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빛과 그림자의 예술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18
캉탱 바작 지음, 송기형 옮김 / 시공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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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양에서 사진을 만들어 걸어온 길
 [찾아 읽는 사진책 82] 캉탱 바작, 《사진》(시공사,2004)

 


  사진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스스로 갈피를 잡지 못하면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야구를 하며 살아가는 이라 한다면, 스스로 야구가 무엇인가 하고 갈피를 잡지 않을 때에 흔들리거나 샛길로 빠집니다. 과학을 하든 문학을 하든, 예술을 하든 여느 공무원으로 일하든 늘 매한가지입니다. 시골 면사무소 일꾼으로 일할 때에는 시골사람다운 넋에 면사무소 일꾼다운 땀방울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늘 제 삶자리를 옳게 바라보며 사랑스레 보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라 할 때에는, 어버이다운 꿈과 사랑을 짓는 나날이어야 합니다. 이래저래 아이가 태어났으니 어버이가 되지 않습니다. 아이들과 살가이 꾸리는 좋은 살림을 빚을 때에 비로소 어버이라 할 만합니다. 나이를 먹기에 어른이 아니에요. 어른다이 살아갈 때에 바야흐로 어른입니다. 아이들 가운데 너무 이른 나이에 생채기를 많이 받거나 아픔이 잦은 나머지 ‘애늙은이’가 되는 슬픈 목숨이 있어요. 이 아이들은 스스로 얼마나 사랑스러운 나날이요 어린이다운 꿈인가를 생각하지 못해요. 그래서 겉으로는 아이들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까맣게 타들어 간 외로운 넋이에요.


  사진은 한국사람이 빚지 않았습니다. 사진은 한국사람이 누리지 않았습니다. 사진기는 한국사람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람처럼 거의 누구나 아무렇지 않게 마음껏 사진을 찍는 지구별 사람도 없으리라 느낍니다. 참말, 한국사람은 사진 없이는 죽을 사람 같습니다.


  필름이나 메모리카드를 쓰는 사진기 말고, 손전화로 찍는 사진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합니다. 어린이부터 할멈 할아범까지 사진을 찍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누구나 사진을 찍는다지만, 막상 ‘사진을 누가 만들었을까’라든지 ‘사진을 왜 만들었을까’라든지 ‘사진이 어떻게 이 나라로까지 흘러들어 널리 퍼졌을까’ 같은 대목을 헤아리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서양사람 캉탱 바작 님이 엮은 《사진》(시공사,2004)이라 하는 책을 읽습니다. 책이름은 더도 덜도 아닌 ‘사진’입니다. 오직 사진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따지고, 오로지 사진이 어떻게 흘러왔는가 하는 대목을 보여줍니다.


 “이 기념할 만한 회의가 있고 며칠이 지나자 벌써 “광학 기계 상점들은 다게레오타입 애호가들로 붐비게 되었다. 역사적 기념물과 각종 건물 및 조각품 들에 사진기를 들이대는 사람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누구나 자기 집 창가에서 보이는 전망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했다. 가장 형편없는 사진조차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낳을 정도로 이 기법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것이었고 당연히 경이롭게 받아들여졌다(24∼25쪽).” 하는 글을 읽습니다. 프랑스이든 영국이든 독일이든 어디이든, 유럽에서 처음 사진기계를 만들어 특허를 내놓을 무렵, 이들은 너나없이 온갖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건사하고 싶었다 합니다. 그러면 이무렵, 이른바 1800년대 끝무렵 즈음 한국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한겨레 사람들은 어떤 삶을 누리고, 어떤 넋을 빛내며, 어떤 나날을 보냈을까요.

  사진이 처음으로 한국땅에 들어올 무렵, 사진기를 쓰는 한국사람도 나타날 무렵, 여러모로 서양사람이 한국사람을 사진으로 찍을 무렵, 일본사람조차 사진기를 어깨에 걸치고 한국땅 골골샅샅 사진으로 담을 무렵, 한국사람은 이 사진을 어떻게 느끼거나 바라보았을까요.


  오늘날 한국사람은 1800년대 끝무렵과 1900년대 첫무렵에 서양과 일본에서 한국땅 골골샅샅 누비며 한겨레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듯, 아프리카나 중남미나 인도나 네팔이나 티벳이나 몽골이나 베트남이나 동남아시아나 여기저기로 찾아다니면서 온갖 모습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나라밖 가난한 사람들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며 가난을 얘기하고, 나라밖 해맑은 자연을 사진으로 찍으며 자연을 노래하며, 나라밖 여느 사람을 사진으로 옮기며 삶과 꿈과 사랑을 보여줍니다.


