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 - 발도르프 선생님이 들려주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2
이양호 지음 / 글숲산책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엉뚱한 번역과 바보스런 문화가 빚은 ‘신데렐라’
 [책읽기 삶읽기 80] 이양호,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글숲산책,2009)



 사진책 《다카페 일기》(북스코프)를 보면, 사진을 찍은 사람과 이이 옆지기와 이이하고 함께 사는 개 이름은 ‘일본말’로 적지만, 이이 두 아이 이름은 ‘한국말’로 옮겨서 적습니다. 참으로 뚱딴지 같다 할 노릇이지만, 2010년대에도 이러한 일이 벌어집니다. 《다카페 일기》를 쓴 일본사람은 당신 아이한테 일본말로 ‘바다’와 ‘하늘’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는데, 이를 한국말로 옮겨서 적으면 어찌 되나요. 거꾸로, 한국사람 이름인 ‘최바다’와 ‘최하늘’을 일본책에서 일본말로 옮겨서 적으면 얼마나 엉뚱하게 되고 말까요.

 북중미 토박이 이름을 일컬을 때에 ‘레드 크라우드’처럼 적는 일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때에는 북중미 토박이들이 쓰는 ‘북중미 토박이 이름’을 써야 합니다. 이 소리값이 남지 않았다면, 영어를 쓰는 미국사람이 붙인 ‘레드 크라우드’가 아닌 한국말로 옮긴 ‘붉은 구름’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두루 잘 아는 ‘삐삐’라는 말괄량이가 있습니다. 어린이책과 영화에 나온 ‘삐삐’는 요즈음 번역에서는 ‘삐삐 롱스타킹’이라는 이름으로 적습니다. 그러나, 이 이름 또한 올바르지 않습니다. 삐삐는 미국사람이나 영국사람이 아닌 스웨덴사람이니까요. 삐삐 이름은 ‘스웨덴말’로 적어야지 ‘영어’로 적어서는 안 됩니다. 스웨덴말로 어떻게 적는지를 잘 모른다면, 영어 ‘롱스타킹’이 아닌 한국말 ‘긴양말’로 적어야 마땅합니다. 삐삐는 ‘삐삐 긴양말’입니다.

 이양호 님이 쓴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글숲산책,2009)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신데렐라’는 영어를 쓰는 나라 사람들이 새로 지어서 붙인 이름입니다. 정작 독일에서 ‘옛날 작은 이야기’를 갈무리하며 내놓은 책에는 ‘신데렐라’라는 이름이 없다고 합니다. 한국말로 옮긴다면 ‘재투성이’나 ‘부엌데기’가 될 독일 이름만 있다고 합니다. 곧, 한국에서 이야기하는 ‘신데렐라’란 엉터리로 옮겨서 터무니없이 퍼진 잘못된 이름이요 책인 셈입니다.


.. 우리 발음 체계에서 나오는 ‘신데렐라’란 소리는 아름답고 가볍다. 여기에 쌍드리옹과 아센푸틀의 뜻인 재투성이, 부엌데기가 가지고 있는 슬픔과 무거움이 자리할 곳은 없다. ‘신데렐라’라고 소리를 내는 순간, 슬픔에 젖어 축 가라앉아 있는 인간은 사라져 버린다 ..  (11∼12쪽)


 가만히 생각하면, 이 나라에서는 ‘신데렐라’라는 이름을 비롯해서 ‘신데렐라 얼굴’까지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땡볕에서 밭일을 하고 집안일을 도맡을 뿐 아니라 노예처럼 시달리고 들볶이던 찬밥덩어리 일꾼이 ‘재투성이’입니다. 그러면, 이 아이 재투성이는 어떤 낯빛일까요. 팔뚝과 손마디와 허벅지는 어떤 모습일까요. 하루 내내 고단하게 온갖 일을 떠안아야 하던 괴로운 아이는 살빛이 어떠할까요.

