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에 걸려 비틀비틀


 책짐을 나르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하다. 등에 진 책을 놓쳐 진흙 바닥에 떨굴 수 없다. 비틀비틀 아슬아슬 바로선다. 내 몸뚱이가 흙더미에서 뒹굴더라도 책이 흙더미에서 뒹굴도록 할 수 없다. 내 몸은 씻으면 그만이요 내 옷은 빨면 된다. 더러워진 책은 돌이키지 못한다. 찢어지거나 다친 책은 되살리지 못한다.

 착한 옆지기와 아이들 넋 또한 한 번 찢어지거나 다친다면 되살리기 힘들 테지. 어쩌면, 착한 넋이기에 다치며 아플 때에도 차근차근 아물도록 애쓰면서 더욱 씩씩해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 살붙이들이 따사롭고 너그럽다 하더라도, 내가 굳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만한 삶에 휘둘릴 까닭이 없다. 나는 돌멩이 하나는 돌멩이대로 아끼면서, 보드라운 흙길을 보드라운 흙내음대로 아끼는 삶을 사랑하고 싶다. (4344.1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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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11-09 02:08   좋아요 0 | URL
큰 일을 하신 날이군요. 이런 날이라도 좀 편한 잠 푹 주무셔야 할텐데요. 마지막 짐차가 삼천 권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양의 책을 이사시키셨는지 ...

파란놀 2011-11-09 09:21   좋아요 0 | URL
제가 나른 책은 5000권쯤 되고요, 다른 일꾼들은 4000권쯤 날랐어요. 얼추 다 해서 3만 권 남짓 날랐답니다 ^^;;;;

오늘... 아침 아홉 시 넘어서 잠에서 깼네요 @.@
 



 빗방울 머금는 책


 오늘 드디어 우리 책을 모두 날라서 차곡차곡 쌓았다. 바닥에서 차오르는 물기 때문에 온통 곰팡이투성이가 되고 만 책꽂이에다가, 책장으로 차츰차츰 곰팡이 기운과 냄새가 배어드는 일을 도무지 지켜볼 수 없었는데, 곰팡이무덤에서 허덕이던 책들을 열넉 달 만에 곰팡이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자리에 몽땅 옮겼다.

 충청북도 음성에서 상자 씌운 짐차에 실린 책들은 기나긴 시간 달린 끝에 전라남도 고흥군 깊은 시골자락에 닿았고, 모두 다섯 시간에 걸쳐 다섯 사람이 바지런히 등짐으로 지고 나르며 책을 쌓았다.

 마지막 짐차 삼천 권쯤 더 날라야 할 즈음부터 빗방울이 조금씩 들었다. 이제 조금 더 하면 되는데 하늘이 기다려 주지 못하는구나 싶어 아쉬우면서, 이제껏 하늘이 오래도록 기다려 주었구나 싶어 고마웠다. 두 마음으로 책짐을 마저 나르면서 숫자를 센다. 앞으로 몇 차례 등짐을 더 지면 일을 마칠까? 온몸에 기운이 다 빠지고 다리가 풀려 해롱거리면서도 열다섯이라는 숫자를 센다. 그래, 마지막 삼천 권을 나르느라 열다섯 차례 등짐을 졌으면, 오늘 나는 백쉰 차례 남짓 등짐을 지었구나.

 일을 거의 마칠 무렵, 후들거리는 다리를 버티고 견디면서 등줄기와 목덜미와 뺨과 팔뚝과 어깨에 내리는 빗방울을 느끼다가는 이 빗방울이 책마다 어느 만큼 스며들는지 헤아린다. 이 가느다란 빗방울은 책들을 다치게 할까. 이 가느다란 빗방울은 먼지구덩이에서 풀려나기를 기다리던 책들한테 따사로운 손길이 될까.

