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맞는 빨래


 하루하루 나이를 더 먹으면서 이제는 더 젊을 적보다 힘을 더 쓸 수 없다고 느낍니다. 하루하루 나이를 먹으며 ‘늙는’ 아버지는, 하루하루 나이를 먹으며 ‘한창 젊은’ 때로 접어드는 두 아이 빨래를 하면서 생각합니다. 첫째를 낳아 첫째 기저귀를 빨 때처럼 둘째를 낳고 살아가는 이즈음 첫째 기저귀를 빨 때처럼 빨래를 하지 못합니다. 첫째 때에는 오줌기저귀 한두 장만 쌓여도 새벽 한 시이고 두 시이고 세 시이고 네 시이고 그때그때 빨래를 했습니다. 이제는 새벽에 한두 차례 겨우 빨래를 합니다. 때로는 새벽 내내 그저 대야에 오줌기저귀를 담근 다음 아침에 일어나서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제 몸에 맞게 빨래를 합니다. 제 빨래에 제 몸을 맞추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적잖은 사람들은 당신들 몸을 당신들 빨래한테 맞추거나 당신들 빨래기계에 맞춥니다.

 책을 읽을 때에 책에 내 몸을 맞출 수 없습니다. 딱딱하며 메마른 글로 싱거우며 덧없는 이야기를 담은 책에 내 몸을 맞출 수 없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삶을 알뜰살뜰 일구고픈 내 몸에 맞는 책을 찾아서 읽고 싶습니다. 억지로 온갖 지식을 내 머리에 쑤셔넣거나 억척스레 갖은 정보를 내 몸에 꿰어맞추고 싶지 않습니다.

 어버이 틀에 맞추어 아이를 키울 수 없습니다. 어버이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라고 느끼면서 아이는 아이 몸에 맞게 하루하루 즐거이 맞아들이도록 보살필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나는 내 몸에 맞게 빨래를 즐깁니다. 나는 내 몸에 맞게 책을 읽습니다. 나는 내 몸에 맞게 아이하고 살아갑니다. 나는 내 몸에 맞게 자전거를 타고, 장마당 마실을 하며, 헌책방 나들이를 즐기고, 좋은 벗님을 사귑니다.

 아침에 빨래를 하면 첫째 아이가 도와줍니다. 빨래를 다 마치고 통에 담아 마당으로 나오면 아이는 싱긋 웃으며 조용히 따라나옵니다. 마당에 놓은 걸상에 빨래통을 올립니다. 아이는 앙증맞은 손으로 빨래를 한 점씩 집어 아버지한테 건넵니다. 아버지는 빨래를 한 점씩 빨랫줄에 넙니다. 빨랫줄에 줄지어 앉던 잠자리가 날아오릅니다. 빨래를 널 무렵, 첫째 아이는 빨래집게를 둘 집어 아버지한테 건넵니다. 아버지는 빨래집게를 받아 천천히 빨래에 집습니다. 우리 아이도 차츰 크서 팔뚝에 힘이 붙고 키가 더 자라면, 아버지가 많이 힘들거나 고단할 때에 빨래를 맡아 해 주겠지요. (4344.8.2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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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의 아름다운 디카 세상
윤광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이야기가 없으면 사진이 아닙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43] 윤광준, 《아름다운 디카 세상》(웅진,2004)



 2002년에 《잘 찍은 사진 한 장》(웅진지식하우스)을 내놓은 윤광준 님이 이태 뒤 새롭게 내놓은 《아름다운 디카 세상》(웅진,2004)을 읽습니다. 윤광준 님은 “사진을 찍기 위해 특별한 곳을 가야 한다는 생각은 거추장스럽다(39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참 옳다 싶은 이야기입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남다르다 싶은 곳에 가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배우려고 남다르다 싶은 사진책이나 인문책을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남다르다 싶은 사진’ 한 장을 얻는 일이 부질없듯이, ‘잘 찍었다 싶은 사진’ 한 장을 얻는 일이 덧없습니다.

 《잘 찍은 사진 한 장》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한 사진삶을 이태 뒤에는 어느 만큼 곰삭였을까 궁금해서 《아름다운 디카 세상》을 펼칩니다. 사진밭에 처음 발을 들이는 이들이 윤광준 님 책을 퍽 즐겨읽을 뿐 아니라, 사진길을 그럭저럭 걷는 이 또한 윤광준 님 책을 꽤 들여다보기 때문입니다. 여러모로 사진말을 낳으며 사진꿈을 키우는 윤광준 님이기 때문에 “브레송과 같은 열정을 바치지 않는다면 평생에 걸쳐 ‘결정적 순간’을 포착해 낼 확률은 거의 없다(80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고개를 갸웃합니다. 앙리까르띠에 브레송 님은 ‘어떤 열정’을 바쳤을까요. ‘평생에 걸쳐 결정스럽다 싶은 순간을 붙잡아야 할 까닭’이 꼭 있는가요.