 다시금 돌이키면, 나 또한 어릴 적부터 ‘참다운 신데렐라 모습’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예나 이제나 ‘신데렐라라는 이름은 거짓’이요 ‘재투성이라는 이름이 참’인 줄을 깨달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이 이야기 속살이나 알맹이를 옳게 들려준 어른은 없었어요.


.. “발뒤꿈치를 조금 잘라내 버려라. 왕비가 되면 걸어다닐 일이 없을 테니까.” ..  (72쪽/재투성이 번역)


 나이를 제법 먹어 곧 마흔 줄에 접어듭니다. 두 아이는 무럭무럭 자랍니다. 이즈음 비로소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야기 번역보다 이야기 비평(또는 풀이)으로 이루어진 책이라 할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를 만나지 않았다면, 퍽 예전부터 잘못 퍼지고 엉뚱하게 알려진 이야기 한 자락에 그대로 휘둘렸으리라 봅니다.

 하기는, 이 나라에 잘못 알려지거나 엉뚱하게 퍼진 이야기는 한둘이 아닙니다. 신데렐라만 이와 같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옛이야기가 오늘날 한국에서 ‘뚱딴지 살’이 붙고 ‘바보스러운 손질’로 얼룩졌을는지요. 나라밖 문학을 제대로 옮기는 분이 몇이나 될는지 아리송합니다.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를 내놓은 이양호 님도 ‘재투성이’ 번역은 영 어설픕니다. 학문으로 파헤치거나 전문지식을 다루는 데에서는 훌륭하다 여길 수 있습니다만, 문학을 문학다이 맞이하면서 살가이 나누는 자리에서는 좀 젬병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번역하는 분들 발자취를 살피거나, 번역하는 분들을 소개하는 책날개 글을 읽어 보면, 무슨무슨 대학교를 나왔다거나 나라밖 어디로 배우러 다녀왔다는 이야기는 적힙니다. 그렇지만 막상 ‘한국말을 어디에서 누구한테서 배웠’으며 한국말을 얼마나 잘 할 줄 안다든지,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쓰려고 어느 만큼 힘쓰는가 하는 이야기는 한 줄이나 한 마디로도 적히지 않습니다.

 굳이 안 적어도 될는지 모르지요. 한국사람이니 한국말을 못 하겠느냐 여길는지 모르지요.

 그러면, 한국사람 가운데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깨달아 옳고 바르게 쓰는 사람은 참말 있기나 있나 알쏭달쏭합니다. 대학교 국문과 교수는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쓰나요.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는 한국말을 참답고 알맞게 쓰나요.


.. 거죽도 그 대상의 한 부분이기에, 거죽을 핥은 사람이 느낀 맛을 깡그리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제대로 맛본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이 이야기의 겉만 만진 데는 여러 까닭이 있겠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깔끔하지 못한 번역과 옛이야기를 어린애만을 위한 것으로 여기는 데에 그 탓이 있는 듯하다 … ‘재투성이’ 이야기를 두고 일반 사람들은 동화라 하고 학자들은 민담이라고 한다. 이러한 문학 장르를 최초로 갈무리한 독일에선 메르헨이라 하는데, 그 뜻은 ‘작은 이야기’일 뿐이다. 거기엔 동화에 있는 아이 동童도 없고, 민담에 있는 백성 민民도 없다 ..  (13, 16쪽)


 어린이문학 평론을 하는 분들은 ‘메르헨’이라는 낱말을 붙잡고 늘어집니다. 그저 ‘작은 이야기’일 뿐인 ‘메르헨’이라지만, 아예 ‘메르헨 장르’까지 만들곤 합니다. ‘판타지’라는 낱말을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하고 비슷한 셈인데요, 이양호 님 말마따나 거죽핥기로 그치는 노릇입니다. 알맹이를 건드리지 않고, 속살을 다루지 않으며, 껍데기에 매달리는 모양새입니다.

