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이 뭐가 힘들어! 뒹굴며 읽는 책 13
완다 가그 글.그림, 신현림 옮김 / 다산기획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집안일은 하찮고 바깥일이 대단하겠지요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2] 완다 가그, 《집안일이 뭐가 힘들어!》(다산기획,2008)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살아가는 애 아버지로서 생각합니다. 집안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집안일은 참 쉽지.’라 말하거나 ‘집안일은 아무것도 아니지.’라 말한다면 ‘그래요, 참 쉽지요.’나 ‘그래요, 참 아무것도 아니지요.’라 대꾸하면서 한 마디를 슬그머니 덧붙이고 싶습니다. ‘참 쉬우니까 집안일 좀 함께 해 주셔요.’라든지 ‘참 아무것 아니니까 님께서 도맡아 해 주셔요.’라고.


.. 아저씨가 소리를 버럭 질렀어. “당신이 하는 일이라곤 꾸물거리며 집 주변을 어슬렁대는 게 전부잖아. 그런 일이 뭐가 힘들어.” 그러자 아주머니가 말했어. “그러면 내일부터 일을 바꿔 볼까요. 내가 바깥일을 할 테니, 당신은 집안일을 해 봐요. 내가 들에 나가서 풀을 자를게요. 당신은 집에서 꾸물거리며 어슬렁대 봐요. 어때요? 바꿔 볼래요?” 아저씨는 얼마든지 잘할 거 같았단다. 풀밭에서 뒹굴거리며 아기를 돌보고, 시원한 그늘에 앉아 버터를 젓고, 소시지 몇 개 굽고 수프나 좀 끓이면 되지 뭐. 흠! 무척 간단한 일이잖아! ..  (14∼15쪽)


 그림책 《집안일이 뭐가 힘들어!》를 읽습니다. 이 그림책은 1935년에 처음 나왔고, 그림책을 그린 완다 가그 님은 1893년에 태어나 1946년에 숨을 거둡니다. 《백만 마리 고양이》라든지 《투명 강아지 아무개의 마법》 같은 완다 가그 님 책이 우리 말로 옮겨지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집안일이 뭐가 힘들어!》가 참으로 멋진 그림책이 아닐까 생각해 보곤 합니다. 한국사람이든 미국사람이든 집안일을 얕보거나 여자한테만 떠넘기는 버릇은 매한가지이니까요. 삶을 읽을 줄 모르거나 삶을 느끼려 애쓰지 못하거나 삶을 사랑하는 손길이 모자라기로는 이 나라이든 저 나라이든 자본주의로 흐르는 나라는 한결같으니까요.

 집안일을 우습게 여긴다든지 하찮게 깎아내리는 까닭은 오직 하나입니다. 집안일을 하고 또 하더라도 돈이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집안일은 하고 또 해도 끝이 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어김없이 되풀이될 뿐 아니라, 나날이 같은 일을 꾸준하게 해야 합니다. 손을 놓을 수 없을 뿐더러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집안일을 하는 사람은 아플 수 없으며, 아파서는 큰일이 납니다.


.. “집안일이 처음이라 좀 어려웠을 거예요. 내일은 아마도 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아주머니가 말했어. “아냐, 이제 그만! 오늘로 집안일도 그만이야. 제발, 부탁이야, 여보, 사랑해. 다시 들에서 일할게. 당신 일보다 내 일이 힘들다고 다시는 투정하지 않을게.” 아저씨가 애원했어. “예, 좋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린 행복하게 잘 살겠죠? 영원히 말예요.” ..  (58쪽)


 그림책 《집안일이 뭐가 힘들어!》를 보면, 집안일을 아무것 아니라 여기던 아저씨가 큰코를 다칩니다. 집안일은 하찮고 바깥일을 대단하게 여기던 아저씨는 집안일을 고작 하루 겪고 나서는 ‘집안일을 하찮게 여기려는 마음’을 다시는 안 품겠다고 싹싹 빕니다.

 그러나, 《집안일이 뭐가 힘들어!》에 나오는 아저씨는 ‘집안일이 무척 손이 많이 갈 뿐 아니라 고되기까지 하다’고 얼핏 느끼면서도 ‘이렇게 힘들며 고단한 집안일인 만큼 나도 집안일을 거들면서 함께 즐거이 잘 살아갑시다!’ 하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집안일에서 꽁무니를 뺍니다. 꽁무니를 빼고플 만큼 혀가 쑥 빠졌다면, 당신 아주머니는 집안일을 하면서 어떤 몸과 마음일까요. 적어도, 아저씨는 아주머니 팔다리를 주물러 준다든지 등허리를 주무른다든지 해야 하지 않을는지요.

