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한테 책 읽히는 누나


 어머니가 저한테 했듯이, 아버지가 저한테 하듯이, 첫째 아이는 둘째 아이 곁에 누워서 조그마한 책을 위로 척 올린다. 석 돌을 앞둔 첫째는 한글은커녕 알파벳 하나 모른다. 한글책인지 영어책인지 모르면서 영어 그림책을 어떻게 골라내어 펼쳐 들고는 제 동생한테 읽어 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쫑알쫑알 말마디를 쉴새없이 읊는다. 펼친 쪽에서 웬만큼 쫑알쫑알 했다 싶으면 가슴에 책을 대고 다음 쪽으로 넘겨 다시 쫑알쫑알 노래를 한다.

 요즈음 들어 집일에 너무 치이면서 첫째한테 그림책 읽히기를 거의 못하며 지나간다고 새삼 깨닫는다. 어머니는 몸이 아프고, 아버지는 집일에 허덕이느라, 첫째랑 살가이 어깨동무하면서 그림책을 읽지 못하는데, 첫째 아이는 제 갓난쟁이 동생한테 어여쁜 짓을 하는구나. (4344.7.1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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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도서관 책읽기


 책을 좋아하면서 살아오던 서른네 살에 도서관을 차렸다. 섣부른 일이 아닐까 싶기도 했으나, 좋아하는 일에는 이르거나 늦거나 할 까닭이 없다고 여겼다. 좋아하니까 훨씬 일찍 글쓰기를 할 수 있고, 좋아하기에 늦깎이에 글쓰기를 할 수 있다. 좋아하니까 너덧 살 나이에 텃밭을 일굴 수 있으며, 좋아하는 만큼 일흔이나 여든에 시골에 땅을 얻거나 빌어 논밭을 보살필 수 있다.

 내가 처음으로 책이 많다고 느낀 곳은 도서관이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를 다니던 2학년 때에 헌책방을 처음 찾아가고 나서는 도서관보다 헌책방이 책이 훨씬 넓고 깊다고 느꼈다. 나라밖 도서관은 모른다. 나라밖 헌책방도 모른다. 나라안 도서관과 헌책방을 다녔을 때에, 나라안 도서관에서는 너무 너덜거리는 흔한 소설책이 지나치게 넓은 자리를 차지해서 못마땅했다. 따지고 보면, 헌책방에서도 ‘팔리는 책’을 더 많이 갖출 수밖에 없으니까, 참고서나 가벼운 소설붙이가 꽤 넓게 자리를 차지한다. 그렇지만, 도서관에 없거나 도서관에 들이지 않는 수많은 책이 들고 나는 헌책방이다. 이 나라 도서관은 ‘도서관 품위’와 ‘도서관 얼굴’과 ‘도서관 크기’와 ‘도서관 책 숫자’ 같은 데에 지나치게 마음을 빼앗긴다. 정작 ‘새로운 책을 꾸준히 사들여 누구라도 손으로 만지며 읽고 정갈히 갈무리하도록 이끄는’ 데에는 마음을 쓰지 못한다.

 헌책방에서도 책을 함부로 다루는 책손이 꽤 많다. 헌책방이니까 헌책을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줄 아는 교수님이나 지식인이 뜻밖에 참 많다. 그렇지만, 헌책방 헌책은 헌책방 일꾼이 ‘팔릴 만하다 싶은 책’을 ‘헌책방 일꾼 돈을 들여 하나씩 고르고 사서 모아 갖춘 책’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이 나라 도서관이 이 나라 헌책방을 따라갈 수 없겠다고 깨달았다.