 곰곰이 따지면, 재투성이 이야기가 신데렐라 이야기로 바뀐 까닭 가운데 하나는, 예부터 ‘한국 어린이 번역 문학’은 으레 ‘일본 다이제스트 판을 살짝 베낀 문학’에서 싹텄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한국땅 어른들은 한국땅 아이들이 한겨레 넋을 아끼며 살아가는 길을 좀처럼 열지 못한 탓이라고 느낍니다. 한국땅 어른들 스스로 한국땅 아이들이 한겨레 얼을 빛내며 자라는 길을 도무지 열지 않은 탓이라고 느껴요.

 삐삐 이야기를 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은 스웨덴사람이지만, 린드그렌 님 스웨덴문학을 스웨덴말을 익혀서 한국말로 옮기는 번역쟁이는 아주 드물거나 아예 없습니다. 으레 독일말로 옮겨진 책을 한국말로 옮깁니다. 네덜란드문학을 네덜란드말을 배워서 한국말로 옮기는 문화가 있을까요. 으레 독일말이나 영어로 옮겨진 네덜란드문학을 한국말로 옮기기만 합니다. 《안네의 일기》가 수없이 많은 판으로 떠돌지만, 시중에 나온 《안네의 일기》 가운데 네덜란드말로 된 책에서 한국말로 옮긴 판은 아예 없습니다.

 끝으로 덧말을 하나 붙이면,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라는 책은 편집을 하며 빈자리를 너무 많이 만들고 판을 아래로 길쭉하게 만드는 바람에 책값이 좀 뻥튀기가 되었습니다. 재투성이 독일말과 영어 자리는 글자를 작게 해도 되고, 한글 밑에 작게 붙여도 됩니다. 쪽수와 부피와 크기를 훨씬 줄여 값싼 책으로 엮을 수 있던 책입니다. (4344.9.20.불.ㅎㄲㅅㄱ)


―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 (이양호 글,글숲산책 옮김,2009.10.31./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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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09-23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몰라서 그러는 건데 영어명 신데렐라(Cinderella)는 원래 재투성이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썽드리용(Cendrillon)를 영어식으로 발음한것이 아닌가 싶군요.
그리고 그림형제는 재투성이를 의미하는 썽드리용(Cendrillon)를 신데렐라처럼 비슷한 발음으로 부르지 않고 재투성이란 의미의 독일어인 아쉔푸텔로 제목을 바꾸지 않았나 싶네요.
제가 위 책을 읽지 못해서 뭐 정확하게 그 내용을 파악하지는 못하겠지만 '우리 발음 체계에서 나오는 ‘신데렐라’란 소리는 아름답고 가볍다. 여기에 쌍드리옹과 아센푸틀의 뜻인 재투성이, 부엌데기가 가지고 있는 슬픔과 무거움이 자리할 곳은 없다. ‘신데렐라’라고 소리를 내는 순간, 슬픔에 젖어 축 가라앉아 있는 인간은 사라져 버린다'란 글은 작가의 오버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마 작가는 신데렐라는 영어이름보다는 디즈니가 각색한 신데렐라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신데렐라가 밝고 아름답다고 착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물론 디즈니에서 나오는 신데렐라는 원작의 썽드리용보다는 분명 더 밝고 명랑하지만요....

파란놀 2011-09-24 08:58   좋아요 0 | URL
글쓴이가 '좀 지나치게' 생각한 말이라 여길 수 있으나,
디즈니 만화가 꽤 옛날에 나왔을 뿐 아니라,
'신데렐라'라는 '명작동화'를 온누리에 퍼뜨린 곳은
바로 디즈니제국이 있는 미국이었고,
이 신데렐라를 일본을 거친 미국 문화로 받아들였으니,
한국사람들은 '신데렐라라 부르는 소리값과 여러 느낌'을
고스란히 떠안으면서 참뜻하고는 동떨어질 수밖에 없으리라 느껴요.
 


