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아가는 말 69] 범나비

 서울에서 올림픽이 있던 1988년을 앞두고 ‘호돌이’라는 상징이가 널리 퍼졌습니다. 이무렵 국민학교에서는 올림픽 표어와 포스터를 노상 그리도록 했고, 호돌이를 예쁘게 여기도록 하는 온갖 인형이며 상품이며 나돌았습니다. 라면이건 무어건 겉에 호돌이 그림이 깃들곤 했습니다. 철없이 놀며 깊이 생각하지 않던 어린 나날이기에, 〈상계동 올림픽〉 같은 이야기는 아예 알지 못했는데, 둘레 어른들 가운데 할머니나 할아버지, 또 시골 어르신들은 “왜 ‘호돌이’인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셨습니다. 당신들한테는 ‘虎狼돌이’를 줄인 ‘호돌이’가 아닌 ‘범돌이’여야 옳으니까요. 어른들은 우리 띠를 일컬을 때에 언제나 ‘범띠’라 말했지 ‘호랑이띠’라 말하지 않았습니다. ‘호랑이띠(호랑띠)’라 말하거나 ‘호랑나비’라 말하면, 으레 ‘범띠’와 ‘범나비’로 바로잡았습니다. 죽어서 가죽을 남기는 짐승은 ‘범’이요, 누런 빛깔이 아닌 하얀 빛깔일 때에는 ‘흰범’이라 했어요. 네 살 아이 손을 잡고 한 살 아이는 품에 안으며 멧길을 오르내리는 동안 나비 한 쌍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 첫째한테나 둘째한테나 이렇게 서로 예쁘게 팔랑거리는 나비를 바라보며 “이야, 범나비로구나.” 하고만 가리키리라 생각합니다. 무늬가 있는 범은 ‘무늬범’입니다. (4344.8.22.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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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금일기 - 모래알 속에서 찾아낸 금과 같은 일기
호연 지음 / 애니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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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손길로 만화를 그리면
 [만화책 즐겨읽기 54] 호연, 《사금일기》



 ‘아나스타시아’ 이야기를 담은 책이 있습니다. 아나스타시아는 이 책을 아무 데에서나 읽지 말라고 합니다. 바람이 흐르는 소리와 풀벌레랑 새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차분하면서 조용히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아나스타시아 이야기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시골집에서 읽을 때하고 바깥마실을 하느라 시외버스를 타고 나와서 읽을 때하고 사뭇 다릅니다. 서울에 들러 전철을 타며 읽을 때랑 여관에 묵으며 읽을 때에는 또 다릅니다. 더 돌이키면, 아나스타시아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다른 책들도 어디에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책이 아닌 사람을 만나 이야기꽃을 피울 때에도 어디에서 만나 어떤 터전을 누리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느냐는 크게 다릅니다.

 반가운 동무를 복닥거리는 전철역에서 만나 시끄러운 전철 소리를 들으며 이야기를 나눌 때랑 자동차 소리 가득한 찻길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눌 때랑 사뭇 다릅니다. 조용한 노래가 흐르는 찻집에 있을 때랑 멧새 지저귀는 숲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눌 때랑 몹시 다릅니다.

 꼭 아나스타시아 이야기가 아니어도 그렇습니다. 권정생 할아버지 동화책을 읽든 리영희 님 인문책을 읽든 늘 매한가지입니다. 버스에서 흔들리며 읽을 때하고 밭둑에 앉아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으며 읽을 때는 크게 다릅니다. 빗소리를 들으며 읽는 책과 우레 치는 소리를 들으며 읽는 책은 느낌부터 다릅니다. 햇살이 쏟아지는 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을 흔드느라 반짝반짝 뒤집어지면서 서로 부딪느라 자그마한 소리를 쏟아내는 곁에서 책을 읽을 때하고 냉장고 옆에 누워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을 때가 같을 수 없습니다.

 살아가는 터전에 따라 받아들이는 느낌과 생각과 넋과 얼이 달라집니다. 살아가는 터전에서 어떤 사랑을 꽃피우는가에 따라 나 스스로 일구는 이야기가 바뀔 뿐 아니라, 나 스스로 일구는 이야기가 바뀌는 결과 맞물려 내 손에 쥔 책이 내 가슴으로 스며드는 깊이와 너비가 바뀝니다.