 윤광준 님은 “사진이란 게 꼭 좋은 화질에 얽매일 필요가 있을까? 나의 의식과 대상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좋은 사진 아닌가(139쪽)?” 하고 묻습니다. 우리한테 묻지 않습니다. 윤광준 님 스스로한테 묻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물으면서도 디지털사진기 화소수를 이야기하는 틀에서 홀가분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묻지만, 막상 값싸고 가벼운 똑딱이를 즐겨쓴다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디지털사진기를 쓸 때에도 ‘잘 찍은 사진’에 얽매이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진 한 장에는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이야기가 스며들 뿐 아니라, 사진 한 장을 빚는 사람 이야기가 나란히 깃듭니다. 이야기가 있기에 사진입니다. 이야기가 없으면 사진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있기에 글입니다. 이야기가 없으면 글이 아닙니다.

 이야기 없이 쓰는 글은 느낌글이 되지 않습니다. 이른바 ‘서평’이 되는데, 서평 가운데에서도 ‘주례사 서평’이 되고 맙니다. 이야기 없이 만든 문학은 시나 소설이나 수필이 되지 못합니다. 어찌어찌 문학 테두리에 든달지라도 이야기가 없는 시나 소설이나 수필을 왜 읽겠습니까. 이야기 있는 삶에서 샘솟는 이야기 있는 문학입니다. 이야기 있는 삶에서 길어올리는 이야기 있는 사진입니다.

 ‘사진을 잘 찍었다’ 할 때에는 구도·초점·빛·빛깔·그늘을 잘 맞추었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구도·초점·빛·빛깔·그늘을 잘 맞추며 찍은 사진은 ‘빈틈없이 찍었다’ 할 만한 사진이지 ‘잘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잘 찍은 사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만, 굳이 이런 꾸밈말을 넣어 말을 하자면, ‘잘 찍은’ 사진이란, 구도가 어긋나거나 초점이 흔들리거나 빛이 모자라거나 빛깔이 어수룩하거나 그늘이 맞지 않다 하더라도 ‘이야기가 살아숨쉬는’ 사진입니다. 앙리까르띠에 브레송 님이 빚은 사진은, 이른바 ‘잘 찍은 사진’이면서 ‘빈틈없이 찍은’ 사진입니다. 반드시 ‘열정을 바쳐야’ 브레송다운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내 삶을 아끼고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 삶을 사랑하면서 사진 한 장으로 그러모을 꿈을 건사할 때에, 필름사진기이든 디지털사진기이든 값비싼 사진기이든 값싼 사진기이든, 어느 사진기를 손에 쥐더라도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따사로운 사진’ 한 장을 얻습니다.

 윤광준 님은 “사진 찍을 대상이 걷거나 뛰면 나 역시 그와 같이 움직이며 사진의 리얼리티를 표현해 내야 하는 것이다(190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옳다 싶은 말입니다. 다만, ‘사실성 짙은 느낌을 나타내야’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이란 무엇일까요. 한자말로 적는 ‘事實’ 말뜻을 제대로 헤아리는 분이 너무 적은데요, ‘사실’이란 “있는 그대로”입니다. 한 마디로 가리키면 “꾸밈없이”입니다. “본 그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이고, “덧붙이거나 깎거나 손질하는” 모습이 아니라 “꾸밈없는” 모습입니다.

 사진으로 찍힐 사람하고 ‘같이 움직이는’ 일은 틀림없이 잘 살필 매무새 가운데 하나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꼭 같이 움직이지 않아도 돼요. 가만히 멈추어 가만히 지켜보아도 돼요. 굳이 같이 뛰어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따라하기’란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함께 어울려 놀거나 사는 모습이 아니거든요. 말 그대로, 내가 사진으로 담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같이 살아야’ 합니다. ‘같이 살면’ 넉넉해요.

 같이 살아가는 고운 벗이기 때문에, 고운 벗하고 오래도록 떨어져 지내더라도 마음으로는 날마다 만납니다. 같은 자리에서 두 눈을 마주보지 못하더라도 깊은 마음으로는 언제나 함께 지냅니다. 사진으로 담을 넋이란 서로 애틋하게 여기는 사랑 한 가지입니다. 눈으로 느끼는 모습을 넘어, 마음으로 아끼는 사랑입니다. 온몸으로 껴안고 온마음으로 부둥켜안는 기쁨입니다.

 윤광준 님은 ‘아름다운 디카 세상’이라 이야기하지만, 디지털사진기가 아름다운 누리를 이루자면, 이에 앞서 ‘우리들이 서로 어우러지면서 살아가는 이 터전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아름다이 일구는 삶’에서 ‘아름다운 사람’으로 어깨동무하는 ‘아름다운 사랑’이 샘솟아 ‘아름다운 사진’이 꽃피웁니다.

 어떤 장비를 쓰든 아름다울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아무 장비라도 아름다울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아름다이 살아가기에 글을 쓰면 글에 아름다움이 깃들고 그림을 그리면 그림에 아름다움이 깃들며 사진을 찍으면 사진에 아름다움이 깃듭니다. 사진이 아름답거나 필름사진기가 아름답거나 디지털사진기가 아름답지 않습니다.

 젓가락이 아름답기에 밥이 맛나지 않습니다. 밥그릇이 아름답기에 배불리 밥을 먹지 않습니다. 밥을 차린 손길이 아름답기에 밥이 맛납니다. 밥상에 오르기까지 땀흘린 흙일꾼 손마디가 아름답기에 배불리 밥을 먹습니다.