 누나 구경


 뒤집기를 못하지만 고개를 마구마구 이리저리 돌리면서 새롭게 보이는 모든 모습을 느끼려 하는 둘째가 누나를 바라보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가 둘째와 누나 사이에 책을 조금 쌓았다. 일부러 쌓지는 않았고, 살림짐을 갈무리하면서 책을 치우려고 한쪽으로 옮기는데, 그만 동생이 누나를 바라보던 눈길을 턱 하고 가로막았다. 동생은 난데없이 가로막힌 울타리 때문에 답답했겠지. (4344.9.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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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똥벼락, 이불빨래


 갓난쟁이가 이불에 똥을 질러서 빨래한 지 이틀 만에 쉬를 크게 했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빨지 못하고 말려서 쓴다. 이러고 하루 만에 다시금 똥을 눈다. 한창 뒤집기를 하려고 바둥거리던 갓난쟁이는 똥을 질펀하게 누고 나서 뒤집는다고 용을 쓰다가 그만 기저귀가 풀려 똥이 이불과 평상에 줄줄 흐르고 만다.

 이른아침부터 부산을 떨며 이불을 빨고 평상을 닦아 마당에 내놓아 말린다. 이윽고 갓난쟁이는 두 번째 똥을 푸짐하게 눈다. 참 푸짐하게 눈다. 배를 살살 쓰다듬으면서 ‘응가’ 하는 말을 되풀이한다. 갓난쟁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아랫배에 힘이 들어갈 때에는 똥을 더 눈다는 뜻이요, 핏기가 천천히 가시면서 까르르 웃을 때에는 시원하게 다 누었다는 뜻이다.

 다시금 갓난쟁이를 안고서 엉덩이를 씻긴다. 방바닥에 살며시 눕히고 새 기저귀를 댄다. 푸짐한 똥을 떠안은 기저귀를 따순물로 빨래한다. 앞서 나온 오줌기저귀를 함께 빨래한다.

 아기는 아침부터 똥벼락이다. 아마, 어제 음성 할머니 댁에 마실을 다녀오며 바깥에서 오래 보내고 택시를 여러 차례 타느라 많이 힘들었기에, 이렇게 하루를 지낸 아침에 똥벼락을 치는지 모른다. 똥벼락을 선물한 갓난쟁이는 조금 놀다가 어머니 젖을 물고는 새근새근 잠든다. 이러고 나서 첫째 아이가 잠에서 깬다. ‘추워’ 하고 말하면서 바지를 안 입겠다는 아이를 이리 달래고 저리 나무라면서 바지를 아이 앞에 내려놓는다. 아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바지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는다. 치마만 입고 싶다고 칭얼거리지만, 저 스스로 춥다고 느끼기에 어머니 웃옷을 커다란 겉옷처럼 껴입었으니 바지를 안 입을 수 없겠지. 이제 첫째 아이랑 부대끼다 보면 어느새 식구들 아침 먹을 때가 되리라. 또다시 눈코를 뜰 수 없이 빙글빙글 도는 새 하루를 맞이한다. (4344.9.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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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지개 책읽기


 서른다섯 살까지는 기지개를 거의 켜지 않았다. 서른 살까지는 기지개를 아예 켜지 않았다. 스물다섯 살까지는 잠잘 때를 빼놓고는 등을 바닥에 대며 쉰 적이 없다.

 새벽에 두 차례 오줌기저귀를 빨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몰아치듯 열 몇 장을 빨 수 있지만, 요즈음 날씨를 보건대, 이렇게 하다가는 언제 다 마를는 지 알 길이 없다. 더욱이, 한꺼번에 많이 빨면 나부터 참 힘들다. 조금씩 자주 빨며 한숨을 돌려야 한다. 똥오줌기저귀를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쏟아내던 첫째 아이를 어떻게 돌보면서 빨래를 다 해냈나 싶을 만큼, 지난 몇 해 일이 아득하다. 둘째 아이는 첫째 아이 때를 생각하면 빨래가 거의 안 나오는 셈이다. 이불이나 방바닥에 똥을 질러대는 일부터 드물다. 그렇지만 모르지. 돌을 맞이하는 날부터 낮에는 기저귀를 풀고 똥오줌 가리기를 시킬 텐데, 이때에는 첫째 때와 똑같이 온 집안이 똥나라 오줌누리가 될 테지. 온 집안을 똥나라 오줌누리로 만들며 두 달쯤 지내야 비로소 낮에 똥가리기 오줌가리기를 해내겠지. 이즈음에는 기저귀 빨래는 좀 줄 테지만, 쉴새없이 걸레를 빨고 이불을 빨며 뭐를 닦고 해야 하니 그야말로 넋이 나가도록 바쁘리라.

