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럼피우스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60
바버러 쿠니 글, 그림 | 우미경 옮김 / 시공주니어 / 199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을 사람답게 돌보는 말 한 마디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56] 바버러 쿠니, 《미스 럼피우스》(시공주니어,1996)



 아이와 그림책을 함께 읽기 앞서 어버이 스스로 좋아하는 그림책을 읽습니다. 어버이부터 스스로 좋아할 만한 그림책이 되지 않는다면 아이한테 보여줄 만한 그림책이 되지 않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이럭저럭 나쁘지 않다 싶은 그림책이라고 여긴다면, 이 그림책은 아이한테도 이럭저럭 나쁘지 않다 싶은 그림책이 돼요. 어버이부터 그닥 재미나지 않다고 여기는 그림책 가운데 아이가 재미나다 여길 만한 그림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버이가 재미나다 여기는 그림책 가운데 아이가 따분하다 여길 만한 그림책도 있겠지요.

 아이한테만 읽힐 그림책이란 없습니다. 아이만 재미나게 보아도 될 그림책이란 없습니다. 교육 효과가 높다는 그림책이란 없습니다. 지식을 쌓아 준다는 그림책이란 없습니다.

 어떠한 그림책이건 아이한테 삶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좋은 삶이 되든 궂은 삶이 되든, 아이한테 삶으로 스며드는 그림책입니다. 이 그림책을 어른이 펼치거나 집어들면 어른한테 삶으로 스며듭니다. 아이도 어른도 삶으로 스며들도록 받아들이는 그림책입니다. 지식으로 삼는다거나 교훈으로 여긴다거나 정보로 살피는 그림책이란 없습니다.

 곰곰이 따질 수 있다면, 아이한테 영어 그림책을 읽히는 일은 한국사람한테 몹시 두렵습니다. 중국사람이 중국 아이한테 영어 그림책이나 한글 그림책을 읽힐까요. 일본사람이 일본 아이한테 영어 그림책이나 한자 그림책을 읽힐까요.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힐 때에는 그림책에 담긴 줄거리와 그림에다가 말을 함께 가르치는 셈입니다. 아이와 어른은 그림책 줄거리를 살피고, 그림책 그림결에 익숙해지며, 그림책 말마디에 혀가 맞추어집니다.

 나는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어 줄 때에 그림책에 적힌 그대로 읽지 않습니다. 언제나 글을 고쳐서 읽습니다. “머나먼 세계로 갈 거예요”는 “머나먼 나라로 가겠어요”로 고쳐서 읽습니다. “대답해요”는 “말해요”나 “이야기해요”로 고쳐서 읽습니다. “하지만”은 “그렇지만”이나 “그러나”로 고쳐서 읽습니다. “해낸 거예요”는 “해냈어요”로 고쳐서 읽습니다. “학교 근처에도 뿌렸어요”는 “학교 옆에도 뿌렸어요”로 고쳐서 읽습니다. “우리 집 정원”은 “우리 집 꽃밭”으로 고쳐서 읽습니다. “허리가 다시 쑤시기 시작했고”는 “허리가 다시 쑤셨고”로 고쳐서 읽습니다. “천국의 새”는 “하늘나라 새”로 고쳐서 읽습니다. “피곤해 보이는군요”는 “힘들어 보이는군요”로 고쳐서 읽습니다. “한 어촌의 촌장”은 “바닷마을 지기”로 고쳐서 읽습니다. “재스민 향기”는 “재스민 내음”으로 고쳐서 읽습니다. “일을 했던 거예요”는 “일을 했어요”로 고쳐서 읽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는 “아침에 일어나 손(과 낯)을 씻고”로 고쳐서 읽습니다. “하늘 색깔을 칠하기도”는 “하늘 빛깔을 그리기도”로 고쳐서 읽습니다. “빨간 꽃들이 피어 있지요”는 “빨간 꽃들이 피었지요”로 고쳐서 읽습니다. “현관 계단”은 “문간 계단”으로 고쳐서 읽습니다. “빙 둘러 있는 바위”는 “빙 두른 바위”로 고쳐서 읽습니다.

