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쪽지 2011.6.30.
 : 집일에 치이는 일꾼이 장마당 마실



- 요즈음 들어 몹시 갑갑하다고 느낀다. 둘째가 태어난 뒤로 더없이 오래도록 집일에 얽히기 때문이 아니다. 집일을 도맡기로는 첫째가 태어난 뒤로도 이와 같았다. 돌이켜보면, 집에 아이가 둘일 때에는 아이가 하나일 때보다 훨씬 고되다 할 만한데, 집일이 많고 끝없기 때문에 고되지 않다. 둘레 사람들이 집일을 너무 모르기 때문에 고되면서 갑갑하다. 내 몸이 힘들거나 벅차기에 집일을 하며 기운이 빠지지 않는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은 ‘남자가 집일을 도맡는’ 줄 생각조차 하지 않는데다가 ‘여자라 해서 집일을 더 잘 알지’ 못한다. 생태와 환경을 걱정한다는 일꾼이라 해서 집일을 더 아끼거나 사랑한다고 느끼지 못한다. 진보와 평화와 평등을 바라는 일꾼이기에 집일을 더 즐기거나 좋아하면서 얼마나 고된 한편 보람이 가득한가를 느끼지 못한다. 나로서는 말로만 읊는 남녀평등이나 여남평등은 달갑지 않다. 가사노동분담이라는 말마디도 내키지 않는다. 집안일을 나누어 할 수 없다. 집안일은 누구나 다 할 줄 알아야 한다. 집에서 살아가는 식구라면 서로서로 집안일을 해야 한다. 어른은 어른대로 하고, 아이는 아이대로 할 집일이다. 집에서 한솥밭을 먹는 살붙이라 하면서 집일을 모른다면 집식구라 일컬을 수 없다고 느낀다.

- 사람들은 왜 집일을 모를까. 사람들은 왜 집일을 헤아리지 않을까. 사람들은 왜 집일을 하찮게 여길까. 사람들은 왜 집일하고 동떨어진 채 살아갈까.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 맡아야 할 집일이다. 하루 한두 시간을 거든다든지, 서너 시간을 거든대서 집안 모양이 나아질 수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까지 꾸준히 보살피거나 건사해야 할 집일이다.

- 날마다 열두 시간은 들여야 비로소 집이 집다울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나는 날마다 열두 시간까지 들이지는 못한다. 다른 일이 있기도 하고, 집식구 밥벌이를 해야 하며, 요사이에는 살림집과 도서관을 옮겨야 하는 터라 책짐을 싸느라 집일에 알뜰히 품을 들이지 못한다.

- 애 엄마 미역국을 끓여 먹이고, 장마철 사이 살짝 하늘이 갠 때를 살펴 기저귀를 잔뜩 빨아 바깥에 넌 다음, 둘째를 씻기고 나서 장마당 마실을 생각한다. 너무 늦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자전거를 마당에 내놓고 아이를 태운 때는 네 시 반.

- 부지런히 달린다. 집으로 돌아올 때가 늦지 않도록 서둘러야 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허둥지둥 다니고 싶지는 않다. 차근차근 발판을 밟으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금왕 읍내로 가는 오르막을 달리면서, 아이가 뒤에 앉아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는다. 오르막에서 땀이 뻘뻘 나지만, 왼쪽과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푸성귀밭과 능금밭과 복숭아밭을 바라보면서, 이 밭에는 무엇이 있고 저 나무에는 무엇이 열린다고 꾸준히 이야기한다. 지날 때마다 거듭 이야기하고, 볼 때마다 새삼스레 이야기한다.

- 어느새 첫째 꼭대기에 닿다. 이제 서른일곱 나이로 아이를 수레에 태우며 다니기란 퍽 만만하지 않은데, 요즈음 한 주에 두 차례쯤 아이랑 읍내 자전거마실을 하면서 가만히 돌아보면, 처음 아이랑 다닐 때보다 한결 수월하게 잘 다닌다고 느낀다. 오르막에서 기어 넣기도 꽤 가볍다. 곧 마흔 나이가 되는데, 마흔 나이가 되더라도 자전거를 달리는 기운은 조금씩 나아질 수 있는 셈인가. 만화영화 〈알프스 소녀 하이디〉에 나오는 할아버지는 퍽 늙은 할아버지인데에도 홀로 나무를 베고 지며 갖은 일을 도맡는다.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려 하느냐에 따라 몸 또한 잘 따라오는 셈일까.

