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꽃

 


찔레꽃 하얗게 빛나면서
감꽃 노랗게 밝더니

 

어느새
밤꽃 샛노랗게 터진다.

 

밤꽃내음 차분히 가라앉으면
이제
어느 여름꽃
고운 빛무늬 되어
살포시 살뜰히 살가이
찾아들까.

 


4346.6.14.쇠.ㅎㄲㅅㄱ

 

..

 

다른 꽃들과 마찬가지로
밤꽃도 한철입니다.
지난여름
밤꽃을 바라보며 쓴 글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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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 이오덕과 권정생이 주고받은 아름다운 편지
이오덕.권정생 지음 / 한길사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 이오덕·권정생 편지글 무단출간 열 해

 


  꼭 열 해가 되었습니다. 이오덕 님과 권정생 님이 주고받은 편지를, 한길사 김언호 대표가 아무런 허락도 동의도 받지 않은 채 함부로 내놓아(무단출간) 말썽을 일으킨 지 꼭 열 해가 되었습니다.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라는 이름을 붙여, 이오덕 님과 권정생 님 두 분이 주고받은 편지를 남몰래 펴내고 엄청나게 광고를 하면서 며칠만에 수천 권을 팔았습니다. 몇 부를 찍었는지 이오덕 님 유족과 권정생 님한테 밝히지 않은 채, 이 책이 말썽이 되고 이레쯤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서점 회수’를 했지만, 고작 돌아온 책은 1200권쯤입니다. 이 책이 말썽이 난 줄 알아차린 서점에서는 ‘다 팔리고 없다’면서 회수를 안 하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책방에서 사라져야 한 이 책을 어떤 사람은 ‘30만 원’ 값을 붙여 팔기도 합니다.


  지난 2003년 11월 10일을 떠올립니다. 나는 그때에 충북 충주 무너미마을에서 이오덕 님 유고와 원고와 책을 한창 갈무리했습니다. 이오덕 님이 흙으로 돌아간 뒤 남은 수많은 글뭉치와 책을 하나하나 살피고 닦고 손질하고 갈래를 지어 나누면서 지냈습니다. 이날도 여느 때처럼 이오덕 님 원고 가운데 묻힌 글을 살피고, 묻힌 글을 한글파일로 옮기는 일을 했어요. 그런데 아침에 어느 분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이오덕 님 큰아들이요 충주 무너니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이정우 님한테 전화가 왔어요. ‘이번에 나온 (이오덕) 선생님 책 눈물을 흘리면서 읽었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깜짝 놀랐지요. 이즈음 나온 이오덕 님 새책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무슨 일이요, 무슨 책이요, 하면서 전화 거신 분한테 다시 여쭈었고, 이정우 님은 한길사로 전화를 걸어 “무슨 책을 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한길사에서는 처음에 책을 안 냈다고 했습니다. 편집부 일꾼도 김언호 대표도, 처음 두 차례 전화통화에서는 책을 낸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갔으나, 낮에 다른 분한테서 무너미마을로 전화가 왔어요. ‘책 나온 소식을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한길사에 전화를 거니, 그제서야 “책을 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김언호 대표는 이정우 님한테 전화를 걸어 “좋은 책 내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 하고 말했습니다. 덧붙여 “이오덕 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 이미 허락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오덕 님 글과 책을 갈무리하면서, 이 글과 책이 나오도록 하는 일을 맡던 나였기에, 한길사 편집부 강옥순 주간한테 전화를 걸어 “왜 출판계약서도 없이 책을 내셨습니까?” 하고 여쭈었습니다. 강옥순 주간은 “이오덕 선생님은 예전에도 한길사에서 책을 내실 때는 출판계약서를 쓰지 않았어요. 구두로만 계약을 한 뒤 인세가 발생하면 이를 정산해서 지급해 드렸어요. 이렇게 하면 이오덕 선생님이 받아들였어요.” 하고 말합니다. 참말 그런가 하고, 전화를 끊고 나서 이오덕 님이 남긴 서류를 찾아보니, 한길사에서 낸 책들 출판계약서가 있습니다. 이오덕 님은 출판계약서가 없이 한길사에서 책을 내지 않으셨습니다.


