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 씻기


 아침에 아이를 씻기는데 무언가 미끈거려 내려다보니, 허벅지에 똥이 묻었다. 바지에도 묻었다. 이 녀석이 똥을 언제 누었지? 소리 없이 누었나? 아니, 소리 내며 누었을 텐데 아이를 씻기려고 물을 받는 사이에 누었나 보다. 그래, 잘 했다. 씻기다가 똥을 누었으면 물을 다시 받아야 하잖아. 내가 입던 바지도 곧 빨아야 했으니 잘 되었지. 똥 눈 아이 엉덩이부터 씻기고 몸을 씻긴 다음 똥빨래를 신나게 한다. 마땅한 노릇이지만, 모두 내 맨손으로. (4344.9.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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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하니 1 - 바다어린이만화
이진주 지음 / 바다출판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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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갈 힘을 북돋우는 오직 한 가지
 [만화책 즐겨읽기 39] 이진주, 《달려라 하니 (1)》


 두 아이를 데리고 음성 할아버지한테 찾아갑니다. 며칠 앞서 음성 할아버지 태어난 날이었는데, 이날 마침 춘천으로 새 보금자리를 보러 다녀와야 했기 때문에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며칠 늦은 생일축하를 하러 어제 온 식구가 찾아갑니다.

 생일축하를 하러 간 우리 네 식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옆지기가 아침에 집에서 구운 케익을 칼로 알맞게 썰어 그릇에 담아 가져갑니다. 나는 ‘아버지가 되어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시로 하나 써서 깨끗한 종이에 옮겨적어 가져갑니다. 첫째는 마냥 신나게 뛰어놉니다. 둘째는 얌전하게 누워서 새근새근 잡니다.

 생각해 보면, 누구한테든 생일축하로 가장 좋은 일이란 더 큰 선물이나 더 돋보이는 선물이나 더 값진 선물이 아니라 할 만합니다. 함께 어울리고 나란히 밥을 먹으며 느긋하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한때가 가장 좋은 일일 수 있어요. 무슨 선물보따리를 잔뜩 짊어지고 찾아가도 나쁘지는 않을 테지만, 생일을 맞이한 사람한테 찾아가는 ‘내’가 바로 살아숨쉬는 선물일 수 있으리라 느껴요.

 곧, 내가 바로 선물이고 옆지기가 바로 선물이며 두 아이가 바로 선물이에요. 나부터 내 생일 때에 누군가 이런저런 선물을 잔뜩 안길 때보다, 서로 얼굴 한번 보자며 찾아와서 몇 마디 말을 섞을 때가 더없이 반갑고 고마우며 즐거워요.


- “이 악바리야! 졌지? 별거 아닌 것이 사나이 앞에서 까불고 있어! 앞으로는 내 앞에서 까불지 마! 알았지? 이 키 작은 못난이 계집애야!” (24쪽)
- “너 달리기 좋아하니? 그, 뭐냐, 육상이란 거 한 번 해 보지 않을래?” “뛰는 거요? 저도 가끔 한 번씩 힘차게 달려 봤음 하고 생각해요. 숨이 차도록! 특히 엄마 생각이 날 때면 엄마 품까지 내처 달려 보고 싶어요. 하늘 끝까지라도.” (80쪽)


 1985년에 〈보물섬〉에 실리고, 1989년에 만화영화로 나온 《달려라 하니》(드림필드) 1권을 새삼스레 다시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어느덧 스물예닐곱 해를 먹은 만화가 된 《달려라 하니》인데, 만화책으로나 만화영화로나 참 ‘오래된’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느끼면서, 이 ‘오래된’ 이야기에 깃든 따스함이나 너그러움을 요즈음에는 쉬 찾아볼 수 없다고 느낍니다.

 《달려라 하니》에 나오는 하니를 예쁘게 볼 수도 있을 테지만, 하니나 하니를 둘러싼 사람들은 예쁜 모습이나 예쁜 얼굴이라기보다 귀여운 모습이나 얼굴이라 할 만하고, 조금 더 찬찬히 살피면, 하나같이 동글동글한 모습이요 수수하거나 투박한 모습입니다. 만화 줄거리를 이루면서 하니하고 맞수가 되는 어린이나 어른 한두 사람은 좀 뾰족하거나 모가 났다고 느끼지만, 이들도 나중에는 동글동글하면서 투박한 매무새로 거듭납니다. 도드라질 대목이 없고, 눈부신 모습이 없으며, 남다른 빛깔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도드라질 대목이 없으면서 재미나고, 눈부신 모습이 없으면서 아름다우며, 남다른 빛깔이 없이 착합니다.

 오늘날 숱한 만화책이나 만화영화에서는 한결같이 ‘도드라져 보이려는 줄거리’에 ‘눈부시게 보이려는 모습’에 ‘남달리 보이려는 그림’이 가득합니다만, 썩 재미나거나 아름답거나 착하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겉보기로는 대단할는지 모르나, 만화책으로든 만화영화로든 두고두고 되읽거나 다시 보면서 즐길 만한 맛과 멋을 헤아리지 못하는 오늘날 만화책이요 만화영화라고 느끼요.

 나는 국민학교 4학년 때에 《달려라 하니》를 읽으면서 하루에도 서너 차례 되읽었습니다. 이듬날에도 서너 차례 또 되읽었습니다. 다음날에도 새삼스레 서너 차례 되읽었습니다. 동네에 한 주에 두 번 찾아오는 ‘책 빌려주는 차’에서 〈보물섬〉을 빌려서 사흘에 걸쳐 아홉 번이나 열 번은 가볍게 다시 보면서 가슴으로 빨아들였습니다.

 한 번 보고 다시 안 볼 만한 만화라면 처음부터 볼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공부나 숙제를 안 해도 되고 만화책만 보아도 된다면, 아마 하루 동안 열 차례이든 스무 차례이든 되읽을 테지요.


