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나누는 기쁨 ㉤ 사진이 걸어가는 길
 ― 깍두기와 사진


 사진을 찍거나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글과 그림을 즐겨읽으라 이야기합니다. 글을 쓰거나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사진과 그림을 즐겨보도록 이야기합니다. 그림을 그리거나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글과 사진을 즐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좋은 글은 좋은 그림이랑 사진하고 이어집니다. 좋은 사진을 마주하는 넋은 좋은 그림과 글을 만나며 한결 깊거나 넓어집니다.

 윤오영 님이 쓴 《수필문학입문》(관동출판사,1975)이라는 묵은 책을 읽다 보면 〈깍두기說〉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책이나 이 글을 찾아 읽기란 쉽지 않은 만큼, 수필쓰던 윤오영 님이 ‘수필을 쓰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밝힌 대목에서 왜 깍두기를 빌었는가를 옮겨 봅니다. 윤오영 님한테는 ‘깍두기와 수필’이지만, 사진을 하는 우리한테는 ‘깍두기와 사진’입니다. 퍽 묵은 글이라 어려운 한문 투가 곳곳에 있지만, 좋은 글을 읽을 때에는 옥편이나 국어사전을 곁에 놓고 읽으면 한결 훌륭합니다.


.. 아마 다른 부인들은 산진해미 희귀하고 값진 재료를 구하기에 애쓰고 주방 주위에 흔히 볼 수 있는 무·파·마늘은 거들떠보지도 아니했을 것이다. 갖은 양념 갖은 고명을 쓰기에 애쓰고, 소금·고추가루는 거들떠보지도 아니했을 것이다. 재료는 가까운 데 있고 허름한 데 있었다. 옛날 음식 본을 뜨고 혹은 중국사관이나 왜관 음식을 곁들여 규격을 맞추고 법도 있는 음식을 만들기에 애썼으나 하나도 새로운 것은 없었을 것이다. 더우기 궁중에 올릴 음식을 그런 막되게 썰은 규범에 없는 음식을 만들려 들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무를 썰면 곱게 채를 치거나 나박김치 본으로 납짝납짝 예쁘게 썰거나 장아찌 본으로 걀죽걀죽하게 썰지, 그렇게 꺽둑꺽둑 썰 수는 없다. 기름·깨소곰·후추가루 식으로 고추가루도 적당히 치는 것이지 그렇게 싯뻘겋게 막 버무리는 것을 보면 질색을 했을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깍두기는 무법이요 창의적인 대담한 파격이다. 그러나 한국 음식에 익숙한 솜씨가 아니면 이 대담한 새 음식은 탄생될 수 없다. 실상은 모든 솜씨가 융합돼 있는 것이다. 이른바 무법 중의 유법이다. 무를 꺽둑 막 써는 것은 곰국 건지 썰던 솜씨요, 무를 날로 먹도록 한 것은 생채 먹던 솜씨요, 고추가루를 벌겋게 버무린 것은 어리굴젓 담그던 솜씨요, 발효시켜서 익혀 먹도록 한 것은 김치 담그던 솜씨가 아니겠는가. 다 재래에 있어 온 법이다. 요는 이것이 따로따로 나지 않고 완전동화되어 충분히 익어야 하고, 싱싱하고 얼근한 맛이 구미를 돋구도록 염담을 잘 맞추어야 한다 ..  (222∼223쪽)


 좋은 밥이란 먼 데 있지 않습니다. 맛난 밥이란 이름난 밥집에 있지 않습니다. 좋은 밥은 바로 내 어버이가 마련해 주는 밥이며, 나 스스로 내 살붙이한테 차려 주는 밥입니다. 맛난 밥 또한 내 할매와 할배가 차려 주는 밥이요, 내가 내 할매와 할배한테 차려 드리는 밥입니다.

 좋은 사진은 틀림없이 나라밖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좋은 사진은 어김없이 나라안에도 있습니다.

 머나먼 아프리카나 중남미 가난한 사람들을 찍어도 다큐사진입니다. 인도에 가든 네팔에 가든 티벳에 가든 이곳 자연하고 벗삼은 사람들을 담아도 다큐사진입니다. 그리고, 한국땅 비정규직 일꾼이라든지 여느 알바 푸름이라든지 농사꾼이라든지 한 달 일삯 100만 원이 안 되는 여느 일꾼들 삶을 담아도 다큐사진입니다. 더구나 가난한 사람만 찍어야 다큐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쟁이 윤주영 님은 《50인》(방일영문화재단,2008)이라는 사진책을 내놓으며 ‘우리 시대를 이끌어 온 사람들’이라는 덧이름을 달았는데, 이 사진책 《50인》 또한 알뜰살뜰 다큐사진이 됩니다.