 사진을 찍고 나누며 즐기는 사람들 삶 밑자락을 건드리거나 들여다보지 않고서야 《아름다운 디카 세상》이 밝히거나 보여주려 하는 이야기를 옳게 건사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이리하여, 윤광준 님은 “카메라 하나로 세상을 보는 관점이 이렇게 다른 만큼 아들녀석과 나와의 이해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2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아닙니다. 사진기를 바라보는 눈이 아닙니다. 사진기와 놀이기계입니다. 윤광준 님 아들아이는 놀이기계로 디지털사진기를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사진기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삶이 다르기에 사랑이 다르고, 사랑이 다른 만큼 사진이 다릅니다. 아니, 사진이 아닌 놀이라 할 테지요.

 사진기 하나로 온누리를 바라보는 눈길이 아닌 줄 느껴야 합니다. 살아가며 온누리를 바라보는 눈길이 다른 줄 헤아려야 합니다. 온누리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매무새가 다른 줄 살펴야 합니다.

 사진이란, 다 다른 터전에서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사랑을 꽃피우면서 다 다른 이야기를 길어올릴 때에 이 다 다른 꿈결을 살뜰히 보듬는 어여쁜 손길 가운데 하나입니다. (4344.8.25.나무.ㅎㄲㅅㄱ)


― 아름다운 디카 세상 (윤광준 글·사진,웅진닷컴 펴냄,2004.4.30./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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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상급식 책읽기


 만화책 《아빠는 요리사》 112권을 보면 도시락 싸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공 ‘요리사 같은 아빠’가 다니는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어떤 도시락을 싸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주인공인 ‘요리사 같은 아빠’는 어마어마하다 할 만한 도시락을 선보이면서 ‘집에서 도시락을 싸는 일이 얼마나 기쁘며 즐거운가’ 하고 이야기합니다.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를 다니면서 가장 자주 가장 오래 떠올릴 만한 이야기는 ‘어머니가 싼 도시락을 꺼내어 먹던 일’입니다. 나는 내 어머니가 싼 도시락을 한 번도 부끄러이 여긴 적이 없고, 한 번도 반찬이나 밥알 하나 남긴 적 없습니다. 동무보다 도시락이 빼어나기에 부끄러이 여기지 않습니다. 날마다 새벽 일찍 일어나 도시락을 싸는 어머니 삶을 알기에, 이 삶이 배어든 사랑어린 도시락이 더없이 고맙습니다. 고마운 도시락이니 가방을 멜 때에 도시락이 기울어지지 않도록 마음을 쓰고, 학교에 닿은 뒤 도시락을 살그머니 꺼내어 책상서랍에 얌전히 모십니다. 낮밥을 먹을 때까지 즐거이 기다립니다. 도시락 따끈따끈한 기운이 교과서나 공책에 밸 때면, 이 따끈따끈한 기운을 볼에 대며 좋아했습니다.

 광역시나 시를 넘어 군이나 읍이나 면이 되면, 학교가 차츰 작아집니다. 학교 크기도 작지만, 이 작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숫자는 얼마 안 됩니다. 문닫는 시골 학교가 해마다 늘어납니다. 이와 달리 광역시나 시에서는 새로운 학교가 자꾸 태어납니다.

 시골에서는 지자체나 나라에서 돈을 대어 시골학교 아이들을 버스로 집까지 태워 주거나 모시러 다니곤 합니다. 시골학교에서는 아주 마땅히 아이들한테 ‘무상급식’을 하는 줄 압니다. 급식뿐 아니라 이런 설비 저런 교재를 지자체나 나라에서 대는 줄 압니다.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는 낮밥이나 참이나 교재뿐 아니라 여러 가지를 마땅히 대야 합니다. 복지라는 이름이 아니라 교육이라는 이름이니까요. 돈을 내야만 배울 수 있을 때에는 교육이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기초교육이라 한다면.

 그렇지만, 나는 좀 달리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밥을 먹일 수 있어야 합니다만, 학교에 따로 밥먹는 자리를 마련하기보다, 집집마다 ‘도시락을 쌀 돈’을 대어, 집집마다 다 다른 아이들 몸에 걸맞게 다 다른 도시락을 싸도록 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교육이니까요. 교육은 틀에 짜맞추는(획일화) 일이 아니요, 교육은 사람에 맞추어(전인교육) 저마다 다른 삶을 찾고 느끼며 사랑하도록 이끄는 일일 테니까요.

 나와 옆지기는 우리 아이들을 학교에 넣을 마음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싶어 하면 보낼 수는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무렵이 되면, 우리 아이들이 다닐 시골학교에서는 아주 마땅히 ‘무상급식’을 하겠지요. 어쩌면 이 급식을 그냥 받아서 먹도록 할 수 있습니다만, 나는 아이들한테 도시락을 따로 싸서 건네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집에서 먹는 밥이랑 밖에서 먹는 밥이 다르도록 하고 싶지 않아요.

 학교에 다니기로 했으면 그냥 급식을 받는 일이 나을는지 모릅니다. 집 바깥에서 오래 머물며 살아가니까요.

