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생각
― 사진과 예술



 사진이 예술인가 예술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사진이 처음 태어나던 때부터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사진이 예술인가 예술이 아닌가 하고 이야기할 사람이 따로 없다고 느낍니다. 오늘날까지 사진이 예술이니 아니니 하고 따지려 한다면, 이런 사람은 그야말로 바보라 할 만합니다.

 오늘은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사진이 그대로 사진인가, 또는 사진이 그대로 예술인가 하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진을 하는 이들 가운데에는 ‘사진기라는 장비’와 ‘사진이라는 틀’을 빌어 예술을 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이 아닌 예술을 하는 사람이지만, 스스로를 ‘사진작가’라 내세우는 사람조차 있습니다. 붓을 써서 무엇인가를 그린다 하더라도 모두 ‘그림작가’이지는 않습니다. 붓으로 무엇인가를 그리지만 그림작가 아닌 ‘예술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붓이나 연필을 빌어 필름에 무엇인가를 아로새길 때에도 얼마든지 ‘사진작가’로서 사진을 하는 일이 됩니다. 영어로 ‘비디오아티스트’라 했던 백남준 님 같은 분은 텔레비전이라는 연장을 써서 예술을 했습니다. 백남준 님은 예술을 하고자 텔레비전이라든지 비디오라든지 사진이라든지 여러 가지 갈래를 당신 나름대로 받아들이거나 다루면서 당신 예술을 꽃피웠습니다. 영어로 ‘비디오아티스트’이지만, 우리가 알아들을 말로 하자면 예술가, 또는 예술쟁이입니다.

 그림과 같은 효과를 노리며 사진을 할 수 있습니다. 사진과 같은 효과를 노리며 그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림을 보면서 느낌을 얻어 ‘그림 같은 사진’을 찍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진을 보면서 생각을 빌어 ‘사진 같은 그림’을 그립니다. 바야흐로 예술이라는 큰 바다 테두리에서 사진과 그림 사이에 무언가 허물어질 만하구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그림이란 무엇이 그림이고, 사진이란 무엇이 사진이며, 예술이란 무엇이 예술이 될 만할까 궁금합니다. 한때 마침표와 쉼표와 말줄임표와 느낌표와 물음표를 뒤섞으면서 ‘새로운 글쓰기’를 한다던 바람이 불다가 지나간 적 있습니다. 글자만 가득 담긴 글로는 글이 밋밋하거나 따분하다고 여기면서 ‘글을 새로운 예술이나 표현매체’로 삼으려던 흐름이 한동안 있었습니다. 요사이는 손으로 쓰는 글을 놓고 영어로 ‘캘리그래피’라는 이름을 붙이곤 합니다. 남다른 글과 글멋과 글예술을 하고프다는 목소리라고 여깁니다.

 틀림없이 글자만 갖고도 예술이 됩니다. 글예술이라 하면 될까요? 그러나, 글이 글이 되자면 글자가 섞인 모양새로 글이 되지 않습니다. 글에는 이야기가 깃듭니다. 손으로 쓰는 글이든 타자기나 컴퓨터로 찍은 글이든, 이 글에 이야기가 깃들 때에 비로소 글이라 합니다. 이야기가 없는 글이란 글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글이 아니라’ 할 때에는 이른바 ‘문학이 아니라’고 합니다.

 나는 사진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느낍니다. 사진은 사진기를 써서 종이에 무언가 빛그림을 남겨야 사진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필름에 빛그림을 앉히든 메모리카드에 빛그림을 남기든 한다고 사진이라고는 느끼지 않아요. 바늘구멍을 낸 상자로 빛그림을 남기든 어떤 장비를 써서 어떤 빛그림을 남기든, 또는 인화지에 몸을 뒹굴든 복사기에 내 몸을 올려놓고 빛그림을 찍든, 사진이 사진이 된다 할 때에는 이 사진에 내 이야기가 깃들기 때문입니다.

 보여주기만으로는 글이 되지 않고 그림이 되지 않으며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물이나 대상하고 똑같이 보이도록 나타낸다서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물이나 대상하고 똑같이 보이도록 나타낼 때에는 ‘베끼기(복제)’라고만 합니다.