 더 가난한 사람을 찾아다닌다든지, 더 꾀죄죄하거나 더 볼품없거나 더 슬퍼 보이는 모습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나서야 다큐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아름다움과 기쁨과 슬픔과 웃음과 눈물과 고단함을 골고루 돌아보는 가운데 따순 사랑과 너른 믿음을 살포시 담을 때에 비로소 다큐사진이면서 ‘사진’입니다. 가난한 살림이든 가멸찬 살림이든 똑같은 사람 살림임을 깨달아, 사진쟁이 스스로 이들하고 살가이 이웃으로 사귀며 같이 웃고 같이 우는 가운데 수수하거나 투박하게 맞잡은 손으로 빚어야 바야흐로 다큐사진이자 삶사진이요 ‘사진’이에요.

 수수하거나 투박한 데에서 태어난 깍두기이듯, 흔하고 너른 데에서 비롯한 김치이며, 날마다 아주 마땅하다는 듯이 먹는 쌀밥입니다. 물 한 방울 없이는 사람이든 어떠한 목숨이든 살아가지 못합니다. 따로 마시는 물이 아니더라도 모든 먹을거리에는 물기가 배었습니다. 물기 없는 먹을거리로는 어떠한 목숨도 숨결을 잇지 못합니다. 참으로 아름답다 하면서 오래도록 사랑받는 밥이나 밥거리란 바로 밥과 김치와 깍두기 같은 데에서 비롯합니다. 참으로 아름답다 하면서 두고두고 사랑받는 사진이나 사진거리란 바로 ‘밥 같은 사진’과 ‘물 같은 사진’과 ‘깍두기 같은 사진’에서 비롯합니다.

 그러나, 불고기도 사진입니다. 염통구이도 사진입니다. 김밥이나 케익이나 도넛이나 핫도그도 사진입니다. 잡채나 탕수육도 사진일 테지요.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나 스스로 어떠한 사진길을 걷는지 옳게 살펴야 합니다. 사진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내가 즐기는 사진이 내가 즐기는 삶하고 얼마나 잇닿았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지난날 궁중에서도 “옛날 음식 본을 뜨고 혹은 중국사관이나 왜관 음식을 곁들여 규격을 맞추고 법도 있는 음식을 만들기에 애썼”다고 하듯이, 오늘날 사진밭에서도 ‘전통 기법’이라든지 ‘서유럽과 미국 기법’이라든지 ‘일본 기법’을 배우거나 따르거나 좇는 흐름이 짙습니다. 사진밭뿐 아니라 그림밭도 마찬가지이고, 다른 문화나 예술을 하는 분들도 매한가지입니다. 이 나라 이 땅에서 내 문화와 내 예술을 꽃피우거나 갈고닦는 이는 매우 드물거나 아예 없다 할 만합니다. 더욱이, 수수한 여느 사람들 삶터인 골목동네나 시골마을에서 문화와 예술을 일으키는 쟁이란 훨씬 적습니다. 대학교 시간강사나 교수 자리조차 바라지 않으며 조용히 사진길을 걷는 이는 얼마나 되려나요. 뚜벅뚜벅 걷는 사진길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뿐사뿐 걷는 사진길을 아끼는 사람은, 톡톡 튀듯 신나게 걷는 사진을 즐기는 사람은, 쉬엄쉬엄 걷는 사진길을 씩씩하게 보듬는 사람은, 다른 이 눈치 아닌 내 삶을 들여다보며 사진길을 다스리는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요.

 앤 셸린 제이거라는 이가 엮은 《사진, 찍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미진사,2008)라는 알차며 훌륭한 사진책이 하나 있습니다. 이 사진책은 책이름으로 우리들한테 묻습니다. 사진은 찍어서 이룹니까? 사진은 만들어서 이룹니까? 사진은 어떻게 이룹니까?

