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쪽지 2011.10.12.
 : 새벽안개와 가을들판



- 새벽 여섯 시 삼십육 분 음성역 기차를 타기로 한다. 집에서 새벽 여섯 시 사 분에 나선다. 바깥은 안개가 짙게 낀다. 멧골집이라 새벽안개가 더 짙게 오래 간다. 짐을 꾸리고 자전거를 마당에 세운다. 문을 잠그고 가방을 멘다. 자전거에 올라탄다. 1분쯤 마당에 자전거를 세우기만 했는데에도 안장에 이슬이 앉는다. 기어를 넣는데 삐걱삐걱한다.

- 손이 꽤 시리다. 무릎도 좀 시큰하다. 이른새벽에 자전거를 몰면 이런가. 문득, 지난날 신문배달 하던 나날을 떠올린다. 신문은 봄이고 겨울이고 날마다 같은 때에 일어나 같은 때에 돌린다. 언제나 새벽 두 시 무렵에 일어나 신문을 챙겨 바구니와 짐받이에 싣고 달렸다. 한여름에도 깊은 새벽은 썰렁하기 마련이요, 이제 와 돌이키면 내 몸이나 내 자전거는 새벽 내내 찬기운을 맞아들이면서 애먹었겠구나 싶다. 신문배달 자전거는 다른 자전거보다 일찍 삭고 일찍 망가질밖에 없겠다.

- 손도 몸도 자전거도 똑같이 얼어붙는다. 한겨울 신문배달 하던 일을 되새긴다. 장갑을 두 겹으로 끼더라도 손가락이 금세 언다. 짐자전거를 탄 지 오 분이 채 안 되어 손가락부터 언다. 다음으로 발가락이 언다. 그렇다고 두툼한 장갑을 낄 수 없다. 장갑이 두툼하면 바구니에서 신문을 집지 못한다. 신문을 돌릴 수 없다. 신문배달 일꾼은 실장갑을 두 겹으로 끼며 겨울나기를 해야 한다. 새벽 두 시 무렵부터 다섯 시 무렵까지 차디차게 얼어붙은 몸으로 골목을 누비면서 신문을 돌린다.

- 그래도 나는 나은 셈이지, 하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늘 새벽 여섯 시 사 분에 길을 나섰으니까. 이십 분 남짓 달리면 기차역에 닿으니까. 그러나 손가락이 얼어붙기 때문에, 한손씩 갈마들며 엉덩이에 대고 녹인다.

- 새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는 길이기에 가방이 퍽 무겁다. 이번 길에는 새로 얻을 집에서 며칠 묵으면서 집 손질을 하고 도서관 책을 옮길 자리를 다져서 이동식주택 짓는 일까지 맡겨야 한다. 작은 버너랑 부탄가스를 챙긴다. 옷가지도 조금 더 챙긴다. 이래저래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숯고개 오르막을 넘는다.

- 오르막이 끝나고 내리막. 이제 자전거로 이 길을 달릴 일은 없을까. 이 자전거는 전라남도 고흥 시골마을 작은 집에 둘 테니까, 다시 충주 멧골집으로 돌아와서 마지막 짐을 꾸려 짐차에 싣더라도, 자전거로 이 길을 다시 달릴 일은 없으려나. 어느덧 음성 읍내로 접어들고, 어둑어둑한 길을 지난다. 음성역에 닿는다. 한숨을 몰아쉬며 자전거에서 내린다. 손가락이 꽁꽁 얼어붙었다. 주머니에 손가락을 찔러넣는다. 몇 분쯤 손가락을 녹이고 나서야 꼬물락꼬물락 움직일 만하다. 자전거는 기차 타는 곳까지 끌고 가서 뜯어야겠다.

- 음성역부터 대전역까지는 무궁화 기차를 탄다. 대전역에 내려 서대전역으로 달린다. 그러나, 대전역부터 서대전역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가를 찬찬히 보여주는 길그림이 없다. 대전역에서 청소하는 일꾼한테 말씀을 여쭌다. 이 말씀대로 달리며 도청 앞에서 왼쪽으로 도는데, 도청 앞에서 왼쪽으로 꺾는 길이 두 갈래. 이런, ‘어느 왼쪽’으로 가야 하나. 깊은 왼쪽 말고 안쪽 왼쪽으로 가기로 한다. 어디로 가든 길은 이어지겠지. 한동안 달리며 저 옆으로 갔어야 하나 하고 생각한다. 몇 분쯤 그대로 달리다 보니 드디어 길알림판이 나온다. 내가 달리는 이 길이 맞다. 가슴을 쓸어내린다.

- 서대전역에 닿아 먼저 뒷간에 들른다. 기차 들어올 때를 기다린다. 기차역 일꾼이 “접이식 자전거이지요?” 하고 묻는다. 싱긋 웃으며 “네.” 하고 대꾸한다.

- 고속철도에는 자전거를 접어서 예쁘게 모실 자리가 있다. 다만, 이 자리는 ‘승무원 자리’. 고속철도 승무원한테 미안한 일이지만 이곳에 둔다. 승무원이 앉을 자리는 기차 칸 사이사이 빈 데에 둘 더 있기에, 미안하면서도 여기에 두기로 한다. 자전거 몸통 잘 보이는 데에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큼직하게 적는다. 기차에 자전거를 실을 때에는 붙임쪽지를 챙겨서 붙이면 한결 잘 보이겠다고 생각한다.

