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기호 씨가 '알라딘 알바'라고 말한 대목이

잘못이라고 받아들여 사과를 했다.

히유. 참 잘 되었다.

왜 책마을 사이에 금긋기를 하면서

'책 좋아하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려고 했을까.

우리가 나눌 이야기는

어떤 제도나 규칙이 아니다.

책을 아름답게 사랑하고

즐겁게 나누는 길을 이야기하면 된다.

 

한기호 씨 네이버블로그에 붙인 댓글을 옮긴다.

..

 

책 좋아하는 보통 사람을 '알라딘 알바'라고 이야기하는 일은
그저 비아냥일 뿐입니다.

비아냥으로는 '출판평론'이 아닌 '출판권력'밖에 안 됩니다.
'출판문화'를 생각한다면, '책마을'을 두루 사랑하고 아끼는 이야기를
쓰시기를 바랍니다.

비판은 가장 옳고 바르면서 '사랑스럽고 따스하게' 할 노릇입니다.
이오덕 선생님도 권정생 선생님도
다른 사람들을 비아냥거리면서 비판한 적 한 번도 없습니다.
이오덕 선생님을 마음 깊이 존경하신다면,
비판을 하는 몸가짐을 잘 추스르시기 바랍니다.

불찰이요 사과라고 말씀하셨기에
제 댓글은 지웁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아름다운 출판평론을 이루어 주시기를 빌겠습니다.
저는 '책 이야기'와 '책마을 사람들 이야기'와 '책 좋아하는 사람 이야기',
여기에, 여태껏 소외받고 힘든 대접 받은 '헌책방 일꾼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한기호 씨께서 이 가운데 어느 한 갈래 이야기를 쓰시더라도,
다른 갈래 보통 사람들 마음밭에 뭇칼질 하는 용어를
아무렇게나 쓰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뭇칼질이 바로 '공멸'에 이르는 길,
스스로 '파멸'로 가는 지름길이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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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카 2013-01-27 15:01   좋아요 0 | URL
하지만 아직도 글은 수정되지 않은 채 그대로더군요.
글을 읽으면서 그저 이용자일 뿐인 저까지도 괜히 조롱을 당한 기분이 들어 퍽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파란놀 2013-01-27 21:13   좋아요 0 | URL
그런 대목을 바로잡지 못하는 몫은
그분한테 있어요.

스스로 잘못했고 사과한다고 했으면서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만큼 그분 마음밭이 좁고 얕다는 뜻이라는 소리예요.

부디, 출판평론 한다는 분들이
넓고 아름다운 마음이 되기를 빌어요...

파란놀 2013-01-30 06:52   좋아요 0 | URL
그런데, 한기호 씨가 쓴 '사과글이 거짓'이었구나 싶어요.
참 딱합니다... 이런 글을 쓴 제가 참 부끄럽습니다...
 

이웃과 즐거운 마음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이 책들이 그저 종이에 찍힌 글씨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겉보기로는 종이꾸러미요, 글씨모임이라 할 테고, 돈으로 사고파는 물건이라 여길 수 있지만, 나는 책을 ‘내 이웃과 사귀는 즐거움’이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내 이웃이 나를 떠올리면서 차근차근 적바림한 이야기꾸러미가 바로 책이라고 느낍니다.


  아마, 이 책 하나 쓴 분은 내 얼굴도 이름도 모를 테지요. 그러나 이 책 하나 쓴 분은 나와 같이 ‘얼굴도 이름도 모를 누군가’를 떠올리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습니다. 서로 즐겁게 사귀고픈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지구별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고픈 마음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온누리를 따사롭게 밝히고 싶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아름답게 살아가는 길을 찾으면서 책 하나 빚습니다. 환하게 웃음꽃 피우는 삶을 누리고 싶어 책 하나 책방 책시렁에 꽂습니다. 맑게 노래하면서 춤추는 마을잔치 이루고 싶어 주머니를 털어 책을 장만하고, 읽고, 아로새기고, 되새기면서 하루를 돌아봅니다.


  이웃과 즐거운 마음 나누는 책읽기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집 마당 후박나무 줄기를 어루만지면서 나무책을 읽습니다. 후박나무 잎사귀 사이로 하늘을 바라보고, 눈발 흩날리는 예쁘장한 구름을 올려다봅니다. 하늘책과 구름책을 읽습니다. 눈을 감고 바람을 느낍니다. 작은아이는 아버지 품에서 고개를 살며시 기대고는 아버지랑 나란히 눈을 감고, 마당에서 눈을 맞으며 바람을 느낍니다. 바람아, 바람아, 너도 하느님이지? 우리 아이도 하느님이고, 나도 하느님이며,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과 풀과 나무와 벌레와 새 모두 하느님이지? 모든 목숨은 책이고, 모든 책은 푸른 숨결이라고 느낍니다. 4346.1.2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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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피

 


  큰아이가 아침에 벌떡 일어나더니 손으로 코를 슥 문지르다가 빨간 피를 본다. 코피가 나네. 다시 누우라고 이르고는 휴지를 두 칸 뜯어 코피를 닦는다. 콧등과 등판을 살살 주무르고는 이마를 쓸어넘긴다. 자, 자, 더 자자. 어제 늦게 자고 오늘 너무 일찍 나려 하니까 몸이 힘들어서 그래.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놀 때에도 잘 놀면 코피는 사라져. 4346.1.2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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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059) 어디의 1 : 어디의 예의냐

 

갑자기 남의 얼굴에 손을 대는 건 어디의 예의냐
《데즈카 오사무/도영명 옮김-칠색잉꼬 (5)》(학산문화사,2012) 11쪽

 