 나는 서른넷 나이에 내 이름을 걸고 도서관을 열었다. 누구보다 나부터 내가 숨을 거두어 흙으로 돌아갈 날까지 기쁘게 누리며 즐거이 맞아들일 책으로 가득한 사랑스러운 책터를 일구고 싶기 때문이다. 더 늦기 앞서, 아니 늦는다 생각하기 앞서, 내가 조금이라도 몸에 기운이 있고, 내 주머니에 조금밖에 안 되더라도 책을 사는 데에 들일 돈이 얼마쯤 있을 때에, 씩씩하고 당차게 도서관을 마련해서 내 고맙고 좋은 책벗하고 책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이 도서관은 2007년 4월 15일에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 한켠에 처음 열었다. 헌책방거리 한켠에 열었대서 ‘도서관’ 아닌 ‘헌책방’이라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2010년 9월 첫머리에 인천에서 충북 충주 멧골자락으로 도서관을 옮겼다. 이제 2011년에 멧골자락에서 다른 시골자락을 찾아본다. 몸이 아픈 옆지기하고 한창 자랄 첫째를 생각하며 멧골자락으로 들어왔는데, 이 멧골자락으로 사람들이 ‘도서관 책마실’을 나오기 몹시 어려울 뿐더러, 멧골자락답지 않게 자동차가 너무 많이 드나들어 집식구한테 썩 좋지 못한 터전인 줄 나중에서야 알아챘다. 우리 도서관과 우리 집식구는 새로운 자리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새 터와 새 자리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저 믿는다. 나 스스로 내가 서른일곱 해 동안 그러모아 알뜰히 아낀 이 책들을 사랑스레 품으면서 살가운 책벗하고 책삶을 나눌 만한 아름다운 시골자락이 한국땅에 아예 없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걱정거리라면, 우리 식구한테는 돈이 거의 없다. 다달이 먹고사는 데에 쓸 돈으로도 허덕이며 지낸다. 그런데 이렇게 지내면서도 책은 참 부지런히 사들인다. 어쩌면, 우리 식구는 자가용을 안 몰고 수많은 기계나 전자제품을 셈틀과 다른 한두 가지를 빼고는 하나도 안 쓰니까 이럭저럭 버티듯 이냥저냥 살림을 꾸린다 할는지 모른다. 살림돈이 빠듯할 때에 몹시 고맙게 푼푼이 보태는 벗바리가 있기도 하다. 벗바리는 어쩌면 살림돈이 바닥을 치며 해롱거릴 때에 용케 알아채어 뒷배를 해 주는지 놀랍기만 하다.

 갈 데는 마땅히 없고, 오라고 부르는 데는 아직 없지만, 방바닥에 큼지막한 길그림 종이를 척 펼친다. 여기도 참 좋은 시골이고 …… 둘레에 좋은 멧자락이 둘러쌌고 …… 금강이 흐르고 …… 가까이에 소양호가 있고 …… 외져서 호젓할 만한 시골이고 …… 뭐, 이런 생각 저런 말을 혼자 주절주절댄다. (4344.7.12.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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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1-07-12 09:08   좋아요 0 | URL
좋은 새터를 꼭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저도 책마실을 가고 싶네요.
첫아이가 벌써 저리 컸네요. 귀해라.

파란놀 2011-07-12 16:43   좋아요 0 | URL
혼자서 저 책더미에 기어 올라간답니다 @.@

마녀고양이 2011-07-12 15:04   좋아요 0 | URL
멋진 도서관 자리를 찾으실 수 있으면 좋겠네요.
원하시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사시는 모습이 좋아보입니다.

파란놀 2011-07-12 16:43   좋아요 0 | URL
앞으로는 몇 만 권 책을 묶는 데에 시간을 들이지 않고, 몇 만 권 책을 천천히 즐기며 나눌 만한 좋은 시골자락을 찾고 싶어요... ㅠ.ㅜ
 
일본 만화현대사
요시히로 코스케 지음 / 우용출판사 / 1998년 7월
평점 :
절판




 일본만화는 일본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꽃
 [만화책 즐겨읽기 27] 요시히로 코스케, 《일본 만화 현대사》



 일본사람은 한국사람하고 견주어 만화책을 훨씬 많이 읽습니다. 일본사람은 한국사람하고 대면 여느 책 또한 더욱 많이 읽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대서 더 훌륭하지는 않습니다. 책을 많이 알기에 더 똑똑하다거나 더 슬기롭다거나 더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책이란 온누리에서 가장 빛나는 열매가 아닐 뿐더러, 책을 읽는 사람은 나날이 더욱 고개를 숙일 줄 아는 길을 배우는 사람이니까요.

 일본사람은 만화이고 책이고 참 많이 읽으면서, 만화이고 책이고 참 많이 내놓습니다.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 많고, 책이 될 글을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책으로 묶는 사진도 많이 찍습니다.

 꼭 책으로 묶으려고 만화를 그리거나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하지는 않겠지요. 널리 팔리거나 읽히려는 뜻으로 그리는 만화라거나 쓰는 글이라거나 찍는 사진이라 할 수 없겠지요. 어찌 보면 어슷비슷한 만화나 글이나 사진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피면 모두 다르며 저마다 다른 만화요 글이요 사진입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처럼 처세나 경영이나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을 다는 ‘책 아닌 책’이 꽤나 많으나, 삶과 죽음과 사랑과 믿음을 다룬 ‘책다운 책’ 또한 무척 많아요. 이와 달리, 이 나라 한국에서는 삶과 죽음과 사랑과 믿음을 다루는 ‘책다운 책’이 뜻밖에 몹시 적습니다. 처세나 경영이나 자기계발을 밝히는 책은 이러한 책대로 외곬로 흘러 한때 반짝하는 종이뭉치에 그치고, 인문학과 사회학과 과학을 다루는 책은 이와 같은 책대로 앎조각을 만지작거리는 데에 그치기 일쑤입니다. 꾸준히 되읽히면서 오래도록 곰삭여 마음밥이나 마음동무로 둘 만한 책은 좀처럼 태어나지 못합니다.


