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쪽지 2011.4.11.
 : 졸린 아이 데리고 나오기



- 아이 어머니가 피자를 먹고 싶다 말한다. 피자라는 먹을거리는 아이한테나 아이 어머니한테나 몸에 안 좋으니까 먹지 말자는 이야기는 못한다. ‘몸에 안 좋은 먹을거리’라는 대목에서 딱히 할 말이 없다. 아이를 함께 돌보는 아버지로서 집에서 어떠한 먹을거리를 마련해서 함께 먹는가.

- 읍내로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일찍 일어나서 낮잠이 없이 보내는 아이는 아버지하고 함께 가고 싶다며 눈물을 비친다. 저녁나절 퍽 고단할 텐데 괜찮을까 걱정스럽다. 그러나, 울먹울먹하는 아이를 놓고 갈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제아무리 고단한 몸이더라도 자전거에 수레를 달고 아이하고 함께 마실을 할밖에 없다.

- “같이 갈 테니까 뚝 그쳐요. 뚝 안 그치면 같이 안 가요.” 아이는 끄윽끄윽 하면서 울음을 삼킨다. 양말을 신고 옷을 갖춰 입는다. 자전거에 수레를 달고 마당 앞으로 꺼낸다. 아이가 방글방글 웃으면서 마당에서 뛴다. 아이를 번쩍 들어 수레에 앉힌다. 졸음이 가득한 아이 얼굴이지만 웃는다. 그리도 좋니?

- 자전거도 아이 아버지 몸도 삐끄덕삐끄덕 소리를 내며 달린다. 아이는 길가에 스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수레에 앉아 노래노래 부른다. 오르막을 오른다. 집에서 음성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이고, 숯고개 언덕받이부터는 내리막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거꾸로 오르막에 내리막이다. 아이는 오르막이 거의 끝날 무렵부터 꾸벅꾸벅 존다. 오르막을 오르는 동안에는 길가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이럭저럭 있느라 인사하며 말을 건다며 깨었다면, 이제는 멧자락과 논밭만 펼쳐지니 슬슬 졸음이 오는가 보다.

- 오르막을 다 오른 다음 자전거를 멈춘다. 수레 덮개를 씌운다. 아이는 한쪽으로 엎드러졌다. 자전거를 천천히 달린다. 피자집에 닿는다. 피자를 시킨다. 피자를 받아 수레 한쪽에 놓는다. 아이는 안 깬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집에서 나설 때보다 퍽 고단하다. 바람이 그닥 세게 불지 않으니 맞바람이라고 하더라도 천천히 발판을 밟는다. 아이와 함께 달리는 만큼 더 빨리 달릴 수는 없겠지. 그저 느긋하게 달리면서 집으로 가뿐하게 돌아와야지. 등판에 땀이 송글송글 돋는다고 느끼면서 오르막을 낑낑댄다. 숯고개 즈음 해서 오른쪽 비탈논을 펄쩍펄쩍 뛰며 가로지르는 고라니 두 마리를 본다. 어스름이 깔리는 때라서 고라니가 돌아다니는가 보다. 새벽과 어스름은 사람 눈에 잘 안 뜨이는 때일 테지. 수레를 돌아본다. 아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이가 깨었다면 고라니를 함께 볼 수 있을 텐데. 아이는 아직 고라니를 보지 못했다. 아이와 함께 다니며 고라니를 더러 마주치지만 “저기 고라니 있네?” 해도 고개를 늦게 돌리느라 못 보곤 한다.

- 고갯마루를 다 오른다. 드디어 살 만하다고 생각하며 시간을 살핀다. 집에서 나올 때에는 고갯마루까지 12분 걸렸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읍내에서 고갯마루까지 19분.

- 고갯마루에서 읍내까지는 15분 걸렸다. 고갯마루에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9분 걸린다. 시간을 살피다가 오늘은 집으로 돌아올 때에 그리 오래 안 걸렸다고 느낀다. 어쩌면, 집에서 나올 때부터 좀 느긋하게 나왔기 때문일까. 하긴, 수레를 안 달고 읍내로 나갈 때에는 모두 16∼17분이 걸렸으니까, 처음 나갈 때부터 꽤나 걸린 셈이다.