- “질질 짜지 마라! 그림도 잘 그리면서!” “저기, 지금 슬픈 건 그림이랑 상관없는데.” “시끄럽다. 자넨 나처럼 쪽박 찰 걱정 없지 않나!” “옳소!”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은 슬플 자격 없어. 그걸로 돈도 벌잖아.” (11쪽/2004.1.18.)


 이 나라에 출판사가 참 많습니다. 나날이 책이 덜 팔린다고도 하지만, 출판사는 참 많고, 참 많은 출판사는 참 많다 싶은 새로운 책을 날마다 꾸준하게 내놓습니다.

 그런데, 거의 모두라 할 만큼, 웬만한 출판사는 몽땅 서울에 몰렸습니다. 경기도 파주에 책도시를 만들어 꽤 옮기기도 했는데, 파주로 옮긴 출판사도 많다지만, 서울에 남은 출판사가 훨씬 많습니다. 돈이 적고 일꾼 또한 적은 출판사라든지, 서울에 건물을 세운 출판사는 서울에 그대로 남습니다.

 더 살피면, 파주에 있든 서울에 있든 이들 출판사는 ‘살림터(생활권)’가 서울입니다. 서울을 바라보며 책을 만들고 책을 팔며 책을 다룹니다. 강릉을 바라보거나 여수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구례를 꿈꾸거나 상주를 살피지 않습니다. 진천이나 양양을 바라면서 책을 내놓는 출판사는 없습니다. 하나같이 ‘서울에 깃들어 서울에서 사고팔 책’이 되곤 합니다.

 서울을 떠나 시골에 깃든 출판사가 몇 있습니다. 수천 군데가 넘는 출판사 가운데 고작 몇만 시골에 깃듭니다. 그러나, 시골에 깃든다 하더라도 서울에서 영업을 하든 수금을 하든 제작을 하든 뭐를 하든 해야 합니다. 서울하고 끈이 닿지 않으면 아무 일을 할 수 없는 얼거리인 이 나라입니다.

 곧, 이 나라에서 태어나는 책은 ‘서울을 발판 삼아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이야기’에 마음을 기울이는 책이 되곤 합니다. 서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서울 틀거리를 벗지 않습니다.


- “그 과자봉지 분리수거 돼.” “어, 정말. 분리수거 해야지. 어린이 환경실천단이거든.” “하하, 환경실천단 아니면 안 해?” “응!” ‘아아, 그래서 갈수록 하늘에 별이 안 보이는구나.’ (36쪽/2004.5.20.)


 나는 서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서울에서 아홉 해를 살기도 했으나, 서울에서 살던 아홉 해 동안에도 서울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책방이 많고 책이 많기에 서울에서 아홉 해를 살았을 뿐입니다.

 책읽기는 지식읽기가 아닌 줄 알면서 서울에서 아홉 해를 머물고 말았습니다만, 이제 고향 인천을 다시 거쳐 시골집으로 살림을 옮겨 옆지기하고 두 아이랑 복닥이며 살아가는 몸으로 곰곰이 돌아봅니다. 서울에서 자동차 소리를 신나게 들으며 만드는 책에는 자동차 소리가 깃들입니다. 우람한 건물을 세운 출판사에서 일하며 만드는 책에는 우람한 건물 기운이 깃들입니다. 풀벌레 한 마리 깃들 수 없는 시멘트·아스팔트·쇠기둥으로 이루어진 건물에서 에어컨 바람을 맞고 전깃불을 밝히며 일하는 사람들 손길은 이러한 기운이 어우러지는 책을 내놓습니다.

 나는 종이로 빚은 책을 읽습니다. 나는 종이로 이룬 책을 아낍니다. 책으로 태어난 종이는 종이이기 앞서 푸른바람과 푸른그늘을 베풀던 나무가 온몸을 내어주며 빚은 목숨이거든요. 나는 책을 읽는 한편 나무를 읽고 목숨을 읽습니다. 나는 책을 읽을 때에 푸른바람과 푸른그늘을 함께 읽습니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던 흙땅을 헤아리고 나무 한 그루가 수많은 잎사귀로 받아들인 햇살을 떠올립니다.


- “내 방 가서 과자 들고 와!” “내가 가져올게.” (서랍을 열고 책꽂이를 본다) ‘모두 과자. 모두 휴지. 어째서……. 이 인간, 전공책은 도대체 어디에 둔 것인가.’ (95쪽/2005.3.23.)


