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낯선 희망들 - 끊이지 않는 분쟁, 그 현장을 가다
이유경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한국이 ‘평화’로울 때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8] 이유경,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



 아이 사진을 찍으면서 아이 눈높이가 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이하고 눈을 마주하는 가운데 사진을 찍는 동안 반드시 아이가 제 사진기 눈을 맞대고 바라볼 때에만 찍어야 할 까닭은 없다고 느낍니다.

 옆지기 부모님이 살고 있는 일산으로 이틀 마실을 다녀왔습니다. 날이 무척 더워 큰 들통에 물을 담아 아이를 씻겼습니다. 들통 뒤로는 일산 부모님이 돌보는 텃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선 채로 아빠 눈높이에서 아이 씻는 사진을 한 장 찍다가는 쭈그리고 앉아 아이 눈높이에서 아이 씻는 사진을 다시 한 장 찍습니다.

 아이하고 어울리며 놀 때에는 멀거니 선 채로 아이 손을 잡고 놀 수 없습니다. 허리를 구부리든지 쭈그리고 앉든지 땅바닥에 털푸덕 주저앉아야 합니다. 아이하고 키높이를 맞추어야 하고, 아이와 걸음걸이를 맞추어야 하며, 아이하고 힘을 맞추어야 합니다.

 아이랑 놀다 보면 아이는 틈틈이 안아 달라며 두 팔을 활짝 펼치곤 합니다. 그저 칭얼대느라 이러할 수 있으나 다리가 아프고 힘들어 쉬고 싶기 때문이곤 합니다. 어른이라면 혼자 마땅한 자리를 찾아 털썩 앉거나 드러누울 테지만, 아이로서는 어버이 품에 안겨 쉴 때가 가장 느긋하고 좋습니다. 우리 집식구들은 아이한테 아기수레에 태울 뜻이 없이 스물석 달을 살아냈는데, 아이가 쉴 때라든지 아이가 잠들 때에 품에 안거나 등에 업고 다니자면 제법 고단하지만, 이렇게 고단한 만큼 비로소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보람이 무엇인가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아기수레를 안 쓰는 까닭이라면, 우리가 아기수레를 써 온 역사란 얼마 안 되고 언제나 업거나 안고 키워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기수레를 태울 만한 판판한 길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한테는 자가용이 없고, 자가용이 없는 우리들은 늘 걸어다니며, 늘 걷고 몸을 쓰면서 살아가는 아빠랑 엄마이기에 아이 또한 걷기를 좋아해 주며 함께 다니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스물석 달에 걸쳐 아이를 안고 걸리며 다니노라니 아이는 걷기뿐 아니라 뛰기를 몹시 좋아하고, 계단 타고 오르기를 아주 즐깁니다. 그예 스스로 튼튼하고 싱그럽게 자라 주는구나 싶어요.


.. 대학 시절 한국 사회에서 내가 꿈꾸는 기자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기도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 시드니 도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머니께서는 이것저것 담아 상자 하나를 보내 주셨는데, 그 안에는 이런 편지가 들어 있었다. “유경아, 공부 너무 많이 하지 마라. 몸 상한다. 세상 보는 것도 다 공부니라.” … 몇 명이 죽었고, 무엇이 파괴되었고, 어디가 공격을 받았고 등의 나열식 ‘분쟁 르포’엔 정치도, 역사도, 그리고 분쟁도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다 ..  (4, 18, 39쪽)


 평화로운 삶이란 평화로운 넋과 평화로운 몸과 평화로운 말로 이루어 간다고 느낍니다. 정치가 평화롭다든지 경제가 평화롭대서 내 삶이 평화롭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정치와 경제와 사회가 평화롭지 않더라도 우리들은 우리 삶을 한결같이 평화롭게 가꾸며 지킬 수 있다고 느껴요. 어수선한 정치일 때라도 봄이 되면 봄꽃이 맑게 피고, 어지러운 경제일 때라도 여름이 되면 여름꽃이 환하게 피며, 어리석은 사회일 때라도 가을이 되면 가을꽃이 곱게 핍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봄꽃을 닮도록 가꾸고 여름꽃을 받아들이도록 일구며 가을꽃을 곰삭이도록 돌볼 때에 참다운 평화이지 않느냐 싶어요.