 도시락을 싸고 싶으면 학교에 보내지 않을 노릇인지 모릅니다. 도시락에 담는 사랑을 아이가 느끼며 살아가기를 바란다면, 아이가 제도권 틀에 얽히지 않는 홀가분하며 아름다운 넋으로 자라도록 곁에서 힘쓸 노릇이라 하겠지요.

 군대에서 밥먹던 일을 돌이킵니다. 군대에서는 밥먹는 일마저 썩 반갑지 않았습니다. 밥먹으러 갈 때에도 줄지어 걸으며 군대노래를 목청이 터져라 불러야 하고, 밥을 다 먹고 나서 밥판을 아주 구석구석 닦아야 했을 뿐 아니라, 잔 티가 조금이라도 남거나 어느 한쪽이 미끌거리면 스텐 밥판이 깨져라 머리통을 두들겨맞고 얼차려를 받은 다음 다시 밥판을 닦아야 했습니다.

 학교 밥먹는 자리에서도 밥판을 씁니다. 초등학교이든 대학교이든 밥판을 씁니다. 스텐 밥판을 볼 때면 군대가 떠오릅니다. 왜 저런 밥판을 써야 하는지 소름이 돋습니다. 밥을 받으러 줄을 서는 일부터 내키지 않고, 밥먹는 방에 우르르 몰려 앉아 서둘러 밥을 먹고 일어서야 하는 일 또한 달갑지 않습니다.

 도시락을 싸서 먹던 어린 날, 죽이 잘 맞는 동무들하고 책상을 붙여 함께 먹습니다. 뒤돌아 앉아서 먹거나 옆 짝꿍이랑 먹습니다. 때로는 도시락을 들고 교실 밖으로 나갑니다. 운동장 한켠 나무 그늘 밑에 앉아서 먹습니다. 도시락을 다 먹고 풀밭에 드러눕습니다. 천천히 먹어도 되고 후다닥 먹고 운동장에서 뛰놀아도 됩니다. 한참 뛰놀고 교실로 돌아가야 할 때에 빈 도시락 그릇에 물을 받아 게걸스레 마십니다.

 서울에서는 무상급식을 놓고 주민투표를 벌였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속으로 생각합니다. 참말 크나큰 일을 뒷전으로 미루고 이런 일 때문에 퍽 많은 사람들이 말다툼을 할 뿐 아니라 적잖은 돈을 들여 주민투표까지 한다니 놀랍습니다. 이런 아우성을 벌일 돈과 품과 땀으로 참말 아름다운 복지 정책을 꾸려야 할 텐데요. 참말 올바른 교육 정책을 이끌어야 할 텐데요.

 나는 더 생각합니다. 무상급식에 앞서 초·중·고등학교에 있는 주차장부터 없애면 좋겠습니다. 학교에 있는 주차장을 없애고 학교 텃밭으로 일구면 좋겠습니다. 반마다 텃밭을 하나씩 나누어 반마다 먹을 푸성귀를 반 아이들이 손수 돌보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더 돈을 들여야 이룬다는 복지나 교육을 넘어, 더 몸을 쓰고 더 마음을 기울여 서로 사랑하며 아낄 복지나 교육으로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4.8.2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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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톱을 깎는 평화


 늦은 저녁이 되어도 첫째는 잠들지 않습니다. 더 놀고 싶으니 잠들지 않겠지요. 불을 끄고 자리에 눕지 않았으니 잠들지 못하겠지요. 아버지는 손톱깎이를 꺼냅니다. 아이는 그림책을 읽습니다. 아버지는 먼저 아버지 손톱을 깎습니다. 빨래를 할 때에 자꾸 손톱이 바닥에 긁히기에 얼른 깎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여러 날이 지나도록 좀처럼 손톱깎이를 꺼내지 못했습니다. 오늘 비로소 꺼내어 집습니다. 한쪽 손을 다 깎고 다른 손을 깎을 무렵 아이가 저도 깎아 달라 합니다. 아버지 다 깎은 다음 깎을 테니 기다리라 말합니다. 아버지는 발톱도 깎으려 했지만 발톱 깎는 일은 잊고 아이 발부터 살핍니다. 아이 발톱을 먼저 깎습니다. 발톱을 다 깎으니 아이가 손을 척 내밉니다. “손에 힘 빼야지.” 조그마한 손가락을 살며시 쥐고 더 조그마한 손톱을 천천히 깎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 손톱도 못 깎으면서 여러 날 지났을 뿐 아니라, 아이 손톱 또한 못 깎으며 여러 날 보냈다고 깨닫습니다. 아이 손발톱을 다 깎고 손톱깎이를 제자리에 놓습니다. 이윽고 잠자리에 들면서 퍼뜩 떠올립니다. 아이고, 내 발톱은 못 깎았네. (4344.8.2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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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7일 전쟁 카르페디엠 27
소다 오사무 지음, 고향옥 옮김 / 양철북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어른이 되고 싶은 어른
 [푸른책과 함께 살기 88] 소다 오사무, 《우리들의 7일 전쟁》(양철북,2011)