  “미국에서는 대개 이름없는 떠돌이 사진사들이 사진 제작의 많은 부분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37쪽).” 하는 글을 읽습니다. 해마다 모든 초·중·고등학교에다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까지 졸업사진책을 내놓습니다. 혼인사진이나 돌사진은 으레 사진첩 한 권으로 두툼하게 묶입니다. 졸업사진책이든 혼안사진책이든, 이러한 사진책에 사진쟁이 이름이 박히는 일은 없습니다. 갓 태어난 사랑스러운 아이를 찍는 어버이는 제 아이들 사진에 제 이름을 새기지 않습니다.


  “초기의 영국 칼로타입 사진가들은 사회학적으로 상당히 동질적인 부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교양을 갖춘 그들은 과학만이 아니라 예술에도 관심이 있었고, 돈과 시간이 충분하여 오락과 취미에 탐닉할 수 있었다(40쪽).” 하는 글을 읽습니다. 사진은 틀림없이 어떤 모습을 꾸밈없이 담는다 합니다. 사진은 참말 어떤 모습을 내가 바라보는 대로 옮긴다 합니다.


  그러면, 내가 바라보는 어떤 모습을 고스란히 옮기는 일은 어떤 값을 하나요. 사진기가 1/100초이든 1/1000초이든 시간을 잘라내어 어떤 모습을 간직할 수 있다 하는 일이란 어떤 뜻을 담나요.


  사진을 찍는 일이란 내 삶을 얼마나 사랑하는 일이 될까요. 사진으로 찍어 어느 모습 하나를 되새기는 일이란 내 삶을 얼마나 좋아하는 일이 되나요. 사진으로 찍힌 삶과 사진으로 안 찍힌 삶은 서로 얼마나 다를까요.


  “부유한 부르주아지를 겨냥한 초호화판 사진관들은 대도시의 중심가에 자리를 잡았다 … 로열층에 위치한 사진관은 대리석과 수정으로 치장되었다. 사진관에 들어서면 치과병원의 대기실보다는 응접실에 더 가까운 방이 손님을 맞이했다(59쪽).” 하는 글을 읽습니다. 사진책 《사진》을 읽는 내내, 돈이 없고 이름이 없으며 힘이 없는 사람들이 누렸음직한 사진 이야기는 한 줄로도 찾아내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들한테는 사진이 없고, 고단한 사람들한테는 사진이 멀며, 아프거나 슬프거나 힘든 사람들 둘레에는 사진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술을 하거나 신문기자 일을 하는 사람 가운데 몇몇이 뒷골목을 드나들며 사진 몇 장 찍곤 한다지만, 막상 뒷골목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는 사람 스스로 제 삶자리를 사진으로 옮기는 일은 아주 드뭅니다. 글을 쓰는 사람 가운데에는 뒷골목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옮기는 이가 더러 나타납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 가운데에도 제 어둡거나 슬프거나 힘겹던 지난 삶자락을 낱낱이 옮기는 이가 드문드문 나타납니다. 그런데, 삶이든 무엇이든 꾸밈없이 담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는 사진 갈래에서만큼은, 좀처럼 여느 자리 여느 삶 여느 이야기 여느 꿈 여느 사랑을 들려주는 사진쟁이를 만나기 어려워요.


  “남북전쟁이 끝난 후 대부분의 철도 회사들은 사진가들을 고용하여 그들에게 한창 진행중인 철로 건설 사업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기차가 통과하게 되면서 펼쳐지는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담도록 했다(79쪽).” 하는 글을 읽습니다. 참 옳구나 싶으면서 참 슬프네 하고 느낍니다. 무언가 먹고살 길을 찾자면, 돈이 있는 사람이 시키는 일거리를 얻어야 한답니다. 어찌저찌 살림을 꾸릴 길을 걷자면, 돈이 될 사진을 찍고, 돈을 거머쥔 사람한테 가까이 다가서야 한답니다. 그래, 그러면, 그렇다면, 참으로 이와 같다면, 내 좋은 보금자리에서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빚으면서 내 좋은 꿈과 사랑을 살가운 이야기로 빚는 사진길을 걸으면 될 노릇 아니랴 생각합니다. 사진으로 돈을 버는 삶이 아닌, 내 삶을 사랑하며 누리는 나날 그대로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면 그지없이 아름다운 모습 아니랴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진이란 고스란히 드러내는 빛살이요, 삶이란 고스란히 누리며 어깨동무하는 빛줄기일 테니까요.