- “잔소리 말고 가서 두부나 두 모 사 와!” “칫! 매일 나만 시키고. 명화 누나는 왜 안 시켜요?” “누나는 대학생인데다 매일 아침마다 열심히 피아노 연습하지 않니?” “아빠는요?” “쿨! 드르렁!” (50쪽)
- “하니! 너 지금 뭐 하는 거니? 소꿉장난 하냐?” “김치요.” “에라! 이 녀석아! 이리 내놔! 김치란 이렇게 담근다는 걸 보여줄 테니까 … 음식 맛이란 손끝에서 우러나는 정성과 양념 양에 따르는 거란 말야. 마늘과 파, 중요한 거야. 난 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혼자 살며 자취하기 때문에 죄다 알아. 그래서 나는 어려서 혼자도 살아 보고 고생하며 크는 걸 찬성하는 사람이란다. 물론 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는 안 되지. 그런 나의 기준으로 본다면, 하니! 너를 보고는 안심했다. 넌 얼마든지 혼자 힘으로 꿋꿋하게 지낼 놈이야. 자! 간이 어떤지 맛 좀 봐라!” (76∼78쪽)



 하니는 중학교 1학년 나이에 홀로 옥탑방을 얻어 밥을 하고 김치를 담급니다. 그렇다고 살림을 잘 해내지는 못해 홍두깨 선생님이 하나하나 도와줍니다만, 열네 살 나이에 꿋꿋하고 씩씩하게 제 길을 걸어요. 열네 살이나 되었으면서 ‘엄마 품’만 그리워 할 수 있겠느냐 따질 수 있을 텐데, 가슴에 사무치는 고운 사랑이기 때문에 열네 살이 아닌 스물네 살이나 서른네 살에도 이처럼, 하니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직 철이 덜 들었으니 이렇겠지 하고 여길 수 있을 텐데, 철이 덜 들면 철이 덜 든대로 아름다이 살아가면 되고, 철이 더 들었으면 철이 더 든대로 참다이 살아가면 됩니다.

 어떤 틀에 박혀야 하지 않습니다. 어떤 틀에 맞추어야 하지 않습니다. 규율이 있고 규칙이 있다지만, 어떤 규율이나 규칙이든 사람들이 사람다이 살아가기 좋도록, 곧 사람이 사람다운 아름다움을 빛내도록 이끌거나 돕는 규율이나 규칙이어야 합니다. 어떠한 틀에 짜맞추려는 규율이나 규칙이라 한다면 독재 정치예요. 다 다른 사람이 다 같은 규율이나 규칙을 맞출 수 없습니다.

 다 다른 사람은 달리는 빠르기가 다르고, 밥 먹는 부피가 다르며, 몸으로 쓰는 기운이 달라요. 어린 하니는 빛처럼 빨리 달린다지만 창수는 어영부영 느립니다. 어린 하니는 응어리진 생채기로 괴롭지만, 창수는 집식구들 따스한 사랑을 받으면서 외로운 하니한테 따스한 사랑을 나눌 줄 압니다. 홍두깨 선생은 어릴 적부터 가난과 따돌림과 괴롭힘으로 시달렸지만, 이 모든 아픔을 남을 해코지하는 데에 쏟지 않아요. 이 모든 아픔을 내 이웃과 동무를 더 따사로이 보듬는 착한 넋으로 북돋웁니다. 나애리는 달리는 솜씨 하나를 타고났으나, 이 타고난 솜씨로 고운 빛줄기를 갈고닦는 데에 끌어올리지 못합니다. 타고난 솜씨를 끌어올리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찾지 않고 찾지 못하며 찾을 뜻이 없습니다.

 만화책 《달려라 하니》는 이토록 다른 사람들이 한 동네에서 얼크러지면서 툭탁툭탁 쌓아올리는 사랑을 들려줍니다. 어설퍼도 기쁜 사랑을 쌓아올리고, 모자라도 너그러운 사랑을 쌓아올리며, 슬프기에 눈물로 어루만지는 사랑을 쌓아올립니다.


- 놀림을 받아도 또 한 번 쳐다보게 되는 아이. 그렇게 좋은 감정. 사춘기가 오는 소리. (61쪽)
- ‘엄마는 그저 하니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으면 돼! 난 엄마에게 아무것도 안 바랄 거야. 언제나 따뜻하고 포근한 엄마 가슴의 기억만 있으면 돼.’ (130쪽)
- ‘그 집은 처음부터 내가 살던 집이야. 자기들 멋대로 팔아버렸지만 내 집이야. 그 집, 거기엔 엄마의 기억이, 그 집 거기엔, 엄마와의 소중한 추억이. 우리 엄마의 체취가 남아 있는 집을 빼앗은 계집애! 다음에도 까불면 가만 안 놔둘 거야. 조심해! 가만 안 놔둘 테니까!’ (157쪽)


 한창 가을로 접어든 날이기에 이제부터 낮이 짧아지고 어스름이 일찍 찾아듭니다. 슬슬 어스름이 찾아들 무렵 네 식구는 멧골자락 작은 집으로 돌아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할아버지가 자가용을 몰아 데려다주십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 첫째 아이가 곯아떨어집니다. 첫째 아이는 할아버지 차를 타기 앞서까지 지칠 줄 모르는 듯 ‘어쨌든 졸린 눈’으로 신나게 놀다가, 할머니 품에 안겨 한 오십 미터쯤 달릴 무렵 아주 깊이 잠듭니다. 온 기운을 쏟아 마음껏 놀았겠지요. 모든 힘을 터뜨려 신나게 뛰었겠지요.

 살아가는 힘은 사랑입니다. 살아내는 기운은 믿음입니다. 사랑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기에 오늘 하루를 더 살아냅니다.

 돈이 있기에 살아가지 않습니다. 든든한 일자리가 있대서 살아내지 않습니다. 자가용이 없으면 걷거나 버스나 택시를 타면 됩니다. 자전거도 있으며, 때로는 다른 사람 차를 얻어 타면 돼요. 집이 없으니 다른 사람 집에서 얻어 지내거나 방 하나 얻어 함께 살아갑니다. 나한테 돈이 없으면 누군가 나보다 돈이 더 있는 사람한테서 얻습니다. 나한테 땅이 없으면 누군가 땅이 있는 사람한테서 빌려서 흙을 일굽니다.

 나는 내가 더 가지거나 더 누린다고 여기는 무언가를 나눕니다. 글을 쓰는 나는 글을 나눌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나는 사진을 나눌 수 있습니다. 케익을 굽고 뜨개양말을 뜰 수 있는 옆지기는 집에서 구운 케익을 나누고 손수 여러 날 걸쳐 뜬 뜨개양말을 나눕니다.