- 오르막이 힘들면 길면서 가파르다고 느낀다. 오르막이 썩 힘들지 않으면 짧으면서 판판하다고 느낀다.

- 눈으로는 앞을 보거나 뒷거울로 자동차들 움직임을 살핀다. 발로는 내가 달리는 이 길이 내 몸에 어떠한가를 느낀다. 발판이 무겁다고 느끼면 안장에서 일어나 더 힘을 낸다. 이렇게 하고도 발판이 무거우면 기어를 넣는다. 눈으로 앞을 바라볼 때에 언덕이나 오르막이라서 기어를 넣어서는 안 된다고 자꾸 생각한다. 다 아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때그때 다시금 생각한다. 언덕은 자전거 발판을 밟은 내 다리가 언덕이라고 느껴야 언덕이다.

- 뒷거울로 아이를 바라보다가 노래하며 노는 짓이 귀여워 뒷거울을 사진으로 찍어 보자고 생각한다. 흔들리기도 하지만 한두 장쯤 살릴 수 있겠지.

- 금왕 읍내를 오가자면 네찻길을 다니는 자동차가 너무 많을 뿐 아니라, 이 네찻길에서 자동차들은 ‘빨리 달리기 내기’라도 하듯 무시무시하게 달린다. 자전거 곁을 너무 아슬아슬하게 달린다. 오르막에서 기운이 빠지며 손목이 살짝 삐끗하다가 왼쪽으로 조금 꺾이면 무시무시하게 내달리는 자동차에 받힐까 걱정스럽다. 수레에 앉은 아이도 아버지가 이렇게 느끼는 줄 똑같이 느끼리라 본다.

- 금왕 읍내 장마당에서 느타리버섯과 알배추와 두부와 새우살과 양배추를 산다. 따로 더 살 먹을거리는 없다. 빵집에 들른다. 아이가 케익을 보더니 케익 노래를 부른다. 돌이켜보니, 오늘 6월 30일은 우리 식구가 인천을 떠나 시골자락으로 살림집을 옮긴 날이다. 케익을 언제 먹었는 지 생각나지 않는데, 오늘 모처럼 사 볼까.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이는 무척 졸리면서 잠을 안 잔다. 수레에서 자꾸자꾸 “케익 먹고 싶은데.” 하고 말하기에 “집에 가서 어머니하고 함께 먹어야지.” 하고 이야기한다. 몇 번 더 “케익 먹고 싶은데.” 하다가는 “케익 어머니하고 먹어요?” 하고 묻더니, 이내 “케익 집에 가서 어머니하고 먹어요?” 하고 묻는다. 오르막에서 땀을 비오듯 쏟는데, 이때에도 아이는 다시금 묻는다. 물이 되어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로 범벅이 된 얼굴은 아마 시뻘겋겠지. 헉헉대는 숨을 몰아쉬다가 살살 고르며 “집에 가면 어머니하고 먹을 수 있으니까 조금만 참아 주셔요.” 하고 말한다.

- 마을 어귀에 들어서다. 비닐을 씌우지 않은 감자밭은 장마비에 흙이 다 쓸리면서 감자가 다 죽고 만 듯하다. 비닐을 씌운 곳은 장마비에도 흙이 쓸리지 않는 듯하다. 이제 시골마을에서는 비닐을 안 쓰면 흙을 일굴 수 없을까.

