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는 글쓰기

 


 봄에 새로 돋는 잎사귀는 아주 반딱반딱합니다. 얼마나 반드르르한지 빗물 한 방울 톡 떨어지면 또르르 굴러 땅으로 떨어질 만합니다. 아주 조그마한 물방울 하나 새 잎사귀에 남지 않을 만합니다.

 

 아이들 볼을 만지면 내 손이 부끄럽습니다. 거칠고 투박하며 못생긴 내 손이 이 곱고 보드라운 아이들 볼을 만지다니, 하며 내 나이와 삶을 헤아립니다. 아이들은 사랑어린 말 한 마디에 사랑을 느끼며 자라고, 아이들은 미움박힌 말 한 마디에 미움을 느끼며 웁니다.

 

 겨울을 견디는 잎사귀를 가리켜 ‘늘푸른잎’이라 할 텐데, 늘푸른잎도 푸른 빛깔이지만, 새봄에 돋는 잎사귀처럼 싱그러이 옅은 풀빛이 아닙니다. 추위와 눈과 바람을 견딘 거칠고 투박한 풀빛이에요.

 

 요즈음 도시 아이들한테 읽히려고 나오는 자연 그림책을 장만해서 읽습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자연 그림책을 굳이 들추지 않아도 되지만, 자연 그림책을 읽을 도시 아이들이 자연을 얼마나 잘 사귈 수 있도록 만드는가 궁금해서 꾸준히 장만합니다.

 

 요즈음 자연 그림책은 그야말로 번쩍번쩍 무지개 같습니다. 빛깔이 초롱초롱합니다. 그림 그리는 솜씨가 빼어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나오는 자연 그림책을 우리 아이들한테 읽히고 싶다는 생각은 좀처럼 안 듭니다. 나라밖 자연 그림책도 그리 다르지는 않아요. 나 혼자 넘기다가는 조용히 덮고 아이한테 안 보여주기 일쑤입니다. 이웃한 일본에서 나오는 몇 가지 자연 그림책은 아주 훌륭해서 늘 곁에 두기는 하지만, 일본 자연 그림책이라 하더라도 어딘가 어설프거나 서글픈 모습이 있기는 비슷비슷합니다.

 

 봄잎은 여름잎이랑 다릅니다. 여름잎은 가을잎이랑 다릅니다. 가을잎은 겨울잎이랑 다릅니다. 이 다 다른 잎빛과 잎결과 잎무늬는 눈으로 바라본대서 그림으로 옮기지 못합니다. 이 다 다른 잎빛이랑 잎결이랑 잎무늬는 눈으로 쳐다본대서 사진으로 찍지 못합니다.

 

 손으로 만지며 느껴야 합니다. 입으로 씹으며 냄새를 느껴야 합니다. 늘 곁에서 지켜보며 느껴야 합니다. 가만히 볼따구니로 쓰다듬으며 느껴야 합니다.

 

 반딱반딱한 봄잎을 봄잎대로 그리는 한국 그림쟁이로 누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시린 겨울 이긴 겨울잎을 겨울잎대로 그리는 한국 그림쟁이로 누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잎마다 다 다른 빠르기로 다 달리 물들며 가랑잎으로 바뀌는 잎사귀를 찬찬히 살펴 가을잎 빛깔을 살릴 줄 아는 한국 그림쟁이로 누가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눈이 부시게 푸른 여름잎을 눈이 부실 뿐 아니라 마음을 환히 틔우도록 담을 줄 아는 한국 그림쟁이로 누가 있으려나 궁금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림으로뿐 아니라, 사진으로도, 글로도, 잎사귀 한삶 고이 그려 이야기꽃 피우는 사람은 매우 드물어요. (4345.2.2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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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눈이 들려주는 학교 숲 이야기 - 겨울철 학교에서 만난 나무의 한살이와 생태 철수와영희 그림책 4
노정임 지음, 안경자 그림, 구자춘 감수 / 철수와영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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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 푸른 숨결은 나무가 되어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43] 안경자·노정임, 《겨울눈이 들려주는 학교 숲 이야기》(철수와영희,2012)

 


 학교는 겨울을 맞이해서 방학으로 접어듭니다. 겨울날 학교는 조용히 텅 빕니다. 운동장에 눈이 그득그득 쌓여도 뛰어노는 아이가 없습니다. 날이 환히 개어 눈부시더라도 흙을 박차는 아이가 없습니다. 참으로 조용한 겨울 학교인데, 이 조용한 겨울 학교를 빙 둘러싸며 자라는 나무는 새봄을 맞이하려고 부산합니다. 한편으로는 추위를 견디고, 한편으로는 새숨을 키웁니다. 한편으로는 겨울철 따스한 살결로 고이 잠을 자고, 한편으로는 머잖아 찾아올 따순 바람에 따라 맑고 밝은 꽃을 피우며 푸른 잎사귀 틔울 꿈을 꿉니다.