 그림책 《미스 럼피우스》를 함께 읽으면서, 이밖에도 곳곳을 고치거나 손질하거나 다듬으면서 읽습니다. 네 살 아이가 네 살부터 익숙해질까 두려운 말마디이기 때문에 두 줄을 죽죽 긋고는 새 말을 적어 넣습니다. 텃밭에 씨앗을 심을 때에 씨앗을 땅에 뿌리고는 호미질을 하며 흙을 팔 수 없습니다. 골을 만들고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어 씨를 뿌린 다음 덮어야 합니다. 골은 알맞게 내야 하고 구멍은 알맞게 파야 하며 흙은 알맞게 덮어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할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 밥을 먹일 때에 뜨거운 밥이나 국을 훌훌 삼키라 할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 밥을 먹이며 딱딱한 찬거리를 자근자근 씹으라 할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 밥을 먹이며 수은이나 포르말린을 차리는 어버이란 없겠지요. 엠에스지뿐 아니라 어떠한 화학조합물이 깃들었는가를 살펴, 이러한 화학조합물이 없는 찬거리로 밥상을 마련해야 합니다. 먹을거리가 내 몸을 살찌운다면, 아이와 읽는 그림책은 아이와 어버이 마음을 살찌웁니다. 마음을 살찌우는 책은 마음을 나란히 살찌우는 말로 읽으며 받아들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그림책에 ‘바이바이’나 ‘안녕’이라 나온대서 이대로 읽으면 아이는 ‘바이바이’나 ‘안녕’이라는 말을 익힙니다. 그림책에 ‘잘 가’라 나오기에 이대로 읽으면 아이는 ‘잘 가’라는 말을 익힙니다.

 말은 지식이 아닌 삶입니다. 아이가 살아가며 생각하는 모든 꿈과 보람과 땀이 깃드는 말입니다. 아이하고 ‘밥을 먹’지 아이하고 ‘식사할’ 수 없어요. 아이하고 ‘책읽기’를 하지 아이하고 ‘독서’를 하지 않습니다.

 아이한테는 영어 그림책을 읽힐 수 없습니다. 아이가 나중에 스스로 영어를 배우고 싶을 때라든지, 아이가 참말 영어를 배워 ‘영어로 된 문학과 예술과 사회와 역사’를 알고 싶다 할 때에 비로소 영어 그림책을 읽도록 할 노릇입니다. 아이가 참말 숱한 지식을 배워서 온누리 수많은 사람들 삶자락을 헤아리고 싶다 할 때에 지식 그림책을 읽도록 할 노릇입니다.


.. 저녁이면 앨리스는 할아버지 무릎에 올라앉아서 머나먼 세상 이야기를 들었어요. 할아버지 이야기가 끝나면 앨리스는 “나도 어른이 되면 아주 먼 곳에 가 볼 거예요. 할머니가 되면 바닷가에 와서 살 거고요.” 했대요. 할아버지는 “그래, 아주 좋은 생각이야, 얘야. 그런데 네가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구나.” 했대요. 앨리스는 “그게 뭔데요?” 하고 물었지요. 할아버지는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지.” 했어요. 앨리스는 “알았어요.” 하고 대답했지만, 그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몰랐대요 ..  (9쪽)


 그림책 《미스 럼피우스》는 ‘럼피우스 할머니’ 이야기입니다. 시집을 안 가고 혼자 살아오셨기 때문에 럼피우스 할머니한테 ‘미스’라고 붙였구나 싶은데, 영어를 쓰는 나라이니 ‘미스 럼피우스’이지, 한국사람한테는 한국말로 ‘럼피우스 할머니’라고 해야 올바릅니다. 어릴 때에는 ‘럼피우스 어린이’이고, 스무 살을 넘길 무렵에는 ‘럼피우스 씨’입니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씨’예요.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럼피우스 아주머니’라 할 만합니다.

