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없애야 말 된다
 (1642) 위계적 1 : 위계적인 관리체계


.. 또 다른 특징은 자립적이고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공동체 학교이고, 위계적인 관리체계가 없다는 것이다 ..  《크리스토퍼 클라우더,마틴 로슨/박정화 옮김-아이들이 꿈꾸는 학교》(양철북,2006) 5쪽

 “또 다른 특징(特徵)”은 “또 다른 모습”이나 “또 다르게 돋보이는 모습”으로 다듬습니다. 짤막하게 “또한”으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자립적(自立的)이고 자체적(自體的)으로 운영(運營)하는”은 “다른 데에 기대지 않는”이나 “나라나 다른 기관에 도움을 받지 않고 꾸리는”이나 “스스로 살림을 꾸리는”으로 손보고, “없다는 것이다”는 “없다”로 손봅니다. ‘공동체(共同體)’라는 말마디를 요즈음 사람들이 즐겨쓰는데,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는 뜻이라 할 때에는 ‘두레’를 넣어 “두레 학교”처럼 적을 수 있어요. “어깨동무 학교”나 “열린 학교”나 “모둠살이 학교”라 해 보아도 됩니다.

 위계적 : x
 위계(位階)
  (1) 벼슬의 품계
   - 새 능의 주인공의 신분이나 위계가 서하총의 그것보다는 아래임을 나타내는
  (2) 지위나 계층 따위의 등급
   - 위계가 서다 / 군대에서는 위계가 분명하다

 위계적인 관리체계가 없다
→ 계층으로 나눈 관리 틀이 없다
→ 지위로 나눈 틀거리가 없다
→ 지위나 계층으로 나누지 않다
→ 위아래로 나누지 않다
→ 사람을 위아래로 나누지 않다
 …


 국어사전에 ‘위계적’이 안 실립니다. 안 실릴 만하니 안 싣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위계’는 실립니다. 실릴 만하니 실을까 생각하다가는, 한자말 ‘위계’ 또한 굳이 국어사전에 실어야 할까 알쏭달쏭합니다.

 “벼슬의 품계”이든 “지위의 등급”이든 그냥 ‘벼슬’이나 ‘지위’라는 낱말만 써도 넉넉합니다. 아니, 한국 말투와 말법을 헤아린다면, “새 능 주인공 신분이나 벼슬이 ……”처럼 적으면 돼요. “지위가 서다”라든지 “군대에서는 계층이 뚜렷하다”처럼 적으면 그만입니다.

 위아래로 나누지 않는다
 지위를 위아래로 나누지 않는다
 계층을 위아래로 나누지 않는다
 지위를 나누지 않는다
 계층을 나누지 않는다

 한국말에는 높임말이 있습니다. 높임말과 함께 낮춤말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높임말과 낮춤말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우리는 높임말과 낮춤말을 아울러 씁니다. 높일 만하니 높임말을 쓰고 낮출 만하니 낮춤말을 쓴다 할 텐데, 이른바 ‘고대국가’이니 ‘근대국가’이니 하는 틀을 세워서 지위와 계층을 나누던 삶자락에서는 말마디를 높이거나 낮출밖에 없어요. 그러나 한 지붕에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아이들 다 함께 살아간다 할 때에는, 억지로 높이거나 낮추는 삶이 아니라, 서로를 아끼면서 사랑하는 삶입니다.

 조선이 아닌 고려 때에는, 고려 아닌 고구려나 백제 때에는, 고구려나 백제 아닌 옛조선 때에는, 옛조선 아닌 자그마한 마을살림일 때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림집을 꾸리고 밥을 마련하며 집을 보듬었을까요. 이천 해 앞서도, 이만 해 앞서도, 모두들 여자가 집일을 도맡으며 밥·옷·집 건사하는 몫을 치러야 했을까요.

 높낮이를 만들어 높임말·낮춤말 가르던 얼거리하고, 서로를 아끼며 사랑하는 삶에서 쓰는 말마디 얼거리는 사뭇 다르다고 느낍니다. 오늘날 한국말에는 슬프게 갈린 높낮이 때문에 생긴 억지스러운 높임말·낮춤말이랑, 살붙이가 서로를 아끼거나 사랑하며 서로서로 섬기며 보살피던 여느 말이 어지러이 섞였다고 느껴요.

