겨울 추위를 견디면서 아직 자그마한 눈으로 있는 다른 벗들한테 ‘아직 너희는 나오지 말아. 바깥은 모질게 춥구나.’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겠지.


.. 빈센트는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온 밤을 뜬눈으로 새웠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아침 일찍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하자마자, 색깔들이 다시 빛나기 시작하는 거였어요. 빈센트는 그 광경을 맨 처음 보았어요. “색깔들도 쉬어야 하나 봐. 어쩌면 그것도 좋은 일이야. 그렇지 않으면 색깔에 익숙해져, 언젠가는 색깔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할 테니까.” 작은 새가 가장 친한 친구 빈센트에게 말했어요 ..  (26∼27쪽)


  디터 콘제크 님 그림책 《색깔을 부르는 아이》(풀빛,2002)를 읽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 ‘빈센트’는 마법 부리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법을 즐기지 않고, 마법을 쓸 생각이 없습니다. 아이 빈센트는 숲을 숲 그대로 바라보고 싶어요. 냇물은 냇물 그대로 마주하고 싶어요. 나무와 물고기는 나무대로 물고기대로 이웃하고 싶어요.


  빈센트를 둘러싼 다른 아이들은 다른 어른들과 똑같이 마법을 익히느라 바쁩니다. 더 놀라운 마법을 부리려고 애씁니다. 더 대단한 마법을 부려 이름을 드날리려 합니다.


  아이 빈센트는 갈대 줄기를 피리 삼아서 붑니다. 갈대 줄기로 피리를 부는 소리가 차츰 무르익으면서 노랫소리로 거듭납니다. 아이 빈센트가 갈대피리를 익숙하게 불 수 있을 무렵, 작은 새가 아이 빈센트한테 찾아와서 동무가 됩니다. 둘은 서로 어여쁜 노랫소리를 빛내려 합니다. 서로서로 어여쁜 노랫소리를 빛낼 수 있을 무렵, 둘은 아름다운 노래를 다른 동무한테 스스럼없이 나누어 줍니다. 다만, ‘사람 동무’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나누어 받지 않아요. 오직 들새와 멧새와 풀벌레만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나누어 받아 더 널리 퍼뜨립니다.


  이리하여 가을날 아름다운 빛깔이 온누리에 퍼지겠지요. 겨울날에도 풀벌레가 마지막 노랫소리를 읊을 테고, 풀벌레가 흙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는, 바람이 노랫소리를 이어받아 싱싱 휭휭 읊을 테며, 이윽고 찾아오는 봄에는 새삼스레 온갖 새들과 벌레들이 갖가지 노래를 복닥복닥 읊을 테지요.


  사랑을 부릅니다. 사랑을 서로 누립니다. 사랑을 삶으로 빛냅니다. 하루는 아름답고, 오늘은 즐거이 웃을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4345.10.17.물.ㅎㄲㅅㄱ)

 


― 색깔을 부르는 아이 (디터 콘제크 글·그림,김경연 옮김,풀빛 펴냄,2002.1.10./9500원)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풀개구리는 얼마나 작은가

 


  풀개구리는 겨울나기를 어떻게 할까. 슬슬 추운 날이 가까이 찾아드는데, 풀개구리도 천천히 겨울잠을 헤아려야 하지 않나 싶다. 벌써 겨울잠 잔다며 땅을 파고 들어간 풀개구리가 있을까 모르겠는데, 바지런히 밥을 먹고 즐겁게 마지막 가을을 누리면서 저마다 깃들 흙터를 찾아야 할 테지.


  풀숲에서고 논둑길에서고 풀개구리가 톡톡 튀며 곁을 스친다. 내 곁을 스치며 지나가는 풀개구리는 무언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다. 쪼그려앉는다. 너는 나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니. 너는 나한테서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니.


  내 발 옆에 선 풀개구리는 아주 작다. 내가 발밑을 내려다보지 않고 걷는다면 오른발로 퍽 하고 밟아 찍 하고 죽일 수 있으리라 느낀다. 어쩌면, 풀개구리 하나 밟고도 밟아 죽인 줄 못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논둑길에서는 논둑에 떨어진 흙덩이 하나 밟았다고 여길 수 있으니까.

  경운기로도, 자동차로도, 또 자전거로도, 풀개구리 밟아서 죽인 느낌을 알아챌 수 있을까. 사람들은 풀개구리가 우리 이웃인 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풀개구리 살 터를 고이 건사하려는 마음으로 원자력발전소나 화력발전소나 송전탑이나 고속철도 땅굴이나 공장이나 골프장이나 이것저것을 거스를 수 있을까.


  풀개구리를 생각하며 책을 읽는다. 풀개구리를 꿈꾸며 글을 쓴다. 풀개구리를 사랑하며 오늘 하루를 누린다. (4345.10.1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카스피 2012-10-17 21:37   좋아요 0 | URL
ㅎㅎ 저 크기를 보니 올 여름에 제가 길른 올챙이기 풀 개구리였나 보네요^^

파란놀 2012-10-18 03:34   좋아요 0 | URL
집에서 올챙이 기르셨나 봐요?
아마 풀개구리는 올챙이일 때에도 아주아주 작지 않을까 싶어요.
 


 모든 책을 읽고 쓸 수 있는가

 


  교과서를 덮고 책을 처음으로 읽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92년부터 두 가지 다짐을 했다. 이제부터 내가 읽을 수 있는 모든 책을 읽어 보기로 하자는 다짐 하나. 여기에, 이제부터 내가 읽을 수 있는 모든 책을 읽고서, 내가 읽은 책마다 한 줄로든 백 줄로든 느낌글을 써 보자는 다짐 둘.