.. 나무는 여러 해를 살아. 그러려면 추운 겨울을 견뎌내야 하지. 겨울을 끄떡없이 보내는 나무들에게는 지혜로운 방법이 있어. 바로 ‘겨울눈’이야 ..  (8쪽)


 아이들은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나무를 쉽게 만납니다. 시골에서는 어디에나 자라는 나무이고, 도시에서도 길가나 학교 운동장 가장자리에 심는 나무입니다. 도시는 시골처럼 숲이나 멧자락이 없다 하더라도 나무만큼은 곳곳에서 자랍니다. 비록 시골처럼 파란 빛깔 하늘이랑 시원히 흐르는 바람이 없다 하더라도, 나무들은 저마다 뿌리내린 터에서 기운차게 살아갑니다. 예삐 바라보는 사람이 없어도, 고이 돌보는 사람이 없어도, 나무는 꿋꿋하며 씩씩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로서는 둘레에 나무가 흔히 있더라도 쉬 가까이 하지 못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어른들부터 둘레 나무랑 가까이 사귀지 않거든요.

 

 도시 어른들은 나무를 보러 자가용을 몰거나 기차나 버스를 타고 멀리멀리 시골로 갑니다. 도시 어른들은 동네 나무를 살펴보지 않습니다. 도시 어른들은 동네 나무를 아끼지 않습니다. 도시 아이들은 도시 어른들 매무새를 고스란히 물려받아요.

 

 도시 아이들 또한 동네에서 흔히 마주할 나무를 가만히 들여다보지 않아요. 나무를 보려면 멀리 시골로 가야 하는 줄 생각합니다. 곁에서 자라는 어여쁜 나무를 어여쁜 손길로 보듬는 꿈을 키우지 못합니다. 동네 나무 한 그루에 내 사랑을 고이 나누어 서로서로 싱그러이 웃음꽃 피우는 길을 찾지 못해요.

 

 단풍나무는 도시에서도 붉게 물듭니다. 은행나무는 도시에서도 노랗게 물듭니다. 도시 한복판 단풍나무나 은행나무보다는 설악산이나 오대산이나 지리산이나 가야산 단풍나무랑 은행나무가 한결 보기 좋거나 곱다면, 설악산이나 가야산은 도시 한복판보다 물과 바람과 햇살이 맑고 흙이 기름지기 때문이에요.

 

 옳게 바라보고 제대로 헤아릴 노릇입니다. 도시에는 자동차가 너무 많아요. 도시에는 흙이 몽땅 시멘트랑 아스팔트한테 깔려서 앓아요. 도시에는 나무가 느긋하게 숨을 쉴 터가 모자라요. 도시에는 밤에도 불을 환하게 켜서 나무들이 새근새근 잠을 잘 수 없어요.

 

 나무한테 너무 괴로운 터전입니다. 나무한테 너무 모진 터전입니다. 나무한테 너무 힘든 터전입니다. 이러한 곳에서 나무가 단풍빛이나 은행빛을 더 곱게 물들일 수 없어요. 살기 괴로운 데에서 나무더러 단풍빛이 왜 해맑지 못하느냐고 나무랄 수 없어요.

 

 


.. 화려한 꽃을 보려고 심어 길러. 백 일 동안 핀다고 ‘백일홍나무’라고도 해. 따뜻한 남부 지방에서 많이 심어 길러 ..  (25쪽)


 나무가 괴롭게 살아가는 터에서는 아이들도 괴롭게 살아가고야 맙니다. 아이들이 괴롭게 살아가는 터라면 어른들이라 해서 즐거이 살아갈까 궁금합니다.

 

 나무가 힘겨워 헉헉거리거나 앓는다면 아이들 또한 힘겨워 헉헉거리거나 앓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무가 뿌리를 튼튼히 내리고 널찍하게 퍼뜨리기 힘든 도시에서는 아이들 또한 즐거이 뛰놀 빈터나 흙땅이 없는 셈입니다.

 

 곧, 나무한테 좋은 삶터는 아이들한테 좋은 삶터입니다. 아이들한테 좋은 삶터는 어른들한테도 좋아, 서로서로 환하게 웃으면서 어깨동무할 만한 삶터예요. 우리는 누구나 사랑을 나누면서 사랑을 씨앗으로 심고 사랑으로 열매를 맺을 때에 보람차며 기쁜 나날일 테니까요.

 

 


.. 잎이 넓은 나무 가운데에 대표적인 늘푸른나무야. 한겨울에 탐스러운 붉은 꽃을 피우지. 동백나무는 제주도나 여수 같은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만 스스로 자라 ..  (30쪽)


 안경자 님이 그리고 노정임 님이 글을 쓴 그림책 《겨울눈이 들려주는 학교 숲 이야기》(철수와영희,2012)를 읽습니다. 겨울을 맞이해 새눈을 다부지게 북돋우는 나무들 이야기를 다루는데, 학교 언저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나무들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감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는 학교에서 쉽게 보기 어려울 텐데요. 호두나무를 학교에 심는 곳이 있을까요. 아파트나 동네에서도 찾아보는 나무를 담았다고 합니다만, 앵두나무 잣나무 보리수나무 탱자나무 포도나무를 심는 학교는 거의 없지 않으랴 싶어요. 곰곰이 돌이키면, 도시에서도 이 같은 나무를 쉽게 찾아볼 만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탱자나무를 좋아해서 마당에 기르기도 하겠지요. 누군가 배씨를 받아 마당 한쪽에 배나무를 기르기도 할 테지요.

