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책읽기

 


  하느님은 예배당에 없다. 예배당에는 예배당만 있을 뿐이다. 숲에는 숲이 있지, 숲 말고 다른 것이 없다. 다만, 요즈음 숲에는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가 있다. 자가용 타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자가용 창문을 열고 휙휙 쓰레기를 던지기 일쑤라, 시골 들판을 걷거나 자전거로 지나가다 보면 곳곳에서 ‘자가용을 모는 사람이 버렸구나’ 싶은 쓰레기를 본다.


  하느님은 성경책에 없다. 성경책에는 성경책만 있을 뿐이다. 아이들을 바라보면 아이들이 보인다. 아이들을 느끼고 싶으면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살며시 껴안으면 된다. 어린이 마음을 다루는 책이라든지, 어린이 몸짓을 살피는 방송이라든지, 어린이한테 무엇무엇 가르친다는 교재를 들여다본대서 아이들을 느낄 수 없다.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 다른 어떤 지식이나 정보로 다룰 수 없다.


  하느님은 십자가에 없다. 십자가에는 십자가만 있을 뿐이다. 정치권력자는 전쟁영웅한테 훈장을 주고, 무슨무슨 훌륭한 일을 했다는 사람한테 훈장을 준다. 그러면 전쟁영웅이란 무엇인가. 이 나라에서는 전쟁영웅인 그이가 다른 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될까. 베트남전쟁 영웅은 어떤 사람일까. 한국전쟁 영웅은 어떤 사람일까. 베트남사람은 한국사람 총에 맞아 죽어도 될 만한가. 괴뢰군이나 인민군이란 없다. 국군도 없고 미군도 없다. 모두 ‘여느 사람’이요 ‘여느 아버지’요 ‘여느 어버이’일 뿐이다. 군인옷을 입었고 멀찍이 떨어졌기에 못 알아챌 뿐, 전쟁영웅이 죽인 적군이란 바로 내 이웃집 아저씨이거나 내 오래된 동무이곤 하다. 문화영웅이나 교육영웅이나 스포츠영웅이란 무엇일까. 십자가에는 십자가만 있듯, 훈장에는 훈장만 있다. 사람을 옭아매는 굴레만 있다.


  하느님은 하늘에 없다. 하느님은 바다에도 땅에도 어디에도 없다. 하느님이 있는 곳은 오직 내 마음속이다. 못 믿겠으면 내 마음을 읽으면 된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 노예교육에다가, 이에 앞서 유치원이니 어린이집이니 유아원이니 보육원이니 하는 여덟 해 바보교육에다가, 나중에는 대학교이니 대학원이니 유학이니 하는 쳇바퀴교육에 허덕이면서, 갓난쟁이일 적부터 서른이 넘을 무렵까지 ‘내 마음속 스스로 들여다보기’를 할 겨를이 없다. 그나마 틈틈이 혼자 여행이라도 다니면 조금이나마 ‘내 마음속 조용히 돌아보기’를 할 텐데, 여행길에 나서면서 느긋하거나 너그러운 마음이 되는 사람은 뜻밖에 퍽 드물다.


  쉽게 말하자면,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하느님인 줄 아무도 모른다. 오늘날 사람들은 스스로 이녁 마음읽기를 못 한다.


  가만히 마음을 다스리며 생각을 기울여 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웃으면 내 아이가 웃고, 내 옆지기가 웃으며, 내 이웃이 웃는다. 익살꾼이 웃겨야 웃지 않는다. 가벼운 내 웃음 한 자락이 훨훨 퍼진다. 내가 찡그리면 내 아이도 내 옆지기도 내 이웃도 몽땅 찡그린다. 내가 사랑스레 활짝 웃으면, 내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웃음꽃이 피어나며 둘레 사람들 마음이 따뜻해진다. 왜 그럴까? 왜 그런지 생각해야 한다. 누군가 몹시 사랑스러운 웃음을 흘리거나 나누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 곁에서는 마치 ‘빛이 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들 하는데, 참말 빛이 나니까 빛이 난다고 느낀다. 왜 그럴까? 왜 환한 사랑 꽃피우는 사람한테서는 빛이 날까?


