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시에서


 아이는 새벽 여섯 시 오십 분에 일어난다. 여관방에는 큼지막한 텔레비전이 있다. 아이는 여관방에서 일어나자 마자 텔레비전을 켜서 만화영화를 보자고 한다. 어찌할 수 없다. 텔레비전을 켜서 만화영화를 보여주어야 한다. 창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창밖을 내다 본다. 바로 코앞에서 무언가 우람한 건물을 한창 짓는다. 이 도시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곳에서 옆지기랑 둘째하고 함께 살아간다면 풀을 뜯을 데가 없으니 가게에서 푸성귀를 사야 한다. 옆지기랑 둘째하고 함께 새 보금자리를 찾으러 마실을 했다면, 옆지기가 먹을 풀을 마련하거나 얻을 데가 없을 뿐 아니라, 풀을 뜯으며 들이마실 풀내음이나 바람내음 또한 없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텔레비전에서 내뿜는 뜨거운 기운으로 머리가 아프다. 창문을 열어도 바람이 들지 않으니 에어컨을 켜야 한다. 아이도 아버지도 버스를 타고 움직일 때에 에어컨 바람 때문에 몹시 괴로웠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버티자면 이렇게 해야 한다.

 나무를 찾을 수 없다.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듣지 못한다. 구름을 올려다볼 겨를이 없다. 조그마한 길에서도 싱싱 달리는 자동차 때문에 아이를 부르고 아이 손을 잡으며 앞뒤를 살핀다. 아침 시외버스를 타고 청주를 거쳐 얼른 음성 시골집으로 가고 싶다. (4344.8.4.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을 안 받는 사람


 아이하고 마실을 다니면서 곧잘 책을 선물한다. 여느 때에 책을 즐겨읽는 이라면, 내가 선물하는 책을 몹시 고맙게 여긴다. 따지고 보면 책 하나는 만 원이 안 되거나 만 원을 살짝 넘는다. 요즈음 물건값이나 돈값으로 친다면 책 선물이란 참 하잘것없다. 그러나, 책을 좋아하며 즐겨읽는 사람한테는 ‘그닥 안 좋아하는 갈래’인 책이 아니고서는 몹시 반가이 맞아들인다.

 여느 때에 책을 안 읽는 사람은 책을 선물할 때에 얼마나 시큰둥하면서 떨떠름한데다가 ‘뭥미?’라 하는 낯빛인지 모른다. 마치 못 볼 것을 보았다거나 만지지 말아야 하는 쥐똥이나 개똥이나 닭똥을 건드리기라도 했다는 듯한 손짓이다. 여느 때에 책을 읽지 않으니 책을 손가락으로 잡는 모양새부터 얼마나 싫어하는가를 아주 잘 느끼도록 한다.

 선물하는 책을 받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한테 책을 선물하는 일이라든지 동무나 이웃이나 살붙이한테 책을 선물하는 일 또한 없거나 드물리라 본다.

 책은 지식도 학력도 자랑도 훈장도 뭣도 아니다. 책은 오직 내 마음밭을 살찌우는 좋은 거름이다. 책은 밑거름이다. 책은 웃거름이 아니다. 책은 화학비료나 풀약이 아니다. 책은 트랙터나 경운기가 아니다. 책은 오직 마음밭 살찌우는 잘 삭은 밑거름이다.

 책을 읽으려면 스스로 밑바닥으로 내려가야 한다. 책을 읽으려면 고개를 숙여야 한다. 책을 읽으려면 나 스스로 바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책을 읽으려면 내 삶을 날마다 조금씩 바꾸어야 한다. 책을 읽으려면 더 따스히 사랑하고 더 넓게 믿어야 한다. 책을 읽으려면 한손에 걸레나 부엌칼을 쥐어야 한다. 책을 읽으려는 사람은 살림을 하려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랑하는 삶이 아니요, 꿈을 꾸는 넋이 아닐 때에는 책을 읽지 못하고, 애써 책 몇 가지를 읽었더라도 옳게 삭이지 못한다.