- 광주역에 닿다. 그런데 이곳이 ‘광주역’인지 ‘광주송정역’인지 헷갈린다. 고속철도는 광주송정역으로 달리지 않나. 물어 볼 사람이 없어 알쏭달쏭해 하다가 그냥 달려 보기로 한다. 어느 쪽이든 시내 안쪽으로 가야 시외버스 타는 데가 나올 테니까. 대전에서처럼 내 느낌을 믿고 달린다. 내 느낌을 믿고 달리다가 엉뚱한 데로 빠지는 적이 곧잘 있는데, 오늘은 용케 내 자전거가 제길을 잘 찾는다. 무등경기장을 왼쪽으로 낄 무렵 시외버스 타는 곳을 알리는 길알림판이 드러난다. 가슴을 쓸어내린다. 자전거로 건널목을 건너는데 까맣고 커다란 자동차가 푸른불인데에도 씽 하고 지나가려 한다. 깜짝 놀라서 멈춘다. 자동차도 멈춘다. 버젓이 푸른불이요, 이 건널목을 건너는 사람과 자전거가 있는데 왜 함부로 내달리는가. 어디를 그렇게 바삐 가야 하시는가.

- 광주에서 고흥 들어가는 시외버스 표를 끊는다. 내가 선 줄에 있는 두 사람이 몹시 오래 끌며 표를 끊는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저희 표를 다 끊었으면 뒤에 선 사람을 생각해야지요. 한 사람 두 사람이 일 분 이 분 질질 끄는 바람에 뒷사람은 그만 차를 놓칠 수 있어요. 당신들한테는 가벼운 수다요 ‘이제 표를 끊었으니 느긋할’는지 몰라도, 표를 끊으려고 기다리는 사람한테는 다른 일이 돼요.

- 고흥읍에서 내린다. 짐칸에서 자전거를 내릴 때에 버스 일꾼이 내려서 바라본다. 도와주려고 하셨나 보다. “거그 말고 뒤에 실었으면 바퀴를 빼지 않고도 통째로 실을 수 있는디.” “아, 그래요. 그러면 다음에는 그렇게 할게요.”

- 우체국에 들러 편지 한 통을 부친다. 김밥집에 들러 김밥 두 줄을 산다. 우리 식구가 살아가고픈 마을까지 자전거로 달리기로 한다. 고흥읍에서 도화면 신호리 동백마을까지 군내버스로는 20분. 자전거로는 몇 분이 걸릴까.

- 14시 08분에 고흥읍에서 벗어난다. 읍내에서 포두 쪽으로 나오는데, 읍내에서는 길이 판판하지만, 도양과 포두로 갈리는 길부터 오르막이다. 신호리에서 읍내로 나올 때에 읍내 막바지는 내리막이 될 테니까, 이때에는 괜찮겠지. 한참 오르막을 달리고 나서 포두면에 접어들 때까지는 내리막. 거꾸로 읍내로 나올 때에는 이곳까지 오르막이 되겠구나. 14시 24분 포두면. 조그마한 면내를 슬슬 지나간다. 나중에 자전거에 수레를 달고 이 길을 달릴 때를 어림해야 하니 애써 빨리 달리지 않는다. 포두면을 벗어나 도화면 쪽으로 가는 길도 오르막. 면내나 읍내만 길이 판판하고 면과 읍을 잇는 길은 다 오르내리막인가. 이래저래 다리힘을 많이 써야 한다고 느낀다. 14시 37분 도화면 들머리. 도화면 길알림돌을 바라보며 새로운 오르막을 맞이한다. 고흥읍부터 신호리까지는 오르내리막이 세 차례로군. 퍽 만만하지 않겠다. 생각보다 오가는 자동차가 많다. 그러나, 자전거로 시골길 달리는 시간이 기니까 오가는 자동차를 많이 만난다 할 수 있겠지. 또, 고흥군에서 고흥읍을 벗어나는 길이기도 하다. 14시 47분 도화면 신호리 동백마을 마을회관 앞. 도화면 들머리부터 이곳까지 오는 동안 자동차가 거의 없다. 그래, 이렇게 마을 깊이 들어오는 데로는 오갈 차가 없겠지. 77번 국도까지만 자동차가 조금 있다 할 테지.

- 읍내에서 마을로 들어오기까지 자동차에 치여 죽은 짐승을 제법 많이 보았다. 군내버스를 타고 움직일 때에는 길죽음짐승을 거의 헤아리지 못했다. 아니, 버스를 타면 길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버스가 길죽음짐승을 거듭 밟고 지나가더라도 느끼지 못한다. 길죽음짐승은 그야말로 떡처럼 납작하게 눌린다. 어느 길죽음짐승은 찻길 맨 바깥 하얀 줄 너머인데에도 떡이 된다. 어떻게 이러할 수 있을까. 이 자리에서 치여 죽고 떡이 되었다면, 자동차를 모는 사람이 일부러 하얀 금 바깥으로 달렸다는 소리일밖에 없다.