.. 나는 ‘인생 선배’라는 이름으로 존중을 강요하는 어르신들의 나이 따지기 병을 아주 질색한다. 그 존중이라는 건 나이, 성별, 인종, 국적, 피부색을 불문하고 자연스럽게 우러나와 서로 주고받아야 할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 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작가 R씨의 인도기행문에 자극받아 인도를 찾았다고 했다. 성지의 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품고 온 그들에게 나는 카스트와 폭력, 힌두 극우주의와 점령 따위의 아주 낯선 이야기들을 녹음기처럼 풀어대며 초를 쳤다. 의도한 건 정말 아니었다 ..  (21, 100쪽)


 국제분쟁 전문기자라고 일컫는 이유경 님이 쓴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온누리 구석구석 싸움이 일지 않는 곳이 없다 보니까 이유경 님과 같은 ‘국제분쟁을 전문으로 다루는 기자’가 태어납니다. 국제분쟁만을 다루는 글과 사진이 넘치도록 많으며, 우리들은 수많은 국제분쟁이 얼마나 자주 많이 터지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아파하는가를 알 길이 없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어슷비슷하다고 여길 만’한 국제분쟁이 많아서 웬만큼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지 않고서는 이야기거리조차 안 되고 나라안 새소식에 안 실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재벌회사 사장님이 돌아가시든 골목동네 가난한 할머니가 돌아가시든 같은 목숨값입니다. 대통령 한 분이 돌아가시든 농사짓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든 매한가지 목숨결입니다. 국제분쟁이라 할 때에도 우리한테 익숙한 나라에서 벌어지면서 더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쳐야 널리 알아줄 만한 다툼이나 싸움이 아닙니다. 왜 온누리 나라들마다 싸움과 다툼이 그치지 않는가를 꿰뚫으면서, 온누리 나라들이 저마다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울 삶을 나누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걸림돌을 찾아야 하는 국제분쟁 기자들입니다.


.. 버마는 내가 알고 있던 대로 ‘민주 대 반민주’같은 단순한 모순만 지닌 게 아니었다. 버마의 소수민족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직후부터 50여 년 동안 타이-버마 국경이 접한 밀림에서 자치와 독립 무장투쟁을 벌여 왔고 이런 ‘민족해방 진영’은 반독재투쟁을 벌이는 다수 버마 족 중심의 ‘민주주의 진영’과 또다른 갈등과 모순 관계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두 진영 모두 군부독재를 반대하며 싸우고는 있지만, 그들 내부에서 ‘다수인종 대 소수인종’이라는 갈등의 골을 겪고 있는 셈이다 … 인도에서는 달리트와 하층 카스트, 무슬림, 여성 등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폭력, 고문, 그리고 심지어 살해도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이 모든 폭력이 대국 인도의 천태만상 속에 도드라지지 않을 뿐이다 … 인도 ‘본토’에서도 하층 카스트와 소외 계층이 민주주의와 정의를 만날 겨를은 별로 없는 판에 점령 지역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점령지 카슈미르에서 민주주의는 세월 좋은 양반네들이나 부리는 멋있는 ‘구라’였고, 일반 주민들이 당하는 일상적 모욕과 위협과 폭력은 민주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  (36∼37, 173, 331쪽)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이라는 책에는 이 나라 신문과 방송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 이야기가 새록새록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처음 나온 2007년과 오늘 2010년을 견주어 헤아린다면, 이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그리 나아지거나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치거나 죽는 사람들 숫자하고 이름이 다를 뿐입니다. 권력을 쥔 이들은 총칼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내리누르거나 들볶습니다. 더 큰 권력을 바라고 더 힘센 총칼을 거머쥐려 합니다. 커다란 권력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이 큰 힘으로 더 너른 사랑과 믿음을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총을 녹여 호미를 만들고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들고자 하는 권력자나 군인이란 없습니다. 총을 만들 돈과 품과 땀으로 우리 삶터를 아름다이 일구거나 칼을 만들 돈과 품과 땀으로 우리 이웃을 사랑하며 돌보려 하는 권력자나 군인이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우리 나라에서 군인 1만을 줄이거나 군 간부 1천을 줄이기만 하여도 온 나라 초중고등학교 아이들한테 ‘무상급식’을 이룰 수 있지 않겠어요? 군인 1만을 더 줄이거나 군 간부 1천을 더 줄인다면 온 나라 대학교에서 ‘무상교육’을 할 수 있겠지요. 군인 1만을 더 줄이거나 군 간부 1천을 더 줄인다면 온 나라 가난한 사람들 살림살이를 뒷배할 ‘무상복지’를 이룰 수 있겠지요.