- 악바리라 불리워 버린 소녀. 부릅뜬 두 눈과 굳게 다문 입. 키 작은 몸으로 무서운 스피드를 내는 소녀. 그러나 그 뒷모습은 언제나 쓸쓸한, 그 애 이름은 하니! (26∼27쪽)
- 아직은 엄마 품에서 응석을 부릴 나이, 부릅뜬 두 눈이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이 펑펑 쏟아져내릴 것 같은 아이. 악바리라 불리는 아이, 하니! (33쪽)



 어느새 저녁이 찾아들고 반달이 뜹니다. 어느덧 반달은 기울고 머잖아 새벽이 희뿌윰하게 밝겠지요. 온갖 풀벌레는 거침없이 웁니다. 풀벌레들은 저희 목숨을 오롯이 누리면서 새벽이고 아침이고 낮이고 저녁이고 밤이고 울음소리를 곱게 나누어 줍니다. 나는 이 풀벌레 울음소리를 받아먹으면서 가을날을 실컷 누립니다. 고운 결 노랫소리는 귀로도 스미고 살갗으로도 스미며 가슴으로도 스밉니다. 새근새근 자는 두 아이 몸으로도 스미고, 곁에서 갓난쟁이한테 젖을 물리는 옆지기한테도 스밉니다. 작은 살림집에 건사하는 책들한테도 스밀 풀벌레 노랫소리이고, 날마다 우리 식구들 고맙게 먹는 밥그릇에도 스밀 풀벌레 울음소리입니다.

 나는 이 가을날 풀벌레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우면서 고맙고 즐겁습니다. 나는 이 가을날 책상맡에 《달려라 하니》를 얌전히 꽂고는 백 번이고 즈믄 번이고 신나게 꺼내어 다시 들출 수 있어 반가우면서 고맙고 즐겁습니다. 네 살 아이도 《달려라 하니》를 혼자 스스럼없이 꺼내서 주루룩 넘겨서 보곤 합니다. 아이는 이선희 님이 부른 만화영화 주제노래를 아주 잘 부릅니다. (4344.9.7.물.ㅎㄲㅅㄱ)


― 달려라 하니 1 (이진주 글·그림,드림필드 펴냄,1996.10.27./판 끊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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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9-07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달려라 하니 다시 보고 싶어요.
저 어릴 때 동네 만화가게는 요즘의 만화방 같지 않고 (요즘 만화방이 어떤지는 사실 잘은 모르지만) 정말 초등학생 꼬마들만 가는 만화가게였어요. 다닥다닥 모여 앉아 만화 읽는 재미에 빠져 밖이 어두워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저를 찾아나선 할머니에게 잡혀 나왔지요 ㅋㅋ
꺼벙이도 하니도 모두 그리워져요.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인지도 모르지요.

파란놀 2011-09-07 19:48   좋아요 0 | URL
저 2001년에 다시 나온 판도 얼마 안 되어 품절이 되었어요. 새로 나와도 요즘 아이들은 재미있게 사 읽지 않으니까 추가 쇄를 안 찍는 듯해요. 어쩌면 만화책 운명은 이와 같은지 모르지요.

그래도, 인터넷에서 판도라티비에서 찾아보면 1989년에 했던 만화영화를 다시 볼 수 있답니다~
 
고향 - 꽃.바다.바위.소나무.숲.오름
황학주 글, 배병우 사진 / 생각의나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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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찍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51] 배병우·황학주, 《故鄕》(생각의나무,2007)


 사람이 사진기를 만들었고, 사람이 사진을 찍습니다. 사람은 곁에 있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기도 하지만, 멀거니 떨어진 자리에서 부산스레 오가는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기도 합니다.

 사람이 붓과 종이를 만들었고, 사람이 그림을 그립니다. 사람은 곁에 있는 살붙이를 그림으로 그리기도 하지만, 들판과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합니다.

 사람이 글을 씁니다. 종이에 글을 쓰든 셈틀 자판을 또닥거리든, 사람이 글을 씁니다. 사람이 쓰는 글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담기고, 사람을 둘러싼 너른 자연이 어우러지는 이야기가 담깁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만큼, 이 사람살이를 글로 옮깁니다.

 꽃·바다·바위·소나무·숲·오름, 이렇게 여섯 가지를 사진으로 담아 큼지막하게 빚은 사진책 《故鄕》(생각의나무,2007)을 읽습니다. 꽃과 바다와 바위와 소나무와 숲과 오름은 배병우 님이 사진으로 담고, 황학주 님이 글을 씁니다. 배병우 님은 배병우 님으로서 바라보거나 마주한 꽃·바다·바위·소나무·숲·오름을 보여줍니다. 황학주 님은 황학주 님으로서 느끼거나 맞아들인 꽃·바다·바위·소나무·숲·오름 이야기를 적바림합니다.

 사진을 보고 글을 봅니다. 사진은 사진대로 이야기를 담았을 테고, 글은 글대로 이야기를 실었을 테지요.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 꽃은 얼마나 꽃다울까요. 이 바다는 얼마나 바다다운가요. 이 바위는 얼마나 바위답다 할 만한지요. 이 소나무는 얼마나 소나무다운 목숨인지요. 이 숲은 어디에서 숲다운 모습일까요. 이 오름은 어떻게 오름다운 모습일는지요.

 더 톺아보면, 내가 내 살림자리 곁에서 늘 바라보는 꽃은 ‘내가 바라보는 꽃’입니다. 이 꽃들은 내가 바라보지 않더라도, 또 사람들이 ‘꽃’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더라도, 언제나 이곳에서 이 모습대로 살아냈습니다.

 사람들이 꽃을 사진으로 찍는다 할 때에는 얼마나 꽃다움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사진으로 찍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어느 한 사람을 사진으로 찍는다 할 때에는 얼마나 ‘어느 한 사람다움’을 알뜰살뜰 빛내면서 사진으로 찍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사진이란 ‘사진으로 담기는 넋 밑삶이나 밑모습을 드러내는 일’하고는 멀찍이 떨어진 채 ‘사진을 찍는 사람 마음을 보여주는 일’에만 가까운지 모릅니다.

 새벽이슬을 머금는 봉숭아랑, 아침햇살 스미는 봉숭아랑, 한낮 눈부신 햇살을 받는 봉숭아랑, 어스름이 깔리는 봉숭아랑, 달빛을 맞아들이는 봉숭아랑, 새까만 깊은 밤 봉숭아랑, 어느 모습이 봉숭아 꽃다운 모습이 될까요. 시골자락 밭뙈기 가장자리에서 자라는 봉숭아랑, 골목집 담벼락 틈바구니에서 자라는 봉숭아랑, 꽃그릇에서 얌전히 자라는 봉숭아랑, 들판이나 멧자락에서 스스로 자라는 봉숭아랑, 그늘진 데에서 조용히 꽃망울 피우는 봉숭아랑, 어느 꽃자락이 꽃답다 할 만한 이야기를 길어올릴까요.

