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와 통하는 탈핵 이야기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12
최열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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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69

 


‘탈핵’은 삶을 찾는 첫걸음
― 10대와 통하는 탈핵 이야기
 최열, 김익중, 이원영, 한홍구, 우석균, 강양구, 소복이
 철수와영희 펴냄, 2014.3.11.

 


  봄비가 내립니다. 오늘은 우체국에 찾아가서 편지를 한 통 부치려 했는데 아침부터 일찍 봄비가 내립니다. 봄비가 내리는 들과 숲은 촉촉하게 젖습니다. 비구름이 뿌옇게 낍니다. 비가 마을을 적시는 동안 경운기 지나가는 소리도 짐차 달리는 소리도 없습니다. 마을은 아주 조용합니다. 두 시간에 한 대 지나가는 군내버스도 빗소리에 묻힙니다.


  빗물로 젖는 나무를 바라봅니다. 뒤꼍 매화나무는 폭신한 꽃망울이 터질 듯 말 듯합니다. 며칠 사이에 확 터지겠구나 싶은데, 오늘 비가 하루 내내 내리면서 미처 터지지 못한 채 빗물에 떨어지는 아이도 있을는지 모릅니다. 겨우내 봄을 기다리며 한껏 부풀던 꽃망울이 빗물에 그만 떨어지만 안쓰럽습니다. 그러나 나무 둘레에 떨어진 애틋한 꽃망울은 다시 흙이 되고 나무로 스며들어 새로운 겨울을 날 테고 새로운 봄을 기다리겠지요.


.. 이미 우리는 전 지구적인 소비를 하고 있어요 … 인간의 수명은 길어야 100년밖에 안 됩니다. 핵발전소의 수명은 40년 안팎이에요. 핵폐기물은 10만 년을 계속 갑니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볼 때 3000세대의 후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예요 … 대부분이 핵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일방적인 홍보의 결과이지요. 우리는 오랫동안 핵이 공해가 없고, 안전하고, 경계적이라고 배워 왔어요 ..  (17, 29, 31쪽/최열)


  처마를 타고 빗물이 흐릅니다. 빗물이 흐르면서 새로운 물줄기가 열립니다. 사람한테는 조그마한 웅덩이가 도랑쯤이 될 테지만, 개미나 거미처럼 작은 벌레한테는 커다란 냇물입니다.


  빗물은 지붕을 적시고 찻길을 적십니다. 빗물은 바다에도 멧자락에도 골고루 드리웁니다. 모든 풀과 나무는 이 빗물을 먹고 자랍니다. 모든 짐승은 풀과 나무가 자라는 숲과 들에서 목숨을 잇습니다. 모든 사람은 풀과 나무와 짐승과 벌레가 골고루 어우러진 지구별에서 얼크러져 살아갑니다.


  어릴 적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놀았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빗놀이를 합니다. 눈이 오는 날에는 눈놀이를 하지요. 빗물을 혀로 날름날름 받아먹기도 하고, 얼굴로 빗방울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빗물이 여느 빗물이 아닌 산성비라고 했어요. 예전에는 경제개발이라는 목소리만 외치더니 어느 때부터 냇물과 샘물과 빗물이 모두 더러워져서 마실 수 없다고 했어요. 화학약품을 써서 수도물을 마셔야 한다고 했어요.


  빗물을 맞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처음으로 퍼질 무렵, 한국에서 퍽 멀리 떨어진 어느 나라에서 핵발전소가 터집니다. 핵발전소가 터진 이야기를 어릴 적에 못 들었습니다. 어릴 적에 학교에서는 언제나 ‘핵은 깨끗한 에너지’라고 가르쳤어요. 석유와 석탄은 앞으로 말라서 없어질 테니, 우라늄을 써서 핵발전소를 지어 깨끗한 전기를 써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 일본은 사고 후 2개만 남기고 모든 핵발전소의 가동을 중지해습니다 … 우리 나라에도 수명을 연장한 핵발전소가 있습니다. 고리 1호기, 월성 1호기입니다. 모두 지은 지 30년이 넘은 시설들이에요. 바로 옆 일본에서 사고가 났는데도 폐쇄는커녕 안전성을 의심받는 상황에서 재운전을 강행합니다. 특정 학맥과 기관 출신들로 이뤄진 핵발전소 마피아들이 그 배경에 있어요. 막대한 이권이 얽힌 핵발전소를 얌전히 폐쇄할 리가 없는 거죠 … 방사능 물질이 탄소보다 더 환경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얘깁니다 ..  (60, 62, 71쪽/김익중)


  198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핵 = 깨끗함’이라고 배웠지만, 언제나 궁금했습니다. 핵에너지가 깨끗하다지만, 일본에 1945년에 떨어진 폭탄은 핵폭탄이지 않아? 한쪽에서는 깨끗한 에너지라지만 한쪽에서는 무시무시한 무기로 쓰잖아?