- 집에 닿아 피자와 가방을 내려놓고 아이를 살짝 안는다. 아이는 얼핏 잠에서 깨는데, 더 잘 듯 더 안 잘 듯 망설이다가 일어난다. 피자를 먹을 때 옆지기가 말한다. ‘자전거만 타고 나갈 때에는 걱정스러운데, 자전거에 수레를 달고 나가면 걱정스럽지 않다’고 한다. 수레를 달고 달리면 덩치 큰 녀석이 잘 보이니까 자동차가 한결 잘 비켜 줄 테니 차에 치일 걱정이 덜하다고 한다. 그러나 수레를 달면 수레 무게이며 아이 무게이며 아버지 몸이 훨씬 고단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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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숲 19 - 신장판
이시키 마코토 지음, 손희정 옮김 / 삼양출판사(만화)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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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 고운 만화책 하나란
 [만화책 즐겨읽기 38] 이시키 마코토, 《피아노의 숲 (19)》



 글책이나 그림책이나 사진책을 볼 때뿐 아니라, 만화책을 볼 때에도 늘 느끼며 생각합니다. 말만 예쁘다 해서 예쁜 글책이 되지 않습니다. 예쁘장한 말을 잔뜩 넣는다 해서 읽을 만한 글책이 아닙니다. 빼어난 글솜씨를 선보인다든지 새로운 글재주를 부린다 해서 돋보이는 글책이 되지 않아요. 글 한 줄에 글쓴이 삶을 얼마나 땀흘려 녹여냈는가에 따라 글책이 달라집니다.

 그림책이라면 그림 하나에 그린이 넋과 숨결이 어느 만큼 짙게 배었는가에 따라 그림책이 달라집니다. 사진책이라 할 때에는 사진 하나에 사진쟁이 얼과 숨소리가 어느 만큼 깊이 스몄는가에 따라 사진책이 달라져요.

 말이나 그림만 예쁘장하게 꾸민다 해서 예쁜 만화책이라 할 수 없습니다. 천재들이 돋보이는 이야기로 꾸민다 해서 좋은 만화책이 되거나 재미난 만화책이 되지 않아요.

 만화이기에 어느 매체보다 생각날개를 펼쳐 꿈과 같은 이야기를 펼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화이기 때문에 섣불리 생각날개를 펼친다거나 아무렇게나 생각날개를 퍼덕인다면, 그닥 재미나지 않을 뿐 아니라 싱겁거나 어이없다고 느끼곤 합니다.

 글책도 그림책도 사진책도 만화책도 오직 이 삶터에 뿌리내립니다. 이 삶터에 두 발을 씩씩하게 디디며 태어납니다.

 글책은 글을 읽으면서 내 생각날개를 펼칩니다. 그림책은 그림을 읽으면서 내 생각날개를 뻗습니다. 사진책은 사진을 읽으면서 내 생각날개를 보듬습니다. 만화책은 만화를 읽으면서 내 생각날개를 여밉니다.

 《피아노의 숲》 19권을 읽습니다. 드디어 19권째에 ‘이 만화 주인공’ 이찌노세 카이 피아노가 나옵니다. 만화쟁이 이시키 마코토 님은 《피아노의 숲》을 몇 권쯤 그릴 생각으로 ‘이 만화 주인공’이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이토록 더디 조금만 그리는지 궁금합니다. 설마 《유리가면》처럼 그릴 생각으로 앞으로 스무 해쯤 더 그리지는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 ‘어쩜 이렇게도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피아노가 있었다니.’‘설마 이 정도의 연주를 들을 수 있을 줄은 몰랐어.’‘이건 타고난 음악성인가.’ ‘이제 이 이상의 쇼팽은.’ “여보, 레프가 이렇게 멋진 연주를 하고 있어요.” ..  (7쪽)
- ‘이찌노세가 연주하는 음악은 어쩜 이리 자연스러운 걸까. 따뜻하고 그리워. 기분 좋은 리듬 때문에? 아니면 칸타빌레? 하모니의 센스?’ ‘아, 이건 폴란드 초원의 유채꽃밭인가?’‘봄에 일제히 싹을 틔우고, 노란색으로 땅을 물들이는 우리 폴란드의 유채꽃이란 말인가?’ (45∼46쪽)



 쇼팽을 기리는 피아노잔치에서 이찌노세 카이는 이찌노세 카이가 태어나서 자라온 나날을 피아노 하나에 고이 싣습니다. 이찌노세 카이가 선보이는 피아노는 ‘쇼팽을 기리는 넋’을 보여주되 ‘쇼팽을 기리며 피아노를 치는 이찌노세 카이’가 ‘이찌노세 카이대로 살아온 제 삶을 기리며 사랑하는’ 손길로 보여줍니다.