- 마을 빈집에 닿아 혼자 청소를 하다가 문득 떠올라, 자전거를 몰고 도화 면내로 가서 가게에서 막걸리 두 병이랑 담배 한 보루를 사다. 가게 할머니가 “으떻게 이런 데까지 와서 젊은네가 살려고 할까?” 하고 묻는다. “좋은 마을에서 아이들하고 잘 살고 싶어서요.” 하고 말씀드린다. 마을로 돌아가는 길은 갓 벤 나락을 말린다고 온통 노란 빛깔. 나락내음 흙내음 땀내음. 나락 사이를 자전거가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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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실이 - 김은미 에세이집
김은미 지음 / 해드림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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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고 아름다이 살아가고픈 꿈
 [책읽기 삶읽기 82] 김은미, 《꼬실이》(해드림,2010)



 우리 살붙이 새로 둥지를 틀 시골집을 계약합니다. 마을 어르신 네 분이 모여 지켜봅니다. 이튿날 아침, 등기이전을 하려고 집임자요 땅임자가 사는 동광양으로 버스를 타고 두 시간 길을 달립니다. 집임자요 땅임자인 분은 땅만 등기를 해 놓고 집은 등기를 해 놓지 않았습니다. 옛날부터 이와 같았는데 이제껏 몰랐답니다. 법무사를 찾아가서 서류를 마무리하려다가 이 대목에서 걸려, 집 등기를 하기 앞서 갖출 서류를 새로 만들어야 하기에 동광양에서 고흥읍으로 돌아오고, 도화면사무소를 찾아가며, 다시 고흥읍으로 갑니다. 아침 일곱 시에 시골마을에서 길을 나섰는데, 저녁 여덟 시가 넘어서 겨우 마을로 돌아옵니다.

 땅은 등기가 되었으니 집은 그냥 그대로 살아갈 수 있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내가 눈을 감거나 옆지기가 눈을 감은 다음, 이 집에서 우리 아이들이 고이 살아간다 할 때에, 또는 우리 아이들이 이 마을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간다 할 때에, 어버이 된 내가 집 등기를 제대로 마무리짓지 않으면 나중에 아이들이 또 골머리를 앓으면서 길에서 여러 날을 흘려야 합니다. 먼 뒷날을 곰곰이 그립니다. 아이들이 하루하루 슬프게 길에서 보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어버이인 내가 여러 날 길에서 보내자고 다짐합니다. 밥 먹을 틈 없이 버스에 택시에 군청에 면사무소에 설계사무실에 한전에 우체국에 몰아쳐야 하지만, 나한테 주어진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살붙이 살아가려는 도화면 신호리 동백마을로 돌아가는 군내버스를 타려다가, 고흥읍내 정류장 옆에 있는 조그마한 표파는곳 선간판을 봅니다. 저기에서 표를 끊는가 보구나. 맞돈 1900원을 내도 되지만 표를 끊고 싶습니다. 표파는곳에 섭니다. 안을 살며시 들여다보니 종이에 고무도장 찍은 표입니다. 표값은 1800원. 시외버스 타는 데에서 군내버스를 타면 1900원이고, 여기에서는 1800원입니다. 한 장을 끊습니다. 곧이어 석 장을 더 끊습니다. 석 장은 두고두고 간직하려고 끊습니다. 누리끼리한 똥종이에 고무도장으로 1800 숫자를 찍은 조그마한 종이표가 애틋해, 이 버스표 석 장을 예쁘게 돌보고 싶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스물이 되고 서른이 된 나이에는 이 종이표가 틀림없이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 그무렵 ‘얘들아 너희 아버지가 이 마을에 살려고 막 들어와서 바쁘게 돌아다닐 때까지 이곳에서는 이 종이표를 끊어 버스를 탔단다.’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 식구 가운데 누구 하나 들어오지 않아도 굶는 꼬실이는 간밤 내내 자는 척, 사실은 기다리기만 했을 거다 … 어쩌다 아주 넓은 풀밭에 데려가면 그때야 사방을 뛰어다니느라고 잠시도 쉬지 않았지만 그럴 일이야 한 해 한 번이나 제대로 있을까 … 참 행복했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며칠이건 몇 달이건 혹은 운 좋게 몇 해건 우리에게 허락될 그동안을 더 사랑하고 더 행복하자 … 언젠가는 헤어지고 말 것이지만, 추억으로 힘을 얻게 될 것이니 ..  (24, 100, 192, 201쪽)


 시골집 계약서를 쓰고 나니 마을 어르신들이 “잘 왔네, 축하하이. 이제 한 동네 사람이 된 거여.” 하면서 활짝 웃습니다. “마을에 살면 마을에 맞는 행동도 해야 하고 힘들 수도 있지만, 우리 마을이 보기보다 인심이 더 좋으니 걱정할 것 없으이.” 하면서 막걸리를 사발에 따릅니다. 마을에서 할머니로서는 가장 젊다는 이장님네 예순다섯 할머님이 술안주로 단감을 깎습니다. 단감은 이장님에 마당 가장자리 돌울타리 곁에서 자라는 감나무한테서 얻습니다.

 4일과 9일은 고흥읍 장날입니다. 10월 14일 어제, 새벽 세 시부터 빗방울이 들었습니다. 아침 여섯 시 무렵에는 주룩주룩 비가 내립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이 되고 보니, 마을 분들은 들일을 나가지 않는답니다. 모두들 일할 때와는 다른 정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는 이른아침부터 읍내 나가는 버스를 탑니다. 들일을 쉬니 바깥 볼일을 봅니다. 마침 장날이기도 하고요.

 “우리 마늘이 임자 잘못 만나 불쌍하다 불쌍하다 했는데 비가 오긴 오네.” 나락 베기 앞서 밭자락 푸성귀를 거두고 한 차례 갈이를 하고 조금 있다가 마늘을 심습니다. 마늘을 심을 때에는 마을 할머님들이 서로 품앗이를 합니다. 젊은 날부터 함께 일하고 서로 돕습니다.