- 집에 닿다. 두 아이를 씻기고 나서 아버지도 씻는다. 밥상을 차리느라 부산을 떠는데, 아이는 케익을 먹고프다며 끝없이 노래를 부르고 케익 상자를 만지작거리다가 그만 케익을 엎는다. 아버지는 아이를 꾸짖고, 아이는 서럽게 운다. 밥상을 다 차리고 나서 밥을 먼저 먹은 뒤 케익을 먹는다. 케익을 먹는 모습을 바라보니 언제 울었느냐는 듯한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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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요리사 112
우에야마 토치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요리’ 만화보다 재미난 만화
 [만화책 즐겨읽기 50] 우에야마 토치, 《아빠는 요리사 (112)》(학산문화사,2011)



 만화책 《아빠는 요리사》는 틀림없이 ‘요리’ 만화입니다. 요리하는 사람들 삶을 차근차근 보여주는 요리 만화입니다. 어느덧 112권이 나온 《아빠는 요리사》인데, 112권을 읽으면서 112권으로 끝날 일이 없겠다고 느낍니다.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가 참 많구나 하고 느낍니다.

 온누리에는 온누리 나라와 겨레와 마을과 살림집만큼 요리 가짓수가 많습니다. 어느 만화책이든 요리책이든 온누리 온갖 요리를 다룰 수 없어요. 이 만화를 그리는 우에야마 토치 님이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그린다면, 조금이나마 건드리려 한달 수 있겠지요.

 온누리에는 온갖 요리가 있습니다. 온누리 온갖 요리에는 온갖 이야기가 깃듭니다. 온누리 숱한 사람들이 마련하며 즐기는 온갖 요리는 꼭 한 번만 마련해서 즐기지 않습니다. 열 번 백 번 천 번 다시 만들거나 새로 만들어 즐깁니다. 같은 요리라 하더라도 즐길 때마다 맛과 멋과 느낌과 마음과 사랑과 꿈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같은 요리를 다시 하더라도 같은 이야기가 태어나지 않아요. 어떠한 요리 만화라 하더라도 이와 마찬가지인데, 똑같은 요리만 다루면서 100권을 그릴 수 있습니다. 똑같은 요리를 하는 백 사람이나 천 사람 이야기를 가만히 돌아볼 수 있으면, 100권뿐 아니라 200권도 그릴 수 있어요.


- “이 가게는 나폴리 피자 협회의 인정을 받았대요.” “호오, 맛있을 만하네. 그런데 카에데, 그 얼굴은 사랑에 빠졌구나.” (7쪽)
- “우리도 슬슬 가 볼까?” “예.” “남자는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품으로 돌아가는 거야.” (114쪽)
- “또 할머니가 생각나셨나 봐. 할머니도 대구포 크로켓을 자주 만드셨거든.” (158쪽)



 가슴속으로 피어나는 사랑이 있을 때에 먹는 밥이랑, 가슴속에 슬픔이 가득할 때에 먹는 밥은 다릅니다. 일이 많아 지치거나 고단할 때에 먹는 밥하고, 일이 없어 한갓지거나 힘들 때에 먹는 밥은 다릅니다. 혼자 차려서 먹는 밥과, 아이한테 차리는 밥과, 내 어버이한테 차리는 밥은 달라요.

 한국사람이 날마다 먹는다는 밥 하나를 놓고도, 흰밥으로 할 때하고 누런밥으로 할 때하고 갖은 곡식을 넣을 때하고 콩을 넣을 때하고 감자를 넣을 때하고 옥수수를 넣을 때하고 고구마를 넣을 때하고 쑥을 넣을 때하고, 언제나 다릅니다.

 살림돈이 바닥나는 힘든 나날 먹는 밥이랑, 살림돈이 넉넉할 무렵 먹는 밥은 같지 않습니다. 이웃한테 떡을 돌릴 때라든지, 내가 이웃한테 떡을 돌릴 때는 같을 수 없어요. 내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처음으로 밥을 혼자 차려 내놓을 때에도 똑같은 밥과 반찬을 올렸달지라도 같을 일이 없겠지요.

 요리 만화이기에 요리를 다룹니다. 그렇지만, 요리 만화이기에 요리를 잘 다루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요리 만화는 가장 한복판에 놓는 이야기가 요리가 되어야 한다고 여길는지 모르지만, 가만히 살피면 ‘요리 이야기는 변죽이나 양념이나 고명’이 되고, 가장 한복판에 놓는 이야기는 ‘밥을 차려서 먹는 사람들 살아가는 나날’이 된다고 느껴요.