 쇼팽이라는 사람이 빚은 피아노 연주는 ‘쇼팽이라는 한 사람이 나고 자란 터전을 아끼고 사랑하며 보듬는’ 손길로 태어났습니다. 쇼팽이 죽고 나서 쇼팽을 피아노로 선보이는 사람이라면 아주 마땅히 ‘쇼팽이 나고 자라며 느낀 숱한 삶과 이야기와 웃음과 눈물’을 피아노로 담도록 애써야겠지요. 그리고 이 쇼팽 연주에 ‘쇼팽을 연주하는 내 삶과 이야기와 웃음과 눈물’을 함께 담아야 합니다.

 나는 ‘쇼팽을 피아노로 들려주는 나’이지 ‘쇼팽을 똑같이 보여주는 쇼팽’이나 ‘쇼팽을 되풀이하듯 보여주는 녹음기’가 아니니까요.

 살아숨쉬는 한 사람으로서, 펄떡펄떡 뛰는 가슴으로 피아노 앞에 선 한 사람으로서, 쇼팽이 지난날 들판을 거닐며 당신 품에 안은 따사로운 너른 흙과 꽃과 바람과 마찬가지로 내가 오늘날 들판을 거닐며 내 품에 안는 따사로운 너른 흙과 꽃과 바람을 소리마디 하나하나에 사뿐히 싣습니다.


- ‘야폰칙(일본인) 중에 이런 사람이 있다니.’ ‘쇼팽을 동경하고 폴란드에 유학 온 일본인도 좀처럼 잡기 힘든 이미지인데, 유학 경험도 없이 어떻게 이런 마주르카를 칠 수 있는 거지?’ (47쪽)
- “왜냐면 이찌노세의 피아노만이 이 대회에서 규격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같은 열에는 세울 수 없게 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찌노세를 남게 하려면 나머지 다른 참가자들을 전부 떨어뜨려야 할 정도입니다. 그러니 이찌노세를 여기서 제외시키고 아마미야를 넣는 건 어떨까 합니다. 무엇보다도 아마미야에게는 훌륭한 이력이 있습니다. 이찌노세의 이력을 보면 어느 음악 전문학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콩쿠르 이력도 없습니다! 국제콩쿠르도 전무합니다!” (163∼164쪽)
- “이 쇼팽 콩쿠르에서는 유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쇼팽을 연주해 내는 인재를 발굴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예비예선을 심사한 선생님들, 그리고 심사위원 여러분의 귀를 믿고 규정을 변경했습니다. 일본인 파이널리스트가 3명이 되어도 문제가 없습니다. 12명 중 대다수를 차지한다면 재고할 여지가 있겠지요 …… 부다 자신이 심사위원에 뽑혔다는 긍지와 자각을 갖고 올바르다고 믿는 평가를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84∼187쪽)


 내 삶을 나 스스로 예쁘게 가꿀 때에 내 글이 예쁩니다. 내 삶을 내 손으로 예쁘게 일굴 때에 내 그림이 예쁩니다. 내 삶을 내 몸뚱이로 예쁘게 껴안을 때에 내 사진이 예쁩니다. 내 삶을 내 다리로 튼튼히 딛고 서며 부둥켜안을 때에 내 만화가 예쁩니다.

 이찌노세 카이가 들려주는 피아노는 다른 ‘콩쿠르 참가자’ 피아노하고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온 터전이 달라서만은 아닙니다. 피아노 앞에 서며 연습을 하거나 나 스스로 피아노를 즐길 때에 내 매무새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피아노잔치에서 1등 연주를 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피아노잔치이니까 말 그대로 ‘피아노로 잔치판을 벌여’야지요. 내 모든 솜씨를 아낌없이 펼쳐 보이면서 나부터 내 피아노를 즐기고 내 피아노 소리를 듣고자 모인 사람들한테 가없이 눈물과 웃음을 선사해야지요.

 더 많은 손님을 끌어모아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노래잔치란 부질없습니다. 더 사랑을 나누고 더 사랑을 받으며 함께 기쁠 노래잔치여야 합니다. 더 눈길을 받거나 더 이름값을 올릴 사진잔치란 덧없습니다. 자랑을 하는 사진잔치가 아니라, 사진 하나로 사랑과 믿음과 꿈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백일장이든 신춘문예이든 참 쓸데없습니다. 글잔치란 상금과 이름값을 거머쥐는 잔치가 될 수 없어요. 상금과 이름값이 나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글잔치라 하면서 막상 글꽃 글숨 글빛 글무지개가 드러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백일장이든 신춘문예이든 참 쓸데없어요.