.. 다카도 그랬지만 또다른 일본 여기자 기요코 오구도 내 머리를 쳤다. 《카트만두의 봄 : 1990 저항운동》의 저자인 그녀를 카트만두 기자회견장에서 주의 깊게 바라본 적이 있다. 네팔어로 질문하고 알아듣는 유일한 외신기자였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에서건 보통 영어로 큰 어려움 없이 대부분의 취재가 이루어졌지만, 현지어를 그렇게 구사하는 수준이라면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굵고 깊은 취재를 할 수 있는 천상의 조건이다 ..  (273쪽)


 국제분쟁을 전문으로 다루고자 발로 뛰고 눈물과 웃음으로 글을 쓰는 이유경 님은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이라는 책을 빌어 우리들한테 나즈막이 속삭입니다. “나는 또 기대한다. 한국 혹은 한국인이 꼭 연루되지 않은 분쟁이나 재난이라도 그 비명 소리가 절박하다면 귀 기울여 들어 주고 받아 적을 줄 아는 그런 통 큰 언론을. ‘한국인 피해는 없는 것으로……’라고 끝나는 뉴스는 늘  ‘그 다음 뉴스는 없는 것으로……’라고 끝내는 그런 언론 말고(391쪽).” 이러한 속삭임은 내 밥그릇과 얽힌 일에서만 내 이웃과 동무를 생각하는 우리 삶이 아니라, 내 밥그릇하고 얽히지 않은 내 이웃과 동무 일에도 온 사랑을 쏟을 수 있기를 꿈꾸는 속삭임입니다. 나 스스로 아름답게 살고 싶은 마음이라면 내 이웃 누구나 아름답게 살 수 있도록 애쓰려는 마음이기를 꿈꾸는 속삭임입니다. 나 스스로 평화를 누리며 살고 싶은 마음이라면 내 동무 누구나 서로 미워하거나 괴롭히지 않으며 어깨동무하고 손을 맞잡으려는 마음이기를 꿈꾸는 속삭임입니다.

 나 스스로 내 눈높이에만 머물지 않고 내 이웃과 동무 눈높이가 되기를 꿈꾸는 속삭임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로서는 아이 눈높이로서 아이하고 부둥켜안기를 꿈꾸는 속삭임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는 아이들 눈높이로서 가르치고 배우며 서로 살가운 배움터를 이루고픈 속삭임입니다.


.. 내가 변했는지 서울이 변했는지 아니면 서울이 원래 그런 녀석인 걸 내가 잠시 까먹었던 건지. 아무튼 서울은 ‘물질이 충만’한 도시의 거드름을 과하게 뽐내며 나를 불편하게 했다. 그 거드름에 대한 거부감은 2주 만에 서둘러 서울을 떠나는 나의 발걸음을 위로해 주었다. 교보문고 10대 서적 코너에 깔린 ‘서울대와 하버드대로 가는 길’을 뒤로 하고 다시 방콕으로 갔다 ..  (72쪽)


 희망이란 낯선 생각이 아니나, 오늘 이 땅에서는 더없이 낯선 생각이기 일쑤입니다. 희망이란 찾아볼 길이 없이 돈만이 넘치는 오늘날 우리 터전입니다. 이리하여 더더욱 낯선 희망을 바랄밖에 없고, 희망이야말로 낯설지 않은 우리 삶이 되기를 바랄밖에 없습니다. 끊이지 않는 분쟁이란 서로서로 평화를 찾자는 몸부림일까요? 끊이지 않는 분쟁이란 기득권과 권력자가 더 큰 밥그릇을 움켜쥐려고 일부러 평화를 짓밟거나 짓누르는 소용돌이일까요? (4343.6.7.달.ㅎㄲㅅㄱ)


 ┌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인물과사상사,2007)
 ├ 글ㆍ사진 : 이유경
 └ 책값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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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보는 눈과 사진을 담는 손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6]  
Erika Stone(사진)+Merle Good(글),  《Nicole visits an Amish farm》(Walker & com,1982)


 고추밭에서 고추를 딸 때에는 긴소매에 긴바지를 입어야 합니다. 한여름이라고 반바지나 끌신 차림으로 고추를 딸 수 없습니다. 담배밭에서 담배잎을 딸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글로 적어 놓은 책은 없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글로 쓰고자 하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사진과 그림으로 옳게 담는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농사를 짓는 이름난 그림쟁이 한 분이 곡괭이질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고 씁쓸하게 웃은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틀림없이 삽질과 곡괭이질을 알지만 ‘곡괭이자루를 쥐고 내리찍는 모습’을 엉터리로 그렸습니다. 곡괭이질을 하는 느낌, 영어로 말하자면 ‘이미지 보여주기’에만 마음을 쏟았을 뿐, 곡괭이질을 할 때에 두 손으로 자루 어디를 잡고 어떻게 내리찍는가를 옳게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자전거 타는 글쟁이와 그림쟁이와 사진쟁이는 꽤 늘었습니다. 그러나 자전거 그림이 옳은지 그른지를 제대로 알아차리는 글쟁이나 그림쟁이나 사진쟁이는 대단히 드뭅니다. 아주 쉬운 보기로, 자전거 체인이 어느 쪽에 달려 있는가라든지 페달이 붙는 자리라든지 손잡이와 앞바퀴가 어떻게 이어져 있으며 안장과 뒷바퀴는 어떻게 맞닿아 있는가를 올바로 그릴 줄 아는 그림쟁이란 드물고, 올바르지 않은 그림을 깨닫는 지식인은 몇 안 됩니다.

