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이 어찌나 야박하게 되었는지, 요즈음은 거리의 책가게에 들어가서 책을 좀 서서 읽을 수도 없읍니다. 좌판 위에 놓인 새로 나온 월간잡지를 이것저것 뒤적거려 보는 것이 조그마한 생활의 낙이라면 낙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요만한 자유마저 용납되지 않습니다. 광화문이나 종로거리의 책가게에 들어가서 5분 동안만 책을 들고 서 있어 보십시오. 점원 아이들이 얼굴 표정이 달라지지 않는 책가게가 없을 것입니다. 책을 펴 보기가 무섭게 벌써 점원 아이가 득돌같이 팔뒤꿈치 옆에 바싹 다가와서 위압을 주는 것쯤은 예사입니다. 노골적으로 책을 빼앗고 나가라고 호령을 치는 책가게도 있읍니다. 얼마 전엔가 동대문 쪽 길가에 있는 고본옥에를 들른 일이 있읍니다. 릴케의 시집이 있길래 그 안의 시를 몇 편 뒤적거리면서 읽기 시작했읍니다. 때마침 빗방울이 부슬부슬 떨어지기 시작하여서 나는 그 책사가 인심이 너그럽지 못한 책사인 줄 알면서도 미적미적 서 있었읍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임꺽정이같이 생긴 주인이 달려와서 왈칵 책을 빼앗고는 “아니, 고만 읽고 나가시오, 가게를 닫아야겠소!” 하고 모욕적인 어조로 소리를 질렀읍니다. 나는 졸지에 가게를 닫아야겠다는 말이 납득이 안 가서, “아니, 대낮에 가게를 닫아야겠다니 무슨 말이요?” 하고 반문했읍니다. 그랬더니 주인은 “오늘은 날씨도 비가 오고 해서 가게를 닫고 낮잠이나 자야겠으니 어서 나가 달란 말요.” 하면서 바로 나를 점포 밖으로 팽개치기라도 할 것 같은 험한 기세를 보였읍니다. 나하고 얼마 동안 옥신각신을 하는 중에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와서, 금방 가게를 닫겠다던 주인은 그쪽으로 가 버리고, 나는 그래도 울화가 가라앉지 않아 얼마 동안 미적미적거리다가 밖으로 나와 버렸지만, 나는 가게를 닫아야겠다는 주인의 핑계가 화가 나면서도 한쪽으로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 (1963.2.) / 《김수영-퓨리턴의 초상》(민음사,1978) 214쪽


 ‘고본옥(古本屋)’은 ‘헌책방’ 또는 ‘옛책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동대문에 있는 곳이고,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는 소리로 헤아려 볼 때, 이곳은 지금 ‘청계천 헌책방거리’를 가리키는구나 하고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시를 쓰는 김수영 님은 광화문과 종로에 있는 책방에 들른 뒤, 그길에 청계천 헌책방거리, 또는 청계천 둘레 동대문 골목골목에 있던 헌책방에 들러 책을 뒤적여 보다가 입술이 파르르 떨릴 만한 일을 겪고 글을 하나 남겼네요. 조금이나마 마음이 따순 헌책방 임자를 만났다면, 한결 살갑고 따순 마음이 묻어나는 글을 남겼지 싶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동대문에서 김수영 님을 차갑게 내쫓은 분은 ‘헌책방에서 느낄 수 있는 아쉬운 대목’을 적바림하게 만들고야 맙니다. 하긴, 이때는 헌책방뿐 아니라 새책방에서도 ‘서서 읽는 사람 내쫓기’를 똑같이 했다니, 말 다했지요.