 우리 말글이 처음부터 위아래를 나누는 말이었을까요. 한문이 한국말이 스며들 무렵부터 억지스레 높임말을 만들지 않았을까요. 한문을 한글로 적어 일컬을 때에는 억지스레 높임말로 삼고, 여느 자리 여느 사람들 여느 말글은 낮춤말로 깎아내리지 않았을까요.

 또한, 스스로 살림을 꾸리는 두레 학교이고, 높낮이나 위아래가 없다
 더욱이, 스스로 살림을 일구는 열린 배움터이고, 높낮이도 위아래가 없다


 말에는 높낮이가 없습니다. 글에는 위아래가 없습니다. 말에는 사랑이 깃듭니다. 글에는 믿음이 실립니다. 높낮이 아닌 따사로운 결을 담는 말입니다. 위아래 아닌 너그러운 꿈을 돌보는 글입니다. (4344.11.2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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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울순이


 아이가 돌울을 타고 오른다. 이제 아귀힘이며 다리힘이며 제법 붙었는지 돌울을 용케 타고 오른다. 우리 집하고 돌울을 마주한 마늘밭에서 비닐씌우기를 하는 이웃 할매 할배한테 인사를 하며 종알종알 수다를 떤다.

 저번에도 돌울을 타고 오르려던 아이였으나, 저번에는 오르지 못하더니 이제는 잘 타고 오른다. 이제 아이는 세발자전거를 퍽 잘 탄다. 다리힘과 아귀힘이 그만큼 세졌다는 뜻이다. 처음 올라가서 놀다가 내려올 때에는 돌울이 괜찮더니, 다시 돌울을 밟고 올라갈 즈음 와르르 무너진다.

 무너진 돌울은 다시 쌓아야 한다. 이 녀석, 돌울을 무너뜨리다니. 그래도 아이는 어디를 어떻게 밟아 돌울이 무너졌는가를 느끼려나. 돌울이 무너지며 미끄러질 때에 어떤 느낌인가를 받아들이려나. 아이가 한 살 두 살 더 먹을 무렵, 우리 집이나 가까운 멧자락 나무들을 타고 오를 만큼 될까 궁금하다. 나무를 타고 오르면 참 싱그럽고 포근하다. 나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지만, 내 어린 나날을 길디길게 보내던 5층짜리 작은 아파트 동네에는 우람한 미루나무가 있었기에, 날마다 이 나무를 올라타면서 놀곤 했다. (4344.11.2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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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11-27 21:37   좋아요 0 | URL
으와 멋져요. 사진이.
으와 이뻐요. 울타리가, 지붕이, 햇빛이, 나뭇가지가, 그림자까지.
으와 돌울순이! 덕분에 사진도 울타리도 지붕도 햇빛도 나뭇가지도 그림자도, 빛나요. 반짝 반짝 반짝.

파란놀 2011-11-28 06:43   좋아요 0 | URL
씩씩하게 노는 아이가 참 예뻐요..@@
 


 사진순이


 보금자리를 새터로 옮길 무렵 자그마한 디지털사진기 하나 새로 장만했다. 작은 디지털사진기는 오직 우리 네 살 아이가 신나게 갖고 놀도록 마련한 선물이었다. 새 보금자리 찾으러 집을 비우는 날이 잦을밖에 없는 아버지인 터라, 아버지가 집을 비우면 아버지는 아버지 사진기를 갖고 나가니까, 집에 있는 동안 동생 모습을 예쁘게 찍으며 놀기를 바랐다.

 네 살 아이는 제 사진기보다는 아버지 사진기를 더 좋아한다. 아버지 사진기 못지않게 어머니 손전화랑 아버지 손전화로 사진찍기를 더 즐긴다. 아이 둘레에 이들 사진기나 손전화가 보이기 때문에, 아이로서는 더 손을 뻗고 더 만지작거리며 더 마음을 쏟겠지.

