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그림

 


  풀과 꽃과 벌레를 그리는 어느 분을 만나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그림’이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본다. 찬찬히 떠오르는 대로 짤막하게 글월 하나 적는다. 우리 아이한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적는다. 그러고 나서, 흰종이에 정갈하게 옮겨적고, 글월 하나 옮겨적은 뒤 빈자리에 그림 몇 붙인다. 치마 좋아하는 큰아이를 그리고, 큰아이가 좋아하는 웃는 얼굴로 그리며, 꽃 두 송이와 나비 한 마리 그린다. 꽃은 두 송이라지만 나비는 한 마리라 여길 이 있을 텐데, 큰아이 스스로 나비이니까 한 마리만 그리면 된다. 그런 다음 아이 손에는 호미 한 자루와 연필 한 자루 그려 넣는다.


  마음을 담으니 글이고, 마음을 보여주니 그림이다. 마음을 쓰기에 글이고, 마음을 노래하기에 그림이다. 아닐까? 다른 사람은 어찌 생각할는지 모를 노릇이고, 나는 글과 그림을 이렇게 생각한다. 4346.5.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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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냄새 (도서관일기 2013.5.4.)
 ―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동백마을, ‘서재도서관 함께살기’

 


  전남 순천에 있는 〈일광서점〉이 곧 문을 닫는다고 한다. 우리 식구 고흥으로 와서 살아온 지 이제 세 해째라, 고흥 곁 순천에 어떤 책방 있었고, 어떤 발자국 있었는가 아직 잘 모른다. 우리 도서관에 들일 책꽂이 때문에 알아보다가, ‘문을 닫는 도매상에서 쓰던 책꽂이’를 나누어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찾아갔더니, 순천 〈일광서점〉 책꽂이였다.


  도매를 하는 〈일광서점〉이 먼저 문을 닫고, 소매를 하는 〈일광서점〉은 5월 10일에 문을 닫는다고 한다. 도매를 하던 자리에서 뜯어낸 책꽂이를 본다. 서른 해는 훨씬 더 묵었다고 하는 책꽂이인데, 나무가 참 좋다. 서른 해 훨씬 지나도록 나무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다. 뜯어내면서 여기저기 생채기가 생기거나 갈라진 데가 생기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요, 이런 틈은 나무를 덧대면 말끔히 사라진다. 무엇보다, 책꽂이 만지면서 결이 참 좋다. 나무로 짠 제대로 된 책꽂이는 이런 내음 이런 결 이런 느낌이로구나. 나무 아닌 합판으로 댄 책꽂이일 때, 또 나무 아닌 이것저것으로 압축한 책꽂이일 때, 이러면서 페인트를 입히고 무얼 바르고 한 책꽂이일 때, 그러니까 요새는 나무 책꽂이 보기 참 힘든데, 아무것 안 바른 나무결 고스란히 있는 책꽂이를 쓰다듬으며 느낌이 아주 좋다.


  순천에 사람이 적어 책방이 문을 닫는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사람 숫자는 예나 이제나 엇비슷할 테니까. 문을 닫은 〈일광서점〉 가까이에는 순천대학교 있고, 순천에는 이밖에 다른 대학교도 있으며, 초·중·고등학교 제법 많다. 순천사람 스스로 책을 읽지 않을 뿐더러, 마음과 삶 밝히는 책하고 사귀지 못했기에 책방이 하나둘 문을 닫고 사라진다.