 콩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콩을 먹는 사람 가운데 콩을 심어 김을 매거나 콩꽃 어여쁜 하얀 꽃잎을 쓰다듬어 본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감자를 즐겨먹든 안 먹든, 감자를 먹는 사람 가운데 감자꽃이 무슨 빛이요 꽃잎이 몇 장인지를 아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배를 먹으면서 배꽃이 하얀지 노란지 헤아리거나, 능금을 즐기면서 능금꽃이 붉은지 불그스름한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귤나무에 귤꽃이 피는지 생각하거나 대추나무에 대추꽃이 피는지 돌아보는 사람은 아예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지식은 넘치고 대학교 다닌 사람은 넘실거리지만, 정작 우리 삶자락 밑바탕을 둘러싼 지식을 보듬으며 껴안는 사람은 나날이 줄어듭니다.

 우리들은 밥을 잘 할 줄 모르거나 밥을 아예 할 줄 모르면서도 밥을 얻어 먹을 수 있습니다. 돈을 치러서 밥을 사다 먹을 수 있습니다. 농사를 짓고 물레를 잣고 길쌈을 한 다음 베틀을 밟고 나서 바느질을 거쳐 옷 한 벌 지을 줄 모를 뿐 아니라, 이렇게 하는 흐름을 하나조차 모르면서 옷 한 벌 예쁘장하게 사서 입을 줄은 압니다. 어쩌면, 이제는 옷 한 벌 사서 입는 값이 훨씬 싸며 품이 거의 안 들기 때문에 옷이란 돈 주고 사서 입으면 그만인 삶자락이라 할 만합니다.

 보도사진이든 다큐사진이든 상업사진이든 초상사진이든 풍경사진이든 만듦사진이든 사진은 사진입니다. 갈래가 다를 뿐 사진은 사진입니다. 사진은 사람이 찍어서 이루는 문화요, 사진은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지며 즐기는 예술입니다. 사람 사이에서 태어나 사람 사이에서 부대끼는 삶이 사진입니다.

 일본사람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조선을 생각한다》 같은 책을 쓸 수 있던 까닭은 당신 스스로 ‘조선 삶’을 ‘당신 삶’으로 맞아들이며 어깨동무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잘나거나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당신 뜻이 거룩하거나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미국사람 허먼 멜빌 님이 《모비딕》 같은 책을 쓸 수 있던 까닭은 당신 스스로 ‘고래잡이 삶’을 ‘당신 삶’으로 받아들이며 껴안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용케 살아남았거나 굳센 고기잡이라서가 아닙니다. 당신 눈이 남다르거나 그윽해서가 아닙니다.

 이오덕 님이 《일하는 아이들》 같은 책을 엮을 수 있던 까닭은 당신 스스로 ‘어린이 삶’을 ‘당신 삶’으로 안아들이며 웃고 울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뛰어나거나 교육자 얼이 단단해서가 아닙니다. 당신 마음이 더 따뜻하거나 훨씬 너그러워서가 아닙니다.

 사진책 《Nicole visits an Amish farm》을 펼치면서 생각합니다. 까망둥이 니콜(Nicole)이라는 계집아이가 하양둥이 채리티(Charity)라는 계집아이를 만나서 보낸 보름에 걸친 나날을 담은 이 작은 사진책에는 그리 넉넉하지 않은 살림으로 살아가는 니콜이라는 ‘까망둥이 아이’가 1970∼80년대에 오로지 하양둥이만 살아가고 있는 ‘아미쉬 마을’에 들어가서 부대낀 삶을 보여주는데, 이토록 따뜻하고 살가운 이야기로 엮을 수 있나 싶어 놀랍니다. 그러나 이 사진책을 들여다볼 사람들 가운데 《단순하고 소박한 삶》이나 《아미쉬》 같은 책이나마 읽었을 사람은 거의 없을 테며, 《Nicole visits an Amish farm》 같은 사진책을 알아볼 한국사람부터 거의 없습니다. ‘아미쉬’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사람조차 드물고, 이 사진책에 나오는 아이들이 왜 거의 언제나 맨발인 모습일는지를 알아챌 사람이란 없을 테며, 우리로 치면 초등학교 낮은학년일 아이들이 밥하기이며 빨래이며 농사일이며 숱한 집일을 함께하는 삶에 어떤 뜻이 깃들어 있는가를 읽을 사람이란 없으리라 봅니다. 더욱이, 아미쉬 사람들은 무늬없는 투박한 긴소매와 긴치마를 입으나 니콜이라는 계집아이는 목덜미 드러나는 온갖 빛깔 밝은 민소매 웃도리에 무릎 위로 올라가는 치마를 입는데, 아미쉬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볼 줄 모르면 찍을 줄 모른다지만, 살 줄 모르니 볼 줄 모릅니다. 살 줄을 모르니 무엇을 어떻게 왜 언제 누구하고 찍어야 하는 줄 모릅니다. 보도사진이든 다큐사진이든 상업사진이든 초상사진이든 풍경사진이든 만듦사진이든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볼 줄 알아야 하는데, 볼 줄 알자면 살 줄 알아야 하고, 살 줄 알자면 스스로 뿌리내리어 녹아든 매무새이자 마음밭이어야 합니다. (4343.6.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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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파란여우님의 "최종규-사진책과 함께 살기"