 이 책을 읽고 나서 깨우칠 분이 있을 테고, 이 책을 읽어도 못 깨우칠 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진, 찍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는 사진은 어떻게 이루는가를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하듯 오락가락하는 이야기로 헷갈리게도 하지만, 정작 풀이는 다른 데에서 합니다. 사진은 찍지도 않고 만들지도 않는다고 아주 고요히 이야기합니다. 사진은 살아내면서 이룬다고 넌지시 들려줍니다.

 사진길은 사진을 찍으며 걸을 수 없습니다. 사진을 만들며 사진길을 걸을 수도 없습니다. 사진이란 나 스스로 일구는 내 삶길에 따라 태어납니다.

 일본사람 ‘다케타쓰 미노루(竹田津 實)’ 님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훗카이도 동물의사’로만 알려졌으나,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들짐승 사진을 찍는 놀라운 사람’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아직 한국에는 ‘토몬 켄’ 님 사진책이나 ‘기무라 이헤이’ 님 사진책 하나 제대로 나온 적조차 없고 옳게 알려지지도 못했으니, 다케타쓰 미노루 님 ‘들짐승 사진책’이 찬찬히 옮겨지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예쁘장하게 꾸민 이야기책만 겨우 나올 뿐입니다. 이는 ‘호시노 미치오’ 님 북극곰 사진을 생각해도 똑같습니다. 호시노 미치오 님은 사진쟁이이지만 막상 호시노 미치오 님 사진책이 나오지는 않아요. 호시노 미치오 님 이야기책만 옮길 뿐입니다. 그래도, 이런저런 이야기책을 옮겨 주니 고맙다 해야 할 테지만, 사진하는 사람으로 보자면 ‘사진책으로 사진을 만나지 못하고 이야기책으로 이야기만 만나는’ 일은 슬픕니다. 아쉬움을 달래며 이야기책을 만나는 동안 이분들이 어떠한 사진길을 걸었는가 하고 어림하거나 헤아리거나 꿈을 꾸어 보고, 이렇게 생각날개를 펼치면서 ‘글을 읽으며 사진을 읽는다’를 이루기도 합니다만, 사진쟁이로서 빚은 열매인 사진책을 못 보는 일은 서운해요. 겨우겨우 헌책방에서 몇 가지 사진책을 만나면서 쓸쓸함을 씻는데, 다케타쓰 미노루 님 사진책 《キタキツネ : 北邊の原野を驅ける》(平凡社,1974)를 마주쳤을 때에는 몹시 놀랐습니다. 다케타쓰 미노루 님이 1974년에 내놓은 북극여우 사진책 여우 모습이 1997년에 한국에서 나온 이름난 어린이책에서 보던 여우 모습하고 털끝 하나까지 같았거든요.

 사진은 내가 보는 대로 내 사진기 단추를 누르며 태어납니다. 사진이라 할 만하든 아니든 어떻든 사진이라는 물건은 쉽게 끊임없이 숱하게 태어납니다. 애써 찍은 사진이 물건으로 머무는지 작품으로 거듭나는지 이야기로 빛나는지는 사진길을 걷는 사람 매무새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진은 보는 대로 찍습니다. 사진을 찍고자 무엇을 보자면 무엇이 어떠한 님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어떠한 님인지를 알자면 지식쌓기도 해야겠으나, 이웃이나 동무나 살붙이로 함께 살아야 합니다. 내 남자친구 키랑 몸무게랑 취미랑 직업을 안다 해서 내 남자친구를 ‘안다’고 할 수 없어요. 마음을 알고 마음을 읽으며 마음을 나누어야 시나브로 ‘남자친구 알아 가는 길’에 첫발을 디딥니다. 마음알기를 하자면 ‘함께 살아가’거나 ‘함께 살듯 어울려’야 합니다.

 사진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글과 그림을 나란히 좋아하고, 만화도 몹시 좋아합니다. 어느 한 가지만 더 좋아할 수 없고, 어느 하나만 더 좋아하지 않습니다. 고루고루 즐길밖에 없고, 고루고루 즐길 만큼 모두 반가우며 기쁩니다.