 밥쓰레기를 묻으러 땅에 구덩이를 판다든지, 무너진 돌울타리 쌓으려고 흙을 파서 큰돌을 캐낸다든지 할 때면, 아이는 어느새 아버지 곁으로 다가와 노래부르면서 논다. 놀며 제가 들 만한 돌을 들어 날라 오기도 한다.

 한 달을 지나 2012년이 되면 다섯 살이 될 아이를 놓고 곰곰이 생각한다. 이 아이는 새해에 말을 더 잘할 테며 더 신나게 뛰어놀고플 테지. 이 아이하고 새해에는 어떤 놀이 어떤 일 어떤 심부름 어떤 삶을 일구어야 즐거울까.

 음성 할머니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마당을 아이랑 함께 거닐었다. 음성 할머니가 우리 마당가 꽃밭에 돋은 가느다란 풀줄기를 바라보며 “달래도 있네. 달래 알아?” 하고 말씀하신다. 저녁에는 설렁하지만 낮에는 포근한 우리 시골마을이기 때문에 벌써 달래가 돋을까. 달래줄기 올라오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나무 씨앗을 이 꽃밭자락에 심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지난가을 주워서 그러모았던 도토리 몇 알 이 둘레에 심으면 씩씩하게 뿌리내리면서 아름드리 참나무로 자라 주려나. 우리 사진순이랑 나무씨를 심고 싶다. (4344.11.27.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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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11-27 21:40   좋아요 0 | URL
어이쿠. 저어기 방문..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요. 흐흐흐

파란놀 2011-11-28 06:45   좋아요 0 | URL
힘들다는 핑계로 새로 바르지 못한 문이에요 ^^;;;;
 
유리가면 47
미우치 스즈에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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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이루는 어여쁜 빛
 [만화책 즐겨읽기 88] 미우치 스즈에, 《유리가면 (47)》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충청북도 음성에서 전라남도 고흥까지 멀디먼 길을 찾아와 주었습니다. 자그마치 다섯 시간을 달려 찾아와 주셨는데, 하룻밤 묵지 않고 다시 길을 돌려 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작은 시골집은 어른들 모시기 힘들다 할 만할 수 있지만, 작은 집 작은 방은 오붓하게 앉아서 이야기꽃을 피우기에는 참 알맞춤합니다.

 나와 옆지기와 아이들이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제대로 붙잡지 못해서 바로 돌아가셨을 수 있지만, 두 분은 오늘 아침 일찍 길을 떠나 들른 다음, 늦지 않게 댁으로 돌아갈 일을 헤아리며 찾아오셨지 싶어요. 남녘땅은 따순 바람 부는 날이지만, 내 어버이 살아가는 충청도 음성은 벌써 영 도 밑으로 육 도라 하니까, 집살림을 걱정하실 수 있겠다 싶어요.

 곧장 돌아가시려는 분들한테 부랴부랴 밥상을 차립니다. 밥을 뜨고 국을 뜨며 수저 놓고 김치를 올리면, 아무리 바삐 돌아가시려 하더라도 한 술쯤 뜨시겠거니 생각했습니다. 1995년에 제금난 뒤 2003년 즈음 한 번 밥을 차린 적 있을 뿐, 이제껏 두 분한테 밥을 차려서 드린 적이 없기에, 오늘은 꼭 밥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두 분이 밥상에 앉습니다. 함께 밥술을 뜹니다. 네 살 첫째 아이는 밥을 안 먹고 딴짓만 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찾아와서 기쁜 나머지 밥을 못 먹습니다. 할아버지는 네 살 아이를 보며 “밥 안 먹고 딴짓하는 건 옛날하고 똑같구나.” 하고 이야기합니다. 문득, 이 말은 아이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 아이 아버지인 내가 어린 나날 이러한 모습이었다고 들려주는 말이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내가 떠올리지 못하는 내 네 살 무렵 어린 나날, 나는 밥먹기보다 딴짓하기에 더 빠졌는지 몰라요.

 곰곰이 헤아립니다. 내가 떠올리지 못하는 네 살 무렵, 다섯 살 언저리, 여섯 살 즈음이라 하지만, 내 몸에는 내가 살아낸 한 살 두 살 세 살 이야기가 차곡차곡 아로새겨졌으리라 믿습니다. 내가 밥자리에서 딴짓을 한다고 아버지한테서 꾸지람을 듣거나 형한테서 꿀밤을 얻어먹지 않았던가, 하고 돌아봅니다.