 

 인천 골목동네에서 아이들과 나들이를 즐기던 지난날, 곳곳에서 호두나무 앵두나무 탱자나무 포도나무 밤나무를 만났습니다. 골목집은 그리 크거나 넓지 않아 온갖 나무를 두루 심는 집은 드물지만, 한두 나무를 오래오래 아끼며 돌보는 집은 쉬 만날 수 있었어요. 석류나무를 예닐 곱 그루나 돌보는 집을 보았고, 이웃 여러 골목집이 저마다 석류나무를 심은 동네를 보았어요. 도시에서도 감나무를 알뜰히 심고 알차게 돌보아 스무 해나 서른 해나 마흔 해를 함께 살아가는 어르신을 어렵잖이 만났어요. 굵직한 대추나무에 굵게 달린 대추알을 호젓한 골목길에서 흔히 마주치곤 했어요.

 

 그러고 보면, 《겨울눈이 들려주는 학교 숲 이야기》는 “학교 숲 이야기”라기보다는 “마을 숲 이야기”나 “동네 숲 이야기”라고 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학교에서는 느티나무나 벚나무나 버드나무나 소나무나 향나무를 흔히 심잖아요. 열매나무는 좀처럼 안 심어요. 좀 따분하다 싶지만, 열매나무를 심으면 아이들 손을 너무 타니 잘 안 심을는지 모르지요.

 

 그런데, 아이들 많은 학교일수록 열매나무를 심어, 아이들이 열매 한 알 어떻게 맺는가를 찬찬히 지켜보도록 이끌면 훨씬 즐거우며 뜻있으리라 생각해요. 겨울 새눈부터 봄 새잎을 거쳐 꽃이랑 열매 무르익는 모습을 날마다 들여다보도록 이끄는 일만큼 좋은 가르침은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열매를 맺으면 이 열매에서 씨를 갈무리해 아이들이 집이나 마을에서 씨앗을 심도록 하지요. 이듬해부터 아이들 스스로 새 열매나무를 천천히 보살피며 지켜보도록 하면 되지요.

 


.. (회양목은)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는 늘푸른나무야. 촘촘히 심어 울타리를 만들기도 하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다듬어서 가꾸기도 해. 그늘이나 공해가 심한 곳에서도 잘 자라고, 산에서도 잘 자라 ..  (55쪽)


 아이들은 저마다 어여쁜 꽃입니다. 아이들은 누구나 추운 겨울을 즐거이 누리며 새봄을 맞이해 활짝 피어나는 어여쁜 꽃입니다. 식물원이나 비닐집에서 바람 한 점 맞지 않으며 크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너른 흙땅에 맨 처음 씨앗으로서 뿌리를 내리고 새싹을 틔워 씩씩하게 줄기를 뻗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푸른 숨을 쉽니다. 아이들은 푸른 숨을 마을 곳곳에 흩뿌립니다. 아이들은 푸른 숨결로 푸른 꿈이랑 사랑을 키웁니다.

 

 아이들 푸른 숨소리 귀기울여 들을 수 있도록 자동차가 줄어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이들 푸른 바람이 시원히 불 수 있도록 찻길이 줄고 거님길이랑 흙길이 되살아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아이들 푸른 눈빛 반짝이도록 높직높직 아파트와 건물 줄어들고 너른 들판이랑 멧자락이 곳곳에 넘실거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4345.2.23.나무.ㅎㄲㅅㄱ)


― 겨울눈이 들려주는 학교 숲 이야기 (바람하늘지기 기획,안경자 그림,노정임 글,철수와영희 펴냄,2012.2.19./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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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 사진으로 걷는 길
 ― 사진을 만든 사람

 


 사진을 만든 사람은 역사에 이름이 남습니다. 이이는 프랑스에서 특허권을 냈고, 이 특허권은 프랑스 정부에서 사들인 다음, 누구나 이 ‘새로운 재주’를 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글은 누가 맨 처음 만들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림은 누가 맨 처음 만들었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글이나 그림도 어떤 특허가 있었을까 모르겠습니다만, 돌로 된 벽이나 나무판이나 종이에 아로새겨 오래도록 남도록 하던 글이나 그림은 누가 맨 처음 만들었을까 궁금합니다.

 

 사진은 사진기라 하는 연장이 있어야 찍습니다. 글은 연필이라 하는 연장이 있어야 씁니다. 그림은 붓이라 하는 연장이 있어야 그립니다. 사진기랑 연필이랑 붓이랑 연장 쓰임새가 다르다 여길 수 있을 테지만, 저마다 연장을 써서 무언가 새로 빚는다는 대목에서는 모두 같습니다. 연장이 없이는 글도 그림도 사진도 태어나지 않습니다.

 

 연필로 빚는 글은 ‘문학’이라는 자리를 마련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붓으로 빚는 그림은 ‘회화’라는 자리를 마련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진기로 빚는 사진은 어떤 자리를 마련해 온갖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요.

