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 모든 책은 새책

 


 첫째 아이와 살아온 다섯 해 동안 나와 옆지기는 둘이 어린 나날 보았던 만화영화를 참 많이 되풀이해서 보았다. 서로한테는 어린 나날 보던 만화영화라 할 테지만, 첫째 아이로서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만화영화였으니. 젤소미나와 참파노가 나오는 〈라 스트라다〉 영화를 볼 때에도 아이한테는 새로운 영화일 뿐이다. 이 영화가 1950년대에 찍었던가, 무척 오래된 영화라 나와 옆지기가 태어나기 앞서 나온 영화이니 ‘옛 영화’라 여길 만하지만, 우리 아이한테는 아주 새로운 영화일 뿐이다. 그러니까, 〈아바타〉이든 〈천하장사 마돈나〉이든 아이한테는 늘 새로운 영화이다. 그리고, 아이한테뿐 아니라 어른인 나한테도 새로 볼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새 영화이다.

 

 오늘 내가 읽는 글책을 우리 아이가 스스로 읽자면 대여섯 해는 더 있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내가 즐겨읽는 어린이책이라면 우리 아이가 서너 해 뒤에도 읽을는지 모른다만, 어른쯤 되어서야 읽을 만한 글씨 깨알같고 부피 두툼한 책이라면 열 해쯤 뒤에야 읽을 수 있다 할 테지. 열 해쯤 뒤, 나로서는 마흔을 훌쩍 넘고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돌아볼 ‘내가 젊거나 어린 나날 읽던 책’은 나한테는 ‘참으로 익숙하고 길들었으며 잘 알 만하다’ 여길 수 있는 책이리라. 그런데, 이 책들은 우리 아이한테 언제나 새로운 책이며 새삼스러운 책이고 놀라운 책이다.

 

 가만히 돌아보면, 내가 처음 책을 가까이하면서 헌책방을 사귀던 때, 나한테 모든 책은 새책이었다. 나는 《모든 책은 헌책이다》라는 이름을 붙인 책을 2004년에 내놓기도 했지만, 이 책을 내놓던 내 마음은 “모든 책은 똑같은 책”인데 사람들이 이 마음을 왜 이렇게 못 읽는가 싶어 참으로 슬픈 나머지, 이렇게 책이름을 붙였다. 내 마음으로는 “모든 책은 책이다”라고만 하고 싶었다.

 

 헌책방에서 만나던 책이든, 도서관에서 만나던 책이든, 새책방에서 만나는 책이든, 나한테 모든 책은 늘 새책이었고, 그저 책이었다. 또한, 다 읽고 덮으면 모든 책은 고스란히 헌책이 되었다. 헌책이 되었다는 책을 다시 들추어 읽으면 새삼스레 새책이 되었고, 새책이 된 책을 두어 차례 되읽고 또 덮으면 다시 헌책이 되지만, 이 책을 다시 들추고 보면 거듭거듭 새책이 되었다.

 

 온누리 모든 책은 새책이다. 늘 새 이야기를 베풀기 때문이다. 온누리 모든 책은 헌책이다. 언제나 내 삶이 묻어나는 이야기밭이기 때문이다. 온누리 모든 책은 책이다. 내 사랑과 내 꿈을 고이 담는 슬기롭고 따사로운 길동무이기 때문이다. (4345.3.12.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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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가운 상말
 596 : 수구초심


옛말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하여 여우도 죽는 순간에는 고향을 향해 죽는다 했던가. 하물며 사람인데 오죽할까
《김재영-내 눈물에 당신이 흐릅니다》(한얼미디어,2005) 71쪽

 

  “죽는 순간(瞬間)에는”은 “죽는 때에는”이나 “죽을 때에는”으로 손보고, “고향을 향(向)해”는 “고향 쪽으로”나 “고향을 바라보며”나 “태어난 곳을 바라보며”로 손봅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은 “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둔다는 뜻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여우를 빗대어 사람 삶을 나타내는 셈이군요. 그런데, 이 한자말은 ‘한겨레 옛이야기’일까요, ‘중국겨레 옛이야기’일까요. 보기글처럼 ‘옛말’이라고 밝히며 적을 만한 낱말인지 궁금합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한겨레 옛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겨레 옛이야기를 빌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옛이야기가 되든 일본 옛이야기가 되든 홀가분하게 말할 수 있어요.