 그러고 보면, 서울 광화문에 있는 큰 새책방이든 나라에서든 학교에서든 ‘책을 읽자!’고 소리높여 외칩니다만, ‘서서 읽기’ 하는 사람은 ‘책읽는 사람’으로 안 치지 싶습니다. 책을 사서 읽을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지요. 하지만 형편이 안 되는 사람도 많잖아요. 이런 사람들은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고, 책방에서 서서 읽을 수 있어요. 그래, 광화문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에서는 푯말을 달리 붙여야지 싶습니다. “책을 읽자!”가 아니라 “책을 사서 읽으쇼!”로. (4340.3.9.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게임방 손님과 어머니 1
기선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 책이름 : 게임방 손님과 어머니 (1∼3)
- 글ㆍ그림 : 기선
- 펴낸곳 : 서울문화사(2006)
- 책값 : 한 권에 3800원씩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바탕으로 요즘 흐름에 맞게 새로 꾸민 《게임방 손님과 어머니》입니다. 주요섭 님이 쓴 짧은소설을 모른다면, 이 책이름이 그저 그러려니 할 수 있을 텐데,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라면 이 작품을 읽어 보지는 않았어도 글이름만은 한두 번 들어 보았겠지요.

 만화책 《게임방 손님과 어머니》를 보면, 이야기 짜임새가 1권과 2권에서 바쁘게 잘 돌아갑니다. 주요섭 님 소설이 두 어른 사이에 애틋한 마음이 요리조리 왔다갔다 한다면, 기선 님 만화는 아직 철이 없다고 할 두 어른 사이에 애틋함이란 없이 콩닥콩닥 다투거나 복닦이는 흐름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 짜임새가 3권이 되면서 갑자기 느슨해지고 일찌감치 끝을 맺어 버렸다고 느낍니다. 아무래도 우리 나라 만화 터전 탓일 텐데, 이만한 이야기감이고 흐름이라면, 4권 5권 6권, 나아가 10권까지는 채울 만큼 줄거리를 탄탄히 짜고 살을 붙이면 한결 사랑을 받고 알콩달콩 부대끼는 우리 삶을 담아내며 웃음을 선사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잡지에 이어싣기 버거웠다면 몇 회를 쉬는 편이 나았을 텐데. 잘나가다가 뚝 끊겼달까요.


[옥희 엄마] 게다가 얼마나 띨띨하고 후줄근한지, 그런 지저분한 녀석을 알바로 썼다가 손님이라도 떨어지면 어쩌지…….
[옥희] 엄마 나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안 돼요!  .. 〈1권 62쪽〉


 《게임방 손님과 어머니》는 주인공으로 나오는 세 사람, 먼저 ‘옥희 엄마’와 딸 ‘옥희’ 사이, 다음으로 ‘옥희 엄마’와 게임방 손님인 ‘판석’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와 사건이 중심입니다. 지난날 사랑방은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길손이 머무는 곳이면서 애틋함이 묻어나는 문화라 할 테고, 오늘날 게임방은 옆에 있는 사람이야 어떻게 있든 자기가 놀고 싶은 대로 신나게 노는 문화입니다. 이런 문화답게 옥희 엄마와 옥희 사이에 오가는 말은 차례가 바뀌었다 싶도록 스물여섯 먹은 젊은 어머니가 퍽 철없어 보입니다.


[옥희] 옥희는 아저씨가 너무 좋아. 엄마도 아저씨 좋아?
[옥희 엄마] 음, 옥희야, 언젠가 네가 더 크면 얘기해 주려고 했는데, 잘 들어. 남자란 동물은 말이지, 여자보다 정신연령이 엄청나게 낮단다. 한 마디로 하등동물이지. 하물며 연하는 말할 것도 없어. 네가 보기엔 저 아저씨가 어엿한 어른으로 보일지 몰라도, 엄밀히 말해 남자도 여자도 인간도 아닌, 22년 묵은 개구리일 뿐이야.
[옥희] 그치만 22살이면, 아빠랑 엄마랑 결혼한 나이 아냐?  .. 〈1권 79∼80쪽〉