 예부터 사진을 ‘복제술’이라고 일컬으며 살짝 비아냥거린 까닭이란, 사진이라는 빛그림에 ‘사진을 찍는 사람 이야기’를 제대로 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림도 마찬가지라서, ‘실물과 참말 똑같이 그린 그림’이기에 더 놀라운 그림이 되지 않을 뿐더러, 아예 그림이 안 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그림이라 할 때에는, 이 그림을 그린 사람 넋이 스미어 그림을 그린 사람 이야기가 담기는 한편, 이 넋과 이야기를 그림 하나로 마주할 우리 가슴에 무럭무럭 샘솟아 피어나는 애틋한 눈물과 웃음이 있을 때에 그림이라 합니다. 우리가 사진이라 할 때에도, 이 사진을 찍은 사람 얼이 깃들며 사진을 찍은 사람 이야기가 들어서는 한편, 이 얼과 이야기를 사진 하나로 마주할 우리 마음밭에 몽글몽글 용솟음치며 태어날 아름다운 눈물과 웃음이 있을 때에 사진이라 합니다.

 이리하여, 사진은 처음 태어날 때부터 사진 그대로 사진이면서, 사진은 또다른 예술 갈래 하나였습니다. 사진을 가리켜 예술이니 예술이 아니니 하고 따지던 사람들은 사진도 예술도 보지 못한 셈입니다. 나아가, 오늘날 사진을 사진으로 여기지 못하거나 ‘사진과 사진기를 써서 예술을 하는 사람’이면서 예술을 마치 사진이라도 되는 듯 껍데기를 씌우는 사람들 또한 사진이든 예술이든 참답게 마주하지 않는 셈입니다.

 사진은 사진이고 예술은 예술입니다. 사진은 사진인 한편 예술이고, 예술은 예술인 가운데 사진으로 녹아듭니다.

 우리 삶 모든 이야기는 삶이면서 예술입니다. 날마다 먹는 밥을 차리는 손길 또한 예술입니다. 밥그릇과 수저를 부시는 설거지도 예술입니다. 걸레를 빨아 방바닥을 훔치는 손길 또한 예술입니다. 논밭에서 일하며 땀방울 똑똑 흘리는 삶자락 또한 예술입니다. 볍씨 하나가 예술이고, 풀씨 하나가 예술입니다. 볍씨 하나는 볍씨 하나대로 예술이면서 볍씨 그대로 볍씨입니다.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 손길이 예술이고, 아이 스스로 땅을 박차며 내딛는 걸음걸이와 웃음꽃이 예술입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들은 사진은 그야말로 사진이면서 사진은 언제나 예술이기도 하다는 넋을 잘 추슬러 주면 좋겠습니다. 사진은 사진일 때에 참말 사진이면서 참으로 예술입니다. 사진은 사진이 아니면서 사진이라는 옷만 걸치려 할 때에는 사진도 예술도 되지 못합니다. 사진은 사진값과 사진빛과 사진밭과 사진꿈 그대로 사진사랑으로 무르익으면서 사진 갈래를 빛내며 예술 누리를 북돋웁니다. (4344.3.2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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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밖 나들이와 책읽기


 사람들은 나들이를 떠납니다. 어떤 이는 작은 수레를 끌고 골목골목 빈병이랑 헌 종이를 주으러 나들이를 떠납니다. 어떤 이는 장마당 나들이를 하려고 닷새나 열흘이나 한 달에 한 번쯤 읍내로 나들이를 떠납니다.

 어떤 이는 자가용을 몰고 언제나 나들이를 다닙니다. 어떤 이는 비행기를 타고 여러 나라로 나들이를 다닙니다. 어떤 이는 시외버스를 타고 나라안 곳곳 나들이를 다니고, 어떤 이는 기차를 타고 서울부터 부산까지 씽씽 오가는 나들이를 다닙니다.

 어떤 이는 대학바라기 문제집 풀이에 얽매여 나들이를 꿈꾸지 못합니다. 어떤 이는 대학바라기 문제집 풀이에 얽매이지만 집과 학교를 오가는 길을 나들이길이라 여깁니다. 어떤 이는 집일과 집살림을 하느라 오로지 집에서만 지냅니다. 어떤 이는 집안 이곳저곳 손질하고 돌보면서 집안을 돌아다니는 나들이를 합니다.