 

 맨 처음 사진기가 태어났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진을 찍는 연장은 값이 그리 싸지 않습니다. 품이 제법 듭니다. 사진기는 1/100초이든 1/1000초이든 붙잡을 수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 붙잡은 모습을 종이에 앉히기까지 훨씬 긴 겨를과 많은 품을 들여야 합니다. 종이에 적바림하면 태어나는 글이나 종이에 그리면 나타나는 그림하고는 적잖이 다릅니다.

 

 한겨레 살아가는 이 나라를 생각해 봅니다. 한반도라 하는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나, 한반도를 넘어 만주나 일본이나 러시아나 중앙아시아로 나아가 살아가는 사람한테 사진이란 어떤 삶이나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돌이켜 봅니다. 여느 터전에서 여느 살림을 꾸리던 여느 사람들은 사진을 얼마나 즐기거나 누렸을까 곱씹어 봅니다. 여느 터전 여느 살림 여느 사람들은 사진뿐 아니라, 글이나 그림은 얼마나 즐기거나 누렸을까 헤아려 봅니다.

 

 사진은 사진기를 장만해야 즐기거나 누린다 할 텐데, 그림이라 해서 누구나 쉬 즐기거나 누리지 않습니다. 글이라 해서 아무나 쉬 즐기거나 누리지 않아요. 지난날 한겨레 거의 모든 사람은 흙을 일구어 살림을 돌보았는데, 이들 가운데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 사람조차 매우 드물거나 거의 없다고 할 만합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는 사람뿐 아니라 역사에 이름을 못 남겼다는 사람까지 샅샅이 훑더라도 ‘한겨레 거의 모두를 이루던 흙일꾼’ 가운데 글 문화나 그림 문화를 즐기거나 누린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1950년대에는 어떻다 할 만할까요. 1970년대와 2000년대는 또 어떻다 할 만할까요. 2010년대에는 시골 여느 흙일꾼이 글 문화를 누린다 할 만할까요. 2020년대나 2050년대에는 도시 공장 일꾼이 그림 문화를 누린다 할 수 있을까요.

 

 글도 그림도 사진도 여느 터전 여느 살림 여느 사람한테는 너무 머나먼 이야기라 할는지 모릅니다. 글도 그림도 사진도 여느 터전하고 동떨어지거나 여느 살림하고 등지거나 여느 사람하고는 아득히 먼 이야기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제 사진은 여느 터전 여느 살림 여느 사람까지 그리 어렵지 않게 누리거나 즐깁니다. 아이들하고 복닥이는 나날을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는 사람은 드물어도, 아이들 복닥이는 모습을 사진으로 몇 장 담아 벽에 붙이거나 손전화로 담는 사람은 매우 많습니다. 아이들하고 어우러지는 나날 이야기를 시나 수필로 써서 벽에 붙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사랑스러운 짝꿍을 곱게 그림으로 담아 벽에 붙이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연필만 있으면 글을 쓰고 붓만 있으면 그림을 그린다지만, 막상 글이랑 그림은 여느 자리 여느 삶하고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있는지 모릅니다. 작은 손전화로도 사진을 찍어 언제라도 돌아볼 수 있는 오늘날, 외려 사진이야말로 여느 자리 여느 삶하고 가장 가까이 어깨동무한다 할 만합니다.

 

 사진을 맨 처음 만든 사람은 돈을 벌려고 했습니다. 문화나 예술이나 삶 이런저런 대목을 살피지 않습니다. 새로운 길로 사진을 열면서, 이 사진으로 장사를 했습니다. ‘영업 사진관’이 생겼어요. 글을 쓰며 돈벌이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며 장사를 하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글도 그림도 돈벌이하고 동떨어진 길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영업 문학관’이나 ‘영업 미술관’이란 없어요. 오직 ‘사진찍기’만 대놓고 돈을 법니다.

 

 곰곰이 살피면, 글은 책이나 신문으로 묶으며 돈을 법니다. 그림은 작품으로 돈을 법니다. 글과 그림이라 해서 돈벌이를 안 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진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돈을 버는 모습이 다를 뿐입니다. 글을 쓰더라도 돈을 벌지 못하면 먹고살지 못해요. 그림을 그리더라도 돈을 벌지 않으면 그림그리기를 더는 하지 못해요. 돈이 없으면 연필과 종이를 장만하지 못합니다. 돈이 없으면 붓과 물감을 장만하지 못합니다. 돈이 있어야 사진기이든 필름이든 메모리카드이든 장만한다지만, 돈이 있지 않고서야 글도 그림도 이룰 수 없습니다.

 

 한겨레 발자취와 삶을 돌아볼 때에, 여느 자리 여느 살림 여느 사람이 글이든 그림이든 즐거이 누리지 못한 까닭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한글이 있었어도 지배계급은 한문으로 살아가며 권력을 누렸습니다. 여느 자리 여느 살림 여느 사람이 누구나 쉽게 글을 쓰도록 문을 열지 않았어요. 더욱이, 그림그리기는 여느 자리 여느 살림 여느 사람은 아예 건드리지 못하도록 꽁꽁 닫아 걸었습니다.

 

 사진을 처음 만든 사람은 돈을 버는 길을 찾으려 했다지만, 이 돈벌이는 누구한테나 열린 문이었습니다. 많든 적든 돈 얼마를 치르면 누구나 즐기거나 누릴 수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글이랑 그림은 돈을 얼마를 치르더라도 계급과 권력이라는 높직한 울타리를 세우고는 아무도 못 들어오게 꽁꽁 틀어막았습니다.