 철없는 어머니에 일찍 철든 딸. 여기에 마찬가지로 철이 안 든 스물두 살짜리 만화가. 철이 없기 때문에 더 ‘용감’하게 세상을 부딪힐 수 있겠지만, 철이 없기 때문에 얕은 이익에 따라 눈이 똥그래지기도 합니다. 어쩌면 얕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다가 쓴맛을 보며 세상을 배울 수 있고, 얕은 이익을 다부지게 내치면서 자기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는 어려움과 보람을 익힐 수 있어요. 우리 살아가는 세상에 ‘바른 길’이란 딱 하나만 있지 않으니까요.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일과 놀이를 찾아서 살아갈 때가 가장 좋아요. 생각과 꿈과 집안 터전과 이웃이나 부모와 살아가는 곳이 모두 다른 우리들입니다. 키도 다르고 몸무게도 다르고 말씨와 얼굴과 몸매도 다른 우리들입니다. 이렇게 다른 우리들이 다 똑같은 길을 갈 수 없겠지요. 이렇게 다른 우리들한테 다 똑같은 길을 가라고 하면 머리가 터지거나 홱 비뚤어질 수 있어요.


[옥희 엄마] 옥희는 시끄러운데도 잘만 자네. 게임방 집 딸은 역시 달라. 휴, 그나저나 거실이 아주 쓰레기장이네.
[판석] 귀찮은데 청소는 그냥 내일 하죠.
[옥희 엄마] 내 인생은 항상 이런 식이야. 정신차려 보면 항상 쓰레기 천지 속에 혼자 남아 있어. 대체 여기서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온통 쓰레기 천지야.
[판석] 누나?
[옥희 엄마] 제기랄! 다 지겨워! 거지 같은 게임방! 만날 이런 식이야! 사람들은 다 왔다가 가 버린다구! 내 상태가 조금만 안 좋아지면 다신 안 찾아와! 왜 내가 이렇게 거지같이 살고 있는 거야! 왜 내가 애 엄마야! 왜 내가 과부인 거야? ……
[판석] 누나는 하나도 잘못한 거 없어요. 그냥 조금 지친 것뿐이야. 누나가 아무리 그렇게 얘기해도 난 누나를 좋아해요. 내일 당장 게임방이 없어진다고 해도, 여기서 보낸 시간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야  ..  〈2권 156∼159쪽〉


 일본 만화 《도레미 하우스》를 보면, 하숙집에 깃들어 지내는 어린 학생과 새로 하숙집 임자가 된 젊은 홀어미 사이가 애틋하게도 되었다가, 서로 토라지기도 하며 조금씩 세상과 사람과 둘레 삶터를 깨달아 갑니다. 조금씩 무르익는 사람으로 발돋움하며, 차근차근 따사로운 사랑으로 부풀어간다고 할까요. 《게임방 손님과 어머니》도 처음에는 철없이 살아가는 젊은 홀어미와 만화가가 나옵니다. 이들은 자기 삶을 ‘거지 같다’고 느끼지만, 참말로 거지 같은 일이 무엇인지, 자기가 왜 이렇게 자신을 깎아내려야 하는지, 자기가 바라는 꿈, 자기가 누리고 있는 그 젊음이 무엇인지 있는 그대로 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게임방 임자인 옥희 엄마는 새로운 ‘손님’인 젊은 만화가를 집안에 받아들여 하숙(또는 사육)을 치고, 제멋대로 굴며 살던 만화가 판석은 잡지사 편집자한테 등떠밀려서 마감날짜를 꼬박꼬박 지키고 어디로 내빼지 못하게 되는 울타리인 게임방으로 살림(또는 갇힘)을 차리게 됩니다. 이리하여, 게임방은 그냥 게임방이 아니라, 막나가던 사람들 삶이, 앞이 시커멓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삶이, 그대로 이어가느냐, 이제부터 하나하나 달라지느냐 하는 갈림길로 거듭납니다.