  어른들은 이 궁금함을 풀어 주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늘 외곬로 지식을 외우고 시험문제를 풀도록 했습니다. 또한, 핵에너지를 얻는 핵발전소 공사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제대로 밝히지 않았어요. 핵발전소를 지으며 전기를 얻으면 핵쓰레기가 나오는데, 핵쓰레기는 수십만 해 동안 꽁꽁 가두어서 새어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했어요. 그렇지만, 핵발전소를 만들 즈음 핵쓰레기를 수십만 해 동안 빈틈없이 가두는 재주는 없다 했어요.


  어느 나라에서는 드럼통에 넣고 바닷속에 버린다고 했어요. 어느 나라에서는 땅속 깊이 파서 버린다고 했어요. 그러나, 이런 핵쓰레기도 저런 핵쓰레기도 수십만 해 동안 방사능을 내뿜어요. 핵발전소에서 얻는 전기는 깨끗하다고 가르치지만, 정작 수십만 해를 더럽히는 무서운 쓰레기일 뿐 아니라, 지구별을 무너뜨리는 끔찍한 폭탄을 만드는 무기예요.


.. 요즘 학교 폭력이 문제시되고 있잖아요. 이런 것들도 아이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알려줌으로써 풀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텃밭을 가꾸고 생명의 탄생과 성장을 지켜보는 경험을 하도록 하는 겁니다. 분명히 효과가 있을 겁니다 ..  (100쪽/이원영)


  《10대와 통하는 탈핵 이야기》(철수와영희,2014)라는 책을 읽습니다. 한참 읽다가 1980년대 끝무렵 독일 이야기를 봅니다. 독일에서는 체르노빌 방사능으로 더러워진 우유를 분유로 만들었고, 방사능으로 얼룩진 분유는 몽땅 한국에서 사들였다고 합니다. 한국에 있는 모든 유제품 회사는 1980년대 끝무렵에 한국에서 ‘체르노빌 방사능 분유’를 팔았다고 해요. 1990년대를 넘은 뒤에도 ‘체르노빌 방사능 분유’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해요.


  설마 싶어 예전 신문기사를 살펴보니, 1989년에 ㅎ신문에 조그마한 기사가 하나 나옵니다. 다른 신문에서는 이 이야기를 안 다룹니다.


  왜 안 다루었을까요? 왜 오늘날까지 제대로 안 건드릴까요? 왜 한국 유제품 회사는 ‘체르노빌 방사능 분유’를 버젓이 팔았을까요? 그무렵 한국 정치꾼과 기자는 왜 이 같은 이야기를 제대로 파헤치지 않았을까요?


  체르노빌 방사능으로 더러워진 먹을거리는 분유뿐이 아닙니다. 분유도 우유도 빵도 과자도 라면도 모두, 방사능으로 더러워진 농산물로 만들었습니다. 케찹도 마요네즈도 똑같습니다.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를 살아온 아이들은 모두 ‘체르노빌 방사능’이 몸에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 일본에서 원폭이 터졌을 때, 히로시마에 피폭자가 42만 명 정도이고 그중에 죽은 사람이 약 16만 명쯤입니다. 여기엔 조선인 피폭자도 섞여 있습니다. 조선인 피폭자는 히로시마에 5만 명쯤, 나가사키에 2만 명쯤 해서 약 7만 명이 피폭을 당합니다. 죽은 사람은 히로시마 3만 명, 나가사키는 1만 명입니다 ..  (119쪽/한홍구)


  한국 어린이는 지구별 어느 나라보다 아토피를 많이 앓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는 어린이는 100% 아토피를 앓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아토피를 100% 앓는지 아무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밝히지 않습니다.