  생각해야 한다. 느껴야 한다. 깨달아야 한다. 보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른 하느님이라서, 저마다 다른 하느님이 저마다 어떤 마음이 되고 어떤 생각이 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이 지구별이 달라진다. 하느님은 예배당에도 성경책에도 십자가에도 없다. 하느님은 바로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 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이기에, 모든 사람이 스스로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려 하느냐에 따라 지구별 목숨이 달라진다. 아주 작은 한 사람이 스스로 삶을 바꾸어 도시를 떠나면 도시도 살고 시골도 산다. ‘도시에 한 사람 자리가 비어’서 도시가 살지 않는다. 도시는 이대로는 몽땅 무너지고 둘레 시골마저 망가뜨린다. 그래서 이런 슬픈 굴레를 깨닫고 도시를 떠나 시골살이를 하겠다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나타나면, 이 한 사람 기운이 도시를 따스히 보듬고 시골 또한 살가이 쓰다듬기에, 한국이라는 나라가 살아날 수 있고, 지구별이 숨쉴 수 있다.


  이 나라 한국이 안 무너지고 버티는 까닭은 삼성이나 에스케이나 무슨무슨 재벌이 수출을 많이 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 나라 한국이 안 무너지고 버티는 까닭은 ‘어린이와 젊은이 모두 떠난 시골’에 늙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씩씩하게 남아서 식량자급율 20%를 지켜 주기 때문이다. 비록 오늘날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농약 많이 쓰고, 풀 한 포기 그대로 건사하지 않지만, 시골에서 숲을 사랑하고 곡식을 거두는 따순 손길이 있기에, 이 손길 힘을 받아 한국이라는 나라 하나 버틸 수 있다.


  잘 생각해야 한다. 이제 시골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모두 돌아가시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야 한다.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도시사람은 ‘쌀조차 다른 나라에서 사다 먹어’야 한다. 아직은 그나마 ‘농약 가득 서린 쌀’이라 하더라도, 이 나라 쌀을 먹지만, 앞으로는 이 나라 값싼 쌀조차 못 먹고, 다른 나라에서 비싸게 사다 먹어야 한다. 곡물재벌이나 씨앗재벌 금고를 두둑히 채우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이 나라 사람들 모든 삶이 얽매이면서 흔들리고 만다.


  사람이 살자면, 시골에서 살아야 마땅하지만, 도시에서 살더라도 사람다움을 건사하고 싶다면, 하느님이 어디에 있는지 깨우쳐야 한다. 스스로 깨우치도록 마음을 닦고 다스리며 아껴야 한다. 시골사람은 누구나, 그러니까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누구나 당신 스스로 하느님인 줄 안다. 당신 스스로 ‘하느님이 내려준 선물 같은 손과 발’로 흙을 만지는 줄 안다.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 되어 흙을 만지고 풀을 만지면서 목숨을 일구는 줄 안다. 도시사람은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아직 씩씩하게 살아서 흙을 만지는 동안 하루 빨리 ‘내 마음을 읽어 하느님 찾는’ 일을 해야 한다. 예배당 아닌, 성경책 아닌, 십자가 아닌, 바로 내 마음속에 깃든 하느님을 찾아, 저마다 하루를 어떻게 빚고 하루를 어떻게 누리며 하루를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아름다운가를 깨달아야 한다.


  내 웃음 하나가 퍼져 온누리를 밝힌다. 내 비아냥이나 짜증이 퍼져 온누리를 어둡게 한다. 내 사랑으로 온누리를 따스히 돌본다. 내 거친 말과 막된 몸짓으로 온누리를 뒤흔든다. (4345.11.2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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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멋대로 찍어라 - 포토그래퍼 조선희의 사진강좌
조선희 글.사진 / 민음인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작지도 크지도 않은 사진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39] 조선희, 《네멋대로 찍어라》(황금가지,2008)

 


- 책이름 : 네멋대로 찍어라
- 글·사진 : 조선희
- 펴낸곳 : 황금가지 (2008.9.26.)
- 책값 : 15500원

 


  (1) 사진은 그저 사진


  나는 내 옆지기와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나는 언제나 내 옆지기와 아이들을 바라보지만, 내 눈썰미로 옆지기와 아이들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평가’할 수 없습니다.