 만화책 《도자기》(애니북스,2008)에 이어 《사금일기》(애니북스,2011)를 읽습니다. 사랑하는 손길로 빚은 만화가 알알이 담긴 이야기책을 읽습니다. 8월하고도 스무 날이 접어들도록 햇살 한 줌 내주지 않는 찌푸린 하늘이 끝없이 쏟아내는 빗줄기 소리를 들으면서 《사금일기》를 읽습니다.

 《도자기》를 읽던 때에는 인천 골목동네 한복판에서 살아가며 골목이웃이 골목밭 일구는 자리를 갓난쟁이를 안고 업으며 돌아다니는 몸이었습니다. 《사금일기》를 읽는 오늘은 세 해 앞서 갓난쟁이였던 첫째가 네 살로 훌쩍 커서 홀로 책읽기를 할 만큼 되고, 둘째가 곧 백날째를 맞이할 무렵입니다.

 빗소리에 섞이는 풀벌레 고운 소리를 듣습니다. 풀벌레들은 그치지 않는 빗줄기인데에도 울음소리를 그치지 않습니다. 비가 닿지 않는 어디에서 이렇게 가늘면서 길고 곧으면서 맑은 소리를 나누어 줄까요.

 비가 그치지 않으니 빨래 마르는 소리를 듣기 힘듭니다. 둘째 기저귀를 말리느라 지난 석 달 동안 아주 괴롭습니다. 그래도 지난 석 달을 이렁저렁 살아냅니다. 앞으로도 또 씩씩하게 살아내겠지요. 햇볕을 구경하지 못하지만, 햇살을 마음껏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풀과 나무로 둘러싸인 이 작은 집에서 고운 햇볕과 따순 햇살을 바라고 기다리면서 살아숨쉬겠지요.


- “그래? 나도 물론 구걸하는 사람들이 백 프로 옳다고 생각지 않아. 하지만 만약 그 구걸하는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그게 너라면? 난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을 거야. 그게 내가 조금이라도 돈을 내는 이유야.” (139쪽/2007.6.30.)


 책으로 나온 《사금일기》인데, 나와 옆지기는 《사금일기》를 일찌감치 다 보았습니다. 책으로 나오기 앞서 만화쟁이 호연 님 누리방(sakumkun.blog.me)에서 다 보았습니다.

 누리방에서 다 본 만화를 다시 책으로 사서 읽는 셈인데, 누리방에서 다 본 만화이기에 이렇게 다시 책으로 사서 읽습니다. 한 번 읽으며 가슴으로 촉촉히 젖어드는 고운 이야기를 거듭 읽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거듭 읽거나 새로 읽을 만할 때에 비로소 장만할 책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아니, 거듭 읽거나 새로 읽을 만하지 않다면 처음부터 찾아 읽을 까닭이 없다고 느낍니다. 여러 차례 되읽을 만해야 비로소 찾아 읽을 값과 땀과 보람과 기쁨이 있다고 느낍니다.

 책읽기는 지식읽기 아닌 삶읽기이기 때문에, 같은 이야기를 꾸준히 되풀이하면서 새로 읽습니다. 이와 맞물려, 글을 한 꼭지 쓴다 할 때에도, 내가 쓴 내 글을 나 스스로 열 번 백 번 즈믄 번 되읽으면서 내 글을 나 스스로 좋아할 만큼 되어야 비로소 글을 한 꼭지 쓴다 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바야흐로, 글쓰기란 삶쓰기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삶을 쓰는 셈입니다. 삶을 글로 쓴다 할 때에는 사랑을 담는다 하겠습니다. 삶을 글로 쓰며 사랑을 담는다 할 때에는 사람 이야기를 담는 노릇입니다.

 만화를 그리는 호연 님은 호연 님 삶을 만화로 그립니다. 호연 님이 사랑하는 삶을 만화로 그립니다. 호연 님 스스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이야기를 만화로 빚습니다.


- ‘몸이 아픈 동안 살이 엄청 빠졌다. 그래서, 갈비뼈에 양말을 문질러 빤다.’ “그만 햇!!” (192쪽/2009.10.26.)


 재미난 만화일 수 없습니다. 즐거운 삶입니다. 신나는 만화이지 않습니다. 고마운 사랑입니다. 멋진 만화가 아닙니다. 착한 사람입니다.