.. 예의니 도리니 하는 것으로 눈막음은 하지만 기실 병약하거나 늙은 사람들에 대해 하찮게 여기는 마음이 왜 없겠는가 … 사람들은 죄다 한마디씩 한다. “어머, 이제 늙었나 봐. 하긴 오래 살았지. 확실히 늙은 티가 확 나네.” 등등 주절거리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누가 자기한테, 자기 어머니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기분이 어떨까. 짐승에게는 도대체 배려라는 게 없는 게 인간이라는 동물이다 … 잠시 토닥토닥 두들겨 주다가 소파에 재워 놓고 눈을 감았다. 어떤 세상일까. 해가 눈부신 건 질색을 하는 나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깜깜한 것이 하염없이 지속된다는 게 쉽게 견딜 일 아니다 … 간혹 나를 난감하게 하는 고집, 부릴 만하겠다 싶다 ..  (37, 45, 118쪽)


 이장님 댁에서 사흘 묵습니다. 우리 살붙이 지낼 집을 계약하기까지 묵도록 작은방을 내어주십니다. 밥도 ‘한 그릇 더 놓을’ 뿐이라면서 함께 먹습니다. “우린 시골이라 이렇게 풀만 먹어요.” 하면서 늘 드시는 밥차림 그대로 함께 먹습니다. 이 밥상을 옆지기가 함께 받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떠올립니다.

 꼭 알맞춤한 작은 집, 작은 마당, 작은 밭과 논, 작은 일손, 작은 마을입니다. 먼 옛날, 또는 가까운 지난날, 이 마을에 빈집이 없이 가득했을 때에는 사람들이 얼마만큼 북적였을까요. 마을 모든 집이 가득 찼다 하더라도 웬만한 도시하고 견주면 그야말로 조그마한 마을 아니었을는지요. 예나 이제나 이 마을은 그저 작은 마을이요 작은 사람들이면서 작은 사랑이라고 느낍니다. 나와 우리 살붙이는 이 작은 마을에 또다른 작은 사람이 되면서 작은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즐거우리라 느낍니다.

 많이 벌어 많이 쓸 까닭이 없어요. 넉넉히 벌어 넉넉히 쓸 까닭이 없어요.

 꿈을 꿉니다. 알맞게 벌어 알맞게 알맞게 누리면서 살아갈 꿈을 꿉니다. 즐겁게 일해서 즐겁게 일한 만큼 버는 그대로 우리 살붙이랑 이웃이랑 동무랑 나누면서 살아갈 꿈을 꿉니다.

 나부터 좋은 넋으로 좋은 말을 즐길 때에 우리 아이들 또한 좋은 넋으로 좋은 말을 즐길 수 있으리라 느끼면서 살아가는 꿈을 꿉니다.


.. 슬프기는 하지만 살아 있는 목숨은 계속 살아지고 다시 다른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결코 잊지는 않지만 헤어질 그 즉시처럼 인생이 자근자근 아프지는 않다. 그리고 새로운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런 마음을 다시 품게 된 것은 먼저 보낸 그 아이와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는다 … 그 몫의 자리가 있고 그 몫의 사랑이 있다. 꼬실이가 죽고 나서 다른 개를 데려다 기르면서 꼬실이한테 미안한 마음을 품지는 않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으니까 … 특별한 능력을 타고났는지 계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짐승들의 마음을 읽는다는 커뮤니케이터 아니더라도 나는 녀석의 마음을 대개 읽을 수 있다 ..  (128, 129, 151쪽)


 집살림을 하는 아주머니로 살아가는 김은미 님이 ‘막둥이 꼬실이’ 이야기를 적바림한 《꼬실이》(해드림,2010)를 읽습니다. 이야기책 《꼬실이》는 열여덟 나이까지 살아낸 꼬실이 마지막 삶을 돌아본 나날을 담습니다. 곁에서 사랑스러웠고 언제나 함께였던 막둥이가 조용하면서 얌전하게 눈을 감은 삶을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함께 살았으니 즐겁습니다. 서로 아꼈으니 사랑입니다. 나란히 밥을 먹고 잠을 잤으니 한식구입니다. 즐거운 삶에 따로 더 바랄 일이 없겠지요. 아끼는 사랑에 군더더기를 붙일 까닭이 없겠지요. 고운 한식구를 예쁘게 되새기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 새롭게 맞이할 수 있겠지요.


.. 그렇게 계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헌책을 떠올렸다. 닳은 겉장, 바뀌기 이전 맞춤법, 조악한 인쇄, 금방이라도 낱장이 흩어질 것만 같은 제본 등, 하지만 100년 가까운 시간이 그 안에 꼭꼭 박혀 있을 터였다. 아버지 젊은 날에는, 우리가 한창 자라던 중장년 시절에는 우리든 누구든 그 책을 들추고 읽었으면 하고 초조하신 적도 있었으리라. 이렇게 좋은 경험, 참고할 것, 깊은 생각이 많은데 왜 아무도 주의 깊게 읽으려 하지 않나 괘씸하기도 하셨을 게다. 그렇지만 그 한 해, 아버지는 당신 혼자 넘기고 되넘기면서도 충분히 만족하신 듯이 보였다 ..  (55쪽)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이 퍽 널리 쓰입니다만, 나는 이러한 말이 퍼지는 일이 썩 달갑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으레 입으로만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욀 뿐, 정작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작게 살아가려 하지 않거든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려면, 남녘땅 한강과 낙동강과 금강과 섬진강을 쇠삽날로 망가뜨리는 일을 하지 말아야지요. 작게 작게 살려야지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려면, 한미자유무역협정을 이루면 자동차나 전자제품을 얼마나 많이 팔아먹어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는가 따위를 읊지 말아야지요. 도시사람도 텃밭을 일구든 주말농장을 하든 스스로 흙을 만지고 아끼면서 내 먹을거리를 조금이나마 내 손으로 일구는 삶으로 바꾸어야지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려면, 자가용하고 헤어지거나 자가용을 좀 덜 타야지요.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야지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말하려면, 아파트를 이제부터라도 작게 지어야지요. 적은 돈으로도 살 만한 아파트를 짓고, 높직하게 올려세우지 말며, 알맞춤한 돈으로 살림집 마련해 알맞춤한 돈으로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보살피면서 내 나날을 알맞춤하게 누려야지요.