 그림책 《집안일이 뭐가 힘들어!》를 읽으면서, 왜 이 아저씨는 아무것도 깨닫거나 깨우치지 못할까 싶어 안타깝습니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집안일을 모를 뿐 아니라, 스스로 집안일을 해 보려 하지 않은 채 이날 이때까지 살아온 아저씨가 하루아침에 ‘그래, 집안일이란 이렇구나.’ 하면서 번쩍 하고 깨달아 아주 착하면서 참다이 살아가기를 바랄 수 없는 노릇이에요. 그예 불에 데었다고는 느낄는지 모르나, 집안일이 얼마나 크며 대단한가를 뼛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으니 고작 한다는 일이란 꽁무니 빼기일밖에 없어요.

 아주머니는 아저씨를 집안일에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굳이 아저씨한테 집안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아저씨가 집안일을 못할 듯하다고 여기기도 했겠지만, 괜히 스스로 ‘내가 이런 일을 하니까 당신이 제대로 알아주시오!’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스스로 껴안으면서 더 사랑해 주는 마음결입니다. 아저씨는 앞으로 조금씩 마음을 다스리면서 설거지를 거든다든지 청소를 돕는다든지 집 안팎 치우기라든지 아이돌보기라든지 여러모로 마음을 쓰겠지요. 차근차근 집안일로 다가오면서 밥하기와 살림살이에 마음을 기울이겠지요.

 아주머니가 어느 날 다리가 다친다든지 몸이 아파 드러눕는다든지 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아저씨는 한 번 크게 겪었으니까, 아주머니가 얼마나 고마우면서 사랑스러운가를 시나브로 깨달아야 하고, 시나브로 깨달으면서 집안일뿐 아니라 집살림을 함께 짊어지면서 흐뭇하게 웃도록 삶매무새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 아주 오래된 옛이야기를 해 줄까? 엄마가 어렸을 때 할머니한테서 들은 얘기야 ..  (7쪽)


 엄마는 할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딸한테 들려줍니다. 딸은 이 얘기를 듣고는 나중에 무럭무럭 자라서 제 딸을 낳는 어머니가 되면 또 제 딸한테 ‘내 엄마, 그러니까 네(딸아이 딸) 할머니한테서 들은 얘기란다.’ 하고 앞머리를 열면서 이야기를 물려줄 수 있겠지요.

 글은 모르고, 책 또한 모르지만, 입에서 입으로, 아니 몸으로 부대낀 삶에서 삶으로 차근차근 물려줄 수 있겠지요. 누가 처음 지었는지 모르고, 언제 처음 태어났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만, 이런저런 실마리야 알든 모르든 대수롭지 않고, 할머니한테서 어머니한테, 어머니한테서 딸한테 천천히 이어지겠지요.

 1930년대 미국땅 어느 곳 모습하고는 사뭇 다르다 할 만하지만, 사람과 자리와 일감이 다르다고는 하나, 삶매무새나 살림새로 보자면 거의 똑같은 모양새로, 예나 이제나 엇비슷한 이야기 하나 태어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201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림책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벌이는 ‘집안일 이야기’를 집집마다 조금씩 다르게 받아들이면서 우리가 꾸리는 하루하루 삶자락이 어떠한가를 가만히 헤아릴 수 있으리라 봅니다.

 우리한테는 어떤 일이 대단할까요. 우리한테는 돈을 더 버는 일이 대단할까요. 우리한테는 집에서 아이를 사랑하며 집살림을 돌보는 일이 대단할까요. 우리한테는 밥 한 그릇이 대단할까요, 큰회사 이름쪽 하나가 대단할까요. (4344.4.11.달.ㅎㄲㅅㄱ)


― 집안일이 뭐가 힘들어! (완다 가그 글·그림,신현림 옮김,다산기획 펴냄,2008.9.30./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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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50] 산들보라