출판사에서 내 줄 수 있다면 올가을이나 올겨울에 <그림책과 함께 살기>라는 책도 하나 태어날 수 있어요... 이 글은 오로지 '사진'만을 생각하는 사람들한테만 읽힐 생각으로 썼기 때문에, 처음부터 '사진과 그림을 이어서 살핀다'는 흐름으로는 가지 않았습니다. 사진 일을 하는 사람들은 사진 하나조차 제대로 파고들지 않는데, 글이나 그림이나 노래나 춤이나 영화나 다른 갈래를 이야기한다면 도무지 뭐가 뭔지 받아들이지 못하거든요... 프랑스 사진책 <뒷모습>은 한국 출판사에서 표지 사진을 바꾸었기 때문에 느낌이 아주 많이 달라졌다고 봅니다... 저한테는 프랑스판 원서로 <뒷모습>이 있는데, 프랑스 사진책 <뒷모습>은 저런 여인네 벗은 뒷모습이 아닌 수수하고 말끔한 다른 뒷모습이랍니다... 표지 하나 때문에도 책 느낌이 사뭇 달라짐을 보여주는 본보기라고 하겠습니다... 사진비평이나 사진책 소개글이라는 글을 보면, 하나같이 너무 딱딱하고 어려운 말로 이론과 지식에만 파묻혀 있어요... 사진을 하는 사람들한테든 그냥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든 거의 도움이 안 된다고 느껴요... 이런 생각으로도 이 책을 썼고, 이렁저렁 사랑받을 수 있으면 '글쓰기 거듭남'을 하면서 이듬해에 2권을 내놓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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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 결정적 순간의 환희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31
클레망 셰루 지음, 정승원 옮김 / 시공사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사진을 찍는 기쁨 하나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4] 클레망 셰루,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앎에는 아무 뜻이 없습니다. 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알아서는 안 되고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며, 알고 있다면 앎을 머리에 가두지 말고 온몸으로 녹아내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찍기에는 아무 뜻이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되고 제대로 찍어야 하기 때문이며, 사진을 찍으려 한다면 내 삶이 송두리째 드러나도록 찍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삶을 다루는 글쓰기이고 그림그리기입니다. 삶을 보여주는 노래부르기이고 춤추기입니다. 삶을 영글은 농사짓기이고 아이키우기입니다. 우리 둘레에서 맞아들이거나 부대끼는 일놀이 가운데 삶하고 이어지지 않는 일놀이란 한 가지도 없습니다. 모두 애틋한 삶이고 모두 가멸찬 삶이며 모두 땀흘리는 삶입니다. 밥 한 그릇을 마련할 때에도 애틋한 삶이고, 밥그릇 하나를 설거지할 때에도 가멸찬 삶이며, 아이한테 노래 하나 들려주며 재울 때에도 땀흘리는 삶입니다. 삶을 꾸밈없이 바라보며 껴안는 가운데 곰삭일 수 있으면 굳이 글이나 그림이나 노래나 춤이나 사진이나 만화나 영화나 연극 따위가 없어도 넉넉합니다. 삶을 있는 그대로 살피며 어루만지는 가운데 되뇌일 수 있으면 따로 글이나 그림이나 노래나 춤이나 사진이나 만화나 영화나 연극 따위로 나타낼 때에 눈물과 웃음이 절로 깃듭니다.