.. 이러한 신인 기용의 성공은 다른 잡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며, 현재는 거의 모든 잡지들이 신인 발굴에 무척이나 신경을 쓰고 있지만, 이 잡지만큼 성공한 예는 별로 없는 것 같다 … 만화의 융성은 데쓰카 오사무라는 천재의 수법을 많은 작가들이 모방하고 계승함에 따라 나름대로의 스타일을 창조해 내며 발전해 온 결과이다. 그렇지만 리바이벌된 작품은 결국 반복이라는 것일 수밖에 없으며, 새로운 형태를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 데쓰카의 만화는 작품 안에 테마성이나 주장을 명확히 내세운 최초의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16, 48∼50, 85쪽)


 한국말로 옮겨지는 일본책이 대단히 많습니다. 팔릴 만하니까 옮기는 책일 테고, 읽을 만하니까 옮기는 책이겠지요. 그러면, 일본사람은 한국책 가운데 어느 책을 골라서 일본사람한테 팔 만하다고 여기거나 읽힐 만하다고 생각할까요. 한국사람이 내놓은 책 가운데 어떠한 책을 일본사람한테 기꺼이 선보이거나 드러내거나 나눌 만한가요.

 때때로 한국 만화가 일본으로 옮겨지기도 합니다. 드문드문 한국 문학이 일본으로 옮겨지곤 합니다. 그렇지만, 일본책을 한국책으로 옮기듯, 온갖 갈래 온갖 사람들 온갖 이야기를 골고루 일본책으로 옮기는 일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어쩔 수 없다 여길는지 모르지만, 한국사람 삶과 눈썰미와 넋은 너무 뻔하거나 지나치게 틀에 박히거든요. 한국사람은 스스로 제 삶을 너무 좁게 가둘 뿐 아니라, 너무 메마르게 내팽개칩니다.

 삶이 따분한데 책이 따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삶이 따분하기에 책을 따분하게 받아들일밖에 없습니다. 삶이 빛날 때에 책이 빛날 수 있습니다. 삶이 즐거울 때에 책을 즐거이 맞아들일 수 있어요.

 이 나라에서는 온통 대학입시를 둘러싼 말과 일과 돈이 흘러넘칩니다. 이 나라에서는 오직 막춤을 추는 정치 이야기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무엇이든 서울로만 몰리거나 쏠립니다. 어느 일이건 더 커다랗거나 굵직한 데에만 기울어집니다.

 대학교 아닌 고등학교나 중학교나 초등학교조차 집어치우면서 이 나라 구석구석을 두 발로 밟으며 삶을 배우는 어린이나 푸름이나 어른이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대학교 등록금이 지나치게 비싼 만큼 이 잘잘못을 푸는 일은 맞습니다만, 대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서 어떤 사람으로 키우는가를 깊이 들여다본다면, 기나긴 나날과 어마어마한 돈을 나 스스로 어디에 들여 내 삶을 어떻게 일구어야 아름다우면서 즐겁고 착하면서 참될까 하는 길을 찾을 만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네 해 사천만 원’을 대학교에 바치기만 할 뿐, ‘네 해 사천만 원’으로 내 길을 내 나름대로 어떻게 밝히거나 돌보아야 할까를 생각하는 젊거나 푸르거나 밝거나 맑은 얼이 너무 드물어요.


.. 테마는 달라도 주의깊게 살펴보면 스토리의 클라이막스에 이르게 되면 격투 장면을 등장시키는 것이 20편의 작품 중 3분의 1 이상이나 되고, 더 나아가 스포츠 분야의 만화에서도 승패를 겨루는 일이 일종의 투쟁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작품들이 ‘투쟁’을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잡지들에서도 이런 경향을 살펴볼 수 있다. 도대체 이렇듯 폭이 좁아진 이유는 무엇일까? 인기만화를 본따서 만화를 만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한 가지 색깔로 물들어 버리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 것인가? … 다른 일면을 살펴보자. 소년만화 부분에서 확실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SF만화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 최근에는 만화가 지망생들이 공부도 안 할 뿐만 아니라, 만화가 여러 장르로 확산·침투되어 일종의 폐쇄 상태에 빠져 버렸기 때문에 ..  (28, 52쪽)


 《일본 만화 현대사》(우용출판사,1998)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1998년에 나온 ‘현대사’이니까 2011년에 헤아린다면 ‘좀 낡은’ 이야기로 여길 만합니다. 참말 좀 낡습니다.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를 빛내는 숱한 ‘일본 만화’ 이야기가 깃들지 못하니까요. 더군다나, 이 책을 쓴 요시히로 코스케 님은 ‘당신 스스로 좋아하는 만화밭이 그리 안 넓어’서, 글쓴이 스스로 다룰 줄 아는 만화누리는 그닥 깊거나 너르다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일본 만화 현대사”라는 이름보다는 “일본 소년만화 현대사”쯤으로 붙여야 걸맞다 싶은 책입니다.