 밥만 잘한대서 살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빨래를 잘한다고 살림을 잘 꾸리지 않습니다. 가계부를 잘 쓰거나 살림돈을 아낀다면 살림을 잘한다 말할 만한가요. 아이를 잘 돌보거나 보살핀다고 살림을 잘하는 셈이겠습니까. 비질이나 걸레질을 잘하는 사람은 어떠할는지요. 살림살이란 이 모두와 다른 숱한 여러 가지를 골고루 사랑하면서 잘할 때에 살림살이라 이름을 붙입니다. 사진찍기란 사진기질을 잘하는 일 하나로는 이루지 못합니다. 기계나 장비를 잘 건사한다고 사진을 하는 셈이 아닙니다. 취재원이나 사진거리를 잘 알아본다고 사진을 하지 않아요. 온몸 바쳐 현장에 뛰어든다고 사진을 힘껏 잘한다 말하지 않습니다. 사진학과를 나오거나 유학길을 떠났다 해서 사진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진삶을 골고루 슬기롭고 사랑스레 껴안을 때에 사진길 첫발을 디딘 셈입니다. (4344.1.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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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긷고 빨래하러 날마다 이오덕자유학교를 오르내리며, 이오덕 선생님 빗돌에 눈 쌓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문득, 여러 해 앞서 쓴 글 하나 떠올라 걸쳐 놓습니다. 

 



글이름 : 나한테 이오덕 선생님은


 새벽마다 일찍 잠이 깹니다. 겨울이 지나면서 개구리가 깨어났고 웅크리던 새들도 기운을 찾았습니다. 새벽 네 시 반쯤 되면 창밖은 환하고 새들 우는 소리로 귀가 따갑기까지 합니다.


 아침 햇빛은
 맨 처음 분홍색으로
 어질게 솟아오른 산의 이마를
 물들이고,

 다음엔 나뭇가지 위에서
 밤새도록 별들의 노래를
 꿈속에 수놓던
 새들의 보금자리를 찾아 주고,

 차츰 산기슭에 내려와
 시래기가 매달린 토담집
 찌그러진 방문을
 빨갛게 비추고,

 그 흙내 나는 방 안
 밥상 위에 놓인 된장찌개에서
 모락모락 서려 오르는 김을,
 둘러앉은 식구들의 검붉은 얼굴들을,
 그 가슴속까지
 환히 밝히고,

 그리고, 길가에 굴러 있는 자그만 조약돌
 조약돌마다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아침 햇빛〉(시모음 《까만새》에서)



 아침 햇빛은 공납금을 내지 못해 쩔쩔매던 아이들 머리에도, 시험점수 따는 공부에 떠밀리는 아이들 머리에도, 학교를 떠나거나 학교에서 쫓겨난 ‘문제아이’머리에도 비춥니다. 하지만 새벽별 보고 학교에 가서 저녁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들 머리에는 비추지 못하겠군요. 체육시간마저 아깝다 해서 바깥에 내보내지 않고, 오로지 책상 앞에만 묶어 두는 형편이니까요.

 교사가 되는 꿈을 꾼 적 있습니다. ‘내가 학교를 다니며 겪은 일’을 한 아이만이라도 되풀이하지 않으면서 ‘그 젊은 나이에 배우고 익히며 받아들일 여러 가지’를 즐겁게 부대낄 수 있도록 힘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교대에 들어가려면 ‘제도권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시험점수 따기 공부를 시키며 닦달하는 지식’을 나부터 다시 머리속에 넣어야 하더군요. 언젠가 ㅅ교육대학교 도서관을 찾아갔을 때, ‘아무도 빌려가지 않는 책’하고 ‘뻔질나게 빌려가서 닳고 닳은 책’을 보았습니다. 교대에서 ‘아무도 빌려가지 않는 책’은 제가 학교를 다니는 동안 숱하게 ‘선생들이 압수해 갔던 책(시험공부에 걸리적거리니 보지 말라며 빼앗은 책. 하이네 시모음, 소설 《원미동 사람들》도 빼앗긴 책이었어요.)’이며 ‘시험문제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다룬 책’입니다. ‘뻔질나게 빌려가서 닳고 닳은 책’은 ‘교대에서 학점을 따고 강의를 들을 때 쓰는 교재’입니다. 더러 ‘동네 책대여점에서 빌려 보는 책’들도 ‘닳고 닳은 책’이 되곤 합니다.