 

 오늘날 꽤 많은 사람들이 ‘나는 글은 못 쓰겠더라’ 하고 말하거나 ‘나는 그림은 못 그리는걸’ 하고 말하는 모습을 흔히 봅니다. 꼭 계급과 권력 때문은 아니지만, 글쓰기와 그림그리기는 울타리가 좀 높기는 높습니다. ‘등단’이나 ‘출판’이나 ‘언론’이나 ‘대학교’라는 울타리가 참 많습니다. 사진 갈래라고 이런 울타리가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만, 사진학교를 다니지 않거나 사진강의를 듣지 않은 사람 누구라도 1회용 사진기이든 값진 사진기이든 있다면, 언제 어디에서라도 사진을 즐기거나 누리면서 마음껏 나눌 수 있어요.

 

 곧, 사진과 사진기라는 새 길을 처음 만든 사람은 어쨌든 ‘돈’이라는 테두리에서 처음 만들었습니다. 이제, 사진을 누구나 마음껏 즐기는 이 자리에서는 저마다 ‘내 마음’을 어떻게 기울이는가에 따라 새 삶을 이룰 만합니다. 어떠한 장비를 갖추더라도 내가 바라보는 삶을 내 눈길로 곱게 담을 수 있습니다. 애써 작품으로 꾸미거나 잔치마당을 마련해야 하지 않습니다. 따로 사진책을 안 묶어도 됩니다. 즐기는 삶처럼 즐기는 사진이면 넉넉합니다. 누리는 삶만큼 누리는 사진이면 흐뭇합니다.

 

 더 헤아릴 수 있으면, 글이랑 그림도 이와 같아요. 즐기는 삶대로 즐기는 글쓰기이면 돼요. 누리는 삶결을 살려 누리는 그림그리기로 나아가면 돼요.

 

 그리고, 연필이든 붓이든 사진기이든 없어도 홀가분합니다. 나는 내 마음으로 내 글을 씁니다. 내 가슴속에 곱게 글을 씁니다. 내 사랑을 실어 내 가슴 깊이 그림을 그립니다. 내 꿈을 담아 내 가슴 한 자리에 사진을 찍어요. 살가운 내 살붙이들 이야기를 마음밭에 아로새깁니다. 고마운 내 이웃과 동무 이야기를 마음밭에 씨앗으로 심습니다. 나는 내 슬기를 빛내어 내 사진을 늘 새로 빚으며 누립니다. (4345.2.23.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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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아 푸른 솔아 - 박영근 시선집
백무산.김선우 엮음 / 강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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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부터 피어날 꽃들한테 한 마디
[시를 노래하는 시 13] 박영근, 《솔아 푸른 솔아》

 


- 책이름 : 솔아 푸른 솔아
- 글 : 박영근
- 펴낸곳 : 강 (2009.5.9.)
- 책값 : 7000원

 


 추운 겨울날 피어나는 겨울꽃이 있습니다. 한창 무르익는 가을에 피어나는 가을꽃이 있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환하게 피어나는 여름꽃이 있습니다. 따스한 바람과 함께 따스한 빛깔과 내음 베푸는 봄꽃이 있습니다.

 

 꽃은 봄부터 피어납니다. 봄부터 피어나는 꽃은 겨울까지 핍니다. 추운 한겨울 동안 꽃은 조용히 시들거나 잠잡니다. 이듬해 봄에 다시금 피어날 꿈을 꾸면서 추위를 견딥니다. 아니, 추위를 받아들인다고 해야겠지요.


.. 일하고 먹고 살아가는 시간들 속에서 / 일하고 먹고 살아가는 일을 / 뉘우치는 시간들 속에서 / 때때로 스스로의 맨살을 물어뜯는 / 외로움 속에서 그러나 / 아주 겸손하게 작은 목소리로 / 부끄럽게 부르는 이름을 / 시라고 쓰고 싶다 ..  (서시)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 살아가며 동백꽃은 거의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내가 구경하지 못했을 뿐 어느 골목집 마당 한켠에 곱게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 한두 그루 있었으리라 봅니다. 전라남도 고흥이라든지 해남이라든지 강진이라든지 여수라면, 곳곳에 동백나무 흐드러지고 동백꽃 붉습니다. 경상남도 통영이나 진해에도 동백나무 동백꽃은 붉게 흐드러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인천 골목동네를 두루 돌아다니며 능금나무 배나무 대추나무 매화나무 복숭아나무 탱자나무 호두나무 밤나무 감나무 수수꽃다리 들을 골고루 구경했습니다. 때로는 석류나무를 보고 살구나무를 봅니다. 때로는 포도나무를 보고 앵두나무를 봅니다. 한 집에 온갖 나무 골고루 심어 돌보지는 못합니다. 조그마한 마당에 몇 가지 나무를 곱게 키우고 우람하게 보살핍니다. 사람 손길 안 닿는 데에서 높디높게 자라난 오동나무를 바라보며 놀라기도 합니다.

