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옛이야기, 설화



  새로운 번역이 예전보다 나은지 어떤지는 알 수 없기 마련입니다. 다만, 처음 번역한 책과 꾸준히 다시 번역하는 책들이 있기에 나중에 번역하는 이들은 앞선 이들 열매를 받아먹으면서 다시금 새로운 번역을 할 수 있어요.


  앞선 번역이 없었으면 ‘새로운 번역’이란 없겠지요. 앞선 번역이 있기에, 나중에 번역하는 이들은 어려운 길을 수월하게 헤칠 수 있고, 앞선 이들이 놓치거나 미처 못 건드린 대목을 더 꼼꼼히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비판에 앞서 존경과 고마움을 내비치면서 즐겁게 ‘새 번역’을 우리한테 선물하려는 마음이면 오래도록 사랑받는 실마리를 열리라 느낍니다. 번역은 ‘읽어서 풀어내는 이야기꾼’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옛이야기도 ‘구술자마다 다 다른 입맛’에 맞추어 새로운 이야기로 들려줍니다. 설화와 신화와 민담에 ‘정답이 하나’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빚은 문학은 ‘창작자가 하나’라 할 테지만, 이를테면 개구리 이야기라든지 꼬마 곡예사 이야기라든지,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목소리와 손길로 다 다른 빛을 담아 다 다른 이야기로 풀어냅니다.


  정답이 하나이기를 바란다면 외국말을 배워서 외국책으로 읽어야겠지요. 정답이 하나뿐이라면, 번역이란 있을 수 없겠지요. 정답이 없는 이야기이기에 번역이 있고, 새롭게 번역하려는 사람이 태어나며, 앞으로도 새로운 번역이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방인》뿐 아니라 《모비딕》도 앞으로 얼마든지 새로운 사람이 새롭게 번역해서 아름다운 이야기빛을 베풀 수 있습니다. 4347.4.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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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 있는 책



  책방에는 팔려고 하는 책을 꽂는다. 책방은 책방이지 도서관이 아니다. 그런데, 책방을 찾는 발길이 차츰 줄면서, 책방은 책방이면서 도서관 같은 꼴로 달라진다. 아름다운 책손이 즐거이 알아보며 고르기를 기다리는 책들이 하나둘 모이니, 이 책들은 어느새 새로운 ‘도서관 책빛’을 뽐낸다.


  오랜 나날을 아로새기는 책들이 차곡차곡 꽂힌 헌책방 책꽂이를 보며 생각한다. 헌책방 책꽂이를 고스란히 옮기면 도서관 책꽂이가 되지 않을까. 요즈음 책과 묵은 책이 골고루 섞인 이 책들은 도서관이 할 몫을 맡은 모습이라고 할 만하지 않나. 거꾸로, 오늘날 도서관 책꽂이는 도서관 모습이라기보다 대여점 책꽂이 모습은 아닌가. 도서관이 도서관 구실보다는 대여점 구실만 하지 않는가.


  책방마실을 할 때마다 생각한다. 마음을 사로잡는 책을 알차게 갖춘 책방은 책방이면서 도서관 같다. 아니, 도서관은 바로 이런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이 책도 읽고 싶도록 이끌면서 저 책도 읽고 싶도록 이끌 때에 도서관이지 싶다. 이 책에 깃든 이야기로 마음을 살찌우고 저 책에 서린 이야기로 사랑을 북돋울 수 있으면 도서관이요 책방이며 책터이자 보금자리가 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4347.4.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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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39) 존재 139 : 분명히 존재하는 모양

어디서부터 끓어오르는지조차 잘 모르는 자신감과 치명적일 정도의 성선설에 의해서 세상을 헤쳐 나가고자 했다. 그리고 남들에게는 이상하리만치 상냥했다. ‘턱없이’라는 말은 분명히 존재하는 모양이다
《사기사와 메구무/최원호 옮김-개나리도 꽃, 사쿠라도 꽃》(자유포럼,1998) 132쪽

 분명히 존재하는 모양이다
→ 틀림없이 있는 모양이다
→ 참말 있는 모양이다
 …


  없다고 여기며 살았는데 어느 때에 ‘없지 않’고 ‘있네’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렴 있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있으니 있다고 말합니다. 없으니 없다고 말합니다. 없을 듯해서 없을 듯하다고 말합니다. 있을 듯해서 있을 듯하다고 말합니다. 꾸밈없이 말을 하고 있는 그대로 글을 씁니다. 4347.4.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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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끓어오르는지조차 잘 모르는 자신감과 끔찍하다 싶은 성선설로 세상을 헤쳐 나가고자 했다. 그리고 남들한테는 아리송하리만치 상냥했다. ‘턱없이’라는 말은 틀림없이 있는 모양이다