 어떤 이는 자리에 드러누운 채 보꾹만 올려다보며 마음속으로 나들이를 합니다. 어떤 이는 자리에 드러누운 채 때때로 창밖을 내다보며 눈길로 나들이를 합니다. 어떤 이는 조용히 숨을 거두면서 이제 또다른 누리로 나들이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갈래에 따라 수많은 곳을 찾아 수많은 숫자만큼 다 다르게 나들이를 합니다. 누군가는 내 보금자리에서도 빛을 보고, 누군가는 내 자그마한 마을에서도 빛을 보며, 누군가는 요 조그마한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도 빛을 봅니다. 누군가는 티벳이나 인도나 네팔쯤은 돌아다녀 보아야 빛을 보고, 누군가는 미국이나 영국이나 프랑스쯤 밟아 보아야 빛을 보며, 누군가는 일본이나 중국이나 러시아쯤 둘러볼 때에 빛을 봅니다.

 어디에서든 빛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사람으로서 프랑스에 찾아가 빛을 볼 수 있고, 프랑스사람으로서 프랑스에서 빛을 볼 수 있으나, 프랑스사람이기에 한국 같은 나라까지 찾아가서 빛을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사람은 한국사람이 프랑스까지 찾아와서 빛을 보려 할 때에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할까요. 일본사람은 한국사람이 일본까지 찾아와서 빛을 본다고 할 때에 무슨 느낌이거나 생각일까요. 노르웨이사람은 노르웨이까지 찾아올 드문 한국사람을 마주한다면 이들 한국사람이 어떠한 빛을 찾아 예까지 찾아왔을까 하고 생각할까요.

 한국은 참 작고 좁은 나라입니다. 한국에서만 지내면 우물 안 개구리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이 참말 작고 좁은 나라 한국땅을 다 돌아보거나 모두 밟은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 자동차를 몰아 한 번 슥 지나갔대서 돌아보았다 할 만할까요. 두 다리로 찻길을 따라 한 바퀴 빙 걸어다니기를 했대서 모두 밟았다 할 만한가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느끼지 않고서, 비와 눈과 바람과 구름과 햇볕과 물과 흙과 풀과 나무과 벌레와 짐승을 고루 느끼지 않으면서, 사람과 삶터와 마을을 어깨동무하거나 두레라든지 울력을 하지 않았으면서, 우리는 무슨 나들이를 했다고 말할 만한가 잘 모르겠습니다.

 좁디좁은 한국에서 나들이를 하든, 넓디넓은 지구별 곳곳에서 나들이를 하든, 나들이는 내 마음을 살며시 열며 나하고 마주하는 사람 마음으로 살며시 깃드는 나들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먼길 나들이는 먼길 나들이대로 즐거우며 뜻있습니다. 가까운 나들이는 가까운 나들이대로 기쁘며 값있습니다. 내 보금자리 돌보며 보살피는 살림마실은 내 보금자리 살림마실대로 어여쁘며 알뜰합니다.

 테레사 수녀님은 인도에서 지냈지 버마나 네팔이나 티벳에서 지내지 않았습니다. 그림쟁이 밀레 님은 프랑스에서 살았지 아프리카나 칠레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이오덕 님은 멧골자락 작은 학교 아이들하고 노래하며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도 미리내 빛깔을 느꼈습니다. (4344.3.2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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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첫 십년의 한국 - 우리시대 희망을 찾는 7인의 발언록 철수와영희 강연집 모음 2
리영희 외 지음, 박상환 엮음 / 철수와영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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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 석 장 느낌글 005] 21세기 첫 십년의 한국