 다만, 일본 만화가 흘러온 길을 돌아본다 할 때에, 소년만화만 바라보며 읽든 소녀만화만 바라보며 읽든 어른만화만 바라보며 읽든, ‘만화란 내 삶과 우리 삶에서 어떠한 자리를 어떻게 차지하는가’를 살필 줄 안다면, 소년만화만 다루거나 살핀다 하더라도 “일본 만화 현대 역사”를 찬찬히 훑거나 읽을 수 있어요.

 큰 길에서 작은 길을 보기도 하지만, 작은 길에서 큰 길을 보기도 합니다. 물줄기는 굵직한 물줄기로만 이루어질 수 없어요. 작은 물줄기가 모여 비로소 큰 물줄기가 이루어집니다. 작은 물줄기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작은 물줄기를 알아야 하며, 작은 물줄기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해요. 이러고 나서야 큰 물줄기를 다루든 말든 해야 합니다.

 그리고, 크니 작니 하고 따지기 앞서, 내 삶이 어떠한 물줄기를 이루며 흐르는가를 읽어야 해요. 내 삶부터 읽고, 내 옆지기나 동무나 이웃이나 살붙이 삶을 이루는 물줄기를 읽습니다. 차근차근 눈길을 넓히고 눈썰미를 키우며 눈높이를 다스립니다.


.. 엄밀히 따져 보면 만화 중에는 분명히 수준이 많이 뒤떨어지는 것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본래 그러한 평가는 정부 차원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자·출판사·독자들이 그들 나름대로 판단하는 것은 아닐까? 소설이나 영상·음악·연주 등 모든 ‘표현’ 역시 그러하다. 중요한 것은 ‘예술이냐? 외설이냐?’라는 논의가 아니고, 공급하는 측과 제공받는 측이 서로 그 ‘표현’들에 대해 얼마나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 독자가 만화에서 얻으려 하는 것이 단순히 오락이나 위안뿐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어떤 공감대를 찾고 교훈 같은 것을 얻고자 하기 시작한 것 같다 … 만화를 문화로서 받아들이는 의식은 일반 일간지에서도 거의 없었던 일이 아닐까? 아니, 그것은 신문뿐만 아니라, 실제로 만화를 만들고 있는 편집장들의 이야기이다 ..  (42, 78, 166쪽)


 《일본 만화 현대사》가 아직 판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만화를 좋아하는 이들께서 곁에 함께 두면서 읽으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만화책을 내놓는 출판사에서는 창작만화책만이 아니라, 이러한 만화비평이나 만화역사를 다루는 책도 틈틈이 한국말로 옮겨서 내놓으면 더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목숨이 있고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있어 삶이 있습니다. 삶이 있기에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가 있는 만큼 글과 그림과 사진과 만화와 춤과 노래와 영화와 연극이 있습니다. 여기에, 집안일이 있고 집안살림이 있어요. 아기는 언제나 새로 태어나고 늙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하나둘 흙으로 돌아갑니다.

 돌고 도는 목숨이듯이 돌고 도는 사람입니다. 흐르는 삶이고 물려지는 이야기예요. 이 만화가 있기에 저 만화가 태어나고, 저 만화를 즐기면서 그 만화를 키웁니다.


.. 나이를 꽤 먹은 어른부터 유아까지 같은 만화의 독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만화를 큰 미디어로 성장시킨 이유 중의 하나인 것이다 ..  (186쪽)


 일본은 “나이를 꽤 먹은 어른부터 어린이까지 함께 즐길” 책삶이 무척 깊으면서 너른 나라입니다. 만화책만이 아니라 그림책과 동화책 같은 어린이책도 널리 사랑하고 두루 사랑받는 나라입니다. 일본에서 창작하고 한국에서 옮기는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살피면, 글솜씨뿐 아니라 이야기 얼거리가 매우 뛰어나거나 훌륭하기 일쑤입니다. 일본 그림책이라서 ‘일본 문화와 사회’를 구석구석에 담아야 하지 않으나, 애써 덜어야 하지 않아요. 일본 그림책을 읽다 보면, 이 일본 그림책을 읽을 일본 어린이와 어른은 참 즐겁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일본 만화책을 읽을 때에도 그래요. 이와 달리, 한국에서 나온 한국 그림책을 읽으면서 ‘이 한국 그림책은 어느 한국사람이나 어떠한 사람이 읽으라고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길 없습니다. 한국 만화책을 읽으면서도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일본에서 만화를 그리는 이들은 “나이를 꽤 먹은 어른부터 어린이까지 함께 즐길” 삶·사랑·사람 이야기를 만화에 담으려고 땀을 흘립니다. 한국 만화쟁이와 글쟁이와 그림쟁이와 사진쟁이는 이 대목을 잘 헤아리거나 알아채거나 느끼거나 톺아볼 수 있기를 꿈꿉니다. (4344.7.12.불.ㅎㄲㅅㄱ)