‘자신감(自信感)’은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배짱’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치명적(致命的)일 정도(程度)의 성선설에 의(依)해”는 “끔찍하다 싶은 성선설로”로 손질합니다. ‘이상(異常)하리만치’는 ‘알 수 없으리만치’나 ‘아리송하리만치’로 다듬고, ‘분명(分明)히’는 ‘틀림없이’나 ‘참말’로 다듬습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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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77) 존재 177 : 인간은 약한 존재


인간은 약한 존재니까. 미움의 감정을 가지고 있어도, 그건 그것대로 상관없다고 생각해

《타니카와 후미코/박선영 옮김-마법을 믿으십니까 2》(학산문화사,2002) 92쪽


 인간은 약한 존재니까

→ 사람은 약하니까

→ 사람은 여리니까

 …



  국민학교를 다닐 적에 학교 음악 수업에서 ‘센박·여린박’을 배웠습니다. 요즈음에는 어떤 낱말을 쓰는지 모르겠지만, ‘센박·여린박’에 ‘세다·여리다’라는 낱말이 나옵니다. ‘세다’라는 낱말은 힘이 세다든지 바람이 세다든지 하는 자리에 곧잘 씁니다. 이와 달리 힘이 여리다든지 바람이 여리다든지 하는 말은 좀처럼 못 듣습니다. 다들 ‘弱하다’라는 한자말을 씁니다.


  언제부터 한국말 ‘여리다’가 쑥 들어갔을까요. 언제부터 한국말은 제 빛을 잃어야 했을까요. ‘세다’는 ‘여리다’보다 조금 더 쓰는 듯하지만, 이 낱말조차 ‘强하다’라는 한자말에 자꾸 밀립니다. 이 흐름이 그대로 퍼지면서, ‘사람’이라는 낱말도 ‘人間’한테 밀리고, ‘존재’라는 한자말도 널리 퍼지지 싶어요. 4347.4.23.물.ㅎㄲㅅㄱ



* 보기글 새로 쓰기

사람은 여리니까. 미운 마음이 있어도, 그 마음은 그대로 좋다고 생각해



‘상관(相關)없다’는 “= 관계없다”라고 합니다. ‘관계(關係)없다’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라고 합니다. ‘관련(關聯/關連)’은 “둘 이상의 사람, 사물, 현상 따위가 서로 관계를 맺어 매여 있음”이라고 합니다. 낱말뜻이 돌림풀이입니다. 보기글에서는 ‘상관없다’를 ‘괜찮다’나 ‘좋다’나 ‘나쁘지 않다’로 손보아야지 싶습니다. “미움의 감정(感情)”은 “미운 마음”이나 “미워하는 마음”으로 다듬고, “-을 가지고 있어도”는 “-이 있어도”로 다듬습니다. ‘인간(人間)’은 ‘사람’으로 손질하고, ‘약(弱)하다’는 ‘여리다’로 손질합니다.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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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을 읽는 어른으로 살기



  많은 어른들이 어릴 적부터 만화를 ‘재미있고 즐거운 노래가 흐르는 이야기빛’인 줄 느끼지 못한 채 자랐다고 느껴요. 입시지옥과 대학천국이라는 울타리에 갇힌 채, 만화는 마치 불온도서인 양 여긴 교사와 학부모 등쌀에 시달리면서, 만화에 깃든 넋을 제대로 못 받아먹으며 살아왔다고 느껴요.


  우리가 즐겁게 보는 웬만한 일본 만화영화는 한국사람이 밑그림과 채색까지 다 해요.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는 아름다운 창작만화가 꽃피우지 못합니다. 값싼 노예나 기계처럼 ‘일본 만화영화 그리기’만 하는 한국이에요. 이런 모습을 읽는다면, 이번 세월호 사고도 괜히 터진 일이 아닌 줄 알아채리라 생각해요.


  한국 만화에서는 요즘 들어 더더욱 물빛 이야기가 흐르는 작품이 매우 드물어요. 일본에서는 이런 만화가 참 많아서 반가우면서, 한편으로는 쓸쓸합니다. ‘일본 만화영화 그리기’를 벗어나서 ‘우리 이야기 그리기’로 나아가지 못하니까요. 그릴 이야기가 많고, 나눌 사랑이 많으며, 어깨동무할 꿈이 많을 텐데, 이 길을 걷지 못하니까요.


  지구별 이웃이라는 생각으로 일본 만화책을 읽습니다. 예쁜 이웃이 바다 건너에 있거니 여기면서 일본 만화책을 읽습니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예쁜 이웃 이야기를 만화책으로도 그림책으로도 사진책으로도 만나고 싶습니다. 학습만화나 지식그림책이 아닌, 예술이나 문화가 아닌, 삶을 사랑하는 꿈을 꽃피우는 만화와 그림과 사진과 글을 만나고 싶습니다. 4347.4.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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