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만 원


 집에서 쓰는 셈틀이 갑자기 맛이 간다. 풀그림이 담겨 셈틀을 움직이는 저장장치가 더는 돌아가지 않는다. 어떻게 되살릴 길이 없고 손쓸 길이 없다. 자전거 수레 뒷자리에 셈틀을 싣는다. 아이는 수레 앞자리에 태운다. 읍내 셈틀집에 들고 가서 맡긴다. 읍내에 나가는 길에 수레가 꽉 찬 느낌이다. 수레 뒤쪽에 수박 한 통보다 더 무거운 셈틀이 버티니, 오르막을 오를 때에 누군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듯하다. 그래도 빗길 오르막을 다 올랐고, 구름이 포근하게 감싸는 야트막한 음성 멧봉우리를 아이랑 함께 바라볼 수 있다. 숯고개 꼭대기에서 살짝 다리를 쉬면서 아이한테 저 멧자락이랑 구름을 보자며 이야기한다.

 이윽고 가게 일꾼한테는 낮밥 먹을 때가 되기에 다시금 발판을 밟는다. 이제는 뒤에서 수레를 밀어 주는 자전거가 된다. 오르막과 달리 내리막은 금세 휭 하고 내려온다. 곧 읍내에 닿고, 셈틀집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는 셈틀을 꺼낸다. 셈틀을 맡기면서 다 고친 다음에는 짐차에 실어 가지고 와 달라고 이야기한다. 도무지 다시 들고 돌아갈 엄두는 나지 않는다.

 한창 저장장치를 만지작거리던 셈틀집 일꾼은 이 녀석을 되살리기 어렵겠다고 말한다. 되살리는 데에 보내도 다 되살리기는 힘들 텐데 30만 원이 든단다. 한숨을 내쉬며 망설인 끝에, 30만 원은 다음에 어찌저찌 살림돈을 조금 모으고 나서 들이기로 하고, 아이 어머니가 쓸 셈틀을 하나 새로 장만하는 길을 찾기로 한다. 새로 셈틀 하나 장만하는 데에 저장장치 1테라를 더 붙여 46만 원이 든단다.

 읍내 가게에서 가래떡을 산다. 저녁에는 굵은 가래떡을 잘게 썰어 감자떡볶이를 해야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빗줄기가 그친다. 아까 지나온 숯고개 꼭대기에 다다를 무렵, 아이는 수레에서 새근새근 잠든다. (4344.7.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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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07-11 17:32   좋아요 0 | URL
왠만하면 물건을 고쳐서 사용하고 싶어도 요새는 참 희안하게도 새걸로 사게끔 하는 요상한 상황이 많습니다-_-; 기왕에 정도 들었고, 사용법도 익숙한 물건인데다가 어쩔수없이 수리시간이 걸리더라도 고칠수 있었으면 더 좋겠는데 말입니다.

파란놀 2011-07-11 21:08   좋아요 0 | URL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새로 쓰고 새로 버려야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맞추어지잖아요. 버리고 새로 사야 경제성장률도 올라가고요......

카스피 2011-07-12 11:05   좋아요 0 | URL
뭐 저도 오래된 컴이 있지만,이젠 거기 맞는 부품도 안나와서 오히려 사는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얼마전에 25만원짜리 노트북을 이마트에서 행사했는데(내요이 좀 복잡하죠.원래는 55만원인데 우리 카드를 사용하면 30만원 상품권을 준다고 하더군요),살까 말까 망설이다 못샀읍니다.역시 돈이 문제에요 ㅜ.ㅜ

파란놀 2011-07-12 16:44   좋아요 0 | URL
더 좋기로는 타자기,
가장 좋기로는 손이지 싶어요...
컴퓨터는 참...