  한길사에서는 허락을 안 받은 채 책을 함부로 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한길사에 ‘편지 원고’가 있었을까요? 이오덕 님은 돌아가시기 앞서 편지 원고를 어느 출판사에 맡겨야 할는지를 놓고 몹시 망설였습니다. 어느 출판사도 미덥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이 얘기를 듣고는 이녁이 한번 구경해 보겠다 하면서 여러 차례 부탁해서 편지 원고를 가져갔고, 어느새 편지 원고를 모두 입력해 놓았습니다. 그러고는 이오덕 님을 자꾸 재촉했습니다. 이오덕 님은 ‘이 편지 원고는 나(이오덕)와 권정생 선생이 모두 죽은 뒤에나 나올 수 있다’면서, 함부로 내놓을 책이 아니라 말하며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러나,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이오덕 님이 손사래를 쳤어도 여러 해에 걸쳐 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오덕 님은 ‘나(이오덕)와 권정생 선생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두 사람이 죽고 나서 책이 나와야 하고, 내(이오덕)가 죽은 뒤에 아들(이정우)한테 이 책 내는 일을 맡길 테니, 아들하고 이야기하라.’ 하고 말씀했습니다. 권정생 님도 이오덕 님하고 말씀을 맞추셨고, 이녁이 죽은 뒤 서른 해가 지나고 나서 책으로 내기를 바라셨습니다. 이에 이정우 님은 “서른 해는 너무 길고, 열 해 뒤에 내기로 하지요.”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권정생 님도 “내가 죽고 나서 열 해 뒤라면 괜찮다.” 하고 말씀했습니다.


  이오덕 님은 2003년에 흙으로 돌아가셨고, 권정생 님은 2007년에 흙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오덕 님이 흙으로 돌아가신 지 열 해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네 해 지나면 권정생 님이 흙으로 돌아가신 지 열 해가 됩니다.


  이오덕 님이 남긴 일기를 다섯 권으로 갈무리해서 2013년 봄에 《이오덕 일기》(양철북 펴냄)가 태어났습니다. 열 해가 지난 뒤에 얼마든지 책이 태어날 수 있습니다.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라는 책이 이 땅에 태어나 사람들한테 아름답게 읽히도록 하자면, 이렇게 열 해를 기다리면 될 노릇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책은 아름다운 손길로 엮을 때에 태어납니다. 아름다운 글을 안 아름다운 손길로 엮어서 내놓으면, 이 책을 만날 사람들부터 안 즐겁고 안 반갑습니다. 그냥 지식으로 읽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눈빛으로 어루만지면서 아름다운 손빛으로 보살펴야지요.


  좋은 책을 읽는대서 좋은 사람이 된다고 느끼지 않아요. 좋은 책을 읽으며 얻은 좋은 넋과 슬기를 스스로 좋은 삶으로 일구면서 나눌 때에 비로소 좋은 마음과 좋은 사랑이 우리 보금자리부터 싹틀 수 있다고 느낍니다.


  앞으로 네 해 더 지나 맞이할 2017년에 어떤 책들이 이 땅에 태어날까 궁금합니다. 그즈음에 태어날 새로운 책 가운데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가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그즈음에 이오덕 님과 권정생 님이 주고받은 편지가 책으로 태어날 수 있다면, 아무래도 한길사 아닌 다른 출판사에서, 그리고 시골에서 살림을 꾸리는 조그마한 출판사에서, 작은 사랑과 작은 꿈과 작은 빛을 가슴으로 받아안으며 나올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돈을 바라는 큰 출판사에서 이런 광고 저런 홍보를 하며 팔 만한 책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사랑을 바라고 꿈을 키우려는 작은 출판사에서 입소문으로 천천히 오래도록 따사로운 손길을 받도록 내놓아 읽힐 책이라고 느낍니다.

