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부인 뽐세라와 애벌레 친구들 - 일본도서관협회 선정도서
야나가와 시게루 글, 김은하 옮김, 카와이 노아 그림 / 예꿈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배추 ‘아저씨’도 애벌레하고 함께 살았을까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9] 카와이 노아·야나가와 시게루, 《배추부인 뽐세라와 애벌레 친구들》(예꿈,2008)


 배추를 얻으려고 배추밭을 돌본 사람은 누구나 압니다. 온갖 벌레들이 배추잎 갉아먹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벌레가 갉아먹은 자국이 하나도 없는 배추란 없습니다. 조그마한 텃밭에 몇 포기만 돌본다면 벌레가 갉아먹기 앞서 모조리 젓가락으로 잡아낼는지 모르지만, 배추 속에 깊이 또아리를 튼 녀석은 놓치기 마련입니다. 또, 새벽과 아침과 낮과 저녁마다 새로운 벌레가 얼마나 자주 깃드는데요. 넓은 밭에 배추를 가득 심었다면, 이 배추에 깃드는 벌레를 사람 손으로 하나하나 잡기란 대단히 힘듭니다. 온통 벌레밥이 될 판입니다. 영화로 나온 〈로빙화〉를 보면 차밭 벌레를 잡는 그림이 자주 나오는데, 가난한 사람은 손으로 벌레를 하나하나 잡고, 돈있는 사람은 벌레 잡는 약을 신나게 뿌립니다.

 요즈음 사람들 눈길로 보자면 ‘차밭 벌레를 잡느라 약을 뿌릴 때에 흐뭇하게 웃는 일’은 소름이 돋거나 무섭다 여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즈음은 농약이 사람 몸에 얼마나 나쁜가 하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졌거든요. 그러나, 가난한 흙일꾼 집에서 아버지랑 누나랑 동생이랑 힘겨이 벌레잡이를 해야 한다면, 이렇게 벌레잡이를 해도 끝이 없다면, 벌레 잡는 약을 뿌리는 일이란 얼마나 고마우면서 대단한 일이 될까 싶기도 합니다. 돈을 벌어야 하는 흙일꾼으로서는 너른 밭에 푸성귀를 많이 길러서 ‘돈을 치러 푸성귀를 살 사람 눈에 소담스러우며 예쁘게 보이도록’ 거두어야 합니다. 약을 쓰느니 마느니가 아닙니다. 농약이 사람 몸에 얼마나 나쁘냐 아니냐가 아니에요. 흙을 일구며 밥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갈리니, 농약을 쓰지 말라고 섣불리 말할 수 없습니다. 도시에서 푸성귀를 사다 먹는 사람치고, 때깔 더 곱고 벌레 먹은 자국 없으며 큼지막하거나 굵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란, 이러면서 값은 퍽 싸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란 없으니까요.

 담배값을 올리느니 마느니 합니다만, 정작 올려야 할 값이란 쌀값과 푸성귀값과 열매값입니다. 쌀값이며 푸성귀값이며 열매값은 제값을 치르도록 올려야 합니다. 똥오줌 거름으로 지은 곡식과 푸성귀는 이렇게 지은 품값대로 올리고, 농약을 쳐서 지은 곡식과 푸성귀는 이렇게 지은 약값과 품값대로 올려야 해요. 배추는 한 포기에 만 원을 해야 하고, 애호박은 하나에 오천 원을 해야 맞습니다. 당근은 한 뿌리에 삼천 원을 해야 하고, 파는 한 묶음에 이만 원을 해야 맞아요.

 곡식이랑 푸성귀랑 열매가 흙에 어떻게 뿌리를 내려 흙일꾼은 얼마나 땀을 흘리는가를 잊은 채 오로지 돈으로만 따지니까, 흙일꾼으로 일하면서 삶을 보람차게 보내겠다는 사람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도시 학교이든 시골 학교이든 아이들을 흙일꾼으로 키우거나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느 학교에서든 ‘흙 일구기 체험 학습’조차 안 합니다. 어느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이건, 고작 서너 살밖에 안 되든 예닐곱 살을 살짝 넘었든, 영어하고 한자를 일찌감치 머리속에 집어넣느라 바쁘지, 이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날마다 먹는 밥과 푸성귀와 열매’를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일구어 고맙게 받아먹을 수 있는가를 느끼도록 이끌지 않아요. 초등학교라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중학교나 고등학교라고 나아지지 않습니다. 대학생은 농촌봉사활동을 가끔 한다지만, ‘농촌봉사활동’이 아니라 ‘시골일 배우기’를 해야 올발라요. 더 많은 책과 더 많은 지식에 앞서, 사람다이 살아갈 참길을 몸으로 느끼면서 맞아들여야 아름답습니다.


