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의 오월 이삭문고 1
윤정모 지음, 유승배 그림 / 산하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권력을 갖고 싶으면 가지라지요
 [푸른책과 함께 살기 100] 윤정모, 《누나의 오월》(산하,2005)

 


- 책이름 : 누나의 오월
- 글 : 윤정모
- 펴낸곳 : 산하 (2005.5.2.)
- 책값 : 7000원

 


  우리는 권력을 가질 마음 없어요. 우리는 우리 마을 우리 보금자리에서 사랑을 보살피고 사랑을 나누며 사랑으로 웃고 싶어요. 권력을 갖고 싶으면 가지라지요. 이름값을 갖고 싶으면 가지라지요. 무슨 대수인가요.


  나는 늘 바람을 마셔요. 골골샅샅 훑으며 저 먼 태평양 깊은 곳부터 불어서 우리 마을 숲을 지나 들판을 가로지르기도 하는 바람을 마셔요. 햇살 머금은 바람을 마셔요. 풀내음 듬뿍 밴 햇살을 먹어요. 구름이 내려보내는 맑은 빗물을 마셔요. 멧새와 풀벌레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어요.


  그런데, 나는 바람을 가지지 않아요. 햇살도 빗물도 풀내음도 노랫소리도 가지지 않아요. 바람은 누구한테나 바람이에요. 나도 마시고 이웃도 마시며 풀잎도 마셔요. 햇살은 누구한테나 햇살이에요. 온 고을 고루 내리쬐는 햇살이요, 시골뿐 아니라 도시로도 드리우는 햇살이에요.


  스스로 누리고 싶을 때에 누리는 바람이요 햇살이고 빗물이에요. 스스로 누리고 싶지 않으니까 누리지 못하는 바람이며 햇살이자 빗물이에요.


  생각해 보면, 손전화 기계는 없어도 돼요. 텔레비전을 왜 봐야 하나요. 신문을 굳이 읽을 까닭이 없어요. 인터넷은 안 켜도 돼요. 눈을 뜨고 바다를 바라봐요. 눈을 살며시 감고는 바람내음을 맡아요. 눈을 다시 뜨고 구름을 바라봐요. 다시 눈을 살며시 감고 햇살이 드리우며 나누어 주는 따순 기운을 온몸으로 느껴요.


.. 그 벌은 고문과도 같았다. 더욱이 우리는 로봇이 아니었다. 움직임이 생명인, 그러니까 10분만 움직이지 않아도 엉덩이에 곰팡이가 슬거나 이끼가 끼거나 땀띠가 돋아 버리는 딱 그 나이의 소년들이었다 ..  (11쪽)


  군대는 평화를 부르지 않아요. 군대는 전쟁을 불러요. 저쪽에서 군대를 만든대서 우리도 군대를 만들어야 평화를 지키지 않아요. 이쪽에서는 저쪽 때문에 군대를 만든다지만, 저쪽에서는 이쪽 때문에 군대를 만들어요. 북녘에 군대가 있으니까 남녘에 군대가 있어야 하지 않아요. 북녘에서는 남녘에 있는 군대를 탓하거든요. 서로서로 탓하면서 군대를 키워요. 서로서로 평화를 외치면서 정작 전쟁으로 나아가요.


  탱크가 평화를 지키는 적은 없어요. 잠수함이나 미사일이 평화를 이루는 적은 없어요. 평화는 낫과 호미와 쟁기가 지켜요. 평화는 따순 햇살 머금는 연필 한 자루가 지켜요. 평화는 맑은 바람 마시는 붓 한 자루가 지켜요. 평화는 바로 하늘처럼 넓고 바다처럼 깊은 사랑이 어린 손길로 어루만지는 손길로 빚어요.


  군인 아저씨도 군인 아줌마도 평화를 지켜 주지 않아요. 군인 아저씨도 군인 아줌마다 달삯쟁이 공무원이에요. 사내로 태어났기에 군대로 끌려간다면, 불쌍한 넋이에요. 군대로 끌려가서 살아남고 싶다며 똑같이 거친 말을 일삼거나 주먹을 휘두른다면, 똑같이 못난 전쟁질이에요.


  사랑은 사랑을 불러요. 주먹질은 주먹질을 불러요. 꿈은 꿈을 불러요. 돈쟁이는 돈쟁이를 불러요. 그러니까, 평화는 평화를 부르고, 권력은 권력을 불러요.


  권력하고 맞서 싸울 까닭이 없어요. 권력을 무너뜨려야 하지 않아요. 봄햇살은 겨울눈을 녹여서 없애지 않아요. 봄햇살은 그저 흙에 깃든 씨앗을 불러서 깨울 뿐이에요. 봄햇살은 봄을 부를 뿐인데, 겨울눈은 어느새 자취조차 남기지 않고 흙으로 스며들고 하늘로 깃들어요. 평화는 전쟁을 몰아내거나 무너뜨리는 데에는 없어요. 평화는 전쟁이 스스로 녹아서 평화한테 한몸으로 스며들어 다시 태어나도록 할 때에 비로소 빛나요.