  누구라도 다른 누구를 바라보다가 값을 매기지 못합니다. 저마다 다른 사람들인데, 누구는 값어치가 어떠하고 누구는 값어치가 이러저러하다고 값을 매길 수 없어요.


  가을하늘이 봄하늘보다 높거나 낮다고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오늘 하늘이 어제 하늘보다 파랗거나 눈부시다고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밤에 올려다보는 별이 어제와 오늘이 어찌저찌하다며 견주면서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이 들꽃과 저 들꽃을 맞대어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이 들풀과 저 들풀은 맛이 어떠하다며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세발나물도 맛나고 유채나물도 맛납니다. 연뿌리도 맛나고 오이도 맛나요. 호박을 먹으며 호박맛을 생각합니다. 무를 먹으며 무맛을 생각합니다. 아욱을 먹으며 아욱맛을 생각해요.


  옆지기를 바라볼 때에는 옆지기를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바라볼 때에는 아이들을 생각합니다. 글을 쓸 때에는 글을 생각하고, 사진을 찍을 때에는 사진을 생각합니다.


.. 난 사진을 전공하지 않았다. 사진이 좋아,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즐거워서 사진을 찍게 되었고,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 사진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내 눈이 세상을 향해 어떻게 열려 있는지를 고민해야 하고, 내 심장은 무엇을 바라볼 때 더 뛰는지 느껴야 하며, 사진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스스로 계속 물어 봐야만 한다 … 책상 앞에서 사진을 배우지 마라 ..  (9, 218, 219쪽)


  글을 쓰면서 글을 생각하지만 ‘글을 잘 쓰자’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사진을 생각하지만 ‘사진을 잘 찍자’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끔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림을 생각할 뿐 ‘그림을 잘 그리자’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이들이랑 노래를 부를 적에도 노래를 생각하지, ‘노래를 잘 부르자’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글을 쓰며 글을 생각할 동안 내 마음은 ‘내가 글로 쓰고픈 삶’을 하나하나 헤아립니다. 사진을 찍으며 사진을 생각할 동안 내 마음은 ‘내가 사진으로 찍고픈 삶’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스스로 누리는 삶이 있을 때에 스스로 쓰고픈 글이 샘솟습니다. 스스로 즐기는 삶이 있을 때에 스스로 찍고픈 사진이 솟구칩니다.


  연필을 쥔대서 글을 쓰지 못해요. 사진기가 있대서 사진을 찍지 못해요. 마음이 느긋하면서 기쁠 때에 글을 씁니다. 마음이 너그러우면서 예쁠 때에 사진을 찍습니다. 마음이 홀가분하면서 사랑스러울 때에 그림을 그립니다.


  다른 이가 쓴 글을 따서 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다른 이가 찍은 틀을 따라 내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삶을 내 글로 적바림합니다. 나는 내 삶을 내 눈길에 따라 내 사진으로 옮깁니다.


  우리 집 아이들을 바라보며 사진으로 찍을 때에는, ‘아이들 어버이’로서 아이들과 같은 눈높이로 살아가는 내 마음결로 사진을 찍습니다. 구경꾼으로 찍는다든지 이웃으로서 찍는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나는 아이들 어버이로서 사진을 찍습니다.


  내 살가운 동무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는, ‘살가운 동무’로서 이제껏 서로 북돋우며 살아온 나날을 되새기는 내 마음씨로 사진을 찍습니다. 구경꾼으로 찍는다거나 손님으로서 찍는다거나 하지 않아요. 내 마음을 살가이 다스리면서 따사로운 눈망울을 빛내며 사진을 찍어요.


