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책과 작은 삶을 사랑한다
 [헌책방에서 책읽기 1] 植本憲吉, 《俳句歲時記 生活 : 春夏》(保育社,1977)

 


 헌책방이라는 곳을 알기 앞서부터 작은 책을 사랑했다.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작은 책은 중학교 2학년 끝무렵부터라고 떠오른다. 이때에 내가 사랑한 작은 책은 시사영어사에서 내놓은 빨간 책.

 

 시사영어사 빨간 책은 왼편에는 영어 오른편에는 한글이 나란히 있었다. 영어를 처음으로 배운 중학생 때에, 이 영어를 옳게 잘 배우고 싶어 책방마실을 하면서 영한대역 작은 책을 아주 싼값으로 사서 읽었다. 내가 읽어 새기는 풀이랑, 영한대역본에 나온 풀이를 견주면서 ‘내 새김말’이 나은지 ‘대역본 새김말’이 나온지 헤아렸다. 대역본 새김말이 그닥 내키지 않을 때가 있지만, 내가 모르거나 쓰지 않던 말을 새롭게 배우기도 했다. 중학생 주머니는 국민학생 주머니보다 조금 나았으나 그리 도톰하지 않기에, 인천 시내 여러 새책방을 돌며 1970년대에 찍은 빨간 책이 있는가를 눈에 불을 켜고 살폈다. 1970년대에 찍은 시사영어사 빨간 책은 300원짜리가 있었고, 때로는 150원짜리가 걸리기도 했다. 1980년대에 찍은 책은 500원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똑같은 책이라 하더라도 손바닥책(문고판)은 국배판 책하고 견주어 값이 훨씬 눅은 줄 깨닫는다. 학교에서 읽으라 시키는 ‘독후감 숙제’ 책을 새책방에서 살피다가 손바닥책을 알아보고는, 서문문고와 을유문고와 범우문고를 곰곰이 살핀다. 독후감 숙제에 들지 않은 책들, 이를테면 신채호 박은식 주시경 최현배 이은상 같은 어른들이 쓴 ‘다른 책’을 여러 출판사 작은 책으로 하나하나 훑으며 장만한다. 독후감 숙제에 드는 ‘고전명작’ 가운데에는 커다랗고 비싼 책이랑 자그맣고 값싼 책이 나란히 있을 때가 있지만, 자그맣고 값싼 책으로만 나온 책이 드문드문 있다.

 

 자그맣고 값싼 책을 몇 권씩 장만하며 가슴이 싸하게 떨린다. 이무렵 나 홀로 조그맣게 꿈을 꾼다. 나중에 내가 돈을 많이많이 벌면 우리 겨레 훌륭한 분들 책을 자그맣고 값싼 판으로 몇 천 몇 만 가지를 찍을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여러 해 살며 서울 시내 헌책방을 마실하는 동안 더 많은 책과 더 깊은 책과 더 너른 책을 만난다. 서울에는 사람뿐 아니라 책이 참으로 많이 모인다. 고향마을에서만 살았으면 책이 이토록 넓고 깊으며 너른 줄 제대로 느끼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책을 넓고 깊으며 널리 살핀다 한들 더 넓은 사람이 되거나 더 깊은 사람이 되거나 더 너른 사람이 된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책 하나 옳게 새기며 옳은 꿈과 옳은 사랑을 펼쳐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책을 읽는 사람’이 될 마음으로 책을 장만해서 읽지 않았다. 나는 ‘책을 읽는 사람’으로 살아갈 마음은 못마땅하다고 느끼며 책을 읽는다. 나는 ‘내 삶을 일구는 사람’으로서 책을 곁에 둘 뿐이다. ‘내 삶을 사랑하는 사람’인 몸가짐을 아름다이 돌보며, 책을 아끼는 몸가짐을 따사로이 북돋우고 싶다.

 

 고등학교 1학년 무렵, 한국 대원사 ‘빛깔있는 책들’을 알았고, 대학교 1학년 무렵, 일본 보육사(保育社) ‘칼라북스(color books)’를 안다. ‘빛깔있는 책들’은 한국에서 나올 수 있는 더없이 어여쁜 무지개빛 책이라면, ‘칼라북스’는 일본에서 빚을 수 있는 그지없이 아리따운 사랑빛 책이라고 느낀다.