 

(최종규 . 2013)

 

이 책을 놓고 2003년에 오간 이야기를 다음 주소로 들어가면 찾아 읽을 수 있습니다.

 

(글 1) http://blog.aladin.co.kr/hbooks/5203761

 : 한길사는 이오덕, 권정생 선생님 앞에 사죄해야

(글 2) http://blog.aladin.co.kr/hbooks/5203767

 : 기사로 담지 못한 이야기

(글 3) http://blog.aladin.co.kr/hbooks/5203772

 : 중앙일간지 후속보도 + ...

(글 4) http://blog.aladin.co.kr/hbooks/5205006

 : 주중식 반론 글 + ...

(글 5) http://blog.aladin.co.kr/hbooks/5205010

 : 한길사 공식 입장 + ...

..

 

2003년부터 열 해가 흘렀는데,

2013년 오늘까지도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사과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사과를 하려 했다면 벌써 했을 테니,

아마 앞으로도 사과를 하지 않으리라 느낍니다.

 

몇 가지 자료사진을 붙입니다.

 

..

 

 

 

 

 

 

..

 

덧붙여, 이런 자료들도 있습니다.

참 슬픈 일이지요.

 

..

 

 

 

청년사는 이 내용증명을 받고도

두 가지 책을 몇 만 권 더 찍어서 몰래 팔았습니다.

 

..

 

 

 

이오덕 선생님은 출판사들이 판매부수를 자꾸 속이니

모든 책에 인지를 붙이셨는데,

이렇게 인지 안 붙인 책을,

이오덕 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버젓이 유통시켰습니다.

 

..

 

사람들은 무엇을 배울까요.

사람들은 무엇을 가르칠까요.

 

..

 

한길사 무단출간 열 해가 된 오늘...

가슴이 너무 찌릿찌릿 저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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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1-10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만 해도 2003년에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를 '아 이오덕님과 권정생님이 주고 받으신 편지로구나'하며 반가운 마음으로 책을 사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 책이, 그 분들이 원하지도 않았고 더구나 생전에 약속까지 한 일을 어기고 이오덕님이 돌아가신 해에 이런 식으로 나왔다니 놀랍고 안타깝네요. 더구나 돌아가신 분과의 출판계약서까지 없었다는 거짓말을 하면서요. 원고 도둑질까지 해서 말이지요.
"좋은 책 내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 좋은 책이라는 건 아는 사람들이, 그 좋은 책이 어째서 좋은 책인가는 잘 헤아리지도 못 하면서 다만 자신들의 이익을 낼 마케팅으로만 책을 펴낸 그 속사정을 읽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쓸쓸하네요. 무엇이 그리 급해서 그렇게 약속도 안 지키고 거짓말까지 하며 책을 출간했을까요.
저도 그 전에는 단지 이오덕이란 참교육을 하시는 분의 책이라는, 그 생각으로만 이오덕님의 책들을 그저 '읽기'만 했는데 이번에 나온 <이오덕일기>를 읽고 나서야 비로소 그 분의 참교육이 무엇이었는지를 새로 헤아리며 더욱 참삶으로서의 책읽기를 만났지요.
정말 함께살기님의 바람대로 2017년에 참다운 사랑과 꿈을 펼치며 여는 곳에서 새로 펴낼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를 기다립니다.
정말 '좋은 책'은 무엇이고, 그 '좋은 책'을 펴내고 읽는 마음은 무엇일까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아침입니다.
함께살기님! 마음 고생도 많이 하시고 애 많이 쓰셨습니다...