.. 이렇게 뽐세라 부인은 애벌레들을 몇 번이나 도와주었어요. 애벌레들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어요. 뽐세라 부인이 아끼고 아끼는 드레스의 윗도리까지 먹어버린 거예요 ..  (23쪽)


 그림책 《배추부인 뽐세라와 애벌레 친구들》(예꿈,2008)을 읽습니다. 텃밭에서 배추를 한 번 심어서 기르기도 했지만, 우리 집 네 살 아이도 배추쯤은 금세 알아봅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배추는 틀림없이 배추 모습이지만 눈이 있고 손과 발이 달렸으며 옷까지 입습니다. 배추를 빗댄 사람입니다. 아이는 배추라고 알아보면서도 아줌마라고도 알아봅니다. “배추 아줌마야.” “배추 아줌마야? 응.” 그림책 뒤쪽에는 애벌레들이 나옵니다. “거기에도 배추가 있니?” “아니, 여기는 벌레야.” 시골집에서 지내며 집안이건 집밖이건 온통 수많은 벌레가 볼볼볼 살아가니까, 아이는 벌레가 익숙합니다. 배추와 함께 벌레를 곧장 알아봅니다.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히면서 줄거리가 이렇다는 둥 저렇다는 둥 덧붙이지 않습니다. 책에 적힌 글을 그대로 읽지 않습니다. 배추 아주머니 모습이랑 애벌레 모습을 찬찬히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에 나비가 되어 배추 아주머니를 다시 찾아오는 애벌레 이야기를 들려줄 때에는 우리 텃밭이나 시골자락 어디에나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나비를 이야기합니다.

 그림책에서는 ‘사랑’이나 ‘목숨’을 들추지만, 이 그림책을 아이한테 읽히면서 어설피 사랑이나 목숨을 들먹일 수는 없다고 느낍니다. 게다가, 날마다 밥을 먹고, 또 시골에서 텃밭을 돌보는 사람으로서 사랑이나 목숨을 아무렇게나 들려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먹는 돼지고기나 소고기나 닭고기나 오리고기도 목숨이지만, 쌀이나 보리나 밀이나 콩이나 옥수수나 팥이나 무나 감자나 당근이나 고구마도 목숨입니다. 꿀이 목숨 아닐 수 없고 된장이 목숨 아닐 수 없어요. 사람은 목숨을 먹어야 제 목숨을 잇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돼지와 쌀 또한 목숨을 빨아들여야 저희 목숨을 잇습니다. 동물은 동물대로 목숨이 될 먹이를 찾고, 식물은 식물대로 목숨이 될 먹이(양분)를 찾습니다. 《배추부인 뽐세라와 애벌레 친구들》에서 애벌레는 배추잎을 갉아먹어야 목숨을 잇습니다. 배추는 애벌레한테 잎을 덜 빼앗겨야 살아갈 수 있어요.


.. 다음날 아침, 뽐세라 부인이 눈을 떠 보니 그 많던 애벌레들이 한 마리도 안 보이는 거예요. “우리 애벌레들, 어디로 갔는지 아시는 분?” “어머머, 뽐세라 부인 좀 봐. 아유, 흉측스러워. 드레스가 누더기가 돼 버렸네?” “뽐세라 부인, 드레스가 왜 그 모양이 됐대요?” ..  (27쪽)


 그림책 거의 마지막 자락에서 흙일꾼 아저씨가 ‘배추 아줌마 뽐세라’한테 “애벌레들이 먹은 건 네 드레스 자락뿐만이 아니야. 네 따뜻한 사랑도 함께 먹은 거지. 난 네가 사랑할 줄 아는 배추가 되어서 정말 기쁘단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말이야 틀리지 않습니다만,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사람들이 이 그림책을 펼치며 당신 아이한테 배추와 애벌레 이야기를 들려준다 할 때에 어떠한 느낌이 되거나 마음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날개가 ‘사람 눈에 곱게 보이’는 나비가 되는 애벌레는 배추잎을 갉아먹어도 나쁘지 않다면, ‘사람 눈에 썩 곱게 안 보이’는 나방이나 다른 벌레가 배추잎을 갉아먹는다면 어떤 이야기가 될까요.