  나는 지구별 모든 책을 읽을 수 있을까. 어떤 통계나 숫자로 따진다면 아마 읽을 수 없다고 하리라. 그러나 내 마음을 살피고 내 뜻을 헤아린다면 모든 책을 읽을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런데 ‘모든 책을 다 읽는다’는 뜻을 돌아보면, 내가 온 땀과 품과 겨를을 들어 ‘종이에 찍혀 태어난 책’을 다 읽는 바로 이때에 새로운 책이 태어난다. 내가 잠든 사이, 또는 내가 숨을 거둔 뒤, 수많은 책이 새로 쏟아진다.


  어떤 사람한테든 뜻과 넋이 있으면 할 수 없는 일이 없다고 느낀다. 스스로 울타리를 세우고 틀을 짓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느낀다. 한자말로 ‘초인’이라는 이름은, 곧 ‘넘어선 사람’이라는 이름은, 스스로 아무런 허울도 울타리도 틀도 없는 사람한테 붙는다. 하늘을 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하늘을 난다. 물을 밟고 걸을 수 있다고 여기니 물을 밟고 걷는다. 곧, 지구별 모든 책을 누구나 다 읽을 수 있다. 주머니를 털어 책을 사야만 책을 읽지 않는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수 있고, 책방에 찾아가서 선 채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내 살림집 작은 방에 앉아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읽을 수 있다. 지구별 곳곳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가를 지긋이 헤아리면서, 숱한 사람들이 저마다 슬기를 빛내어 영글어 놓는 열매를 받아들일 수 있다.


  어떠한 책이든 다 읽을 수 있다고 깨달은 뒤, 그러면 이렇게 읽은 책 이야기를 느낌글로 낱낱이 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이때에 나는 스스로 틀을 지었다. 나 스스로 틀을 짓지 않았으면 아마 나 스스로 읽은 모든 책에 얽힌 이야기를 글로 썼겠지. 그러니까, 눈에 드러나는 글 숫자와 부피로만 살피면 이러한 글쓰기는 할 수 없다. 눈으로 드러내는 모양새 아닌, 삶으로 녹이는 글쓰기를 한다면, 누구나 어떠한 글이라도 쓸 수 있다.


  스스로 읽은 책에 얽힌 이야기를 쓰는 일이란, 바닷가에서 물결 출렁이는 소리를 쓰는 일하고 같다. 몸소 읽은 책마다 무엇을 느꼈는가 하고 돌아보며 쓰는 일이란, 멧등성이 너머로 날아가는 멧새가 우짖는 소리를 쓰는 일하고 같다. 가을바람에 살랑이는 억새풀 이야기를 쓸 수 있는가. 풀벌레가 밤낮으로 노래하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가. 누렇게 익는 나락빛 이야기를 쓸 수 있는가. 해맑게 웃는 아이들 놀이 이야기를 쓸 수 있는가.


  햇볕을 글로 쓰고, 흙빛을 글로 쓰며, 달빛을 글로 쓸 수 있을 때에, 스스로 어떤 이야기라도 글로 쓸 수 있다. 책 읽은 느낌이야 아무것 아닌 글쓰기가 된다. 독후감이나 논문이란 얼마나 손쉬운 글이요, 손쉬우면서 덧없는 글이 될까. 삶을 밝히려고 쓰는 글일 때에는 어떠한 글도 마음에서 우러나와 홀가분하게 쓸 수 있다. 삶을 밝히지 않거나 삶을 짓지 않는 글일 때에는 아무런 글도 사랑스럽게 쓸 수 없다.


  가만히 돌아보니,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적에 두 가지 다짐을 하고, 이 다짐을 곰곰이 아로새기면서 한 가지 다짐을 더 해서 세 가지 다짐을 했다. 마지막 셋째 다짐은, 읽고 느낀 모든 이야기를 삶으로 풀어내자 하고 다짐했다. 읽는 까닭과 쓰는 까닭은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살아가려는 마음이나 뜻이 없다면 읽을 까닭도 쓸 까닭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떤 삶을 빚거나 누려야 할까. 사랑하며 살아갈 나날이란 무엇이요, 꿈을 꾸며 착하게 다스릴 삶이란 무엇일까. 읽을 수 있는 책을 종이에서건 풀에서건 하늘에서건 찬찬히 읽으면서 생각한다. 내가 무언가 읽는 까닭은 스스로 어떠한 삶을 즐기고 싶기 때문인가 하고 돌아본다. 내가 무언가 쓰는 까닭은 스스로 어떠한 삶을 빛내고 싶기 때문인가 하고 되짚는다. 곧, 셋째 다짐인 ‘삶으로 녹이기’가 있을 때에 책읽기가 생겨나고 글쓰기가 일어난다. ‘삶으로 지내기’가 있어야 비로소 책도 글도 이 땅에 태어난다. (4345.10.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산들보라 국그릇

 


  어린 산들보라는 물잔이든 국그릇이든 혼자 쥐어 혼자 마시고 싶다. 옆에서 그릇이나 물잔을 들어 먹여 주면 안 흘리고 마실 수 있지만, 흘리거나 쏟더라도 제 손을 쓰고 싶다. 그저 기다리며 가만히 지켜보면 될 테지. 옷은 빨면 되고 몸은 씻기면 될 테지. 하루하루 팔힘과 다리힘과 몸힘이 붙을 테니, 지긋이 바라보며 씩씩하게 밥을 먹으라고 맡기면 될 테지. (4345.10.1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