  이 자리에서 꺼낸 ‘옛말’이란, 아무래도 ‘한겨레 옛이야기’란 뜻보다는 ‘고사성어’라는 뜻에서 꺼낸 옛말일 텐데, 꼬치꼬치 안 따져도 되리라 봅니다. 그러나, 보기글을 찬찬히 살피면, “여우도 죽는 순간에는 고향을 향해 죽는다” 하고 길게 적어요. 앞쪽에는 ‘수구초심’이라는 중국 옛말을 한자까지 밝히며 적지만, 이렇게 적어서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으니 뜻풀이를 낱낱이 밝혀요.

 

 옛말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하여 여우도 죽는 순간에는
→ 옛말에 여우도 죽을 때에는
 …

 

  처음부터 중국 옛말이든 한자로 적는 ‘首丘初心’이든 안 적을 때에 가장 알맞으리라 생각합니다. 손쉽게 읽으며 새길 수 있도록 글을 쓰면 더없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중국 옛말이든 그리스 옛말이든, 들고 싶으면 들되, “옛말에 여우도 죽을 때에는 고향을 바라보며 죽는다 했던가”처럼 이야기하면 넉넉하리라 생각합니다.

 

 여우마음
 여우 고개돌리기
 여우 고개 바라기

 

  생각을 더 기울인다면, 한겨레는 한겨레답게 새말 하나 빚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 여우 한 마리 살아남을 수 없지만, 여우가 보여주는 모습은 중국이든 한국이든 일본이든 서로 같았겠지요. 그래서, 한국땅에서는 한국땅 나름대로 새 이야기 담는 새말을 빚을 수 있으면 즐겁습니다. (4345.3.12.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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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다섯 인생 - 나만 좋으면 그만이지!
홍윤(물만두) 지음 / 바다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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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삶으로 좋은 이야기 피우는 좋은 책
 [책읽기 삶읽기 100] 물만두 홍윤, 《별 다섯 인생》(바다출판사,2011)

 


  스스로 짓고 싶은 삶을 지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키우는 덧없는 생각은 삶으로 짓지 못합니다. 가장 고우며 가장 빛나며 가장 착한 생각은 언제나 삶으로 지을 수 있습니다. 어리숙하거나 어리석거나 어설픈 생각은 삶으로 짓지 못합니다.


  좋은 삶이란 따로 없다고 느낍니다. 내가 좋아하는 삶은 있으나, 좋으니 나쁘니 하고 가를 만한 삶은 딱히 없다고 느낍니다. 나 스스로 좋아하기에 내가 바라는 길로 꾸리는 삶이 있어요. 나 스스로 사랑하기에 내 온마음을 기울여 보살피는 삶이 있어요. 나 스스로 좋아하지 않는 나머지 아무렇게나 내팽개치는 삶이 있어요. 나 스스로 사랑하지 못하기에 이냥저냥 흘리고 마는 삶이 있어요.


  삶을 가꾸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삶을 가꾸는 글쓰기’라는 말이 있는데, 스스로 제 삶을 좋아할 때에 글을 쓸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으며,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속뜻을 담아요. 삶을 담는 글이기에 앞서, 삶을 좋아할 때에 글을 쓰는 나날이 돼요. 글은 삶을 드러낸다고 말하기 앞서, 글을 쓰려면 스스로 제 삶을 사랑하며 아낄 수 있어야 해요.


