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군대 옷


 춘천에서 시외버스표를 끊고 나서 이십 분쯤 시간이 남았다. 시외버스 타는 곳 옆에 ㅇ마트가 붙었기에 이곳에 들른다. 싸게 파는 반바지가 있으면 살까 하고 생각하지만, 반바지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냥 나오려고 하다가 민소매옷을 3000원에 파는 옷걸이가 보인다. 잘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며 두 벌을 고른다. 열 해 가까이 입던 민소매옷 여러 벌이 구멍나고 찢어져서 더는 못 입을 판이다. 옷값을 셈하고 나온다. 시외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저녁에 새로 산 민소매옷 한 벌을 입는다. 입고서 가슴에 새겨진 글을 읽는다. 알파벳으로 무어라 적혔는데 ‘NAVY’라는 낱말과 ‘AMERICA’라는 낱말이 보인다. 이런, 이 옷은 뭘 기리거나 뭘 말하거나 뭘 보여주는 옷이람?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만든 옷인데, 왜 이런 글을 새겼담? 알파벳으로 뭔가를 새기려 한다고 할 때에도 사람들한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새길 수 없나? 헨리 데이빗 소로우 님이 쓴 글에서 한 줄쯤 따서 적바림할 수 없나? 마더 존스 님이 외친 말에서 한 대목쯤 따서 새길 수 없나? (4344.9.4.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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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선


 새 살림집을 찾으러 춘천으로 갔다가 충주 멧골집으로 돌아오는 시외버스에서 얼핏설핏 시끄러이 벅벅대는 라디오를 듣다. 시외버스 일꾼은 웬만해서는 라디오를 틀지 않는다. 시외버스를 타는 사람은 으레 코 자기 마련이라, 잠잘 때에 귀 따갑지 말라며 조용히 다니곤 한다. 그런데 이날 따라 시외버스 일꾼은 라디오를 틀었고, 라디오 소리는 내 귀에까지 들린다.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들으면서 멀미를 참는다. 이날 내가 탄 시외버스 일꾼은 120킬로미터 가까이 될 듯한 빠르기로 달리면서 찻길을 자꾸 바꾸는 바람에 속이 아주 미식미식 부글부글 끓고 골이 띵하다. 많은 사람 태우고 달리는 길을 좀 보드라이 몰 수 없는가. 좀 귀 안 아프도록 조용히 달릴 수 없는가. 어지럽고 메슥거려 창문에 머리를 기대어 차라리 얼른 생극에 닿기를 바라는데, ‘노동운동가 …… 천만 노동자의 …… 고인 …… 전태일 ……’ 하는 소리가 들린다. 머리를 창문에서 뗀다. 문득 무슨 느낌이 스친다. 설마, 아니 설마가 아닌 생각 하나가 스친다. 그렇구나. 틀림없이 그렇구나. 이제 어머니 한 분이 당신 사랑스런 아이 곁으로 가는구나. 먼저 떠난 아이가 바란 꿈을 이루려고 온몸과 온마음과 온삶을 바친 넋이 이제 마음을 고이 쉬면서 눈물로 젖는구나.

 창밖을 바라본다. 멀미 기운은 가라앉지 않는다. 머리는 그저 어지럽다. 가을 볕살 받으며 천천히 누렇게 익는 나락이 바람이 흩날린다. 눈물이 핑 돈다. 내 어머니가 머잖아 하늘나라로 간다 할 때에도 이렇게 눈물이 핑 돌겠지. 내 아버지도 어머니와 함께 하늘나라로 갈 때에 이처럼 눈물이 젖겠지.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여든한 살까지 살아갈 수 있으면 앞으로 열 몇 해쯤 뒤가 되겠지.

 세 사람 이름이 나란히 떠오른다. 세 사람은 세 나라에서 많은 이들한테서 어머니라는 이름을 들었으리라. 메어리 해리스 존스, 다나까 미찌꼬, 이소선. 《마더 존스》와 《마더 죤스》, 《어머니의 길》, 《미혼의 당신에게》 네 가지 책은 모두 새책방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고요히 잠든 씨앗은 언제쯤 싱그러이 새잎을 틔울 수 있을까. (4344.9.4.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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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꽃 2012-01-05 15:46   좋아요 0 | URL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를 읽으면서 많이 울었는데...ㅠㅠ
 

 

 발가락으로 읽는 책


 나즈막한 책상에 책을 잔뜩 쌓은 아이가 책상 한쪽에 걸터앉아서 조그마한 그림책을 무릎에 올려놓는다. 책을 읽으면서 발가락은 꼼지락꼼지락. 발레 하는 아이 모습을 담은 그림책이라서 그림책 아이마냥 발가락을 요리조리 움직이나. 책을 들여다보는 눈길은 발가락에서 춤을 춘다. (4344.9.4.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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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 헌책방