  오늘날 한국땅에서 사진을 배우고 싶다 말하는 푸름이와 젊은이는 으레 서양 학문을 배우고 서양 문화흐름을 좇으며 서양으로 몸소 찾아가 사진학교를 다닙니다. 아무래도 사진이 태어나고 널리 퍼진 데는 서양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이기 때문이고 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좀 달리 느낍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꼭 에스파냐라든지 덴마크로 글배움을 하러 가야 할까 궁금합니다. 시를 쓰거나 동화를 쓰거나 희곡을 쓰는 사람이 애써 칠레나 스웨덴이나 독일로 글배움을 하러 떠나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림을 그리고픈 이가 네덜란드나 벨기에나 영국으로 그림배움을 하러 찾아가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내 곁 좋은 삶을 깨닫고 내 둘레 좋은 사람을 느끼며 내 자리 내 모습과 내 꿈과 내 사랑을 헤아리면서 사진길을 씩씩하게 걸어가면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나 스스로 내 자그마한 사진기 하나로 ‘내 새로운 사진길’을 열면서 ‘내 고운 꿈 실은 사진역사’를 이루면 어떠한 그림이 될까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특허가 될 수 없던 사진입니다. 처음부터 누구한테서 배우지 못하는 사진입니다. 고스란히 담는 사진이라는 빛깔이기 앞서, 내 눈길은 내 삶을 얼마나 고스란히 바라보며 고스란히 맞아들이고 고스란히 즐길 줄 아는가를 스스로 찾을 때에 사진이든 그림이든 글이든 노래이든 영화이든 춤이든 만화이든 시나브로 예쁘게 태어난다고 느낍니다. 서양사람은 서양나라에서 서양물결대로 사진을 이룹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땅에서 한국결대로 사진을 일굽니다. 도시사람은 도시사람대로, 시골사람은 시골사람대로,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누구나 제 삶을 사랑하는 결대로 사진을 보듬습니다. (4345.3.14.물.ㅎㄲㅅㄱ)


― 사진 (캉탱 바작 글,시공사 펴냄,2004.2.28./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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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글게 쓰는 우리 말
 (1560) 바닥살이

 

북망산에 간다 한들 바닥살이 아니드냐
《박영근-솔아 푸른 솔아》(강,2009) 25쪽


  바닥에서 살아가는 나날이기에 ‘바닥살이’입니다. 이른바 한자말로 하자면 ‘빈민생활(貧民生活)’쯤 될 테지요. 이보다 더 가난하게 살아가는 나날이라면 ‘밑바닥살이’가 될 테고, 그야말로 아무것 없이 쓸쓸하며 힘겨운 나날일 때에는 ‘맨바닥살이’가 됩니다.


  시를 쓰는 이들은 말을 빚습니다. 말로 꽃을 피우고, 말로 삶을 살찌웁니다.


  글을 쓰는 이들은 넋을 짓습니다. 글로 사랑을 나누고, 글로 믿음을 북돋웁니다. (4345.3.14.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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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드롭스 1
우니타 유미 지음, 양수현 옮김 / 애니북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오줌 싸 주니 이불 빨래
 [만화책 즐겨읽기 130] 우니타 유미, 《토끼 드롭스 (1)》

 


  첫째 아이랑 처음 함께 살던 나날을 떠올립니다. 첫째 아이는 이불에 참 자주 쉬를 누었습니다. 천기저귀를 대더라도 늘 대야 하니까, 오줌을 누고 나서 곧장 갈아 주더라도 고추가 발개지기 마련입니다. 이제 막 쉬를 누었으니 다문 10분이라도 알몸으로 있으라 하는데, 이렇게 열어 놓았을 때 어김없이 쉬를 누곤 했습니다. 밤에 자면서 쉬를 푸지게 누어 이불까지 흥건히 젖기 일쑤였습니다. 여름에 태어난 첫째는 겨우내 두꺼운 이불을 자주 빨도록 이끌었어요.


  둘째 아이는 첫째 아이와 달리 아직 이불에 쉬를 거의 안 합니다. 그러나 둘째도 첫째처럼 오줌가리기를 할 무렵에는 어김없이 이불에 쉬를 할 테지요. 돌이 지나면 낮에는 기저귀를 푼 채 지내도록 하고 쉬를 누일 텐데, 이때에 이불이며 방바닥이며 책꽂이이며 온갖 곳에 쉬를 할 테지요.


  아이들 똥오줌 때문에 이불을 빨아야 하면, 이제 아침부터 두 팔이 욱씬욱씬 저리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이불을 빨래하면서, 아이들아 너희들 얼른 자라서 너희 이불을 너희가 신나게 밟으며 빨아 주렴,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너희가 이불에 똥도 누고 오줌도 누니 이불을 자주 빨아 보송보송 포근히 덮고 잘 수 있겠지요. 아버지 몸은 고단하고 고달프며 고되지만, 아버지 어릴 적에도 이불에 얼마나 자주 똥오줌을 누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 어느 화창한 가을날, 나는 외할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휴가를 얻어 고향집에 내려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처음 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7∼8쪽)
- 말인즉슨 혼자 살던 방년 79세의 외할아버지가 가족들 몰래 첩을 두고 아이까지 만들었다는 것이다. 만약 아버지에게 첩이나 숨겨둔 자식이 있었다면 솔직히 나도 심란했겠지만, 글쎄, 뭐랄까, 외할아버지가 그랬다면 왠지 용서가 될 것 같은 마음이 든달까. 오히려 제법이시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11∼12쪽)