 어떤 잘난 사람을 따라하거나 흉내낼 글이 아니요 그림이 아니며 사진이 아닙니다. 대단한 노래꾼을 따라하며 노래를 불러야 맛이 아닙니다. 내 목소리에 감겨드는 느낌을 살리고 사랑하며 부르는 노래가 제맛입니다. 엄청난 춤꾼을 흉내내며 춤을 추어야 멋이 아닙니다. 내 몸에 찾아드는 기쁨과 슬픔에 따라 움직이며 즐기는 춤이 제멋입니다. 스스로 제 결을 찾아야 할 삶이지, 스스로 제 결을 놓거나 버리며 다른 데로 눈길을 돌리고 다른 곳에 손길을 뻗을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겉치레로 내동댕이칠 수 없습니다. 겉을 꾸미는 일놀이란 삶이 아닙니다. 겉을 꾸미는 일놀이란 거짓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속차림으로 보듬어야 합니다. 속을 차리는 일놀이일 때라야 비로소 삶입니다. 속을 차리는 내 삶이란 바로 참입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려 하는 우리들이라 할 때에는 바야흐로 내 삶을 꾸밈없이 들여다볼 뿐 아니라 너그러이 껴안는 매무새여야 합니다. 사진기 다루는 재주를 배워야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값나가는 장비를 갖추어야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 교본을 챙겨 읽는다든지 사진 강좌를 찾아 듣는다든지 해서 사진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을 잘 찍자면 내 삶을 잘 꾸려야 합니다. 사진을 신나게 즐기고 싶다면 내 삶을 신나게 즐기고 있으면 됩니다. 아름다운 사진을 바란다면 내 삶을 아름답게 여밀 노릇이고, 사랑스러운 사진을 꿈꾼다면 내 삶을 사랑스레 가꿀 노릇입니다.

 나라 안팎에서 참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거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진쟁이로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이 있습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사진을 통해 기하학에 대한 관심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냈다. 많은 비평가들은 황금 분할 법칙에 충실한 그의 이미지 위에 구성 도식을 적용해 가며 이 사실을 설명하곤 한다 … 카르티에브레송은 마네킹, 인형, 매춘부, 눈 감은 사람, 잠자는 사람, 꿈을 꾸거나 무언가에 도취된 사람 등 초현실주의 신화의 좋은 구성 요소를 사진으로 담아냈다(38, 41쪽).”고 합니다. 이때에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이 갓 사진기를 손에 쥔 때요, 그러니까 새내기 사진쟁이 때 모습이라고 합니다. “카르티에브레송이 한층 성장하는 데는 전쟁의 경험, 수용소 생활, 지인들의 실종 같은 사건들이 밑바탕이 되었다. 그는 ‘전쟁 이후, 염려하던 마음은 달라진 세상에 대한 기대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사진의 추상적 접근법’보다는 ‘인간의 가치’에 더 관심이 많았으며 … 이제 그는 선동적이거나 초현실주의적인 사진가가 아니라, 정보에 따라 적절하게 반응하는 사진기자였다(58, 64쪽).”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픗내기나 새내기였을 적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은 ‘사진을 할지 그림을 할지’ 망설이는 가운데 ‘돈 걱정을 따로 하지 않는 넉넉한 살림’에서 ‘사진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을 뿐 아니라, ‘사진을 한다 하더라도 무엇을 담아서 보이고 나눌는지’는 살피지 못한 셈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고빗사위를 넘기는 동안 비로소 당신한테 ‘사진이야말로 내 삶이로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으로 태어났다고 하겠습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은 “어떤 상황에서든 그는 늘 좋은 이미지를 노렸다(45쪽).”고 합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아주 마땅한 소리입니다. 언제나 좋은 사진이 되도록 애쓸 노릇이지, 어느 때에는 대충 찍는다든지 어느 때에는 어설피 찍는다든지 어느 때에는 아무렇게나 찍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찍어 달라고 해서 찍어 주든 이웃 아줌마가 찍어 달라고 해서 찍어 주든 사랑스러운 집식구가 찍어 주기를 바라며 찍든 늘 온힘과 온마음을 바쳐 나한테 가장 아름답고 즐거운 사진을 일구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사진을 찍든 이제까지 찍은 사진 가운데 가장 나으며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잡지사들의 요청에 응하면서 사진을 선택하고 의미 있게 배열하는 작업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78쪽).”고 합니다. 당신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당신 사진을 잡지사에 팔고 신문사에 팔았을 텐데, 이렇게 돈을 받으며 사진을 내어줄 때에 편집자들은 이리 자르고 저리 붙이는 한편, 당신이 사진으로 담아 나누려는 이야기하고 엇나갈 때가 있다고 밝힙니다.