- (이찌노세의 피아노는 도입부만으로도 대회장의 색을 바꿔 버렸다.) (41∼42쪽)
- ‘카이는, 카이는 어릴 적부터 대지에서 태어난 것 같은 작품에 뛰어났다. 숲의 피아노로 자란 카이는, 나도 알 수 없었던 마주르카의 마음과 한몸이 된 건지도 모르지. 자연의 대지는 폴란드만의 특권이 아니라, 온 세상에 다 있는 거니까.’ (51∼52쪽)
- ‘“숲의 피아노”로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카이만이 낼 수 있는 소리.’ (86쪽)



 《피아노의 숲》 주인공인 이찌노세 카이는 ‘숲 피아노’를 들려줍니다. 왜냐하면 이찌노세 카이는 숲에서 태어나 숲에서 자라며 숲에서 먹고살았거든요. 숲에서 어머니하고 둘이 아름다이 살았거든요. 숲에서 숲 피아노를 사랑하며 숲 노래를 즐겼거든요. 숲에서 숲을 느끼며 쇼팽을 알았고 슈베르트를 보았거든요.


- “카이, 네 자신을 믿어라.” “네! 그럼, 치고 올게요.” (30쪽)
- (숲으로!!!) (62쪽)


 숲이란 이찌노세 카이한테 보금자리요 삶입니다. 숲에서 숲아이로 살아가며 숲노래를 피아노로 옮깁니다.

 쇼팽 콩쿠르에 나온 다른 아이들은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도시에서 도시내기로서 도시사람다운 꿈을 키우며 도시살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도시내기로서 자연을 노래하거나 만나더라도 겉스치는 자연일 뿐, 내(사람) 몸을 이루는 자연이 무엇인가를 환히 깨닫지는 못합니다. 아무래도 다른 아이들을 낳아 키운 어버이부터 자연을 헤아리지 않으면서 살아가니까요. 스스로 자연스럽지 못한 어버이들이 당신 아이들한테 어떤 자연을 들려주거나 물려주겠습니까. 스스로 자연을 사랑하지 못하는 어버이들이 아이들한테 무슨 자연사랑을 이어주겠습니까.

 쇼팽이든 슈베르트이든 모차르트이든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쇼팽을 잘 친다 해서 이름값을 드높이지 못합니다. 슈베르트를 빼어나게 옮긴다 해서 천재이지 않습니다. 모차르트를 훌륭히 들려준다 해서 ‘내가 모차르트가 될’ 수는 없어요.

 팡웨이는 팡웨이를 칠 뿐이고, 안창수는 안창수를 칠 뿐이며, 슈우헤이는 슈우헤이를 칠 뿐입니다. 중국사람이라서 더 낫거나 한국사람이라서 더 좋거나 일본사람이라서 더 훌륭하지 않아요. 저마다 제 삶과 목숨과 사랑을 예쁘게 돌보면서 즐거울 수 있을 때에 ‘쇼팽으로 피아노잔치’를 하든 다른 무엇으로 피아노잔치를 하든 예쁜 노래꽃을 피웁니다.


- ‘카이가 친 마지막 음은 나를 가로질러 황금색 여운을 뿌리며 빛 속으로 사라졌다.’ (105∼107쪽)


 얌전뺑이로 자란 슈우헤이는 《피아노의 숲》 19권에서 피아노와 삶과 사랑이 무엇인가를 조금은 느꼈을까 궁금합니다. 슈우헤이 ‘재주’로는 콩쿠르에 붙을 수 없는 줄 깨달았을까 궁금합니다. 슈우헤이는 ‘붙느냐 마느냐 1등하느냐 2등하느냐’ 같은 어리석은 생각에서 홀가분하지 않고서야 슈우헤이 피아노를 찾을 수 없는 줄을 알아차렸을까 궁금합니다. 부끄러운 나머지 이제부터 ‘내(슈우헤이) 피아노’를 찾아 ‘내 삶’을 가꾸며 사랑하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내 길을 걸을 때에 나를 사랑하면서 내 이웃과 동무를 사랑합니다. 내 길을 걷지 못할 때에는 나조차 사랑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내 이웃과 동무를 참다이 사랑하지 못합니다.