.. 맛이 기가 막혔다. 라면에 관한 한 우리 엄마가 이 세상에서 최고다. 고추장까지 조금 풀어 넣은 라면은 내 입맛에 그만이었다. 내가 국물까지 비우자, 엄마가 물었다. “그게 그렇게 맛나냐?” 그럼, 엄마 손맛인데. 이런 대답을 해야 했을 텐데, 내 입에선 딴소리가 튀어나왔다. “다음 올 땐 자장면 사 줘.” “그려, 한가할 때 올라오면 그러더라고.” ..  (25쪽)


  밥 한 그릇 함께 먹어요. 이야기 한 자락 함께 나누어요. 책 한 권 돌려서 읽어요. 이부자리 서로 나누어 누워요.


  내가 마시는 물이 네가 마시는 물이에요. 내가 마시는 냇물은 저 멧골에서 솟아서 이렇게 흘러요. 내가 마시고 내려놓는 물방울 하나는 다시 냇물이 되어 내 동무들 마시는 물줄기로 이어져요.


  꼭지를 트니까 나오는 물은 없어요. 비가 내리고 냇물이 흐르며 바다가 움직이면서 물을 얻어요. 지구별이 아름답게 움직이면서 내 보금자리 한켠에도 맑은 물이 솟아요. 지구별이 어여삐 숨쉬면서 내 마을 샘가에서 맑은 물이 콸콸 솟아요.


  이맛살을 찡그리니 서로 이맛살을 찡그리는군요.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리니 저마다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리는군요.


  아이들 살살 다독이며 재워요. 코코 자는 아이들은 보드라운 어버이 손길을 느껴요. 어버이 손이 굵다든지 투박하다든지 거칠다든지 못생겼다든지 새까맣다든지 허여멀겋다든지 생각하지 않아요. 아 참 따스하구나 하고 느낄 뿐이에요. 어버이는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주고,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은 다음, 이 사랑이 차근차근 깊고 넓게 커지면서 새로운 사랑꽃을 피워요.


.. 엄마는 조용조용 타일렀다. “아녀, 너도 이 에미에겐 금덩이여. 하지만 너는 벌써 익은 금덩이고, 기열이는 아직 덜 익은 금덩이잖냐. 그란께 그렇게 꼬집으면 멍이 더 깊이 들제.” 그 뒤 누나와 단둘이 살 때, 누나는 그때 일을 이렇게 되새겨 주었다. “익은 금덩이, 덜 익은 금덩이. 세상에 얼마나 듣기 좋고 또 그럴듯한 소리다냐? 그 말을 듣자 슬며시 반성이 되더란께. 안 그냐?” ..  (55∼56쪽)


  윤정모 님 푸른문학 《누나의 오월》(산하,2005)을 읽습니다. 누나는 어디에서나 누나입니다.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기에 누나가 아니에요. 누나는 경상도 청도에서도 누나요, 강원도 횡성에서도 누나입니다. 1970년 4월에도 누나이고, 2010년 7월에도 누나예요.


  누나는 마음속으로 꿈을 키웁니다. 동생도 가슴속으로 사랑을 키웁니다. 누나는 푸른 들판을 바라보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꿈을 가다듬습니다. 동생도 푸른 숲을 바라보고 파란 바다를 내다보면서 사랑을 키웁니다.


  가을날 막 베어 말리는 나락 한 알 가만히 손바닥에 올려놓아 보셔요. 나락 한 알에서 피어나는 가을냄새를 맡아 보셔요. 이윽고 나락 한 알 혀에 살며시 올려놓아요. 혀로 나랏맛을 느껴 보셔요. 가을이 짙게 밴 나락 한 알에는 봄과 여름을 지낸 기운이 서려요. 겨우내 볍씨로 곱게 잠들다가 봄부터 따순 흙땅으로 깃들어 햇살과 바람과 빗물을 먹고 자란 숨결을 느껴요.


  겨를 벗기지 않은 햇나락은 혀에서 살살 녹아요. 깨물지 않아도, 씹지 않아도, 햇나락은 입안에서 달콤하게 녹아요.


  햇나락 먹으면서 생각해요. 먼먼 옛날 옛적 사람들은 굳이 불을 피워 밥을 짓지 않아도 나락을 먹으며 숨결을 이을 만했겠다고 생각해요. 더 맛나게 먹으려고 밥을 짓기도 했을 테지만, 모든 곡식은 열매 그대로 입안에서 녹는구나 싶어요.