카스피 2011-07-12 17:15   좋아요 0 | URL
타지기도 예전에 써봤는데 이거 글자 하나 틀리면 수정하는 것이 넘넘 힘이 드는게 단점입니다ㅜ.ㅜ
 
荒木經惟ト-キョ-·アルキ (とんぼの本) (單行本)
荒木 經惟 / 新潮社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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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미나게 살아가며 재미나게 사진찍기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9] 아라키 노부요시(荒木經惟), 《ト-キョ-·アルキ》(新潮社,2009)


 1940년에 태어나 젊은 날부터 사진을 찍은 아라키 노부요시 님은 2009년에 《ト-キョ-·アルキ》(新潮社,2009)라는 자그마한 사진책 하나를 내놓습니다. 1964년에 사진상을 한 번 받고, 1971년에는 혼인나들이를 한 이야기를 당신 돈으로 1000권 내놓기도 했다니까, 2009년에 내놓은 《ト-キョ-·アルキ》는 어쩌면 ‘아라키 사진삶 쉰 해’를 기리는 자그마한 선물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아라키 노부요시 님이 보여준 사진삶을 다른 사진책으로 만난 이한테 《ト-キョ-·アルキ》는 좀 남다르다 싶은 사진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ト-キョ-·アルキ》는 책이름 그대로 ‘아라키’가 여태껏 내 나름대로 재미나게 살아온 나날을 재미난 발걸음 그대로 보여주는 사진책이라 느낄 수 있어요.

 사진기 하나 목에 걸고는 도심지를 천천히 거닐면서 사진을 찍은 이야기를 그러모아 책 하나로 묶었다고 볼 수 있는 한편, ‘아라키는 이렇게 걷고 이렇게 만나며 이렇게 느껴 이렇게 나눈다’고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땅한 이야기입니다만, 아라키 노부요시 님이 2007년에 내놓은 《ARAKI》(Taschen)를 읽는다 해서 아라키 노부요시 님이 어떠한 길을 걸어왔는지 알 수 없고, 1971년에 당신 돈을 들여 내놓은 《センチメンタルな旅》를 어찌저찌 찾아내어 읽는다 해서 아라키 노부요시 님이 요즈음 어떠한 삶을 일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와 함께, 《ARAKI》나 《センチメンタルな旅》를 읽지 않고서 아라키 노부요시 사진과 삶과 사랑과 사람을 안다고 할 수 없어요.

 사진책 《ト-キョ-·アルキ》를 읽을 때에는 오직 하나만 느끼면서 알 수 있습니다. 아라키 노부요시 님이 걸은 길은 아라키 노부요시 님이 걸었기에 뜻있거나 뜻깊지 않습니다. 아라키 노부요시 님이 사진으로 담는 사람들을 만나기 앞서 언제나 뜻있고 뜻깊던 길입니다. 아라키 노부요시 님이 사진으로 담든, 다른 누군가가 사진으로 담든 한결같이 뜻있고 뜻깊은 길입니다. 왜냐하면 누가 어떠한 얼거리와 넋으로 사진으로 담든, ‘사진으로 담기는 사람들마다 사랑스러우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저마다 다르게 아끼면서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들이 이제껏 살아오며 일군 이야기 가운데 한 자락을 고맙게 얻습니다. 사진쟁이가 고맙게 얻은 사진을 그러모아 내놓은 책을 읽는 사람은 이 사진책 하나에 그러모인 숱한 사람들 숱한 삶과 사랑 이야기를 고맙게 들여다보면서 생각날개를 펼칩니다. 아라키 노부요시 님은 숱한 사람들 삶자락 이야기 가운데 귀퉁이를 예쁘게 바라보면서 담고, 아라키 노부요시 님 사진책을 읽는 사람은 아라키 노부요시 님 눈썰미 가운데 한 조각을 아리땁게 읽으면서 가슴이 벅찹니다.

 어느 누구 삶이라 하더라도 똑같습니다. 사랑스럽지 않은 삶이 없고, 사랑스레 담지 못할 삶이 없습니다.

 도쿄 한복판에도 있다는 가난한 사람들 뒷골목이라 해서 후줄근할 까닭이 없습니다. 돈이 적어 살림살이가 후줄근하더라도 사랑스레 살아가는 사람들인걸요. 도쿄 변두리에도 있다는 돈있는 사람들 복닥거리는 눈부신 길거리라 해서 돋보일 까닭이 없습니다. 돈이 많아 한밤에도 불빛이 번쩍거리더라도 사랑스레 살아가지 않으면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사랑스레 살아가는 사람한테서는 사랑스레 살아가는 기운을 느끼면서 사랑스레 살아가는 손길로 담은 사랑스레 나눌 사진이 태어납니다. 재미나게 살아가는 사람한테서는 재미나게 살아가는 얼을 받아들이면서 재미나게 살아가는 손놀림으로 담은 재미나게 나눌 사진이 태어납니다.