파란놀 2013-11-10 11:01   좋아요 0 | URL
그무렵, 한길사에서는 이 책을 3000권 찍고 1500권 팔았다고 처음에 얘기했지만, 이정우 님이 새벽같이 짐차를 몰고 시골에서 파주로 달려가서 창고에 보니, 책이 1200권 있었습니다. 이정우 님이 한길사에 '서류로 몇 부 찍었는가를 달라' 했지만,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끝까지 서류를 아무것도 안 주었어요. 입으로만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 초판 발행부수와 판매부수는 내부관계자들이 양심선언을 하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나저나 이 책 나왔을 때에 appletreeje 님은 반갑게 읽어 주셨군요. 참 고마운 손길입니다. 참말 그렇게 사랑받고 두고두고 읽혀 사람들한테 아름다운 이야기빛 베풀 수 있는 책으로 자리잡았으면 좋았을 텐데요.

2017년에 책이 못 나오면... 2067년에는 책이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흠, 너무 먼 앞날일는지 모르지만, 2067년에 책이 나와도 재미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

많은 분들이 이오덕 선생님 책에서 '참교육'을 읽기는 하지만, '참교육'을 삶으로 누리거나 나누지는 못해요. 그래서 이런 안타까운 일이 터졌지요. 그리고, 잇따라 다른 안타까운 일도 자꾸자꾸 터졌어요. 이제는 좀 홀가분하게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 저도 어느 만큼 후련하기도 합니다.
 

자전거순이 5. 두 팔을 벌려 (2013.8.26.)

 


  자전거를 타며 두 팔을 죽 펼치면 얼마나 시원할까. 바람이 머리카락과 눈썹을 날리고, 얼굴 목 가슴 배 다리 샅샅이 건드리면서 지나가면 얼마나 상큼할까. 샛자전거에 앉은 큰아이가 두 팔을 펼치며 자전거놀이 즐길 때에 무어라 나무랄 수 없다. 얼마나 시원하며 상큼한가를 잘 아니, 신나게 놀 수 있도록 자전거를 반듯반듯 몬다. 뒷거울 살펴 뒤에서 따라오는 자동차 있으면 팔 내리라 하고, 뒤에 자동차 없으면 마음껏 팔벌리기 하도록 해 준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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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3.8.26.
 : 여름바다, 잘 있어라

 


- ‘여름 휴가철’이 끝난다. 드디어 ‘여름 휴가철’이 끝난다. 여름 휴가철 내내 바닷가에도 골짜기에도 도시 손님들 넘쳐서 우리 아이들 느긋하게 놀지 못했다. 외진 골짜기까지 도시에서 온 손님에다가 다른 마을에서 술병 들고 찾아드는 어르신이 있어 여러모로 고단했다. 더운 여름날, 골짝물 흐르는 시원한 숲그늘에서 술 한잔 즐기고픈 마음은 알겠지만, 마치 잔치판이라도 벌이듯 골짜기 한켠에서 판을 크게 벌여 놀고는 쓰레기 잔뜩 버리는 짓은 하나도 안 반갑다. 도시사람도 놀 줄 모른다지만, 시골사람도 놀 줄 몰라서야 되겠는가. 시골 바닷가나 골짜기에서는 불을 피우거나 뭘 구워먹지 말아야 할 노릇이지만, 이를 지키는 사람이란 없고 이를 키져보는 사람 또한 없다.

 

- 들빛 푸르게 맑은 여름 막바지에 바닷가로 자전거마실을 간다. 여름 내내 아이들과 바닷가와 골짜기를 돌아다닌다. 도시 손님 넘치는 바닷가 말고 고즈넉한 바닷가를 찾아보려 했지만, 끝내 못 찾았다. 자전거를 달려 알아보기에는 내 다리가 너무 힘든가. 그래도 다음해 여름에는 조용하고 홀가분한 바닷가를 다시 찾아보고 싶다.