 사진책 《故鄕》을 펼치면서 거듭 돌이킵니다(거듭 돌이키니, 이 사진책 이름은 ‘故鄕’이지 ‘고향’마저 아닙니다). 이 사진책에 나오는 꽃은 꽃다운 꽃이 될 수 없습니다. ‘고향을 생각하거나 떠올리는 사람 마음에 새겨진’ 모습을 되새기는 징검돌 같은 꽃이 될 뿐입니다. 바다도 바위도 소나무도 숲도 오름도 이와 매한가지입니다. 바다를 보여주는 바다 사진이 아닙니다. 바위를 보여주는 바위 사진이 아닙니다. 소나무나 숲이나 오름을 보여주는 소나무 사진이 아니요 숲 사진이 아니며 오름 사진이 아니에요. 언제나 ‘사진기를 쥔 사람 마음에 새겨진 이야기 틀거리에 따라 잘라서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이름난 사진쟁이가 당신 아이들을 사진으로 담을 때를 헤아립니다. 이름없을 뿐더러 사진쟁이조차 아닌 여느 어버이가 당신 아이들을 사진으로 옮길 때를 돌아봅니다. 어느 쪽이 ‘사진’일까요. 어느 쪽이 ‘아이’ 사진일까요. 어느 쪽이 아이 ‘삶’일까요.

 사진작가라는 이름을 얻은 분들은 왜 ‘작가’가 될까 궁금합니다. 온누리에 널리 알려졌기에 ‘소나무를 가장 잘 찍는 사람’이라는 이름표가 붙을 만한가 궁금합니다. 소나무를 가장 잘 찍는다 하지만, 이 소나무 사진들은 얼마나 소나무다움을 드러낼는지요. 소나무가 이 사진을 바라본다면 소나무로서 ‘그래 그래, 이 사진들은 바로 나, 소나무 삶이로구나.’ 하고 느낄 만한지요.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소나무 모습을 잘 찍는다’고 해야 알맞으리라 느낍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배병우 님 스스로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좋아해 주는 소나무 모습을 잘 찍는다고 말해야 올바르다고 느낍니다.

 소나무 꽃잎이나 뿌리나 줄기를 찍는 사람은 ‘소나무를 못 찍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위에 뿌리내려 자라는 소나무를 찍든, 민둥산에 한 그루 달랑 남은 소나무를 찍든, 몇 천만 원어치 값을 뽐내며 학교나 체육관이나 회사나 아파트 들머리에 심긴 소나무를 찍든, 어디에서나 ‘소나무를 찍는 사진’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소나무는, 어디에서 자랄 때에 ‘소나무다운 소나무’일까요. 사람 발길이 뜸한 데에서야 비로소 소나무일는지요. 아파트 앞에 심으면 소나무가 아닐는지요. 소나무는 경주에서만 소나무요, 서울 남산에서는 소나무가 아닐는지요.

 나는 생각합니다. 배병우 님이 스스로 우물을 파고 우물에 갇혔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배병우 님이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울타리 안쪽에 얽매인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배병우 님이 길어올리는 사진을 바라보거나 다루거나 비평하거나 이야기하는 사람들 스스로 우물을 파거나 울타리를 친다 할 만합니다. 배병우 님은 배병우 님이 바라보는 대로 꽃도 찍고 바다도 찍고 바위도 찍고 소나무도 찍고 숲도 찍고 오름도 찍고 할 뿐입니다. 구태여 ‘배병우 아닌 다른 사람 눈길’로 꽃이나 바다나 바위나 소나무나 숲이나 오름을 바라보며 사진으로 찍을 까닭이 없어요. 그런데, 퍽 슬프게도 배병우 님 사진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당신 눈길’이 아닌 ‘당신들이 좋아한다는 배병우 님 눈길’을 좇거나 시늉하거나 따르면서 어설픈 껍데기 사진에 사로잡힙니다. 곧, 배병우 님은 배병우 님 사진을 즐긴다 하지만, 배병우 님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들한테 ‘자,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즐기는 사진을 마음껏 누려 보셔요.’ 하고 이끌지 못하는 노릇입니다. 온통 따라쟁이만 낳습니다. 온통 흉내쟁이만 키웁니다.

 《고향》이라는 사진책은 모두 여섯 갈래로 나누어 고향이라는 삶자리를 돌아봅니다. 고향을 이 여섯 갈래로 나눌 만한지부터 아리송한데, 이 여섯 갈래로 나눈다 할 때에, 어느 한 갈래도 ‘도시하고 가깝지 않’습니다. 여섯 갈래 모두 도시하고 동떨어진 삶자락이요 이야기입니다.

 도시에는 꽃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도시에는 바위도 소나무도 숲도 오름도 없습니다. 아니, 도시는 꽃조차 들이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키우는 꽃은 돈이 되는 꽃입니다. 돈이 되지 않는 꽃은 모조리 잡풀로 여겨 뽑아냅니다. 그렇다면, 이 사진책에서 밝히는 ‘고향’에서 자랄 꽃은 어떤 꽃인가요. 참말 고향이라는 데에는 꽃이 있을까요.

 이제 사진책 《고향》을 덮습니다. 여러 달에 걸쳐 가만히 들여다보던 사진책 《고향》을 이제 덮습니다. 내 고향 인천에는 서울에서 흘러든 똥물과 쓰레기가 가득한 나머지, 앞바다에서 똥냄새와 쓰레기내음을 피웁니다. 내 고향 인천에는 서울로 올려보낼 공산품을 만드는 공장이 가득해서, 언제나 매연을 마시고 언제나 짐 가득 실은 짐차 배기가스까지 신나게 마십니다. 나한테 내 고향은 시커먼 빛깔에 가까운 잿빛입니다. 돌도 흙도 햇빛도 물도 바람도 풀도 홀가분하기 어려운 터전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꽉 막힌 데에서도 내 어버이와 내 이웃들은 텃밭을 일구고 꽃밭을 마련하며 웃음눈물을 나누더군요.