 주문을 받아 멋들어지게 찍어야 하는 사진이라면, 참말로 멋들어지게 보이는 사진이 태어나겠지요. 사랑하는 짝꿍이랑 살아가며 낳은 사랑스러운 아이를 담는 사진이라면, 참말로 사랑스레 보이는 아이 모습이 빛나는 사진이 태어나겠지요.

 사람이 선 삶자리에서 사진이 태어납니다. 사람이 마주하는 삶자락에서 사진이 태어납니다. 사람이 사랑하는 삶터에서 사진이 태어납니다.

 일본 도쿄라 해서 더 대단하다 싶은 사진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한국 괴산이라 해서 더 시골스럽거나 투박하다 싶은 사진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든, 내 넋과 얼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사진이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찍는 사진이기에 꼭 도시스러운 사진이 되지 않아요. 멧골이나 바닷가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찍은 사진이라서 반드시 멧골스럽거나 바닷가스러운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품는 꿈과 돌보는 넋에 따라 달라지는 사진입니다. 좋아하는 길과 사랑하는 사람에 따라 바뀌는 사진이에요.

 제주섬에서 살아가거나 제주섬을 자주 찾아가지만, 정작 제주섬 속내를 사진으로 못 담고 글로 못 쓰며 그림으로 못 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지내거나 서울을 자주 들르지만, 막상 서울 속살을 사진으로 못 찍고 글로 못 옮기며 그림으로 못 보이는 사람이 있어요.

 늘 지내거나 오래 지내거나 자주 가까이한대서 더 잘 알지 않습니다. 늘 걷는 길이라서 더 꼼꼼히 잘 알아보지 않습니다. 처음 지나가거나 한 번 지나치는 길이라 하더라도 내 마음밭에서 사랑씨가 자라는 사람이라면, 날마다 수없이 지나가는 길이라 하지만 내 마음밭에 아무런 씨앗 하나 자라지 않는 사람보다 살뜰히 느끼어 꽃피우는 이야기열매가 있습니다. 아라키 노부요시 님 사진책 《ト-キョ-·アルキ》는 이야기합니다. 재미난 이야기를 재미난 눈썰미와 손짓과 발걸음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나저나, 큰아이를 짐받이에 붙인 걸상에 앉히고 작은아이를 등에 업은 채 바구니에는 먹을거리나 짐을 실은데다가 가방을 손잡이에 걸고 기어 없는 자전거를 달리는 아주머니는 언제 보아도 그지없이 아름답구나 싶습니다. 두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 가운데 이와 같은 자전거를 모는 분은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사진으로도 찾아보지 못합니다. (4344.7.10.해.ㅎㄲ
 

 

(최종규 . 2011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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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ra 2011-07-11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같이 비오는 날, 따뜻한 녹차와 함께 보고싶은 책이네요. 리뷰보고 구매하고 싶어졌습니다.^^

파란놀 2011-07-11 17:11   좋아요 0 | URL
일본말을 할 줄 아신다면, 글을 읽으면서 한결 재미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어머니 책읽기


 어린 날, 어머니가 집에서 책을 읽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고 떠오릅니다. 어머니가 글을 모르기에 책을 안 읽으셨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글을 읽을 줄 알고 쓸 줄도 압니다. 그러나, 집에서 책을 읽는 모습은 보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집에서 마주보는 어머니 모습이란, 일하고 살림하는 모습입니다. 집일을 하고 부업을 하며, 집살림을 건사하는 모습입니다.