 춘천으로 보금자리를 옮긴다. 네 식구 곱게 살아갈 살림집을 찾으러 여러 차례 오간 끝에 참 예쁜 멧자락을 낀 예쁜 집을 얻었다. 예쁜 멧자락을 낀 예쁜 집을 얻었으니 홀가분하다. 도서관 책을 옮길 마땅한 자리는 아직 못 찾았지만, 식구들이 마음을 붙이면서 오순도순 어우러질 좋은 보금자리를 찾았으니 기쁘다. 가벼운 마음으로 춘천 중앙로2가 94-3번지 〈경춘서점〉으로 찾아간다. 그동안 춘천을 오가면서 이곳까지 들르지 못했다. 살림집과 도서관이 새로 깃들 자리를 찾지 못했으니 마음이 무거워 차마 찾아갈 수 없었다.

 춘천 시내 두 군데 헌책방 가운데 하나인 〈경춘서점〉에서 춘천 시내에 자리한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 졸업사진책 일흔 권을 장만한다. 〈경춘서점〉 책꽂이에서 좀처럼 새 임자를 찾지 못한 채 먼지를 곱게 먹는 졸업사진책을 한꺼번에 장만한다. 춘천에서 문화와 교육과 역사와 삶을 사랑하면서 책을 아끼는 분들은 이러한 옛 자료에는 눈길을 두기 힘들었을까. 어쩌면, 졸업사진책이 어떠한 값과 뜻과 넋이 깃든 책인가를 아직 모르니까 눈길을 못 두었다 할 만하겠지. 1960년대에 춘천국민학교가 어떤 모습이었고, 1970년대에 춘천에서 중학교를 다닌 아이들 옷차림과 머리 모양과 신이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헤아리려는 사람이 있다면, 비로소 이 졸업사진책에 서린 값과 뜻과 넋을 짚을 테지. 나처럼 고향이 인천인 사람이라면, 1950∼70년대에 전국 초·중·고등학교에서 ‘반공바람’에 휩쓸리면서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밑으로 와서 사진을 찍겠다며 수학여행을 오는 모습이 사진으로 담긴 졸업사진책에 어떤 값과 뜻과 넋이 감도는가를 헤아릴 테지.

 나는 춘천에 있는 춘천 헌책방이 좋다. 나는 인천에 있는 인천 헌책방이 좋다. 나는 제주에 있는 제주 헌책방이 좋다. 나는 서울에 있는 서울 헌책방이 좋다.

 나는 춘천이나 인천이나 제주나 서울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이들 도시에 헌책방이 있기 때문에 이곳 헌책방을 좋아하고, 헌책방을 아끼며 즐겨찾는 사람들 손길과 발걸음을 좋아한다. (4344.9.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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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꽃 2011-09-03 10:20   좋아요 0 | URL
춘천으로 오시네요. 어디예요? 저도 춘천 토박이가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이제 곧 종규님이랑 예쁜 아가들, 예쁜 아가엄마를 볼 수 있겠네요~~

파란놀 2011-09-03 20:08   좋아요 0 | URL
신동면 증3리 멧골자락에 깃든 작은 집이랍니다 ^^
나중에 춘천에서 뵈어요~~~

울보 2011-09-03 11:15   좋아요 0 | URL
어! 저 고향이 춘천인데 요즘도 한달에 두번은 춘천에 가려고 노력하는데 친정이 소양댐밑 샘밭이란곳에 있거든요,
어디로 가실까 ㅡ,
만일 춘천으로 가시게 된다면 나중에 한번 찾아가 봐야겠어요,,

파란놀 2011-09-03 20:08   좋아요 0 | URL
네, 놀러오셔요~
살짝 깊이 들어가는 멧골자락에
아주 조용하게 품에 안긴 집이랍니다~
 
베르너 비숍 Werner Bischof 열화당 사진문고 7
클로드 쿡맨 지음, 이영준 옮김, 베르너 비숍 사진 / 열화당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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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무엇을 사랑하는가를 사진으로 담기
 [찾아 읽는 사진책 50] 베르너 비숍·클로드 쿡맨, (열화당,2003)



 1916년에 태어나 1954년에 숨을 거둔 베르너 비숍(Werner Bischof)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한국땅에서 슬픈 피비린내가 나던 때에 이 나라에 찾아와서 ‘슬픈 피비린내’ 사진이 아닌 ‘사랑스러운 사람들 사랑스러운 삶’ 한 자락과 이 삶 한 자락을 뒤틀려는 가녀린 몸짓을 사진으로 담기도 했습니다.