.. “옴마, 우리 집 밥상!” 누나는 밥상 앞에 달려들어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서만은 아닌 듯했다. 집에서 먹어 보는 밥상이 그처럼 그리웠던 모양이다. “우리 집 김치가 참말로 꿀맛이다, 꿀맛!” 엄마는 계란 부친 것도 슬며시 누나 밥그릇 옆으로 디밀었으나, 누나는 김치와 청국장만 정신없이 먹어댔다. 그 모습을 지켜본 엄마와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간 얼마나 굶었으면 저럴까 싶은 모양이었다. “천천히 묵어라잉.” 그렇게 말해 놓고 엄마는 누른 밥을 긁어 왔다. 누나가 그 누른 밥까지 달게 먹고 있는데, 엄마가 물었다. “인제 다시는 안 나갈 거제?” ..  (85쪽)


  푸른문학 《누나의 오월》에 나오는 누나는 아무런 권력이 없습니다. 이른바 ‘어떠한 주먹힘도 돈힘도 말힘’도 없습니다. 다만, 누나는 꿈을 꿉니다. 스스로 살아가고픈 누리를 꿈꿉니다. 스스로 살아가며 빛내고픈 나라를 꿈꿉니다. 스스로 살아가며 빛낼 사랑을 펼칠 어여쁜 마을을 꿈꿉니다.


  권력을 노리는 이들은 군대를 키워 권력을 건사합니다. 권력을 노리는 이들은 졸업장과 자격증을 거머쥐면서 강단과 교단과 법정과 병원에서 이름표를 가슴에 척 붙이고 다닙니다. 권력을 노리는 이들은 경제를 부르짖고 문화를 노래하며 예술을 퍼뜨립니다. 권력을 노리는 이들은 야구공 하나로 수십 억원을 번다고 외치고, 권력을 노리는 이들은 축구공 하나를 꿰매는 이웃나라 아이들 삶을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웃나라 아이들이 축구공 꿰매는 삶’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권력자는 이 나라 아이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시달리면서 입시기계가 되고 마는가를 들여다보지 못해요. 이 나라 어린이와 푸름이 가슴에서 꿈이 자라지 못하는 모습을 들여다보지 못해요. 이 나라 어른들 가슴에서 사랑이 싹트지 못하는 모습을 들여다보지 못해요.


..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누나는 정말 선생님이 되었을까?” 누나는 그 말에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아녀.” “왜?” “가난한 시골 사람들은 딸아이한텐 절대로 공부를 시키지 않은께.” “글믄 어째서 전에는 소를 몰고 나갔단가?” ..  (154쪽)


  누나가 바라는 한 가지는 꿈입니다. 누나를 바라보며 살아가던 동생이 바라는 한 가지는 사랑입니다.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하는 일이 꿈이 아닙니다. 학교를 마치고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되는 일이 사랑이 아닙니다.


  삶을 빛낼 때에 꿈입니다. 삶을 누릴 때에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권력을 가지고 싶으면 가지셔요. 권력을 갖고 여든 해 삶이나 아흔 해 삶을 지내 보셔요. 나는 꿈과 사랑을 품에 안고 백 해뿐 아니라 오백 해나 천 해를 즐거이 지낼게요. 내 몸뚱이가 삭아서 사라지더라도 내 넋은 즐거이 온 지구별과 뭇별 사이를 오가며 즐거니 지낼게요. 아니, 내 몸뚱이는 꿈과 사랑을 먹으면서 언제까지나 이어가리라 느껴요. 살결이 몸뚱이가 아니고 뼈가 몸뚱이가 아니거든요. 나는 언제나 나무 한 그루가 될 수 있고, 풀 한 포기가 될 수 있어요. 바람 한 가닥이 될 수 있어요. 햇살 한 조각이 될 수 있어요. 옷을 입는 몸만 몸이 아니에요. 저 잎사귀도 저 풀벌레도 저 멧새도 모두 내 몸이요 내 마음이에요.


  늦가을 들판을 거닐며 풀벌레 가느다란 노랫소리 들었어요. 이제 풀벌레 모두 고요히 잠들었겠거니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들판에는 아직 가느다랗게 울리는 풀벌레 노랫소리가 있어요. 아하, 삶을 누리는구나. 즐거이 삶을 누리는구나.


.. 마침내 면 보건소 앞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경운기를 세우고 미친 듯이 보건소 문을 두드렸다. 눈을 비비고 나온 의사는 경운기 위에 누워 있는 누나를 살펴보더니 어서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새벽 첫닭이 울 무렵 누나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뒤였다. 경운기에서 옮겨 와 이불에 누이자, 누나는 별안간 아버지 손을 잡아챘다. 그리고 하얀 박꽃처럼 오므려진 그 입술을 들썩이며 말했다. “아부지, 기열이는 꼭 공부시켜 줘요.” ..  (167쪽)


  1980년 5월 광주에 있던 사람들은, 또는 보성이나 고흥에 있던 사람들은, 또는 여수나 순천에 있던 사람들은, 또는 대구나 부산에 있던 사람들은, 또는 서울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을 꿈꾸거나 사랑했을까요. 권력을 무너뜨려 새 권력을 세우고자 했을까요. 민주주의를 되찾고자 했을까요. 평화와 통일을 이루고자 했을까요.