  가만히 따지면, 오늘날 모든 한국 어린이가 아토피를 앓는 까닭은 체르노빌 방사능 농산물 때문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1960년대부터 휩쓴 새마을운동 때문에 이 나라 시골에서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끔찍하게 퍼부었어요. 1960∼70년대에 도시에서 살던 사람은 모조리 농약과 화학비료에 젖어들어야 했습니다. 시골에서 살던 사람은 농약을 뿌리느라 몸이 망가졌겠지요.


  한쪽에서는 방사능 농산물과 가공식품이 춤추고, 한쪽에서는 농약과 화학비료와 항생제에 찌든 농산물과 가공식품이 춤춥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수많은 공장과 발전소에서 내뿜는 매연과 쓰레기가 넘치고, 다른 한쪽에서는 무섭게 늘어나는 자동차가 내뿜는 배기가스와 쓰레기가 넘칩니다. 게다가 흙집과 풀집을 모두 없애서 ‘석면 지붕’을 쓰도록 새마을운동 지도자 박씨가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이제 시골마을 ‘석면 지붕(슬레트지붕)’을 모두 없애려는 움직임이 일지만, 얼마 앞서까지 군대에서든 여느 사회에서든 석면에 고기를 구워먹기 일쑤였어요. 게다가, 석면에 이어 온통 시멘트로 지은 집이 넘쳐요. 시멘트를 안 쓰는 집이 없어요. 시멘트로 지은 집에다가 아스팔트로 길과 빈터를 뒤덮어요. 시골 논둑까지 시멘트로 덮고, 논자락 흙도랑까지 시멘트도랑으로 바꾸어요.


.. 후쿠시마엔 사고를 알리는 어떤 표시도 없었습니다. 경고문도 없고요. 겉으로 보기엔 사고 이전과 차이가 없었어요. ‘일상을 가장한 야만’이라는 표현이 떠올랐습니다 … 지금도 후쿠시마 원전에서는 하루 300톤의 오염수가 태평양 바다로 유출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것이 장기적으로 해양 생태계에 영향을 미칠 거라는 정도로만 파아가고 있어요 ..  (135쪽/우석균)


  ‘탈핵’ 하나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탈핵이란 겨우 첫걸음입니다. 탈핵만 한대서 더러워진 이 나라가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핵발전소는 없애지만, 엄청난 고속도로와 공장과 골프장이 그대로 있다면 어찌 될까요. 핵발전소는 없애지만, 시멘트집을 자꾸 늘리기만 하면 어찌 될까요. 핵발전소는 없애지만, 농약과 화학비료와 항생제를 몰아내지 않으면 어찌 될까요. 핵발전소는 없애지만, 자동차를 줄이지 않거나 석유를 줄이지 않으면 어찌 될까요.


  그리고, 핵발전소는 없애는데, 학력차별이나 계급차별이나 재산차별을 없애지 않으면 어찌 될까요. 핵발전소는 없애지만, 모두 도시로만 쏠리는 우리 사회를 바로세우지 않으면 어찌 될까요. 핵발전소는 없애지만, 입시지옥은 그대로 두면 어찌 될까요. 그야말로 탈핵은 첫걸음입니다. 이 첫걸음조차 제대로 디디지 못한다면, 지구별에서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며 살아갈 길은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4347.3.1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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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에서 살아가는 푸름이들이 ‘공동체’란 무엇일까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날에는 이런 이야기를 나눌 일이 없었다. 지난날에는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으레 모둠살이나 마을살이를 했기 때문이다. 도란도란 모둠살이나 마을살이를 했으니 굳이 ‘공동체’란 무엇일까 하고 이야기를 나눌 까닭이 없다. 삶으로 즐겁게 누리니, 지식이나 정보를 주고받지 않아도 넉넉하다. 오늘날은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함께 살아가는 길’을 가르치거나 보여주지 않기 일쑤이다. 학교에서는 시험을 치러 성적을 매기고 등급을 붙인다. 아이들은 서로를 동무나 이웃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스스로 등급으로 여기며 동무나 이웃도 등급으로 마주한다. 그러니, 푸름이한테 따로 인문학교실을 마련해서 ‘품’을 들려주고 가르치며 알려줄밖에 없다. 학교는 있되 삶이 없으니 청소년인문학교실이 있어야 한다. 《나에게 품이란 무엇일까》를 읽으며 생각한다. 이 나라에서 학교란 무엇이고, 교육이란 무엇일까. 이 나라 어른들 마음자리에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게 피어나는가. 4347.3.1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한 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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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품이란 무엇일까?- 공동체에 대한 고민
윤구병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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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4-03-12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나중에 <숲에서 살려 낸 우리말> 꼭 읽어보겠습니다.^^