.. 정말 사진을 사랑한다면 빛부터 느껴 보아야 한다 … 기술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기술은 배우면 되는 것이다. 어떤 기술이 내게 없다면 그 기술이 없음으로써 내게 또 다른 채워 넣을 공간이 생기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질감과 명도 빛 심지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소리까지 사진 속에 담을 수 있도록 사물을 바라보고 관찰하고 표현하는 ‘사진가의 애티튜드’를 기르는 일이다 … 빛이 넘쳐나는 날엔 넘쳐나는 빛을 즐겨라. 비가 오는 날엔 비의 촉촉함과 눅눅함, 그 나름의 것을 즐겨라 ..  (26, 86, 116쪽)


  사진은 그저 사진입니다. 사진이 대단할 일이란 없습니다. 대단하다면 삶이 대단합니다. 삶이 대단할 때에 ‘이 대단한 삶을 글로 옮기’면 글이 대단하다 싶은 느낌이 들 테고, 삶이 대단할 적에 ‘이 대단한 삶을 사진으로 옮기’면 사진이 대단하다 싶은 느낌이 들어요.


  어느 사진을 볼 적에 참 아름답네 하고 느낀다면, 어느 사진을 찍은 사람 스스로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아름다움을 살며 아름다움을 아낀다는 뜻입니다. 어느 사진을 볼 적에 참 밋밋하네 하고 느낀다면, 어느 사진을 찍은 사람 스스로 밋밋한 생각이요 밋밋한 삶이고 밋밋하게 하루를 흘린다는 뜻입니다.


  멋스럽다고 하는 틀을 누군가 빚었다 하더라도 ‘틀이 멋스럽다’고 해서 사진이 멋스럽게 거듭나지 않아요. 사진을 찍으려 하는 사람 삶이 멋스러울 때에 사진이 멋스럽지, 사진만 멋스러울 수 없어요. 글 한 줄은 글쓴이 삶을 드러내기에, 글만 멋스러운 일이란 없어요. 글을 쓰는 사람 삶이 멋스러워야 비로소 글 한 줄이 멋스러울 수 있어요.


  사랑을 하는 사람이 글을 쓰면 글에 사랑이 묻어나고, 슬퍼 눈물짓는 사람이 글을 쓰면 글에 슬픈 눈물이 묻어납니다. 고단한 하루에 지친 사람이 글을 쓰면 글에 고단한 한숨이 묻어나요. 골울 쉬 부리는 사람이라면 글 사이사이 골부림이 묻어나겠지요.


  바라는 대로 살아가고, 살아가는 대로 사진이 나와요. 꿈꾸는 대로 이루어지고, 꿈이 이루어지는 결이 고스란히 사진으로 태어나요. 사진은 그저 사진일 뿐이니, 사진을 거룩히 여긴다거나 얕잡을 까닭이 없어요. 옷은 옷일 뿐이고, 밥은 밥일 뿐이에요. 거룩한 옷이 없고, 거룩한 밥이 없어요. 몸을 따스히 돌보는 옷이 되고, 몸을 따스히 다스리는 밥이 돼요. 밥을 뜨는 숟가락이고, 길을 거닐 때에 발을 지키는 신이에요. 밤을 밝히는 등불이고, 때를 벗기는 비누예요.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삶을 누려요. 꾸밈없이 받아들이면서 삶을 찾아요. 삶을 누릴 때에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삶을 찾을 때에 사진으로 생각을 드러낼 수 있어요.

 


  (2) 책상맡 사진과 마음밭 사진


  조선희 님 사진책 《네멋대로 찍어라》(황금가지,2008)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책이름부터 ‘네멋대로’ 찍으라고 말하는 책인데, ‘네멋대로’란 무엇인지를 슬기롭게 느끼면, 애써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됩니다. ‘네멋대로’가 무엇인지를 슬기롭게 느끼지 못하면, 굳이 이 책을 읽더라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깨닫는 사람은 책이 없어도 깨닫습니다. 못 깨닫는 사람은 책이 있어도 못 깨닫습니다. 느끼는 사람은 사진기를 손에 쥐어 사진을 찍지 않더라도 마음으로 삶을 아로새길 수 있습니다.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사진기를 손에 쥐어 온갖 사진을 수없이 찍어댄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아로새길 만한 삶이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 내 몸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카메라를 골라라 … 사진은 이렇게 찍어야 한다는 법칙 따위는 없다 … 내 말의 의도는 이제 더 이상 영역을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며, 특히 사진을 막 시작한 사람이나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난 내가 찍고 싶은 것은 뭐든 찍을 것이며, 누가 나를 패션사진가라 하든 상업사진가라 하든, 연예인 전문 사진가라 하든, 개의치 않을 것이다. 난 단지 사진가이며,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일 뿐이다 ..  (14, 45, 104쪽)