 서른일곱 아저씨는 새벽 다섯 시 삼십오 분에 방바닥에 드러누워 기지개를 켠다. 기지개를 켜고서 좀처럼 다시 일어나 앉지 못한다. 날이 갈수록 등허리가 방바닥하고 사귀는 겨를이 늘어난다. 누워서 책을 읽으면 버릇이 없다고도 하고, 책을 애써 쓴 사람들한테 못할 짓이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어쩌나. 등허리가 버티지 못하는데. 등허리를 반듯하게 편 채 책을 읽으면 참 좋겠지만, 이렇게 책읽기를 할 틈이 없는걸. 등허리를 반듯하게 펼 때에는 집일을 건사해야 하거나, 아이하고 놀아야 한다. 힘겨운 몸을 쉴 때에 살그머니 눈을 떠서 책줄을 조금 훑는다. 이나마 하지 않는다면 하루에 글 한 줄 못 읽고 지나치기 쉽다. 방바닥에 등허리를 찰싹 붙이고는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두 아이를 가슴에 갈마들어 올리고는 등을 토닥인다. (4344.9.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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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새 4
데즈카 오사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2년 2월
평점 :
절판



 개죽음·참죽음·막죽음·늙어죽음
 [만화책 즐겨읽기 68] 데즈카 오사무, 《불새 4》



 둘째 오줌기저귀 빨래로 하루를 열고 하루를 닫습니다. 비가 흩뿌리는 날이라든지 어제처럼 갑작스레 날이 서늘해지면서 집안에 물기가 사라지는 날에는 틈틈이 자주 빨래를 해야 합니다. 가만히 살피면, 갓난쟁이는 오줌을 신나게 눌 때에는 십 분에 한 장씩 기저귀를 내놓습니다. 금세 갈고 금세 또 갈며 다시금 금세 갑니다. 옆지기는 어제 갑자기 날이 쌀쌀해지니 아기가 이를 느껴 오줌을 자주 누는가 보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겠지,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나, 고개만 끄덕일 수 없습니다. 기저귀 빨래가 쌓이지 않게 자주 빨아야 합니다. 보송보송 마른 기저귀가 넉넉히 있도록 일해야 합니다. 기저귀를 자주 빨아 집안에 너는데, 바깥에는 빗줄기가 오락가락하는데, 뜻밖에도 빨래는 ‘아기가 오줌기저귀를 금세 내놓듯’ 금세 마른다고 느낍니다.

 그러고 보면, 아기는 오줌기저귀를 자주 내놓고, 아버지는 콧물이 자꾸 고여 코를 자주 풀어야 합니다. 이런 날은 몸을 잘 간수해야겠다고 느낍니다. 찬바람을 잘못 쐬거나 찬물을 잘못 만지면 퍽 여러 날 몸이 다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저것 가리거나 따지지 못합니다. 몸이 아픈 옆지기가 집일을 조금도 건사하지 못하는 터라, 여기에 마음 조금 쓰고 저기에 몸 조금 쓰면서 바쁘게 몰아칩니다. 이것저것 한다고 애쓰지만 정작 어느 하나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합니다. 날마다 열 시간을 집일에 들인들, 아니 열두 시간이나 열네 시간을 집일에 들인들, 깔끔하게 매조지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하기는, 내 어머니를 비롯해서 옆지기 어머님이나 이 나라 모든 어머님들은 당신들 흘린 땀방울과 눈물방울 보람을 제대로 누린 적이 없습니다. 이 나라 어머니들 사랑과 믿음을 뭇사람들 누구나 고이 건사하면서 섬긴 적이란 한 번도 없다고 느낍니다.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를 다닌 지난날, ‘어머니 사랑이 어떠한가’ 하는 이야기를 학교에서 한 차례라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국민학생 때에는 효도편지 쓰기를 숙제처럼 했습니다. 그저 숙제일 뿐입니다. 어머니 몫과 어머니 자리와 어머니 삶을 아름다이 여긴다거나 돌본다거나 껴안는다거나 하도록 이끌지 않아요.