- 책이름 : 우리들의 7일 전쟁
- 글 : 소다 오사무
- 옮긴이 : 고향옥
- 펴낸곳 : 양철북 (2011.8.15.)
- 책값 : 1만 원


 (1) 어린이와 어른


 사람들은 읽어서 알고, 들어서 알며, 겪어서 압니다. 사람들은 살아서 알고, 만나서 알며, 바라보았기에 압니다. 사람들은 생각해서 알고, 마음써서 알며, 느껴서 압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어린 나날부터 참 많은 이야기를 압니다. 우리 집 네 살 첫째는 보육원을 다니지 않으니 여느 아이보다 참 적은 이야기를 안다 하리라 봅니다. 우리 집 네 살 첫째 다른 또래는 보육원에서 여러 놀이를 하며 알파벳도 보고 저런 놀이도 하며 또래끼리 온갖 말을 섞겠지요.

 아이들끼리 주고받는 말마디에 가만히 귀를 기울입니다. 아이들이 읊는 말마디는 하나같이 저희 어버이한테서 듣는 말마디입니다. 내 아이가 읊는 말마디라면 바로 내가 읊는 말마디입니다. 아이들은 서로 어울리면서 서로 저희 어버이들 말마디를 주고받습니다. 아이들은 제 또래 말마디를 들어서 배운다기보다 제 어버이 말마디를 제 또래를 거쳐 들으면서 배우는 셈입니다.

 아이들은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로 말을 배우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텔레비전이나 비디오나 둘레 어른들 모습을 바라보면서 무엇엔가 익숙해지거나 길듭니다. 자주 보니 익숙합니다. 늘 보면서 길듭니다. 좋거나 나쁘거나 가리지 못합니다. 옳거나 바르거나 살피지 못합니다.

 밥을 받아들이듯 말을 받아들입니다. 물을 마시듯 제 어버이 삶터를 빨아들입니다. 바람을 마시듯 제 어버이와 둘레 어른이 꿈꾸는 삶을 함께 마십니다.


.. 형제가 많은 준코는 보통 집처럼 설날이나 생일에 용돈을 받지 못한다. 용돈이 필요하면 일을 해야 한다. 맏딸인 준코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곧장 가게에 나가 일을 했다. 배달도 나가고 아기 기저귀도 갈아 준다. 청소와 빨래는 준코의 특기다. 무엇보다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준코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집안일을 거들 거라고 했다. 늘 공부에 쫓겨 머릿속에서 성적 고민이 떠나지 않는 에이지를 준코는 불쌍하게 여겼다 ..  (45쪽)


 아이가 이래저래 잘못했을 때에 이런저런 목소리로 꾸짖었다면, 아이는 이 꾸짖음을 가슴에 새깁니다. 아이가 이렁저렁 잘할 때에 요런조런 손길로 쓰다듬는다면, 아이는 이 손길을 몸에 새깁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아이가 받아들이는 말이나 맞아들이는 몸짓은 아이가 아이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른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어른 또한 둘레 어른이 내뱉는 말을 받아들입니다. 어른도 둘레 다른 어른이 보이는 몸짓을 맞아들입니다.

 사랑으로 따스히 살아가는 어른하고 어깨동무하는 어른이라면 사랑으로 따스히 어루만지는 삶을 받아들입니다. 골을 부리며 성을 내는 어른하고 함께 일하는 어른이라면 저도 모르는 어느 결에 골을 부리며 성을 내는 버릇에 젖어듭니다.

 푸른숲이 껴안는 조그마한 집에서 눈부시게 반짝이는 밤별을 올려다면서 살아간다면, 어른이나 아이나 이 푸른숲이 베푸는 푸른 내음과 기운을 받아먹을 뿐 아니라, 눈부시게 반짝이는 밤별빛을 맞아들입니다.

 아이들이 시골에서 살아야 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아이들은 맑은 바람과 밝은 햇살과 고운 흙을 누리며 살아야 제 목숨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어른 또한 맑은 바람과 밝은 햇살과 고운 흙을 누리며 살아갈 때에 어른인 제 목숨과 아이들 목숨을 사랑합니다.


.. “다 같이 하는 일이 이렇게 재미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어. 공부벌레처럼 공부만 하면 도쿄대에 들어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아마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거야.” … “그럼 한 가지 물어 볼게요. 시장이나 교감은 그런 (비밀) 모임에 나가도 되나요?” 마이크를 잡은 교감은 할 말을 잃었다. “왜 대답을 못하죠? 얼른 대답하세요.” 히데아키는 날카롭게 다그쳤다. “그 문제와 이건 다르다. 너희는 아직 어린애란 말이다.” “어린애든 어른이든 나쁜 건 나쁜 거예요. 그렇지 않은가요?” “그건 그렇지만…….” “왜 아이들만 진실하게 살아야 하죠? 이유를 말해 보시라고요, 이유를.” ..  (117, 313쪽)


 아이도 목숨이요 어른도 목숨입니다. 아이도 사람이고 어른도 사람입니다. 아이도 삶이며 어른도 삶입니다. 아이부터 사랑이면서 어른 또한 사랑이에요.