 《21세기 첫 십년의 한국》 같은 책을 읽으며 조금 갑갑합니다. 이 책에 담기는 이야기란 예나 이제나 참으로 안 바뀌는구나 싶고, 이러한 이야기를 벌써 몇 열 해째 고스란히 되풀이해야 하는데다가, 우리 스스로 착하거나 아름다이 살아갈 길을 사람들 스스로 못 느끼거나 안 찾는구나 싶기 때문입니다. 리영희 님은 “평화적인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 완화를 통해서 남한도 쓸데없는 국가 예산의 낭비를 막아야 합니다(25쪽).” 하고 말합니다만, 전쟁무기를 버리는 평화를 꾀하려는 오늘날 한국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참말 평화라면 전쟁무기란 없어야 하는데, 내 손에 전쟁무기 아닌 평화로운 연장인 낫과 호미를 쥐어 내 텃밭을 일구려는 오늘날 도시내기란 몇이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손호철 님은 “그들이 틀렸기 때문에 그들의 자유를 막자라는 것은 언제든지 우리 주장이 틀렸으니 잡아넣자는 논리로 우리에게 되돌아올 수 있(57쪽)”다고 얘기합니다만, 틀린 말로 이 나라를 휘어잡는 슬픈 지식인들도 우리 아버지이며 우리 이웃이자 내 동무입니다. 이 슬픈 사람들이 제자리를 찾아 착하며 바르게 살아가도록 돕도록 나 스스로 더욱 착하며 사랑스레 살아야 합니다. 참지식·참슬기란 책·학벌·논리 아닌 땀내 밴 삶입니다. (4344.3.27.해.ㅎㄲㅅㄱ)

― 박상환 엮음, 철수와영희펴냄, 2008.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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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없는 낙원 1
사노 미오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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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하고 예쁘게 살아가고픈 꿈
 [만화책 즐겨읽기 34] 사노 미오코, 《네가 없는 낙원 (1∼2)》



 사진을 찍는 사람이 모두 똑같이 사진을 찍는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진을 찍는 사람 가운데에는 나 스스로 예쁘게 바라보는 모습을 예쁘게 담고 싶다는 꿈을 꾸는 사람이 어김없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 또한 나 스스로 바라보는 아름다운 모습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종이에 옮기고파 하는 사람이 꼭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 또한 나 스스로 어여쁘다 느끼는 삶을 어여쁘다 느낄 글로 갈무리하여 적바림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드시 멋지구려 사진기나 비싸구려 사진기가 있어야만 내가 예쁘게 바라보는 모습을 예쁘게 사진으로 담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좋은 종이에 좋다는 물감이나 붓을 써야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습니다. 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나온다든지 다른 걱정 하나 없이 글만 쓸 수 있대서 어여쁘다 느낀 삶을 글로 쓸 수 있지 않습니다.

 밥을 맛있게 지을 때에 꼭 비싼 살림살이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쓸 만한 살림살이가 있으면 될 뿐입니다. 쓸 만한 살림살이를 알맞게 쓰거나 즐거이 다룰 수 있을 때에 밥을 맛있게 짓습니다.

 멋있다는 비싸거나 큰 자동차를 타야 더 잘 돌아다닐 수 있지 않습니다. 멋져 보인다는 비싸거나 이름난 자전거를 몰아야 자전거마실이 한결 즐겁지 않습니다. 더 큰 집이어야 하지 않습니다. 더 많은 책이어야 하지 않아요.


- “살아 있었구나.” “그래. 죽지 않을 정도로 살아 있었지.” “선물 줘! 석 달치.” “내가 선물이야.” “바-보!” (1권 4∼5쪽)
- “그래, 토모에 속에 있는 달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한 거야. 이제부터 토모에가 점점 더 빛이 나도록 움직이기 시작한 거야.” (1권 135쪽)
- “있잖아, 토모에. 이 사진 안에는 토모에가 있단다. 엄마 뱃속에.” (1권 146쪽)
- ‘토모에는 이기고 지는 승부가 없는 이벤트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2권 112쪽)
- “아빠 손은 커다랗고 포근했어. 토모에가 감기에 걸리면 이렇게 머리를 감겨 줬어. 그러면 토모에는 기분이 좋아서 언제나 잠들었지.” (2권 157쪽)



 만화책 《네가 없는 낙원》에 나오는 ‘토모에’라는 아이는 제 아버지가 사진작가였습니다. 토모에는 사진작가였던 아버지를 몹시 좋아하지만 정작 토모에는 사진기를 들거나 사진찍기를 하지 않습니다. 다만, 토모에는 아버지를 닮아 사진찍기 놀이를 할 때가 있는데, 토모에는 두 눈을 사진기 눈으로 여겨 살며시 감았다 뜨면 제 마음 깊이 사진으로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토모에는 제 아버지가 ‘사진을 찍는 마음’ 하나를 물려받았을 뿐입니다. 제 아버지 사진기도 사진장비도 사진작품도 물려받지 않은 토모에입니다. 제 아버지 이름값이라든지 제 아버지 돈을 물려받지 않았어요.