 

 일본 보육사 칼라북스는 그저 작기만 한 책이 아니다. 아름답게 작다. 글은 어떠한지 모른다. 일본글은 못 읽으니까. 나는 사진과 엮음새만 살피며 칼라북스를 한 권 두 권 장만한다. 넓고 깊으며 너른 이야기를 앙증맞고 즐거우며 멋스러이 담아 사랑스러운 손바닥책을 손에 쥔다. 온몸이 파르르 떨린다.

 

 쿠스모토 켄키치(植本憲吉)라는 분이 엮은 《俳句歲時記 生活 : 春夏》(保育社,1977)를 인천 배다리 헌책방 아벨서점에서 장만한다. “하이쿠 철맞이 얘기, 삶”은 《봄여름》이랑 《가을》이랑 《겨울》 세 권으로 나누어 나왔다고 한다. 작은 책을 곰곰이 읽으며 가만히 생각한다. 우리 나라에서도, 우리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철따라 살아가는 이야기를 살가운 시 하나를 곁에 두고 사랑스러운 사진 하나를 나란히 놓으면서 책 하나 조그맣게 묶을 수 있을까. 우리들은 철따라 해따라 달따라 날따라 무엇을 서로 즐기거나 누리면서 살아갈까. 설과 한가위 말고 다른 달과 다른 철에는 저마다 무슨 일과 놀이를 즐기거나 누리거나 어깨동무하며 지낼까.

 

 《俳句歲時記 生活 : 春夏》를 읽으면, 이 작은 책에 나오는 ‘철따라 즐기는 삶’은 거의 모두 ‘시골에서 흙을 만지거나 바다를 누비면서 즐기는 일이랑 놀이’이다. 도시에서 누리거나 즐기는 일이나 놀이는 거의 안 실린다. 이른바 ‘세시풍속’ 가운데 도시에서 누리거나 즐기는 일이나 놀이가 있을까. 일본이나 한국이나 거의 비슷하겠지.

 

 사람들 스스로 시골집을 버리거나 떠나거나 등지면서 사람들 스스로 일과 놀이를 송두리째 내다 버렸다고 새삼스레 깨닫는다. (4345.1.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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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알라딘서재 갈무리(결산,기네스)를 살피니,

마녀고양이 님이 댓글을 2000 꼭지 넘게 달며

1위를 하셨다.

 

얼마나 바지런히 댓글을 달아 주셨으면

이렇게 할 수 있나 싶어 놀랐다.

 

곰곰이 생각을 기울여 본다.

나도 댓글을 저만큼까지 못하겠지만

바지런히 달며

'이웃' 노릇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다짐한다.

 

그러면, 나는

힘 닿는 데까지 용을 써서

하루에 댓글 10개 쓰기를 해 보자고 꿈꾼다.

 

..

 

그동안 '눈팅'이라고,

눈으로만 읽고 추천이랑 땡스투만 누르던 글에

댓글을 하나하나 달아 본다.

 

처음 며칠은 그럭저럭

하루 댓글 10개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웃 서재 분들이

'날마다 새 글을 써 주지'는 않으니까

하루 댓글 10개 달기는

이내 높디높은 울타리에 걸린다.

 

=_=;;;

 

앞으로...

어느 날에는

하루에 올라오는 이웃서재 새 글이

스물 서른이 될 수 있으니,

이럴 때에는

이웃서재 새 글 읽기에도 벅차리라.

 

삶을 숫자로는 따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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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1-06 05:39   좋아요 0 | URL
^^
이웃 서재 글 읽고 댓글 다는 일도 보통이 아니지요.
물론 이웃이 자꾸 늘어나면 더 하고요~~

파란놀 2012-01-06 05:47   좋아요 0 | URL
오... 벌써 일어나셨네요 @.@

하기는... 저는 한 시 반에 일어났으니... ㅠ.ㅜ

댓글을 달며
제 마음도
착하게
달래는구나 싶어요..

조선인 2012-01-06 09:08   좋아요 0 | URL
오, 괜찮은 계획이에요. 저도 실천해볼까 봐요.

파란놀 2012-01-06 12:20   좋아요 0 | URL
넵~ 힘내시고
아이들하고 언제나 좋은 나날 누리셔요~

페크pek0501 2012-01-08 19:50   좋아요 0 | URL
저는 아예 하루 날을 정해서 오늘은 댓글만 써야지, 하면서 몇 시간씩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댓글을 쓴 적이 있어요. 새 글을 읽는다는 것, 쉽지 않아요. 또 댓글 쓰는 것도요.