 시집을 안 간 여자한테 ‘아주머니’라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데, 장가를 안 간 남자한테는 ‘아저씨’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예부터 이와 같이 말을 했다는데,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짝을 이루는 낱말인 줄 헤아린다면, ‘아저씨’는 장가 안 간 남자한테도 일컫는 이름이고, ‘아주머니’는 시집을 안 간 여자한테는 일컬을 수 없다면 어딘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가씨와 할머니 사이 여자’는 무어라 일컬어야 할는지요.

 《미스 럼피우스》에서는 ‘미스 럼피우스’와 ‘럼피우스 부인’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한자말 ‘夫人’을 쓰는데, ‘부인’이라는 한자말 또한 “시집을 간 다른 집 여자를 일컫는 이름”일 뿐입니다. 이러한 말뜻을 헤아린다면 ‘럼피우스 부인’이라는 이름 또한 잘못 쓰는 말마디예요. 럼피우스 씨는 시집을 안 갔으니까 ‘부인’이라 일컬을 수 없거든요.

 나이 흐름을 살펴, 한창 젊은 나이인 럼피우스한테는 ‘럼피우스 씨’라 하고, 나이가 들었을 때에는 ‘럼피우스 아주머니’라 하며, 퍽 늙었을 때부터는 ‘럼피우스 할머니’라고 해야 올바릅니다.


.. 우리 고모할머니 미스 앨리스 럼피우스는 만년설이 덮여 있는 높은 산봉우리들도 올랐고, 정글을 뚫고 지나기도 했고, 사막을 횡단하기도 했어요. 사자가 노는 것도 보았고, 캥거루가 뛰어다니는 것도 보았고요. 그리고 어디를 가든, 결코 잊을 수 없는 친구들을 사귀었대요 ..  (16쪽)


 아이가 잠자리에 들기 앞서 어머니가 아이하고 나란히 누워서 《미스 럼피우스》를 읽습니다. 어머니는 책에 적힌 대로 읽습니다.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렇게 읽어 주면 안 되겠다’고 느껴 책에 적힌 글줄을 모두 뜯어고칩니다(이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아이한테 읽어 주기 앞서 그림책 글을 다 고쳐 놓아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아이도 아이라 하겠으나, 어머니도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 모두 저마다 옳고 바르게 살아가면서 옳고 바르게 생각하도록 이끌 옳고 바른 말에 익숙해야 아름다울 테니까요. 그림책 《미스 럼피우스》가 이냥저냥 한두 번 슥 훑고 지나칠 만한 책이라면 구태여 글줄을 뜯어고칠 까닭이 없습니다. 그림책 《미스 럼피우스》를 한두 번 얼추 훑고는 책꽂이 아무 데나 꽂고 두 번 다시 꺼낼 일이 없다면 애써 글줄을 뜯어고치지 않아도 됩니다.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열 번 스무 번 거듭 읽으며 찬찬히 새길 만하다고 느낀다면 글줄을 낱낱이 짚으면서 찬찬히 가다듬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린 럼피우스한테 할아버지는 꼭 한 가지 꿈을 들려주었거든요. “온누리를 아름답게 하는 일을 해 다오.” 하고. 할머니 럼피우스가 된 뒤에 어린 아이들을 둘레에 앉히고는 “아이들아, 너희들은 앞으로 온누리를 아름답게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다오.” 하고 이야기합니다.

 아름다운 삶을 사랑하기에, 아름다운 말을 사랑합니다. 아름다운 사람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꽃피우고 싶기에, 아름다운 말로 아름다운 넋을 일구고 싶습니다.