.. 오늘날의 교육에는 사랑이란 것이 없어졌다. 겉으로야 무슨 말을 못하며, 보이기야 무슨 모양 어떤 숫자를 못 만들어 내랴. 가르치는 것이 지식의 단편이요, 물질을 얻고 입신하는 수단이고 보면 이런 넋 빠진 교육에서 아이들은 교사를 지식 전달의 기계로 보고, 교사는 아동을 밥벌이의 도구로 여긴다. 교육은 완전히 하나의 상품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  《이오덕-삶과 믿음의 교실》(1978) 49쪽


 아직 힘알이 없는 멧개구리 뒤뚱걸음을 보았다가, 곧 깨어날 개구리알이 얼마나 있나 들여다보다가, 새벽부터 부지런히 울어대는 저 작은 새가 박새인지 콩새인지 살펴보다가, 새잎을 틔우려는 나무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만져 보다가, 오늘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지만 온갖 공해를 내뿜는 사람문명 탓에 먼지띠가 짙게 끼어 뿌옇게 보이는 하늘은 언제쯤 파래질까 생각하다가, 아, 철쭉이 피었네? 산수유는 진작 폈지? 살구꽃이 곧 터질 듯 말 듯이라는데, 복숭아꽃도 피겠구나, 보리순 뜯어 먹고 쑥 뜯어 먹고 민들레와 씀바귀도 캐어 먹으면서 참말 봄이 왔구나 하고 느낍니다.

 지난 2003년 8월 25일에 이오덕 선생님이 이 땅을 떠난 뒤로 세 해째 되었습니다. 선생님 살아 계실 때 딱 한 번 뵌 일은 있지만, 오로지 책으로 배우고 책으로만 스승이었습니다. 함께 어깨를 걸고 다부지게 일할 동무가 보이지 않고, 이런 까마득한 벼랑 앞에서 내가 무엇을 하면 좋을까 아찔할 때 한결같은 목소리로 만날 수 있던 책 스승이었습니다. 책으로만 만나는 스승이기에 자칫 ‘책에만 묻힐’까 아슬아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정약용도, 박지원도, 홍대용도, 이규보도, 허균도, 김시습도 책으로만 만나는 스승입니다. 이분들은 언제나 ‘당신들이 한 일을 책에 적힌 글월로 읽기’보다 ‘책은 안 읽어도 좋으니, 어느 한 가지라도 얻은 것이 있으면 바로 몸으로 옮기며 네 깜냥대로 받아들이며 부대끼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깨우침·앎·슬기도 책으로 남아 우리한테 다가올 테지요.

 ‘교육자 이오덕’이 우뚝 설 때까지 이분한테 ‘스승이 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책도 많이 읽으셨을 테고, 아이들과 부대끼며 많이 배우고 겪기도 하셨을 테며, 시골학교에서 자연을 언제나 벗삼기도 하셨겠지요. 그러고 보면 저한테 스승인 것은 사람이 남긴 책도 있지만, 우리 모두가 태어나도록 한 자연 삶터, 둘레 사람들, 새소리와 바람소리와 파란 하늘이기도 하겠어요.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누구하고도 열린 마음으로 부대낄 수 있다면, 배울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거듭날 수 있겠어요.

 이오덕 선생님은 우리들한테 스승으로 있기보다 말동무로, 살구와 오디를 함께 따먹고 감을 함께 주워먹는 놀이동무로, 자연 삶터에서 땀흘려 제몫을 다하는 일동무로 함께 살아가고 싶으셨구나 싶어요. 그래, 이제는 봄입니다. 이 봄을 봄기운 그대로 마음껏 느끼면서 ‘이오덕 선생님도 듣고 좋아하셨을 새소리’로 새벽을 열고 쑥을 뜯어 찌개를 끓여 아침을 먹습니다. (4339.4.1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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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2.27. 

지우개 들고 노래하기. @.@ 

 

그림책 펼치고 자판 두들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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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우리말 생각 ㉤ 새말