.. 의지하고 믿고 사랑하는 아름다움에 대해 우리는 함께 배워 왔지요 … 막둥이 보낸 지 겨우 하루 지났다. 장난감이 부서진 게 아니라 사랑하는 식구가 죽은 거다 ..  (209, 260쪽)


 작은 아름다움이 아닌 큰 아름다움을 바라면서, 아니 아름다움조차 아닌 큰 것만 바라면서 ‘아름다움’이라는 낱말을 뒤에 붙이는 일은 몹시 슬픕니다. 아름다움은 크거나 작다고 가르지 못합니다. 큰 아름다움이 없고 작은 아름다움 또한 없습니다. 아름다움은 그저 아름다움이에요.

 작은 삶이 없고 큰 삶이 없습니다. 작은 사랑 또한 없으며 큰 사랑 따로 없어요. 그런데, 참말 이 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아름다이 살아가고픈 꿈’을 밝히기 힘듭니다. 따로 ‘작고’라는 꾸밈말을 앞에 달아 ‘작고 아름다이 살아가고픈 꿈’을 밝혀야 하는데, 이렇게 밝혀도 ‘작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어깨동무하는 길을 찾기가 만만하지 않아요.

 《꼬실이》를 적바림한 김은미 님이 막둥이를 아끼면서 사랑한 나날 그대로, 저마다 제 고운 옆지기를 아끼면서 사랑하는 나날을 누릴 수 있기를 비손합니다. 나는 내 옆지기와 살붙이를 곱게 아끼면서 사랑하는 길을 내 몸과 마음을 함께 살찌우면서 걷자고 헤아립니다.

 군말 한 마디 붙입니다. 이야기책 《꼬실이》는 애틋하고 아름다운데, 책 짜임새와 엮음새는 영 허술합니다. 출판사 일꾼이 제대로 마음을 기울이지 못해 퍽 서운합니다. 부디 사랑을 읽고 사랑을 나누어 주셔요. (4344.10.15.흙.ㅎㄲㅅㄱ)


― 꼬실이 (김은미 글·사진,해드림 펴냄,2010.12.31./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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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가 길게 자란다면 내 친구는 그림책
타카도노 호오코 글 그림, 예상렬 옮김 / 한림출판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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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마음그릇으로 읽는 그림책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7] 타카도노 호오코, 《내 머리가 길게 자란다면》(한림출판사,2003)



 좋은 마음그릇이 되어 읽는 그림책은 내 아이한테 좋은 마음그릇이 되기도 할 테지만, 이보다 어버이인 나부터 내가 이제껏 제대로 느끼지 못하거나 살피지 못했던 고운 마음그릇이 되어 스며든다고 느낍니다. 좋은 마음그릇인 좋은 책 하나 가만히 펼치면서 아이하고 함께 읽든 혼자서 읽든, 이 마음그릇이 담긴 마음밥을 차근차근 받아먹거나 즐길 수 있구나 싶어요.

 책값을 천천히 마련하면서 즐겁고, 땀흘려 마련한 돈을 책값으로 쓰면서 즐거우며, 책 하나 장만하려고 책방마실을 다니는 일이 즐겁습니다. 장만한 책을 읽을 때에 즐겁고, 읽은 책을 책시렁에 꽂을 때에 즐거우며, 읽은 책을 틈틈이 다시 꺼내어 들출 때에 즐겁습니다.

 먹고 또 먹어도 줄지 않는 마음밥인 책입니다. 즐기고 또 즐기면서 낡거나 닳지 않는 마음벗인 책입니다. 나누고 또 나눌수록 새로운 빛이 서리며 어여쁜 마음밭인 책이에요.


.. “뭐야? 너희들 겨우 그것밖에 안 길러? 나라면 더 길게 기를 텐데!” 수진이가 말했습니다. “뭐, 얼마나?” “훨씬, 훨씬, 훨씬, 훨씬, 훨씬, 더 길게! 길이는 …….” ..  (4쪽)


 타카도노 호오코 님이 빚은 그림책 《내 머리가 길게 자란다면》(한림출판사,2003)을 읽습니다. 머리가 짧은 아이는 저보다 머리가 긴 동무 둘이랑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내 머리가 길게 자란다면’ 어떠한 모습일까 하고 꿈을 꿉니다. 길디긴 머리카락으로 무엇을 하고, 길디긴 머리카락 때문에 어떤 일이 생기며, 길디긴 머리카락은 아이 삶을 얼마나 아름다이 일구는가를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예쁜 꿈이에요. 멋진 꿈이에요. 예쁘게 살아가는 아이인 만큼 예쁘게 꿈꿀 수 있겠지요. 멋지게 살아숨쉬는 아이인 터라 멋지게 꿈꿀 수 있을 테지요.