 사랑방도, 게임방도, 또 빨래방이나 노래방도, 찻집이나 술집이나 밥집도, 하숙집이나 전세집 같은 우리네 살림집도 모두 《게임방 손님과 어머니》에 나오듯이 ‘거지 같이 사는 꼬락서니’로 이어가는 곳이 될 수 있고, ‘내가 참으로 바라던 삶이 무엇인가 돌아보는 터전’으로 달라지는 곳이 될 수 있습니다. 느끼기 나름이고, 받아들이기 나름이니까요. 내가 바라는 것이 돈인지 이름인지 힘인지, 아니면 꿈인지 믿음인지 사랑인지를 생각해 볼 일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길로 걸어가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이 만화책을 ‘거참, 재미있네’ 하고 덮을 수 있습니다. ‘음, 뭔가 아쉽네’ 하고 덮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둘레 사람들과 맺고 있는 끈’은 무엇이고 ‘내가 걷는 이 길’은 무엇인가 가만히 짚어 볼 수 있어요. 뭐, 책도 읽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게 받아들일 테니까요. (4340.3.8.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가 지고 나서 눈이 내렸습니다. 방에 있느라 눈이 내린 줄 몰랐습니다. 잠깐 바람을 쐬려고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가려다가 흠칫 놀랐어요. 하얗게 쌓인 눈, 소복하게 쌓인 눈을 보았거든요. 아, 눈이구나. 이야, 눈이네. 낮에 쌀 사러 읍내에 마실을 갈 때 조금씩 흩날리더니, 그예 펄펄 내리는 눈으로 바뀌었군요.

 뽀독뽀독 눈을 밟아 볼까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합니다. 가만히 저 눈을 바라보기만 하렵니다. 그래 보았자 다가오는 새날 아침, 해가 반짝 비치면 슬금슬금 녹을 테지만.

 이렇게 눈이 오면 부랴부랴 눈을 쓰는 분이 있고, 눈이 와도 멀거니 구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한때 부랴부랴 눈을 쓰는 사람이었는데, 요사이는 눈을 쓸지 않습니다. 그냥 두어도 며칠 지나지 않아 모두 녹던걸요. 겨울이라 해도 한 주면 다 녹고요. 길에 쌓인 눈을 쓴다면, 자동차가 덜 미끄러지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자동차도 천천히 달리면 그다지 미끄러지지 않아요. 아니, 차가 미끄러질 만큼 눈이 많이 오는 일이란 거의 없습니다. 앞으로도 눈이 수북히 오는 일이란 없을 테며, 그저 몇 센티미터 오면 많이 왔다고 할 테지요. 이런 눈이라면 가만히 두고 눈을 즐기면 어떨까 싶어요. 눈싸움 할 만큼 많이 쌓이지 못했으니 눈싸움은 못하고, 눈사람도 못 굴리겠지만, 가만가만 눈길을 걸으며 눈을 느껴 보고, 고개를 들어 하늘바라기를 하며 얼어붙은 하늘도 보고, 눈 덮인 산기슭에 짐승들 발자국이 있나 두리번두리번 살피기도 하고. (4340.3.7.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작은집
르 꼬르뷔제 지음, 황준 옮김 / 미건사 / 1993년 6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작은 집
- 글쓴이 : 르 꼬르뷔제
- 옮긴이 : 황준
- 펴낸곳 : 미건사(1994.5.10.)
- 책값 : 5000원


 ‘르 꼬르뷔제’가 누구인지, 또 어떤 일을 한 사람인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어디에선가 이름을 익히 들었다는 생각에 《작은 집》이라는 작은 책을 덜컥 집어듭니다. 사진이 많고 글은 적은 책, 으흠, 이이 르 꼬르뷔제는 집짓는 일을 하는 사람이로군요.