― 일본 만화 현대사 (요시히로 코스케 글,김보선 옮김,우용출판사 펴냄,1998.7.10./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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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숭아 씨앗


 복숭아를 달콤하게 먹고 나면 굵직한 씨앗이 나옵니다. 복숭아 씨앗은 딱딱한 껍데기에 싸여 안쪽에 곱게 깃듭니다. 이 씨앗이 보드라운 흙 품에 안겨 힘차게 뿌리를 내리면 복숭아 새싹이 돋고, 이 복숭아 새싹이 무럭무럭 자라서 복숭아나무로 큰다면, 사람들이 맛나게 즐기는 복숭아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 복숭아 씨앗부터 돌보아 어린나무로 키운 한 그루를 장만해서 복숭아나무를 심어 복숭아를 얻을 수 있겠지요. 누군가 다른 여러 가지 일을 해서 돈을 번 다음 복숭아 열매를 저잣거리에서 장만할 수 있을 테고요. 어느 쪽이 되든 복숭아를 먹기는 똑같습니다. 스스로 복숭아나무를 돌보며 복숭아 열매를 얻든, 돈으로 저잣거리에서 복숭아 열매를 사든, 복숭아를 먹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러나, 복숭아 한 알을 먹는 매무새와 삶은 서로 다릅니다.

 손수 모판을 만들어 모를 심은 다음에 피를 뽑고 논둑 김을 맨 다음 낫으로 벼를 베어 낟알을 하나하나 떨군 다음 키질을 해서 돌을 고르고, 나중에 방아를 찧어 겨를 벗긴 다음 쌀을 조리로 일고 나서 잘 씻어서 쌀뜨물로 된장국을 끓이고 이 쌀로 밥을 지어 먹을 때에는, 그저 돈만 벌어 쌀을 사다 먹을 때하고 같을 수 없겠지요.

 어느 쪽이 가장 옳은 삶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쪽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자가용을 몰면서 살아야 합니다. 자가용으로 씽씽 내달리지 않고서는 바쁜 일을 치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몹시 바쁘고 힘들면서도 자가용을 몰지 않고 자전거를 몰거나 두 다리로 걷거나 버스나 전철을 탑니다.

 옳으니 그르니를 굳이 따지지 않아도 됩니다. 꼭 따져야 한다면, 내 삶을 어떻게 빛내고 내 꿈을 어떻게 펼치며 내 하루를 어떻게 즐기느냐를 따져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새벽부터 밤까지 집일과 아이돌보기를 하느라 꼬박 보내느라 책을 한 번도 손에 쥐지 못합니다. 아니, 손에 책을 쥐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손에서 물기 마를 겨를이 없으니 이대로 휘몰아치면서 눈이 저절로 감겨 고스란히 곯아떨어질 판입니다. (4344.7.1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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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가꾸는 어린이문학 - 이오덕 문학정신 이오덕 교육문고 2
이오덕 지음 / 고인돌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문학으로 어린이와 어른을 함께 지키는 길
 [어린이책 읽는 삶 2] 이오덕, 《삶을 가꾸는 어린이 문학》(고인돌,2010)


 1925년에 태어나 2003년에 흙으로 돌아간 이오덕 님은 1984년에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백산서당)을 내놓습니다. 1977년에 《시정신과 유희정신》(창작과비평사)을 내놓은 다음 두 권째 내놓은 어린이문학 비평입니다. 《시정신과 유희정신》은 2005년에 ‘굴렁쇠’ 출판사에서 새옷을 입혀 다시 냈고,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은 2010년에 ‘고인돌’ 출판사에서 새옷을 입히며 책이름을 고쳐서 다시 냅니다.

 이오덕 님이 2003년이 아닌 2011년까지 사셨다면 《시정신과 유희정신》이나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에 뒤이은 새로운 어린이문학 비평을 내놓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가만히 살피면, 2002년에 몸이 많이 아프던 나날에도 《어린이책 이야기》(소년한길)와 《문학의 길 교육의 길》(소년한길)을 내놓았습니다. 2001년에도 병하고 싸우면서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소년한길)를 내놓았어요. 《시정신과 유희정신》은 1970년대까지 이루어진 이 나라 어린이문학을 발판으로 어린이 삶과 넋을 사랑하고 믿으려는 이야기를 담았다면,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은 1980년대까지 이루어진 이 나라 어린이문학을 깊이 헤아리면서 빚은 어린이사랑과 어린이배움입니다. 2001년과 2002년에 내놓은 세 가지 어린이문학 비평은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로 접어드는 이 나라 어린이문학이 앞으로 어떠한 길을 씩씩하며 착하게 걸어가면 아름다울까를 돌아보는 생각밭입니다.