 사람은 사진을 찍습니다. 사람은 사진기를 만들어 사진을 찍습니다. 잘난 이야기를 길어올리려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돈을 벌자며 사진기 단추를 눌러대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사람이 찍는 사진은 사람이 살아가는 나날을 담습니다. 사람이 만든 사진기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는 그릇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나날은 ‘사람 얼굴’을 찍는대서 담기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길거리나 골목길’을 찍는대서 실리지 않습니다. 들꽃이나 골목꽃 한 송이를 찍더라도 얼마든지 고향 빛깔을 담습니다. 길바닥에 구르는 돌이나 바가지에 담긴 물을 찍더라도 얼마든지 고향 내음을 싣습니다. 들판을 찍거나 멧자락을 찍거나 바닷물을 찍거나, 누군가 이곳에 얌전히 섰기 때문에 들판 사진이나 멧자락 사진이나 바닷물 사진이 태어납니다. 사람들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이 지구별 기스락에서 보금자리를 틀었을까요. 사람이 찍는 사진에 사람내음은 얼마나 깃드는가요. 사람이 만들어 나누는 사진기란 사람들 사랑을 얼마나 옮길 만한 따스한 연장이 되는가요. (4344.9.6.불.ㅎㄲㅅㄱ)


― 故鄕, 꽃·바다·바위·소나무·숲·오름 (배병우 사진,황학주 글,생각의나무 펴냄,2007.3.2./5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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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내는 잣나무 아나스타시아 2
블라지미르 메그레 지음, 한병석 옮김 / 한글샘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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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으로 부르는 소리를 듣는가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43] 블라지미르 메그레, 《소리내는 잣나무》



- 책이름 : 소리내는 잣나무
- 글 : 블라지미르 메그레
- 옮긴이 : 한병석
- 펴낸곳 : 한글샘 (2007.10.20.)
- 책값 : 12000원


 (1) 소리 듣기


 나는 내 귀가 받아들이는 소리를 좋아합니다. 온누리 모든 소리가 하나같이 듣기 좋다고는 여기지 않으나, 내가 즐거이 살아갈 터전에서 고맙게 들을 수 있는 소리라면 모두 좋아합니다.

 멧자락 한켠에 깃든 시골집에 머물며 멧자락을 둘러싼 숲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한테는 자가용이 없기 때문에 ‘터지는 소리(폭발음)’를 우리 스스로 낼 까닭이 없고, 들을 까닭이 없으며, 퍼뜨릴 까닭이 없습니다. 참말 자동차 소리는 무시무시합니다. 시끄럽습니다. 자동차가 한 번 지나가기만 하더라도 멧골자락이 조용해집니다. 멧골자락 다른 소리들은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랑 자동차 부르릉거리며 달리는 소리에 주눅이 듭니다. 다른 어느 소리도 받아들이지 않아요.

 우리 집에는 보일러가 있습니다. 보일러 또한 ‘터지는 소리’를 냅니다. 그런데, 보일러 터지는 소리는 풀벌레나 멧새나 개구리가 우는 소리를 잠재우지 않습니다. 보일러가 돌건 말건 풀벌레나 멧새나 개구리나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살포시 둘레 목소리와 노랫소리하고 녹아들어요.


.. “사람이 우울한 상태에 있으면 병을 고치기 어렵고, 약도 도움이 안 돼. 그런데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면 병은 금세 사라져 … 육신의 병이 나타나는 이유는 사람이 스스로 자연과 멀어진 때문이기도 하고 또 스스로 품는 어두운 감정 때문이기도 해. 그뿐 아니라 질병이란 훨씬 더 큰 고통에 대한 경고이거나 그것을 막는 것이기도 하지 … 하느님은 당신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거야. 통증으로 말씀하시지. 이 고통은 당신의 고통이지만, 그의 것이기도 해. 하지만 당신은 진통제를 먹어 가며 계속 자기 방식대로 살지. 통증이 무엇 때문인지 생각조차 하지 않아 … 다른 모든 진리도 사람들은 다 알아. 행하지 않을 뿐이야.” ..  (32, 38, 69, 70쪽)


 사람들 발자국 소리나 이야기 소리 또한 풀벌레가 울던 소리를 잠재웁니다. 사람들이 떠들거나 복닥거리는 소리가 나면 풀벌레이든 멧새이든 개구리이든 소리를 뚝 그칩니다. 사람들 스스로 얼마나 느낄는지 모릅니다만, 자연하고 하나로 얼크러지려는 사람이 아니라 한다면 풀벌레이든 멧새이든 개구리이든 그저 가만히 기다립니다. 이놈들이 얼른 이곳에서 사라져 주기만을 기다립니다.

 나는 사람들 발자국 소리나 이야기 소리를 딱히 싫어하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사람들 말소리가 구수하거나 따사롭거나 살갑지 않습니다. 둘레에 어떤 목숨붙이가 어떤 보금자리에서 어떤 삶을 잇는가를 헤아리지 않는 사람들 목소리는 ‘같은 사람’으로서 듣기에도 영 못마땅합니다.

 멧골집에서 볼일을 보러 큰도시로 나간다든지, 먹을거리를 좀 장만하려고 읍내 장마당에 나간다든지 하면, 금세 소리가 바뀝니다. 마을길로 접어들면 풀벌레나 멧새 소리는 잦아듭니다. 두찻길밖에 안 되는 한길이라지만, 읍내로 이어지는 시골길에 접어들면 ‘오가는 자동차가 아주 적어’도 풀벌레나 멧새나 개구리가 마음껏 노래하지 않습니다. 그예 쥐죽은 듯한 소리라고 할까요.

 읍내에 닿으면, 시골자락이라 하더라도 여느 자연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다른 큰 도시처럼 귀를 쩌렁쩌렁 울리면서 따갑게 퍼지는 소리까지는 아니나, 보드라우면서 맑은 소리가 이곳 읍내를 감돌지 않습니다. 자동차가 오가고, 가겟집에서 소리가 흘러나오며, 뜻없는 사람들 뜻없는 말소리가 울려퍼집니다.