.. 10억으로 무얼 하겠는가. 10억을 번 다음에도 행복하지 않다면 말이다 … 낙오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게 어쩌면 누군가의 등을 밟고 올라서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 내가 남긴 날들보다 나를 기다리는 날들이여, 내가 너희를 더 기쁘게 맞이하마. 이제야 그걸 알다니. 나이 든다는 건 좋은 거란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  (14, 33, 217쪽)


  좋아할 수 있는 매무새라면 누구나 내 삶을 글로 담습니다. 좋아할 수 있고 아낄 수 있을 때에는 누구나 내 삶을 글로 차곡차곡 담으며 갈무리해요. 그러나, 좋아할 수 있는 자리를 넘어, 사랑하며 빛내려 한다면 한결 거듭나야 합니다. 이렇게 나 스스로 좋아할 만한 삶을 어떻게 일구고 싶은가 하고 꿈꾸어야 해요. 나 스스로 좋아하며 누릴 삶을 어떻게 짓고 싶은지 생각해야 해요.


  도토리 예배당 종기기 아저씨로 살아가며 할아버지가 된 권정생 님은 언제나 당신 마음밭에 씨앗을 심었어요. 그림책으로도 나오고 만화영화로도 나온 《강아지똥》은 다른 누구도 아닌 권정생 님 스스로를 사랑하며 빚은 글이에요. 이리 구르고 저리 뒹굴며 쓸모없다고 버려진 당신 몸뚱이라 하지만, 이 당신 몸뚱이를 어떻게 아끼고 사랑하며 좋아해야 할까를 생각하고 꿈꾸며 ‘강아지똥’ 하나를 빚었어요. 이 강아지똥이 밑거름이 되어 동시를 쓰고 동화를 쓰며 수필을 썼어요.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을 쓰고 《몽실 언니》를 쓰며 《우리들의 하느님》을 썼어요. 권정생 님 책을 읽는 사람은 많아도 권정생 님 사랑이 무엇인가 하고 함께 읽는 사람은 퍽 드문데, 스스로 가장 사랑하고 싶은 삶을 생각하며 누린 나날이 고스란히 깃든 글줄이라고 읽을 때에 내 마음밭에도 내 손으로 씨앗 하나 심을 수 있어요.


  내가 심을 내 마음밭 씨앗 하나는 내 삶을 가장 예쁘게 빛낼 씨앗 한 알입니다. 때로는 두 알이 될 수 있고, 어쩌면 석 알이나 넉 알이 될 수 있어요. 한 알은 내 삶을 북돋우고 한 알은 들꽃을 빛내며 한 알은 들새를 살찌울 씨앗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석 알 모두 내 배를 불리는 쪽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어떻게 하든 좋아요. 맨 처음부터 가장 사랑스레 빛날 수 있고, 차츰차츰 고운 빛을 찾을 수 있으며, 느즈막하게 아리따이 빛나는 햇살을 나눌 수 있어요.


.. 안락사에 찬성한다. 아파 보지 않은 사람, 아픈 사람을 돌봐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 장애인을 배려한다고 하더니만 우리 구역 투표소는 계단이 많은 교회였다. 휠체어를 들고 가나, 업고 가나, 장애인은 사람도 아닌가. 장애인이 투표하는 곳에서는 비장애인도 투표할 수 있다. 장애인만 불편할까? 임산부, 노약자 모두 불편하다. 왜 모르는 걸까? … 다른 것보다 장애아 어머니의 마음만 갖는다면, 다리에 점점 힘이 빠져 가는 부모님 생각을 조금만 한다면 이건 분명 고치기 쉬운 일이다. 왜 모든 관공서와 은행 같은 편의 시설에 계단이 있는지 ..  (19, 26∼28쪽)