.. 미스 럼피우스는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남아 있어. 난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할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해.” 했어요. 그렇지만 어떻게? 미스 럼피우스는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했어요. “세상은 벌써 아주 멋진걸.” ..  (18쪽)


 아이가 어머니 몸에서 천천히 자라는 동안, 아이가 어머니 몸에서 바깥 누리로 나온 뒤, 아이가 무럭무럭 크면서 씩씩하게 뛰노는 요즈음, 아이한테 바라거나 들려주는 이야기는 꼭 하나입니다. 착하고 참다우며 곱게 살아다오.

 착한 사람으로 살고, 참다운 사람으로 살며, 고운 사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착한 마음과 참다운 마음과 고운 마음을 건사하기를 바랍니다. 착하게 살면서 가난할 수 있고 가멸찰 수 있습니다. 참다이 살면서 수수할 수 있고 이름을 드날릴 수 있습니다. 곱게 살면서 조용할 수 있고 떵떵거릴 수 있습니다. 어떤 모습이건 대수로울 수 없습니다. 어떤 모습이건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결을 아낄 줄 알아야 합니다. ‘또다른 김연아’라든지 ‘또다른 박세리’ 같은 꿈이란 꿈이 아니라 돈바라기나 이름바라기입니다. 아이는 기계가 아닙니다. 아이는 노리개가 아닙니다. 아이는 나와 마찬가지로 고운 목숨입니다. 내 어버이가 나한테 고운 목숨을 선물해 주었듯이 나는 내 아이한테 고운 목숨을 선물해 줍니다. 내 어버이가 나를 고운 사랑으로 돌보며 함께 살았듯이 나는 내 아이를 고운 사랑으로 보살피며 함께 살아갈 뿐입니다.


.. 언덕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미스 럼피우스는 탄성을 질렀어요. “정말 믿어지지가 않아!” 언덕 너머에는 푸른빛, 보랏빛, 장밋빛 루핀 꽃들이 가득했던 거예요! 미스 럼피우스는 기쁨에 가득 차서 무릎을 꿇었어요. “바람이야! 바람이 우리 집 정원에서 여기까지 꽃씨를 싣고 온 거야! 물론 새들도 도왔겠지!” ..  (22쪽)


 럼피우스 할머니는 당신 할아버지가 들려준 한 마디를 내내 떠올리며 살았습니다. 어린 날부터 할머니가 되는 날까지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할아버지 말씀’인데, 럼피우스 당신이 당신 할아버지만 한 나이가 될 무렵 바야흐로 ‘할아버지 말씀’을 온몸으로 깨우칩니다. 똑똑하다면 누구 못지않게 똑똑한 럼피우스 할머니요, 슬기롭다면 누구 못지않게 슬기롭다 할 만한 럼피우스 할머니인데, 삶이란 머리를 굴리는 앎이나 슬기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몸소 부딪히고 스스로 부대끼면서 천천히 받아들입니다.

 하루아침에 깨우칠 이야기란 없습니다. 한꺼번에 받아들일 삶이란 없습니다.

 아이는 한두 해만에 어른이 되지 않습니다. 어른이라 해서 한두 해만에 부쩍 자라지 않습니다. 네 살 어린이는 네 살 어린이답게 살아가며 큽니다. 마흔 살 어른은 마흔 살 어른답게 살아가며 큽니다. 여든 살 할매 할배라면 여든 살 나이에 걸맞게 이제껏 몸으로 복닥인 나날을 온몸에 아로새기겠지요.