.. “당신은 받은 게 그리 많음에도 왜 행동하지 않아? … 진리를 아는 것은 그것을 큰 소리로 말하는 데 있지 않아. 그건 생활양식에 있는 거야.” … “영혼이 어느 정도 무감각해지고 어떤 심연의 어둠에 빠져야 주위에 일어나는 일을 의식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을까?” … “내가 한 말 모두를 당신이 계속 의심한다면 내가 무슨 증거를 대도 당신은 그걸 알 수 없거나 의심할 거야.” ..  (165, 170, 194, 262쪽)


 골목동네에서 살던 때를 떠올립니다. 고향집 인천에서든, 옆에 붙은 서울에서든, 이러한 데에서 지낼 때에는 자연이 나누는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너무 고요했습니다. 깊은 밤 아무런 자동차가 오가지 않을 때조차 풀벌레라도 울어 주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습니다. 달빛이나 별빛이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도시입니다. 달빛조차 볼 수 없고 별빛조차 느낄 수 없으니, 달빛소리나 별빛소리를 어떻게 듣겠어요. 가끔 비둘기 소리를 듣는다거나 참새 소리를 듣지만, 이나마 들을 수 있으면 참 고마운 노릇입니다. 거의 하루 내내 자동차 시끄러운 소리에다가 가겟집 소리에다가 뜻없는 말소리만 가득합니다.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며 나눌 사랑어린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귀에 대고 “사랑해.” 하고 속삭인대서 사랑어린 소리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어린 소리란 나비 날갯짓 소리입니다. 사랑어린 소리란 바람이 풀잎을 흔드는 소리입니다. 사랑어린 소리란 개구리가 논물에서 헤엄치는 소리입니다. 사랑어린 소리란 도토리가 톡 떨어지며 또르르 구르는 소리입니다.

 귀가 있대서 모든 사람이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귀가 있지만 소리를 듣는다기보다 소리에 무디어지곤 합니다. 눈이 있대서 모든 사람이 모습을 보지 않습니다. 눈이 있으나 모습을 보기보다 모습에 무뚝뚝해지곤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풀내음을 옳게 맡지 못합니다. 요즈음 사람들을 흙내음에 싱그러운 기운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즈막 사람들은 물내음에 온몸을 정갈히 다스리지 못합니다.

 뜬소리이든 막소리이든 두 귀로 얼마든지 주워담을 수 있습니다. 삶소리이든 자연소리이든 두 귀로 마음껏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무엇을 꿈꾸고 어디를 바라보며 어떤 사랑을 일구려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소리 하나로 이루려는 꿈이 무엇인가에 따라 사람들마다 걷는 길이 바뀌겠지요. 아파서 눈물짓는 지구별 울음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으나, 아프기에 한숨짓는 이웃사람 울음소리에 귀를 막거나 한귀로 소리를 흘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리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소리는 누구나 듣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소리이지만, 느끼지 못할 만큼 몹시 바쁜 도시자락이요, 이제는 시골자락이래서 느긋하거나 넉넉한 소리결이 되지 못합니다. 누구나 듣는 소리이건만, 들을 때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할 만큼 아주 힘든 도시자락이면서, 언제부터인가 시골자락마저 포근하거나 따사로운 소리마디가 되지 못합니다.


..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요.” “마음으로 감사하다 할 수 있지.” “소리도 없이요? 누가 그걸 듣는다고?” “마음으로 듣는 사람은 듣는 법이지.” … “사랑이 들어 올릴 수 있는 자만이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다네 … 자네와 대화하면서 그 애는 생각을 늦추지 않고 오히려 더 빨리 했다네.” … “교만은 부자연스러운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그게 산 영혼을 가리는 거야. 바로 이 때문에 과거의 철학자들과 오늘의 천재들이 별반 짓는 게 없는 거야. 첫발을 내디뎠을 뿐인데 자만에 싸여 처음에 받은 걸 다 잃어버리는 거야.” ..  (219, 220, 227쪽)


 눈으로 보는 사람은 눈으로 봅니다만,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않기 일쑤입니다. 마음으로 듣는 사람은 마음으로 듣습니다만, 내 마음에 들리면서도 믿지 않기 일쑤예요. 소리들이 슬프게 눈물을 흘리면서 시나브로 죽습니다.


 (2) 이야기 듣기


 아나스타시아 두 번째 이야기 《소리내는 잣나무》(한글샘,2007)를 읽습니다. 아나스타시아 이야기를 글로 써서 책으로 내는 블라지미르라는 사람은 이 책에서 더할 나위 없이 ‘바보스러운 사람인 듯’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블라지미르라는 사람이 하는 짓은 참말 하나같이 바보스럽거든요. 참을 코앞에서 마주할 뿐 아니라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거짓을 눈앞에서 맞이할 뿐 아니라 온몸으로 치르면서도 옳게 깨닫지 못합니다. 참에 눈멀고 거짓에 속아넘곤 합니다. 참을 뒤로 젖히고 거짓에 손을 담그곤 합니다.

 그러나, 블라지미르라는 사람이 바보짓을 일삼는대서 블라지미르라는 사람이 바보이지는 않습니다. 블라지미르라는 사람이 껍데기를 벗기까지는 이런 일을 겪어야 하니까 바보스레 부대낄밖에 없습니다. 바보스레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깨지거나 넘어지면서 비로소, 좀 늦게 알아챕니다.

 잘 살피면, 블라지미르는 ‘좀 늦게 알아채며 뉘우친다’ 하더라도 옳게 받아들이면서 깨닫습니다. 블라지미르처럼 ‘바보스럽지 않다’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속아넘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속아넘어가지 않을 뿐, 참다이 살아가거나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곤 합니다.

 나는 어느 쪽이 더 낫거나 덜 떨어지는지 모릅니다. 어느 쪽을 더 낫다고 여겨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마음그릇에 걸맞게 다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 다 다른 삶을 다 달리 아름다이 일구는 뜻을 찾기 마련입니다. 러시아에서는 러시아대로 아름다운 삶길을 찾고, 한국에서는 한국대로 아름다운 삶길을 찾으며, 칠레에서는 칠레대로 아름다운 삶길을 찾으면 돼요.


.. “블라지미르, 내가 살 곳은 여기야. 여기에 있어야만 난 나의 소명을 다 할 수 있어. 부모가 지은 사랑의 공간보다 더 큰 힘을 주는 것은 세상에 없어 … 앵두나무는 죽지 않았던 거야. 앵두나무의 생각과 열의, 그리고 감정이 너무나도 순수했고, 그래서 죽지 않은 거야. 누구도 무엇도 순수한 사랑을 없앨 수 없어.” … “더 이상 사람들을 가르칠 필요가 없어요. 아담과 이브의 사과로 유혹은 그만해야 해요. 이제 사람들이 느껴 볼 수 있게 해 주어야 해요. 과거에 사람이 느낀 대로, 사람의 능력이 어땠는지 사람이 누구인지 한 번 느낄 수 있게 해 주어야 해요.” … “새벽의 장관은 감상해야 하는 것이지, 왜 그런지 따지고 캐기 시작하면 황홀한 감동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아무런 결과도 없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논리일 뿐이야.” ..  (33, 53, 221, 222쪽)


 한국땅 곳곳에 고인돌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아이들은 학교를 다닐 때에 고인돌 이야기를 배웁니다. 그러나, 고인돌이 왜 고인돌이요 이 고인돌에 어떠한 빛이 깃들었는가를 가르치지 않으며 배우지 않습니다. 그저 크기를 재고 연대를 따지며 무슨무슨 부족이니 씨족이니 겨레이니 하는 ‘역사’ 지식조각을 그러모을 뿐입니다.