- “사람들이 자꾸 쳐다봐요. 우리를.” “난 전혀 상관없는데. 신경 쓰이나?” “아니, 전 괜찮지만, 약혼녀 분이 아시면.” (8쪽)
- ‘우와! 나, 마스미 씨랑 춤을 추고 있어! 이렇게 가볍게 나는 듯이! 처음인데! 믿어지지가 않아! 꿈만 같아!’ (23쪽)
- ‘뭐지? 난 지금 마스미 씨랑 즐겁게 얘길하고 있어. 이렇게 자연스럽게. 전엔 그토록 미운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곁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 그저 기쁠 뿐!’ (46쪽)



 내 마음은 내 고향인 인천을 비롯해, 서울이든 충청도이든 부산이든 어디이든, 크고작은 모든 도시하고 멀찍이 떨어진 시골마을에서 살아가고픕니다. 고향 인천에서 살아가며 골목마실을 날마다 몇 시간씩 아이를 안고 업고 하며 할 때에도, 이 아름다운 골목이웃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는 기쁨보다 시골마을에서 조용히 살붙이들과 살아가는 나날을 꿈꾸었습니다. 다만, 어떤 모습 어떤 그림이 될 때에 아름다울까 하는 대목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내가 도시로 찾아가기에 빠듯하고, 도시에서 우리한테 찾아오기 벅찬 외진 시골에서 사랑스레 살아가면 참 즐겁겠다고 여겼습니다.

 크고작은 도시에서, 또 내 어버이 살아가는 충청북도 음성에서 바라보자면, 전라남도 고흥은 참 멉니다. 그러나, 고흥군 테두리에서 헤아리자면, 이곳 사람은 이곳 삶자락 결과 무늬대로 예쁘며 아름답습니다.

 나는 아직 스스로 흙을 일구거나 돌보거나 사랑하면서 밥·옷·집을 마련하는 삶을 붙잡지 못합니다. 흙일을 옳게 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할 텐데, 이보다는 흙을 어떻게 만지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껴안을까 하는 삶그림을 제대로 그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느껴요.

 내 삶을 먼저 예쁘게 그려야 합니다. 흙에 터 내리려는 우리 집을 어떻게 꾸미고, 어떻게 다스리며, 어떻게 돌보면서 네 식구 오순도순 지내야 좋을까 하는 그림부터 찬찬히 그려야 해요.


- “(1천만 엔짜리 수표를 찢으면서) 이게 내 마음이야. 그녀(약혼녀)에겐 내가 직접 전해 주지. 뒷일은 신경 쓰지 마.” (13쪽)
-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 그 말은…….’ (84쪽)
- ‘이제 곧 꿈같은 시간이 끝난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그것만으로도 충만해지는 느낌이니까.’ (100쪽)


 날마다 아이들 사진을 쉰 장이나 예순 장 남짓 찍습니다. 날마다 새롭고, 언제나 싱그럽구나 싶어, 이 아이들 사진을 날마다 쉬지 않고 찍습니다. 나는 사진을 찍고 글을 씁니다. 누군가 내 곁에서 내 모습을 사진으로 담거나 내 삶을 글로 싣지 않아요. 나는 시골살이를 내가 느끼거나 받아들이는 대로 사진과 글로 옮긴다 할 텐데, 내 살붙이가 이 시골살이를 내 살붙이대로 느끼거나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옮긴다면 어떻게 될까 살짝 궁금하면서 여러모로 떨립니다. 내 눈길만으로는 막상 내 삶길조차 슬기로이 여미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모자람과 못남이, 내 살붙이 눈길로 바라볼 때에 훤히 드러나겠구나 싶어 부끄럽고 낯이 벌개집니다.

 만화책 《유리가면》(대원씨아이,2011) 47권을 읽습니다. 47권째에 이르러 마사미 씨는 당신 마음을 더는 숨기지 못하겠다고 털어놓습니다. 47권째에 이르러 마야 또한 제 마음을 꾸밈없이 밝힙니다. 이제껏 빙빙 맴돌거나 겉돌면서 ‘껍데기·이름·돈·힘줄·얼굴·나이·신분’ 들에 얽매였으나, 47권에서는 가까스로 이러한 굴레가 얼마나 덧없는가를 드러냅니다.