파란놀 2014-03-12 17:32   좋아요 0 | URL
아, 고맙습니다 ^^
후애 님이 즐거이 읽고 소개해 주신다면
<숲말>은 널리널리 사랑받으면서
예쁜 꽃책으로 뿌리내리리라 믿어요 ^^

2014-03-12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12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삶에 푸른책

 


  한국말사전에는 ‘푸름이’라는 낱말은 없습니다. ‘청소년’이라는 낱말만 있습니다. ‘청소년’이라는 낱말은 한국말사전에 나오지만, ‘청소녀’라는 낱말은 안 나옵니다. ‘청소년’이라는 낱말이 머스마만 가리키지 않으나, 아무래도 ‘소년’이라는 낱말은 머스마만 가리킵니다. 흔히 쓰는 ‘청소년’이지만, 곰곰이 살피면 그리 쓸 만하지 않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푸름이’라는 낱말을 좋아하고 즐겨씁니다.


  어린이는 어린 사람을 가리킵니다. 푸름이는 푸른 사람을 가리킵니다. 몸이 푸르고 마음이 푸르기에 푸름이입니다. 사랑이 푸르고 삶이 푸르니 푸름이입니다. 다만, 오늘날 거의 모든 푸름이는 푸른 몸과 마음으로 지내지 못합니다. 푸름이 아닌 ‘예비 입시생’이나 ‘입시생’입니다. 거의 모든 푸름이가 대학바라기에 목을 매달아야 합니다.


  저는 전라남도 고흥이라고 하는 시골에서 두 아이와 함께 살아갑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인천이지만, 충청북도 충주 끝자락 멧골마을에서 여러 해 지낸 뒤 고흥 시골마을에 뿌리를 내렸어요. 우리 집 아이들이 푸른 숨결 마시면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뜻이고, 저와 곁님 두 사람도 푸른 숨결 먹으면서 즐겁게 일하기를 바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 네 식구가 전남 고흥 시골마을에 깃든 까닭 가운데 하나는, 두 아이를 앞으로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는 뜻이 있으며, 두 아이가 학교에 굳이 다니지 않으면서도 푸른 넋이 되고 푸른 사랑이 되어 푸른 삶을 가꿀 수 있기를 바라는 뜻이 있기도 합니다.