 《국어 실력이 밥 먹여 준다(문장편)》라는 책을 읽다가 “향기 나는 문장이니 하는 이야기까지 듣는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14쪽).”라는 글월을 보았습니다. 이 같은 글월이 잘못되었다거나 얄궂다거나 할 수 있는 한편, 이러한 글월은 오늘날 어디에서나 어렵잖이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글을 쓰고 싶으면 이와 같이 쓸 일이지만, 저보고 이 글을 다시 쓰라 한다면, “향긋한 글이니 하는 이야기까지 듣는다면 더없어 좋다.”처럼 쓰겠어요. 이 글월을 쓰신 분은 토박이말 ‘향긋하다’보다 한자말 ‘향기(香氣)’를 좋아하지만, 저는 ‘향기’라는 한자말보다 토박이말 ‘향긋하다’를 좋아해요. 그리고 ‘-일 것이다’ 같은 말투는 달가이 여기지 않아요. ‘것’이라는 말투는 아무 데나 쓰면 안 될 뿐더러, 이곳저곳에 함부로 쓸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금상첨화(錦上添花)’ 같은 한자말을 꼭 써야 하는지 궁금해요. 바르고 알맞으면서 쉽게 글을 쓸 수 있잖아요. “비단에 꽃을 더한다”는 뜻이라는 ‘금상첨화’인데, 쉽게 말하자면 “더 좋다”는 이야기예요. “참 좋다”나 “한결 좋다”는 이야기이기도 해요.

 말사랑벗들은 이렇게 생각해 본 적 있나요. ‘금상첨화’라는 한자말은, 한자를 쓰며 살아가는 중국사람이 ‘새롭게 지은 낱말’이에요. 우리는 한글을 쓰며 살아가는 한국사람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서 서로서로 살가이 나눌 만한 우리말을 새롭게 지을 만하지 않을까요?

 낱말책에 싣기는 어렵겠지만, ‘더좋다’ 같은 낱말을 지을 수 있어요. 새 낱말이 아니더라도 ‘더 좋다’ 같은 말마디를 써 볼 수 있어요. 학문하는 낱말로 관용구라고 하는데, ‘더 좋다’나 ‘한결 좋다’를 관용구로 삼아도 넉넉합니다. 또는 ‘비단에꽃’이라든지 ‘비단꽃’ 같은 낱말을 빚을 만해요.

 이렇게 보면, 이 글월은 “향긋한 글이니 하는 이야기까지 듣는다면 비단꽃이 아닐까.”처럼 새로 적어 볼 수 있습니다. “향긋한 글이니 하는 이야기까지 듣는다면 비단에 꽃을 얹는 셈이다.”처럼 새롭게 적을 수 있어요.

 학교를 다니는 말사랑벗이라면 “학교에서 입는 옷”인 ‘교복(校服)’을 입기도 하겠지요. 이 낱말을 그대로 써도 나쁘지 않으나 “학교에서 입는 옷”이라는 뜻 그대로 ‘학교옷’이라는 새 낱말을 빚어 써도 괜찮아요. 학교에서 부르는 노래는 ‘교가(校歌)’ 아닌 ‘학교노래’가 되고, 나라에서 부르는 노래는 ‘국가(國歌)’ 아닌 ‘나라노래’가 돼요.

 저는 집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살아간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저는 제가 하는 일을 가리켜 ‘아이키우기’라고 이야기해요. 이 낱말도 낱말책에 없을 뿐더러 ‘육아(育兒)’라는 낱말만 실리는데, 낱말책에 실리든 안 실리든 즐거이 쓸 만하다고 느낄 뿐더러, ‘아이키우기’라는 말을 쓰는 분이 나날이 부쩍 늘어나요.

 지난날에는 ‘독서(讀書)’라고만 얘기했으나 오늘날에는 ‘책읽기’라고도 함께 얘기해요. 어쩌면, 이제는 ‘독서’보다 ‘책읽기’라는 낱말을 훨씬 자주 많이 이야기할 텐데, 아직까지 이 낱말은 낱말책에 안 실려요. 낱말책에 안 실린 낱말은 우리나라 맞춤법으로는 띄어서 적도록 하지만, 사람들이 새로 빚는 낱말로 여기며 즐겁게 쓰면 좋아요. ‘책읽기’와 맞물려 ‘삶읽기’나 ‘마음읽기’나 ‘글읽기’나 ‘시읽기’나 ‘영화읽기’나 ‘정치읽기’나 ‘사회읽기’ 같은 새말을 마음껏 빚어도 되고요. ‘사랑읽기’라든지 ‘믿음읽기’처럼 새말을 빚어도 됩니다.