 배추흰나비를 바라보자면 참 예쁘구나 하고 고개를 꾸벅 숙이거나 손을 흔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배추흰나비가 애벌레일 때에 배추잎을 신나게 갉아먹어도 될 만큼 어여쁜 목숨이라고 말해도 좋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배추와 배추흰나비 애벌레가 서로 살가이 사귀려면, 배추흰나비가 ‘배추가 꽃을 피울 때에 꽃가루를 옮겨서 배추가 새로운 목숨이 태어날 씨가 맺도록 도와준다’는 얼거리를 보여줄 때에 비로소 ‘그래, 배추랑 배추흰나비 애벌레는 서로 살가운 사이가 될 수 있어.’ 하고 이야기할 만합니다.

 그러니까, 그림책 《배추부인 뽐세라와 애벌레 친구들》에서는 이 대목을 미처 그리지 못했습니다. 다른 ‘배추 아줌마’들은 벌레한테 덜 먹히면서 예쁘장한 배추잎을 건사하며 저잣거리에 내다 팔린다면, ‘뽐세라 배추 아줌마’는 애벌레한테 잎을 잔뜩 갉아먹히면서도 ‘배추꽃을 아름다이 피워’ 이 배추꽃에 나비가 된 애벌레가 새삼스레 찾아와서 꽃가루받이를 해 주어 뽐세라 배추 아줌마는 배추씨를 맺어 이듬해에 새로운 배추가 잔뜩 다시 태어날 밑목숨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보여준다면, 시나브로 ‘사랑’이나 ‘목숨’을 보여주는 고운 그림책이라 할 만할 텐데 싶습니다.

 모든 애벌레는 나비가 되든 나방이 되든 ‘어른벌레’로 다시 태어납니다. 모든 푸성귀는 꽃을 피우고 씨를 맺으며 이듬해에 새롭게 다시 태어납니다. 모든 목숨은 다른 목숨을 고맙게 받아먹으면서 살아갑니다. 삶이란 죽음이고, 죽음이란 삶입니다. 삶이란 죽음이 되기에 사랑이고, 죽음이란 삶이 되기에 사랑이에요. 그림책 《배추부인 뽐세라와 애벌레 친구들》에서는 사랑과 목숨을 어설프거나 가벼운 ‘가르침(교훈)’으로 보여줄 노릇이 아니라, 차분하면서 수수한 삶과 죽음으로 제대로 보여주어야 하지 않았겠느냐 생각합니다.


- 누구 드레스가 제일 예쁘시더라?
- 감히 내 드레스를 갉아먹으려 들다니, 저리 못 가실까!
- 하아, 정말 피곤하시다.
- 이 뽐세라 부인이 좀 봐주시려고 하는데.
- 낮잠 한숨 자고 나서 내쫓으셔야겠다.



 한 가지 덧붙이면, 이 그림책은 옮김말이 꽤 엉터리입니다. 이야기 얼거리가 좀 아쉬워도 삶과 죽음과 목숨과 사랑을 다루려 한 대목에서는 돋보이는 그림책인데, 한국말로 옮기면서 “예쁘더라”라 할 대목에 ‘-시-’를 엉뚱하게 넣었습니다. ‘뽐세라 아줌마’이니까, 말투가 이러하다가 할는지 모르나, “예쁘더라?”나 “저리 못 갈까!”나 “하아, 참 힘들다.”처럼 적바림해도 됩니다. 이렇게 적바림해야 비로소 이 그림책을 읽을 아이들이 말을 옳게 받아들여요.


- 연둣빛 드레스를 뽐내고 있었지요
-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겠어요
- 흐뭇한 마음에 미소 지으며


 그런데, 이런 ‘-시-’도 얄궂지만, “연둣빛 드레스”라든지 “뽐내고 있었지요”라든지 “시작했어요”라든지 “잡아먹으려는 게”라든지 “미소 지으며” 같은 말마디는 더 얄궂습니다. 배추잎이 연두빛인가요? 배추잎은 풀빛입니다. 굳이 ‘드레스’라 하기보다는 ‘옷자락’이라 하면 됩니다. “푸른 옷자락”이라 하면 돼요. ‘있다’를 보조용언처럼 쓰는 일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뽐냈지요”로 말끝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어요”로 고치고, “잡아먹으려 하지 않겠어요”와 “웃음지으며”로 고쳐야 합니다.