 사람을 사람답게 돌보는 말 한 마디는 ‘아름다움’입니다. ‘착함’이고 ‘참다움’입니다. 이를 한자말로 일컬어 ‘진선미’라 하는데,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살아가며 나누는 한국말은 ‘착하고 참다우며 고움(아름다움)’이에요. (4344.5.2.달.ㅎㄲㅅㄱ)


― 미스 럼피우스 (바버러 쿠니 글·그림,우미경 옮김,시공주니어 펴냄,1996.10.10./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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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05-02 16:16   좋아요 0 | URL
말은 지식이 아닌 삶입니다. 너무 너무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시집을 안 간 여자사람은 참 호칭이 애매하네요^^;

파란놀 2011-05-02 16:42   좋아요 0 | URL
장가를 안 간 남자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우리 말로는 예부터 "아무개"라 하거나 "아무개 씨"라 했으니,
이대로 하면 되는데, 그냥 영어로 "미스 아무개"로 해 버리면
어른들이나 아이들이나 자꾸 헷갈리거나 길을 잃어버리지 싶어요...
 
나는 고래곶에 사는 고래라고 합니다
이와사 메구미 지음, 다카바타케 준 그림, 황부겸 옮김 / 푸른길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파란빛 하늘과 바다를 껴안아 주셔요
 [책읽기 삶읽기 55] 이와사 메구미·다카바타케 준, 《나는 고래곶에 사는 고래라고 합니다》(푸른길,2004)


 온누리에는 책이 참 많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책이 태어나기 때문에 날마다 새로운 책이 늘어나며 온누리 책은 날마다 북적북적 넘칩니다.

 수없이 늘어나는 책을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모조리 읽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새로 태어나서 나중에 스스로 책을 읽을 무렵이 될 때에는 ‘일찌감치 판이 끊어져 새책방에서 찾아볼 수 없는’ 책이 있습니다. 도서관에서는 갖춘다 하지만, 서울에 있는 커다란 도서관 빼고는 안 갖추는 책이 많습니다. 부산, 인천, 대구, 대전, 제주에 있는 도서관에서도 모든 책을 샅샅이 갖추려 하지는 않으니까요. 아니, 이 나라 모든 도서관은 한국땅 모든 책을 1권씩이라도 알뜰히 건사할 만큼 돈이나 시설이나 일꾼이 없다고들 합니다.

 날마다 새로 나오는 책들은 어떠한 빛과 소금을 담는지 헤아려 봅니다. 부질없이 나오는 책이란 없겠지요. 쓰잘데없이 종이쓰레기를 빚는 책 또한 없겠지요. 그러면, 종이에 글을 찍는 책이라면 하나같이 사랑할 만하거나 아낄 만하거나 돌아볼 만하다 할 수 있을까요.


.. 파란색을 정말 좋아하는 고래 선생님은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를 보며, ‘아, 행복해. 이런 곳에서 태어나 살 수 있다는 건 정말 축복이야.’라고 생각했습니다 ..  (6쪽)


 《나는 고래곶에 사는 고래라고 합니다》(푸른길,2004)라고 하는 책을 집어들어 읽습니다. 옆지기가 고래를 좋아하기 때문에 ‘고래곶’과 ‘고래’라는 이름에 끌려 집어듭니다. 아마, 고래를 좋아하는 다른 분들도 책이름에 두 차례 나오는 ‘고래’라는 이름에 끌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 앞머리에 나오는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를 보며” 참으로 즐겁다고 느끼는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곧이어, ‘품격이라는 뭔가는 참으로 뭔가 있기나 한가’ 하고 곰곰이 생각한다는 대목에도 밑줄을 긋습니다.

 너른 바다를 누비는 고래라 한다면, 파란 바다와 파란 바다가 좋겠지요. 품격이니 격식이니 하는 틀이나 껍데기에 얽매이지 않을 테지요. 사람들처럼 성적표라든지 졸업장이라든지 매달리지 않겠지요.

 아파트가 없어도 되는 고래이고, 자가용이 없어도 되는 고래입니다. 훈장이라든지 기관총이라든지 파티복이라든지 전투기라든지 없어도 되는 고래예요.