 뭇사람들이 사진밭 큰사람으로 섬기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이름을 놓고 돌아볼 때에 이런 말마디는 퍽 얄궂습니다. 그러나 큰사람이든 작은사람이든 이런저런 다툼과 부딪힘과 아픔과 생채기를 겪거나 치르는 가운데 차츰차츰 당신 자리를 찾아 가는 셈 아닌가 싶습니다. 주문에 맞추는 글ㆍ그림ㆍ사진이 아니라, 부탁에 따르는 글ㆍ그림ㆍ사진이 아니라, 바로 내 삶에 맞추는 글ㆍ그림ㆍ사진이 되어야 시나브로 나를 비롯한 내 둘레 사람들 모두한테 웃음과 눈물을 선사하는 땀방울로 영글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당신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닌 미국에서 당신 사진을 전시하던 이들이 처음 붙였던 이름이라는 “결정적 순간”이라는 말마디는, 우리 말로 쉽게 옮기면 “바로 이 사진 하나 얻는 때”를 있는 그대로 사진으로 담아내는 삶이었다는 당신 매무새는, 사진찍기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한테든 사진찍기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한테든 고마운 이야기 하나라고 느낍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언제나 발생한 사건자 자체보다는 그 안의 진실을 다양하게 해석해 보여주는 상황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96쪽).”고 하니까요. ‘순간을 기다리며 찍는 당신’이 아닌 ‘어느 한때에 깃든 삶을 누구보다 스스로 느끼며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당신’이었을 테니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은 많지만, 사진을 찍는 삶을 글로 함께 적바림하는 사람은 몹시 드문 가운데, 당신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님은 우리한테 남긴 사진 못지않게 우리한테 남긴 글이 제법 많습니다. 이리하여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자그마한 책에는 당신이 걸어온 사진삶이 차곡차곡 담기는 한편, 당신이 밝히며 늘 거듭나고 있던 사진말이 알알이 깃들어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당신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이름을 들먹이는 사람은 꽤나 많으면서, 정작 당신 사진 작품을 찬찬히 챙겨 본다든지 당신 사진 이야기를 곰곰이 찾아 읽는다든지 하는 사람은 그리 안 많구나 싶습니다. 브레송이 어떻고 저떻고 하고 입방아를 찧기 앞서, 브레송이니 부라자이니 어렁저렁 말밥을 삼기 앞서, 사진 하나에 온삶을 들여 땀과 품과 사랑과 믿음을 펼쳐 온 삶자락을 들여다볼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브레송이라 하는 사람이 사진을 어떤 매무새로 껴안았는지 살필 노릇이고, 브레송이라 하는 사람이 사진을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가 돌아볼 노릇이며, 브레송이라 하는 사람이 사진에 어떤 숨결을 불어넣었는지 생각할 노릇이라고 봅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작은 책에는 “결정적 순간의 환희”라는 이름이 하나 덧붙습니다. 책을 두 번 내처 읽고 나서 이 덧이름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사람한테는 더도 덜도 아닌 “사진을 찍는 기쁨”일 뿐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해 봅니다. 찍힌 사진을 나중에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바로 이때”를 찍었다 할는지 모르고, 찍은 사진을 두고두고 바라보는 사람들이 느끼기에 “기막힌 모습을 짜릿하게” 찍었다 할는지 모르나,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으로서는 ‘찍어야 할 모습을 찍었’을 뿐이요, ‘담아야 할 삶을 담았’을 뿐 아니랴 싶습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라는 작은 책에 담긴 당신 삶과 넋을 돌아보니 그저 이런 느낌이 듭니다. 떠들썩하니 무슨무슨 이름을 갖다 붙이며 떠받들 브레송이 아니라, 그예 사진을 사랑하고 아끼며 사진과 한몸이 된 삶이었던 브레송이라고 느끼며 우리 스스로 우리 깜냥껏 사진을 사랑하고 아끼며 사진과 한몸이 될 길을 찾아나서면 즐거우리라 생각합니다. (4343.6.5.흙.ㅎㄲㅅㄱ)


[책에서 그러모은 생각조각]
ㄱ. 나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장면이나 일화를 찾아다니지 않았다. 그저 그것들이 거기 있었다.
ㄴ. 마그네슘 플래시는 빛이 전혀 없을 때라도 허용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사진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위협적인 것이 되고 만다.
ㄷ. 인간적 진실이 훼손되지 않도록 인위적인 면을 반드시 피하고 사진기와 사진 찍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ㄹ. 만일 좋은 사진을 조금이라도 잘라낸다면 결국 균형은 깨지게 된다.
ㅁ. 사진기는 작업의 도구이지 그저 예쁜 장난감 기계가 아니다. 이 기계로 우리가 하려는 일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ㅂ. 나는 내 사진을 트리밍하거나 피사체를 재배치해서 좀더 나아 보이도록 시도한 적은 거의 없다. 만일 사진이 그리 좋지 않았다면 프레임 안의 기하학적 비율이 잘못된 것이고, 그렇다면 여기저기 변형하여 인화하더라도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ㅅ. 사진가는 자신을 잊고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꿰뚫어보며, 상대가 지금 그 위치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사람의 내면으로까지 정교하게 카메라를 들이밀어야 한다.
ㅇ. 탐미주의에 앞서 현재의 삶이 드러나 보이는 이미지에 애착을 가진다.
ㅈ. 나는 보도기자이지 화실의 초상화가가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고 행동하는 외부세계(혹은 내적 세계)는 내 작품의 주제이자 나에게는 큰 의미를 지닌 무대 배경이다.
ㅊ. 애호가들은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고, 기술자들은 시험 중인 기계 속에 파묻혀 있다.
ㅋ. 사실 우리 모두는 모방자들로서, 무엇보다 ‘본질’을 모방해야 한다. 그리고 다음 단계에서 우리 자신을 부담 없이 표현해야 한다.
ㅌ. 나는 위대한 사진을 찍으려 일부러 애쓰지 않는다. 내가 얻은 모든 것이 위대한 사진이다.
ㅍ. 나는 사진보다 삶에 더 관심이 많다.
ㅎ. 나에게 보도사진은 눈과 손, 그리고 두 다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클레망 셰루 씀,정승원 옮김,시공사 펴냄,2010.5.24./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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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는 눈 125 : 길을 거닐며 새기는 책