.. 사람들이 말하기를 “호수에서 4m라구? 그 사람들 미쳤군! 류머티즘에 걸리고, 무엇보다 호수면의 반사 때문에.” ‘모두들’ 자세히 관찰도 하지 않고, 잘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류머티즘이라고? 예컨대 남비에 물을 끓여 보면 된다. 수증기는 어느 쪽으로 흘러가는가. 남비 위쪽으로 올라가지, 절대로 남비 측면으로는 돌지 않는다. 통상 ‘습윤성 류머티즘 증상’은 표고 50미터 내지 100미터 전후의 구릉지에서 많이 발생한다 ..  〈13쪽〉


 온 나라 구석구석 아파트가 들쑥날쑥 들어서는 이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를 짓는 사람들은 얼마나 ‘생각’을 해 보며 아파트를 지을까요. 아파트가 들어서는 땅, 기운, 햇볕, 바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볼까요. 아파트가 들어서며 달라질 그곳 삶터, 자연, 사람 들을 헤아려 보았을까요. 아파트를 세우면 집값이 얼마가 오르고, 돈을 얼마 버는 데에만 눈길을 쏟지 않았을까요.


.. 이 집의 개가 기뻐하도록(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 개도 가족의 일원이므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밑을 볼 수 있는 높이에 울타리가 있는 구멍을 뚫고 작은 발판을 설치해 주었다. 이렇게 해 두면 개가 싫증을 내지 않고 놀게 될 것이다. 대문 울타리에서 이 발판이 있는 구멍까지 개는 계속해서 20미터나 뛸 수 있고, 또 거리낌없이 짖을 수도 있다 ..  〈27쪽〉


 요사이는 집에서 애완동물이라고 하는 짐승을 기르는 이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난날에도 집집마다 개며 닭이며 고양이며 돼지며 소며 염소며 토끼며 온갖 짐승을 길렀습니다. 지난날 짐승기르기는 우리가 먹는 고기짐승이기도 했지만, 한식구로 여기는 살가운 동무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지난날 우리가 기르던 짐승들은 딱히 ‘목에 줄이 매여 좁은 집구석에 갇히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일소를 부리고 돼지를 친다고 해도 이들 집짐승이 어느 만큼 자유롭게 움직이고 돌아다닐 수 있도록 마음을 썼어요.

 오늘날 애완동물은 아파트 구석에서 눈치를 받으며 살그머니 키워야 하거나 좁은 시멘트 소굴에 갇힌 채 온삶을 마치게 되어 있습니다. 아파트를 지을 때, 집짐승이 그곳에 사람과 함께 살겠거니 생각하는 ‘건축가’란 없고, ‘아파트 회사’에서도 이런 데에는 마음을 안 쓰니까요.

 집짐승을 기를 수 없는 집이라면, 사람도 사람답게 숨구멍을 트며 살 만한 집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사람답게 숨구멍을 트며 살 만한 집이라면, 어떤 집짐승도 즐겁게 어울려 살 수 있는 집이라 할 수 있을까요. 마당이 있는 집에는 개나 고양이를 키우기 좋습니다. 개나 고양이를 키우지 않아도 마당이 있는 집에 살면, 이 집에서 지내는 사람들도 한결 마음을 부드럽게 다스리고 조촐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 이제 벌써 9월 말이 되었다. 가을 화초가 피기 시작한 옥상에는 다시 푸르름으로 가득 찼다. 야생 제라늄도 빽빽히 자라서 이곳 한쪽 면을 뒤덮고 있다. 정말 아름다운 광장이다. 또 봄에는 어린 풀들이 자라고, 작은 화초가 피고 진다. 여름에는 키가 큰 잡초가 무성해 초원을 방불케 한다. 옥상 정원은 이렇게 자생하고 있다. 태양과 비와 바람과 씨앗을 날라다주는 새들 마음대로(아주 최근, 1954년 4월의 일이었는데, 이 옥상 한쪽 면은 원추리로 파랗게 뒤덮였었다. 원추리가 어떻게 해서 여기에 옮겨졌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  〈46∼47쪽〉


 아파트에도 뜰이 있습니다. 아파트 관리인은 틈틈이 뜰을 돌보며 ‘자기들이 심은 나무나 꽃’ 아닌 풀이 자라는가 빈틈없이 살피며 풀뽑기를 합니다. 꽃나무는 자기가 뻗고픈 대로 가지를 뻗을 수 없고, 1층과 2층, 또는 3층에 해를 가린다며, 위로 줄기를 올릴 수 없습니다. 바람을 타고 민들레 씨앗이 날아와도, 지나가는 새한테 묻어 온 들꽃이 뿌리를 내려도 어김없이 뽑힙니다.