 

 나무를 심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나무를 아끼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런데, 나무는 사람이 애써 심지 않아도 스스로 씨앗을 퍼뜨립니다. 미루나무이든 느티나무이든 멀리멀리 씨앗을 퍼뜨립니다. 이 가운데 어른나무로 튼튼히 뿌리내리는 씨앗은 몹시 드물지만, 이 골목 저 골목, 볕바르거나 그늘지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살아가려 애씁니다.


.. 경님아, 밤기차 어둑한 창가에 기대어 / 서울 가던 날 / 손 한번 흔드시지 못하고 / 번지는 들판의 불빛들 속에서 어머니 / 손 한번 / 흔 드 시 지 못 하 고 ..  (서울 가는 길)


 어떤 분은 어린나무를 장만해서 심어 돌보았겠지요. 어떤 분은 씨앗을 알뜰히 건사해서 작은 새싹부터 보살폈겠지요. 나는 스무 해나 서른 해나 마흔 해 남짓 골목이웃하고 살아온 나무를 바라봅니다. 나는 스무 해나 서른 해나 마흔 해 동안 꽃을 피운 나무를 마주합니다. 나는 내 나이보다 오래도록 살아온 나무가 맺는 열매를 고마이 나누어 먹습니다.

 

 나무 한 그루에서 꽃을 피우기까지 적지 않은 해를 보냅니다. 나무 한 그루에서 열매를 얻기까지 꽤 긴 해를 보냅니다. 퍽 많은 사람들은 꽃을 피우지 못하고 키가 작은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인지 아닌지조차 알아보지 못하곤 합니다. 꽤 많은 사람들은 꽃과 잎을 모두 떨군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어떤 나무인가 알아차리지 못하곤 합니다. 아마, 아예 거들떠보지 않을 수 있겠지요. 다들 바쁘니까, 모두들 다른 데에 눈길을 두어야 하니까, 겨울나무 앙상한 가지와 함초롬한 작은 새눈을 들여다보지 못하겠지요.


.. 그곳엔 비 내리는 판문점의 닳고 닳은 비애도 /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고지에 오르는 / 지겨운 전쟁도 없지 ..  (천지를 생각하며)


 자동차 끝없이 오가는 찻길에서 자라는 은행나무나 방울나무는 해마다 가지가 잘립니다. 찻길 가장자리에서 배기가스 듬뿍 마시며 맑은 숨을 내뿜도록 들볶이는 나무는 얼마 살아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들 가녀린 길가 나무들, 곧 ‘길나무’들은 사람보다 오래 삽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돈을 벌다가 도시에서 숨을 거두는 사람보다, 길나무 목숨이 훨씬 깁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돈을 벌다가 도시에서 죽는 사람은 으레 병원 문턱을 드나듭니다. 찻길에서 날마다 어마어마하게 배기가스를 들이마시고 햇볕 한 조각 제대로 받기 힘들며 전깃줄에 등불에 밤낮으로 시달리는 길나무이지만, 이들 길나무는 병원 문턱을 밟지 않습니다. 이들 길나무 가운데 병원에 드나들어야 할 녀석이 있다면 곧장 목이 잘릴 테니까요. 막바로 뿌리가 뽑히고 새 나무로 바뀔 테니까요. 도시에서는 나무이든 사람이든 목숨이든 흙이든 꽃이든 온통 돈으로만 재거나 따집니다.

 

 나무가 슬픕니다. 사람이 슬픕니다. 땅이 슬픕니다. 하늘이, 해가, 구름이, 바람이, 물이, 꽃이, 풀이, 모두모두 슬픕니다. 멧새가 다리쉼을 할 만큼 느긋한 나무를 찾기 어려운 도시입니다. 멧새 한 마리 한갓지게 둥지를 틀기 어렵다면, 착한 사람 하나 몸을 눕혀 쉴 보금자리 하나 마련하기 어려운 셈이리라 생각합니다. 들짐승 한 마리 곱게 깃들며 삶터를 얻기 어려운 도시입니다. 들짐승 한 마리 조그마한 굴조차 팔 수 없다면, 고운 사람 하나 다리를 쭉 뻗고 기지개를 펼 쉼터 하나 얻기 어려운 셈이리라 생각합니다.

 

 자동차 대는 자리는 그렇게 많은데요. 돈을 내고 자동차를 대든, 돈을 안 내고 자동차를 대든, 도시에서는 어디에나 자동차를 대는걸요. 자동차는 그렇게 많고, 자동차 다닐 길은 그렇게 넓으며, 자동차 둘 자리는 그렇게 넓은데, 어이하여 나무 한 그루 느긋하게 뿌리를 뻗을 땅뙈기란 없을까요. 사람 하나 보금자리 예쁘게 꾸며 나무와 풀과 꽃을 즐거이 누릴 땅뙈기란 없을까요. 물줄기 햇살 받으며 시원하게 흐를 땅뙈기란 없을까요.


.. 몇 번인가 이사를 할 때마다 / 그 비좁은 골목길은 리어카 한 대의 이사 보따리에도 땀을 흘렸다 ..  (그 방)


 눈이 내립니다. 겨울눈은 겨울을 살아내는 나무마다 소복하게 쌓입니다. 하얗게 쌓이던 눈은 햇살이 들면서 스르르 녹습니다. 스르르 녹은 물은 나뭇줄기를 타고 흙으로 흘러내립니다. 흙으로 흘러내린 물은 흙을 촉촉하게 적십니다.