 

- 큰아이가 샛자전거에 앉아 손잡이를 거의 안 잡는다. 문득문득 느끼기는 하지만, 참말 손잡이 안 잡고 두 팔 벌리면서 놀든지 뭔가를 한다. 아직 어리니까 이렇게 놀아야겠지. 더 나이를 먹으면 샛자전거에서 발판 함께 구르며 아버지를 도와주겠지.

 

- 면소재지를 거쳐 발포바닷가까지 가는 동안 나무그늘이 없다. 시골 분들은 찻길 가장자리까지 밭을 일구느라 나무 한 그루 자랄 손바닥만 한 땅뙈기조차 내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시골 분들은 들일을 하며 다리를 쉬며 땀을 들일 나무그늘이 없는 셈이다. 스스로 이렇게 만든다. 나무열매 즐기는 맛이 없고, 나무그늘에서 나무노래 들으며 한갓지게 낮잠을 자거나 쉬려는 멋이 없다. 그런데, 나무 없이 어떤 마을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나무 없이 어느 집이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화덕마을 지나 상촌마을 못 닿아 발포바닷가 쪽으로 꺾는 옛길이 있다. 군내버스도 마을사람도 으레 새길로 다닌다. 나는 굳이 옛길로 달린다. 옛길에는 길가에 나무가 마주보며 자란다. 짧은 길이지만 나무를 누리며 달리는 길이다.

 

- 여름 휴가철 끝난 바닷가는 아주 조용하다. 이 바다는 온통 우리 차지가 된다. 큰아이는 헤엄옷으로 갈아입고 논다. 작은아이는 수레에서 새근새근 잔다. 바닷가로 마실을 올 적에 작은아이는 으레 잠이 들고 만다. 큰아이가 신나게 놀고 쉴 즈음 비로소 작은아이가 깬다.

 

- 한참 놀고 나서 집으로 돌아간다. 늦여름 시골마을은 온통 푸른 물결이다. 이곳도 저곳도 푸른 물결이 싱그럽다. 그러나, 이 푸른물결을 마냥 싱그럽게만 바라보지 못한다. 어느 논이고 밭이고 죄 농약바람 맞는 들이기 때문이다. 겉보기로는 푸른물결이지만, 풀벌레 깃들지 못하고 제비와 멧새 모조리 죽이며 개구리 한 마리 살아남지 못하는 소리없는 푸른물결이다. 사람들이 새와 벌레와 짐승하고 벗삼으며 숲노래 부르던 지난날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뉘엿뉘엿 지는 해를 따라 집으로 돌아간다.

 

(최종규 . 2013 - 시골에서 자전거와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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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쪽지 2013.11.9.
 : 가을비 맞으며

 


- 도화고등학교 학생 둘이 서재도서관에 찾아왔다. 비구름 그득해서 날이 어둑어둑하기에 도서관은 슥 둘러보기만 하고, 함께 집으로 와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고는 저마다 돌아갈 집이 있어 마을 어귀로 나와 군내버스를 기다린다. 한 아이는 남성마을로, 한 아이는 고흥읍으로 간다. 저녁 일곱 시 오 분이 군내버스가 두 갈래로 들어온다, 읍내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버스가 더 일찍 오기 마련이지만, 오늘은 두 버스가 나란히 마을 어귀에 선다. 두 아이가 버스 타는 모습을 보고 나서 자전거를 달린다. 오늘은 가을비 촉촉하게 내리는 날이다.

 

- 내 비옷이 작다. 그러께까지 쓰던 비옷은 워낙 오래 입은 탓에 곳곳이 찢어져 비옷 구실을 못한다. 게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면소재지에서 비옷을 새로 장만했으나, 시골 면소재지에서 가장 큰 비옷이라 하는데에도 내 몸에는 꼭 붙는다. 가방을 등에 짊어진 채 입을 만한 비옷은 큰도시로 가거나 인터넷으로 알아보아야 하려나.