 돈벌이에 매인 어른하고 살아가는 아이가 돈벌이에 매이는 삶으로 나아갈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싱그러이 웃으며 사랑을 꽃피우는 어른하고 살아가는 아이가 제 동무나 이웃하고 예쁘게 웃으며 사랑을 꽃피웁니다.

 무턱대고 아무 책이나 읽어치우는 어버이하고 살아간다면, 책은 많이 읽을는지 몰라도 삶으로 삭일 이야기는 깨닫지 못하는 아이가 되기 마련입니다.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하는 어른도 아이도 아닙니다. 내 삶에 알맞게 책을 살피고 찾으며 느껴서, 내 삶을 북돋울 고마운 길동무로 사귈 책이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이들이 영어를 배우든 한자를 배우든 무어를 배우든 늘 똑같습니다. 아이들은 지식을 배워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지식을 쌓아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졸업장이 많아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자격증을 불려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디에서 누구랑 어떻게 왜 살고 싶은가를 느껴야 합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키울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서로서로 나눌 믿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 밥과 옷과 집을 어떻게 이루어 어떻게 나누는 기쁨을 길어올려야 하는가를 헤아려야 합니다.

 곧, 어른부터 제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마련하면서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어른부터 제 밥과 옷과 집을 어찌 건사해야 하는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돈으로 만드는 밥과 옷과 집이란 없습니다.


.. “아이들이 계속 없어지면 세상은 대체 어떻게 될까요?” “어른들만의 세상……. 생각만 해도 오싹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떡하면 좋을까요? ” “야바 씨, 자녀가 있습니까?” “있죠. 초등학교 5학년생 딸 하나.” “저도 초등학교 2학년생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혹시 따님이 없어질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상상도 안 해 봤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다.” 야바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렇죠? 부모치고 아이들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준답시고 불행하게 만드는 크나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아이들을 ‘착한 아이’로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착한 아이’란 대체 어떤 아이일까요? 그것은 어른의 꼭둑각시죠/ 다시 말해, 어른이 되었을 때 사회에 순응하는 구성원이 되도록 훈련시키는 게 교육이죠.” ..  (330쪽)


 나는 어머니한테서 일하는 삶과 밥하는 손길과 빨래하는 몸뚱이와 할배를 돌보는 마음을 배웠습니다. 한 사람으로 살아갈 모두를 어머니한테서 배웠는지는 아직 잘 모릅니다. 다만, 어머니가 두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갔듯, 나도 옆지기하고 두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면서 생각합니다. 우리 집 두 아이는 제 어버이한테서 무엇을 배우면서 살아갈는지 곱씹습니다. 두 아이가 제 어버이한테서 무엇을 배울 만하고 무엇을 받아들일 만하며 무엇을 즐겁게 누릴 만한지 돌아봅니다. 흔한 말로는 ‘아이키우기(육아)’이지만, 옳게 말하자면 ‘함께살기(어른과 아이가 함께 살기)’입니다.


 (2) 어른과 이레 동안 싸우는 어린이


 소다 오사무 님이 쓴 푸른책, 그러니까 청소년소설 《우리들의 7일 전쟁》(양철북,2011)을 읽습니다. 새 보금자리를 찾아 충청북도 시골집을 떠나 강원도 시골집을 떠도는 길에 시외버스를 타며 읽습니다. 밤에 여관을 찾아들며 읽습니다. 중학교 한 반 아이들이 몽땅 하나가 되어 모든 어른하고 이레에 걸쳐 맞서 싸우는 이야기를 담은 푸른책을 읽습니다.

 아이들은 왜 어른들하고 싸워야 할까요. 어른들은 왜 아이들이 싸우자고 소매를 걷어붙일 때까지 서로 살가이 사랑하는 길을 걷지 않았을까요.

 싸움이 일어나는 까닭은 딱 둘입니다. 첫째, 힘센 쪽이 힘여린 쪽을 짓밟으면서 노예로 부리려고. 둘째, 힘여린 쪽이 힘센 쪽한테 짓눌리는 삶을 이제부터 떨쳐내려고.


..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도움이 되지 않게 돼. 그리고 도움이 안 되는 걸로 치면 우리 어린애들도 마찬가지 아니야?” “어린애들은 다르지. 부모는 자식을 키울 의무가 있다고.” “자식도 자라면 부모를 돌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 … “역시, 노인은 어른하고는 달라. 약한 사람을 괴롭히고 싶지 않아.” ..  (67쪽)


 아이들은 똘똘 뭉칩니다. 아니, 똘똘 뭉친다기보다 열서너 해에 걸쳐 쌓인 깊은 앙금과 눈물이 얼크러지면서 거센 불길이 됩니다. 아이들한테 쌓인 앙금과 눈물은 너무 아픕니다. 그러나, 이 너무 아픈 앙금과 눈물이 얼마나 아픈가를 어른들은 조금도 깨닫지 않고 느끼지 않으며 바라보지 않습니다.

 ‘나도 너희만 한 때를 살았다’고 말한대서 아이들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개구리가 되니 올챙이 적을 잊는 어른들이잖아요. 올챙이 적이 어떠한 줄을 잊고서 ‘나도 너희만 한 때를 살았다’고 입으로 떠든대서야 어느 어린이나 푸름이가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런데, 딱 두 어른이 이 아이들하고 손을 잡습니다. 아니, 딱 두 어른은 이 아이들한테서 사랑을 받고, 이 아이들한테 사랑을 베풉니다.