 아파트 뜰은 겉보기로는 예쁘장하게 꾸민 푸름이 있는 듯 보이지만, 속을 살펴보면 끙끙 앓는 나무와 무서움에 벌벌 떠는 풀들이 잔뜩 옹크린 채 숨을 죽이고 있는 감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감옥 같은 데에서 자라는 풀들이 푸르다면 얼마나 푸를 수 있을까요. 이런 풀을 보며 푸름을 느끼는 아파트사람들은 얼마나 마음에 푸름을 담을 수 있을까요.


.. 1924년에 이 작은 집이 완성되어 내 양친이 이사하려고 할 무렵, 이곳 촌장은 마을 주민들을 모아 놓고 이 땅에 이런 건축물은 ‘자연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라고 논의했다. 또 이 집이 이 땅에 세워짐으로써 앞으로 이런 종류의 건물이 (어쩌면) 몇 채나 더 지어질 것이 아니겠는가고 걱정하고, 이것이 다시는 더 모방되지 않도록 하자고 이런 건물의 건축을 금지했다 ..  〈82쪽〉


 르 꼬르뷔제라는 이가 지은 집은 ‘실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이 부모님은 이곳에서 마지막 삶을 아늑하게 보냈지만, 마을사람들하고 어우러지지 못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때부터 여든 해가 훌쩍 지난 2007년 오늘 르 꼬르뷔제를 돌아본다면, 지금도 르 꼬르뷔제가 지은 이 집은 ‘실패’일까요. 오늘 이 나라에서 아파트를 꾸역꾸역 온갖 곳에 세우는 ‘건축가’들은 ‘성공한 집’을 짓고 있을까요. 이집트에서 집짓는 일을 하는 하싼 화티는 ‘의사들이 맹장수술을 한다고 할 때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길이로 살을 갈라 똑같은 크기대로 맹장을 덜어내지 않는다’고 말하며, ‘사람이 살 집을 그곳에 깃들 사람들 형편에 따라 다 다르게 짓지 않는 사람은 건축가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나라 구석구석 들어서는 아파트는 사람이 살라고 지은 집일까요. 죽은 르 꼬르뷔제가 본다면, 이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며 너나 할 것 없이 찾아드는 그 수많은 아파트는 어떠한 집일까요. 아니, 집이라 할 수 있을까요. 사람도 집짐승도 깃들 수 없는 시멘트 소굴이거나, 사람다움과 자연스러움을 잃고 하루하루 마음이 병들고 몸은 찌들며 죽어가야 하는 시멘트 무덤은 아닐는지요. 우리가 깃들어 살아갈 집이라면, 돈으로 마련하는 집이 아니라, 그곳에서 누가 무엇을 하며 얼마 동안 어떻게 지낼까를 헤아려서 저마다 다 다르게 지을 집이 아닐는지요. (4340.3.8.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이 보는 ‘교과서 참고자료’를 가리켜 ‘학습지’라고 합니다. ‘학습(學習)’은 ‘배울 학 + 익힐 습’을 쓰는 한자말입니다. 그러니까, ‘학습지’란, 쉬운 우리 말로 풀면 “배우는 책”, “배움책”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사서 본다고 하는 그 학습지들은 우리들한테 얼마나 “배움을 선사하는 책, 배우는 책”이 되고 있을까요.