 여자아이한테 ‘너는 앞으로 어머니가 된단다’ 하고 깨우치는 교사나 둘레 어른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남자아이한테 ‘너는 앞으로 아버지가 된단다’ 하고 일깨우는 교사나 둘레 어른 또한 만나지 못했습니다. 여자아이한테든 남자아이한테든 ‘너희는 앞으로 어버이가 된단다’ 하고 가르치는 교사나 둘레 어른을 알지 못해요.


- “듣자 하니 야마토의 왕은 멋대로 거짓 역사를 만들어 자신이 신의 자손이라 발표하려 한다는데, 그런 짓은 용서할 수 없다. 나는 쿠마소의 왕으로서 올바른 역사, 올바른 일본의 모습을 글로 써 남기려 한다.” (25쪽)
- “야마토에서도 뭔가 열심히 쓰고 있는 것 같던데. 왕에게만 유리한 만들어진 역사 말이야.” “맞습니다.” “하지만 이건 거짓 역사가 아니야. 이 쿠마소, 아니, 이 왜국이, 어떻게 생겨서 어떻게 사람들이 지금까지 살아왔는지를 바르게 적었지. 특히, 야마토 정부를 만든 자네 선조들이, 얼마나 작고 약한 나라를 괴롭히고 침략하고 착취했는지를 모두 조사해 적은 거야! 난 이걸 자손에게 남겨 올바른 역사를 알리고 싶다.” (66쪽)



 제도권학교 열두 해는 기능인을 낳습니다. 그렇다고 이 기능인이 재주나 솜씨가 돋보이도록 이끌거나 돕지 못해요. 제도권학교를 꾸짖는 대안학교라 해서 기능인 낳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대안학교라 해서 아이들한테 ‘어머니 길’이나 ‘아버지 길’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아울러 ‘어버이 길’을 물려주지 못합니다.

 제도권학교나 대안학교나 지식 교육 테두리에서 맴돕니다. 그렇다고 너른 지식이나 깊은 지식에 가 닿지 못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열린 삶을 일구게끔 돕지 못해요. 아름다운 삶이나 아름다운 사랑이나 아름다운 사람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착한 삶이나 착한 사랑이나 착한 사람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참다운 삶이나 참다운 사랑이나 참다운 사람을 밝히지 못합니다.

 나는 제도권학교 열두 해를 보내고, 대학교를 그만두기까지 다섯 학기를 보내며, 어른이 되어 대안학교에서 세 해 남짓 아이들과 어울리는 동안, 이들 배움터 가운데 어느 곳에서도 ‘삶’을 느끼거나 배우거나 깨닫거나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어디에서나 ‘지식’만 조각조각 난 채 있을 뿐이었어요. 어설픈 기능인과 어줍잖은 지식인 테두리에서만 맴돌 뿐이었어요.

 이웃나라 일본에서 독도를 자꾸 일본땅으로 삼으려고 우긴다 하지만, 이 나라 한국에서 독도를 한국땅으로 느끼도록 하는 참배움이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아니, 독도라는 섬을 한국땅다이 돌보거나 아끼거나 사랑한 적조차 없어요. ‘독도 영유권 정치 문제’로만 떠들썩합니다. 독도라 하는 작은 섬 삶이나 자연이나 발자취를 찬찬히 헤아리면서 나누는 교사나 학생은 없습니다. 독도뿐 아니라 ‘학생들이 나고 자란 고향마을’이나 ‘교사가 나고 자란 고향동네’ 이야기를 교과서에 담은 적이란 없고 이야기하는 적도 없으며 함께 나누는 적 또한 없습니다.