  저는 고등학교만 마친 학력입니다. 우리 곁님은 중학교만 마친 학력입니다. 더 꼼꼼히 말하자면, 저는 대학교에 들어가서 다섯 학기를 다닌 뒤 스스로 그만두었습니다. 우리 곁님은 고등학교를 두 해쯤 다니다가 스스로 그만두었습니다. 저는 대학교 문턱을 밟고 첫 학기를 듣던 날부터 우리 사회에서 대학교가 제구실을 안 하거나 못 한다고 느꼈습니다. 우리 곁님은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대학교뿐 아니라 고등학교도 중학교도 초등학교도 모두 제구실을 안 하거나 못 한다고 깨달았습니다. 저는 좀 늦게 알아챘고, 곁님은 일찌감치 알아챘습니다. 이런 얼거리를 알아채도 학교는 그냥 다녀서 졸업장을 거머쥘 수 있지만, 뒤틀리거나 비틀린 학교를 끝까지 마쳐서 졸업장을 가져야 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질없는 졸업장을 내밀면서 일자리를 얻고 싶지 않았어요. 덧없는 졸업장으로 내 얼굴에 껍데기를 씌우고 싶지 않았어요.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어 졸업장을 버렸습니다. 사랑스럽게 꿈꾸고 싶어 졸업장 아닌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저는 대학교를 다닐 적에도 신문배달을 하며 먹고살았는데, 대학교를 그만둔 뒤에는 배달 구역을 늘려 오로지 신문배달로 살림을 꾸렸습니다. 곁님은 고등학교를 그만둔 뒤에 편의점과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했습니다. 중졸 학력을 받아줄 만한 일자리는 거의 없었으리라 생각해요. 저 또한 고졸 학력을 받아주는 일자리는 참 적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고졸 학력으로 출판사에 일자리를 얻었어요. 이때가 1999년입니다. 2001년부터는 고졸 학력이면서 ‘한국말사전 만드는 기획편집자’가 되었습니다. 졸업장으로만 따진다면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저를 받아준 출판사에서는 졸업장이 아닌 마음을 바라보아 주었어요. 학력이나 경력이 아닌 제 마음속에 있는 빛과 꿈을 읽어 주었어요. 그래서 저는 2001년 1월부터 2003년 8월까지 한국말사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2003년 9월부터는 이오덕 선생님이 남긴 책과 글을 갈무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학력도 경력도 없던 제 삶이니, 학맥도 연줄도 돈도 없는데, 제 마음빛을 읽고 믿는 분들이 있기에 무척 뜻있고 값있으며 아름다운 일을 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신문배달 일을 하며 푼푼이 아끼고 모은 돈으로 꾸준히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출판사에 들어간 뒤에는 한 달 일삯 가운데 1/3을 책값으로 썼고 2/3는 적금을 부었어요.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기도 하고, 새책방이나 헌책방에 가서 서서 읽기도 했지만, 오래도록 되새기고 싶은 책은 언제나 허리띠 졸라매어 스스로 장만해서 밑줄을 그으면서 읽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한 해에 100권은 읽자고 다짐했고, 고등학교를 마친 첫 해에는 한 해에 500권은 읽자고 다짐했어요. 대학교를 다섯 학기 다니고 그만둘 무렵에는 한 해에 1000권은 읽자고 다짐했으며, 출판사에 들어가서 일할 즈음에는 한 해에 2000권은 읽자고 다짐했습니다. 이 다짐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잇습니다.


  한 해에 2000권을 장만해서 읽는 일이란 어렵다면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생각을 바꾸면 즐겁습니다. 즐겁게 삶을 배우면서 사랑을 익히겠다는 마음가짐이라면, 한 해에 2000권 아닌 3000권이나 5000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한 해에 1만 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숫자란 대수롭지 않습니다. 한 해에 2000권을 읽는대서 한 해에 1999권을 읽는 사람보다 대단하지 않습니다. 한 해에 2000권을 읽기에 한 해에 2001권을 읽는 사람보다 떨어지지 않습니다. 더 헤아려 보셔요. 한 해에 1999권을 읽는 사람은 한 해에 1998권을 읽는 사람보다 대단할까요? 한 해에 1998권을 읽는 사람은 한 해에 1997권을 읽는 사람보다 대단한가요? 한 해에 1997권을 읽는 사람은 한 해에 1996권을 읽는 사람보다 대단하나요? 더 더 헤아려 보셔요. 한 해에 100권을 읽는 사람은 한 해에 99권을 읽는 사람보다 대단할는지요? 한 해에 10권을 읽는 사람은 한 해에 9권을 읽는 사람보다 대단하다 할 만한가요?


  한 해에 0권을 읽든 한 해에 2000권을 읽든 모두 똑같습니다. 책을 읽은 권수는 아무것이 아닙니다. 한 해에 2000권이 아닌 2만 권을 읽었다 하더라도 ‘책만 읽은 삶’이라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책을 읽는 까닭은 ‘책만 읽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삶을 읽고 삶을 가꾸며 삶을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가다듬은 아름다운 눈빛과 눈썰미와 눈높이와 눈매로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내 이웃을 아끼며 내 삶자리를 돌보는 빛을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책읽기를 하는 까닭은 삶읽기를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내 삶을 읽고 내 이웃 삶을 읽습니다.