 그림책 끝자락을 보면 “다 아줌마 덕분이에요(33쪽).”라는 대목이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아줌마’로 적고, 책이름은 ‘배추부인’인데, 아이들한테 읽힐 그림책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무개 부인’처럼 적는 어설픈 말투가 아니라, 알맞고 바르게 가다듬는 우리 말투로 적어야지 싶어요. “배추 아줌마 뽐세라와 애벌레 동무들”이라고 이름을 붙였어야지요.

 그나저나, 그림책을 아이하고 읽으면서 늘 궁금합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뽐세라 배추 아줌마’는 애벌레를 가엾게 여겨 돌보려 하는데, 배추 아줌마가 아닌 배추 ‘아저씨’가 될 때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그림책이 배추 아저씨를 주인공으로 삼는다면, 배추 아저씨는 ‘어린이 돌보기’를 어떻게 했으려나요.

 그림책마다 어린 목숨을 돌보거나 보살피는 몫은 으레 여자한테만 맡기거나 떠넘깁니다. 남자는 어린 목숨을 돌보지 않기 일쑤이고, 아예 모르기까지 해요. 그렇다고 오늘날 어른 여자들이 집일이나 집살림을 옳게 잘하는지 알쏭달쏭해요. 목숨을 아끼고 어린이를 사랑할 몫이란 여자가 더 잘 하거나 더 알뜰히 맡아야 하지 않습니다. 고운 사랑이 깃든 목숨을 어버이한테서 선물받아 자라난 사람이라면,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내 아이를 비롯해 이웃 아이를 따숩게 사랑하고 너르게 아낄 줄 알아야 한다고 느껴요. 책을 덮고 나서 생각한 일이지만, 뽐세라 아줌마 둘레에 ‘뽐내라 아저씨’가 함께 나오면 더욱 재미나면서 알차게 이야기를 엮고 풀 수 있겠지요. (4344.7.10.해.ㅎㄲㅅㄱ)


― 배추부인 뽐세라와 애벌레 친구들 (카와이 노아 그림,야나가와 시게루 글,김은하 옮김,예꿈 펴냄,2008.3.11./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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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종이


 두 군데 출판사 아는 분한테 전화를 걸어 신문종이 한 주치 모아서 보내 주실 수 있느냐고 여쭈었다. 책짐을 싸는데 신문종이가 많이 들어 모자란다고, 시골에서는 신문종이 얻기 너무 힘들다고 이야기했다. 두 곳 두 분이 고맙게 신문종이를 한 상자씩 보내 주었다. 한 분은 골판종이까지 묶어서 보내 주었다. 오늘 두 번째 상자를 받아 끌르는데, 상자에 가득한 빳빳한 신문이 참으로 푸짐하게 보였다. 벌써 보름 넘게 집일과 아이키우기와 책짐싸기를 하느라 등허리가 휠 노릇이지만, 이 빳빳한 신문종이를 위아래로 대어 책을 싼다고 생각하니까 콧노래가 나온다.

 그런데 책을 싸자면 힘들어서 책은 못 읽잖아? 하기는, 지난 보름 동안 하루에 한 쪽 읽기도 몹시 벅찼다. 어쩌면, 이렇게 고되며 힘에 부치는 나날일 때에, 감기는 눈을 부릅뜨며 읽을 만해야 참말 책다운 책이라 할는지 모른다. 첫째 아이 옷가지를 빨면서 아이를 씻기고, 다 마른 빨래를 걷고 새 빨래를 널고 나서 기지개를 켠다. (4344.7.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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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풍과 책읽기


 1980년대 국민학생이 맞이한 소풍은 봄과 가을에 한 차례씩 찾아왔습니다. 먼저 학교에 모인 다음, 학년과 반에 따라 줄을 맞추어 재잘재잘 떠들며 걸어서 갔습니다. 으레 가까운 데로 가고, 으레 여러 학교에서 같은 날 찾아가니까, 소풍날 찾아가는 곳은 북적북적거립니다. 가까운 데이든 먼 데이든 버스를 타고 찾아간 적이 없습니다. 늘 걸었습니다.