  날마다 얼마나 괴롭고 힘든 삶자락인가 하는 이야기가 아주 짙게 드러나는 글을 쓴 미우라 아야코 님이 있어요. 한창 눈부시게 빛난다는 아가씨 나이에 그만 드러눕고 말아 일곱 해를 내리 침대살이만 했다던가요. 이제 죽나 저제 죽나 하고 기다려야 하던 눈부신 젊음이었다고 하는데, 당신을 침대에서 일으켜 꽤 기나긴 해를 살아가며 옆지기를 만나고 책을 내놓으며 문학을 일구고 편지를 쓰도록 이끈 힘은 병의원 처방이나 수많은 약품이 아니라고 했어요. 아픈 몸이건 안 아픈 몸이건, 당신이 이 땅에 태어나 이렇게 숨을 쉬고 햇살을 먹으며 바람을 느낄 수 있는 하루란, 얼마나 대단히 고마운 선물이며 아름다운 삶인가 하고 느끼며, 마음속으로 깊이 사랑하고 꿈꾸었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다만, 미우라 아야코 님은 침대에서 일어나 걷고 밥먹으며 여행까지 다닐 수 있었다 하더라도, 이렇게 움직이고 나면 며칠을 드러누우며 쉬어야 했답니다. 이레나 보름을 내리 쉬며 몸을 달래는 일이 잦았다고 해요. 아픈 몸으로 수필을 쓰고 소설을 씁니다. 아픈 몸으로 사랑을 노래하고 믿음을 꿈꿉니다.


  문득 돌아보면, 미우라 아야코 님은 당신 몸이 씻은 듯이 낫기까지는 바라지 않았구나 싶어요. 아픈 몸이든 튼튼한 몸이든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 여겼으니까요. 아픈 몸이기 때문에 당신 몸을 더 사랑할 수 있다고 깨달았으니까요. 아픈 몸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렇게 아픈 동안 당신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를 더 사랑스레 헤아리며 어깨동무하는 길을 보았다고 하니까요.


  누구라도 몸이 아파 드러누워야 한다면 괴롭겠지요. 나도 몸이 아파 집일을 못하며 꼼짝없이 끙끙 앓아야 하면 괴롭고 힘듭니다. 누가 이 집일을 맡아서 하나 걱정스럽고, 아픈 몸을 쉰다며 드러눕는 일이 안 아픈 몸으로 온갖 집일을 맡아서 할 때보다 훨씬 짐스러우며 무겁다고 느껴요. 그런데, 이렇게 무겁고 짐스러우면서, 어느 한편으로는 몹시 홀가분하고 기뻐요. 내 곁에 좋은 사람이 있어 나를 보살펴 주고, 집일이나 집살림을 거느리니까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제 몫과 길과 삶을 예쁘게 건사하니까요.


  줄 수 있는 사랑은 참 좋은 사랑입니다. 받을 수 있는 사랑 또한 참 좋은 사랑입니다. 돈이 많아 돈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도 좋은 사랑이요, 돈이 없어 돈을 나누어 받을 수 있는 사람도 좋은 사랑이에요. 가난한 살림이란 얼마나 좋은 사랑인가요. 가멸차서 돈을 나누어 주고 싶은 사람이 기꺼이 돈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좋은 빛줄기이거든요. 가난한 살림인 탓에 둘레에서 돈이나 여러 가지를 기쁘게 얻는다면, 받으면서 사랑스럽고, 나한테 주는 사람도 사랑스러운 아름다움을 느낄 테니, 서로 즐거운 나날이 되리라 생각해요.


.. 내가 만든 서재는 내 얼굴이다. 내 얼굴에 남의 눈과 코를 붙일 수는 없는 일이다 … 우리 나라의 장애인 문제는 가정에서부터 생긴다. 장애인 자식을 귀하게 여기면 사회 또한 그들을 귀하게 여길 것이다 … 이사 오면서 옛날 집 사진을 제대로 찍어 놓지 못한 게 제일 안타까웠다. 철문이 나무문으로 바뀔 때도 못 찍고, 장독대도, 펌프가 있던 수돗가도, 아궁이도, 쪽마루도 못 찍었다 … 그동안 안 읽은 책이 얼마나 많을까. 그 많은 책 중에 얼마나 많은 보석이 숨어 있을까. 그 보석을 알아보지 못하고 빛내지 못한 것이 가슴에 박혀 아프다. 정말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싶다. 좋은 독자가 아니어서 죄송하다고. 그래도 제발 책을 쓰시라고 말씀드리면 너무 뻔뻔할까? ..  (25, 195, 226, 321쪽)