- “마모루 씨, 축하합니다.” “응? 아, 고마워.” “표, 표정이 아주 근사했어요.” “엇, 내가?” “예, 히토미 씨도.” “그래?” “아이가 태어난다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 “응, 글쎄, 아직 실감이 안 나는데, 세상이 전혀 다르게 느껴져.” “세상이 말인가요?” “응.” “뭐랄까. 모든 것에 의미가 있어. 내가 있는 것, 걷고 있다는 것, 풀이 자라고, 꽃이 피어 있는 것, 벌레가 있고, 새가 날아다니는 것, 산이 있는 것, 노을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는 걸 알았어. 그게 기뻐.” (28∼31쪽)


 《아빠는 요리사》(학산문화사,2011) 112권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112권째에는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맺은 빛나는 선물인 아기가 태어나는 이야기가 하나 나옵니다. 26∼27쪽에서 아기 아버지가 갓난쟁이를 품에 안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야말로 눈물겨운 대목인데, 아버지가 아기를 안기 앞서 아기를 어머니 곁에 눕힙니다. 일본에서는 아주 마땅히 하는 모습이에요. 한국에서는 웬만한 거의 모든 병원에서 이렇게 안 하는 모습이고요. 한국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병원에서 따로 ‘아기방’에 아기를 가둡니다. 어머니하고 떨어뜨려요. 갓난쟁이는 어머니 뱃속에서 바깥으로 나온 다음 무엇보다도 어머니 따스한 품을 바라는데, 한국 병원에서는 아기가 무엇을 바라고 아기 어머니 몸이 어떠한가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기 아버지가 갓난쟁이를 품에 안으면서 ‘거룩하면서 아름답게 빛나는 얼굴’을 마주하기 너무 힘듭니다.


- “맛있어. 많이 먹지는 못해도 이 맛, 잊지 못할 거야.” (179쪽)


 삶에 따라 이야기가 있습니다. 삶에 따라 사랑이 있습니다. 삶에 따라 사람들 어우러지는 나날이 달라지고, 서로 즐기는 밥이 나뉘겠지요.

 틀에 박힌 삶이 될 때에는 틀에 박힌 이야기에 머뭅니다. 틀에 매이지 않는 홀가분한 삶이라면 틀에 매이지 않는 홀가분한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몇 달째에는 무얼 시키고 몇 해째에는 무얼 가르치고 하는 틀에 따라 아이를 ‘다루면(관리하면)’ 아이는 제 목숨결대로 꽃피우기보다는 시들시들 길들어지고 맙니다. 길들어지는 삶이더라도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있을 테지만, 빛나면서 고운 이야기로 거듭나지 못해요.


- “요새는 남자도 도시락 정도는 만들 줄 알아야죠.” “나도 가끔 도시락을 싸오지만 이렇게 정성스럽게 만들지는 못해.” “응, 남은 반찬이나 냉동식품으로 대충 후다닥 싸오지.” (187쪽)


 가만히 살피면, “요새는 남자도 도시락쯤은 만들 줄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요새는 ‘오롯한 어른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이라면 도시락이든 밥이든 생일잔치상이든 얼마든지 넉넉히 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다음 미역국을 날마다 끊임없이 끓여서 아이 어머니한테 내밀 수 있어야 하고, 남다른 밥차림에 앞서 날마다 사랑스레 받아들일 밥차림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어야 해요.

 사랑이 있을 때에 재미난 이야기이고, 사랑이 있어야 재미난 삶이며, 사랑이 있기에 재미나게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맛나게 즐기는 밥입니다. 만화책 《아빠는 요리사》 112권은 ‘요리’ 만화에 무엇을 담아야 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4344.7.5.불.ㅎㄲㅅㄱ)


― 아빠는 요리사 112 (우에야마 토치 글·그림,설은미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11.5.25./4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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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든 아이