 두 아이하고 아픈 옆지기랑 살아가자니, 참으로 책을 손에 쥘 겨를을 낼 수 없습니다. 아는 분한테 아이 얘기를 알리자며 전화를 걸자고 생각하더라도 이 일 저 일에 치여 전화기 단추 누를 틈을 내지 못합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어버이로 살아가는 자리에 서기 앞서 내 마음과 삶을 살찌우는 책을 읽지 않는다면,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제금날 때까지 손에 책을 쥘 수 없는지 모른다고.

 집일에 바쁜 어버이가 신나게 함께 놀지 못하기에, 네 살 아이는 일찍부터 혼자 책읽기에 빠져들곤 합니다. 돌이켜보면, 나도 어린 날 집밖에서 동네 동무들이랑 신나게 뛰어놀거나 집안에서 만화책에 신나게 빠져들었습니다. 다만, 내 눈에는 일하는 어머니 모습이 늘 아로새겨졌고, 어버이로 살아가는 나한테는 내 아이가 오늘날 저희 아버지한테서 일하는 모습이 아로새겨질까 궁금합니다. (4344.7.1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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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줌마 자전거, 아저씨 자전거


 일본 사진쟁이 아라키 노부요시 님 사진책 《ト-キョ-·アルキ》(新潮社,2009)를 읽다가 문득 생각한다. 아라키 노부요시 님 사진기에도 ‘애 둘을 태우는 아줌마 자전거’ 모습이 들어왔고, 어김없이 찍혔다. 아이 하나는 자전거 앞이나 뒤에 걸상을 붙여 앉힌 다음 아이 하나는 등에 업고 마실을 다니는 아주머니가 한국이나 일본이나 유럽이나 미국이나 꽤 있다. 이러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분 또한 제법 많다.

 그런데 한 가지는 없다. 아이를 둘씩 자전거에 태우며 저잣거리에 장보러 다니는 아주머니는 있지만, 아이를 하나라든지 둘을 자전거에 태우며 저잣거리에 장보러 다니는 아저씨는 없다(또는 아주 드물다). 아이를 둘씩 자전거에 태우며 어린이집에 맡기거나 데려오는 아주머니는 흔하게 만나지만, 아이를 하나라든지 둘을 자전거에 태워 어린이집을 드나드는 아저씨는 없다(아니면 아주 드물다).

 이제는 아주머니도 자가용을 많이 몬다.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저씨는 으레 자가용을 몬다. 아주머니는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며 장보기를 마치거나 어린이집에 들러 집으로 돌아오고도 집안일을 시원시원 해낼 뿐 아니라, 밥도 예쁘게 차린다. 아저씨 가운데 땀 뻘뻘 흘리며 자전거로 아이들을 태운 다음, 집에서 집안일을 거뜬히 치르면서 밥 또한 곱게 차리는 이는 얼마나 될까. 아저씨들은 자전거를 몰아도 혼자 씽씽 내달리는 비싸구려 자전거에만 눈길을 두곤 한다. (4344.7.1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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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래를 짜는 손목


 둘째 갓난쟁이 쉰 날째. 날마다 마흔 장쯤 똥오줌기저귀를 빨 뿐더러, 첫째와 옆지기 옷가지에다가 내 옷까지 빨고 걸레와 행주를 빤다. 저녁나절, 밥 차리느라 미룬 기저귀 열 장을 빨고 나서 물을 짜는데 손목을 못 돌리겠다. 찌르르 하고 아픈데 억지로 참으며 마무리짓는다. 이동안 새 오줌기저귀 두 장이 나오고, 빨래하다가 살짝 쉬며 첫째랑 둘째를 씻긴 다음, 둘째 배냇저고리를 더 빨자니 손목이 참 시큰거린다. 저녁을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는데, 빈 그릇 들고 부시기도 버겁다. 땀을 또 몇 바가지 흘린 터라, 찬물로 몸 좀 씻으려고 하니, 물을 담은 작은 대야 쥔 손이 힘겹다. 집일에 파묻힌 아버지가 제대로 놀아 주지 못해 심심한 첫째는 홀로 방바닥에 앉아 한 시간 즈음 그림책을 본다. 첫째가 재미있게 본 책을 아버지도 보라며 건네는데, 책을 받아 책장을 넘길 힘이 없구나. (4344.7.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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