- “난 저 (불새) 생피를 꼭 마시게 하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그게 누구죠? 폐하인가요? 아니면 연인?” “아버지한테는 절대로 안 줘! 아버지는 권위를 세우기 위해 무덤이 완성되면 2천 명의 사람을 생매장할 속셈이다.” “히익, 그게 정말이에요?” “아버지가 직접 말했어. 그 산 제물은 무작위로 뽑힐 거다. 아무 죄도 없이 산 채로 묻히는 거야. 만일 죽지 않는 몸이 된다면, 스스로 땅을 파고 나올 수 있겠지.” (48쪽)
- “바보 같으니! 왜 불새를 잡아 피를 마시지 않았죠? 그러면 늙지도 않고.” “젊은이, 인간은 죽지 않는 게 행복이 아니야.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는 게 중요한 거지.” (85쪽)


 나한테는 책이 많습니다. 서른일곱 해를 살아오면서 내 돈을 치러 장만하고 읽어 그러모은 책이 몇 만 권 됩니다. 읽은 다음 내놓았다든지 읽었으나 장만하지 않은 책까지 치면 내 손을 거친 책은 꽤 많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 책들을 내 아이들한테 물려줄 마음이 없습니다. 내 아이들이 저희 아버지 책을 읽도록 이끌 마음 또한 없습니다. 책이란, 스스로 마음이 우러나오면서 집어들어 펼쳐 가슴으로 곰삭인 다음 몸으로 살아내야 책입니다. 어버이 되는 사람이 잔뜩 쌓아놓고 ‘이 좋은 책’을 읽으라고 들이민대서 책이 되지 않아요. 더구나, 나는 이 책들을 지난 스물 몇 해에 걸쳐서 읽었습니다. 아이들보고 이 책들을 읽어내느라 아버지하고 똑같은 나날을 쓰라고 등떠밀 수 없어요.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저희 삶을 일구면서 저희 책을 읽어야 해요. 아이들은 아이들 깜냥껏 저희 삶을 사랑하면서 저희 사람을 사귀어야 해요.

 나와 옆지기는 우리 아이들을 학교에 넣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학교에 넣고 안 넣고는 대수롭지 않아요. 나와 옆지기는 우리 아이들이 여느 제도권학교나 대안학교라는 데에서 자질구레한 지식조각에 파묻혀 푸른 나날을 흘려보내도록 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책을 읽고 사랑책을 느끼며 삶책을 맞아들이도록 도우면서 보듬고 싶어요. 내 어머니인 친할머니를 사귀고, 옆지기 어머니인 외할머니를 만나도록 도우면서 보듬고 싶습니다. 때로는 종이에 담은 슬기를 보여주기도 할 테지만, 종이에 담기지 않은 수많은 땀과 주름과 굳은살이 무엇인가를 살갗으로 부비면서 녹일 수 있도록 온식구 복닥이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생각할 일이에요.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언제부터 초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했나요. 언제부터 대학교 졸업장이 없으면 ‘사회살이를 못한다’고 하나요. 아이들이 꼭 영어를 해야 하나요. 러시아말을 익히거나 일본말을 배우면 안 되나요. 아니, 스웨덴말이나 에스파냐말을 익히면 안 될는지요. 나라밖 말은 따로 안 배우면서 전라도말이나 경상도말이나 제주도말을 익히면 안 될는지요. 아이들은 아이들 스스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뿌리내리게끔 어버이는 곁에서 조용히 어깨동무하는 길동무와 같이 지내야 한다고 느낍니다.


