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사람들 고운 삶을 고운 사진으로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23] 한금선, 《꽃무늬 몸뻬 막막한 평화》(안목,2009)

 


 여느 책방에서는 팔지 않는 사진책 《꽃무늬 몸뻬 막막한 평화》(안목,2009)를 서울 종로구 통의동에 있는 ‘사진위주 류가헌’에서 장만합니다. ‘류가헌’은 2011년 12월 한 달 동안 ‘사진책잔치(포토북페어)’를 열어요. 작지도 크지도 않게 알맞춤한 사진쉼터 류가헌에서 씩씩하게 꾸리는 사진책잔치는 어여쁩니다. 이 사진책잔치에 마실하는 길에 《꽃무늬 몸뻬 막막한 평화》를 만났습니다. 반갑게 펼치고 기쁘게 장만합니다.

 

 《꽃무늬 몸뻬 막막한 평화》는 이 사진책 내놓은 안목 출판사 누리집(http://anmoc.com)에서 살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인터넷 아닌 책방에서 손으로 만지작거린 다음 장만하고 싶어 책이 나온 지 이태 만에 비로소 구경하면서 책장을 넘깁니다.

 

 흑백사진으로 이루어진 꽃무늬 몸빼 할머니 할아버지 아줌마 아저씨 모습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는, 책끝에 붙은 만나보기 글을 읽습니다. 권은정 님이 한금선 님을 만나 주고받은 이야기 가운데 “한참 전에는 우울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요즘은 사진이 따뜻하다고 해요. 더러는 같은 사진을 두고도 그렇게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하하하(141쪽).”라는 대목을 찬찬히 곱씹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지난날 한금선 님 사진은 ‘사람들이 슬프게 여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찍었’기에 지난날 한금선 님 사진을 읽을 때에 ‘슬프구나’ 하고 느낄 만할 수 있어요. 2009년 《꽃무늬 몸뻬 막막한 평화》에서는 사람들이 슬프게 여기기를 바라지 않는 사진이었으니까, 곧 ‘사람들이 내 살가우며 가까운 이웃이요 동무요 한식구라고 여기며 받아들이기를 바라면서 찍었’기에 2009년 이 사진책은 ‘따뜻하다’고 느낄 만하구나 싶어요.

 

 한금선 님은 잇달아 “시설 안에 있는 이들이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요. 우리 모두에게 그 정서를 경험하게 해 주고 싶은 거지요. 그분들에게는 한 공간의 주인공이 되는 시간을 만들어 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한 권의 책을 만들어 지난한 우리 삶의 한 단면을 채워 왔던 그분들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 드리려고 해요(142∼143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참말 이 이야기 그대로 한금선 님은 ‘남다르지 않은 사람’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남다르지 않은 사람들 남다르지 않은 삶을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남다르지 않기에 남다르게 바라볼 까닭이 없는 사람들 수수한 이야기를 사진으로 옮깁니다.  꾸밈없이 마주하고 즐거웁게 어우러질 좋은 사람들 꿈을 사진으로 빚어요.

 

 사진책을 덮습니다. 며칠 뒤 사진책을 다시 펼칩니다. 또 사진책을 덮습니다. 이러고 며칠 뒤 사진책을 거듭 펼칩니다. 보름 남짓 이러기를 되풀이합니다. 아이가 먹을 밥을 차리고, 아이가 입을 옷가지를 빨래하며, 아이와 드러누워 잠잘 집안을 쓸고닦습니다. 두 손에 물기 마를 겨를이 없다고 늘 느끼면서 문득 생각합니다. 고운 사람들 고운 삶을 고운 사진으로 담는다고. 사랑스러운 사람들 사랑스러운 삶을 사랑스러운 글로 엮는다고. 좋아하는 사람들 좋아하는 삶을 좋아하는 그림으로 선보인다고.

 

 사진기를 쥐며 어떤 사진이야기 하나 빚으려는 분들 누구나 이 생각을 예쁘게 건사하면 반갑겠습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서 좋아하는 사진을 찍어야 해요. 가난하거나 불쌍하거나 슬픈 사람을 애써 만나며 가난하거나 불쌍하거나 슬픈 이야기를 보여주려 할 까닭이 없어요. 사랑할 사람을 사귀면서 사랑할 이야기를 글·그림·사진·춤·노래·연극으로 빚으면 즐거워요.