 글도 그림도 사진도 만화도 모두 사랑이 밑바탕입니다. 피아노 또한 사랑이 밑바탕이에요. 예쁜 만화는 예쁜 사랑을 밑바탕으로 삼아 태어납니다. (4344.4.17.해.ㅎㄲㅅㄱ)


― 피아노의 숲 19 (이시키 마코토 글·그림,손희정 옮김,삼양출판사 펴냄,2011.4.2./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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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살 아이 호미질과 책읽기


 씨감자를 몇 심는다. 오늘 일요일을 맞이해 음성 읍내에서 열리는 장마당에서 씨감자를 아직 판다면, 씨감자를 더 사서 텃밭 골을 더 만들어 감자를 심어야지. 골 하나라고 하기에도 멋쩍은 골을 하나 만들어서 얼렁뚱땅 감자를 심는데, 네 살 아이도 일을 거들겠다며 호미를 들고 나선다. 아직 풀캐기라든지 고랑 만들기를 할 줄은 모르지만, 호미를 마치 곡괭이처럼 들고 땅을 콕콕 찍는다. 그래, 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도시에서 살던 때에는 이런 놀이나 일은 꿈조차 꿀 수 없었지. 제아무리 아파트나 번쩍거리는 도심지가 아닌 고즈넉한 골목동네에서 살았다 하더라도, 골목이든 아파트이든 똑같이 도시가 아니겠니. 도시에서는 너한테 호미질을 일러 줄 수 없구나. 그림책으로만 보여주거나 사진 몇 점으로 보여줄 뿐이지.

 호미질을, 그러니까 그림책을 백 번 천 번 본다 한들 익힐 수 있는 호미질이겠니. 그림책 한 번 안 보았어도 호미 한 번 단단히 움켜쥐고 땅을 콕콕 파 보아야 비로소 무언가를 알 수 있지.

 네 아버지는 예쁜 그림책을 싫어하지 않는다. 네 아버지도 예쁘장한 그림책에 눈길이 간다. 그러나 예쁘기만 하고 알맹이는 없는 그림책은 반갑지 않다. 지식으로만 읽는 그림책은 내키지 않고, 재미난 웃음이 나오도록 이끌려 하는 그림책 또한 반갑지 않다. 땀흘리는 일은 땀흘리며 일하는 보람이 있기 마련인데, 요즈음 사람들이 스스로 땀흘리며 살아가려 하지 않는대서 땀흘리는 일을 억지로 그럴듯하게 껍데기를 씌우거나 재미난 놀잇거리라도 되는 듯이 꾸밀 수는 없어.

 빨래를 빨래놀이처럼 즐길 수 있겠지. 그러나 빨래는 빨래야. 걸레질은 걸레질이야. 걸레빨이는 걸레빨이야. 비질은 비질이지. 쌀을 씻어 티끌을 떨구는 일도 쌀씻기야. 나는 맛나구려 하고 보여주는 요리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맛나구려 하는 밥거리를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일구어 얻는가를 함께 밝히지 못한다면, 하나도 맛나구려 하는 밥거리라고 느끼지 못한다.

 네 어머니는 네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 곧 네 할머니가 마련해 준 김치를 맛있게 잘 먹는다. 네 할머니가 밭에서 손수 길러 거둔 배추로 마련한 김치이든 저잣거리에서 사들인 배추로 마련한 김치이든, 네 할머니 김치를 네 어머니가 맛나게 먹는다. 김치맛도 김치맛일 테고, 할머니 김치에는 이 김치를 마련하는 손길이며 땀방울이며 깃들었으니까.

 너는 세 살 아이일 때부터 호미질을 했다. 네 동생은 돌쟁이 무렵부터 호미질을 하겠지. 너는 네 아버지가 쓰는 삽이나 괭이를 들어 보겠다며 낑낑거린다. 네 동생은 돌쟁이 무렵부터 삽이나 괭이를 만지작거리겠지. 너는 요 조그마한 텃밭에서 노닥거릴 때이건 숲속을 거닐 때이건 신에 흘러든 모래알을 느낀다. 1분을 채 걷지 않았어도 시골 흙길에서는 신에 모래일이 깃든다. 도시에서는 여러 시간을 걸어도 신에 모래알이 깃들 까닭이 없다. 그저 먼지로 까맣게 될 뿐이다.

