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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누스 푸디카 ㅣ 창비시선 410
박연준 지음 / 창비 / 2017년 6월
평점 :
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5.7.25.
노래책시렁 505
《베누스 푸디카》
박연준
창비
2017.6.19.
남들이 안 쓰거나 모를 만한 어려운 낱말을 골라서 슬쩍 넣어야 ‘글’이라고 여기는 분이 꽤 있습니다. 워낙 중국글을 받아들이던 지난날부터 ‘글’이란 “어렵게 꼬아서 아무도 못 읽도록 감춘 그들잔치”이곤 했습니다. 중국글만 ‘글’로 삼던 그들(남성가부장권력·마초)은 아예 중국글을 ‘수글’이라는 이름으로 자랑했습니다. 훈민정음이 태어났어도 훈민정음은 ‘암글’일 뿐이요, 순이(여성)는 수글(중국글)이 아닌 암글(훈민정음)만 익히면 된다고 여겼습니다. 《베누스 푸디카》를 읽는 내내 우리는 아직 지난날 ‘그들잔치’를 고스란히 이으면서 글담을 쌓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저 삶을 노래하면 될 텐데, 자꾸 어려운 중국글이나 일본글이나 영어를 끼워넣어야 하나요? 그대로 살림을 노래하면 넉넉할 텐데, 구태여 먼나라 그들잔치를 채워야 하는가요? 발을 바로 이 땅바닥에 붙일 적에 삶이 태어나고, 이 삶을 그리는 말이 깨어납니다. 수글도 암글도 모르는 채, 종이에 붓에 먹에 벼루도 까맣게 모르는 채, 그렇지만 아이를 사랑으로 낳아서 돌볼 줄 알던 지난날 수수한 흙지기 숨결을 가만히 살리는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오늘사람’을 찾지 말아야 하려나 궁금합니다. 말을 잊거나 등진 곳에는 노래가 없이 ‘틀’만 있습니다.
ㅍㄹㄴ
곧, 곧, 들릴 것 같은데 / 회색이 될 것 같은데 / 다하기 전에는 움직일 수도 없는데 // 붉은 궤적을 따라 신경이 쏟아지고 / 주황, 아니면 빨강이겠구나 너는 / 막돼먹은 바람처럼 달렸겠구나. (침대/16쪽)
아홉번 죽은 별들만 아름답다는데 대관절 / 아름답게 죽은 별이란 게 무슨 소용일까? / 살아나면 어쩌지 / 이 많은 생의 궁극들, / 피어나면 어쩌지 (아홉번 죽은 별들만 아름답다/37쪽)
꿈속에서 아버지가 군대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 그럼 우린 어떻게 살아? // 아버지는 대답하지 못하고 /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더니 (흠향歆饗/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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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누스 푸디카》(박연준, 창비, 2017)
그게 내 일곱살 때 음부 모양
→ 내 일곱살 샅
→ 내 일곱살 밑
10쪽
버드나무 아래서 기다래지는 생각
→ 버드나무 밑에서 길어가는 생각
→ 버드나무 곁에서 긴긴 생각
14쪽
허방과 실패로부터 도망가는 지네의 붉은 등
→ 허방과 쓴맛을 달아나는 붉은등 지네
14쪽
허밍으로 비밀을 발설하는 무희들
→ 콧노래로 속내를 들려주는 춤아씨
→ 입술노래로 숨은말 하는 나풀꽃
22쪽
먹이를 발견한 짐승이 세상을 압인(壓印)하는 동작으로
→ 먹이를 찾은 짐승이 둘레를 찍어누르듯이
→ 먹이를 본 짐승이 온누리를 내리누르듯이
28쪽
밤의 이적수(耳赤手)로 죽음에 성공한 귀신들
→ 밤이 살려서 죽어버린 깨비
→ 밤이 도와서 죽은 도깨비
37쪽
여기가 백회(百會)인가, 무구한 풀들이 모여 기도하는 백회인가
→ 여기가 온빛인가, 고운 풀이 모여 비는 온빛인가
→ 여기가 빛인가, 깨끗한 풀이 모여 비손하는 빛인가
46쪽
시작도, 선언도, 기억도 없이 깊어진 것들
→ 처음도, 말도, 생각도 없이 깊어간 길
50쪽
봄의 식물들은 기다리는 게 일이다. 자기 순서를
→ 봄풀은 제자리를 기다린다
→ 봄꽃은 제때롤 기다린다
134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