 1977년부터 2002년까지 이루어진 어린이문학 비평책을 읽다 보면, 이 나라에 새로 태어나는 어린이문학을 샅샅이 톺아본 흐름을 짚을 수 있기도 하지만, 이동안 이오덕 님 스스로 당신 말과 넋을 더 단단하며 알차게 가다듬으려고 애쓴 발자국과 손길을 느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동안 이오덕 님이 내놓은 또다른 열매 가운데 하나는 《우리 글 바로쓰기》(한길사) 세 권이거든요. 1977년에는 우리 말글을 올바로 쓰는 데에는 마음을 쓰지 못했고, 1984년에는 조금 마음을 기울였으나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2001년과 2002년에는 아주 깊이 파고들면서 당신 말씨와 말투를 많이 고치거나 바로잡았습니다. 2010년대까지 사셨더라면 2001년과 2002년에 이룬 ‘글쓴이 말매무새 거듭나기’를 한껏 알차게 꽃피웠으리라 생각합니다.


.. (동화란) 장사하는 아주머니나 농민이나 노동자나 사무원이나 누구든지 가까이 다가가고 즐길 수 있다. 그런 문학이라야 진짜 문학이다 … 어려운 한자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깨끗한 우리 말로 바꿀 수 있으면 우리 말로 쉽게 풀어서 쓰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절실한 생각은 절실한 체험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흐리멍텅한 생각은 체험의 바탕이 없는 데서 나오고, 머리로 억지로 만든 실제로 없는 얘기는 어설프고 재미없는 동화가 된다 … 아무리 시가 개성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많은 독자들의 가슴을 건드리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20, 40, 59, 163쪽)


 2010년에 다시 태어난 《삶을 가꾸는 어린이 문학》(고인돌,2010)이라는 책이지만, 이 책은 2010년 책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1984년 책으로 읽습니다. 1984년에 이룬 열매이면서 2010년이든 2020년이든 2030년이든 얼마든지 새롭게 읽고 아로새기면서 내 삶길과 삶결을 보듬는 길동무나 밑거름으로 삼을 책으로 읽습니다.

 이오덕 님은 어린이문학을 바라보는 글을 쓰면서, 이 글을 바탕으로 어린이가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살아갈 터전을 생각합니다. 어린이가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살아갈 터전을 생각하면서, 이러한 터전은 어린이를 비롯해 모든 어른이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살아갈 터전이 되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어린이한테만 좋으며 훌륭한 밥을 ‘쌀밥과 책밥과 말밥과 배움밥’으로 먹여야 할 뿐 아니라, 어른부터 좋으며 훌륭한 밥을 ‘쌀밥과 책밥과 말밥과 배움밥’으로 함께 먹으면서 즐겨야 한다고 거듭 힘주어 이야기합니다.

 마땅한 노릇입니다. 어른 스스로 학벌 사회와 비정규직 사회를 단단히 세우고서는 아이들한테 이 나라에서 예쁜 어른으로 자라도록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한테 영어나 한자나 교과서를 잘 가르친다 한들, 어른이 빚은 학벌 사회와 비정규직 사회에서 어떤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겠어요.

 모든 아이가 어른으로 자라고 나면 도시에서 아파트를 얻어 회사원이 되는 길로만 등떠미는 제도권 학교교육인데, 이러한 얼거리를 그대로 둔 채 아이들이 착하거나 참답거나 아름답게 살도록 돌볼 수 없어요. 아이들은 그림책에서만 꽃을 보고, 그림책에서만 흙을 만지며, 그림책에서만 꿈나라를 밟습니다. 아이들은 동화책에서만 구름을 바라보며, 동화책에서만 고양이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동화책에서만 이웃사랑을 나눕니다. 정작 아이들이 두 다리를 딛는 이 터전에서는 살가이 사귈 동무나 이웃을 찾기 어렵습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집을 나서면 곧바로 자가용에 올라타고, 자가용에서 내리면 높다랗거나 깊은 건물로 들어섭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햇볕을 쬐거나 낮하늘이나 밤하늘을 올려다볼 틈이 없어요.