 모든 사람 삶은 흙에서 비롯한다. 어마어마하게 높이 세우는 건물이나 아파트이건, 사람들이 읽는 책이건, 사람들이 몰고 다니는 자동차나 기차나 버스이건, 어느 하나 흙에서 안 비롯할 수 없다. 사람들이 날마다 먹는 밥이건 빵이건 케익이건 과자이건 무엇이건 흙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내기들은 흙을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랑하거나 아낄 줄을 모른다. 우리 살림집이 도시에 깃들 때에는 우리 살림집 또한 흙을 생각하거나 사랑하거나 아끼기 힘들다. 흙을 밟고 들어서는 도시이니까. 흙을 울궈먹으며 뱃살이 디룩디룩해지는 도시이니까. 흙을 멀리해야 깨끗해지는 도시이니까.

 모든 책은 흙에서 비롯한다. 모든 책은 흙에 뿌리를 내린 나무를 베어 만든 종이에서 비롯한다. 모든 책은 흙에서 먹을거리를 얻어 목숨을 잇는 사람들이 종이에 글을 써서 비롯한다. 어제와 그제는 모처럼 네 살 너한테 그림책을 몇 권 읽어 주었으나, 요사이는 네 아버지가 참 고단해서 다른 날에는 그림책을 거의 못 읽어 주었다. 그래도 어제 낮에는 텃밭에서 호미질 놀이를 했으니, 우리는 어제 하루 흙책을 읽은 셈이다. 모레와 글피에도 흙책을 읽도록 오늘 장마당에서 씨감자랑 푸성귀 씨앗을 실컷 장만하자. (4344.4.1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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埿まみれの死―澤田敎一ベトナム寫眞集 (講談社文庫) (新裝版, 文庫)
澤田 サタ / 講談社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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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흙투성이 사진을 찍으며 진흙투성이 죽음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4] 사와다 교이치(澤田敎一), 《泥まみれの死》(講談社,1985)



 구와바라 시세이 님이 쓴 《보도사진가》(타임스페이스,1991)를 읽으면 사와다 교이치(澤田敎一) 님 이야기가 짤막짤막 나옵니다. 두 사람이 동갑내기라 했으니 사와다 교이치 님 또한 1936년에 태어난 셈인데, 사와다 교이치 님은 1970년 10월 28일에 베트남에서 숨을 거둡니다. 미국이 베트남으로 쳐들어가서 싸움이 터진 뒤로 일본 사진기자는 모두 열다섯 사람이 숨을 거두었다 했는데(미국 사진기자는 스물한 사람이 숨을 거두었답니다), 사와다 교이치 님도 열다섯 가운데 하나입니다. 생각해 보면, 베트남전쟁 때에 죽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와바라 시세이 님도 베트남전쟁 때에 베트남에 가서 사진을 찍었답니다. 사진을 왕창 찍고는 도쿄로 돌아와 사진잔치를 벌이며 “약간 자랑스러운 말투로 설명을 덧붙였다(《보도사진가》 178쪽)”고 했는데, 구와바라 시세이 님은 사진잔치 강연을 마치고 내려오며 사와다 교이치 님 얼굴을 보고는 “자신의 우쭐대던 태도가 부끄러워졌다”고 밝힙니다. 이때 사와다 교이치 님은 구와바라 시세이 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에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싱긋 웃기만 했다는데, 당신은 구와바라 시세이 님이 뒷날 펴낸 《보도사진가》라는 책을 볼 수 없었을 테니, 이이가 남우세스러워했는지 어떠했는지는 몰랐겠지요.

 이러거나 저러거나 사와다 교이치 님은 베트남전쟁 때에 온몸을 던져 사진을 찍었고, 온몸을 던져 찍은 사진에는 숱한 상장이 돌아왔습니다. 사와다 교이치 님은 숱한 상장을 받았으나 한결같이 베트남전쟁터로 뛰어들어 사진을 찍습니다. 이 전쟁이 끝나지 않고서야 사와다 교이치 님 사진 또한 그칠 수 없었겠지요. 아니, 이 전쟁이 끝난다면, 전쟁 뒤끝 베트남 삶터와 사람과 삶자락을 살며시 사진으로 담았겠지요.

 서른다섯이 될 무렵 더는 사진기 단추를 누를 수 없게 된 사와다 교이치 님은 당신 젊은 나날을 미국군하고 함께 움직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일본사람으로서 미국군이 아닌 ‘해방군’하고 함께 움직이면서 사진을 찍을 수 없겠지요. 오늘날 미국이 이라크로 쳐들어갈 때에도 미국군하고 함께 움직이면서 사진을 찍어야지, 이라크군하고 함께 움직이면서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이라크군하고 함께 움직이며 사진을 찍는 기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아니 뼛가루 하나 남기지 못하는 채 언제 죽었는 지조차 모르며 죽고 말 테지요. 애써 찍은 사진은 하나도 빛을 못 볼 테지요.