  누군가는 군인이 쏜 총알에 맞아 죽고, 누군가는 군인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죽으며, 누군가는 보안사에서 붙잡아서 남영동 지하실에서 두들겨패는 바람에 죽었어요. 누군가는 연좌제이니 무어니 하면서 피가 마르며 죽었고, 누군가는 땅을 빼앗기고 집을 빼앗기며 죽었어요.


  그리고, 누군가는 살아가요. 누군가는 살아남았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텅 빈 머리로 살아가요. 누군가는 깊이 생각을 키우며 살아가요. 누군가는 1981년에 태어나고 1991년에 태어나면서 지난 발자국은 모르는 채 새로운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요.


  《누나의 오월》에 나오는 누나는 언뜻 보기에는 쓸쓸하게 죽은 듯해요. 그렇지만, 누나는 그토록 누나가 아끼고 사랑하는 동생이랑 어머니랑 아버지 곁에서 고요히 눈을 감아요. 가장 아늑한 품에서 가장 따사로운 숨결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아요.


  누나는 권력을 바라지 않았어요. 민주주의도 평화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요. 다문 하나 꿈을 바랐어요. 동생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꿈을 잊지 않기를 바랐어요. 언제나 꿈을 아끼면서 살아가기를 바랐어요. 곁에서 누나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던 동생은 누나가 품은 꿈을 비로소 느끼면서 스스로 품은 사랑이 꿈하고 만나 어떻게 얼크러지도록 살아갈 때에 아름다울까 하고 천천히 생각해요.


  그곳에 모인 사람들도, 그곳에 모이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한마음 한사랑 한삶이리라 느껴요. 너희가 권력을 갖고 싶으면 가지렴, 우리는 서로를 아끼는 꿈과 사랑을 흐드러지게 꽃피울 테니까, 하는 한삶이에요. (4345.1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푸른책 푸른삶)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진찍기
― 사진을 찍는 까닭

 


  내가 국민학생이던 1985년 무렵, 집에서 굴러다니던 전자동 작은 사진기로 구름을 스무 장 남짓 처음 찍을 때, 사진찍기란 무엇인지 딱히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무렵 그 사진기로 골목놀이 하는 동무들을 찍었으면 어떠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동무들과 누리던 골목놀이는 ‘사진 한 장’으로조차 안 남았으나 내 몸과 마음에는 깊이 아로새겨졌어요. 종이에 남는 사진이 따로 없더라도 언제나 환한 그림으로 낱낱이 떠올리며 즐길 수 있어요.


  1998년에 후배한테서 빌린 사진기로 ‘내 사진’이라 할 사진을 처음으로 찍었습니다. 신문사지국에서 신문배달을 하며 사진기를 두 차례 도둑맞고, 전철 짐칸에 사진기를 놓고 내린다든지, 사진기 가방을 전철 바닥에 깜빡 놓고 내린다든지, 택시에서 졸다가 그만 사진기 가방을 두고 내린다든지, 이러저러하면서 새 사진기를 자꾸자꾸 어렵사리 되사곤 했는데, 한 해 두 해 흐르고 흐르는 동안 ‘사진 찍는 까닭’을 따로 생각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어쩌면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 할 수 있는데, 찬찬히 돌아보면,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서 사진찍기란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늘 마음 깊이 아로새기면서 되뇌어야 하겠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곰곰이 생각을 기울입니다. 나는 사진을 왜 찍는가.


  나는 내 삶이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나는 내 삶을 누리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내 삶을 즐기기에 사진을 찍고, 내 하루를 스스로 빛내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예전에는 나도 ‘감동(感動)’이라는 한자말을 빌어 ‘사진 찍는 까닭’을 얘기하기도 했습니다만, 이제 이 한자말은 안 씁니다. 왜냐하면, 국어사전에서 ‘감동’ 말뜻을 찾아보면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임”이라고 나와요. 곧, ‘내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 ‘감동’이고, 내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란, 스스로 ‘내 삶을 누리’는 일이에요. 한 마디로 간추리자면, ‘삶 = 사진’인 셈이에요. 살아가기에 사진을 찍고, 살아가니까 사진을 읽는 셈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살아가기에 글을 쓰고, 살아가니까 글을 읽어요.


  스스로 마음이 즐거이 움직일 적에, 이 기쁜 느낌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꼭 이웃이나 동무하고 나눌 뜻은 없습니다. 스스로 마음이 즐거이 움직이면, 내 마음에는 즐거운 꿈과 사랑이 깃들어요. 즐거운 꿈과 사랑은 내 얼굴빛을 환하게 적십니다. 내 삶이 차근차근 거듭나요. 나를 마주하는 사람은 환하게 거듭나는 내 얼굴빛을 바라보며 즐거운 꿈과 사랑을 시나브로 받아먹습니다. 나는 나대로 내 고운 얼굴빛을 스스로 즐깁니다.