 스물석 달째 함께 살고 있는 우리 아이가 낮잠을 다문 십 분이든 삼십 분이든 자 주면 얼마나 좋으랴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물석 달 동안 이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있습니다. 아점을 먹고 살살 졸릴 무렵 그예 잠들어 주면 낮에 한결 기운차고 신나게 놀 수 있으며 밤에 깊이 잠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밤에 깊이 잠들면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금 싱그러우며 기운차게 놀 수 있고, 하루하루 이런 나날을 되풀이하면서 튼튼하고 씩씩한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습니다.

 우리 딸아이는 도무지 낮잠을 자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밤잠이 길지 않습니다. 새벽 여섯 시 무렵에 어김없이 깨어나려 하는데, 요사이 하루하루 낮이 길어지고 새벽이 일찍 찾아오니 벌써 다섯 시 무렵부터 깰려고 옴쭐옴쭐합니다. 바깥이 하얗게 밝아 오면 저도 잠에서 깨려고 부시럭거립니다. 애 아빠로서는 아이가 잠들어 있는 새벽녘이 조용히 일할 애틋한 때이기 때문에 으레 새벽 너덧 시에 홀로 살며시 일어나 글을 씁니다. 그런데 글조각 하나 겨우 끄적일 무렵 아이가 벌떡 일어나 “아빠!” 하고 부르며 찾으면 “아이구!” 소리가 절로 터져나옵니다.

 오늘도 우리 아이는 어김없이 낮잠을 건너뜁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싶어 아이를 데리고 바깥마실을 나옵니다. 졸릴락 말락 하니까 한 시간쯤 걸리면 되겠지 생각하는데, 아이는 아빠 품에만 안기려 하고 걷지를 않습니다. 이 녀석 졸리기는 무척 졸린가 보네. 그러나 잠들지도 않습니다. 자지도 않고 걷지도 않고. 이렇게 두 시간 반쯤 낑낑거리며 땀 뻘뻘 흘리는 골목마실을 하노라니 비로소 곯아떨어집니다. 아이가 곯아떨어지고서야 집으로 가자고 생각합니다. 이제 아빠도 아빠 일을 해 보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곯아떨어진 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힘들며 더딥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채 가까스로 집에 닿습니다. 애 아빠는 더없이 고단하여 찬물로 한 차례 씻은 다음 아이 옆에서 잠들지도 못하고 딱히 아빠 일을 하지도 못합니다. 멍하니 앉아 책조차 못 펼칩니다.

 며칠 앞서 우리 친형이 산티아고로 떠났습니다. 쉰 날 남짓을 다니는 나들이길이라고 하며 떠났습니다. 떠나는 길에 우리 식구한테 살림돈을 두둑히 보태 주었습니다. 한 달 반치 달삯에 이르는 돈을 주었습니다. 요사이 ‘산티아고 순례자’가 많이 늘었고 ‘산티아고 순례기’ 책이 꽤 많이 나온다는데, 우리 형은 어떤 마음과 뜻으로 먼 나들이길을 떠나는지 궁금합니다. 먼 나라에서 낯과 물이 선 사람들 사이를 뚜벅뚜벅 거닐며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받아먹을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형은 형한테 주어진 삶을 어떻게 마주하고 있으며, 형한테 주어진 길을 어떤 매무새로 받아들이는지 궁금합니다. 그러고 보니 형으로서는 곧 마흔 줄 나이에 접어듭니다. 《나는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라든지 《중년 이후》라는 책을 쓴 소노 아야코 님은 나이가 젊을 때에는 젊은 대로 좋고, 나이가 들 때에는 나이가 드는 대로 좋다고 밝힙니다. “사람도 물건도 살아 있는 생물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든가 사라져 버릴 운명이다. 그러한 존재를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소중한 의무인 것이다(92쪽)” 하고 《중년 이후》에서 밝힙니다. 먼길을 땀흘려 걷노라면 형은 형대로 저는 저대로 우리 삶을 알뜰히 사랑할 몸짓 하나 익힐 수 있겠지요. (4343.6.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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