 ㄱ. 일본 사진책 하나를 장만했다. 아이보다 살짝 어린 듯한 일본 아이가 잔뜩 찍힌 사진책이다. 일본사람이든 한국사람이든 ‘사람 맨눈으로 바라본 빛느낌’하고 동떨어지게 너무 짙은 빛느낌으로 사진찍기를 너무 좋아하는구나 하고 새삼 깨닫는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아이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는 엇비슷할까. 아이하고 새벽부터 밤까지 내내 함께 복닥이면서 여러 해를 살아가는 어버이라면 어떤 사진을 찍을까. 사진기를 손에 쥘 힘마저 없이 집일을 하면서 어떤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아이는 일본 아이가 찍힌 사진책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넘긴다. 옆지기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니, 아이가 부러워 하는지 모르겠구나 싶다. 그동안 아이를 찍은 사진에 몇 마디 말을 붙였던 글을 추슬러서 내 아이 사진책을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느낀다. 열 권이나 스무 권이나 서른 권쯤? 둘레에서 우리 아이를 아끼는 고마운 분한테 한 권씩 드리자 생각하면서 작게 만들어 볼 수 있겠지.


 ㄴ. 저녁이 깊다. 아이는 잘 때가 되었으나 좀처럼 잠자리에 들려고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먼저 뻗어 아이를 부르지만 본 척 만 척이다. 누운 채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사진기를 들어 몇 장 찍는데, 사진을 찍는 줄 모른다. 혼자 읽을 때보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이것저것 이야기를 붙여서 읽거나 책에 적힌 글을 읽을 때 훨씬 좋아하지만, 고단한 몸으로 책읽히기를 해 주지 못하기 일쑤이다. 스스로 책을 쥐어 읽는 삶이 고맙다. (4344.7.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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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조선인님의 "옥주현이 맞은 돌은 몇 개인가"

텔레비전이 없기에 나가수가 무언지 모르지만,
옥주현 님이 옥타브는 잘 올라가지만,
노래는 옥타브로 부르지 않아요.

임재범 님도 노래를 잘 부르고,
저도 임재범 님을 좋아하지만,
나가수라 하는 데에, 임재범 님하고 조덕배 님이 함께 나온다면
어떻게 될는지는 모를 일이에요.

옥주현 님하고
민해경 님이 함께 나온다면...
'노래를 성적표처럼 성적 매기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쉽게 알겠지요.

똑같은 노래 하나를 놓고,
가수마다 어떠한 개성과 결로 즐기는가를 보여주도록 한다면,
방송을 보는 사람들도 '생각이 조금은 바뀌'면서
노래를 즐기거나 받아들이는 새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누구를 더 좋아하거나 팬이거나 하는 일보다,
노래가 가수 삶과 내 삶에서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방송이니 언론이니 뭐이니에 휘둘리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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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62] 우리들 친구

 혀가 짧아도 애쓰다 보면 혀짤배기 소리를 안 낼 수 있는지 모릅니다. 혀가 짧기에 더 힘쓰면서 혀짤배기 소리에서 벗어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혀가 짧기에 혀짤배기로도 낼 수 있는 소리를 찾아 나한테 걸맞거나 즐거울 말마디를 찾기도 합니다. 국민학교를 다니던 어린 날, 국어를 배우는 때에 으레 책에 적힌 글을 읽도록 시키는데, 나로서는 “우리의 무엇무엇” 하고 나오는 대목이 읽기 힘들었습니다. 천천히 똑똑 끊어 읽으면 읽을 만하지만, 어느 교사이든 이렇게 읽지 못하도록 했고, 동무들은 깔깔거리며 놀렸습니다. 하는 수 없이 웃음소리와 꾸지람을 무릅쓰고 빨리 읽을라치면 소리가 새거나 혀가 꼬였어요. 이때에 내가 했던 생각은 ‘책에 적힌 글을 그대로 읽으라면 어찌할 수 없지만, 내가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에는 이렇게 안 하겠어.’였어요. 어린 날 동무들이 많이 듣고 부르던 노래 〈빨간머리 앤〉에서 마지막에 나오는 대목을 나는 혼자서 조용히 “우리들 친구”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이제 네 살 된 딸아이한테도 아버지는 〈빨간머리 앤〉 노래 끝자락을 “우리들 친구”로 고쳐서 부릅니다. 아이 어머니는 “우리의 친구”로 똑똑히 부를 줄 알고, 아이도 이렇게 배우지만, 아버지가 “우리들 친구”라 하니, 요새는 아이도 이렇게 부릅니다. (4344.7.4.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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