 걸어서 가자면 꽤 걸리기 때문에 아침 일찍 학교에 모입니다. 교장 선생님 말씀이 길디길게 이어지고 나서 학년에 따라 차례차례 학교를 나섭니다. 담임을 맡은 이는 줄이 흐트러질 때마다 소리를 빽 지르며 다그치지만, 소풍날에는 빽빽 다그치는 소리도 노래처럼 들립니다.

 학교를 벗어나 놀러가는 길이기 때문인지, 한 시간을 걷고 두 시간 가까이 걷더라도 그리 힘들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여느 때에는 늘 시멘트 성냥갑 교실에서 지내지만, 소풍날만큼은 아침 여덟 시에도 아홉 시에도 열 시에도 동네를 걸어서 지나갑니다. 학교 바깥 동네 아침 모습을 느끼며 걷는 일은 새삼스럽고 놀라우며 즐거웠습니다.

 국민학교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꼭 한 차례씩 버스를 빌려 꽤 먼 데까지 수학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마실을 다닙니다. 버스를 타고 먼 데를 다닐 때에는 창밖을 내다보기도 하지만, 창밖 모습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아니, 창밖을 내다볼 겨를이 없이 버스에서 노래를 불러야 하느니 도시락을 까먹어야 하느니 하면서 부산스럽습니다. 기운이 넘치는 신나는 아이들은 몸이나 다리를 쓸 일이 없는 버스에서 그야말로 시끄러울 뿐입니다.

 버스를 타고 찾아가는 머나먼 곳에서는 돌아볼 곳이 많다고 합니다. 빨리빨리 이곳에서 저곳으로 움직이고, 이곳에서 사진 한 장 저곳에서 사진 두 장을 찍어야 합니다. 무엇을 더 생각하거나 살피거나 헤아리거나 돌아볼 틈이 없습니다.

 걸어서 찾아가던 소풍 놀이터에서는 서둘러 사진을 찍을 일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복닥이기는 하지만, 한갓지거나 느긋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사진이야 따로 안 찍어도, 또 소풍날이 아니어도 으레 찾아가는 곳이니까, 굳이 사진으로 뭔가를 남기기보다는 마음껏 뛰고 놀며 즐깁니다.

 집에서 책을 읽습니다. 읽던 책을 다시 넘기고, 보던 책을 새삼스레 꺼냅니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며 읽을 책이란 꼭 새로운 책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읽던 책을 다시 넘겨도 기쁘고, 보던 책을 새삼스레 꺼내도 즐겁습니다. 글책이든 그림책이든 사진책이든, 한 번 보고 스윽 지나치기만 한다면, 내 마음에건 가슴에건 생각에건 머리에건 깃들지 않습니다. 노상 곁에 둘 만한 책일 때에 언제라도 읽을 만한 아름다운 이야기로 자리잡습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도서관이라는 곳은 더 많은 책이나 더 새로운 책을 갖추지 않아도 될 만합니다. 언제라도 다시 읽거나 거듭 읽으면서 내 넋과 얼을 어여삐 보듬는 맑고 밝은 책으로 살가울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도서관이라고 느낍니다. 어머니 품이든 아버지 품이든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고, 모레와 글피라고 다를 수 없어요. 늘 같은 품이면서 사랑스럽고, 언제나 같은 품으로서 빛납니다. (4344.7.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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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63] 하루맞이