 

 이윽고 봄입니다. 언땅이 녹고 겨울눈이 껍질을 벗는 봄입니다. 뭇새들 홀가분하게 지저귀는 봄입니다. 흙 속에서 겨울잠을 자던 벌레들 알을 까고 볼볼 기어나옵니다. 볼볼 기어나오던 벌레들은 새들한테 먹이가 됩니다. 새들은 재재거리는 소리로 흙일꾼 새벽을 깨웁니다. 흙일꾼은 쟁기와 호미로 밭을 갈아엎습니다. 밭자락에는 새로운 씨앗이 깃들고, 새 씨앗을 품은 흙은 새 목숨을 보듬습니다. 새 목숨은 너른 사랑을 받으며 야무지게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립니다. 너른 사랑 받으며 흙 위로 고개를 내민 새싹은 따사로운 햇살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랍니다.


.. 닫힌 철문 앞에서 / 원직 복직을 외치는 그의 쉰 목소리를 / 희망이라도 불러도 좋은 것일까 ..  (희망에 대하여)


 봄빛이 환합니다. 봄빛은 누런 들판을 푸른 들판으로 천천히 바꾸면서 환한 기운 나눕니다. 봄내음이 그윽합니다. 봄내음은 온누리에 향긋한 내음을 퍼뜨리며 풀먹는 짐승이랑 사람을 살찌웁니다.

 

 봄에 피어나는 꽃은 노래꾼입니다. 봄에 피어나는 꽃은 춤꾼입니다. 봄에 피어나는 꽃은 사랑꾼입니다.

 

 노래를 실어나르는 봄꽃은 노랗게 물듭니다. 춤을 실어나르는 봄꽃은 발그스름하게 물듭니다. 사랑을 실어나르는 꽃은 하얗게 물듭니다.

 

 봄부터 할미꽃과 진달래뿐 아니라 수유와 살구와 수수꽃다리가, 또 원추리와 감자와 당근이, 또 숱한 들꽃과 풀꽃이 들판을 잔치판으로 이룹니다. 나는 내가 이름을 아는 꽃은 이름을 아는 대로 참 곱구나 하고 쓰다듬습니다. 나는 내가 이름을 모르는 꽃은 이름을 모르는 대로 참 예쁘구나 하고 어루만집니다. 패랭이꽃이든 해바라기꽃이든, 모두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애틋한 느낌을 살려 붙인 이름이겠지요. 봄까치이든 민들레이든 마을과 고을마다 사람들 가슴속에서 피어나는 가장 맑은 넋을 살려 붙인 이름일 테지요.


.. 내 안에도 / 나도 몰래 / 나를 키우고 / 나를 살리는 것 있다는데 ..  (눈물)


 봄에는 봄꽃이 노래를 부르며 시가 하나둘 태어납니다. 봄에는 봄꽃이 춤을 추며 싯말이 하나들 퍼집니다. 봄에는 봄꽃이 사랑을 나누며 싯꿈과 싯무지개가 온누리를 빛냅니다.

 

 박영근 님 시집 《솔아 푸른 솔아》(강,2009)를 읽습니다. 푸른 솔을 노래하는 삶을 보낸 박영근 님 넋을 돌이키며 시집 여섯 권을 한 권으로 간추린 자그마한 시집을 읽습니다. 박영근 님이 쓴 시를 바탕으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라는 노래 한 가락 태어났다고 하는데, 나는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는 모릅니다. 그저 시를 읽습니다. “푸른 솔”을 노래한 넋은 어떤 결이었을까 하고 헤아리며 시를 읽습니다.

 

 스스로를 살리고 동무를 살리며 온누리를 살리고프던 꿈을 시 한 자락으로 읽습니다.


.. 전철도 끊긴 동암역 근처 / 눈 쌓인 골목 미루나무 가지 끝 // 빈 새둥지 속에 / 뜨거운 별빛 한줄기 떨어진다 // 오랜 기다림도 그친 곳에 / 눈은 내려 쌓이리 ..  (동암역 근처)


 1958년에 태어나 2006년에 숨을 거둔 박영근 님은 쉰 해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쉰 해를 넘기지 못한 삶이란, 딱 마흔여덟아홉에서 멈춘 삶이란, 쉰을 코앞에 두고 스러진 삶이란, 어떤 사랑이 담긴 이야기일까요. 쉰을 코앞에 두고 스러져야 했을 때에, 박영근 님은 당신 나이를 얼마나 헤아려 보았을까요.

 

 박영근 님을 낳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몇 살까지 삶을 누렸을까요. 당신 아버지와 어머니보다 일찍 흙으로 돌아간 삶이었을까요, 당신 아버지와 어머니보다 조금 더 길게 누리다가 흙으로 돌아간 삶이었을까요.