  우리 도서관에 들이는 책꽂이는 오래오래 잘 있기를 빈다. 순천에 있던 옛 새책방 한 곳 발자국 곱게 건사하면서, 나무냄새 두고두고 나누어 줄 수 있기를 빈다. 나무로 만든 종이로 묶은 책을 꽂는, 나무로 짠 책꽂이가, 나무로 둘러싸인 시골 도서관에서 푸르게 빛나기를 빈다. (ㅎㄲㅅㄱ)

 


* 사진책도서관(서재도서관)을 씩씩하게 잇도록 사랑스러운 손길 보태 주셔요 *
* 도서관 지킴이 되기 : 우체국 012625-02-025891 최종규 *
* 도서관 지킴이 되어 주는 분들은 쪽글로 주소를 알려주셔요 (011.341.7125.) *
* 도서관 나들이 오시려면 먼저 전화하고 찾아와 주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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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16] 마음읽기
― 스스로 사랑하려는 마음일 때에 사랑

 


  글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그냥 나오는 글이란 없이, 모두 이녁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쓰는 글은 내 마음이고, 내 이웃이 쓴 글은 내 이웃 마음입니다.


  내 마음과 이웃 마음은 다릅니다. 내 삶과 이웃 삶이 다르니까요. 내 목소리와 이웃 목소리는 다릅니다. 내 생각과 이웃 생각이 다르니까요.


  글을 읽을 때에 ‘줄거리’를 읽으려고 하면 마음을 못 읽습니다. 누가 쓴 글이든 마음을 쓰기에, 마음을 읽으려 하지 않고서는 서로 말다툼으로 번지기 쉽습니다.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른 삶에 따라 다 다른 목소리로 쓰는 글이기에, ‘내 삶과 내 생각과 내 목소리’에 맞추어 다른 사람 글을 읽으면 엉뚱하게 풀어내고 맙니다. 글 아닌 말에서도 이와 같아요.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를 읽어야지요.


  누군가는 말투가 좀 거칠 수 있어요. 누군가는 말끝마다 욕지꺼리가 섞일 수 있어요. 누군가는 말투가 나긋나긋하겠지요. 누군가는 말끝마다 상냥한 기운 감돌겠지요.


  말투가 거칠면, 이녁 마음도 거칠까요. 말끝마다 욕지꺼리 섞으면 이녁 말은 들을 값어치조차 없을까요. 문학을 떠올려요. 문학에 나오는 말을 떠올려요. 문학에 나오는 줄거리를 떠올려요. 문학을 읽는 우리들은 ‘줄거리’를 읽으려는 뜻이 아니에요. 문학을 읽는 까닭은 마음을 읽고 싶기 때문이에요.


  어떤 사람은 글을 읽든 책을 읽든 문학을 읽든 ‘줄거리’만 좇을 수 있어요. 누구한테나 자유이니, 줄거리가 좋으면 줄거리로 갈 뿐이에요. 다만, 줄거리를 붙잡을 때에는 마음을 잡지 못해요. 줄거리에 얽매이면 마음읽기하고 멀어져요.


  글 한 줄에서 마음을 읽는다 할 때에는, 글을 쓴 이녁 마음이 어떠한가를 살펴, 서로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뜻이에요. 살을 섞거나 쓰다듬어야 사랑이 아니라, 마음을 읽고 나누려 할 때에 사랑이에요. 살을 섞는 일은 살섞기예요. 살을 쓰다듬는 일은 쓰다듬기예요. 마음을 읽을 때에는 마음읽기이고, ‘마음’이란 바로 삶을 사랑하는 바탕이니, 저절로 사랑읽기로 흘러요.


  마음을 따사롭게 추스르는 사람은 삶을 따사롭게 추스릅니다. 마음을 너그럽게 북돋우는 사람은 삶을 너그럽게 북돋우지요.


  우리 어른들은 마음을 슬기롭게 읽으며 삶을 슬기롭게 지을 수 있기를 빌어요. 우리 어른들은 우리 아이들한테 슬기로운 삶·넋·사랑을 찬찬히 물려줄 수 있기를 빌어요. 스스로 사랑하려는 마음일 때에 사랑이에요. 땅에서 솟아나거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사랑은 없어요. 스스로 일구는 사랑이고, 스스로 짓는 사랑이에요. 마음을 읽으면서 사랑을 나누고, 마음을 헤아리면서 사랑을 빛내요. 4346.5.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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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19] 시멘트읽기
― 숲과 논밭과 찻길과 도시

 


  시골자락 논두렁이 아주 빠르게 사라집니다. 경운기와 오토바이 다니기 좋도록, 또 들풀 자라지 못하도록, 논두렁을 시멘트로 덮습니다. 시골자락 논도랑이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큰물 질 적에 물골에 빗물 잘 빠지도록 한다면서, 흙도랑을 시멘트도랑으로 바꿉니다.