 짧은머리 아이하고 살아가는 어버이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합니다. 예쁘게 꿈을 꾸는 아이하고 살아가는 어버이 또한 예쁘게 꿈을 꾸는 어른일까요. 아이만 혼자 예쁘게 꿈을 꾸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곰곰이 돌아봅니다. 나는 우리 집에서 우리 옆지기랑 두 아이가 저마다 어떤 예쁜 꿈을 꾸면서 살아가도록 따스하거나 너그러운 살붙이로 지내는가 하고 곰곰이 돌아봅니다. 나는 내 보금자리를 얼마나 어여삐 건사하는 어여쁜 어른인가 하고 곰곰이 되새깁니다. 우리 집 딸아이와 아들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저희 동무들하고 어여삐 이야기꽃을 피우도록 이끌 만큼 나 스스로 어여삐 살아가는지 곰곰이 헤아립니다.


.. 오른쪽으로 땋은 머리와 왼쪽으로 땋은 머리를 팽팽하게 나무에 묶으면 우리 집 모든 빨래를 한꺼번에 널 수 있어. 빨래가 마를 동안 나는 책 10권을 읽고 “도와줘서 고맙다.”라는 엄마의 칭찬을 들을 수 있을 거야 ..  (12∼13쪽)


 좋은 삶으로 이루는 좋은 꿈입니다. 좋은 사랑으로 일구는 좋은 믿음입니다. 좋은 손길로 나누는 좋은 밥입니다.

 아이한테서 예쁜 웃음이나 맑은 웃음을 바란다면,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는 나부터 예쁜 웃음과 맑은 웃음을 아끼며 사랑하면 돼요. 아이한테서 예쁜 말이나 예쁜 몸짓을 꿈꾼다면, 아이랑 오순도순 복닥이는 나부터 예쁜 말이나 예쁜 몸짓으로 이웃을 사귀면 돼요.

 좋은 마음그릇으로 읽는 좋은 그림책입니다. 좋은 마음그릇을 갈고닦지 않는다면 좋은 그림책을 코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며 받아들이지 못해요.

 좋은 그림책을 찾기 앞서, 내 삶을 좋은 꿈·사랑·이야기 감도는 기쁨으로 돌볼 줄 알아야 해요. 좋은 그림책을 바란다면, 어른인 내가 하는 일이 아이들이 기꺼이 물려받으면서 좋아할 만한 일이 되어야 해요. 내 아이가 어른이 되어 저희 좋은 짝꿍을 만나서 저희 아이를 낳은 다음에도, ‘어른인 내가 마련한 보금자리’에서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느끼면서 알콩달콩 한솥밥을 먹을 수 있다면, 따로 좋은 그림책이 곁에 없어도 내 삶은 늘 좋은 이야기꽃이 가득합니다.


.. “그래도 보통 때는 귀찮지 않을까?” “그래, 머리가 길어서 다니기 불편하지 않을까?” 연희와 민지가 함께 물었습니다. “문제없어. 그럴 때는 파마를 하는 거야. 그러면 ……. 내 머리는 숲이 되는 거야! 작은 새도, 다람쥐도, 벌레들도 모두 다 모여서 아주 멋있는 숲이 되는 거야!” (22∼26쪽)


 나는 숲을 꿈꿉니다. 나와 옆지기가 따사로이 한삶을 일구는 좋은 ‘집숲’을 꿈꿉니다. 두 어버이와 살아가는 두 아이가 푸른 숨결을 누리면서 푸른 꿈결을 스스로 보살필 수 있을 좋은 집숲을 생각하면서 우리 살림집을 가꿉니다. 돈을 더 벌거나 이름을 더 얻거나 힘을 더 펼치는 삶은 내키지 않아요. 포근하게 어깨동무하고 싶고, 넉넉하게 껴안고 싶으며, 신나게 손잡고 싶어요.

 그림책 《내 머리가 길게 자란다면》을 읽고 덮고 다시 읽고 다시 덮으면서 즐겁습니다. 이야기꽃 하나 피고 지는 그림책을 읽으면서 즐겁습니다. 새 이야기꽃이 천천히 피어나고, 또다른 새 이야기꽃이 새삼스레 피고 지는 그림책을 아이하고 나눌 수 있어 즐겁습니다. (4344.10.13.나무.ㅎㄲㅅㄱ)


― 내 머리가 길게 자란다면 (타카도노 호오코 글·그림,예상렬 옮김,한림출판사 펴냄,2003.1.30./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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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ngwoo Chun : Versus - 천경우 작품집
천경우 지음 / 이안북스(IANNBOOKS)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사진이 되기, 예술이 되기, 이야기가 되기
 [찾아 읽는 사진책 48] 천경우, 《Photographs》(IANN,2011)


 마을 이장님 댁에서 하룻밤을 지냅니다. 우리 네 식구는 충청북도 멧골자락 작은 집을 떠나 전라남도 고흥군 시골마을 작은 집으로 옮기기로 합니다. 마땅한 빈집과 빈터를 찾는 동안 마을 이장님이 도와줍니다. 가을걷이를 하는 바쁜 때이지만 저녁나절 짬을 내어 도와주시고, 저녁밥과 잠자리까지 내어줍니다.

 새벽 네 시 십오 분에 잠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짙게 드리운 구름을 올려다봅니다. 시골고양이 여러 마리가 고샅길을 조용히 거닙니다. 따로 고양이를 키우는 집은 없으나 고양이가 이렇게 마을 한식구로 지낸다고 합니다. 마을에 쥐가 없답니다.