- “저 사금일기 출판할 거예요.” “사금일기 별로예요. 도자기가 더 재밌어요. 도자기2나 그려요.” “도자기 미워.” (212쪽/2010.1.23.)


 사랑하는 손길로 만화를 그리면, 그린이 삶부터 따사로이 껴안습니다. 그린이 삶부터 스스로 따사로이 껴안기에, 그린이를 둘러싼 사람들 삶을 따사로이 껴안습니다. ‘톨스토이’는 사랑이고, 《사금일기》는 톨스토이를 사랑으로 읽은 사랑입니다. (4344.8.20.흙.ㅎㄲㅅㄱ)


― 사금일기 (호연 글·그림,애니북스 펴냄,2011.8.12./1만 원)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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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엉덩이 책읽기


 새 보금자리를 찾는다며 자전거를 끌고 춘천마실을 다녀왔다. 춘천에 가기 앞서 서울을 들렀다. 서울에서는 두 군데 헌책방과 한 군데 인문사회과학책방과 세 군데 출판사와 용산전자상가를 들르느라고 자전거를 한참 달렸다. 춘천에서는 마땅한 살림집을 찾으려고 엉덩이가 아프도록 자전거를 오래도록 달렸다.

 믿고 바라면서 꿈꾸면 이루어질 수 있을까. 믿고 바라면서 꿈꾸는 나날로 내 사랑을 기울이면 천천히 이루어지겠지.

 엉덩이가 욱씬거린다. 며칠 동안 자전거를 신나게 타야 했더니, 며칠째 집일을 안 하고 빨래 또한 안 하던 내 두 손에 있던 꾸덕살이 엉덩이 쪽으로 내려온 듯하다고 느낀다.

 새벽나절 우는 풀벌레 온갖 소리를 듣는다. 풀벌레는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울었다. 같은 풀벌레가 이처럼 쉬지 않고 노래를 하는지, 다 다른 풀벌레가 다 다른 때에 한결같이 노래를 하는지 궁금하다. 새 보금자리는 이 보금자리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밤부터 새벽까지, 언제나 수많은 풀벌레 울음소리로 가득하기를 빈다.

 옆지기가 새 보금자리에서 탈 자전거가 왔다. 아주 예쁘장하게 생겼다. 옆지기는 나보고 한번 타 보라 했지만 타지 않았다. 이 어여쁜 자전거는 앞으로 옆지기 엉덩이를 욱씬거리게 하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낳겠지.

 마땅한 살림자리를 찾으려면 두 다리로 거닐며 살펴야 한다. 자가용을 몰며 여기저기 휘 돌아다닌대서 마땅한 살림자리를 찾을 수 없다. 살림자리를 알뜰히 찾고 싶으면 자가용에서 내려야 한다. 자전거를 몰며 멧자락 옆에 낀 살림집이 얼마나 있고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있는지 헤아린다. 조용히 둘러본다. 천천히 움직인다. 자전거는 더 먼 길을 헤아리도록 돕는다. 자전거는 언제 어디에서라도 멈추어 주고 기다려 준다. 엉덩이가 욱씬거리는 만큼 허벅지와 종아리가 붓고, 허벅지와 종아리가 붓는 만큼 등허리가 뻑적지근하다. (4344.8.2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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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과 아이와 책읽기


 아이는 바깥으로 나오면 제 어버이 말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면 다른 사람과 말을 섞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말을 섞으면, 다른 사람이 살아오며 쓰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좋은 말이건, 궂은 말이건.

 아이는 글을 깨쳐 스스로 책을 읽을 때가 되면, 어버이가 쥐어 주지 않던 책을 하나하나 찾아 읽습니다. 어버이는 이것저것 가리거나 추려서 건넸고, 책에 적힌 말도 걸러서 들려주지만, 글을 깨친 아이는 저 스스로 하나하나 읽습니다. 올바르며 살가운 말로 이루어진 책이건, 뒤틀리며 메마른 말이 가득한 책이건. (4344.8.2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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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형무소 - 옮기던 날의 기록 그리고 그 역사, 개정증보판
리영희·나영순 글, 김동현·민경원 사진 / 열화당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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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개’사진을 ‘까망하양’사진으로 바꾸다
 [찾아 읽는 사진책 29] 김동현·민경원, 《서대문 형무소》(열화당,1988/2008)


 어느 한 사람을 사진으로 담든, 어느 집 하나를 사진으로 찍든, 어느 한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사진을 내놓습니다. 어느 집 하나를 마주하는 사람마다 다 다른 느낌을 사진에 싣습니다.