- “넌 지금 고귀한 순장을 모독하고 있어!” “형, 난 죽는 걸 반대하는 게 아니야. 개죽음을 막고 싶을 뿐이야.” “개죽음? 개죽음이라고? 위대한 제왕의 죽음을 슬퍼해 몇 십 명의 인간이 그 뒤를 따른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냐! 영화로 만들면 틀림없이 히트칠 거야. 그걸 가지고 개죽음이라니.” “그래, 개죽음이야.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죽어야 하는 거야?” (163쪽)


 데즈카 오사무 님 《불새》(학산문화사,2002) 넷째 권을 읽습니다. 《불새》 넷째 권을 읽으니, 참말 ‘죽음’이 무엇인가를 자꾸 되뇔밖에 없습니다. 죽음을 죽음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슬픈 넋을 자꾸 헤아릴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사람들은 개죽음입니다. 싸움터에서 총이나 미사일이나 탱크 따위에 목숨을 빼앗겨도 개죽음이지만, 대한민국 군대에서 지뢰를 밟고 죽는다든지 고참이나 간부한테 얻어맞아 죽어도 개죽음이에요.

 어른들은 늙어서 죽어야 합니다. 참말 늙어서 죽어야 해요. 늙어서 몸이 더는 움직이지 못할 때에 곡식을 끊고 조용히 숨을 거두어야 해요. 목숨이 다하는 마지막 날까지 온힘을 다해 온사랑을 나누면서 살아내야 비로소 어른이에요.

 어른들은 보험 걱정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라에서는 보험을 부추기거나 북돋아서는 안 됩니다. 돈을 쌓아 돈을 받는 보험도 올바르지 않고, 나라에서 세운 공단에서 보험을 맡아 주는 일도 올바르지 않아요. 사람들 누구나 늙으면 죽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들 누구나 다치면 아프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들 누구나 내 목숨과 이웃 목숨을 아끼도록 해야 합니다.

 나는 늘 느껴요. 나는 개죽음이 싫어요. 개죽음이 싫어 둘째 아이가 군대에 끌려가지 않기를 바라요. 아니, 이 나라에 군대가 사라지기를 바라요. 이웃나라에도 군대가 없어져야 한다고 꿈꾸어요.

 나는 즐겁게 죽고 싶어요. 즐겁게 죽기 앞서 즐겁게 살고 싶어요. 막 죽고 싶지 않아요. 나는 늙어서 죽고 싶어요. 자동차에 받혀 죽는다든지, 아파트더미에 깔려 죽는다든지, 돈더미에서 허우적거리거나 돈가뭄에서 굶주리며 죽고 싶지 않아요. 푸른 수풀과 나무가 우거진 숲속에서 조용하게 흙으로 돌아가서 개미밥과 지렁이밥과 흙밥이 되고 싶어요.


- “컴퓨터는 인간을 보좌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두뇌를 대신할 수는 없어.” (196쪽)
- “왜냐고?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우주 비행사로 자랐기 때문에 부모니 형제니 애정이니 인정 따위는 필요없었던 거야. 나는 18살 때까지 센터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았어. 나갔다간 잡균을 묻혀 돌아올, 요컨대 우주의 어느 별에 잡균을 퍼뜨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지.” (279쪽)


 고운 꿈을 사랑하는 삶이라면, 살아가는 동안 즐겁고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을 때에도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기운이 샘솟거나 넘쳐서 온몸 쑤시도록 일한 이튿날에도 멀쩡히 일어나서 씩씩하게 살아내는 젊은 날은 젊어서 좋습니다. 이와 함께, 기운이 다시 샘솟기 힘들어 몸을 꽤 쓰고 난 이튿날에는 골골대거나 앓아눕는 ‘저무는 날’은 늙는 날대로 좋아요.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받아 들뜬 부푼 가슴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 사랑을 물려주면서 시나브로 식는 몸에서 숨결이 빠져나가는 서운함도 눈물과 함께 받아들이며 죽어야 합니다. 나는 웃음과 눈물이 함께 있는 사람이에요. 나는 삶과 죽음이 똑같이 고마운 사람이에요. (4344.9.20.불.ㅎㄲㅅㄱ)


― 불새 4 (데즈카 오사무 글·그림,최윤정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02.2.25./4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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