 고래는 바다에서 살아가며 바닷것을 먹고 바다에 똥오줌을 눕니다. 고래처럼 큰 덩치가 바다에 똥오줌을 누며 살지만, 고래 똥오줌 때문에 바다가 더럽혀진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합니다. 고래 못지않게 덩치가 큰 상어가 누는 똥오줌 때문에 바다가 더럽혀진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없어요. 오직, 사람이 누는 똥오줌 때문에 온 들판과 물과 하늘과 흙과 바다가 더러워집니다. 사람이 누리는 물질문명 때문에 온 하늘과 바다가 더러워집니다.


.. “저, 아무래도 고래 선생님은 엄청나게 큰 몸집으로 보나 품격으로 보나, ‘고래 씨’라든가 ‘구지에몬 씨’라고 부르는 것은 어쩐지…….” 고래 선생님이 품격이 대체 뭘까 생각하고 있는데, 펠리컨이 다시 말했습니다 ..  (14쪽)


 이야기책 《나는 고래곶에 사는 고래라고 합니다》는 고래들이 벌이는 ‘올림픽’을 보여줍니다. 물뿜기를 겨루고, 다른 바닷짐승이 펼치는 놀이를 보여줍니다. 치고 받으며 다투기보다는 어깨동무하면서 사이좋게 어울리는 삶을 보여줍니다. 보드라운 이야기요, 따사로운 이야기입니다.

 다만, 책을 덮기까지 두 군데 말고 더 밑줄을 긋지 못합니다. 새삼스레 들여다보거나 가만히 되짚을 만한 대목이 보이지 않습니다.

 나쁘거나 얄궂은 이야기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만 한 이야기책까지 굳이 한국땅에서 책으로 내놓아야 하는지 아리송합니다. 한국땅에서 한국 삶터를 돌아보면서 한국 아이들한테 살가이 이야기꽃을 피울 만한 마음그릇이 있는 한국 글쟁이는 없을까 궁금합니다.

 파랗디파란 하늘을 가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수하게 이야기꽃을 피우면 좋겠습니다. 파랗고파란 바다를 끝없이 아끼는 넋으로 조촐히 이야기마당을 열 수 있으면 고맙겠습니다. 더 작게 생각하고, 더 작게 바라보며, 더 작게 살아갈 때에 한결 애틋하면서 살가운 이야기꿈을 펼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4344.5.1.해.ㅎㄲㅅㄱ)


― 나는 고래곶에 사는 고래라고 합니다 (이와사 메구미 글,다카바타케 준 그림,황부겸 옮김,푸른길 펴냄,2004.7.12./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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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성문 2


 책으로는 훌륭한 소리로 진보와 평화와 평등을 외치지만, 막상 집에서는 가부장 권력을 휘두르는 이는 ‘진보’인가 ‘남녀평등주의’인가 ‘평화운동’인가.

 자격증과 졸업증을 바랄 뿐 아니라, 이런 종이쪽이 없으면 벼랑으로 내몰기 때문에, 반성문이든 사상전향서이든 무어든 자꾸자꾸 글로 권력과 폭력을 휘두른다. (4344.4.3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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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성문 1


 ‘사상전향서’란 얼마나 끔찍한 폭력인가. 그러나, 이런 종이쪽을 썼대서 생각이 바뀌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저 이런 종이쪽은 사람을 얽어매려는 쇠사슬이다. 주민등록증에 붉은 줄을 긋고는 한 사람을 ‘죽을 때까지 죄인으로 손가락질’하는 셈하고 마찬가지이다.

 반성문이란 참으로 쓸데없는 종이쪽이자 모진 폭력이다. 그러나, 이 종이쪽을 써야 비로소 뉘우쳤다고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다. 글은 그럴싸하게 쓰면서 삶은 엉터리라면 반성문이란 무슨 뜻인가? 기록? 자료? 졸업장이나 자격증이 한 사람 ‘성적’이나 ‘재주’를 보여주지 않듯이 반성문이란 어느 한 사람 삶을 뉘우친 자국이 될 수 없다. 오로지 이 한 사람이 살아온 나날과 부대낀 나날이 온삶과 온사랑으로 ‘뉘우침글’이 된다.