 다만, 기계를 바꾼대서 사진 느낌이 확 바뀌지는 않습니다. 쓰는 기계가 달라지면 아주 조그마한 대목에서 느낌이 얼핏 바뀌기는 하지만, 같은 사람이 같은 사람을 바라보거나 같은 사람이 같은 집을 바라보며 사진으로 담는 느낌은 거의 똑같습니다.

 기계는 그대로이고 사람이 다르다면, 이때에는 언제나 다른 사진이 태어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마다 다 다른 어버이한테서 태어나 다 다른 삶을 꾸렸거든요.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사랑을 받으며 다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린 사람이기 때문에, 이 다 다른 사람들이 일굴 사진에는 다 다른 사진말이 깃듭니다.

 기계가 그대로요 바라보는 사람 또한 그대로라 할 때에는, 쓰는 필름에 따라 느낌이 달라집니다. 무지개필름을 쓸 때랑 까망하양필름을 쓸 때랑 사진이 달라집니다. 아니, 사진기를 쥔 사람이 사진기에 눈을 박아 들여다볼 때에는 똑같아요. 다만, 필름에 앉히는 모습이 달라지고, 나중에 종이에 사진을 얹을 때에 새삼스럽게 달라진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한 가지 더. 기계가 같고 바라보는 사람 또한 같으며 필름 또한 같다 할 때에는, 날씨와 날과 철에 따라 달라집니다. 봄철 찍는 사진하고 겨울철 찍는 사진이 같을 수 없습니다. 궂은 날과 갠 날 사진이 같을 수 없습니다. 아침과 새벽과 낮과 밤 사진이 같을 수 없어요.

 사진은 늘 사진이지만, 사진에 이야기를 싣는 사람입니다. 사진은 언제나 사진으로 이루면서, 사진에 삶을 담는 사람입니다.

 사진찍기를 할 때에 어떠한 기계를 썼느냐는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사진읽기를 할 때에 사진쟁이가 어떠한 기계를 썼느냐를 하나도 몰라도 됩니다. 사진찍기를 할 때에 사진쟁이가 누구한테서 사진을 배웠느냐를 살필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쟁이는 이제껏 살아낸 내 나날을 돌이키면서 내 사진을 찍을 뿐입니다. 사진읽기를 할 때에 사진쟁이가 무슨무슨 대학교를 나오거나 어디어디 배움길을 다녀왔다 하는 가방끈을 알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읽기를 할 사람들은 사진 한 장에 깃든 이야기가 내 마음밭에 어느 만큼 아로새겨지는가를 느낄 뿐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기계를 따질 일이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내 사진에 담기는 사람이나 집이 어떠한가를 돌아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무지개필름을 쓰겠느냐 까망하양필름을 쓰겠느냐를 가눕니다. 요사이는 디지털파일로도 무지개파일을 쓰겠느냐 까망하양파일을 쓰겠느냐를 가눕니다.

 내 사진으로 담으려는 사람이나 집을 ‘아침에 만나’려는지 ‘낮에 만나’려는지 ‘새벽에 만나’려는지 ‘한낮에 만나’려는지 ‘저녁에 만나’려는지 ‘밤에 만나’려는지를 따져야 합니다.

 내 사진으로 옮기려는 사람이나 집을 ‘맑은 날에 사귀’려는지 ‘궂은 날에 사귀’려는지 ‘비오는 날에 사귀’는지 ‘눈오는 날에 사귀’려는지 ‘구름 낀 날에 사귀’려는지 ‘안개 낀 날에 사귀’려는지 ‘비바람 몰아치는 날에 사귀’려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 사진으로 빚으려는 사람이나 집을 ‘따순 봄날에 어우러’지려는지 ‘꽃샘추위 닥친 봄철에 어우러’지려는지 ‘갓 접어든 여름날에 어우러’지려는지 ‘한창 무더운 여름날에 어우러’지려는지 ‘벼락과 우레가 떨어지는 여름날에 어우러’지려는지 ‘산들바람 가을철에 어우러’지려는지 ‘열매가 무르익는 가을날에 어우러’지려는지 ‘겨울비 내리는 겨울날에 어우러’지려는지 ‘큰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철에 어우러’지려는지 ‘꽁꽁 얼어붙은 겨울철에 어우러’지려는지 ‘따스한 바람이 부는 겨울날에 어우러’지려는지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사진책 《서대문 형무소》(열화당,1988/2008)를 읽습니다. 스무 해를 사이에 두고 첫판과 고침판으로 나누어진 두 가지 사진책을 읽습니다.