  고샅이라 할 시골길은 어느새 거의 다 시멘트길로 바뀌었습니다. 도시 골목길도 흙길은 한 군데도 안 남았다 할 만하며, 아스팔트를 깔거나 시멘트를 깝니다. 자동차를 대기 좋도록, 또 자동차가 다니기 좋도록, 도시는 어디에나 아스팔트하고 시멘트로 바닥을 마감합니다.


  시골에서도 논이나 밭으로 경운기나 트랙터 드나들기 좋도록 시멘트길 따로 한 군데쯤 마련합니다. 멧자락에 올라 시골마을 멀리 내다보면, 논밭 한쪽에 하얗게 시멘트길 난 모습 볼 수 있습니다. 머잖아 이 나라 시골마을 어디에나 논두렁까지 하얗게 덮이리라 느낍니다.


  아무래도 자동차는 흙길을 다니기 나쁘지요. 아무래도 짐차이든 경운기이든 흙길에서는 바퀴 빠질 수 있지요.


  그런데, 시멘트바닥에는 아무 씨앗을 못 심어요. 시멘트바닥에서는 나무도 풀도 돋지 못해요. 사람이 살아갈 집에서도 방바닥을 시멘트로 하면 숨이 막히지요. 방바닥과 벽을 흙으로 하는 까닭이 있어요. 먼 옛날부터 사람들 살림집 바닥이나 벽이 모두 흙인 까닭이 있어요. 서양 문명이 퍼지기 앞서까지 지구별 모든 겨레는 흙바닥에서 잠을 잤어요. 서양사람조차 흙바닥에서 잠을 잤지요. 다만, 서양사람은 흙바닥에 나무로 짠 침대를 놓고 잠을 잤습니다. 서양에서 도시라는 데가 생기고 돌과 시멘트로 지은 층집 생기면서 비로소 ‘시멘트집’이 지구별 곳곳에 퍼졌어요.


  풀이 돋는 흙바닥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에요. 풀과 나무를 보듬는 흙으로 집을 지어 흙내음 마시고 흙숨 먹으며 살아온 사람들이에요. 흙을 치우고 시멘트로 높다라니 층집 지으니, 어른이든 아이이든 숨이 막히고 코가 막힐밖에 없어요. 숨과 코가 막히다 보니, 마음까지 막히고 생각마저 막혀요.


  사람도 짐승도 흙에 기대어 살아가고, 흙바닥에 누워 자요. 흙을 싫어하거나 흙을 아끼지 않거나 흙을 멀리하거나 흙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따스한 마음결을 잃어요. 동네나 마을이 살기 좋다면, 동네사람이나 마을사람이 흙을 아낀다는 뜻이에요. 도시에서는 조그맣게 텃밭을 일구거나 꽃밭을 가꾸는 동네일 때에 포근한 숨결 감돌아요. 시골에서는 논밭이 제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풀약과 비료와 항생제로 돈농사 짓는다면 너그러운 숨결 감돌지 못해요.


  큰비 몰아치면 아스팔트 찻길도 무너지고 시멘트바닥도 갈라져요. 큰비 몰아치면 때때로 멧자락 무너지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숲을 망가뜨리지 않았으면 멧자락 무너질 일 없어요. 사람들이 찻길을 낸다며 멧자락 한쪽을 깎거나 밀었기 때문에 큰비 때문에 멧자락 무너져요. 찻길 없고 숲나무 함부로 베지 않은 멧자락은 큰비에 아랑곳하지 않아요.