  ‘네멋대로’란 ‘네 마음대로’입니다. ‘네 마음대로’란 ‘네 마음이 흐르는 대로’입니다. ‘네 마음이 흐르는 대로’란 ‘네가 마음으로 즐기는 삶이 흐르는 대로’입니다. ‘네가 마음으로 즐기는 삶이 흐르는 대로’란 ‘너 스스로 하느님인 줄 느끼면서 네 하루를 너 스스로 빚고 네 사진은 네 생각이 즐겁게 흐르는 대로’입니다.


  나는 하느님이고 당신은 하느님이며 우리 모두 하느님입니다. 나는 사진쟁이이고 당신은 사진쟁이이며 우리 모두 사진쟁이입니다. 나는 살림꾼이고 당신은 살림꾼이며 우리 모두 살림꾼입니다. 나는 사람이고 당신은 사람이며 우리 모두 사람입니다.


  내가 웃을 적에 아이들이 웃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웃습니다. 내가 찡그릴 적에 아이들이 찡그릴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찡그려요.


  내 웃음 하나가 온누리를 환하게 밝힙니다. 내 찡그림 하나가 온누리를 어둡게 뒤덮습니다. 사진을 찍는 마음이란 내 삶을 스스로 어떻게 가누어 즐기겠느냐 하는 물음과 같습니다. 어떠한 길을 어떠한 마음으로 걸어가느냐에 따라 내 사진이 달라집니다. 아니, 사진이 달라지기 앞서 삶이 달라지고 넋이 달라지며 말이 달라져요. 삶과 넋과 말이 달라지기에, 사진 또한 시나브로 달라져요.


.. 사진이 조금 거칠면 어떤가? 요즘 나오는 카메라는 400이나 800 정도는 노이즈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 사진의 도덕성에 관한 오래된 논쟁. 난 과감히 말한다. 먼저 찍어라. 이런 거창한 문제는 차치하고, 지나가는 어떤 이를 찍고 싶다고 하자. 그가 카메라를 의식하고 똑바로 카메라를 쳐다보게 할 요량이 아니라면 일단 찍자. 야단을 맞을 수도 있고, 핀잔을 들을 수도 있고 왜 찍느냐는 항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럼 용기를 내어 설명하자. 그러나 일단 내가 찍을 만큼 다 찍은 다음에 그렇게 하자. 설명을 하고 찍기엔 너무 늦다 ..  (72, 114쪽)


  내 마음을 담아 찍는 사진입니다. 책상맡 사진이 아닙니다. 내 마음을 담아 누리는 사진입니다. 마음밭 사진입니다. 마음밭에 씨앗 하나 심는 사진입니다. 사랑이 어린 씨앗을 심는 사람이 있고, 꿈이 감도는 씨앗을 심는 사람이 있어요.


  당신은 어떤 씨앗을 당신 마음밭에 심고 싶나요. 당신이 심는 씨앗대로 당신 마음밭에 싹이 돋고 줄기가 오르며 꽃이 피어요. 당신이 심은 씨앗을 돌보는 손길대로 당신 마음밭 풀줄기가 흐드러져요.


  누가 누구한테 사진을 가르칠 수는 없어요. 마땅한 노릇이에요. 누가 누구한테 글쓰기를 가르칠 수는 없어요. 누가 누구한네 아이사랑이나 어버이사랑을 가르치지 못해요. 모든 삶은 스스로 배우고 스스로 찾으며 스스로 깨닫습니다.


  삶뿐 아니라 사랑도 스스로 찾고 누리며 즐겨요. 믿음도 스스로 찾고 스스로 북돋우며 스스로 일구어요. 내가 동무 하나를 믿을 때에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대로 믿을 뿐, 둘레에서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기에 믿지 않아요. 내가 동무 하나를 사랑할 적에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대로 사랑할 뿐, 옆에서 요로콩조로콩 말밥을 빚는대서 사랑하지 않아요.