  ‘좋은 느낌’을 받기에 사진으로 찍어서 나누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좋은 느낌’은 그대로 좋은 느낌입니다. 나 스스로 ‘좋은 느낌’으로 살아가며 ‘좋은 사람’으로서 ‘좋은 삶’을 즐겨요. 스스로 새롭게 거듭나고 언제나 해맑게 다시 태어나요. 이때에 내 손에 사진기를 들면 사진찍기를 하고, 이때에 내 손에 연필이 있으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요.


  곧, 사진이란 늘 삶을 찍습니다. 글이란 언제나 삶을 씁니다. 그림이란 노상 삶을 그립니다. 내가 사진을 찍는 까닭이라면 오직 하나입니다. 내가 스스로 삶을 누리면서 즐겁게 빛내기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 삶을 누리지 못하거나 삶을 즐기지 못하거나 삶을 빛내지 못할 적에는 사진을 못 찍습니다. 글도 못 씁니다. 그림도 못 그려요. 아이들한테 자장노래 한 가락조차 못 불러 주어요. 아이들과 맛나게 나눌 밥도 못 할 뿐더러, 아이들이 입을 고운 옷이 되도록 빨래하는 일조차 못 하고 말아요.


  삶이 즐거우면 어떠한 일이든 합니다. 삶이 즐겁지 못하면 어떠한 일도 못 합니다. 삶이 즐거우면 어떠한 사진이든 마음껏 누립니다. 삶이 즐겁지 못하면 아무런 사진도 못 찍습니다. 그러니까, 삶이 즐겁지 못한 사람이 손에 사진기를 쥔대서 ‘사진’을 찍지는 못해요. 사진기 단추는 신나게 누른달지라도 스스로 ‘마음속 즐거운 빛줄기’가 없으면 디지털파일이나 필름을 수없이 낳기는 할 터이나,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이야기는 태어나지 못해요. (4345.11.1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버지는 왜 ‘구멍옷’ 입어?

 


  응, 아버지가 구멍난 옷을 입었니? 그렇구나. 그런데 아버지는 옷에 구멍난 줄 느끼지 못했어. 그냥 옷이니까 입었을 뿐이야. 너한테는 구멍이 크게 잘 보였구나. 그러나 아버지는 옷에 구멍이 있건 말건, 이 옷이 빨갛건 노랗건, 이 옷이 크건 작건 하나도 대수롭지 않아. 아버지 몸을 감싸면서 지켜 주는 옷이야. 겨울에는 따스한 숨결을 지키고, 봄에는 따스한 숨결을 받아들이는 옷이야. 아버지는 이 옷 한 벌을 벌써 몇 해째 입는지 모르겠구나. 아버지 스스로 옷을 사서 입는 일은 드물고, 거의 늘 둘레에서 옷을 선물해 줘. 새로 사 주기도 하고, 입던 옷을 물려주기도 해. 아버지는 어떤 옷이든 즐겁게 받아서 입어. 네가 입는 옷도 새로 사서 주는 옷은 몇 벌 안 되고, 거의 다 우리 둘레에서 좋은 넋으로 물려준 옷이란다. 그저 걸치는 옷이 아니라 사랑을 누리는 옷이야. 멋을 내거나 예쁘게 보이려는 옷이 아니라, 내 삶을 함께 밝히면서 사랑을 고이 나누는 옷이야. 참말 옷이란 날개란다. 멋부리는 날개가 아니라, 내 몸을 홀가분하게 이끌어 꿈하늘을 날고 사랑하늘을 날아오르는 날개란다. (4345.1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처마 밑에 들이지 못한 빨래

 


  아침 일찍 마실을 다녀와야 해서 부랴부랴 일찌감치 밥을 짓고 나물을 헹구어 무치느니 달걀을 삶느니 밤을 삶느니 하느라, 가방을 꾸려 아이들과 대문 밖으로 나갈 적에 빨래를 처마 밑으로 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깜빡 잊는다. 아침에 해가 높다라니 걸렸으니, 낮이나 저녁에 돌아와도 걱정없으려니 하고 여겼달 수 있지만, 요즈음 늦가을 날씨를 떠올리면 어쨌든 저녁에는 이슬이나 찬기운 안 맞게 처마 밑으로 들이든 마루로 올려놓든 해야 했다. 일찌감치 마실을 나가기에 빨래도 일찌감치 해서 밖에 널었으니, 따사로운 아침볕 받은 빨래는 마실을 나갈 무렵 만져 보았을 때 거의 다 말랐다. 기저귀는 다 말랐고. 햇볕을 조금이라도 더 먹기를 바라며 그대로 두었는데, 그대로 두었다가 가을비를 옴팡 뒤집어쓴다.