 반성문 없이 옳고 바르게 살아갔으나 반성문을 안 썼으니까 나쁜 사람이라며 손가락질하거나 깎아내리거나 떠들어도 되는지 궁금하다. 시인 신동엽 님은 일제강점기에 쓴 ‘平山八吉’이라는 창씨개명을 놓고, 시인 이원수 님은 일제강점기에 쓴 친일시를 놓고, 따로 반성문을 쓰지 않았다. 반성문이란 삶으로 보여줄 노릇이지, 글로 적바림한대서 뉘우침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종이쪽이 아닌 온몸에 아로새긴 뉘우침글을 읽어야 사람과 삶과 사랑을 읽을 수 있다. (4344.4.3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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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쓴 글과 읽는 글


 모든 사람이 모든 글을 옳게 쓰지는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글을 옳게 읽지는 않습니다. 나이가 어리기에 글을 옳게 못 쓰거나 글을 옳게 못 읽지 않습니다. 나이가 있기에 글을 옳게 쓰거나 글을 옳게 읽지 않습니다.

 학교를 오래 다녔거나 책을 많이 읽었기에 글을 옳게 쓰거나 글을 옳게 읽지 않습니다. 학교를 적게 다니거나 못 다녔거나 책을 조금 읽었거나 못 읽었기에 글을 옳게 못 쓰거나 글을 옳게 못 읽지 않습니다.

 차라리 어린이라면 나중에 글을 옳게 쓰거나 글을 옳게 읽을 수 있겠거니 생각할 만합니다. 그러나 어린이일 때에도 글을 옳게 쓰거나 글을 옳게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글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남김없이 알아듣거나 헤아려야 하지 않습니다. 이 글에 깃든 마음을 함께 느끼거나 받아들일 수 있으면 됩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들꽃과 들풀을 바라보면서 받아들이거나 느낍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밥을 먹고 국을 마십니다. 아이는 어른하고 똑같이 밥그릇을 비우지 못합니다. 아이는 어른처럼 젓가락질이나 숟가락질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이는 아이대로 젓가락질을 하고, 아이는 아이 밥통만큼 밥그릇을 비울 수 있어요.

 아이한테 어른처럼 밥그릇을 비우라거나 젓가락질을 하라고 바라거나 시킬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 어른처럼 원고지에 글을 쓰거나 사진기를 손에 쥐라 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어른한테 나무라듯 아이를 나무랄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는 아이 눈높이로 다가서야 하고, 아이한테는 아이 마음밭에 걸맞게 말을 걸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글을 쓰는 사람들이 ‘글을 읽을 사람’ 눈높이에 맞추지 않았으니까, 이 글을 못 알아듣거나 못 받아들이거나 못 느낀다 할 만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누가 이 글을 읽을까’ 하고 헤아린다면, 글이 사뭇 달리 읽히겠지요. 아니, 글을 쓰는 사람들은 ‘글을 읽을 사람’ 눈높이가 아니라 삶높이를 곱씹으면서 ‘글을 읽는 사람 삶높이가 어떠한 자리에서 어떻게 있는가’를 ‘글을 읽는 사람’ 스스로 돌이키면서 깨닫도록 도와야 합니다. 혼자 잘났다고 떠벌이는 글을 쓸 생각이 아니라면, 혼자 똑바로 잘 하면서 살아간다고 내세우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러나 언제나 걸림돌이 있습니다. 이 걸림돌이란 너무 무섭습니다. 아니, 슬프다고 해야 할까요. “꽃이 참 예뻐요.”라든지 “밥이 참 맛나요.”라든지 “물이 참 맑아요.”라든지 “하늘이 참 파래요.”라든지 “바람이 참 따스해요.”라든지 “소리가 참 고와요.”라든지 “흙이 참 보드라와요.”라 할 때에 알아듣지 못하는 슬픈 마음밭이라는 걸림돌이 있습니다.