 돌이켜보면, 마음으로 밭을 일구지 않고 몸으로도 텃밭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한테 책을 선물하는 일이 잘못이 아닌가 싶다. 아니, 틀림없이 잘못이리라. 밭갈이하는 땀방울을 아끼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않으면서 쉽게 책을 선물하는 사람이 멍청이요 얼간이라 할 만하다. (4344.8.4.나무.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광주역 영풍문고


 시외버스를 내린 광주역 한켠에 커다란 영풍문고가 있다. 아니, 영풍문고가 아니라고 해야 하나. 책방 문간에는 한글로 ‘영풍문고’라 적히지 않는다. ‘YPBOOKS’라고만 적힌다.

 어마어마하게 많다 싶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시외버스역 둘레 커다란 저잣거리에서 아이 손을 잡으며 이맛살을 찡그린다. 아이는 버스에서 풀려났다는 생각에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시끄러우면서 어수선한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마음대로 뛸 수 있어 좋다며 웃는다.

 어쩐지, 이렇게 어수선한 저잣거리 한켠에 책방이 있다는 모습이 믿기지 않는다. 아무래도 안 어울린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서울 연신내 먹자골목으로 바뀐 골목 한켠에 예부터 오래도록 자리를 지킨 헌책방 〈문화당서점〉이 있다. 이런 모습을 돌아본다면 광주역이라 해서 얄궂거나 낯설다 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아무리 헤아려도 낯설다. 아니, 낯설밖에 없다. 아니,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곳에서 무슨 책을 누가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시끄러이 떠드는 데에서 책을 읽을 만한가. 책을 팔 수야 있겠지. 시끌벅적한 서울국제도서전 같은 데에서도 책팔이는 잘만 하니까. 어쩌면, 이 나라에서는 책팔이만 있고 책읽기는 없는지 모른다. 사람들 스스로 차분해지면서 맑아지자 해서 읽는 책인데, 사람들 스스로 차분해지거나 맑아지고 싶지는 않으니까, 찻길을 더 넓히고 더 크면서 빠른 자가용을 장만하는데다가, 아파트와 쇼핑센터만 잔뜩 올려세우잖은가.

 한손에 책을 쥐며 걸어다니는 사람을 볼 수 없다. 책을 넣었다 싶은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만날 수 없다. 광주역에서뿐 아니라 서울역에서도 인천역에서도 부산역에서도 대구역에서도 대전역에서도 똑같다. 한손에 책을 곱다시 쥐며 맑은 눈빛과 낯빛으로 따사로운 몸짓을 선보이는 사람을 마주치지 못한다. (4344.8.4.나무.ㅎㄲㅅㄱ)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카스피 2011-08-05 23:14   좋아요 0 | URL
음 언제 광주고속버스 터미날에 영풍문고가 생겼는지...몇년전 광주에 갔을적에는 없었는데 말이죠.예전 광주의 무슨 고등학교부근의 헌책방 거리와 서방시장부근의 헌책방을 간 기억이 나는군요.서방시장 헌책방들은 거의 문을 닫았는데 나머지 헌책방들은 잘 있는지 궁금해 지는군요.
 