 먼저, 다 큰 젊은 아들(어른이 된 아들)한테서 버림받은 할아버지가 아이들 품에 안깁니다. 버림받은 떨꺼둥이 할아버지는 ‘어른들하고 싸우겠다’고 나선 아이들 이야기를 찬찬히 듣습니다. 찬찬히 듣고 나서 ‘싸움’, 그러니까 한자말로 옮기면 ‘전쟁’이란 무엇인가를 차분히 들려줍니다. 꾸미지 않습니다. 감추거나 숨기지 않습니다. 당신이 겪으며 온몸과 온마음에 아로새긴 그대로 하나하나 들려줍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 말을 들으며 깜짝 놀랍니다. 깜짝 놀랄 뿐 아니라 소리를 지릅니다. 할아버지는 이 모든 소리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 다시금 차분히 되풀이합니다. “너희는 절대 전쟁을 하지 마라(155쪽).” 하고.

 그러면, 청소년소설 《우리들의 7일 전쟁》은 뭘까요? 책이름부터 ‘전쟁’이라고 하는데?


.. “그런 얼굴은 개도 안 핥아요. 진딧물이라면 몰라도.” 다시 모두가 왁자그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이 똥개새끼들이 듣자 듣자 하니까 아주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가네.” “교사잖아요. 좀 더 품위 있는 말 좀 쓰지 그래요.” “나와! 내가 요절을 내주겠다.” “나오라고 한다고 나갈 멍청이가 어디 있어요. 그래서 물개(체육교사 별명)는 뇌세포가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라고요.” … “두 번째 문제. 이건 선생님이라면 누구나 아는 법률 문제예요. 학교 교육법 제11조에서는 뭐라고 말하고 있죠?” “모른다.” 사카이(물개 선생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도 몰라요? 학생에게 체벌을 가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어요.” 사카이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  (129, 146쪽)


 아마, 어른 눈길로 어린이를 바라본다면 ‘전쟁’이 될 테지요. 어린이 눈길로 어른을 바라본다면 ‘맞서기’입니다. ‘말하기’입니다. 아이들이 이처럼 들고 나서지 않고서야 어른들은 조금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레에 걸쳐 ‘어른이 보기에 전쟁을 벌여’야 겨우 귓등을 엽니다.

 아이들은 어떠한 굴레나 쇠사슬에도 얽히지 않는 홀가분한 곳, 이른바 ‘해방구’에 다 함께 모여 한몸이 될 때에 바야흐로 ‘그동안 하고팠으나 한 마디도 입밖으로 내지 못하던 말’을 마음껏 터뜨립니다.

 아이들한테 노상 손찌검을 하는 못난 교사 앞에서는 ‘야 임마 물개야!’ 하고 혀를 내밀지 못하지만, 홀가분한 쉼터에서는 ‘야 이녀석 물개야!’ 하며 혀를 낼름 내밉니다.


.. 교장은 생활지도주임의 얼굴을 봤다. “잘 모르겠습니다.” “잘 안 되는 이유는 아이들을 인격체로 대하기 때문이야. 우리가 보통 동물을 어떻게 길들이지? 개나 말을 조련하듯이 채찍으로 길들이면 반드시 잘 돼 가게 되어 있어. 이게 비법이야. 자네들도 머릿속에 잘 넣어 두게.” “교장 선생님은 부임하신 지 3년 만에 우리 학교를 도내 몇 안 되는 모범 학교로 바꿔 놓으셨습니다. 이건 기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  (222쪽)


 다른 한 사람, 아이들이 받아들이는 어른은 양호 교사입니다. 양호 교사는 아이들을 걱정하면서 먹을거리를 날마다 새로 마련해서 갖다 줍니다. 아이들 어느 어버이도 아이들한테 먹을거리를 갖다 주거나 챙겨 주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저 안쪽에서 굶으면 제발로 기어나오리라 여깁니다. 아이들이 굶든, 아이들이 추위에 떨든, 아이들이 외로움에 몸부림치든, 아이들이 슬픔에 잠기든, 하나도 아랑곳하지 않는 어른들입니다.

 어른들은 그저 한 가지를 바랍니다. 이 아이들이 ‘왜 이렇게 어른들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날뛰나?’ 하고 생각하면서, 이 아이들이 ‘예전처럼 고분고분하게 어른들 말을 듣기’를 바랍니다. 어른들 말을 고분고분 듣는 아이들이 앞으로 무럭무럭 자라서 당신들 어른처럼 ‘돈벌이에 푹 싸여 아이들을 당신하고 똑같이 돈벌이 기계처럼 만드는’ 노릇을 이으려 합니다.