 

 함께 말을 섞고픈 사람들을 만나고 말을 섞으면서 사진을 찍으면 돼요. 같이 밥을 먹고 나란히 밤별을 올려다보고픈 이와 얼크러지면서 사진을 찍으면 돼요.

 

 사진은 고발하지 않아도 돼요. 고발하고프다면 고발사진을 찍으면 되겠지요. 기사로 내보내고 싶으면 보도사진을 찍으면 되고요. 내 사진이 고발사진이라면 고발사진 느낌을 물씬 살리면 됩니다. 내 사진은 보도사진이라 할 때에는 그야말로 신문이나 잡지에 번쩍 하고 실려 번쩍 하고 놀래키도록 보도사진을 찍으면 돼요.

 

 시골집에서 두 아이랑 옆지기하고 살아가는 나는 고발사진을 찍을 일이 없고 보도사진을 찍을 까닭 또한 없습니다. 나는 네 식구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언제나 즐거이 사진꿈으로 북돋우면 넉넉해요. 나는 사진기를 손에 쥐면서 사진꿈에 젖어요. 사진기를 만지작거리면서 사진빛을 누려요. 즐거이 찍은 사진을 다달이 한 차례쯤 종이에 뽑아 음성에서 살아가는 내 어버이와 일산에서 지내는 옆지기 어버이한테 편지를 적어 띄우면서 사진길을 걷습니다. 내 사진을 가장 좋아할 사람은 누구보다 우리 아이요 옆지기이며 어버이예요. 그래서 나는 내 사진삶을 ‘이야기사진’으로 일구어요. ‘사랑사진’으로 빚고 ‘시골사진’이랑 ‘살림사진’으로 여깁니다.

 

 사진책 《꽃무늬 몸뻬 막막한 평화》를 생각합니다. 한금선 님이 붙인 이름처럼 “꽃무늬 몸뻬”가 “막막한 평화”로 마무리됩니다. 아, 이 사진책 ‘남다르지 않은 사람들 남다르지 않은 이야기’는 “꽃무늬 몸뻬” “어여쁜 하루”가 아닌 “막막한 평화”로 마무리할밖에 없군요.

 

 이 사회가 이렇게 이끌기 때문일까요. 우리 스스로 이처럼 바라보기 때문인가요.

 

 사진책과 사진이야기에 붙는 이름이 “꽃무늬 몸뻬”이기만 했다면, “꽃무늬 몸뻬” “꽃내음 밥상”이었으면, 꽃무늬가 꽃송이 꽃누리 꽃내음 꽃열매 꽃빛 꽃꿈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으면, 참 아리따웠으리라 생각합니다. (4344.12.21.물.ㅎㄲㅅㄱ)


― 꽃무늬 몸뻬 막막한 평화 (한금선 사진,안목 펴냄,200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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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금선 님 다른 사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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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이갑철 지음 / 류가헌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가을날, 사진과 함께 숨을 쉬다
 [찾아 읽는 사진책 76] 이갑철, 《가을에》(류가헌,2011)

 


 이 겨울에 대청마루로 스미는 볕살을 누립니다. 우리 집 네 살 아이는 대청마루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노래를 합니다. 쿵쿵 발을 구릅니다. 이리 달리고 저리 내닫습니다. 나무널로 지은 대청마루 밟는 느낌이 좋을까요. 맨발로 쿵쿵 달릴 때마다 발바닥부터 머리카락까지 올라오는 느낌이 신날까요.

 

 아이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내 어린 날을 돌이킵니다. 인천에서 충남 당진으로 내 어버이를 따라 나들이를 하노라면, 대청마루 밟는 느낌이 새삼스러웠습니다. 곧장 해를 바라보는 대청마루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추운 대청마루입니다. 여름에 발바닥으로 느끼는 마루결이랑 겨울에 발바닥으로 받아들이는 마루결이 사뭇 달라요. 겨울날 쉬를 누러 대청마루에 발을 디디면, 또 신을 꿰려고 대청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저 밑 신발을 찾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 쉬를 누고 돌아와 대청마루에 손을 디디면, 이 차가운 기운이 얼마나 파르르 떨리면서 올라오던지요. 얇은 창호종이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또 얼마나 차가운데, 방바닥은 뜨끈뜨끈한 불이 올라오던지요.