  비에 젖은 빨래는 모두 다시 헹구어 집안에 넌다. 저녁에 나온 새 옷가지는 미처 빨래하지 못한다. 헹군 빨래가 말라야 비로소 새 빨래를 할 수 있다. 아이들 모두 재운 깊은 밤에 홀로 고요히 생각에 잠긴다. 바보스럽군, 바보스럽네, 바보스럽잖아,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지 않았으면서, 오늘은 또 왜 이렇게 했니.


  서두를 까닭이 없다고, 느긋하게 즐기면 된다고, 1분 마음을 기울이면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린다고, 내 마음쓰기가 어딘가 꼬였다고, 아무래도 나 스스로 삶짓기를 한결 슬기롭게 가다듬는 길을 제대로 못 찾는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제 이 빨래가 그럭저럭 말랐으니, 이듬날 볕에 보송보송 말리기로 하고, 새롭게 밤빨래를 하자. 아이들 깊이 잠든 맑은 이마를 살살 어루만지고, 밤하늘 환하게 빛나는 미리내를 웃으면서 바라보는 가을날 밤이 예쁘다. (4345.11.14.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빨래순이 아버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토끼 드롭스 6
우니타 유미 지음, 양수현 옮김 / 애니북스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벗’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만화책 즐겨읽기 191] 우니타 유미, 《토끼 드롭스 (6)》

 


  오랜 벗들은 내 마음을 잘 헤아려 줍니다. 나도 오랜 벗들 마음을 잘 헤아려 줍니다. 그런데, 아무리 오랜 벗이라 하더라도 무턱대고 마음을 헤아려 주지는 않습니다. 오랜 벗인 만큼 서로를 더 깊이 바라보면서 ‘어긋난 길을 걸어갈’ 적에는 누구보다 따끔하게 한 마디 합니다. 그러고는 덧붙여요. 네가 그 어긋난 길을 가더라도 이제 너는 어른이라 너 스스로 가는 길이니 무어라 하지 않을 테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틀림없이 어긋난 길이니까 스스로 더 살피고 알아보면서 그 길을 가라고.


  벗이기에 서로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벗이기에 서로 거리끼지 않습니다. 벗이기에 서로 스스럼없이 생각을 나눕니다. 다만, 서로 벗이면서 어른인 만큼, 어떠한 길을 걷더라도 스스로 살피고 알아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하는 대목은 스스로 알아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벗이니까 가르쳐 주지 않아요. 아니, 벗이라 한들 가르쳐 줄 수 없어요. 스스로 느껴야 느끼고, 스스로 알아야 알아요. 스스로 느끼지 못할 때에는 백 마디 천 마디 말은 덧없어요. 모두 한귀로 흘리는걸요.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백 가지 천 가지 책을 쥐어 준다 한들 읽지 못할 뿐 아니라, 읽는다 하더라도 줄거리에 깃든 넋과 이야기를 받아먹지 못해요.


  오랜 벗하고 처음 사귀던 무척 어린 날을 돌이켜봅니다. 아주 어린 나날에는 ‘아이’였던 만큼 벗들이 서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나 스스로 삶으로 겪지 못할 적에는 모두 받아들이지는 않아요. 나중에 스스로 겪으며 새롭게 받아들이자고 생각하면서 동무가 들려준 이야기를 고맙게 받아들입니다.


- “너 환상이 너무 크다! 키가 크면 아무리 말라도 무겁다고. 그리고 넌 남자 눈으로 보는 거고, 난 아빠 눈으로 보는 거니까.” (25쪽)
- “지나가던 배달부나, 큰 짐 지고 가는 할머니나, 사람 좋아하는 큰 개나, 그런 게 갑자기 닥치면 어쩌려고 이런 데 서 있냐!” “다이키치, 걱정이 너무 많아.” “이게 보통이야.” “아, 그래?” (110쪽)


  벗이란 함께 살아가는 이웃입니다. 이웃은 이웃이요, 벗은 이웃 가운데 오래도록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솥밥 먹는 살붙이를 두고도 벗이라 일컬을 수 있어요. 이를테면, 한솥밥 먹는 옆지기랑 아이들은 ‘삶벗’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벗이거든요. 다른 한편으로는 ‘길벗’입니다. 함께 길을 걸어가는 씩씩한 벗이에요. 어느 모로 보면 ‘마음벗’이에요. 마음으로 생각을 나누기도 하고, 마음으로 사랑을 북돋우기도 하는 예쁜 벗이에요.


  ‘말’이나 ‘이름’을 놓고 곰곰이 생각해 보곤 합니다. 이를테면, ‘아내’와 ‘남편’ 같은 말이나 이름을 놓고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말은 언제부터 누가 왜 어떻게 썼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1500년대나 400년대나 기원전 1000년 무렵에는 서로 어떤 말과 이름을 썼을는지 돌아봅니다. 단군이 이 땅에 왔을 무렵은 어떠했을까 헤아려 봅니다. 단군에 앞서 1만 해쯤 앞서는, 또는 10만 해쯤 앞서는 어떤 말과 이름이 있었을까 되새겨 봅니다.