  나무가 있고 풀이 있어, 멧자락은 비가 오거나 말거나 늘 괜찮아요. 나무가 있고 풀이 있는 멧자락은 보송보송하지요. 손가락으로 땅바닥 누르면 손가락 쏘옥 들어갈 만큼 보드랍지요. 그런데 이 보드라운 숲흙은 큰비에든 작은비에든 튼튼하고 씩씩합니다. 풀뿌리와 나무뿌리가 흙을 지키니까요. 풀과 나무가 흙을 살리니까요. 흙은 풀과 나무를 북돋우고, 풀과 나무는 흙을 지켜요.


  시멘트바닥과 아스팔트길은 무엇을 지킬까요. 그래요, 시멘트바닥과 아스팔트길은 자동차를 지키지요. 아파트를 지키고 높다란 건물 지키지요. 시멘트는 도시를 지켜 물질문명 사회 세워요. 아스팔트는 도시를 북돋아 물질문명 사회 키워요. 도시에서 자동차 없는 나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으리라 느껴요. 시골에서도 자동차 없이 농사를 짓거나 살림을 꾸릴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오늘날 거의 사라졌다고 느껴요. 흙이 없으면 밥도 물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지만, 흙을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나머지 학교 운동장에서조차 흙을 몰아내요. 도시는 공원에서도 흙을 밟지 못해요. 도시 놀이터에서는 아이들이 흙을 만지며 놀 수조차 없어요. 도시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가운데에는 흙 한 줌 없는 시설 제법 많아요.


  생각할 수 있어야 해요. 자동차 다니는 찻길에서는 아무런 잔치도 놀이도 얘기마당도 어울림판도 이루어지지 못해요. 자동차가 다니지 못해야, 자동차가 서지 않아야, 자동차가 모두 사라지고 없어야, 비로소 동네사람이든 마을사람이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잔치마당 펼쳐요. 서울 광화문을 생각하면 쉬 알 수 있을까요. 자동차를 몰아낸 광화문 너른터 되기에 비로소 그곳에서 무언가 잔치라든지 행사를 꾀하지요. 자동차 싱싱 달리면 사람들은 아무것 못할 뿐 아니라, 뿔뿔이 찢어지거나 흩어져요. ‘재래시장’이라고 하는 오래된 저잣거리에 왜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따스한 기운 감도는가를 떠올려요. 오래된 저잣거리에는 자동차 드나들지 못해요. 오직 사람들이 두 다리로 걸어서 오갈 뿐이에요.


  자동차 대는 자리가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백화점이나 커다란 할인매장을 떠올려요. 이런 데에서 따스한 기운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백화점 일꾼조차 힘겹거나 고단한 일에 지쳐요. 곧, 자동차 있는 곳에는 민주주의 없어요. 자동차 있는 곳에는 평화 없어요. 자동차 달리는 찻길에서는 평등도 복지도 통일도 자유도 권리도 꿈도 사랑도 믿음도 배움도 없어요. 자동차 달리는 찻길에는 오직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와 매판권력과 노예교육만 있어요.


  숲은 시멘트로 안 덮어도 빗물에 쓸리지 않아요. 또 숲은 빗물에 조금씩 쓸려 냇물이나 바닷물로 흘러들어도 돼요. 풀과 나무가 가을 지나 겨울 되고 다시 봄이 되는 동안 새 흙 태어나도록 가랑잎 떨구고 풀잎 지거든요. 잘 생각해 보셔요. 백두산이든 지리산이든 한라산이든 높이가 낮아지지 않아요. 비를 그렇게 맞으며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 해를 살았어도 멧자락은 높이가 낮아지지 않아요. 흙이기 때문이고, 흙땅에 풀과 나무가 살아가기 때문이에요.