 곧, 마사미 씨는 삶을 일구는 보람이 무엇인가를 온마음으로 깨닫는 새날을 맞이합니다. 마야는 삶을 아끼는 빛이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느끼는 새날을 맞이합니다. 사업을 벌여 회사를 꾸리는 일이든, 연극을 하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펼치는 일이든, 집에서 살림하는 일이든, 가게에서 장사하는 일이든,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서 밑바탕이 되면서 든든한 뿌리가 되는 대목이 무엇인가를 두 사람은 비로소 알아차립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일 텐데, 시오리 씨나 아유미는 사람이 살아가는 밑바탕을 깨닫거나 느끼지 못합니다. 두 사람은 무엇 하나를 거머쥐려는 뜻은 있으나, 무엇 하나를 거머쥐어서 당신 삶이 얼마나 즐겁거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헤아리지 못해요. 아니, 생각하지 못합니다. 시오리 씨가 마사미 씨와 혼인한대서 즐거운 나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아유미가 홍천녀 배역을 따낸다 해서 즐거운 나날을 누릴 수 있는가요.

 사랑이 없는 혼인은 죽음입니다. 사랑이 없는 연극은 빈틈없는 재주놀음입니다. 사랑이 없는 혼인으로는 사랑을 낳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이 빈틈없는 재주놀음을 선보이는 연극으로는 사랑을 들려주지 못합니다.


- “맙소사! 하늘이 온통 장밋빛이야! 그쵸? 이렇게 아름다운 일출은 태어나 처음 봐요! 크고 힘차고 아름다운 태양이 서서히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어요. 다행이다! 마스미 씨도 볼 수 있어서!” (50쪽)
- “사쿠라코지. 저 아일 연습장까지 무사히 좀 데려다 줘.” “예? 아, 네!” “너흰 아주 소중한 배우야. 시연이 얼마 안 남았으니 모쪼록 운전 조심하고.” (117쪽)



 홍천녀를 연극하는 일이란 더 놀랍고 더 빼어나며 더 돋보이는 주인공이 되는 길하고는 동떨어집니다. 더 예뻐야 배역을 얻지 않습니다. 연기를 더 잘해야 주인공이 되지 않아요. 홍천녀가 살아가는 터에서 무엇을 사랑하면서 아끼는 나날인가를 깨달아야 비로소 홍천녀를 연기할 수 있습니다. 홍천녀와 마주하는 아츠신 또한 이와 마찬가지예요. 돈이 많아야 아츠신이 아니에요. 얼굴이 잘생기거나 어떤 재주가 대단해야 아츠신이지 않아요. 아츠신과 홍천녀는 ‘처음부터 한몸 한마음’이던 두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한몸 한마음이던 사랑이란 아츠신이요 홍천녀이면서, 바로 여느 삶터에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넋이에요.

 마야는 어릴 적부터 마야네 어머님을 비롯해 마야네 동무한테서 따사로이 사랑받았고, 마야도 따사로이 사랑을 나누는 길을 걷습니다. 아유미는 어릴 적부터 아유미네 어버이를 비롯해 마유미네 극단 사람들한테서 따사로이 사랑받은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아유미 스스로도 사랑을 나누는 길하고는 멀찍이 떨어집니다.

 마야는 사랑이 감도는 사랑빛을 내뿜습니다. 아유미는 빈틈이 보이지 않는 놀라운 바람을 일으킵니다. 아마 적잖은 사람들은 사랑빛을 못 느끼고, 놀라운 바람에 휩쓸릴는지 몰라요. 사랑을 담은 노래보다는 놀랍게 부르는 노래에 더 이끌리는 사람이 많기도 하듯, 사랑을 담은 조그맣고 조촐한 일자리보다 돈을 더 주는 일자리에 이끌리는 사람이 많기도 하듯, 어쩌면 홍천녀 배역은 마야 아닌 아유미한테 갈는지 모릅니다.