 시험 한 번 치고 나면 버리는 책, 시험점수 높이는 데에만 쓸모가 있는 책, 학교를 마치면 종이뭉치밖에 안 되는 책이 아닐는지요. 학년갈이나 학기갈이를 할 때마다 집밖에 통째로 내놓거나 헌책방에 팔러 가는 종이뭉치는 아닐는지요. 새것으로 온돈 주고 사기 아깝고 헌책방에서 반값쯤에 사도 아깝다고 느끼는 책은 아닐는지요. 참으로 우리들이 “배우는 책”이라 할 때에는, 그 책을 처음 살 때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을 하고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죽는 날까지 늘 곁에 놓고 틈틈이 펼치고 돌아보며 되새길 만한 책이어야 좋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은 진짜 “배우는 책”은 무엇인지 모르는 채, 가짜 “배우는 책”에 마음이고 몸이고 푹 길들고 찌들어, 우리 세상도 우리 자신도 제대로 못 살피면서 어영부영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학습지’를 사서 무언가 배우거나 가르친다고 할 때에 참말로 ‘무엇’을 배우거나 가르칠까요. 우리가 배우는 것은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요. 우리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치려 하나요. 누구한테 쓰는 배움이나 가르침일까요. 어느 때에 쓸까요. 짤막짤막한 지식이나 상식을 잠깐 동안 머리에 담고 시험을 치를 뿐이라면, 이런 앎은 1회용품이지 싶은데. 우리 삶을 가꾸는 일이 아니라, 시간때우기이지 싶은데. 우리들 재주와 슬기는 시험을 치러서 얻는 점수로 잴 수 없잖아요. 요리대회에서 1등을 받은 사람 밥이 가장 맛있고, 예선에 떨어진 사람이 짓는 밥은 가장 맛없을까요. 요리대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사랑을 담아 짓는 밥이 참으로 맛있지 않던가요. 100만 원짜리 고급스런 상차림이 아니더라도, 고작 3000원어치 찬거리로 나물 몇 가지와 김치 몇 조각 올린 상차림이라도 신나고 맛나게 밥그릇 비울 수 있지 않나요.

 사랑과 땀과 믿음을 고이 담은 상차림이라면, 적은 돈으로 차렸든 반찬 몇 가지 못 올렸던, 한결 아름답거나 살갑다고 느낍니다. 사랑과 땀과 믿음을 고이 담지 않았다면, 아무리 많은 돈을 바치고 겉보기로는 맛깔스러울지 몰라도, 조금도 안 아름답고 안 살갑다고 느낍니다. 책을 볼 때에도 똑같습니다. 사랑과 땀과 믿음을 고이 담은 책 하나가 제 마음을 살찌우고 아름답게 돌본다고 느낍니다. 이런 책은 껍데기나 엮음새가 좀 어설프더라도, 책이름을 퍽 못 지었다는 생각이 들어도, 낯선 글쓴이가 쓰고 낯선 출판사에서 펴냈다고 해도, 책을 펼쳐 읽는 내내 입가에 웃음이 번집니다. 슬픈 줄거리에 눈물이 똑똑 떨어집니다. 하지만 사랑과 땀과 믿음을 고이 안 담은 책은, 아무리 번들번들 예쁘장하게 보이더라도 손이 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 삶을 밝힌다고 하는 훌륭한 줄거리를 담았다고 내세우더라도 웃음이나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이름난 글쟁이가 글쓴이로 이름을 올리고, 아무리 잘 알려진 출판사에서 펴냈으며, 언론사 기자들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어도 들춰보고 싶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옷 한 벌을 입든, 밥 한 그릇을 비우든, 몸뚱이 하나 뉘일 집을 찾든, 언제나 비슷하겠구나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몸과 눈에 맞추며 우리 삶을 살찌울 사랑과 땀과 믿음을 살뜰히 찾는다면, 이런 옷과 밥과 집과 책을 스스로 찾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우리들이 사랑과 땀과 믿음을 찾기보다는 겉치레와 겉꾸밈에 매여 다른 사람들 눈치와 눈길에 발목잡힌다면, 정작 자기 삶을 살찌우는 책은 거들떠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껴안지 못하며 베스트셀러 목록만 더듬지 않을까요. 우리 마음과 머리와 생각에 맞추는 책읽기가 아니라, 세상사람들 지식수준이나 상식퀴즈 따위에 얽매이는 책읽기로 흘러 버리지 않을까요.