"하루에 댓글 10개 쓰기를 해 보자고 꿈꾼다" - 저도 그래야겠어요. 힘들면 하루 5개씩이라도...ㅋㅋ 이 또한 덕을 쌓는 일이 아닐까 해요. 호호~~

파란놀 2012-01-08 20:12   좋아요 0 | URL
네, 새 글을 읽기란 수월하지 않아요.
그러나 좋은 동무나 이웃하고
얘기한다고 생각하면
아무것 아닌 일이 되기도 하는 듯해요.

저는 신문-방송-인터넷뉴스 안 읽어서
이웃서재 글읽기는
그리 어렵지 않아요~ ^^
 


 손으로 쓰는 편지봉투

 


 2007년부터 1인잡지를 만들었습니다. 1994년 12월 29일부터 1인소식지를 만들었습니다. 새 잡지가 나올 때면 이 잡지를 받아보는 분한테 봉투에 책을 넣어 부쳤습니다. 처음에는 받는이 주소와 보내는이 주소까지 모두 손으로 적는데, 봉투를 쓰다 보면 손이 덜덜 떨리더군요. 나중에 보내는이 주소 찍은 봉투를 마련해서 손품을 줄였습니다. 그러나 받는이 주소를 타자로 옮겨 종이에 뽑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셈틀을 꼼지락거리며 뽑아서 가위질을 하나, 곧장 손으로 봉투에 주소를 적으나 품과 겨를은 서로 매한가지라고 느꼈어요.

 

 내가 혼자 만드는 잡지를 받아보는 분이 오백 사람을 넘고 천 사람이 넘는다면 차마 손으로 봉투를 다 쓰지 못할 테지요. 봉투 천 장 넘게 받는이 주소를 적는다 생각하면 손이 남아나겠느냐 싶습니다. 아마 이쯤 된다면 잡지 부치는 일을 도맡을 일꾼을 한 사람 두어 품과 겨를을 나누어야겠지요.

 

 고흥집에서 조그맣게 마련한 잡지를 부치려고 봉투에 주소를 하나하나 적습니다. 봉투에는 우리 집 옛 주소가 찍혔기에 옛 주소를 죽죽 긋고 새 주소를 적습니다. 새 주소는 옆지기가 고맙게 적어 줍니다. 한참 이렇게 하다가 아무래도 옆지기 손까지 너무 힘들게 하는구나 싶어 새 집 주소를 종이로 뽑아 봅니다. 앞으로도 몇 백 장을 이렇게 해야 할 테니까요.

 

 주소 다 적고 풀을 발라 마무리한 편지꾸러미를 가방에 차곡차곡 담습니다. 손글씨 편지봉투를 우표 붙여 보내고 싶어 우체국 일꾼한테 묻습니다. 시골 작은 우체국까지 우표가 내려오지 않아 우표로는 붙이지 못한다고 얘기해 줍니다. 셈틀로 직직 뽑는 딱지만 쓴다고 합니다. 일이 수월하기로는 셈틀 딱지가 수월할 텐데, 나로서는 혼자 소식지 만들어 혼자 봉투 쓰고 혼자 우체국에서 우표를 사서 붙이던 1995년부터 하던 일을 언제부터인가 우표 없이 보내기만 하니, 손으로 쓴 봉투가 참 멋쩍습니다. 나는 손으로 주소 적은 봉투에 우표를 붙여 띄운 편지가 눈물나게 고맙다고 느껴, 나도 봉투에 손으로 주소를 적고는 우표를 붙이고 싶은데, 언제나 우표붙이기에서 척 하고 걸립니다. 다음에 읍내에 갈 때에는, 읍내 조금 큰 우체국에 우표가 있느냐고 여쭐 생각입니다. (4345.1.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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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1-06 05:43   좋아요 0 | URL
1인 잡지도 만드신다니, 참 많은 일을 하시네요~~~
아~ 작은우체국에는 우표가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요~
손으로 쓴 편지를 받는 것도 즐거운 일이죠.^^

파란놀 2012-01-06 07:13   좋아요 0 | URL
1인잡지 만든 지는 참 오래되었어요.
1인소식지를 1994년부터 만들었으니까요 @.@

gimssim 2012-01-06 15:33   좋아요 0 | URL
한 자 한 자, 장인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역설의 삶을 사시는 님의 저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파란놀 2012-01-06 17:27   좋아요 0 | URL
손으로 글을 쓰면 느낌이 참 좋아요.
책이란, 손으로 쓴 글을 담아
사람들한테 사랑을 들려주는 이야기꾸러미라고 느껴요.
 