 한창 가을걷이를 하고, 온 길바닥에 나락을 넙니다. 드나드는 자동차란 군내버스 말고는 거의 없기에 찻길은 차 한 대 지나다닐 자리를 빼고는 온통 나락누리입니다. 막 거둔 노란 나락으로 예쁜 노란누리를 펼칩니다. 노란 빛깔 흙내음이 물씬 퍼집니다. 내가 선 동백마을이나 이웃 신기마을이나 봉서마을이나 봉동마을이나 한결같이 나락내음과 흙내음입니다. 부디 나락베기와 나락말리기가 다 끝날 때까지 빗방울이 들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나락을 벤 자리는 벼포기만 몽땅하게 남습니다. 벤 벼포기는 네모낳게 말아 주는 기계가 척척 네모반듯한 덩이를 내놓기도 하고, 흙일꾼 할매와 할배가 집집마다 다른 모양새로 짚뭇을 삼기도 합니다. 사진을 찍는 분 가운데에는 이 짚뭇 모습이 재미있다 여겨 온나라 다 다른 짚뭇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다니기도 합니다. 한 마을 짚뭇만 보더라도 얼마든지 다 다르고, 새벽과 아침과 낮과 저녁마다 햇살에 따라 느낌과 모양과 빛깔이 다릅니다. 온나라 짚뭇을 들여다보려 한다면 수만 수십만 짚뭇에다가 때와 철과 날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릴 테지요.

 새벽 네 시 반, 마당에 있는 물꼭지로 낯을 씻고 머리를 감습니다. 기지개를 켜고 마당을 휘 둘러봅니다. 달은 구름에 가리고, 마을 고샅 여기저기에 걸린 작은 등불이 내는 빛을 받은 바지랑대와 빨랫줄에 하얀 빛가루가 내려앉습니다. 달빛가루만큼은 아니지만 달빛가루와는 또 다르게 고즈넉하면서 눈부시며 어여쁜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집 즐거이 마련할 수 있으면 우리 집에는 어떻게 빨랫줄을 잇고 바지랑대를 걸칠까 하고 꿈을 꿉니다. 충청북도 멧골자락은 아침저녁으로 퍽 서늘해 풀벌레소리 일찌감치 잠들었으나, 전라남도 시골자락은 아침저녁에도 풀벌레소리 가늘게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거의 모두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이 나라 사람 가운데 반쯤 되는 숫자는 서울과 서울 둘레 커다란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전남 고흥이 고향이지만 서울에서 일자리를 얻어 회사를 다니는 이가 퍽 많습니다. 해남이, 강진이, 보성이, 순천이, 화순이, 담양이, 나주가, 구례가, 곡성이, 남원이, …… 고향이지만, 이 고향을 등지고 커다란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 한 자리를 얻어 돈을 버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나는 잘 모르지만, 고흥이나 해남이나 강진이나 화순이 고향이요 당신 어버이가 예부터 흙을 일구고 살아가는데 당신은 서울이나 서울 둘레에서 사진찍기를 하면서 꿈이나 뜻을 펼치는 분이 있으리라 봅니다. 사진이라는 문화를 빛내고 사진이라는 예술을 살찌우며 사진이라는 열매를 거두자면, 시골마을에서는 할 수 없고 큰도시에 깃들어야 한다고 여길 만할 테니까요.

 사진삶을 일구려는 이들은 으레 서울로 모이고, 서울에서도 강남으로 모입니다. 으레 뉴욕이나 파리를 꿈꾸며, 때로는 베를린이나 도쿄를 찾습니다. 런던이나 산티아고로 발길을 옮기는 이도 있겠지요. 암스테르담이나 오슬로를 찾아가는 사람도 있을 테고요.

 사진빛을 보듬고자 고흥이나 통영이나 고성이나 문경이나 부여에서 살림집을 건사하면서 살아가는 이는 쉬 찾아보지 못합니다. 사진길을 걷고자 군산이나 김해나 밀양이나 상주나 홍천이나 횡성에서 뿌리를 내리며 마을 이웃을 사귀려는 이는 좀처럼 만나지 못합니다.

 사람이 찍는 사진이고, 사람을 찍는 사진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찍는 사진이며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찍히는 사진입니다. 내 삶과 네 삶이 어우러지는 사진입니다. 내 꿈과 네 꿈이 어울리는 사진입니다. 내 사랑과 네 사랑이 하나되는 사진이에요.

 천경우 님 사진책 《Photographs》(IANN,2011)를 들여다봅니다. 뿌옇게 보이는 사진마다 어떤 이야기가 담겼을까 하고 가만히 헤아립니다. 천경우 님이나 다른 예술비평가가 적바림한 글을 읽지 않고서는 이 사진을 읽어낼 수 없을까 하고 곱씹습니다. 천경우 님은 당신 사진책 이름을 ‘Photographs’라고 붙이는데, 사진을 보여주는 사진이기에 사진책 이름이 이와 같은지, 사진은 사진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사진책 이름이 이러한지, 사진으로는 사진을 할 수밖에 없어서 사진책 이름을 이렇게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은 사람들과 함께하는가요. 사진은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나는가요. 사진은 사람이 빚어서 사람이 즐기거나 누리는가요.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르게 살아가며 다 달리 사진을 누립니다. 《Photographs》 또한 다 다른 사람들 다 다른 삶에 따라 태어난 다 다른 사진책 가운데 하나예요. 더 돋보이지 않으며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더 눈부시지 않으며 좀 어수룩하지 않습니다. 더 빛나지 않으며 썩 모자라지 않습니다. 그저 천경우 님 삶·넋·말만큼 길어올린 이야기가 담긴 사진책 하나입니다.