 새말이란 하늘에서 똑 하고 떨어지는 말이 아니라, 우리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며 저절로 일구는 낱말이에요. 내 삶을 북돋우며 알맞게 빚는 낱말이 새말이고, 내 넋을 곱게 여미면서 슬기롭게 짓는 낱말이 새말이에요. 이리하여, ‘꿈날개’나 ‘꿈나래’도 새말이고, 아저씨가 말사랑벗을 일컫는 ‘푸름이’도 새말이랍니다. 밤에 올려다보는 하늘을 놓고 ‘밤하늘’이라 일컬으면, 이때에도 새말이에요. 동무들이랑 걷는 길이 좁아 ‘좁은길’이라 해 보아도 새말이고, 우람하게 자란 나무를 바라보며 ‘큰나무’라 가리킬 때에도 새말이에요. ‘글쓰기’도 새로 태어난 말이고, ‘그림그리기’나 ‘노래부르기’나 ‘사진찍기’ 또한 새말이랍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지을 수 없는 말이니까요, 새롭게 빚은 낱말을 듣는 이웃과 벗을 헤아리면서 아기자기하면서 사랑스러운 마음을 담아 하나둘 곱씹어 보셔요.

 ‘새말’이 있으니 ‘새글’이 있고, 사람은 새롭게 태어난대서 ‘새사람’이며, 새로 사귀는 벗은 ‘새벗’이요, 새로 한 밥은 ‘새밥’이에요. 새로 내놓아서 ‘새책’이고, 새롭기에 ‘새뜻’인 가운데, 새롭게 맞아들여 ‘새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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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기와 연필 쥔 예쁜 이웃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14] 《山に生かされた日日》(民族文化映像硏究所,1984)



 삶도 사람도 온누리도 하루가 다르게 달라집니다. 날마다 새로운 물건이 쏟아지고 새로운 소식이 퍼지며 새로운 기계가 태어납니다. 새로운 물건이 쏟아지면서 얼마 되지 않은 물건마저 낡거나 뒤떨어지거나 버려야 할 것으로 삼습니다. 새로운 소식이 퍼지며 지난날 소식은 파묻힙니다. 지난날 소식이 너무 많다 보니, 소식더미에서 허우적거릴 뿐, 무엇을 귀담아듣고 무엇을 눈여겨보며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가를 잊습니다. 새로운 기계가 자꾸 태어나는 가운데, 나 스스로 내 손과 몸과 마음을 기울여 가다듬는 일거리가 스러집니다.

 제가 쓰는 디지털사진기는 캐논 회사에서 만든 450디입니다. 지난 2010년 여름에 이 사진기가 스스로 목숨을 다해 더는 쓸 수 없어 550디를 장만해 보았는데, 새 사진기는 온갖 솜씨를 더 부릴 만한 기계였으나 제 눈결하고는 어울리지 않아 되팔았습니다. 망가진 450디를 목돈 들여 고쳐서 다시 씁니다. 어쩌면 2011년 여름에 다시금 덜컥덜컥거려 또 고쳐야 할는지 모르고, 2012년 여름에는 그예 맛이 갈는지 모릅니다. 필름을 쓰는 사진기는 잘 안 망가진다고들 하지만, 아무리 살살 건사하더라도 오래도록 쓰다 보면 자잘히 낡고 닳아 못 쓰기 마련입니다. 필름사진기 한 대가 스스로 목숨을 다해 사진벗한테서 하나 얻어 쓰는데, 이 녀석이 목숨을 다할 때에 고칠 수 있는 가게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새로운 장비와 새로운 솜씨가 나타나면서 새롭게 사진을 찍거나 새롭게 사진이야기 일구는 사람 또한 많이 나타납니다. 바야흐로 사진예술이 흐드러지게 꽃핀다고 느낍니다. 이와 함께,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온누리이다 보니, 나라나 지자체에서 큰돈 들여 ‘지역 생활문화유산 기록 사업’을 곧잘 벌이곤 합니다. 현대 도시 물질문명하고 적잖이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사진과 동영상과 글로 적바림하는 일을 퍽 자주 봅니다.

 이를테면 소한테 쟁기를 얹혀 논갈이를 하는 농사꾼 삶이라든지, 그물로 고기잡이하는 사람들 삶이라든지, 멧골에서 나물을 캐는 멧사람 삶이라든지, 바다에서 물질하는 사람들 삶이라든지, 나무를 깎고 다듬어 집짓는 사람 삶이라든지, 우리 악기나 그릇을 만드는 사람들 삶이라든지 찾아다니고 살펴보며 적바림하곤 합니다. 글을 쓰는 분은 으레 대학교수나 대학원 석·박사 과정 학생이나 조교나 강사입니다. 전문 사진쟁이가 사진을 찍기도 하고, 그냥 사진기 쥔 대학교수나 대학생이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마을사람 스스로 마을사람 삶을 담는 일은 드뭅니다. 아주 드물게 충남 홍성군 홍동면에서는 ‘마을 이야기책’을 엮습니다. 그러나 이곳을 뺀 이 나라 어느 곳에서도 마을사람 스스로 ‘우리 이야기가 참 보배롭지.’ 하고 여기며 적바림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스스로 적바림할 겨를이 없습니다.