 첫 아이가 우리 집에 찾아온 날부터 하루맞이는 남다릅니다. 첫 아이를 맞아들이고부터 아이보다 훨씬 일찍 깊은 새벽에 일어나 아이 기저귀를 살핍니다. 이러고 나서 밤새 쌓인 오줌기저귀를 천천히 빨래합니다. 잠자리에 들기 앞서 빨래한 기저귀와 옷가지가 어느 만큼 말랐는가 만지고는, 다 말랐으면 개고, 이 자리에는 새벽에 새로 빤 기저귀와 옷가지를 넙니다. 이윽고, 아침맞이 글쓰기를 조금 하다가, 곧 일어날 식구들 먹일 밥을 어떻게 차릴까를 생각하며 쌀을 씻어 불립니다. 머잖아 아이가 깨어나면 이때부터 쏜살같이 흐르는 하루는 온 넋과 얼을 쏘옥 빼며 해가 하늘 높이 떴는지 저쪽으로 기울었는지 모르는 채 휙휙 흐릅니다. 저녁이나 밤에 아이를 재우고 나면 오늘 하루도 이렇게 저무는구나 돌아보면서 하루마감을 해 보고 싶지만, 내 몸에 남아난 기운이 거의 없어 어느새 아이 곁에서 폭 고꾸라집니다. 오늘 하루도 여느 날과 똑같이 엽니다. 하루맞이는 새벽빨래부터입니다. 빨래를 마친 옷가지를 두 손으로 꼭 쥐고 비벼서 물기를 짜고 탕탕 텁니다. 손에서 물기 마를 틈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를 낳아 어버이로 살아온 이 땅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하루맞이를 이렇게 했겠지, 하고 돌아봅니다. 고마운 하루맞이입니다. 퍽 힘에 부치지만 보람차면서 아름다운 하루마감을 꿈꿉니다. (4344.7.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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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村伊兵衛昭和を寫す〈1〉戰前と戰後 (ちくま文庫) (文庫)
木村 伊兵衛 / 筑摩書房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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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으로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 찾기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5] 기무라 이헤이(木村伊兵衛), 《木村伊兵衛 昭和を寫す 1 戰前と戰後》(筑摩書房,1995)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 어떤 나날인가를 돌아보면서 나눈 사진이 살포시 실린 사진책 《木村伊兵衛 昭和を寫す 1 戰前と戰後》(筑摩書房,1995)를 넘기면서 생각합니다. 소설 《스물네 개의 눈동자》에 나오는 쇼도지마섬 작은 학교 작은 아이들을 맡은 작은 교사는 스물네 눈동자를 맑게 빛나는 열두 아이하고 나란히 서서 사진 한 장을 찍습니다. 교사와 아이들은 사진 열석 장을 하나씩 나누어 갖고, 이 사진을 언제까지나 간직하면서 지난날을 그립니다. 일본 정부가 대동아전쟁이니 태평양전쟁이니 자꾸자꾸 일으키면서 아이들까지 ‘전쟁 바보’로 만들어 싸움터로 내몰아 죽고 죽이는 짓을 일삼도록 하지만, 작은 섬 작은 학교 작은 교사는 아이들한테 ‘충은 보국’이 아닌 ‘사랑과 믿음’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무렵 작은 섬 작은 학교 작은 교사 둘레에 ‘일본이 일으키는 전쟁이 얼마나 덧없으면서 나쁜가’를 함께 느끼면서 나무라는 이웃이란 없습니다. 초롱초롱 눈망울을 맑게 빛내던 열두 아이조차 저희 어버이가 ‘일본 정부가 시키는 제국주의 교육과 정책’에 젖어들며 저희를 키우기 때문에, 이러한 틀에서 쉬 헤어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기무라 이헤이 님이 빚은 사진으로 엮은 《木村伊兵衛 昭和を寫す 1 戰前と戰後》는 어떤 사진이라 할 만할까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기 앞서’와 ‘전쟁을 끝마친 다음’에 보이는 모습이 담긴 이 사진책은 사진쟁이 어떠한 넋을 실었다 할 만할까요.

 사진이란 ‘기록하는 사진’일까요. 사진은 ‘기록하는 구실’을 하도록 만들었을까요. 사진이란 ‘예술하는 사진’인가요. 사진은 ‘예술하는 노릇’을 하자며 만들었나요.

 어쩌면, 사진을 처음 만들어 널리 퍼뜨린 사람들은 ‘기록하는 사진’과 ‘예술하는 사진’을 함께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여기에 ‘돈을 버는 사진’이라든지 ‘외치는 사진’이 차근차근 샘솟았다 할 만합니다. 그런데, 기무라 이헤이 님 사진은 이 가운데 어디 갈래에도 들지 않습니다. 《木村伊兵衛 昭和を寫す 1 戰前と戰後》에 담긴 사진은 ‘1920년대 일본’이나 ‘1940년대 일본’이나 ‘1960년대 일본’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기무라 이헤이 님이 찍은 사진을 그러모은 조그마한 사진책에는 ‘일본에서 살아간 사람들 나날’이 담길 뿐입니다. 기록도 증언도 인문지리도 아닙니다. 문화도 예술도 멋도 호사 취미도 아닙니다. 오직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사진으로 옮길 뿐이에요.