  창호종이 문살로 아침햇살을 느낍니다. 저 멀리 멧등성이 너머로 새벽마다 보얀 빛이 서립니다. 창호종이 바른 문을 안 열면 희뿌윰히 밝다가는 노랗게 되는 결을 살짝 느끼고, 이내 온 방이 환해지는 빛을 느껴요. 창호종이 바른 문을 열고 대청마루에 앉아 저 먼 멧등성이를 바라보면, 새까만 밤하늘이 보라빛으로 물들다가는 노르스름한 빛깔로 바뀝니다. 이내 발그스름해지다가는 새하얀 빛으로 젖어들고, 시나브로 파아란 하늘이 됩니다. 밤하늘에서는 똑같이 시커멓게만 보이던 구름이 하얀 솜빛이 되는 모양새를 느낍니다.


  밤이 있어 아침이 있습니다. 달이 있어 해가 있습니다. 풀싹이 있어 풀꽃이 있습니다. 열매가 있어 씨가 있습니다. 사내와 가시내는 서로 좋은 짝꿍입니다. 왼손과 오른손은 서로 예쁘게 어울립니다. 아이와 어른은 서로서로 사랑스러운 님입니다. 추운 겨울을 지나 따사로이 누리는 봄입니다. 후끈후끈 달아오른 여름을 지나 시원한 산들바람 보드라이 누리는 가을입니다.


  하루하루 기쁜 꿈입니다. 언제나 좋은 이야기밭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사랑입니다. 늘 빛나는 이야기꾸러미입니다. 모든 삶은 어여삐 책입니다.


.. 책 사는 돈은 아깝지 않은데, 나 혼자만 보는 게 아까울 때가 있다 …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제목도, 주인공도, 줄거리도 기억 못하게 될지언정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 냄새, 내 기억의 편린 한 조각만 남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내가 책을 통해 얻으려는 것은 어떤 지식도 지혜도 경험도 아닌 나 자신과의 소통, 내 과거와의 만남이다 … 내가 바라는 건 좋은 작품뿐이다 … 책만으로도 좋았던 그때, 아무것도 바라지 않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니까 ..  (44, 46, 265, 273쪽)


  물만두 홍윤 님이 쓴 글을 갈무리해 엮은 《별 다섯 인생》(바다출판사,2011)을 읽습니다. 아픈 몸으로 살아낸 마지막 발자국을 담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문득, 홍윤 님이 아프지 않은 몸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할 때에도 이렇게 글을 썼을까 궁금합니다. 아프지 않은 몸으로 글을 썼다면 어떠한 결로 어떠한 꽃을 피우는 삶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아픈 몸이요 아픈 삶이기에 마지막에 ‘안락사’로 느긋하게 쉬도록 해 줄 수 있는 일을 나쁘게 볼 수 없다는 글줄을 읽다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걷는 길’을 받아들여야겠지만, 나는 ‘안락사’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습니다. 나는 꿈을 꾸는 얼굴로 조용히 잠들어 숨을 거둘 생각이거든요. 내 곁 아픈 사람이 아파 괴롭다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힘들지 않습니다. 내가 아파 괴로울 때에 내 곁에 있는 사람이 힘들어 한다고 느끼지 않아요. 아플수록 하루하루가 더 고맙습니다. 힘들수록 한 시간 한 분 한 초가 더 애틋합니다.