 나는 내 살붙이들 모두한테 따사로운 손길을 내밀고 싶다. 나는 내 이웃과 동무 누구한테나 따스히 말길을 트고 싶다. 그런데, 이삿짐 나르는 일꾼한테 치를 일삯을 놓고 옆지기한테 그만 목소리를 높이고 만다. 이 사람들이 틀림없이 계약을 맺을 때에 ‘아주 싼 값’으로 해 주었지만, 나는 이 사람들이 너무 싼 값에 계약을 맺었다고 여겼다. 그래, 옳게 약속했건 잘못 약속했건 약속한 사람이 잘못이야. 그렇지만, 약속한 사람이 어리석게 약속한 줄을 뻔히 알기 때문에, 나는 잘못된 값을 치를 수는 없어. 내 어리석은 몸짓을 노상 가다듬어 주는 옆지기이지만, 내 옆지기가 잘못 아는 대로 잘못된 길을 걸어갈 때에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길을 내밀어 바른 길을 보여줄밖에 없어. 짐 나르는 일꾼들이 거짓말 아니라 참말 두 손 들 만큼 혀를 쑥 빼물며 죽으려 하는 모습을 느끼면서 이 사람들을 나무랄 수 없지. 이 사람들도 몸으로 느낄 테니까, 우리가 이 사람들을 안쓰러우면서 따스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해.

 믿는다. 믿으면서 산다. 책짐 함께 나른 일꾼들이 모두 착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나한테 걱정어린 이야기를 들려주는 옆지기가 착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너무 고단하고 지친 나머지, 옆지기한테 차근차근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한 내가 못난 사람이구나 싶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삿짐 일꾼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놓아야지. (4344.1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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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9 1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놀 2011-11-09 19:02   좋아요 0 | URL
네, 오늘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못했고요 ^^;;;
내일부터 소포를 꾸려 택배종이 붙인 다음
우체국 일꾼 부르려고요~

즐거이 기다려 주셔요~~~~~
 


 시를 쓴다


 시를 쓴다. 좋은 사람이 앞으로 좋은 꿈을 이루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마음 가득 바라면서 시를 쓴다. 좋은 사람 삶꿈을 헤아리며 쓴 시는 작은 종이에 천천히 적바림해서 선물로 준다.

 시를 쓴다. 나한테 선물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로 쓴다.

 또 시를 쓴다. 옆지기와 아이들한테 선물하고픈 이야기를 시로 쓴다.

 이 나라 모든 아이들이 함께 읽어 주기를 바라면서 시를 쓰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나라 어느 아이들을 만나더라도 찬찬히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를 시로 담자고 생각한다. 맨 먼저 내가 함께 살아가는 두 아이를 바라보면서, 이 두 아이들이 앞으로 마주할 온누리 아이들을 떠올린다. 모두들 사랑스러운 꿈과 결과 눈빛과 손길로 어깨동무할 좋은 누리가 어떤 모습일까 하고 곱씹으면서 시를 쓴다.

 시를 하나 써낼 때면 기운이 많이 빠진다. 내 기운을 써서 담는 글줄이니까. 내 사랑을 들여 엮는 글월이니까.

 시를 쓰고 난 다음 자리에 드러누워 생각에 잠기다 보면, 어느새 새 기운이 돋고 새 사랑이 자란다. 해마다 맛난 열매를 베푸는 나무들처럼, 시쓰기란 해마다 맛난 마음밥을 나누는 일이로구나 싶다.

 푸성귀와 나무는 한 해에 한 차례 제 몸을 바친 선물을 몸밥으로 내준다면, 사람은 시를 쓰면서 언제라도 제 마음을 온통 쏟은 선물을 마음밥으로 나누는구나 싶다. 시를 쓰기로 다짐하면서 참 좋다. 내가 시골에서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하나는 호미질일 테고, 바로 이 시쓰기이다. (4344.1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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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림꾼, 가정주부, 밥어미, 가정부


 내가 어릴 적부터 가장 티없으면서 가슴깊이 바라던 꿈은 무엇이었을까 곰곰이 돌아본다. 무엇보다 나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다운 어른,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내 첫째 꿈이었다.

