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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빛이 여전합니까 ㅣ 창비시선 440
손택수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평점 :
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5.6.22.
노래책시렁 477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손택수
창비
2020.2.20.
이 하루를 밝히는 즐거운 삶과 이야기를 어린이 곁에서 새봄빛으로 누리다 보니 새여름빛으로 접어듭니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삶을 짓고 이야기를 빚습니다. 남이 짓거나 빚은 삶과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도 있되, 스스로 서는 하루가 있지 않다면 쳇바퀴이거나 굴레이게 마련입니다. ‘남이 보아주는 눈길’을 받아먹고 살 적에는 그만 ‘보여주는 남’이 없으면 헤매거나 지치거나 막혀요. 남이 잘 보아주기를 바라면서 차려입거나 꾸미면 ‘나대로·나답게·나로서’를 잊는데, 이때에는 나뿐 아니라 너(이웃)도 ‘나(너)’를 잊으면서 ‘남(사회·정부)’한테 매달리기를 바라더군요. 우리가 스스로 ‘나’를 찾고 품고 짓고 돌보기에 우리 곁에 있는 ‘너’도 나란히 스스로 삶을 짓고 이야기를 빚는 길을 열고 폅니다. 《붉은빛이 여전합니까》를 읽는 내내 ‘남한테 잘 보이려는’ 몸짓과 ‘남이 잘 보아주기 바라는’ 눈짓을 느낍니다. 남이 조금이라도 ‘내 글(문학)’을 안 나쁘게 보아주기 바라면서 꾸미고 보태는 얼거리입니다. 그러나 남한테 선보이려고 쓰는 글(문학)이라면 알맹이도 씨눈도 없더군요. 언제나 속(참다운 나)을 들여다보면서 드러내려는 글(문학)일 적에는 창피하거나 부끄러울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펴면서 빛나고요. 껍데기를 들씌우는 글만 넘치는 나라에서, 이제는 껍데기를 벗어야 하지 않을까요?
ㅍㄹㄴ
무슨 인연으로 날 찾아왔나 찬찬히 살펴보고 싶지만 / 독감예방주사를 맞고 멀쩡하게 겨울이 지나갈 때 (나뭇잎 흔들릴 때 피어나는 빛으로/13쪽)
먼산 쪽으로 고개를 빼고 있으면 / 내 안에서 더 분명해지는 소리 / 오고 있다 누군가 누군가가 되어 /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 / 강을 건너오고 있다 휑한 다리를 건너오고 있다 (가만히 맥박처럼 짚어보는 누군가/43쪽)
연금을 계산하고 노후를 설계하고 새로 나온 보험을 좇아다니다가 / 봄날이 다 지나갔다 / 아파트 한채를 장만하고 차 한대를 갖고 / 여행상품을 검색하는 동안 (행복에 대한 저항시/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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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빛이 여전합니까》(손택수, 창비, 2020)
찬을 줄이니 평소의 음식 가짓수에 한둘만 더해도 그날 하루는 내가 나의 칙사다
→ 곁밥을 줄이니 여느 곁밥에 한둘만 더해도 그날 하루는 내가 나를 모신다
9쪽
석류나무와 한 삼년 동거를 한 적이 있습니다
→ 붉구슬나무와 한 세 해 함께산 적이 있습니다
10쪽
누군가의 눈망울을 들여다본 적이
→ 누구 눈망울을 들여다본 적이
→ 눈망울을 들여다본 적이
→ 이웃 눈망울을 들여다본 적이
12쪽
무슨 인연으로 날 찾아왔나 찬찬히 살펴보고 싶지만
→ 무슨 끈으로 날 찾아왔나 찬찬히 보고 싶지만
→ 무슨 사이로 날 찾아왔나 살펴보고 싶지만
13쪽
먼 데를 잃고 더 쓸쓸해져버린 사람
→ 먼 데를 잃고서 더 쓸쓸한 사람
17쪽
걸음걸이 조신스럽게 물받이통을 비운다
→ 걸음걸이 살피며 물받이통을 비운다
→ 걸음걸이 삼가며 물받이통을 비운다
→ 걸음걸이 곱게 물받이통을 비운다
20쪽
한옥에서는 풍경도 빌려 쓰는 거라네요. 차경(借景)
→ 흙집에서는 빛도 빌려쓴다네요. 빈빛
→ 옛집에서는 터도 빌린다네요. 빌림터
24쪽
젓가락을 태연하게 받는 어안(漁眼)처럼
→ 젓가락을 그냥 받는 물고기눈처럼
→ 젓가락을 가만히 받는 헤엄눈처럼
→ 젓가락을 사뿐히 받는 둥근눈처럼
28쪽
싸락눈 받아먹는 계곡 속처럼 헛헛한 속도 얼마쯤은 환해진 것 같은데
→ 싸락눈 받아먹는 골짜기처럼 헛헛한 속도 얼마쯤은 환한 듯한데
34쪽
열등생인 내가 학급 대표가 된 날이었다
→ 덜떨어진 내가 모둠지기가 된 날이다
→ 못난 내가 모둠지기가 된 날이다
36쪽
오고 있다 누군가 누군가가 되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 강을 건너오고 있다
→ 온다 누가 누구가 되어 누구를 기다리는 누가 냇물을 건너온다
→ 온다 누가 아무개가 되어 누구를 기다리는 아무개가 내를 건너온다
→ 온다 누가 네가 되어 너를 기다리는 누가 물줄기를 건너온다
43쪽
수목한계선 부근까지 내려오다 멈칫
→ 나무금 언저리까지 오다 멈칫
→ 나무끝줄 옆까지 오다 멈칫
46쪽
그대가 찾는 백경이 나의 백지이기도 함을 수심을 알 수 없는 망망대해를 나의 종이도 품고 있음을
→ 그대가 찾는 흰고래가 흰종이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허허바다를 종이도 품는 줄
→ 그대가 찾는 하얀고래가 하얀종이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난바다를 종이도 품는데
48쪽
오늘도 신세한탄을 하는 여자
→ 오늘도 넋두리를 하는 순이
→ 오늘도 우는 그사람
56쪽
연금을 계산하고 노후를 설계하고 새로 나온 보험을 좇아다니다가
→ 꽃돈을 세고 뒷삶을 그리고 새로 나온 밑길을 좇아다니다가
66쪽
섬은 묵음이다 침묵이 있어야 섬이 된다
→ 섬은 고요하다 말이 없어야 섬이 된다
→ 섬은 조용하다 가만 있어야 섬이 된다
78쪽
풀이 사관이다 사초(史草)이니까 역사의 주인은 풀이라는 뜻이다
→ 풀이 붓님이다 해적이는 우리가 쓰니 임자는 풀이라는 뜻이다
→ 풀이 글님이다 발자국은 우리가 적으니 지기는 풀이라는 뜻이다
104쪽
나의 수더분한 선임이었던 정문의 수위 아저씨들은 야경주독하는 모습을 대견스럽게 여기셨던지
→ 수더분한 언니이던 나들목 지기 아저씨들은 밤낮없는 모습을 대견스럽게 여기셨던지
→ 수더분한 맏님이던 들머리 지킴이 아저씨들은 낮밤없는 모습을 대견스럽게 여기셨던지
129쪽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