 원자폭탄을 맞아 송두리째 날아간 나가사키 천주교회당 사진을 보며 생각합니다. 나가카시 천주교회당과 천주교마을 이야기는 나가이 다카시 님이 쓴 《영원한 것을》이라는 이야기책에 잘 나왔습니다. 시골사람들이 조용한 시골자락에서 조용히 흙을 일구면서 천천히 일군 자그마한 마을 자그마한 예배당이 나가사키 천주교회당입니다. 남을 해코지하지 않고 남을 괴롭히지 않으며 역사가 오래된 물건이라서 섬기지 않을 뿐더러, 곁에서 아파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옆에서 착하게 살아가는 이웃을 보살피는 믿음집이 나가사키 천주교회당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곳에도 원자폭탄은 떨어져 너나 가리지 않고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2011년 봄날, 후쿠시마 작은 마을이 난데없이 사라진 일하고 엇비슷합니다. 착하게 살던 사람도 밉게 살던 사람도 곱게 살던 사람도 짓궂게 살던 사람도 똑같이 하루아침에 사라져요. 폭격기에서 떨구는 폭탄 때문에 죽든, 바닷물이 크게 불어 마을을 휘감으면서 죽든, 죽음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 죽든, 차에 치어 죽든, 죽음은 사람을 고르지 않습니다.

 기무라 이헤이 님 손길을 거쳐 사진으로 옮겨진 삶이 그러모인 《木村伊兵衛 昭和を寫す 1 戰前と戰後》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을 다시금 헤아립니다. 바닷마을 사내들이 배를 바다에 띄우는 모습에서라든지, 바닷마을 아가씨들이 일손을 멈추고 쉬면서 웃음꽃을 피우는 모습에서라든지, 바나나송이를 이고 장마당을 걷는 뒷모습이라든지, 검불을 모으는 아이들 모습이라든지, 베틀을 밟는 젊은 여자와 늙은 여자 모습이라든지, 사진마다 이 사진에 깃든 사람들 이야기가 고스란히 어우러집니다. 돋보이고자 찍은 사진이 아니요, 내보이려고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무슨 인문지리 연구를 한다며 찍는 사진이 아니며, 가난한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를 다큐멘터리로 보여주겠다는 사진이 아닙니다. 그예 나랑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차분히 마주하면서 이야기꽃 함께 피우는 사진입니다.

 사진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사진은 무엇을 하면 아름다울까요. 사진으로 무엇을 하자며 사진길을 걸을 수 있나요. 사진으로 무엇을 하면서 아름다움을 서로 나누는가요.

 역사에 길이길이 남아야 좋은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한테 알려져야 훌륭한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교과서에 실린다거나 박물관 잘 보이는 자리에 걸려야 거룩한 사진이 되지 않아요. 웃음이 나게 이끌고 눈물이 나게 끌어당길 때에 사진입니다. 웃음이 나게 읽혀야 글이고, 눈물이 나게 보여져야 그림입니다. 웃으면서 부르는 노래요, 울면서 추는 춤입니다. 모든 삶은 모든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른 삶을 일구면서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립니다.

 2010년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한국 사진쟁이는 어떤 길을 걷는지 궁금합니다. 2000년대에는 어떤 길을 걸었고, 1990년대에는 어떤 길을 걸었는지 궁금합니다. 지난날은 어찌저찌 걸었을지라도 2010년대와 2020년대를 새롭게 걸을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2030년대에는 2030년대대로 아름다운 꿈을 찾고, 2040년대에는 2040년대대로 아름다운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곁에 있습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한테는 내가 아름다운 님입니다. 아름다운 사진은 내 삶자리에서 찍습니다. 내 삶자리를 사랑할 때에 내 둘레에서 사진길을 걷는 사람은 나한테서 사랑스러운 빛을 느껴 고운 사진을 시나브로 이룹니다.

 아름다운 사진을 찾아 멀리 떠날 수 없고, 나 스스로 아름답게 살지 않는다면 가까이에서든 멀리에서든 무엇이 아름다운지 깨닫지 못합니다. (4344.7.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사진책 읽는 즐거움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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