 내 둘째 꿈은 “집에서 집일하고 집살림을 맡으며 살아가는 아버지”였다. 1980년대 첫무렵, 아직 어디에서나 가부장 틀거리에 따라 모두 흘러가던 때, 나는 내 어머니처럼 집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 다음 일은 헤아릴 수 없었다. ‘어떻게 먹고살지?’라든지, ‘남자가 집에서 살림을 하면 돈은 누가 벌지?’ 같은 물음에 아무 대꾸를 하지 못했다. 아니, ‘남자는 집에서 살림을 하고, 여자가 밖에서 돈을 벌어도 되지.’ 하고 생각했다. 시골살이까지는 톺아보지 못했으나, 집에서 일과 살림을 맡자면 무엇을 알고 할 줄 알아야 하느냐를 곱씹으면서 내 어머니가 일하고 살림하는 매무새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내 셋째 꿈은 나 스스로 수수하고 투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나 스스로 꾸밈없이 글로 담는 일이었다. 잘난 사람들만 글을 쓴다든지, 거의 남자들만 글을 쓰는 일이 하나도 반갑지 않았고 달갑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문학을 배우는데, 노상 ‘남자들이 쓴 글’만 있었다. ‘집에서 일 하나 안 하는 남자’들이, ‘집에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남자’들이 쓰는 글만 가득했다. 때때로 ‘여자가 쓴 글’이 담긴 문학책에는 ‘살림하고 일하는 여느 여자’가 아니라 사대부나 양반과 같은 권력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여느 할머니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여느 어머니 눈물을 살필 수 없었다. 나는 “어른이 되”고 “살림꾼이 되”면서 “이 삶이야기를 고스란히 글로 남기는 아버지”로 있고 싶었다.

 서른일곱 나이가 되어 내 지난 꿈을 찬찬히 짚는다. 그래. 나는 내가 맑은 마음으로 밝은 생각을 북돋울 때에 이렇게 꿈을 꾸었기에, 이러한 꿈이 아주 알맞춤하다 싶은 빠르기로 하나씩 이루어지는구나. 더 늦지도 않고 더 이르지도 않는 빠르기로, 언제나 즐겁고, 한결같이 예쁘게 이루어지는구나. 어리석은 겉치레에 휘둘리며 바보처럼 바라던 일들, 이를테면 전쟁무기를 꼬물꼬물 그림으로 그린다든지 100층이 넘는 건물을 짓는다든지 하는 일은 나한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면 이 슬프며 끔찍한 꿈들이 다른 사람한테서 이루어지는지 모른다. 내가 꾸는 사랑스러운 꿈은 나한테 일어나고, 내가 꾸는 슬프며 끔찍한 꿈은 다른 사람들한테 안쓰러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내가 꾸는 좋은 꿈으로 내 삶을 사랑하고, 나와 내 둘레 모든 고운 사람이 저마다 제 꿈길을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살림꾼으로 살아가련다. 가정주부도 가정부도, 또 밥어미도 아닌 살림꾼으로 살아가련다. (4344.1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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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하는 어린이


 지난 토요일에 충주로 와서 여러 날 보낸다. 집에는 날마다 한두 차례 전화를 건다. 집으로 전화를 걸면 세 차례 가운데 두 차례 아이가 받는다. 전화 울리는 소리가 한 번이나 두 번 될 즈음 잽싸게 받는다. 전화를 받은 첫째 아이는 쉬지 않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아는 말 모르는 말 끝없이 늘어놓는다. 그동안 짐 꾸리느니 짐 푸느니 벽종이 바르느니 밥하느니 청소하느니, 아이 눈빛 마주보면서 아이가 사랑스러이 말을 배우고 삶을 느끼도록 하지 못했다고 아주 깊이 깨닫는다. 집에 전화를 걸어 네 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오직 이 아이만 생각한다. 오직 네 살 아이 목소리만을 듣고 네 살 아이가 어떤 몸짓으로 전화기를 붙잡고 수다꽃을 피우는가를 헤아린다. 네 살 아이는 제 어머니랑 아버지가 여느 때에 쓰는 말로 제 삶과 꿈을 나타내는 어린이말을 삼는다. (4344.1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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