 이 꽃이 무슨 꽃인지 꼭 이름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꼭 이름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이름이란 사람이 붙입니다. 꽃이나 나무 스스로 내가 어떤 이름이라고 밝히지 않습니다.

 이름이란 사람이 붙이기 마련이기에, ‘다른 사람이 붙인 이름’을 모르면 ‘내가 느끼는 대로 이름을 붙이’면 됩니다. 누군가 ‘개불알꽃’이라 하든 말든, 이 이름을 알든 모르든, 나는 ‘괭이불알꽃’이라든지 ‘소불알꽃’이라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누군가 ‘제비꽃’이라 하든 말든, 이름을 알든 모르든, 나는 ‘땅보라꽃’이라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땅바닥에 찰싹 달라붙듯 자그맣게 피어나는 보라빛 꽃송이인 만큼, 나는 내가 느끼는 대로 이름을 붙이면 됩니다.

 어떠한 이름이든 내가 느끼며 받아들이는 삶을 내 깜냥껏 슬기로이 곰삭이면서 사랑할 수 있으면 됩니다. 어떠한 글이든 내가 읽으며 깨달은 삶을 내 손으로 사랑하고 내 마음으로 아끼면서 좋아할 수 있으면 됩니다.

 어려운 이웃을 보았을 때, 누군가는 1억 원이라는 돈을 선뜻 내놓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1만 원을 내놓을 수 있고, 누군가는 마음속으로 비손하면서 부디 아픔과 걱정을 잊으면서 웃고 살아가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빨래를 거들 테고, 누군가는 김치 한 접시를 갖다 줄 수 있겠지요.

 만화책 《어시장 삼대째》(대명종,2010) 29권을 읽으면, 205쪽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삼대째 어시장 가게에서 일하는 ‘마사’라는 사람이 어린 날 당신 아버지한테 “아버지, 왜 같은 전갱인데 저렇게 분류를 하는 거야?” 하고 여쭙니다. 마사네 아버님은 “그건 말이다. 같은 전갱이라도 맛이 다르기 때문이지.” 하고 웃으면서 이야기합니다.

 누군가한테는 다 똑같은 전갱이일 테지요. 그런데 누군가한테는 다 똑같은 ‘물고기’입니다. 누군가한테는 다 다른 ‘전쟁이’이고요.

 이오덕 님이 쓴 책을 마흔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송건호 님이 쓴 책을 스무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리영희 님이 쓴 책을 열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남주 님이 쓴 시집을 열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권정생 님이 쓴 동화책을 열다섯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원수 님이 쓴 동화책이나 동시책을 서른 가지쯤 읽은 사람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누군가는 한 권만 읽어도 ‘아무개를 다 알았다’고 하겠지요. 누군가는 이오덕이든 송건호이든 리영희이든 김남주이든 권정생이든 이원수이든 다 똑같은 ‘책’이라 하겠지요. 그리고, 누군가한테는 한 사람이 내놓은 책마다 다 다른 삶과 이야기가 깃들고, 같은 책 한 권일지라도 이 한 권에 깃든 꼭지마다 다 다른 삶과 이야기가 배었다고 느끼겠지요.

 누군가 글을 씁니다. 누군가 글을 읽습니다. 누군가 책을 만듭니다. 누군가 책을 삽니다. 오늘도 해는 뜨고 오늘도 달이 뜨며 오늘도 바람이 불고 오늘도 햇살이 비칩니다. 오늘도 개구리는 알을 깨며 왁왁 울 테며, 오늘도 왜가리는 개구리 먹이를 찾아 이 논 저 논 누빌 테지요.

 아름다운 책은 따로 없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다운 책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따로 없습니다. 아름다운 삶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4344.4.3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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