  괴로운 몸이 되는 까닭은 하루라도 더 살고 싶기 때문이에요. 괴롭게 몸부림치는 까닭은 한 분 한 초라도 더 버티고 싶기 때문이에요. 나는 살 만큼 살고서 조용히 삶을 놓고 싶어요. 삶과 다른 누리로 새롭게 이어가고 싶어요. 내 곁 좋은 사람들을 오래오래 바라보며 마음으로 담고 싶어요. 아이들 똥오줌기저귀 빨래하는 일이란 수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종이기저귀를 쓸 수 없어요. 날마다 내 두 손과 몸뚱이는 아이들 똥오줌 냄새 짙게 배요. 첫째하고 네 해를 똥오줌 냄새를 맡았고, 둘째하고 앞으로 세 해 더 똥오줌 냄새를 맡겠지요.


  좋은 삶을 좋은 사랑으로 빛내고 싶어요.


.. 다른 건 다 지나쳐도 아버지 생신만은 챙겨야 한다. 왜냐하면 울 아버지가 삐지면 무섭기 때문이다 … 아침부터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던 엄마는 활짝 핀 꽃이 눈에 띄어 집에만 있는 내게 보여준다며 사진을 잔뜩 찍어 오셨다 … 내가 안 봐도 감나무에는 감이 열린다 ..  (78, 184, 264쪽)


  수필책이라 할 《별 다섯 인생》을 가만히 덮으며 생각합니다. 홍윤 님은 어떤 꿈을 꾸며 살았을까 하고 가만히 생각합니다. 아마, 대단하다 싶은, 또는 거룩하다 싶은, 아니면 놀랍다 싶은 꿈을 꾸었을까 안 꾸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바라보는 눈길에 따라 다를 테지만, 삐지는 아버지를 생각하는 삶은 ‘보잘것없’거나 ‘수수하’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삐짐쟁이 아버지를 생각하는 삶이 참 대단하고 거룩하며 놀랍다고 느껴요. 아침에 쓰레기 버리러 나간 어머니가 꽃 사진 찍어 오는 모습을 생각하는 삶은 ‘하찮’거나 ‘흔하’다 여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꽃송이 어머니를 생각하는 삶이 참 예쁘고 사랑스러우며 믿음직하다고 느껴요.


  홍윤 님이 애써 들여다보지 않아도 감나무에는 감꽃이 피고 감잎이 흐드러지며 감열매가 맺습니다. 홍윤 님이 모르는 봄꽃이 온 들판과 멧자락에 가득합니다. 홍윤 님이 굳이 봄들을 누비며 냉이와 달래와 쑥과 씀바귀를 캐거나 뜯지 않더라도, 훙윤 님 어머님이 저잣거리에서 소담스레 장만해서 소담스레 된장국 끓여 내놓을 수 있어요.


  좋은 삶이고, 좋은 사랑이며, 좋은 글입니다. 좋은 사람이며, 좋은 이야기이고, 좋은 책입니다. (4345.3.12.달.ㅎㄲㅅㄱ)


― 별 다섯 인생 (물만두 홍윤 글,바다출판사 펴냄,2011.12.13./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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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래하는 사진

 


  두 아이를 씻기고 빨래를 하다가 문득 생각한다. 빨래나 밥하기나 청소처럼, 집에서 날마다 으레 자주 하는 일거리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고 생각한다. 마침 첫째 아이가 통에 들어가 물놀이를 하기에 얼른 사진기를 가져온다. 이틀이나 사흘에 한 차례 이렇게 씻기면서도 막상 아이 사진을 찍자고 생각하지 못하기 일쑤였다. 하루 내내 아이랑 복닥이며 아이들 온갖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서, 왜 아이들 씻길 때에는 사진을 찍자고 생각하지 못할까. 아무래도 후다닥 씻기고 재빨리 빨래를 마쳐야 다른 집일을 더 일찍 끝낼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사진으로 찍자면 가장 쉽게 가장 흔히 찍을 만한 집일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막상 ‘사진쟁이가 가장 안 찍는’ 모습이 바로 집안일 하는 삶. 저마다 집에서 날마다 으레 하는 일을 사진으로 담아서 나눈다면 얼마나 재미날까. 다 다른 살림새와 다 다른 이야기를 꽃피우며 얼마나 앙증맞고 놀라울까.