  시골이 시골답게 빛나는 길을 헤아려요. 도시가 도시답게 즐거운 길을 살펴요. 독재정권 새마을운동이 저지른 ‘슬레트 지붕’이 나쁜 줄 이제서야 깨닫고는, 요즈음 들어 나라에서 큰돈 들여 시골마을 슬레트집을 하나씩 허물어요. 그러나, 슬레트 지붕 쓰레기를 어떻게 하려는지 딱히 대책이나 정책은 없어요. 그저 허물어 어느 쓰레기매립지에 파묻을 뿐이에요. 핵발전소 핵쓰레기만 걱정할 일 아니에요. 온 나라 뒤덮은 시멘트바닥과 아스팔트길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해요. 상수도 공사이니 무슨 공사이니 하면서 아스팔트길이나 시멘트바닥 자주 뜯지요? 그러면, 이렇게 뜯은 아스팔트쓰레기와 시멘트쓰레기는 어떻게 하나요? 어마어마한 시멘트쓰레기 어찌해야 할까요. 아파트 재개발 할 때마다 쏟아질 시멘트쓰레기는 또 어떡해야 할까요. 흙집은 허물어도 흙으로 돌아가고, 다시 흙집 지으면 되지만, 도시를 이루는 엄청난 시멘트집에서 나올 시멘트쓰레기 앞으로 어디에 어떻게 버리려나요. 제발, 도시 시멘트쓰레기 시골에 몰래 갖다 버리지 마셔요. 부디, 시골 흙땅에 함부로 시멘트 덮지 마셔요. 4346.5.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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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믿는 마음

 


  아버지가 두 아이 데리고 마실을 다니면 둘레에서 으레 “애 엄마는 어디 가고?” 하면서 혀를 찹니다. 작은아이 아직 안 태어난 지난날, 큰아이와 아버지가 마실을 다녀도 둘레에서 곧잘 “애 엄마는 뭐 하고?” 하면서 혀를 찼습니다. 거꾸로, 아이들 어머니가 아이들 데리고 다니면 어느 누구도 “애 아빠는 어디 가고?”라든지 “애 아빠는 뭐 하고?”처럼 묻지 않습니다.


  혀를 차는 이들은 ‘당신이 읊는 말’을 ‘아이들이 듣는 줄’ 헤아리지 않습니다. 예부터 일소도 말귀를 모두 알아들어 일소 앞에서 누가 일 잘 하고 못 하고를 말하지 말라 했는데, 아이들 앞에서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할 노릇 아닙니다. 혀를 차고 싶으면 그저 마음속으로 찰 노릇이고, 입밖으로 나올 말은 아무렇게나 뇌까리지 말 노릇입니다.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나오고, 시외버스를 타고 순천으로 가는 길에, 작은아이는 아버지 무릎에 기대어 새근새근 잡니다. 큰아이는 아버지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다가 뜨다가 졸음 참으며 쉽니다. 작은아이가 아버지 무릎을 차지하니 큰아이는 아버지 어깨만 겨우 얻습니다. 그래도 씩씩하고 대견하게 먼 마실 잘 견디며 다닙니다. 어머니 함께 네 식구 마실을 다니면, 어머니 품을 작은아이가 차지하고, 아버지 품을 비로소 큰아이가 차지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 품에서 자랍니다. 아이들은 오롯이 믿으며 온몸을 맡길 만한 어버이 품에서 자랍니다. 어버이는 아이들을 품에 안습니다. 어버이는 아이들을 따사롭게 토닥이고 보듬으며 살아갑니다. 한편, 어버이로서는 아이들을 토닥일 수 있고 보듬을 수 있기에 날마다 새 기운 얻습니다. 나무는 흙을 붙잡고, 흙은 나무를 포근히 안습니다. 아이들은 나무요, 어버이는 흙입니다. 아이들은 흙한테 푸른 숨결 나누어 주는 나무요, 어버이는 아이들이 씩씩하고 튼튼히 설 수 있도록 돕는 포근한 흙입니다. 4346.5.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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