  책상머리에서 사랑할 수 없어요. 책상머리에서 믿을 수 없어요. 책상머리에서 삶을 즐기지 못해요. 소매를 걷어붙이고 텃밭으로 나가야 풀을 뽑든 나물을 하든 합니다. 자전거를 끌고 들판으로 나와야 들길을 달리며 들바람을 쐽니다. 아이들 손을 잡고 멧길을 오르내려야 숲바람을 맞고 숲햇살을 쬡니다.


.. ‘내 카메라는 자동이니까.’ 하는 생각을 버리고 내 카메라를 즐기자 … 내가 어떤 물건이나 어떤 상황을 향해 셔터를 누르는 행위는 내 안의 무언가와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이 통했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바깥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이 나의 마음을, 나의 손가락을 움직인 것이다 … 재밌는 일은,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선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난 아직 확실히 모르겠지만, 요즈음 여러 지인들이 사진이 많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  (123, 134, 217쪽)


  어떤 이는 아무개가 저기 국보 1호를 쳐다보라고 해서 손가락을 따라 쳐다보고는 ‘우와, 국보 1호로구나!’ 하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문화답사나 자연답사를 나가서, 길잡이 한 사람이 이끄는 대로 꽁무니를 좇으며 쳐다보라는 대로 쳐다보면서 ‘우와!’ 노래를 부를는지 모릅니다.


  어떤 이는 문화답사도 자연답사도 한 차례조차 안 할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 문화이고 자연이거든요. 내가 나를 보며 내 문화를 느낍니다. 내가 나를 보며 내 자연을 깨닫습니다. 내가 걷는 길이 곧 문화입니다. 내가 보는 곳이 곧 자연입니다. 내가 손으로 쓰다듬는 이웃집 울타리가 바로 문화입니다. 내가 누리는 나무그늘이 바로 자연입니다.


  풀벌레가 노래합니다. 나비가 춤을 춥니다. 새들이 날갯짓을 하며 온 들판에 고즈넉한 소리를 남깁니다. 바람결에 맞추어 억새가 흔들리고, 억새보다 키 작은 풀들은 가을볕을 쬐며 마지막 꽃을 터뜨려 바지런히 씨를 퍼뜨리려고 합니다.


  찾아보아야 할 문화유산이 따로 있는 일이란 없습니다. 국보이거나 보물이거나 지역문화재라서 찾아보아야 하지 않습니다. 국립공원이나 도립공원이라서 따로 찾아가서 맛보거나 누려야 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달동네 골목집이 문화요 문화재입니다. 가멸찬 사람들 으리으리한 아파트와 마당 널따란 집도 문화요 문화재입니다. 수목원도 숲일 테지만, 뒷산도 숲입니다. 나무 한 그루에서 숲이 퍼집니다. 풀 한 포기에서 들판이 이루어집니다. 내 마음속에 사랑 한 자락 깃들면, 이 사랑 한 자락이 차츰 자라나며 너른 사랑마을을 이룹니다.


.. 흐린 날에도 태양이라는 광원이 존재하고, 그 광원을 구름이라는 엄청나게 큰 하얀색 천이 감싸 소프터 역할을 해 준다 … 누군가 내게 질문한다. “인물 사진을 잘 찍는 노하우는 무언가요?” 난 답한다. “없는데요.” 노하우 따윈 없다. 인물을 찍는다는 건 내 식으로 그들을 이해하는 방법 혹은 애정의 표현이다 … 얼마나 피사체를 이해하고 있으며, 또 모델이 사진가를 어떻게 느끼고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진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쉽게 생각해 보라. 여러분이 친근한 혹은 가장 사랑하는 모델을 찍을 때와 사진 찍기 직전에 만난 낯선 이를 찍을 때의 느낌을. 또 그들이 각자 당신의 카메라를 바라보는 시선의 느낌을 말이다 ..  (144, 164, 194쪽)


  사진을 찍고 싶다면, 살아가고 싶어야 합니다. 사진을 찍고 싶으면, 생각하고 싶어야 합니다. 사진을 찍고 싶다면,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진을 찍고 싶으면, 생각을 빛내야 합니다.