 

 두 아이와 옆지기랑 살아가는 아버지로서 돌아봅니다. 이런 시골집에서 살아가리라 생각하지 못했을는지, 꿈꾼 적이 없었는지 돌아봅니다. 어린 날 살던 인천 오래된 아파트는 마루가 나무바닥이었습니다. 방은 시멘트바닥이었으나, 마루는 나무였어요. 5층 작은 아파트는 연탄을 때도록 되었는데, 연탄 한 장 집어넣어 바닥을 덥히더라도 워낙 추워 마루에 난로를 피우고 이불을 뒤집어써야 했어요. 우리 집은 툇마루 바깥창이 없었기에 방에 달린 창문에는 언제나 성에가 끼고 얼음이 두껍게 맺혔습니다. 아침마다 얼음을 떼내고 걸레질을 하느라 바빴습니다. 이렇게 안 하면 창문에 맺힌 얼음이 툭툭 떨어지거나 얼음 녹는 물이 벽을 타고 줄줄 흘렀어요.

 

 아버지 어머니 태어난 시골집으로 겨울 나들이를 가서 스무 날쯤 지내면, 유리 아닌 종이로 댄 창문에 성에가 끼거나 얼음이 얼 일이란 없습니다. 흙으로 지은 집은 나무로 불을 때고, 어디를 걷든 달리든 놀든 흙을 밟습니다. 내 어릴 적 내 어버이 시골집은 온통 흙누리였어요. 흙이랑 물이랑 풀이랑 바람이랑 햇살이 골고루 하나로 얼크러졌어요.

 

 인천을 떠나 두 해째 시골에서 살아갑니다. 처음 한 해를 보낸 충청북도 멧골자락에서든 올 새 한 해를 보내는 전라남도 시골자락에서든, 마당이나 고샅이나 모두 시멘트길입니다. 애써 도시를 벗어나 시골살이를 누리지만, 흙으로 된 땅을 밟기 만만하지 않아요. 집이며 벽이며 바닥이며 시멘트입니다. 흙이랑 나무로 따로 집을 짓지 않는다면, 하루 내내 시멘트에 둘러싸인 채 시멘트내음을 맡아야 합니다.

 

 흙을 시멘트나 아스팔트나 쇠붙이나 대리석으로 덮어야 문명이 될까요. 흙을 밟지 않아야 세계시민이나 문화시민이 되나요. 나는 ‘시민’이 아니라 ‘군민’이고 ‘면민’이자 ‘마을사람’인데, 조그마한 시골마을 사람으로서 흙을 누리는 길은 꽁꽁 틀어막혀야 하나요.

 

 어릴 적 국민학교 운동장은 흙땅입니다. 어릴 적 으레 갯벌에 놀러다니고, 흙 있는 자리를 찾아다니며 동무들하고 놀았습니다. 흙이 있어야 땅바닥에 금을 긋고 놉니다. 시멘트나 아스팔트로 된 땅바닥에서 놀자면 학교에서 분필 몇 자루 훔쳐야 합니다. 또는 바닥에 대고 그을 때 하얗게 묻어나는 돌멩이를 어디에선가 주워야 합니다.

 