 눈이 와도 빨래널기

 


 충청북도 멧골집에서 겨울을 나던 때가 떠오르지 않는다. 빨래가 꽁꽁 얼어붙더라도 해가 마당으로 따숩게 비칠 때에 내다 널었던가. 날마다 빨래를 여러 차례 하면서 늘 오늘 빨래만 돌아보거나 살필 수 있지 않느냐 싶다. 그래도 인천 골목동네에서는 여러 해 살았기 때문인지, 바깥마당에 내다 널던 빨래는 그럭저럭 떠오른다. 워낙 해가 잘 드는 집에서 살았으니 빨래널기는 걱정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살림집 될 보금자리를 고를 때에는, 첫째로 해가 얼마나 잘 드는가이다. 무엇보다 해가 잘 들어야 한다. 다음으로 빨래할 자리가 넉넉해야 한다. 한쪽에서 아이가 씻고 한쪽에서 아버지가 빨래할 만해야 한다. 부엌을 넓게 쓰면서 부엌 한켠에서 식구들 앉아 밥을 먹도록 한갓져야 하는 줄은 옆지기랑 함께 살고부터 배웠다. 혼자서 오래 살다 보니 부엌 넓게 쓰기는 그닥 안 헤아리곤 했다.

 

 고흥에도 눈이 내려 쌓이기도 하는구나 하고 처음으로 느낀 엊그제, 눈이 쌓이든 말든 빨래는 해서 해바라기를 시키려고 생각한다. 다 마친 빨래를 바가지에 담아 마당으로 나온다. 아이가 곁에서 거드는 척하다가 눈놀이를 한다. 하나하나 빨래줄에 넌다. 아이들 옷가지가 후박나무 빨래줄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 시름이 다 가신다. 그나저나, 빨래를 널기 무섭게 바람이 되게 매몰차게 분다. 이러다 기저귀 다 찢어질라. 하도 되게 부는 바람이라 해가 나도 기저귀 빨래는 금세 얼어붙는다. 겨울이 춥디추운 데에서 살던 북녘땅 옛사람은 아이들 기저귀 겨울 빨래를 어떻게 했을까. (4345.1.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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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85] 능금씨

 

 

 ‘사과(沙果)’라는 이름은 옳지 않지만, 사람들은 ‘사과’라는 이름 아니고는 이 열매를 가리키지 못합니다. 예부터 이 열매를 가리키던 이름은 ‘능금나무 내(柰)’였습니다. ‘능금나무 내’는 ‘멋 내’라고도 적힙니다. 그러니까 우리 열매 이름은 ‘능금’이랑 ‘멋’이에요. 이와 비슷하게, ‘오얏 리(李)’라는 이름이 있어요. 이제는 ‘자두(紫桃)’라고만 하고 ‘오얏’이라 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는데, 사람 성을 일컬을 때에 ‘자두 리’라 하는 사람은 없어요. ‘柰’라는 한자를 놓고도 ‘사과나무 내’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잃은 사람들은 능금나무이든 멋나무이든 생각하지 못해요. 생각을 잊은 사람들은 오얏나무를 헤아리지 않아요. 배꽃이라는 어여쁜 이름이 있어도 ‘이화(梨花)’라는 한자에 갇히는 한국사람이에요. 경성대학교라 안 하고 서울대학교라 하지만, 배꽃대학교라 말하지 못하고 이화(여자)대학교라 말하기만 해요. 새해에 다섯 살 된 우리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열다섯이 되고 스물다섯이 되면, 이 아이가 둘레 어른들 사이에서 듣고 나눌 말은 어떤 모습이 될까 궁금합니다. 우리 아이가 생각씨 담은 생각말을 들려줄 때에 예쁜 마음씨로 곱게 이야기꽃 피울 이웃은 얼마나 있을까 궁금합니다. 새해 선물로 받은 능금 한 알 썰며 능금씨 하나 건사합니다. (4345.1.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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