 돌이켜보면, 고인돌 하나만 이러하지 않습니다. 역사책에 담기는 이야기는 온통 지식조각입니다. 조각조각 찢긴 지식입니다. 살아가는 슬기나 살아가는 아름다움이나 살아가는 빛줄기를 담은 역사책은 없습니다. 다른 교과서라 해서 이와 같은 틀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오로지 지식조각으로 이루어지는 교과서이고, 이 지식조각 교과서를 머리에 쑤셔넣겠다는 학교입니다.

 옛사람은 왜 고인돌을 빚었는지 헤아리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책이고 교과서요 역사이면서 학교입니다. 옛사람이든 ‘오늘사람’이든 ‘앞사람’이든,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면서 보살피는 참길을 착하게 일구는 나날을 즐기는 이야기가 무엇인가를 돌아보도록 이끌지 않는 책이고 교과서요 역사이면서 학교예요.

 어머니는 아기한테 젖을 물립니다. 아기가 커서 젖을 떼면 어머니(이든 아버지이든) 자리에 서는 사람들은 아이한테 밥을 차려 줍니다. 어머니는 아기한테 왜 젖을 물릴까요. 어버이 되는 사람들은 왜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 줄까요.

 밥은 왜 먹어야 하나요. 밥을 먹으며 목숨을 잇는 우리들은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 사람인가요. 어떤 목숨을 내 몸으로 받아들이는가요. 어떤 삶을 내 손으로 일구는가요. 어떤 사람을 사귀려 하는가요. 어느 곳에서 내 보금자리를 곱게 돌보려 하는지요.


.. “손이 사랑으로 땅을 만진 것이지. 기계가 아닌 바로 사람의 손으로 자기 토지의 흙을 다정하게 만져 주었지. 땅은 느꼈어.” … “책은 표지를 잘 만들려면 화가가 있어야 하는데, 마음을 담아내야 하오. 의미와 목적에 맞아야 하오.” … “콘크리트 벽에 싸여 태어나는 자기 아이한테 여자가 줄 게 뭐가 있을까? 그녀는 아이한테 어떤 세상을 준비해 놓았을까? 아이가 태어나 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생각이라도 해 봤을까? … 엄마가 창조하고 선사한 이 사랑의 공간에서라면 그 존재는 어떤 것도 무서울 것이 없는 거야 … 모유를 먹는 갓난아기에게 모유와 함께 지난 세월의 깨달음과 지혜를, 심지어는 태초의 것까지 전달할 수가 있는 것이지.” ..  (80, 141, 199, 200, 201쪽)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는 흙일꾼들이 ‘풀베는 기계(예초기)’를 써서 풀을 깎는 모습을 보면 몹시 슬프면서 아픕니다. 풀은 끔찍하게 목덜미가 잘리면서도 풀내음을 남깁니다. 죽음과 두려움이 서리는 풀내음인데, 풀은 참말 풀이라서 죽음과 두려움이 서리는 풀내음이라 하더라도 사람 코에는 푸른 빛깔입니다. 참 대단하지요. 풀은 이렇게 끔찍하게 죽으면서도 푸른 빛깔을 남겨요. 사람은 숨을 거둘 때에 이 흙에 무엇을 남길 만한가요.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이 누리에 어떤 빛깔을 아로새기는가요.

 풀베는 기계에 목덜미가 잘리는 풀은 ‘기계에 잘려 둘레로 흩뿌려질’ 때에 마치 총알처럼 휭휭 날아가 박힙니다. 풀은 스스로 총알이 되고 싶지 않았을 테지만, 기름을 먹는 기계 칼날에 목덜미가 잘리면서 마치 총알처럼 되고 맙니다. 기계로 풀을 베는 자리 둘레로 지나가던 사람이 이 풀조각 총알을 맞으면 살이 찢기거나 아주 따갑습니다. 기계로 풀을 베는 사람은 한여름에도 두툼한 바지에 두툼한 긴소매 옷을 입으며, 얼굴은 수건이나 가리개를 뒤집어씁니다. 옆에서 누가 소리를 치며 불러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기계소리가 워낙 크고, 기계에 잘리는 풀이 내는 소리가 대단히 크거든요.

 풀약을 먹고 말라죽고 만 길가를 지날 때면 언제나 죽음이 번진 냄새를 맡습니다. 기계에 목덜미가 잘린 풀밭을 지날 때에도 노상 죽음이 퍼진 냄새를 맡습니다. 낫으로 풀을 베거나 호미로 풀을 캔 자리를 지날 때에는 죽음내음을 맡지 않습니다. ‘손으로 만진 땅’과 ‘기계로 만진 땅’은 땅거죽부터 느낌이 사뭇 달라요.


.. “잣나무도 같아. 느끼고 이해하는 사람만이 많은 걸 들을 수 있는 거야 … 하지만 그 안락이란 오류고 허상이야. 사람은 세상의 로봇이 되고 말아. 삶의 본질을 사색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줄 시간이 항상 부족해. 자기 삶에 대해서도 숙고할 시간이 없어. 사람은 프로그램된 로봇과 같은 거야. 지금 당신은 직접 눈과 귀로 보고 듣지만 믿지는 못하고 있어 … 사랑하려면 먼저 이웃을 알아야 해. 모르는 사람을 사랑할 순 없지 … 지구의 한편에서 기후변화가 일어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라는 신호라고 받아들였지. 그곳이 쉴 수 있게 … 자연과 달리 이런 매커니즘, 기계들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해. 자신을 재생산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고장이 나면 나무와 달리 스스로 복원되지도 않아. 때문에 이 기계장치를 서비스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고, 사실상 많은 사람들을 바이오로봇으로 만들어 버렸어. 바이오로봇은 진리를 스스로 깨닫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조종이 아주 쉬워.” ..  (247, 250, 254, 256쪽)


 아나스타시아 이야기 둘째 권을 읽으면서 곰곰이 되짚습니다. 아버지라는 자리에서 살아가는 몸으로 돌아보자면, 나는 우리 두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야 할 만한 사랑스러운 보금자리를 옳게 건사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어떤 보금자리에서 새 목숨을 즐거이 누리도록 해야 하는가를 참다이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이들이 태어나서 살아갈 집’을 참다이 살피지 않는대서, 내가 참다이 살피지 않은 일을 둘러댈 수 없습니다. 다른 여느 사람들을 슬프게 바라보기 앞서, 나는 나부터 내 삶을 슬프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슬픈 내 삶을 옳게 깨달아, 기쁜 내 삶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3) 사랑 듣기


 사람을 살찌우는 밥은 가공식품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찌우는 밥은 사랑어린 밥입니다. 사랑어린 손길로 사랑어린 ‘목숨 깃든 먹을거리’를 손질해서 마련한 밥일 때에 비로소 사람을 살찌울 수 있습니다.

