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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라도 따뜻하게 - 표성배 시집 ㅣ 문학의전당 시인선 153
표성배 지음 / 문학의전당 / 2013년 5월
평점 :
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5.7.16.
노래책시렁 503
《기계라도 따뜻하게》
표성배
문학의전당
2013.5.6.
보려고 하는 마음이라면, 눈을 감든 뜨든 온빛을 맞아들입니다. 들으려고 하는 마음이라면, 귀를 닫든 열든 온숨을 받아들입니다. 보려는 마음이 없기에 못 보고, 들으려는 마음이 없으니 못 들어요. 비가 내리면서 사람한테 들려주려는 얘기가 있으나 빗방울을 안 보면서 빗소리를 안 듣는 분이 수두룩합니다. 종이도 신발도 옷가지도 사람한테 들려주려는 말이 있지만 “사람도 아닌데 무슨 말을 해?” 하면서 코웃음치는 분이 숱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끼리도 말을 안 섞거나 등지기 일쑤입니다. 찬찬히 마주하고 차분히 바라보면서 마음을 나누기보다는 “우리 쪽이냐 아니냐?” 하고 따지기부터 합니다. 《기계라도 따뜻하게》는 땀지기(노동자)로 일하는 동안 늘 마주하는 여러 틀(기계)하고 말을 섞고 마음을 나누기도 하는 하루란 무엇일까 하고 돌아보는 줄거리입니다. 날마다 닦고 기름을 먹이고 토닥일 적에는 오래오래 가는 틀입니다. 마구 다루거나 안 닦거나 팽개칠 적에는 얼마 안 가서 망가지는 틀입니다. 온누리 모든 세간에도 숨이 깃듭니다. 책과 붓 한 자락에도 숨결이 흐릅니다. 돌멩이한테도 모래알한테도 숨빛이 있어요. 숨소리를 들을 때에 비로소 노래합니다. 숨소리를 안 듣는 채 끼적거린다면 흉내에 거짓글입니다.
ㅍㄹㄴ
누구라도 좋으니 / 내 말 좀 들어주었으면 하던 때가 있었다 / 차갑게 침묵하는 기계만이 / 유일한 친구였던 때가 있었다 (기계라도 따뜻하게/22쪽)
아늑하기도 하지만 / 정작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하지만 / 그래도 기계는 숲이다 (기계의 숲/28쪽)
졸릴 때는 졸아야 한다 / (그게 주어진 졸림에 대한 예의다) / 사실 사십이 지나도록 / 예의에 대해 모르고 살았다 / 망치에 대한 예의 / 프레스에 대한 예의 / 그라인더에 대한 돌에 대한 나무에 대한 / 물에 대한 바위에 대한 흙에 대한 (졸릴 때는 졸아야 한다/80쪽)
지금 한창 용접하고 있는 / 정식이 자리는 만수 자리였다 / 성호 자리였다 /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 정씨 자리였다 / 박씨 자리였다 (자리/88쪽)
아침 일 시작 전 이리저리 기계를 살피다 툭 어깨를 쳐주자 기계도 따라 내 어깨를 툭 치고는 싱긋 웃는다 (사이에/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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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라도 따뜻하게》(표성배, 문학의전당, 2013)
때론 시퍼렇고 때론 냉혈(冷穴) 속 같은
→ 때론 시퍼렇고 때론 찬굴 같은
→ 때론 시퍼렇고 때론 무덤 같은
23쪽
공습경보처럼 다급하게 훑고 지나간 소나기
→ 벼락불처럼 부랴부랴 훑고 지나간 소나비
→ 벼락알림처럼 가쁘게 훑고 지나간 소나기
25쪽
배식구를 향해 나아가는
→ 밥길로 나아가는
→ 밥줄로 나아가는
33쪽
그럴 때마다 장인정신(匠人精神)을 떠올려 본다
→ 그럴 때마다 일빛을 떠올려 본다
→ 그럴 때마다 일넋을 떠올려 본다
34쪽
어제까지 보무(步武)도 당당하던 기계가 출근해 보니 흔적 없이 사라졌다
→ 어제까지 자랑스럽던 틀인데 아침에 보니 깨끗하게 사라졌다
→ 어제까지 다부지던 틀인데 아침에 나오니 깔끔하게 사라졌다
48쪽
졸릴 때는 졸아야 한다. 그게 주어진 졸림에 대한 예의다
→ 졸릴 때는 졸아야 한다. 졸림을 모실 노릇이다
→ 졸릴 때는 졸아야 한다. 졸리면 따를 일이다
→ 졸릴 때는 졸아야 한다. 졸리면 자야 맞다
80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