.. 동지도 지났는데 시커먼 그을음뿐 / 홑부뚜막엔 불 땐 흔적 한 점 없고, / 이제 가마솥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 뒷산을 지키던 누렁개도 나뭇짐을 타고 피어나던 나팔꽃도 없다 / 산그림자는 자꾸만 내려와 어두운 곳으로 잔설을 치우고 / 나는 그 장지문을 열기가 두렵다 ..  (길)


 내 무릎에 안긴 채 잠든 아이를 바라봅니다. 우리 아이는 앞으로 몇 해쯤 더 아버지 무릎에 안긴 채 잠들 수 있을까 어림해 봅니다. 우리 아이는 열다섯 살이 되거나 스물다섯 살이 되어도 아버지 무릎에 안긴 채 잠들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이 둘 아버지인 나는 앞으로 몇 살까지 아이들을 무릎에 안으며 무릎과 발목이 뻣뻣하게 저려도 싱긋 웃으면서 아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길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이를 바라보는 하루는 언제나 꽃밭입니다. 아이한테서 꽃내음을 맡고, 나한테서 꽃내음을 맡습니다. 아이한테서 꽃빛을 느끼고, 나한테서 꽃빛을 느낍니다. 서로서로 꽃과 같은 결과 무늬로 사랑을 주고받습니다. 포근하며 촉촉한 꽃잎처럼, 곱고 보드라운 꽃잎처럼, 향긋하고 어여쁜 꽃잎처럼, 환하고 맑은 꽃잎처럼, 하루하루 좋게 누리고 싶다고 꿈을 꿉니다.

 

 그리고, 박영근 님 시집에 나오는 〈꽃들〉을 읽습니다. “공장 담벼락을 타고 올라 / 녹슨 철조망에 / 모가지를 드리우고 망울을 터뜨리다 / 담장 넘어 비로소 피어나는 꽃들, / 흐르는 바람에 / 햇살 속에(꽃들)” 하고 노래하는 〈꽃들〉을 읽습니다.

 

 참말 박영근 님 시에는 꽃이 자주 나옵니다. “카티자, 세상에 꽃이라니, 도대체 무슨 꽃들이 / 저렇게 빨갛고 노란 것일까 / 기억 속의 꽃들이 한꺼번에 말을 잃고 / 병원 계단을 오른다(임시 묘지의 시)” 하고 외치면서도, 참말 꽃이 자주 나옵니다. 웬 꽃이냐며 혀를 차지만, 어인 꽃이냐고 울부짖지만, 그래도 꽃을 말합니다. 꽃을 바라보고 꽃을 느끼며 꽃을 어루만집니다.


.. 계절이 골목길 건너 백목련의 꽃망울과 은행나무 가지 위에서 바뀔 무렵이면 / 그 집엔 밀린 빨래들이 그 작은 마당과 / 녹슨 창틀과 흐린 처마와 담벽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 햇살에 취해 바람에 흔들거릴 것이다 ..  (이사)


 밀린 빨래도 작은 마당 꽃망울 내음을 받아들입니다. 안 밀리고 그날그날 즐기는 빨래도 작은 마당 꽃망울 내음을 받아먹습니다.

 

 빨래는 꽃내음을 먹으며 더 보송보송하게 마릅니다. 꽃내음 깃든 옷을 입고 일터로 가는 사람들 넋은 꽃넋으로 거듭납니다. 꽃내음 깃든 옷을 입고 일하는 사람들 이마에서 꽃방울 같은 땀방울이 떨어집니다.

 

 이제 봄이고, 이제부터 봄꽃이 피어납니다. 흙으로 돌아간 박영근 님은 좋은 거름이 되어 봄꽃이 흐드러지도록 돕는 작은 흙알갱이로 살아가겠지요. (4345.2.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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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기계 들이면
아침 낮 저녁
쉴새없이 빨래하던 내 손
느긋하게 쉰다.
하얗게 트거나
쩍쩍 갈라지는 일
줄어들겠지.

 

틀림없이
빨래 일거리 줄면서
집살림 더 살가이
보듬는 길 찾을 만하다.
나날이 무럭무럭 크는
두 아이 곱게 배울
좋은 살림빛 돌볼 짬 낸다.

 

저녁나절
아이들 씻긴 물로
기저귀랑 옷가지랑
빨래하며 생각한다.
기저귀며 옷가지며
손빨래하는 아버지
오늘날 얼마나 될까.

 

아니,
빨래는 안 해도 돼.
아이들 씻기고 입히며 먹이는
집안일 즐거이 웃으며 하는
아버지는 얼마나 있을까.
너무 바쁜 아버지들 아닌가.
너무 밖에서 노는 아버지들 아닌가.

 

아이들 씻기고 남은 물
언제나 너무 아까운 나머지
아이들 옷가지 빨래하는 데 쓴다.
빨래기계한테는
이불이랑 두꺼운 겉옷 맡기고
가벼운 옷가지랑 기저귀
이 물로 손빨래하면 될 테지.

 

씻은 물은
빨래하는 물이 된다.
빨래하는 물은
옷부터 빨고 걸레를 빨며
이 물은 다시
바닥을 닦는 데 쓴다.
물 한 방울 고맙다.

 

물잔에 따라 마시면서
밥을 안치면서
국을 끓이면서
낯을 씻으면서
이를 닦으면서
어디에서 흘러
어디로 가는가 생각한다.


4345.2.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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