 ‘어머니 손맛’이나 ‘맛집 멋집’이 사람을 살찌우지 않습니다. 사랑어린 손길로 지은 밥일 때에 목숨을 새로 짓습니다. 어머니가 차려 주든 아버지가 차려 주든, 또 할머니가 차려 주든 할아버지가 차려 주든, 사람을 살찌우는 밥이라 할 때에는 반드시 사랑이 어려야 합니다. 미움이든 시샘이든 꿍꿍이셈이든 깃들어서는 안 됩니다. 돈벌이 꾀하려는 마음이든 이름값 높이려는 마음이 깃들어서는 안 됩니다. 내 밥솜씨를 자랑하려는 밥차림이란 사람을 살찌우지 못합니다. 멋들어진 밥집으로 모셔서 밥 한 끼니 올린다 해서 사람을 살찌우지 못해요.


..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애소설이나 추리소설을 주로 읽어. 왜 그렇지?” “그건, 그런 책은 읽으면서 생각할 필요가 거의 없기 때문이야. 성경은 깊이 생각하며 읽어야 하고, 여러 문제에 대해 스스로 답해야 해.” ..  (65쪽)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하고, ‘우리가 품어야 할 생각’에는 꼭 사랑이 감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할 사람이어서는 산 목숨이 아닌 죽은 목숨입니다. ‘사랑이 감도는 따사롭고 너그러운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비로소 산 목숨이요 산 사람입니다.

 깊이 생각한대서 깊다 할 만한 생각을 얻지 않습니다. 사랑스레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스레 널리 헤아려야 합니다. 사랑스레 따사로이 껴안아야 합니다. 사랑스레 글줄을 적바림해야 합니다. 사랑스레 붓질을 하고, 사랑스레 사진기 단추를 눌러야 합니다.

 사랑스레 부를 노래요, 사랑스레 출 춤입니다. 사랑스레 껴안을 옆지기요, 사랑으로 품에 안는 아이들입니다.

 도시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자동차를 타거나 전철을 탑니다. 이러한 탈거리를 몰아야 한다면, 힘들겠지만 사랑을 실어 운전대를 잡아야 합니다. 이러한 탈거리에 몸을 실었으면 내 사랑을 고이 펼치면서 찻삯을 치러야 합니다. 셈틀 자판을 또닥거리며 일하는 회사원이라 하더라도 셈틀 단추를 켜서 불을 넣을 때에 내 따순 사랑을 실어야 합니다. 따순 사랑이 없다면, 텃밭을 일구면서도 살진 푸성귀를 얻지 못합니다. 따순 사랑이 없을 때에는, 제아무리 멋들어진다는 사랑노래를 부른다는 이름난 노래꾼이라 하더라도 가슴으로 벅차오르는 기쁨을 들려주지 못합니다.


.. “택일이라고요? 아이는 아무 때나 나오잖아요.” “아무렇게나 잉태하니까 아무 때나 나오지. 엄마는 언제고 아기의 탄생을 당기거나 늦출 수 있어.” … “그녀한테 왜 내가 필요하죠? 실험용? 무슨 목적이죠?” “그 애는 그냥 사랑한 거야, 블라지미르. 언제나 그렇듯 진정으로. 자네가 사는 세상에서 여자에게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을 택하지 않아서 그 애는 행복하다네. 우월한 지위에 자신을 놓지 않은 것일세. 자기가 다른 모든 여자와 같은 것이 기쁘다네.” ..  (187, 191쪽)


 아나스타시아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이 ‘아나스타시아가 이 이야기책에 담은 사랑’을 느끼면서 ‘사랑을 느낀 내가 내 둘레 살붙이부터 내 이웃과 동무 모두한테 예쁘게 사랑을 나누는 길’을 잘 살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을 나누려 할 때에는 참말 사랑을 나눕니다. 사랑을 나누려 하지 않았으면 언제까지나 사랑을 나눌 수 없습니다. (4344.9.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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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짝짓기 잠자리


 잠자리는 어떤 소리를 내면서 울까. 잠자리가 내는 소리는 사람 귀로 들을 수 있을까. 날마다 몇 차례씩 마당에 빨래를 널고 걷으면서 만나는 잠자리를 볼 때마다 잠자리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내 귀로는 도무지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한다. 아니, 내가 마음을 조금 더 활짝 열지 못했기에 못 듣는달 수 있다. 손가락으로 살며시 건드려도 빨랫줄에서 날아가지 않는 잠자리이다. 눈알을 또륵또륵 굴리면서 나한테 잠자리말을 살며시 건네지만, 나는 좀처럼 못 알아들으리라.

 더없이 좋은 가을 포근한 볕살이라 이불을 말리려고 들고 나온다. 빨랫줄에 척 하니 걸려 하는데 짝짓기 잠자리가 이 빨랫줄을 붙잡았다. 부디 날아가지 말아 주렴 하고 빌며 아주 천천히 이불을 건다. 짝짓기 잠자리는 흔들리는 빨랫줄을 단단히 붙잡는다. 이불을 다 널었다. 이제 집게를 꽂아야지 하고 생각하는데, 아이가 언제 뒤따라 나왔는지 빨랫줄에 널린 이불을 밑에서 쑥 잡아당긴다. 빨랫줄이 철렁 한다. 짝짓기 잠자리는 화들짝 놀라 그만 멀리 날아간다.

 이 녀석. 네 키높이에서는 짝짓기 잠자리가 안 보여서 그랬니? 빨랫줄에 넌 이불이나 옷가지는 놀잇감이 아니라구. 함부로 쑥 잡아당기면 안 돼. 이렇게 하다가 젖은 빨래가 톡 풀려서 흙바닥에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러니. 요 녀석. 혀를 쭉 빼물고 내뺀다. (4344.9.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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