  이른바 ‘생활사진’이니 ‘다큐멘터리’이니 하는 이름을 붙이는 사진을 들여다보아도, 빨래하는 삶이나 밥하는 삶이나 밥먹는 삶이나 설거지하는 삶이나 아이들이랑 노닥거리는 어버이 삶이나, 이런저런 흔하고 수수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는 일이 아주 드물다. 골목길 마실을 하며 사진을 찍는다는 사람들조차, 골목집 빨래줄마저 사진으로 그닥 안 찍기 일쑤이니, 이 나라에서는 아무 할 말이 없는 셈일까. (4345.3.12.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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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는 손

 


  바야흐로 따뜻한 날을 맞이하니, 여러모로 할 일이 많다. 그러고 보면, 어느 시골집이나 겨울철에는 곰이나 다람쥐가 겨울잠을 자듯 웅크리며 느긋하게 쉬고, 들꽃 흐드러지는 새봄부터 차츰 바빠지기 마련이다. 언제나 맞아들일 집일은 날마다 같은 크기요, 우리한테 논은 없으나 뒤꼍 땅뙈기가 있어 밭으로 삼자면 일거리가 꽤 될 테고, 이제부터 도서관 책꽂이랑 책을 알뜰히 갈무리해야 한다. 첫째 아이는 아주 쉬잖고 뛰어놀아야 할 나이요, 둘째도 무럭무럭 자란다. 마음을 제대로 건사하지 않는다면 이 숱한 일을 치르지 못한다.

 

  봄맞이 빨래를 실컷 하느라 손가락 마디가 쩍쩍 갈리지며 트는가 하고 생각했다. 가만히 보니 빨래는 빨래대로 두툼한 겉옷을 많이 빨아야 하니 팔뚝이 저리기까지 하지만, 다른 일거리가 줄줄이 잇다는 만큼, 손가락이며 손바닥이며 손목이며 쉴 겨를이 없다. 글을 쓴다는 일이란, 어떤 삶을 꾸린다는 이야기가 될까. 밥을 마련하고 옷을 짓고 집을 돌보는 손으로 글까지 쓴다고 하는 일이란, 어떤 사랑을 펼치겠다는 이야기가 될까. 옆지기를 아끼고 아이들을 어루만지는 틈을 다시금 쪼개어 글을 쓴다고 하면, 어떤 꿈을 이루려는 나날이 될까.


  이제 시골마을 흙일꾼이라면 누구나 실장갑을 끼고 일한다.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실장갑을 끼지 않으면 손가락 마디마디 트고 갈라지며 쑤시지 않은 데가 없으리라. 헌책방 일꾼은 실장갑을 여럿 끼고, 실장갑 사이에 비닐장갑을 덧낀다. 하루 내내 쉴 짬이 없을 뿐더러 물을 자주 만져야 하는 일꾼들 손이란, 한결같이 숨을 들이마시는 염통처럼, 한결같이 핏망울 흐르는 핏줄처럼, 한결같이 움직이는 온몸 힘살처럼, 목숨 하나 받아 마지막 숨을 쉬고 고요히 흙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씩씩하고 튼튼하게 일하는 손이라 하겠지.


  문득 아이 손을 잡는다. 아이 손이 참 작다. 아직 어리니 손이 작을 테지. 하루하루 손이 커질 테고, 머잖아 아버지 손보다 커질 수 있겠지. 내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 손을 얼마나 잡아 주었을까 궁금하다. 나는 내 아이들과 옆지기 손을 얼마나 자주 오래 따사로이 잡는지 궁금하다. 서로서로 손마디와 손가락과 손바닥과 손등을 따사로이 느끼며 저녁나절 곱게 접으며 잠자리에 든다. (4345.3.12.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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