 베트남에서 싸움판이 끝난 지 꽤 긴 해가 흘렀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미국군하고 함께 움직인 사진기자’ 사진만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베트남 해방군’하고 함께 움직인 사진기자 사진은 좀처럼 들여다보기 힘듭니다. 어쩌면 베트남 해방군은 숱한 사진기자를 거느리기 힘들었다 할 만한지 모르며, 이동안 베트남 해방군은 굳이 사진을 안 찍었는지 모르지요. 한국땅에서는 알기 힘들지만, 베트남에 가 보면 해방군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 이룬 열매를 어느 만큼 맛볼 수 있을는지 모르고요.

 사진책 《泥まみれの死》(講談社,1985)를 펼칩니다. 《진흙투성이 죽음》 또는 《고달픈 죽음》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사진책은 사와다 교이치 님 옆지기인 ‘사와다 사타(澤田サタ)’ 님이 엮어서 내놓습니다. 당신 옆지기가 떠난 지 열다섯 해가 지난 어느 날 내놓은 《泥まみれの死》에는 미국군과 함께 움직이면서 미국군 테두리에서 느낀 베트남전쟁을 찬찬히 보여주기도 하지만, 미국군 테두리에서 바라본 베트남전쟁이라기보다는 ‘전쟁이란 무엇인가?’와 ‘전쟁터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는가?’와 ‘전쟁터 군인은 어떠한 삶인가?’를 넌지시 보여줍니다.

 미국군이든 해방군이든 잠을 자고 밥을 먹습니다. 미국군이든 해방군이든 총소리가 멎을 때에는 두 다리 뻗으며 쉬거나 노래를 부릅니다. 총에 맞아 다치면 아파서 소리를 지르거나 눈물을 흘립니다. 총알이 머리나 염통을 꿰뚫었으면 그만 고개를 픽 떨굽니다. 총알이 빗발치면 미국군이든 해방군이든 탱크 뒤이든 건물 뒤이든 바싹 달라붙으며 두려움이 덜덜 떱니다.

 미국군과 함께 움직이면서 전쟁사진을 찍은 사와다 교이치 님이기 때문에 ‘미국군이 포로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살며시 엿봅니다. ‘해방군을 도와주었다’는 빌미 때문에 애꿎게 죽은 사람들 모습을 일본 사진기자 눈길로 바라봅니다. 총에 맞아 죽어야 하는 가녀린 베트남사람, 미국군 주먹에 얻어맞는 슬픈 베트남사람을 일본 사진기자 눈매로 함께 들여다봅니다. 손바닥만 한 사진책 겉에는 장갑차 꽁무니에 밧줄을 이어 ‘해방군 한 사람 주검’을 질질 끄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박습니다.

 베트남에 간 미국이라는 나라 군인은 누구를 왜 어떻게 죽여야 했을까요. 평화를 지키는 일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될까요. 자유를 찾는 일이 사람을 괴롭히거나 주검을 갖고 노는 일이 될까요.

 일찌감치 숨을 거둔 사와다 교이치 님은 더 말할 수 없지만 더 사진을 찍을 수도 없습니다. 죽은 이는 말이 없습니다. 죽은 이 곁에 있었거나 죽은 이를 살짝 스쳤던 사람들이나 죽은 이 사진을 본 사람들이 ‘새로운 말’을 남길 뿐입니다.

 사와다 교이치 님은 죽고 나서 ‘로버트 카파 상’을 받았다는데, 이 상이란, 이 이름이란, 이 훈장이란, 참 덧없구나 싶습니다. 사와다 교이치 님이 로버트 카파 님보다 일찍 태어나 일찍 죽었으면 ‘사와다 교이치 상’이 생겨서, 로버트 카파 님이 ‘사와다 교이치 상’을 받는 사람이 되지 말란 법이 없으니까요.