 조그마한 사진책 《베르너 비숍》(열화당,2003)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작은 사진책은 영국 파이돈(phaidon) 출판사에서 내놓은 책을 옮긴 판입니다. 인터넷책방에서 살펴보니 영국에서 나온 판이 외려 한국에서 옮겨진 판보다 값이 쌉니다. 거꾸로 되었네 싶고, 이런 줄 미리 알았으면 영국 책으로 장만했을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진책으로 찍은 빛느낌이나 종이느낌은 한국 책이 영국 책을 아직 못 따르거든요. 더욱이, 굳이 ‘사진쟁이 삶을 풀어서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사진마다 옆에 붙인 ‘덧말’을 읽는다 해서 사진을 더 잘 읽어낼 수 있지 않아요. 그래도, “1943년, 비숍은 ‘가난과 싸우고 자유를 사랑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임무이며, 우리 일생의 임무라고 생각한다’라고 썼다(6쪽).” 같은 글월을 한글로 읽을 수 있으니 고맙습니다. “비숍은 일부러 어린이들을 택했다. 그 나라 지도자들의 죄가 어떤 것이건 간에, 어린이들은 전쟁의 무고한 희생자들이었다. 또한, 핵전쟁의 발발에 위협받고 있는 그들의 미래는 현재보다 황폐할 것 같았다(8쪽).” 같은 글월을 읽을 수 있는 일 또한 고맙습니다.

 다만, 애써 이러한 글월을 읽지 않더라도 ‘사진으로만 보았을 때’에도 베르너 비숍이라는 분이 어떠한 사진을 좋아하면서 어떠한 사진길을 걸으려 했는가를 환하게 느낄 만해요. 사진은 사진이기 때문에 사진으로 읽습니다. 사진은 사진이기 때문에 사진으로 찍습니다. 사진은 사진이기 때문에 사진으로 나눕니다.

 사진을 읽을 때에는 사진으로 읽습니다. 글을 읽을 때에는 글로 읽어요. 사랑을 읽을 때에는 사랑으로 읽습니다.

 사랑을 다른 테두리나 눈길로 읽을 수 없습니다. 그림을 다른 테두리나 눈길로 읽을 수 없어요. 사람은 사람 그대로 바라보면서 마주합니다. 내 앞에 선 사람을 이이 그대로 맞아들이며 사귈 뿐, 이이를 다른 누구로 삼거나 여기거나 견줄 수 없어요. 이이는 오직 이이 한 사람이요 이이 한 목숨입니다.

 베르너 비숍 님 사진을 읽으면서 차근차근 느낍니다. 베르너 비숍 님은 ‘사람들이 무엇을 사랑하는가를 사진으로 담는 사람’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뉴욕을 찍은 사진이든 조개껍데기를 찍은 사진이든 쿠스코로 가는 길을 찍은 사진이든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베르너 비숍 님은 ‘당신이 찾아가서 만나는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에서 ‘이들이 무엇을 사랑하면서 껴안는가’를 가만히 지켜봅니다. 가만히 지켜보고 나서 살며시 사진기 단추를 누릅니다.

 더 좋다거나 더 나쁘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베르너 비숍 님 당신이 느끼는 결을 고스란히 사진으로 담습니다. 사람들이 착하게 살면 착하게 사는 얼거리를 사진을 담습니다. 사람들이 바보스레 살면 바보스레 사는 줄거리를 사진으로 담아요.

 저는 골목길을 천천히 거닐며 사진을 찍을 때에 늘 느낍니다. 내가 찍는 골목길 사진은 더 예쁘게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내가 찍는 골목길 사진은 이 골목길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예쁜 살림 예쁜 빛깔 예쁜 꿈넋 예쁜 손길을 고루 건사하면서 나누기 때문에, 이 모든 예쁜 모습을 내 사진으로 담아 예쁜 이야기를 꽃피울 수 있을 뿐입니다. 서로서로 사이좋게 어깨동무하는 이웃이기에 나 또한 즐거이 사진을 찍습니다. 예쁜 사랑으로 예쁜 웃음을 짓기에 예쁘구나 하고 느낄 만한 사진입니다. 억지로 예쁜 척할 수 없는 사진입니다. 예쁜 그림을 따로 만들거나 꾸밀 수 없습니다. 예쁜 삶은 예쁜 결로 묻어납니다. 만드는 사진은 티가 납니다. 살아가는 사진은 사랑이 묻어납니다.

 자그마한 사진책 《베르너 비숍》에 베르너 비숍 님 모든 삶이나 사진이나 사랑이 깃들지는 않습니다. 꼭 이만큼만 깃듭니다. 그런데, 이만큼이든 저만큼이든 삶이나 사진이나 사랑은 달라지지 않아요. 사진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면 더 잘 읽을 수 있겠습니까. 사진을 꼭 한 장만 볼 수 있으면 제대로 못 읽겠습니까.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사진 한 장으로 모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진 한 장으로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진쟁이는 사진 백 장을 그러모아서 또다른 이야기를 싱그러이 들려줍니다. 꿈을 노래합니다. 빛을 나눕니다. 넋을 보살핍니다. 흙을 사랑합니다. 한국땅 사진쟁이들한테 베르너 비숍이 착하고 해맑게 읽힐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4344.9.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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