 가방에 담는 책 



 육십 리터들이 내 커다란 가방에는 내가 쓴 책을 여러 권 넣습니다. 이 책들을 늘 들고 다니면서 그때그때 길에서 마주하는 고마운 이한테 슬며시 선물하곤 합니다. 그러나 퍽 오랫동안 고마운 이를 못 만나 마냥 가방 무게만 무겁게 하기도 합니다. 헌책방마실을 한다면 헌책방 일꾼한테 드릴 책을 여러 권 챙기니 이 책들 무게가 꽤 나갑니다. 나는 한두 군데 헌책방이 아닌 모든 헌책방을 다니려 하는 사람이기에, 내가 쓴 책이 나올 때에 글삯을 받지 않고 책을 받습니다. 책을 내놓아도 돈을 벌지 못합니다. 책으로 글삯을 받아 책을 선물하고 살아가니 벌이가 영 시원찮습니다. 그러나 내가 쓰는 모든 글은 내 둘레 고마운 사람과 헌책방에서 샘솟습니다. 내가 하루 열 시간 남짓 들여 집일을 하며 어설피 건사하는 살붙이한테서 비롯하는 사랑으로 글을 씁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합니다. 옆지기를 만나지 않고, 두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나 홀로 돌아다니면서 나 혼자서 누릴 겨를이 아주 많았을 뿐 아니라, 책값으로 돈을 꽤 많이 썼을 테고, 이래저래 글을 훨씬 많이 썼을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옆지기와 두 아이 때문에 내 온삶이 책읽기하고는 자꾸 멀어지고 말지만, 내가 좋아하는 ‘책으로 삶과 사람과 사랑을 읽기’가 ‘몸으로 삶과 사람과 사랑을 읽기’로 거듭나거나 새로워지곤 합니다. 날마다 열 시간 남짓 들여 집을을 하면서도 집살림을 옳게 건사하지 못하는데, 열 시간 남짓 들인다 해서 집일이나 집살림을 옳게 건사하기 만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쯤 해서는 집식구와 사랑스레 보금자리를 일굴 만하지 않다고 깨닫습니다. 다 다른 책을 날마다 열 시간 남짓 몇 해를 읽을 때보다 늘 같은 집일을 날마다 열 시간 남짓 몇 해를 할 때에, 더 깊으며 너른 삶과 사람과 사랑을 읽는 셈 아닌가 하고 몸으로 느낍니다. 가방에 담아 땀 뻘뻘 흘리며 짊어지는 책들은 집일을 하는 어버이로서 내 삶으로 받아들이는 고마움을 예쁘게 나누고 싶기에 선물하려는 책들입니다. (4344.8.3.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흙 닦기


 전주 헌책방거리 앞에서 택시를 탄다. 택시에서는 어김없이 에어컨 바람이 흐른다. 아이는 에어컨 바람이 몹시 싫다는 뜻으로 코를 손으로 감싸쥐고는 “냄새 나.” 하고 말한다. 택시 일꾼은 아이가 말하는 “냄새 나.”를 옳게 느끼지 못하리라. 그저 택시를 지저분하게 여긴다고 받아들일밖에 없으리라. 아버지는 “춥니?” 하고 말하며 손닦개로 아이 다리를 덮지만, 택시 일꾼이 이러한 말을 알아들을까. 아버지도 택시 에어컨이 싫고, 에어컨을 켤 때에 나는 냄새가 싫으며, 이보다 자동차에서 나는 플라스틱과 기름이 뒤섞인 냄새가 싫다. 자동차 앞에 붙은 엔진이 달구어지며 나는 냄새는 고스란히 자동차 안쪽으로 스며드는데, 이러한 냄새를 느끼는 어른이 참 드물다. 아이가 낯을 찡그리며 내리고 싶다 하지만 내릴 수 있나. 이러다가 아이가 발을 툭툭 놀리더니 택시 앞자리 한쪽을 흙 묻은 신으로 건드리고 만다. 택시 일꾼이 아이를 나무란다. “가만히 있어!” 짜증이 잔뜩 묻어난 목소리이다. 아버지는 “벼리야, 네가 신으로 이렇게 더럽히면 안 되잖아.” 하고 말하며 한손으로 흙 묻은 자리를 삭삭 닦는다. 말끔히 닦으려 하지만 다 닦이지는 않는다. 휴지에 물을 묻혀 닦아야 하는가 보다. 손바닥으로 여러 차례 훔친다. 아이가 밥집 같은 데에서 물을 쏟으면 아버지는 걸레를 찾아서 바닥을 훔친다. 아이가 길에다 무언가 쏟으면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어 말끔히 닦은 다음 비닐봉지 하나를 꺼내어 휴지를 넣고서 어딘가에서 쓰레기통을 보면 그때에 넣는다. (4344.8.2.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