 

- 가을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달린다. 오늘은 모자를 깜빡 잊고 나온다. 모자가 없으니 안경을 쓰기는 했어도 눈과 얼굴로 빗물이 들이붓는다. 가을비 가운데 첫가을이나 한가을 아닌 늦가을 내리는 비이기 때문인지 자전거를 달리는 손이 시리다. 고흥은 포근한 겨울이라 겨울눈 구경하기 어려운 만큼, 겨울에도 겨울비 맞으며 자전거를 달려야 할는지 모른다. 빗길에 쓸 만한 장갑을 한 벌 마련해야 할까 싶다.

 

- 면소재지로 가는 길에 비를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 시골길을 오가는 자동차 없으니 느긋하게 달리면서 느긋하게 하늘바라기를 한다. 비 내리는 소리, 빗물이 비옷 때리는 소리, 빗방울이 논과 밭과 길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먼 멧자락마다 비구름 깊이 드리우는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본다.

 

- 면소재지 가게에 들르는데, 며칠 뒤에 무슨 날인지 가게 한쪽에 빼빼로가 수북하게 쌓인다. 그렇구나, 무슨 날이 있구나. 작은 빼빼로 한 통을 골라 본다. 면소재지 빵집에 들러 네모빵을 장만한다. 하루 지난 빵이라며 500원을 에누리해 준다. 하루 안 지났어도, 이틀 지났어도, 다 괜찮은데.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빗줄기가 가늘다. 조금 더 천천히 달려 본다.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는 천등산 멧자락이 훨씬 잘 보인다. 입을 헤 벌리며 자전거를 달린다. 빗길 자전거란 참 그윽하구나. 이 가을에 이 빗길을 달리며 저 멋스러운 모습 누릴 수 있으니 더없이 즐겁구나. 비옷이 너무 작아 사진기는 두고 왔다. 저 아름다운 비구름과 멧자락을 사진으로 담지 못하니 서운하고, 이 모습을 나 혼자만 누리는구나 싶어 아쉽다. 그래도 내 마음속에는 가을비 숲바람이 파고든다. 이 느낌을 잘 잡자. 다음에 큼지막한 비옷 장만한 뒤에 빗길 시골마을 빛살을 사진으로 담자.

 

- 신기마을 앞에서 짐차 하나가 자전거 달리는 길로 마주 달린다. 저런 미친 놈이 다 있나 하면서도 그대로 달리다가, 내가 옆 찻길로 꺾는다. 엉뚱한 찻길로 달리는 짐차가 제길로 들어설 생각을 않는다. 틀림없이 마을회관에서 술 퍼마시고 달리는 사람이 탔으리라. 어떻게 저리도 터무니없이 자동차를 모는가. 어느 찻길로 달려야 하는 줄조차 모르면서 자동차를 술기운으로 달려도 되는가. 시골에서 바쁜 들일 다 끝난 요즈음, 할배들은 하나같이 날이면 날마다 술이다. 바쁜 일철이 아니어도 할배들은 들일 하는 동안 소주 한두 병 가볍게 깐다. 막걸리도 잘 안 마시고 다들 소주를 들이켠다. 작은 병 아닌 큰 병으로 훌떡훌떡 마신다. 술기운으로 경운기와 짐차와 오토바이를 몬다. 시골 할매나 할배 가운데 긴긴 겨울에 책을 벗삼아 마음밥 먹는 분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할매들은 여자 마을회관에서 화투를 치고, 할배들은 남자 마을회관에서 소주를 퍼붓는다.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면서 짚삶이 사라진 뒤, 이제 시골마다 겨울에는 온통 화투판과 술판만 남는다. 시골마을 어린이와 푸름이와 젊은이는 모조리 도시로 떠났으니, 시골에서 무언가 남다르거나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나거나 자라지도 않는다. 가을비 뿌리는 오늘 같은 날, 들빛과 숲빛과 바다빛과 마을빛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누리는 눈빛이 어디에도 없다.

 

(최종규 . 2013 - 시골에서 자전거와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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