 우리한테 즐거울 옷밥집이어야 좋을 텐데, 우리한테 즐거운 책 한 권이어야 반가울 텐데, 우리 몸에 옷밥집을 맞추지 않고, 옷밥집에 우리 몸을 맞춘다고 할까요. 우리 삶에 맞추는 책, 우리 꿈에 맞추는 책, 우리 마음에 맞추는 책이어야 좋을 텐데, 책에 따라 우리 삶과 꿈과 마음을 맞추지는 않을까요. 나아가, 자기 삶이 무엇이고 꿈은 무엇이고 마음은 어떠한지를 제대로 못 살피며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지는 않을까요. 잘팔린다는, 많이 읽힌다는, 남들이 좋다는 책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좋아할 만한 책, 자기 생각을 가다듬을 책, 자기 꿈을 다독이며 살아가도록 이끄는 책은 놓치고 있지 않을까요.

 ‘맞춤책’이라고 해서 ‘어떠어떠할 때 읽는 책’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책을 두루 묶어서 소개하는 일을 흔히 볼 수 있으며, ‘자기계발서’라고 해서 ‘자기한테 모자란 무엇을 느끼며 어찌어찌 자기 몸가짐과 생각을 추스른다는 책’이 자꾸자꾸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런 책들은 얼마나 ‘다 다른 어버이가 낳아서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모습으로 자라난 뒤, 다 다른 생각으로 다 다른 밥을 먹으며 다 다른 꿈을 꾸며 살아가는 우리들’한테 알맞춤한 책일까요. ‘다 다른 우리들을 얼마나 다 다른 모습으로’ 가꾸며 키우는 자기계발 책일까요. 책에 나온 줄거리에 우리를 맞추며 자기를 돌아보고 가꿀 일이 아니라, 자기 삶이 무엇인지를 속속들이 살피고 깨닫는 가운데 자기가 미처 못 느낀 자기 모습과 우리 둘레 모습을 헤아릴 책을 찾아야 앞뒤가 맞지 않을까요.

 학습지라는 것은 얼마나 배움직한 책일까 함께 생각해 봐요. 아니, 학습지를 책이라 할 수 있을까요. 학습지는 우리가 ‘책하고 멀어지게 하는 걸림돌’은 아닐까요. 학습지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학습지를 책상맡에 많이 채우면 많이 채울수록, 정작 우리가 알아야 할 참 지식하고는 멀어지고, 우리가 느껴야 할 참 세상하고는 동떨어지며, 우리가 보아야 할 참 내 모습은 잊혀져 버리지 않나요. 시험점수에 맞추는 내 머리나 마음이 아니라, 내 삶에 맞추는 내 머리나 마음이어야지 싶은데. 시험점수야 어찌 되든, 내 갈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면서, 참다운 나를 찾고 가꿀 수 있도록 마음을 쓰고 책도 읽고 사람도 만나고 일도 하고 놀이도 즐겨야 신나고 재미있는 우리 삶으로 꾸릴 수 있지 싶은데. 우리는 초중고등학교를 거치고 대학교까지 다니고 대학원이나 유학이라는 기나긴 배움을 거치면서도 정작 ‘나를 가꾸는 배움’, ‘나를 가꾼 뒤 내가 살아갈 이 세상에서 내 꿈을 어떻게 펼치면 좋은가 하는 배움’은 못 느끼거나 안 느끼면서 살지는 않을까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시험점수에 매였다가, 나중에는 차츰 길들고 물들어 아무 생각 없이 학습지에 따라가거나 매이며 자기 모습, 줏대, 뿌리, 줄거리, 바탕을 죄 잃고 있지 싶어요. (4340.2.23.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