  하나하나 따지면, ‘아내’랑 ‘남편’이라는 낱말을 우리 겨레가 쓴 지는 얼마 안 되었어요. 어쩌면 백 해조차 안 되었을는지 몰라요. 이백 해 앞서만 하더라도 이런 말을 어느 누구도 몰랐을 수 있어요.


  한문을 쓰던 사대부나 권력자나 궁궐 기득권은 이런 낱말을 안 쓰고 중국말로 따로 가리키는 말과 이름이 있었을 테지요. 흙에 기대어 흙을 빚고 살던 거의 모든 여느 사람들 또한 이런 낱말을 안 썼겠구나 싶어요. ‘바깥사람’이나 ‘안사람’이란 말을 썼을까요. 글쎄, 아니라고 느껴요. ‘바깥사람’이나 ‘안사람’이라는 이름 또한 ‘아내’와 ‘남편’처럼 쓴 지 얼마 안 되었으리라 느껴요. 예전에는 흙일을 둘이 나란히 해야 했거든요. 다만, 오백 해쯤 앞서까지도 부엌일은 가시내만 하도록 시켰을 수 있으리라 느껴요. 그런데, 천 해쯤 앞서도 부엌일을 가시내만 했을까 하고 떠올리면, 또 이천 해쯤 앞서는 부엌일을 누가 어떻게 했을까 하고 되새기면, 이때부터 이야기가 달라져요.


- ‘아, 말하면 안 되는 거였나? 그나저나 린, 요새 코우키 얘기만 나오면 가시를 세우면서.’ (68쪽)
- ‘휴대폰, 꼭 있어야 할까? 이것(스팸쪽글)만 없으면 편할 것 같은데. 아, 또 왔다. 이상한 메일만 잔뜩. 귀찮아. 코우키도, 이젠 싫어. 무슨 생각 하는지도 모르겠고.’ (104∼105쪽)
- “전 코우키랑 사귀고 있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거예요.” “흠, 그렇구나.” “하지만 소중한 사람이에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지킬 거예요.” (178∼179쪽)


  이름이란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떤 이름이 붙든 삶이 대수롭습니다. 삶을 아름다이 일구지 못하면서 이름만 번듯하대서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요. 이를테면, ‘장애자’한테 ‘장애인’이라는 이름을 새로 붙이다가 ‘장애우’라는 이름을 다시 붙인대서 삶이 달라지지 않아요. 이름만 바꿀 뿐, 한국 사회에서 금을 긋거나 나누는 틀은 너무 딱딱하고 메마를 뿐 아니라 드세고 억세요. 허울은 그럴듯해도 알맹이는 허술하곤 해요.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장애 있다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사회 밑틀이 ‘장애 있는 사람’이 홀가분하게 마실을 다닐 수 있도록 이루어지지 않거든요.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장애 있는 사람이 움직이기에는 매우 나빠요. 장애 없는 사람조차 거님길을 걸어서 돌아다니기에 몹시 힘들어요. 이를테면, 장애 없다는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어디를 다녀온다고 할 적에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걱정스러운가요. 자동차가 얼마나 싱싱 달리고, 길섶은 얼마나 좁으며, 자동차 배기가스는 얼마나 고약한가요. 거님길에는 가게에서 내놓은 짐이나 전봇대나 길알림판이나 버스정류소나, 걸림돌이 얼마나 많은가요.


  이름이란 대수롭지 않기에, ‘벗’이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됩니다. ‘이웃’이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됩니다. 그저 ‘사람’이기만 하더라도 반갑습니다. 서로 마음을 읽고 나누며 아낄 수 있으면 넉넉합니다. 굳이 어떤 이름을 지어서 붙이지 않더라도, 슬기로운 생각을 빛내면서 사랑스러운 꿈을 북돋울 수 있으면, 반가우며 고맙고 즐거운 ‘마을사람’이 되리라 느껴요.


  나는 내 삶을 아낍니다. 내 이웃은 이녁 삶을 아낍니다. 나는 내 삶을 아끼듯 이웃 삶을 바라보면서 이웃이 스스로 아끼며 누릴 삶을 가만히 읽습니다. 이웃 또한 이녁 삶을 아끼듯 내 삶을 바라보며서 이웃 나름대로 나를 바라볼 때에 느낄 ‘내가 아끼며 누릴 삶’이 어떠한 그림인가 하고 따사롭게 마주합니다.


  삶으로 만납니다. 삶으로 사귑니다. 삶으로 어깨동무합니다.