 토모에는 ‘사진에 담는 마음’ 하나를 물려받았습니다. 사진쟁이는 사진기를 들 때에 착하며 사랑스러운 마음이어야 하는데, 사진쟁이 스스로 착하며 사랑스러운 마음이어야 비로소 사진에 착하며 사랑스러운 마음을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토모에는 저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돌보면서 저하고 마주하거나 만나는 사람들한테마다 예쁘거나 기쁜 넋을 베풉니다.

 이리하여, 토모에는 제 아버지한테서 ‘사진을 찍는 마음’을 비롯해 ‘사진에 담는 마음’에다가 ‘사진을 나누는 마음’을 곱다시 물려받은 셈입니다.


- “이 말괄량이 녀석이! 니시나 선생님이, 아빠가 저 세상에서 우실 거다.” “아빠는 예쁜 꽃이랑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랑 비 냄새를 좋아했어. 카즈야도 알잖아!” (1권 21쪽)
- “카즈야는 카즈야야. 그리고 아빠 편지랑 엽서는 안 빌려 줄 거야. 절대로 안 돼.” (1권 86쪽)
- “제복을 입어 보니까 갑갑한걸. 주름스커트는 옷감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아? 반바지로 하면 좋을 텐데.” (1권 117쪽)
- “토모에라면 눈 깜짝 할 사이에 백 장이든 천 장이든 써 버릴 텐데. 아빠 얘기라면.” (2권 15쪽)
- “이상해. 네모난 수조 속에서 선을 따라 수영하는 게 뭐가 재밌을까? 토모에는 물고기랑 게랑 다시마랑, 함께 헤엄치는 게 좋아.” (2권 17쪽)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보면, ‘네로’라는 아이는 돈이 없어 종이나 물감이나 붓을 사지 못합니다. 빈 집 옥상 바닥에다가 벽돌조각으로 해오라기를 그리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까만 하늘을 그림판으로 삼아 온갖 그림을 마음속으로 그립니다. 나무판자에 목탄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만, 목판에 지우고 다시 그리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네로는 제 눈에 아름다이 보이는 모습을 즐겁게 그리고, 사랑스레 그립니다.

 네로라는 아이는 제 어버이와 할아버지한테서 무엇을 물려받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네로라는 아이도 토모에라는 아이와 매한가지로 착한 마음과 예쁜 손길을 물려받았을까 궁금합니다. 착한 마음과 예쁜 손길을 물려받았기에 ‘제 이름값을 높이려는 그림’이 아니라 ‘제 삶을 가꾸려는 그림’을 좋아하고, ‘제 돈벌이가 될 그림’이 아니라 ‘제 꿈을 이루려는 그림’을 사랑할까요.

 《네가 없는 낙원》에 나오는 토모에는 도시내기입니다. 도시내기이면서 꽃내음이나 바람소리를 느끼거나 좋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도시내기이더라도 꽃내음을 얼마든지 맡을 수 있고 바람소리 또한 얼마든지 들을 수 있어요. 다만, 좋아한대서 살아내기까지는 못하기 일쑤입니다. 좋아할지라도 머리로 좋아할 뿐, 마음으로 깊이 좋아하거나 온몸으로 기쁘게 껴안으며 좋아하기는 힘들기 마련입니다.