 학교 운동장 흙땅에서 공차기를 하고 공놀이를 하며 즐거웠습니다. 달리다가 넘어져도 조금 까질 뿐, 때로는 피가 살짝 날 뿐, 어디 뼈가 부러지거나 으스러지지 않아요. 사내아이는 누구나 얼굴 몇 군데 흙땅에 넘어지거나 미끄러지며 긁힌 자국이 있습니다. 긁혀 피가 나더라도 모두들 똑같으니 옷섶으로 슥슥 문지르고 끝납니다. 무릎이 까지면 살짝 이맛살 찡그리고 절뚝이다가 어느새 아까와 똑같이 내달리며 놉니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인천 중구 신흥동3가 연탄공장 바로 곁, 철길하고 이웃한 국민학교에서 맞이한 운동회는 언제나 두근두근 설레는 놀이마당입니다. 운동회를 앞두고 봄부터 가을까지 날마다 ‘방과 후 연습’을 두어 시간 남짓 해야 했지만, 운동회 하루 놀 생각으로 이 고단한 ‘훈련 같은 연습’을 잘 치렀습니다. 운동회를 한 달 앞두면 연습은 네 시간으로 늘어났고, 각목을 무시무시하게 휘두르는 교사들 앞에서 움찔거리면서도 운동장 흙땅에서 온몸이 누렇게 바뀌어도 잘만 뒹굴었어요. 날마다 체육복을 빨아도 날마다 방과 후 연습을 하느라 체육복은 너덜너덜 흙투성이가 되고, 연습을 마치면 이 너덜너덜 흙투성이 체육복차림으로 또 몇 시간 신나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갔어요.

 

 이갑철 님 사진책 《가을에》(류가헌,2011)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사진책 《가을에》에 담긴 모습은 시골마을 운동회라 하는데, 시골마을 같지 않은 시골마을 운동회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연대를 살그머니 거슬러오르면, 시골마을 아닌 여느 도시에서도 이와 얼추 비슷한 모습을 쉬 보았으니까요. 1970년대이든 1960년대이든 1950년대이든, 큰도시 한복판에 자리한 국민학교가 아니라면 으레 작은 동산 한둘쯤 옆에 낀 학교였고, 학교 둘레로 풀밭이나 논밭이 있기 마련이었으며, 여느 도시라면 멧꼭대기까지 빼곡하게 들어차는 다닥다닥 작은 집이 있었어요. 어르신들도 손주 운동회 뛰는 모습을 구경 나오고, 조촐히 동네잔치를 이루었어요.

 

 그러고 보면, 《가을에》는 시골마을 운동회를 담는데, 막상 ‘여느 도시 작은 국민학교 작은 운동회’이든 ‘커다란 도시 큰 국민학교 큼지막한 운동회’이든 알뜰살뜰 사진으로 남겨 이야기자락 하나 빚은 일이 거의 없구나 싶습니다. 이 나라 자그마한 분교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분은 있으나, 이 나라 여느 도시 여느 초등학교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이는 없습니다. ‘내가 다닌 학교’ 운동회를 두고두고 다시 찾아가며 사진으로 담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모두들 멀디먼 옛날 옛적 이야기만 헤아릴 뿐, 바로 오늘 바로 이곳 바로 우리 아이들 요즈막 웃음꽃과 눈물바람이 깃든 운동회 파란하늘 흙땅을 살피는 사진이야기 피어나기란 너무 벅찬 노릇이구나 싶어요.

 

 사진책 《가을에》는 사랑스럽습니다. 가을날, 사진과 함께 숨을 쉬는 사람들 싱그러운 꿈을 느낄 만합니다. 누군가 “겨울에”나 “봄에”나 “여름에”를 뒤이어 빚을 수 있다면, 누군가 저마다 다 다른 자리 다 다른 이야기 서린 다 다른 “가을에”를 예쁘게 바라보며 얼싸안을 수 있다면, 산들바람 부는 가을빛과 눈바람 부는 겨울빛과 꽃바람 부는 봄빛과 햇살바람 부는 여름빛을 곱다시 무르녹일 수 있으면, 참 재미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 얼굴이 흙을 닮아 흙빛일 때에 그지없이 사랑스럽습니다. (4344.12.21.물.ㅎㄲㅅㄱ)


― 가을에 (이갑철 사진,류가헌 펴냄,2011.10.31./4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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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백나무 옷장 책읽기

 


 십이월 첫머리에 맞춤한 편백나무 옷장이 어제 마무리되어 오늘 짐차로 왔다. 전라도 광주에서 빚은 편백나무 옷장을 실은 짐차가 마을 들머리에 접어들 때부터 ‘고놈 참 크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베니어판을 대지 않고 통나무로만 지은 편백나무 옷장은 값이 만만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이 옷장을 나와 옆지기뿐 아니라, 먼 뒷날 우리 아이들이 저희 어버이한테서 곱게 물려받아 알뜰히 아낄 수 있기를 바랐다. 목돈을 써야 하는 옷장이란, 그만큼 오래도록 우리 시골집에서 함께 숨쉬고, 같이 살을 맞댈 동무이자 살붙이라 할 만하다. 화학 냄새 많이 나는 여느 옷장을 집에 들일 수 없다.