 내가 대학교 사진학과를 다녔다면, 내가 나라밖에서 사진을 배웠다면, 내가 내 사진을 ‘사진 주류한테든 비주류한테든 알리려고 서울에서 사진잔치를 연 적이 있다’면, 내가 내 사진을 서울에 있는 미술관이나 전시관이나 박물관에 팔았다면, 내가 내 사진을 나라밖으로 알리려고 힘썼다면, 나도 천경우 님처럼 사진을 했을는지 모르지만, 나는 대학교를 다니지 않았고, 사진강의를 듣지 않았으며, 나라밖 사진잔치를 열지 않았습니다. 오직 내가 살아가는 작은 골목동네와 시골마을에서 사진잔치를 조그맣게 엽니다. 내가 찍은 내 사진은 나한테 사진으로 찍힌 이들한테 나누어 줍니다. 나는 내가 찍은 사진을 챙기거나 간직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사진은 예술이 되어야 하나요. 사진에는 어떠한 이야기를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삶을 일구면서 담아야 하는가요.

 나는 내 삶이 좋습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합니다. 나는 내 삶에 따라 내 사진을 누립니다. 이제 곧 동이 트겠군요. (4344.10.13.나무.ㅎㄲㅅㄱ) 



― Photographs (천경우 사진,IANN 펴냄,2011.6.10./2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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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걷이철 책읽기


 동백마을 이장님 댁에서 이틀째 묵는다. 새벽 세 시에 “비가 오네. 들깨 덮어야겠소.” 하는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깬다. 이장님과 아주머님 두 분이 일어나서 바깥으로 바삐 나가신다. 나도 퍼뜩 일어나서 뒤따른다. 오는지 마는지 소리조차 없는 듯한 실비가 조금 내린다. 말리려고 널어 놓은 들깨를 셋이 함께 덮는다. 엊저녁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는데 비가 오기는 온다.

 어제 도화면 지죽리까지 돌아보고 돌아오는 길, 동호덕마을 할배와 할매 두 분이 햇볕에 말린 나락을 푸대에 다시 담아 경운기에 싣는 모습을 본다. 세 시간 남짓 자전거를 몰았기에 다리가 많이 지쳤지만, 할배와 할매를 스친 자전거머리를 돌린다. 경운기 뒤쪽에 자전거를 세운다. “경운기에 실으시지요? 제가 거들게요.” 할배하고 둘이서 나락푸대를 경운기에 싣는다. 할배는 일흔은 훌쩍 넘으신 듯한데 기운을 퍽 잘 쓰신다. 할배가 이만큼 기운을 쓰지 못한다면 경운기에 나락푸대를 실을 수도 없을 테지만, 경운기에 실어 댁으로 돌아간 다음 갈무리하지도 못할 테지. 아니, 나락논을 돌보려면 기운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흥군 도화면 신호리 동백마을뿐 아니라 이웃마을 모두, 시골마을 어디나 가을걷이철이 되어 몹시 바쁘다. 나도 새 보금자리 찾으러 다니느라 바쁘다 할 만하지만, 요 며칠은 집임자하고 계약을 한다며 집임자가 언제 오나 기다리기만 했다. 집임자는 끝내 시골집까지 안 오고 전화로만 이야기한다. 한 번 떠난 고향마을에는 다시 찾아오고 싶지 않을까. 당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흙으로 돌아가 없는 고향마을에는 어쩐지 다시 찾아올 만한 마음이 들지 않을까. 도시에서 해야 하는 일이 몹시 바쁘며 빠듯하기 때문에 쉽사리 찾아들 수 없을까.

 도시에서 학원 강사 노릇을 하는 옆지기 동생은 강사 노릇뿐 아니라 다른 공부까지 하느라 언제나 밤이 깊을 무렵 집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옆지기 동생만 이러하지는 않다고 느낀다.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거나 배움자리를 찾아다니는 누구나 새벽 일찍 집을 나설 테고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오겠지. 나는 인천에서 살던 때, 인천에서 서울로 일하러 가느라 새벽 아주 일찍 부산을 떨어 지옥철을 탔다가, 저녁에 파김치가 된 몸으로 오징어떡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참 많이 보았다. 이들 도시내기 회사원과 공무원한테 가을이 있으려나. 가을걷이가 있으려나. 가을걷이로 바쁜 흙일꾼 비지땀을 느낄 가슴이 있으려나.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로 떠난 다음 도시에서 튼튼히 뿌리를 내린 딸아들은 시골마을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해마다 가을이면 부지깽이한테조차 일을 거들라 할 만큼 힘에 부치고 바쁜 줄 느낄 겨를이 있을까 궁금하다. 이 바쁜 틈에 마을 이장님네 아주머니는 손자한테 보내준다고 잘 익은 단감을 따서 갈무리하고 김치를 함께 싸서 서울로 보낸다. 나는 옆에서 감 갈무리를 조금 거들고는 감알 셋 얻는다. 다쳐서 보내지 않고 이곳에서 먹을 감알 가운데 셋을 골랐더니, 이잠님네 아주머니는 서울로 보내려던 예쁜 감알을 셋 골라 얹어 주신다. 옆지기와 두 아이 몫으로 두 알씩 생긴다.

 가을은 책을 읽는 철일 수 있을 테지만, 먼저 가을걷이를 하고 나서 책을 읽는 철이 된다. 가을걷이를 모두 마치고서야 비로소 종이책을 읽는 철이 된다. 가을걷이가 있기에 책이 있고, 가을걷이를 하는 사람들은 온몸에 나락내음과 풀내음과 흙내음이 짙게 배는 책읽기를 한다. (4344.10.1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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