- ‘아아, 이제 더는 안 돼! 완벽하게 졌다! 이 이상 내 마음을 속일 수가 없어!’ (74∼75쪽)
- ‘해내라, 사쿠라코지! 몸도 마음도 온통 상처투성이인 이츠신을! 네가 이제부터 만들어 낼 이츠신은, 어쩌면 천하의 아카메 케이를 넘을 수 있을지도 몰라!’ (171쪽)



 미야는 홍천녀를 연기할 수 있어도 기쁘지만, 홍천녀를 연기할 수 없어도 기쁠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야한테는 홍천녀가 처음이자 끝이 아닙니다. 마야한테는 날마다 새날입니다. 마야는 홍천녀를 연기할 수 있으면, 나중에는 홍천녀와 새롭게 어깨를 견주거나 홍천녀에서 새로 거듭나는 또다른 연극을 선보이는 길을 걸으리라 봅니다. 홍천녀에서 누리는 사랑과 홍천녀에서 누리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나날을 새롭게 느끼거나 깨닫는 사랑을 싣는 또다른 연극이 태어나도록 이끌 수 있어요.

 아유미는 홍천녀를 연기하면 더는 연기할 길이 없습니다. 막다른 길에서 꼭대기까지 오른들, 더 오를 꼭대기가 없다 한다면 무슨 힘과 무슨 꿈과 무슨 보람과 무슨 땀으로 연기를 할 수 있으려나요.

 삶을 이루는 어여쁜 빛을 보아야 합니다. 삶을 일구는 아름다운 빛을 누려야 합니다. (4344.11.27.해.ㅎㄲㅅㄱ)


― 유리가면 47 (미우치 스즈에 글·그림,서수진 옮김,대원씨아이 펴냄,2011.12.15./4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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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11-27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아아아아아! 유리가면!
유리가면은 멋지군요. 여전히.

파란놀 2011-11-28 06:44   좋아요 0 | URL
좀 길게 늘어뜨려서
적잖은 분들이 따분하다고 느끼는데,
머잖아 마무리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아마 52권이나 54권으로 끝맺고
외전을 서너 권쯤 그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

분꽃 2011-11-28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는 50권쯤으로 마무리하지 않을까 했는데...
종규님 글을 보니 아직 더 기다려야...==;;;;;

파란놀 2011-11-28 15:25   좋아요 0 | URL
어쩌면 49권으로 끝낼 수도 있겠지요 @.@
그나저나 60권까지 갈는지도 몰라요 @.@
어쩌면 더 더...
 



 다시 사는 책


 만화책 《여자의 식탁》 7권째를 사서 읽었다. 7권을 펼쳐 읽다가 ‘6권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헷갈려 그만 6권은 나중에 사기로 했는데, 그냥 사야 했는걸’ 하고 느낀다. 《여자의 식탁》 6권이 나올 무렵 우리 시골살림을 새터로 옮기려고 부산히 떠도느라 새로 나온 만화책이 무엇인지를 헤아릴 길이 없었다. 그러니, 이무렵 나온 《여자의 식탁》 6권을 샀는지 안 샀는지 떠오르지 않고, 아직 풀지 못한 책짐에 갇힌 만화책들을 언제 풀어 살필는지 또한 모르니, ‘틀림없이 안 봤구나’ 싶은 7권만 먼저 사서 읽었다.

 만화책 《여자의 식탁》은 1권만 읽든 5권만 읽든 7권만 읽든, 이야기가 서로 얽히거나 이어지기도 하지만, 따로따로 홀로서기를 하기에, 차례대로 읽거나 거꾸로 읽거나 괜찮다.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이 이야기를 먼저 읽든 저 이야기를 먼저 읽든 즐겁다.

 늦은 밤 아이들 잠든 다음 조용히 읽고 덮은 《여자의 식탁》 7권 빈자리 한쪽에 몇 마디 끄적인다. “겹칠 듯하면 좋은 이웃한테 선물해도 되지요.” 그렇다. 깜빡 잊고 다시 산 책은 내가 좋아하는 책인 만큼, 내가 좋아하는 이웃이나 동무한테 두꺼운종이로 예쁘게 싸서 슬그머니 선물로 부치면 된다. (4344.11.26.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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