 사진기자 사와다 교이치 님은 진흙투성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괴로우며 고달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사와다 교이치 님을 비롯해 수많은 베트남사람과 숱한 미국사람이 베트남 들판과 숲과 도심지에서 진흙투성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너나없이 괴로우며 고달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전쟁은 누가 왜 일으켰을까요. 전쟁이 일어난 동안 누가 돈을 벌었을까요. 전쟁터에 찾아간 군인은 왜 월급을 받아야 할까요. 사람을 죽이는 짓을 하는데에도 돈을 벌 수 있다니 이 무슨 평화요 자유요 민주라 할 만한가요. 미국은 군수산업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였으며 오늘날에는 또 얼마나 돈벌이를 하는가요. 미국이 벌인 싸움터에 종군기자로 뛰어든 사람들이 찍은 사진은 우리들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는가요. 전쟁사진이란, 전쟁터를 보여주는 사진이란, 보도사진이란, 보도사진가란, 목숨을 바치며 총알받이가 되어 숨을 거둔 사진기자가 남긴 사진이란, 오늘날 한국땅 여느 도시내기들한테 무슨 이야기로 아로새겨질 수 있을까요. (4344.4.1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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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쑥뜯이


 하루에 두 차례 쑥뜯이를 합니다. 여러 날 아침과 낮을 삼십 분 즈음 쑥뜯이로 보냅니다. 봄이 지나면 더는 쑥을 구경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며 쑥뜯이를 합니다. 아직 다른 풀을 잘 모르니 쑥뜯이를 더 바지런히 한다 여길 수 있고, 뜯은 쑥으로 쑥버무리를 마련하는 솜씨를 익히려고 날마다 바지런을 떤다 여길 수 있습니다. 네 식구 시골살이를 하는 둘째 해에 더 많이 알거나 훨씬 잘 알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올해에는 쑥뜯이 하나를 제대로 할 수 있어도 기쁘리라 생각합니다.

 음성 장마당에서 홑잎나물 삶은 뭉치를 둘 장만해서 닷새째 넉넉히 먹습니다. 그제, 홑잎나물을 훑는 나뭇잎이 어떠한 모양인가를 비로소 깨닫습니다. 예전에도 숱하게 보기는 했지만 제대로 들여다보거나 알아채지 않았습니다. 우리 집 바깥뒷간 옆에서 자라는 나무에 홑잎나물로 삼는 나무가 자라는 모습을 그저께 비로소 알았습니다.

 풀뜯이를 하자면 사슴이나 토끼처럼 풀을 뜯어서 먹어야 하겠지요. 낯익어 보이는 풀이든 낯설어 보이는 풀이든 한두 닢을 살짝 뜯어서 혀에 올립니다. 살살 씹으며 어떤 물이 나와 어떤 맛이 나는가를 헤아립니다.

 책 하나를 찾거나 살필 때에 ‘처음부터 다 아는 책’을 장만하는 때도 있으나, ‘처음부터 까맣게 모르는 책’을 장만하는 때가 훨씬 잦습니다. 책 하나 가만히 손에 쥐어 넘기면서 비로소 이 책이 내가 읽을 만한가를 깨닫습니다. 누가 이 책을 좋다고 이야기하거나 말거나 나 스스로 이 책을 넘기면서 좋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나한테는 좋다 할 만한 책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좋아할 삶은 나 스스로 일굽니다. 내가 걷는 길이 내가 좋아하는 길입니다. 어설프거나 어줍잖은 모습이라면 어설프거나 어줍잖은 모습 그대로를 내가 좋아한다 할 수 있겠지요.

 쑥뜯이를 할 때에는 아이와 함께 집을 나섭니다. 쑥을 뜯는 논 둘레에서 아이는 노래를 부르거나 뜀박질을 하거나 아버지와 함께 쑥을 뜯습니다. 쑥을 뜯다 보면 쑥내가 물씬 오르는 쑥이 있습니다. 이때에 아이는 쑥잎을 들어 아버지보고 냄새를 맡아 보라며 들이밉니다. 아이 손톱보다 작은 쑥잎 하나에서도 곱다 싶은 쑥내가 짙게 납니다.

 아마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방사능’이 빗물에 섞여 내렸다지요. 시골마을이요 멧골자락이라지만, 이곳에서 쑥뜯이를 하면 방사능 머금은 빗물을 받은 풀일 테니까, 내 몸에 나쁠 수 있겠지요. 그러면 공장 가공식품은 얼마나 안 나쁠 만할까요. 공장 가공식품은 어떤 푸성귀나 열매를 그러모아서 만들까요.

 쑥을 뜯고 곰취를 뜯습니다. 아이 어머니가 조금 걸을 만하면 아이하고 손을 맞잡으며 달래 캐러 숲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봄날입니다. (4344.4.1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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