.. 일본사람들이 자기 나라의 문화 유산을 아끼고 가꾸려는 몸가짐은 대단하며, 아이들도 그렇게 넉넉하게 기록된 옛이야기를 즐겨 읽으면서 자라고 있다 … 글쓴이 자신이 어린이가 사는 현장에서 함께 숨을 쉬는 민중성을 몸소 겪어야 한다 … 오늘날 어린이들이 교과서에 나오는 어린이같이 그렇게 행복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외국 동화에 나오는 꿈같은 세계의 어린이들과 매우 다른 역사의 삶 속에 숨쉬고 있다는 것, 이것을 모르고서 동화고 소설이고 시를 쓴다면, 그런 글쓴이나 시인이 역사와 겨레에서 동떨어진 슬픈 사람이 될 것이란 사실은 불을 보는 일보다 더 환하다 … 교훈을 너무 밖으로 드러내어 보이는 훈화나 도덕 교과서의 글같이 되었다면 그것은 문학작품이라 할 수 없지만, 교훈성 그 자체를 죄다 빼려고 하는 것은 어린이문학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교훈을 꺼리고 무서워하는 사람일수록 재미없고 해로운 작품을 쓰는 것이다. 교훈이 없다는 것은 글쓴이의 의도가 없고 사상이 없다는 것이고, 역사와 사회·어린이에 대한 믿음과 정열·사랑이 없는 것을 말해 준다 ..  (84, 98∼99쪽)


 2010년에 책이름을 《삶을 가꾸는 어린이 문학》으로 바꾸었습니다만, 이오덕 님이 여느 때에 들려준 말씀 가운데 하나가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입니다. 글쓰기와 배움(교육)과 글쓰기 가르치기 세 가지가 ‘삶을 가꾸는 일’이 된다는 뜻입니다. 삶을 가꾸는 일이란, 삶을 돌보거나 일구거나 사랑하거나 믿거나 좋아하거나 보듬거나 일으키거나 껴안거나 어깨동무하거나 즐기거나 다스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돌보거나 일구거나 사랑하기로는 삶만이 아닙니다. 동무도 사랑하고 이 겨레도 돌보며 푸나무도 껴안습니다. 시골도 사랑하고 멧등성이도 보듬으며 자전거도 즐깁니다. 이름을 바꾸어 본다면, ‘자전거를 사랑하는 글쓰기 교육’이 되기도 하고, ‘설거지를 즐기는 글쓰기 교육’이 되기도 해요.

 어떤 틀에 박힌 이야기가 아니며, 어떤 틀에 매려는 교훈이 아니에요.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는 길을 어른부터 밝히면서 어른이 좋은 짝꿍을 사귀어 혼인을 하면서 아이를 낳아 어버이가 될 때에, 내 아이한테 어떠한 삶말과 삶책과 삶꿈과 삶사랑을 물려줄 수 있느냐를 찾자는 이야기입니다.

 이리하여,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이라 할 때에는 “어른을 지키는 문학”이기도 하고, “사람을 지키는 문학”이기도 합니다. 이오덕 님이 돌아보기에, 이 나라 어른들은 어린이도 못 지키고 어른도 못 지키기 때문에 이렇게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어린이문학 비평을 내놓았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요즈음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데, 어린이문학이란 어린이만 즐기는 문학이 아닌 줄 아직 어른들은 제대로 깨닫지 못해요. 어린이부터 즐기는 어린이문학이고, 글을 깨친 사람 누구나, 이를테면 여느 노동자나 시골 흙일꾼 누구라도 읽거나 즐기는 어린이문학입니다. 권정생 님이 이룬 어린이문학은 어린이만 즐기는 문학이 아니라 ‘어린이가 읽을 수 있는 글’ 눈높이로 맞추어서 할머니 할아버지도 기쁘게 즐기는 문학이에요.

 곧,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일 때라야 어른을 지키고 사람을 지킵니다. 이 땅을 지키고 이 나라를 지킵니다. 핵무기나 군대가 이 나라를 지키지 않습니다. 어린이문학이 이 나라를 지킵니다. 경제성장률이나 대기업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습니다. 어린이문학이 이 나라를 지켜요.

 이 나라를 지키는 가장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고 참다운 길이 무엇인가를 밝히려고 1984년에 내놓은 책이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입니다.


.. 어린이문학은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 밑뿌리로 되어 있어야 하는 문학이다.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란 아이들의 귀여움에 빠져 버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의 마음, 아이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깊이 이해하여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풀어 주고, 그들이 사람답게 자라나도록 하려는 정신이 곧 어린이 사랑이다 … 지금까지 학교에서 진행되어 온 사람됨을 짓밟는 시험경쟁 교육은 어떻게 해서라도 고쳐야 하겠다. 단편 지식을 집어넣고 외우는 경쟁 대신에 자발성과 자율성을 우러르고 창의성을 뻗쳐 주는 종합 사람교육으로, 물질 가치만을 가장 높게 생각하는 교육에서 정신 가치를 탐구하는 철학교육과 예술교육으로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 …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참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어린이문학인이라면 마땅히 어린이가 참되게 자라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이고, 이를 없애려고 애쓸 것이다 … 어린이교육에서 철학이고 과학이고 역사고 모두 문학으로 해 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어린이문학은 철학과 종교와 과학과 역사와 어학 들을 모두 아우르며 그것을 이론으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문학으로 진리로 깨닫게 하는 데 귀한 값어치가 있습니다 ..  (209, 256∼257, 264쪽)


 2010년에 이르러 책이름이 바뀐 채 다시 나옵니다. 다시 나온 책을 새롭게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2010년에 이 책에 새 이름을 붙여야 마땅한지 찬찬히 돌아봅니다. 이제, 이 나라 어린이는 어느 만큼 지킨다 할 만하니까, “삶을 가꾸는”이라는 이름으로 고칠 만한지 가누어 봅니다.