  푸름이한테 들려주고 싶은 책은 바로 삶입니다. 사랑이고 꿈입니다. 노래이고 춤입니다. 웃음이고 이야기입니다. 푸름이는 푸른 삶을 가꾸도록 돕는 푸른 책을 읽을 때에 싱그러이 웃고 노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푸른 삶을 누리도록 이끄는 푸른 책을 사귀면서 아름답게 춤추고 꿈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푸름이한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쓰면서 몇 가지 새로운 말을 쓸 생각입니다. 한국말사전에 안 나오는 ‘푸름이’라는 낱말을 쓰듯이, 푸름이가 읽을 예쁜 책을 가리켜 ‘푸른책’이라고 이름을 붙이려 합니다. 푸른책을 읽는 푸름이는 ‘푸른삶’을 가꾼다고 말하려 합니다. 책을 읽는 길은 ‘책길’이라 가리키고, 책을 읽는 삶은 ‘책삶’이라 가리키며, 책으로 이루어진 숲은 ‘책숲’이라 가리키려 해요. ‘책읽기’와 맞물려 ‘삶읽기’라는 말을 쓰려 하고, ‘글읽기’와 ‘글쓰기’라든지, ‘삶빛’과 ‘숲빛’과 ‘마음빛’처럼, 스스로 마음을 아끼고 보살피는 어여쁜 말을 차근차근 길어올리려 합니다. 즐거이 노래하면서 ‘책말’을 읽으셔요. 마음을 살찌우는 ‘책밥’을 배불리 먹으면서 이웃하고 ‘책사랑’을 나누시기를 빌어요.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운 마음이 피어나는 자리에, 사랑스럽고 즐거우며 맑은 꿈이 몽실몽실 자라리라 믿습니다. 4347.3.1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푸른삶 푸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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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새롭게  《푸른삶 푸른책》 이야기를 씁니다.

《푸른삶 푸른책》 이야기는 푸름이(청소년)하고 즐거이 나누고 싶은

책이야기입니다.

 

입시나 교육이 아닌, 삶을 즐기고 누리는 이야기를 담는

책과 노래를 글 하나로 나누고 싶어요.

 

모두 57가지 이야기를

앞으로 57주에 걸쳐서

차근차근 쓰려 합니다.

주마다 한 가지 이야기를 씩씩하게 쓰자고 다짐합니다.

 

아무쪼록 앞으로 57주 동안

이 책이야기를 꾸준히 띄우면서

즐거운 책편지가 될 수 있기를 빌어요.

 

반갑게 맞이해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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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리꽃빛 머리카락

 


  곁님이 머리카락에 물을 들였다. 무슨 빛깔이라고 해야 할까, 무척 밝은 빛깔을 입혔다. 여러 날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비로소 한 가지 떠오른다. 그래, 참나리꽃빛이로구나.


  고등학교 다닐 무렵이었나, 그때에 참나리꽃을 처음 알아보고는 어쩜 이렇게 고운 빛이 다 있나 하고 퍽 오래도록 생각했다. 주홍이니 주황이니 다홍이라는 한자말 이름으로는 참나리꽃빛을 가리킬 수 없겠다고 느꼈다. 참나리꽃빛은 오직 참나리꽃빛이라고 할까.


  곁님이 머리카락에 물을 들인 머리방에서는 어떤 이름으로 이 빛깔을 가리킬까. 머리카락에 물들이는 곳에서 ‘참나리꽃빛’이라는 이름을 쓸 수 있을까. 이런 빛이름을 쓰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아들을 만할까. 참나리꽃이 자라는 들이 이 땅에 얼마나 있을까. 우리 시골집에서 면사무소 가는 길목에 참나리꽃이 해마다 스스로 피고 지는 자리가 있는데, 마을 어른들은 그곳에도 어김없이 농약을 듬뿍 치고 봄가을에 불을 질러 다 태운다. 그렇지만 참나리꽃은 해마다 씩씩하게 다시 돋고 새롭게 오른다. 참 대단하지, 참 놀랍지, 참 아름답지. 4347.3.1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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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4-03-16 23:16   좋아요 0 | URL
머리색을 보니 '삐삐'가 떠올랐어요. 머리도 양갈래로 묶으셔서 더 그런것 같아요. ㅎㅎ
정말 함께살기님 말씀대로 '참나리꽃빛'이네요. 너무 너무 과감하세요.
저는 머리카락에 힘이 없어서 염색은 꿈을 못꾸는데, 대리만족하고 갑니다. ~~

파란놀 2014-03-16 23:29   좋아요 0 | URL
네, 빨강머리가 되면
다들 놀랍고 아름다운 힘이 솟으니,
우리 곁님도 빨강머리와 함께
씩씩하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

시골에서는 이 머리빛을 보고
다들 '빛이 곱다'고 좋아해 주십니다 ^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