 둘째 아이 이름을 지었습니다. 둘째 아이 이름 또한 애 엄마가 짓습니다. 애 아빠가 곁에서 거들며 함께 지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둘째 아이 이름을 놓고 ‘눈보라’나 ‘봄눈보라’도 생각해 보았으나, ‘산들보라’로 마무리짓습니다. ‘산들’이란 산들바람에서 나오는 ‘산들’이요, 산들바람이란 “시원하고 가볍게 부는 바람”입니다. ‘보라’는 눈보라에서 나온 말인 한편, “이 사람을 보라” 할 때에 나오는 ‘보라’이기도 합니다. ‘산들’이라는 이름은 “산과 들”을 일컫는 산들이 되기도 합니다. ‘보라’는 보라빛 보라이기도 합니다. 뜻이야 이밖에도 여러모로 더 헤아릴 수 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한결 깊어지거나 넓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뜻이나 더 사랑스러운 느낌이나 더 고운 결에 걸맞게 붙이는 이름은 아닙니다. 둘째를 낳아 함께 살아갈 어버이 스스로 어느 곳에서 어떤 매무새로 어떤 살림을 꾸리면서 지내려 하느냐 하는 꿈을 담는 이름입니다. 둘째 아이 또한 첫째 아이처럼 어쩔 수 없이 아버지나 어머니 성을 붙여야 할 테며, 의료보험증에는 끝 이름 하나가 잘리겠지요. 그래도 우리 둘째는 그예 ‘산들보라’일 뿐이고, 산들보라처럼 어여삐 이 땅으로 찾아오리라 믿고 기다립니다. (4344.4.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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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49] 봄꽃

 봄에 피어 봄꽃을 시골자락에서 쉬나무 꽃으로 처음 마주합니다. 도시에서 살던 지난날에는 개나리를 보며 봄꽃을 처음 느꼈으나, 멧자락 시골집에서는 쉬나무 꽃이 맨 먼저 우리들을 반깁니다. 텃밭에 거름을 내려고 풀을 뽑고 흙을 갈아엎다 보니 아주 조그마한 풀에 곧 맺히려는 풀잎 빛깔 작은 꽃망울이 보입니다. 이 꽃망울이 활짝 터지면 풀빛 꽃이 조그맣게 흐드러지려나요. 사람 눈으로는 아주 작다 싶지만, 개미한테는 무척 함초롬한 꽃이 되겠지요. 봄날이기에 봄꽃을 봅니다. 멧자락 집이기에 멧꽃입니다. 시골마을인 터라 시골꽃입니다. 도시에서는 도시꽃이었고, 도시에서도 골목동네였기에 골목꽃이자 동네꽃이었습니다. 시골마을 들판에서는 들꽃이며, 도시자락 길바닥에서는 길꽃입니다. 종이로 만들면 종이꽃일 테고, 나무에는 나무꽃이요, 풀은 풀꽃입니다. 사람들 마음에는 마음꽃이 필까요. 사람들이 사랑을 나눈다면 사랑꽃이 흐드러질까요. 사람들이 서로를 믿거나 아끼면 믿음꽃이 소담스러울 수 있나요. 그렇지만 요즈음 도시내기들로서는 돈꽃과 이름꽃과 힘꽃에 자꾸 끄달릴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참꽃과 삶꽃과 말꽃과 꿈꽃을 사랑하면서 일꽃과 놀이꽃과 아이꽃과 살림꽃과 글꽃과 그림꽃을 피우기란 힘든 나날입니다. (4344.4.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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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말(인터넷말) 62] ‘뮤직 홈’과 ‘음악 감상’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지 않는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사람은 한국말 ‘노래’를 즐겨쓰지 못할 뿐 아니라, 널리 북돋우지 못합니다. ‘노래’하고 ‘音樂’이 다른 말일 수 없을 뿐 아니라, ‘music’은 ‘노래’를 가리키는 영어일 뿐입니다. 노래는 한국말이고, 음악은 중국말이며, 뮤직은 영어입니다. 이를 옳게 가누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사람 스스로 ‘노래’라는 낱말 쓰임새를 줄이거나 옭아맵니다. ‘노래듣기’는 못하고 ‘뮤직플레이어’만 하겠지만, ‘뮤직비디오’를 우리 말로 옮기려고 마음쓰지도 못합니다. ‘海外’는 일본사람이 쓰는 낱말이라고들 이야기하지만, ‘해외음악’ 같은 말마디도 ‘나라밖 노래’로 적을 줄 모릅니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알 때에는 ‘최근 들은 음악’이라는 말마디 글자수를 살피며 ‘관심음악’을 ‘좋아하는 노래’쯤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겠지요. (4344.4.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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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3.31. 

날마다 옷을 갈아입혀야 할 만큼 잘 논다. 이듬날 또 자전거 어린이로... 

 

아버지 자전거 옆을 돌아서, 제 자전거를 타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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