 사진책 《서대문 형무소》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1988년 사진책이고 다른 하나는 2008년 사진책입니다. 두 사진책은 서로 다른 책입니다.

 왜냐하면, 판짜임과 엮음새가 다를 뿐 아니라, ‘사진마저 다릅’니다.

 처음에는 “한정된 시간 내에 굴절 많은 우리 역사의 현장을 제대로 기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라도 전할 수 있게 된 것을 우리의 행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1988/사진 찍은 이).”고 밝혔습니다. 그러면, 스무 해 뒤에는 ‘한정된 시간’이 아니었겠지요. 스무 해에 걸쳐 꾸준히 더 찍고 더 만나며 더 어우러졌으면, 2008년에 새로 내는 1988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못 다 이룬 숱한 이야기를 알알이 아로새길 아름다운 사진책이 될 수 있겠지요.

 나중에는 “판형을 확대하고 기록적 가치가 뛰어난 사진과 도면 자료 등을 추가했으며, 독립지사 세 분의 글을 덧붙여 서대문형무소에 관해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2008/편집자).”고 하지만, 2008년 사진책은 그리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2008년 사진책은 판이 조금 커지고 사진 짜임이 조금 달라지며 쪽수가 조금 늘었습니다. 그렇지만, 1988년 사진책하고 무엇이 다른가를 느낄 수 없습니다. 이럴 바라면 1988년 사진책을 똑같이 다시 낼 때하고 무엇이 나아질까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1988년 사진책과 2008년 사진책은 큰 대목에서 서로 엇갈립니다. 1988년 사진책에는 ‘무지개사진’이 제법 실립니다. 2008년 사진책에는 오직 ‘까망하양사진’이 실립니다. 1988년 사진책에는 ‘무지개사진’이었는데 2008년 사진책에서는 몽땅 ‘까망하양사진’으로 바뀝니다.

 나는 묻고 싶습니다. 온누리 사진쟁이 가운데 ‘무지개사진’으로 찍는 이야기하고 ‘까망하양사진’으로 찍는 이야기가 똑같다고 느낄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까망하양사진이 나쁘고 무지개사진이 좋을 수 없습니다. 까망하양사진이 ‘기록 값어치가 빼어나며 다큐멘터리 빝깔이 더 짙을’ 수 없습니다. 두 갈래 사진은 두 갈래대로 이야기가 다르고 삶이 다르며 생각이 다릅니다. 그저 빛느낌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1988년 사진책부터 ‘사진쟁이는 무지개사진으로 담았’으나 ‘출판사 편집자가 까망하양사진으로 바꾸’었는지 모릅니다. 1988년 사진책과 2008년 사진책에서는 이 대목을 한 마디로도 다루거나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대목은 반드시 밝혀야 하고 꼭 다루어야 해요.

 앙리까르띠에 브레송 님이 당신 사진을 ‘까망하양사진’이 아닌 ‘무지개사진’으로 찍었다고 할 때에, 이이 사진을 똑같이 바라볼 수 있을까요. 김기찬 님이 담은 《골목 안 풍경》은 까망하양사진일 때하고 무지개사진일 때에 아주 크게 달라집니다. 사진으로 담긴 모습뿐 아니라 사진으로 찍는 느낌까지 아주 크게 달라집니다.

 무지개사진과 까망하양사진이 어떻게 다른 줄 모른다면, 새벽에 안개가 드리울 때에 소나무를 찍는 사진하고 한낮에 안개가 모두 걷혀 파란 빛깔 하늘이 눈부실 때에 소나무를 찍는 사진이 어떻게 다른 줄 모르는 삶하고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책 《서대문 형무소》는 이 나라 사진밭이 어떠한 깊이요 너비인가를 낱낱이 보여줍니다. (4344.8.22.달.ㅎㄲㅅㄱ)

 

― 서대문 형무소 (김동현·민경원 사진,리영희·나명순 글,열화당 펴냄,1988.1.15·2008.1.1./16000원)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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