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알같은 글씨를

 


  깨알같은 글씨를 읽는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빼곡하게 책이 쌓인 헌책방 책시렁 한쪽 깨알같은 글씨로 작가와 출판사 이름이 적힌 책들 사이에 새삼스레 깨알같은 손글씨로 무언가 적어서 살며시 알리는 쪽글을 읽는다. 아니, 이 글씨를 누가 알아본담? 아니, 이 글씨는 누가 알아보라고 썼담?


  누군가 틀림없이 알아볼 사람은 알아보겠지. 이 책들 바라던 사람은 즐겁게 알아볼 테지. 이 책 하나 즐겁게 장만할 뿐 아니라, 나긋나긋 따사로이 적바림한 손글씨 쪽글 하나 기쁘게 맞이할 테지.


  헌책방이기에 볼 수 있고, 작은책방이라서 만날 수 있는 조그마한 깨알글씨이다. 그런데, 더 헤아리면, 이 책을 책시렁에 꽂으면서 ‘얼른 좋은 책임자 새로 만나서 잘 읽히기 바라’는 책지기 마음이 깃든 깨알글씨이다. 그저 이 책 하나에만 이 깨알글씨 붙이고 싶었을까? 모든 책에 저마다 다른 이야기 깃들었으니 다 다른 깨알글씨를 수북하게 붙이고 싶었으리라. 종이에 찍힌 글을 읽으며 글쓴이 넋을 맞아들이고, 책이 꽂힌 책시렁 사이를 돌아보면서 책지기 얼을 받아들인다. 4346.10.2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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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글 읽기
2013.7.10. 큰아이―동생 곁에서

 


  누나가 공책에 글을 쓰는 곁에 동생이 달라붙어 논다. 작은아이는 큰아이 언저리에서 맴돌듯이 논다. 큰아이는 동생이 장난감 자동차 굴리며 입으로 내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한 마디 톡 쏘지만, 작은아이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작은아이는 누나하고 함께 놀고 싶은 마음이지만, 누나는 누나 할 일이 있다. 큰아이는 글씨쓰기를 하며 소리를 내어 읽으니, 작은아이는 곁에서 누나 목소리를 듣는다. 누나 목소리를 들으며 저절로 말을 익힌다. ㄱㄴㄷ와 가나다를 쓰도록 하기도 하지만, 큰아이 읽는 소리를 작은아이가 배우기도 하니, 다른 말들을 엮어 큰아이가 소리내어 쓰도록 이끌곤 한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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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10-29 16:21   좋아요 0 | URL
와우, 이 사진이 오늘 저를 웃게 합니다.
다섯 컷 짜리 만화 같아요.

파란놀 2013-10-29 16:11   좋아요 0 | URL
누나가 동생이 달라붙으니 싫어하면서도
종알종알 말을 잘 가르쳐 주고
동생은 아랑곳않고 달라붙으며 놉니다 ^^;;
 

아이 그림 읽기
2013.7.23. 큰아이―이야기 그림

 


  서재도서관 도와주는 분들한테 작은그림 선물로 드리려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큰아이도 아버지 곁에서 그림을 그린다. 큰아이는 제가 그린 그림을 아버지가 그린 그림이랑 함께 넣어서 보내란다. 그렇구나, 고맙네. 그렇지만 아버지는 아버지 그림만 보낼래. 네 그림은 우리 집에 붙이자. 큰아이가 쳇 쳇 하며 토라진 얼굴이다. 얘야, 모든 사람한테 다 보내도록 그리자면 네가 하루 내내 그려도 다 못 그려, 그러니 그렇게 하고 싶으면 나중에 하고, 하나하나 이야기를 넣어 그린 이 그림들은 벽에 붙여서 ‘이야기 그림’이 되도록 하자. 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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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10-29 15:54   좋아요 0 | URL
맨 오른쪽 그림은 사름벼리가 혼자 생각해서 그렸나요? 아니면 뭘 보고 그렸나요?

파란놀 2013-10-29 16:12   좋아요 0 | URL
모두 다 아이가 스스로 생각해서 그린 그림인데,
맨 오른쪽 그림은... 바다를 나는 나비였던가 하늘을 나는 나비였는데...
아주 놀라운 선 처리와 색감이었어요 @.@
 

그림순이 어린이

 


  두 눈으로 본 모습을 그린다. 마음속으로 헤아린 모습을 그린다. 그림은 삶이면서 꿈이다. 살며 마주하는 아름다운 빛을 그림으로 담는다. 꿈꾸며 사랑하고픈 고운 이야기를 그림으로 빚는다. 아이가 그림순이 되어 그림놀이를 할 적에, 나도 곁에서 그림돌이 되어 그림놀이를 함께 즐긴다. 4346.10.2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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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창고 손가락

 


  헌책방 책지기는 책을 캐내려고 온몸을 쓴다. 책을 깨끗하게 보고 나서 헌책방으로 곱게 들고 와서 내놓는 분도 있으나, 책을 아무렇게나 내다 버리는 사람과 기관이 더 많아서, 헌책방 책지기들은 버려진 책을 되살리려고 여러모로 품을 들이고 겨를을 쏟아야 한다. 그리고, 책방에 책이 쌓이는 흐름에 맞추어 책꽂이를 새로 짜야 한다. 이러는 동안 손이 곧잘 다치고, 손가락이나 손바닥에 반창고를 붙이는 일이 잦다. 장갑을 끼고 일해도 손가락이나 손이 다치곤 한다.


  헌책방 책지기한테 “일하는 예쁜 손”을 사진으로 찍으면 어떻겠느냐 하고 으레 말씀을 여쭙는데, 모두들 “이 못생긴 손이 뭐가 예쁘냐?” 하시면서 손사래를 친다. 하는 수 없이 헌책방 책지기 손을 사진으로 못 담는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책값을 셈하고 나서 간이영수증 한 장 손글씨로 적어 주십사 하고 말씀을 여쭈는데, 간이영수증에 날짜와 책값을 찬찬히 적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렇구나, 따로 손을 찍자고 하면 모두들 남우세스러워 하시니, 이렇게 영수증 적으실 적에 살짝 사진으로 담으면 되겠네.’하고 느낀다.


  폐지처리장과 고물상을 뒤져 책을 캐내고, 캐낸 책을 닦고 손질하면서 다치거나 굵어지거나 투박해지는 손가락이 바로 책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온 손가락이라고 느낀다. 책 하나 아름답게 읽히기를 바라며 품을 들인 손가락이다. 책 하나 사랑스레 다시 빛날 수 있기를 꿈꾸며 긴 나날 바친 손가락이다. 4346.10.2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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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0-29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창고 붙이신 손가락 사진,이 그렇듯
깊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네요~^^

파란놀 2013-10-29 14:33   좋아요 0 | URL
헌책방 일꾼들 손가락은 늘 이렇게 생채기투성이라 반창고를 붙이셔요.
고물상에서 책들을 건져낼 적에, 또 책을 실어 나를 때에,
실어 나른 책을 손질할 적에
그야말로 품이 많이 들어요.

가상 2013-10-29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쉽게 쓴 책은 없을텐데 너무 쉽게 가지고, 또 버립니다. 어떤 손이든 '살리는 손'은 예쁩니다.

파란놀 2013-10-29 14:33   좋아요 0 | URL
그래도 헌책방이 있어
쉽게 버려지는 책들이
다시 빛을 볼 수 있고,
알뜰히 쓴 책 또한
두고두고 되읽히며 사랑받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