  내 삶은 남과 견주어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습니다. 내 생각은 남과 견주어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습니다. 내 사랑도, 내 믿음도, 내 꿈도, 내 이야기도, 내 모습도, 내 목소리도, 내 살림살이도, 남과 견주어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아요. 나는 언제나 나입니다. 나는 언제나 나이면서 하느님입니다. 내가 사진으로 찍고픈 이야기가 있으면 스스로 생각하면 됩니다. 스스로 가만히 생각을 기울이면, 내가 사진으로 찍고픈 이야기는 모두 찍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을 기울이지 않거나, 스스로 사랑을 쏟지 않으면, 나는 아무 사진도 못 찍어요.


  나는 내 마음이 흐르는 결을 보살피며 사진을 찍습니다. 나는 내 사랑이 자라나는 마음밭을 돌보며 사진을 찍습니다. 나는 내 삶이 이루어지는 보금자리를 누리며 사진을 찍습니다.


  ‘네멋대로’이든 ‘내멋대로’이든, 내 마음을 아끼고 즐기면서 꾸리는 삶입니다. ‘함부로’가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또한 아니에요. 내 모든 사랑을 들이는 사진이고, 내 온 꿈을 담는 사진입니다. 함부로 찍으려 하면 함부로 싸지르는 사진이 될 뿐이에요. 아무렇게나 찍으려 하면 아무렇게나 어수선한 사진이 될 뿐이에요.


  남 눈치 아닌 내 눈길을 아껴요. 남들 하는 대로 아닌 내가 즐거이 살아가는 몸짓을 찾아요. (4345.11.2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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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들보라 아빠 책으로 놀기

 


  누나는 춤추며 노래한다. 아버지는 춤추며 노래하는 누나를 사진으로 찍는다. 이 틈에 산들보라는 아버지 읽던 책을 슬쩍 가로채어 한손으로 볼펜을 쥐며 아버지 하듯 무언가 끄적거리는 시늉을 하며 논다. (4345.11.1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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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춤노래 1

 


  작은걸상을 밟고 올라서서 노래하고 춤추며 하모니카를 분다. 오랜만에 춤노래를 하네 생각하다 보니, 동생이 생긴 뒤로는 동생하고 어울려 뛰노느라 바쁘기에, 혼자서 춤노래를 하는 일이 줄었구나 싶다. 그러네, 아직 동생이 태어나지 않던 때에는 날마다 여러 차례 춤노래를 보여주며 혼자서도 놀고, 나랑 옆지기한테 예쁜 춤노래를 베풀었는데. (4345.11.1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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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나비, 가을풀씨

 


  아이들과 마을 들판을 걷는다. 나락을 모두 베고 마늘을 심은 자리에 풀약을 치는 어르신은 없다. 한갓지고 느긋하게 논둑에 앉기도 하고, 아이들은 논둑을 달리거나 고샅을 뛰놀기도 한다. 나는 두툼한 책 한 권을 들고 나와 논둑에 앉는다. 틈틈이 아이들을 바라보며 사진 몇 장 찍는다. 아이들은 햇볕을 듬뿍 받으며 저희끼리 논다. 흙을 줍고 돌을 집는다. 도랑물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파랗게 눈부신 하늘을 누비는 멧새를 본다. 마을 할아버지 경운기 지나갈 적에 손을 흔든다.


  책을 읽다가 나비를 만난다. 아직 날아다니는 나비가 꽤 있다. 이 나비들은 언제쯤 겨울잠을 자려나. 따스한 남녘마을에서는 겨울에도 나비가 잠을 안 자고 겨울나기를 하려나. 겨울에 몇 송이 피어나는 동백꽃은 나비한테 겨울밥이 되어 줄까.


  논둑에서 흔들리는 풀씨를 본다. 용케 낫질을 안 받고 살아남은 풀포기가 저희 씨앗을 바람에 맡겨 여기저기로 날린다. 조용한 마을 고요한 들판이다. 이 가을날, 아이들 발자국 소리와 웃음꽃 소리와 까르르 노랫가락 소리가 저 멀리 천등산까지 퍼진다. (4345.11.1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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