 이 나라 어린이가 어린이답게 어린이 삶을 꾸리면서 어린이다운 사랑을 마음껏 누리거나 나누면서 활짝 웃음꽃을 피우니, 이제는 “어린이를 지키는” 일은 안 하거나 살짝 손을 내려놓아도 될는지 생각합니다. 초등학교 낮은학년부터 거칠거나 막된 말을 쉬 내뱉는 아이들이 서울부터 제주까지 가득가득한데, 이 나라에서 “어린이를 지키는” 일은 그만두거나 그치거나 멈추어도 될 만한가 헤아립니다. 초등학교 영어 교육에 뒤이어 초등학교 한자 교육까지 다시 시키려 하는 정부요 언론이요 학습지회사요 교사요 지식인이요 어버이인데, 어느 누구도 “어린이를 지키는” 데에는 마음을 안 쏟아도 괜찮은지 알쏭달쏭합니다.

 어린이한테 착한 삶과 참다운 넋과 아름다운 꿈을 보여주거나 물려주거나 가르치거나 함께하는 어른이 거의 안 보이는데, 이제는 “어린이를 지키는” 일은 이름부터 그닥 알맞지 않다고 여기는 일이 옳거나 바르거나 괜찮은지 아리송합니다.


.. 어린이문학을 신앙처럼 믿고 평생을 가난한 겨레의 어린이를 생각하며 살아가신 (이원수) 선생은 겨우내 차가운 몸으로 언 땅에 나 있는 밀과 보리를 덮어 주고 나뭇가지를 안아 주다가 드디어 봄이 오자 녹아 버리는 때묻은 눈 바로 그것이었다 …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에 나오는) 이쉬가 온갖 문명의 이기를 보았을 때, 어떤 것은 재미있게 여기고 어떤 것은 놀라워 하지만, 다른 어떤 것은 대수롭지 않게, 또는 시시하게 여기는 것이 참말 재미있다. 그런 이쉬의 취향을 샅샅이 살펴보면 문명 세계의 빈 구멍이 남김없이 드러날 것 같다 … 내가 보기로 이쉬의 이런 취향은 오늘날 눈먼 기계문명을 날카롭게 비판한 말없는 철학이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1911년 황금문 공원에서 해리 파울러가 대륙횡단 비행을 위해 이륙했을 때 모든 사람이 흥분했지만 이쉬만은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만일 이쉬가 오늘날까지 살아 있었더라면 온갖 원자무기와 우주항공 물체에 대해서 한층 더 차가웠을 것이 틀림없다 ..  (307, 508∼509쪽)


 어린이를 안 지키면 사랑할 줄 모릅니다. 어린이를 안 지키는 어른은 어린이도 어른도 사랑할 줄 모릅니다. 지키는 일은 감싸고 도는 일이 아닙니다. 지키는 일은 울타리를 치는 일이 아닙니다. 지킨다 해서 예방주사를 놓는다거나 방부제를 먹이는 일이 아닙니다.

 지키는 일이란 사랑하는 일입니다. 지키는 일이란 아이 스스로 메마르거나 거친 이 땅에서 씩씩한 몸가짐과 맑은 마음가짐으로 착한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도록 보살피면서 함께 살아가는 일입니다.

 아이들이 어린이문학을 참답게 즐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치고 중학교 1학년이 되더라도 어린이문학을 실컷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니 갑작스레 청소년문학만 즐겨야 할 아이들이 아닙니다. 어린이문학은 고등학생도 대학생도 즐기는 문학입니다. 회사원도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즐길 어린이문학이고, 할머니와 아저씨와 아줌마와 할아버지가 함께 즐기는 어린이문학이에요.

 청소년문학이란 청소년부터 즐기는 문학입니다. 어른문학은 말 그대로 어른부터 즐기는 문학이 되겠지요. 어른문학을 쓰거나 즐기려면, 어느 어른이더라도 어린이와 청소년을 거치니까, 어린이문학과 청소년문학이 예쁘게 바탕이 될 때라야 비로소 예쁘게 어른문학을 꽃피웁니다. 어린이문학을 지키지 않는 터전에서 어른문학도 어른사회도 지킬 수 없하고, 지킬 힘을 스스로 북돋우지 못합니다. (4344.7.11.달.ㅎㄲㅅㄱ)


― 삶을 가꾸는 어린이 문학 (이오덕 글,고인돌 펴냄,2010.7.20./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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