 

 바닥이 고르지 않고 중천장 또한 고르지 않은 가운뎃방에 편백나무 옷장을 넣는다. 뒤꼍으로 이어지는 작은 문은 막힌다. 이 작은 문 고리를 열었어야 했다고 뒤늦게 깨닫는다. 어쨌든 자물쇠로 잠그지 않았으니 열 수 있겠지.

 

 옷장에서 나는 편백나무 냄새가 온 집안을 감돈다. 페인트도 니스도 바르지 않은 새 옷장은 하야말갛다 할 만한 빛깔이다. 보드라운 나무결을 느낀다. 옷장이 막 들어올 무렵 두 아이 모두 졸음에 겨워 악지를 쓰고 울먹울먹하더니 잠들었고, 옷장을 다 들이고 이제 방을 치우려 할 무렵 드디어 옷장 구경을 하더니 슬슬 옷장 안쪽으로 기어든다. 베니어판 아닌 나무판으로 댄 옷장은 튼튼해서 두 아이가 옷장 안으로 기어들어 방방 뛰어도 튼튼하다. 그렇지만, 벼리야, 너는 좀 큰 아이란다, 네 살 나이 오늘은 뛰어도 되지만, 네가 여섯 살이나 일곱 살이 된 다음에는 뛰면 안 될 듯해.

 

 옷장 안에 들어가 나올 줄 모르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도 어릴 적 이 아이들처럼 커다란 옷장 안에 몰래 들어가 놀던 일이 있었다고 떠올린다. 옷장이란 얼마나 숨기 좋은 곳인가. 이불이 없어도 들어가기 좋고, 이불이 있으면 더 아늑하며 재미나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운 다음 손을 뻗어 옷장을 톡톡 두들겨 본다. 소리가 좋다. 나와 옆지기가 이런 옷장을 손수 짤 수 있으면 가장 좋으리라 생각한다. 못 짤 일은 없으리라. 다만, 꿈을 천천히 꾸어야지. 우리 두 사람이 나중에 우리 옷장을 새로 짜기를 바라기 앞서, 우리 네 식구 살아가는 이곳에서 나무를 알뜰히 심어 돌본 다음, 우리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저희 집을 지을 때에, 또는 우리 아이들이 낳을 아이들이 저희 집을 짓는다 할 때에 쓸 만한 나무를 얻게끔, 우리 집숲을 곱게 보살펴야지.

 

 이제 오늘부터 우리 집에서는 새로운 이야기책 하나가 생긴다. 아이들이 나중에 잊어버리더라도 아버지가 처음 찍은 사진이 있으니, 아이들과 함께 자라는 옷장과 아이들이 맺을 이야기가 하야말간 편백나무 옷장 구석구석에 하나둘 아로새겨지리라. (4344.12.21.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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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12-21 08:44   좋아요 0 | URL
옷장이 아이들 집이 되었네요^^
편백나무 냄새, 여기까지 나는듯 합니다.

파란놀 2011-12-21 09:35   좋아요 0 | URL
이제 오늘은 이 옷장에 옷과 이불
차곡차곡 넣어야지요.
에고~

페크pek0501 2011-12-21 15:15   좋아요 0 | URL
저도 어릴 적 술래잡기할 때 옷장에 들어가거나 또 책상 밑에 이불로 커튼처럼 치고 들어가 숨어서 논 적이 많았어요. 그곳이 비밀스럽고 아늑해서 좋았어요. 저만의 세계 같았고요. 유쾌하고 아름다운 어린시절이지요. ㅋ 사진 속의 아이들도 그때의 저처럼 행복하겠지요. ㅋ