  “손을 대는 건” 같은 말투는 오늘날 그대로 두어야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겨레는 예부터 이처럼 말하지 않고 “손을 대는 짓은”처럼 말했어요. ‘것(건)’이 아닌 ‘짓’이라는 낱말을 넣으며 말했어요. ‘것’이라는 낱말을 넣은 말투를 아무 자리에나 쓰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면, 한겨레는 토씨 ‘-의’ 또한 아무 자리에나 쓰지 않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거의 아무 자리에나 ‘-의’를 쓰고 맙니다. 옳게 생각하거나 살피면서 말을 하는 사람이 드물고, 바르게 헤아리거나 가다듬으면서 글을 쓰는 사람이 적어요. 띄어쓰기나 맞춤법은 돌아본다지만, 옳은 말법이나 바른 글투를 곱씹는 사람은 좀처럼 안 나타납니다.


  스스로 사랑스러운 손길이 되어 사랑스러운 글빛을 드러내기란 어려울까요. 스스로 아름다운 눈길이 되어 아름다운 말빛을 나누기란 힘들까요.

 

 어디의 예의냐
→ 어디 예의냐
→ 어디서 배운 짓이냐
→ 어디서 굴러먹은 버릇이냐
 …

 

  내 어릴 적을 곰곰이 떠올립니다. 나는 “어디서 배운 버릇이냐” 하는 말투를 곧잘 들었고, 동무들끼리 다툼이 있을 때에 서로 이런 말을 외치곤 했어요. 아마, 어른들이 우리를 나무랄 적에 “너희들 그게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냐” 하고 윽박지르셨겠지요. 그래서 어린 우리들도 어른들 말투를 똑같이 물려받아 이런 말을 읊었지 싶어요.


  “어디의 예의냐” 같은 말투는 듣지 못했고 쓰지 않았어요. “어디서 배운 예의냐”라든지 “어디에서 굴러먹은 예의냐”처럼 듣고 썼어요.


  일본사람이라면 ‘の’를 넣는 말투가 익숙하거나 올바를 테고, 한국사람이라면 ‘-의’ 아닌 뜻이랑 느낌을 살리는 말투여야 알맞으며 아름답습니다. 토씨 ‘-서’나 ‘-에서’를 붙일 노릇입니다. 조금 더 살피면, “남의 얼굴에”도 “남 얼굴에”처럼 적거나 말할 수 있어요. 입으로 “남 얼굴에 손을 대는 짓”처럼 말해 보셔요. 술술 부드럽게 말이 흐르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4346.1.27.해.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갑자기 남의 얼굴에 손을 대는 짓은 어디서 배웠느냐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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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쓰는 자리

 


  ‘글을 쓰는 터’, 곧 ‘작업실’이라는 데를 이태쯤 누린 적 있다. 아직 혼인을 안 했고 아이도 없던 홀몸으로 서울에서 살아가던 때였는데, 보증금 천만 원에 깃들 수 있는 되게 재미난 골목집 2층을 얻어 달삯 20만 원 내면서 지내 보았다. 2001∼2002년 무렵이다. 일제강점기 적산가옥이던 나무집이었는데, 나무로 지은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가면 삐이꺽삐이꺽 소리가 났다. 벽도 천장도 나무요, 2층 골마루도 마땅히 나무이다. 2층 난간 또한 나무이다. 온통 나무이니, 천장 안쪽에서 집쥐 달리기하는 소리를 듣고, 따로 뒷간이 없던 집이라, 집임자가 여러 셋방이 함께 쓰는 뒷간을 손수 만들어 주기도 했다. 겨울이 되면 물을 틀어도 개수대가 꽁꽁 얼어붙어 집에서 밥을 해 먹을 수 없던 그곳에, 어느 날 족제비 한 마리 찾아와 내 방을 기웃거리다가 홱 사라지기도 했다. 온통 책으로 둘러싸인 나무집에서 내 몸 하나 누일 자리만 있던 보금자리는 처음으로 누린 내 ‘글방’이었다고 할까.


  옆지기랑 두 아이하고 살아가는 오늘을 돌아본다. 아이들 재우고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놀리고 하느라 부산하다. 네 식구 살아가며 내 글을 쓸 틈은 깊은 밤과 새벽 빼고는 없다. 모처럼 혼자 바깥일 보러 나오면, 너무 홀가분한 몸을 어쩌지 못하기 일쑤이다. 이러다가 문득 깨닫는다. 아하, 우리 아이들이 아버지더러 느긋하게 글 좀 써 보라고 이렇게 나를 풀어 주었나? 눈을 살그마니 감고 생각을 기울인다. 그래, 그러면 내 삶을 찬찬히 수첩에 적어 볼까? 둘레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건, 곁에서 누가 큰 목소리로 떠들든, 옆에서 누가 손전화기 꺼내어 영화를 보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시외버스를 탔건, 군내버스를 탔건, 하나도 대수롭지 않다. 나는 내 마음을 기울여서 내 사랑을 글 하나로 갈무리한다. 퍽 시끌벅적한 술집에서조차 시를 쓴다. 그래, 시는 이렇게 태어나는구나. 어디에 내 몸을 깃들이더라도, 내가 시골숲 누리는 사랑을 떠올릴 수 있어야 비로소 시 한 자락 태어나는구나.


  수첩에 깨작깨작 적바림한 시 한 자락을 정갈한 종이 하나 꺼내어 차근차근 정갈한 손글씨로 옮겨적는다. 그러고는 내가 좋아하는 이웃한테 살며시 내민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기쁘며 즐거운 선물인, 시쓰기이다. 4346.1.2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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