 토모에는 갑갑한 틀만 받아들이지 않는 아이일까 헤아려 봅니다. 토모에는 그저 멋모르거나 철없으니까 여느 도시내기하고 똑같이 살아가고픈 꿈을 안 꾸는지 곱씹어 봅니다. 토모에가 시골 아이라면, 또 토모에네 어머니가 아예 시골로 살림집을 옮겨 스스로 흙을 일구면서 살아간다면, 토모에며 토모에네 어머니이며 어떠한 넋으로 어떠한 삶을 꾸릴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토모에네 아버지 또한 도시에서 살아가며 ‘아름다움을 느끼고 아름다움을 즐기며 아름다움을 나누는 사진을 찍기’까지는 했으나, 막상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며 아름다운 삶꽃과 삶사진을 일구는 데에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셈 아닌가 싶습니다. 토모에는 제 아버지가 하지 못한 꿈이자 삶이자 일이자 놀이인, 스스로 착하면서 예쁜 삶을 일구고픈 마음으로 도시에서 하루하루 힘겨이 버티지 않느냐 싶어요.


- “죽으면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 (1권 26쪽)
- “어쩐지 나,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 (토끼) 우사치키는 죽어서 가엾다는 소릴 하는데, 음식이 되는 동물한테는 그런 말 안 해. 토모에는 이제 고기는 안 먹을 거야.” (1권 74∼75쪽)
- “엄마로서는 자식의 배를 부르게 해 주고 싶을 뿐인데. 숭고한 사랑까진 아니지만. 사자도 사람도 마찬가지야.” (1권 92쪽)
- “토모에는 지구상의 모든 동물을 ‘우사키치’라고 부르고 있어. 마음속에서 우사치키 우사키치. 사랑하는 우사키치.” (1권 101쪽)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어머니이며, 토모에는 토모에일 테지요. 토모에는 태어날 때부터 토모에였고, 아버지와 어머니 또한 처음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 아무개와 어머니 아무개’라는 이름이었을 테고요.

 토모에네 아버지는 사진을 찍으러 지구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딸 토모에한테 편지나 엽서를 자주 보냈다는데, 편지나 엽서 끄트머리에는 늘 ‘네가 없는 낙원에서’라고 적바림합니다. 네(딸 토모에)가 없지만 하늘나라와 같은 아름다운 터전에 있다는 뜻이었을 텐데, 얼굴을 마주보는 자리에는 틀림없이 없지만, 마음이 만나는 자리에서는 늘 ‘네(딸 토모에)가 함께 있는 하늘나라’로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토모에네 아버지이든 토모에이든 마찬가지였겠지요.


- “토모에는 태어나기 전부터 토모에였구나.” (1권 168쪽)
- “토모에는 이미 정해 놨어. 결혼할 사람.” (2권 52쪽)
- “잘은 모르겠지만, 짝사랑이다 이 말이지?” “그런 셈이지!” “그럼 말이야. 토모에도 빨리 앞으로 나아가서 퀸이 되어 버려.” (2권 178쪽)


 토모에는 토모에대로 아름다운 목숨입니다. 토모에 곁에서 토모에 사진을 찍어 주는 카즈야는 카즈야대로 아름다운 목숨입니다. 토모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분대로 아름다운 목숨이고, 토모에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야나기라든지 카즈야 여자친구인 미카코도 저마다 아름다운 목숨이에요.

 누구나 제 목숨 그대로 아름다우면서 ‘체스 말판 퀸’에서 퀸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장기 말판에서 왕이든 말이든 졸이든 모두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습니다. 졸이라 덜 아름답거나 상이라 더 아름답지 않습니다. 한 발자국씩 천천히 내디디든 한거번에 훌쩍 뛰어넘든 모두 사랑스럽습니다.

 내 길을 나대로 걸어갈 수 있는 이야기를 누구나 제 깜냥껏 일굽니다. 더 잘난 이야기가 아니고, 더 못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화책 《네가 없는 낙원》에서는 서로서로 따사로운 마음길과 손길로 어우러지는 하루하루를 좋은 이야기르 길어올리려는 사람들 삶을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4344.3.26.흙.ㅎㄲㅅㄱ)


― 네가 없는 낙원 1∼2 (사노 미오코 글·그림,서현영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02/3500·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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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3.15. 

글쓰기를 하는구나. 그런데... 

 

밥상에서 밥 안 먹고 뭐 하냐... 

 

요, 돼지 꾸루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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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3-27 20:57   좋아요 0 | URL
ㅎㅎ 바나나 볼펜으로 열심히 글을 쓰네요^^

파란놀 2011-03-28 07:17   좋아요 0 | URL
아버지가 공책에 글을 쓰면 아이도 따라서 이렇게 놉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