 마을사람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담는 사람들은 언제나 ‘마을 바깥’에서 살아가며 ‘마을 구경’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을에서 일거리를 찾아 마을사람하고 이웃으로 지내며 스스로 마을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틀림없이 인문학 지식이나 인류학 지식은 빈틈없을 뿐더러 ‘마을 이야기책 엮는 솜씨’라든지 ‘사진기 다루는 재주’는 빼어납니다. 글과 사진은 뛰어납니다. 글과 사진은 훌륭하거나 뜻있다 할 만합니다. 다만, 글이든 사진이든 사랑스럽다거나 살갑다거나 따스하다거나 너그럽다거나 포근하다거나 즐겁다거나 애틋하다거나 좋다거나 하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누군가는 이야기합니다. 딸아이 키우는 어버이가 딸아이를 찍는 사진보다 둘레 사람이나 사진관 사람이 딸아이를 찍는 사진이 한결 ‘객관’이지 않겠느냐고. 내 어버이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도 딸아들이 찍을 때보다 낯선 사람이 찍을 때에 ‘객관’을 지키지 않겠느냐고. 인간문화재를 담을 때에 제자가 사진으로 담을 때랑 전문 사진쟁이가 사진으로 담을 때랑 사진기자가 사진으로 담을 때랑 견주면 전문 사진쟁이나 사진기자가 ‘객관’ 테두리에서 찍지 않겠느냐고.

 일본 사진책 《山に生かされた日日》를 봅니다. “新潟縣朝日村奧三面の生活誌”라는 이름이 붙은 ‘민속문화 생활기록’이라 할 만한 책입니다. 서울 신촌에 있는 헌책방에서 장만한 《山に生かされた日日》은 1984년에 1쇄를 찍고 1996년에 3쇄를 찍습니다. 열두 해 만에 3쇄라니 참 더디 팔리는 책일 텐데, 어찌 되었든 깊은 멧골 조그마한 마을사람 이야기책이 3쇄를 찍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멧마을 사람들 삶이야기를 담은 책이 이렇게 사랑받은 적이 없을 뿐더러, 앞으로도 이처럼 사랑받기는 힘들다고 느낍니다. 하나같이 도시로만 몰리고 도시 살림만 헤아리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민속문화 생활기록’을 왜 하고 어떻게 하며 누가 하는가를 살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잘 찍은 사진을 담아야 잘 엮은 사진책이 아닙니다. 잘 쓴 글을 실어야 잘 빚은 이야기책이 아닙니다.

 어깨동무하는 삶으로 사진을 담아야 하고, 너나들이 같은 이웃이 되어 글을 실어야 합니다. 제아무리 예쁘장하게 찍은 딸아이 사진이라 한들 아름답거나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초점 어긋나고 흔들린데다가 빛조차 안 맞았을지라도 ‘아이를 사랑하는 어버이가 따사로운 넋과 손길’로 찍은 사진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山に生かされた日日》에 실린 사진들은 하나같이 사랑스럽습니다. 따스합니다. 좋습니다. 즐겁습니다. 머나먼 도시에서 학자님들이 ‘행차’해서 찍는 사진이 아니라, 머나먼 도시에서 찾아온 학자님들일지라도 마을사람하고 고이 어우러지면서 저절로 얻은 사진으로 책을 일구었습니다.

 지역문화를 살피든 민속문화를 톺아보든 생활문화를 파헤치든 전통문화를 다루든, 학자나 교수나 학생 된 사람은 ‘사진기를 쥔 예쁜 이웃’으로 마주서야 합니다. ‘연필을 쥔 고운 동무’로 어깨동무해야 합니다. ‘사진기와 연필을 때때로 내려놓고 함께 호미를 쥐는 살붙이’로 두레를 하고, ‘술잔과 수저를 함께 드는 마을지기’로 웃고 울어야 합니다. (4344.1.3.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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