  이름표나 계급장이나 졸업장이나 자격증으로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지 못해요. 어떤 일터에서 사람을 뽑아 쓴다 할 적에 졸업장이나 자격증으로 사람을 가리지 못해요. 얼굴을 보고 함께 지내 보아야 비로소 ‘사람을 조금씩 읽’으면서 ‘삶을 가만히 느껴’요. 사람을 읽고 삶을 느낄 때에 바야흐로 함께 걷는 길을 생각합니다. 함께 나눌 일을 생각하고, 함께 즐길 꿈을 생각해요.


- “뭐든 간에 린 너는 좀더 욕심을 부렸으면 좋겠어. 아직 젊잖아! 보호자 모임 때도 네 아버지가 무척 걱정하더라고.” (123쪽)
- “그냥 바래다 주라 그래.” “다이키치, 그게 더 걱정 안 돼?” “엉? 전혀!” “무슨 일 생길 거란 생각은 안 들어?” “무슨 일은. 무슨 일이 생겨도 이제 고등학생이잖아? 스스로 판단해.” (128∼129쪽)
- “네 생일 케이크 사러 갈 건데, 직접 고를래?” “아, 오늘. 깜빡했다.” (189쪽)


  우니타 유미 님 만화책 《토끼 드롭스》(애니북스,2011) 여섯째 권을 읽으며 ‘벗’이란 무엇일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소꿉벗을 헤아리고, 삶벗을 헤아립니다. 마음벗을 헤아리고, 사랑벗을 헤아립니다.


  벗 가운데에는 글벗이 있어요. 그림벗이나 사진벗이 있습니다. 생각을 함께 북돋우거나 살찌우는 생각벗이 있을 테지요. 일벗과 놀이벗이 있어요.


  어떤 이는 사랑놀이 할 생각으로 사랑벗만 찾아 헤맬는지 모르는데, 사랑놀이라고 하면서 살섞기에만 눈길을 둔다면, 이는 사랑놀이 아닌 살섞기가 될 뿐이에요. 살섞기하고 사랑놀이는 다르니까요. 이러면 사랑벗 아닌 살벗쯤 된다 하겠지요.


  누군가는 배움벗을 찾으리라 생각해요. 누군가는 꿈벗을 바랄 테고, 누군가는 이야기벗을 바라겠지요. 밥을 나누는 밥벗이 있어요. 자전거벗이나 나들이벗이 있을 테며, 마을벗과 학교벗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 “아카리 선배한테서 초봉 얘길 듣다니 의외네요. 선배는 얼굴을 살리는 일 할 거 같은데.” “난 매달 정해진 월급을 받는 평범한 일을 하고 싶어! 돈 걱정이나 밥 걱정은 이제 질렸어.” (175쪽)
- ‘별로 우울해 할 틈도 없이 자기 생일파티를 자기 손으로 준비하는 린의 모습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192쪽)


  벗이란 무엇일까요. 내 벗은 나한테 무엇일까요. 나는 내 벗한테 무엇일까요. 나는 벗으로서 어떻게 삶을 일구거나 누리는가요. 내 벗은 내 벗으로서 어떻게 삶을 짓거나 즐기는가요.


  《토끼 드롭스》에 나오는 아이들이 어느새 어린이에서 푸름이로 자랐습니다. 푸름이로 자라서 살아가는 아이들은 ‘벗’을 차분히 돌아봅니다. 어느 철부지는 아직 사랑벗조차 아닌 살벗만 바라고, 어느 철없는 벗은 아직 삶벗이나 마음벗은 생각조차 못합니다. 어느 푸름이는 애늙은이는 아니요 철부지 또한 아닌 마음으로 ‘벗-삶벗-사랑벗-마음벗-길벗-꿈벗’ 여러 가지를 골고루 생각합니다.


  대학교를 가느냐 마느냐는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떤 일터를 얻어 얼마나 달삯을 받느냐 또한 대수롭지 않습니다. 《토끼 드롭스》에 나오는 ‘린’은 벗을 생각합니다. 벗 가운데에서도 삶벗을 생각합니다. 삶을 나누고 사랑을 꽃피우며 꿈을 누리는 벗이란 어떠한 사람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마음속 깊이 애틋한 벗을 그립니다. 마음속 넓게 스미는 벗을 키웁니다.


  스스로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나며 아름다운 벗으로 자리매깁니다. 스스로 고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며 고운 벗으로 빛납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다 있대서, 집안살림 넉넉하대서, 자가용 있거나 널찍한 아파트 있대서, 학교 시험성적 높대서, 삶이 즐겁거나 아름답지 않아요. 스스로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느끼며 하루를 누릴 때에 비로소 삶이 즐겁거나 아름답습니다. 만화책에 나오는 푸름이 ‘린’이 아름답게 삶을 빛내면서 사랑을 누릴 앞길을 살포시 그려 봅니다. (4345.11.14.물.ㅎㄲㅅㄱ)

 


― 토끼 드롭스 6 (우니타 유미 글·그림,양수현 옮김,애니북스 펴냄,2011.1.28./8000원)

 

(최종규 . 2012 - 만화책 즐겨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