 아이들은 이레에 걸친 ‘말하기(전쟁)’를 끝내는 자리에서 어른들한테 “우리 부모들도 지금은 타락했지만 젊었을 때는 꽤 멋진 일을 했군요(328쪽).” 하고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래요, 개구리들이 잊고 만 올챙이 적 일은 꽤 멋진 일이었는가 봅니다. 그러나, 이 멋진 일을 개구리가 될 때에도 고이 잇지 않는다면, 어느 어른이라 하더라도 하나도 반갑지 않고 멋지지 않으며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3) 어른이 되고 싶은 어른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나부터 내 고마운 보금자리에서 내 사랑스러운 옆지기와 내 아름다운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스럽거나 아름다이 마주하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한솥밥을 먹는 살붙이들은 서로서로 얼마나 좋은 길동무이거나 벗님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보기에 어른인 나는, 얼마나 어른다운 어른으로 살아가는지 궁금합니다. 참말 어른이 되었다 할 만한가 궁금합니다. 밥그릇 숫자로만 어른인가요. 나이로만 어른인가요. 해마다 더 주름이 지는 살결로만 어른인가요. 머리카락을 마음껏 내버려둘 수 있으니 어른인가요. 술을 마실 수 있기에 어른인지요. ‘19금’에서 벗어났으니까, 참말 전쟁이 터지면 총칼을 들고 살인을 마음껏 저지르는 군인이 될 수 있으니 어른일는지요.


.. “져도 좋잖아. 하고 싶은 걸 할 수만 있다면.” … “모두들, 내 이 왼손을 봐라. 그리고 이 배를.” 세가와 할아버지는 왼손을 높이 들어 올리고, 셔츠를 올려 배를 보여주었다. 왼손에는 손가락 네 개가 없었고 배에는 죄어든 듯한 흉터가 있었다. “이 손가락은 전쟁 때 폭탄에 날아가버렸다. 이 배의 흉터도 그 파편이 떨어져 생긴 거고.” “아팠겠네요?” 히데아키가 미간을 찌푸렸다. “한데 말이다. 참 이상하게도 아픈 줄은 몰랐단다. 뜨거운 쇳덩어리에 눌린 것 같았어. 그래서 보니까 손가락이 없어져 버렸더구나.” 모두들 할아버지의 네 손가락이 없는 손을 바라본 채 숨을 죽였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았단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몇 명이 동시에 물었다. “그 전투에서 살아남은 건 소대 아흔 명 중 절반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죽었어요?” “죽었지. 나는 다치는 바람에 상이군인이 돼서 돌아왔지만,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은 수송선을 타고 필리핀으로 가야 했어. 한데 도중에 잠수정공격으로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모두 전사했지.” “모두?” ..  (29, 70∼71쪽)


 어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늘 어른다운 삶을 사랑하려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어린이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어린이다운 삶을 사랑하려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푸름이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한결같이 푸름이다운 삶을 사랑하려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 “모두 하늘 좀 봐. 별이 참 예쁘다.” … “할아버지, 전쟁 때 사람 죽인 적 있어요?” “있지.” “살인을 했다고요?” 겐이치가 째지는 소리를 냈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전쟁이란 그런 거란다.” “죽였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기분이 아주 나쁘지. 벌써 몇 십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지금까지도 악몽을 꾸고 가위에 눌려.” ..  (49, 155쪽)


 어른이 되고 싶은 어른이어야 고운 목숨입니다. 어린이가 되고 싶은 어린이여야 맑은 눈길입니다. 푸름이가 되고 싶은 푸름이여야 따스한 몸뚱이입니다.

 늙었기에 주름이 집니다. 젊기에 탱탱합니다. 일했기에 굳은살이 박힙니다. 놀거나 쉬는 동안, 뭉친 힘살이 풀립니다.

 《우리들의 7일 전쟁》에서 이레에 걸쳐 어른들한테 할 말을 마음껏 쏟아낸 아이들은 이제 어떤 푸름이로 살아갈까요. 이 푸름이들을 보살피며 함께 지낼 어버이와 교사는 앞으로 어떤 어른으로 살아갈까요. (4344.8.24.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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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8-24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말이죠,
저한테 좀더 내면에 있는 아이를 다독여서 제 나이까지 끌어올려야 편안해질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말에, 저는 슬펐답니다. 그냥요. ^^

된장님 말씀대로 모두 시골에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두 시골에 간다면, 거기가 시골이 맞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람이란,
그리고 집단화된 사람이란 어느 방향으로 갈지 예상하기 어려우니까요. 된장님처럼
확고한 신념을 가지지 못 한 저로서는, 계속 혼란의 연속일거 같아요.

그래도 항상 좋은 글 감사하답니다.

파란놀 2011-08-24 11:49   좋아요 0 | URL
시골에 가서 산다는 뜻이란,
내 밥하고 옷하고 집을 스스로 마련하거나
스스로 다스린다는 뜻이에요.
이러면서, 나 또한 자연에서 태어난 목숨인 줄을 깨닫고,
이러한 목숨이 제 보람을 다 하도록
맑고 밝으면서 곱게 살아가는 기쁨을 누린다는 뜻이 돼요.

도시에서는 밥-옷-집을 오직 돈으로만 사야 해요.
모두 상품이 되고 재산이 돼요.
도시에서 살아가더라도 내 밥하고 옷하고 집을
스스로 건사할 수 있으면,
이때에는 시골에서 살아가는 나날하고
비슷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