파란놀 2011-12-21 20:56   좋아요 0 | URL
아이와 어버이 모두 즐거이 하루하루 누려야지요~ 그러려고 애쓰기는 하는데
^^;;;;
 

 

 산들보라 손가락

 


 어머니 품에서 새근새근 잠드는 산들보라. 이 아이는 어느새 일곱 달째 함께 살아간다. 첫째 아이하고 일곱 달째 함께 살던 무렵을 되새긴다. 첫째 아이 일곱 달째 함께 살아가던 즈음에는 첫째 아이를 찍은 사진이 아주 많았다. 320장을 꽂는 사진첩 여러 권을 가득 채울 만큼 되었다. 잘 나온 사진만 추려도 여러 권 되었다. 그런데, 산들보라와 함께 살아온 일곱 달 동안 ‘산들보라 사진첩’은 아직 한 권조차 못 만들었다.

 

 두 아이와 살아가며 너무 빠듯한 나머지 둘째 아이 사진첩은 한 권조차 못 만들밖에 없다고 말하는 일은 오직 핑계일 뿐이다.

 

 두 아이 아버지인 나를 돌아보면, 나도 산들보라처럼 내 어버이한테는 둘째요, 내 사진첩은 형 사진첩하고 대면 사진 숫자가 적다. 나는 돌 사진이 없다. 나는 갓난쟁이였을 적 사진마저 없다. 내가 내 어버이를 서운하게 여긴다면, 둘째 아이 산들보라 또한 제 아버지를 서운하게 여기리라. 제 누나 사진은 수두룩하게 쌓이고 쌓여 넘치고 또 넘치는데, 제 사진은 아기자기하게 찍어 주지 않았으니 시무룩하게 여길 수 있으리라.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나절 곰곰이 생각에 젖다가 산들보라 잠든 모습을 바라본다. 속으로 생각한다. ‘어차피 조금 뒤 다시 깨겠지. 너도 깊이 잠들려면 네 누나처럼 더 놀고 악지도 부려야겠지.’ 손톱 깎은 지 며칠 안 되었는데 어느새 제법 길게 자란 모습을 바라본다. 어머니 품에 꼭 안겨 손가락 살짝 나온 모습을 들여다본다. 튼튼하고 야무지게 자라니 언제나 고맙다. 푹 자고, 달게 자고, 예쁘게 자고, 이듬날 아침에 또 기쁘게 새날을 맞이하렴. 이제 섣달 그믐이 찾아오는구나. (4344.12.21.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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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밟는 어린이

 


 2011년이 저물기 앞서 드디어 네 살 사름벼리가 아버지를 밟으며 노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다. 처음으로 담는다. 옆지기는 그동안 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을 생각을 못 했달 수 있고 안 했달 수 있으며, 찍을 만한 형편이 못 되었달 수 있다.

 

 아버지는 원고지에 시를 옮겨적는다. 올 한 해 쓴 동시 백 꼭지를 여러 날에 걸쳐 천천히 꾹꾹 눌러적는다. 이 동시가 예쁜 책 하나로 태어날 수 있기를 꿈꾸면서 반듯반듯하게 새겨적는다.

 

 그런데 네 살 사름벼리는 아버지가 무얼 하는가를 아는지 모르는지, 슬쩍 아버지 등을 타고 오른다. 등을 타고 오르더니 두 발로 꼿꼿하게 선다. 두 발로 꼿꼿하게 서더니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부르더니 이내 춤을 춘다. 야, 이 녀석아, 원고지에 글을 쓰는 아버지 등을 밟고서 춤노래를?

 

 너희 옷가지를 빨래하랴, 네 밥을 차리랴, 집 안팎을 쓸고닦으며 치우랴, 등허리가 앞으로 휠 만하니까, 이렇게 밟고 춤노래를 펼치면서 등허리를 펴 주는 셈이니?

 

 그예 원고지 한 장을 버린다. 애써 쓴 시를 다시 옮겨야 한다. 그래도 아이가 등을 밟고 춤노래를 선보이는 동안 예닐곱 꼭지를 옮겼다. 팔목과 팔뚝과 팔꿈치가 몹시 뻑적지근하다. (4344.12.21.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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