  돌을 앞둔 둘째 아이는 하루에 네 차례 안팎 똥을 눕니다. 볼볼 기어다니던 아이 손을 만질 때에 차갑네, 하고 느끼면 어김없이 쉬를 누었거나 똥을 누었습니다. 아침 일곱 시 반 무렵 잠에서 깨어 꽁꽁거리는 아이가 엉덩이를 실쭉샐쭉 흔들며 아버지한테 기어오면, 나 똥 누었으니 얼른 기저귀 갈고 밑 씻어 주셔요, 하는 뜻입니다.


  밤에 자다가 쉬를 누면 으앙 하고 자지러질듯 울면서 기저귀를 다 갈도록 울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볼볼 기어다니며 놀 때에는 바지까지 축축히 젖도록 쉬를 두어 차례 누고도 암 말을 안 해요. 요 녀석, 밤에만 그렇게 울어대지 말고, 낮에 낑낑거리기라도 해야 알아차리지 않겠니.

 

 


- ‘친아버지가 죽었는데 이렇게 내버려둬도 되나? 죽었단 것도 제대로 안 가르쳐 준 거 아냐? 내가 여섯 살 때 죽는다는 걸 이해했었나?’ (15쪽)
- ‘이 회의의 주제는 린을 누가 맡아 주느냐……가 아니었나? 회의니 뭐니 하면서 그럴듯한 말들을 늘어놓고 있지만, 결국 이 사람들의 결론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거 아냐?’ (23쪽)
- ‘엄마의 존재를 전혀 모른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158쪽)


  아이들과 살아가는 나날이란 아이들과 몇 미터 안쪽에서 하루 내내 지내는 나날입니다. 아이들이 안 보이는 데로 가서 무얼 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 또한 제 어버이가 안 보이는 데에 있으려 하지 않습니다. 서로 마주보거나 서로 느낄 만큼 가까운 데에서 숨결과 목소리 모두를 느끼며 함께 지냅니다.


  아이가 무얼 바라는지 아이가 말하지 않아도 헤아립니다. 아이가 입을 오물오물 꽁알꽁알 하는 소리를 다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짐짓 모르는 척합니다. 아이가 똑바로 말하도록 기다립니다. 아이한테 제대로 말하라고 이릅니다. 마음으로 알아들으니 말을 않더라도 얼마든지 아이가 입으로 털어놓기 앞서 찬찬히 이루어 줄 수 있지만, 이렇게 하는 일이란, 아이가 무럭무럭 씩씩하게 자라도록 이끄는 어버이 구실은 아니겠지요.


  때로는 심부름을 시키고, 때로는 나 혼자 말없이 집일을 하면서 아이가 곁에서 함께 하도록 부릅니다. 다 마른 빨래를 개면서, 자 여기 네 옷이니 네가 개렴, 하고 내밀기도 하고, 아이는 스스로, 이 옷 내 옷이야, 하면서 하나하나 집어 가서 조물딱거리며 갭니다.


  첫째 아이는 퍽 말끔히 빨래를 개기도 하지만, 어수룩하게 구기기도 합니다. 말끔히 갤 때에는 참 잘 갰다고 얘기합니다. 어수룩하게 구기면, 애써 빨아서 말렸는데 이렇게 구기면 어떡하니 하고 얘기합니다.


  둘째가 기저귀에 쉬를 해서 갈아야 할 때면 첫째 아이가 뽀르르 달려가서 새 기저귀 한 장을 가져옵니다. 첫째 아이가 딴청을 부리며 안 가져온다 싶어 아버지가 일어나서 가져올라치면 어느새 팩 일어나 휙 달려오면서, 내가 가져갈게, 하고 외칩니다. 오늘 아침에는 어머니가 둘째 기저귀를 벗기며 갈려 할 때에 첫째 아이가 말없이 기저귀 한 장을 가져옵니다. 따로 시키지 않았으나 아이가 으레 스스로 나서서 가져옵니다. 예쁜 아이요,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 착한 아이요, 다부진 아이입니다.

 

 


- “린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똑똑하고 야무진 애예요. 적어도 당신들보다는 제대로 된 어른으로 클 겁니다. 린! 이런 삭막한 데는 애들이 있을 곳이 못 돼. 우리 집에 올래?” (25∼26쪽)
- 썰렁하기 그지없던 내 방은 먼지덩어리가 굴러다니는 일도 없어지고 잡지 나부랭이들이 구석으로 치워졌으며. (66쪽)
- “갈아입으면 그만이야.” “화 안 내?” “물론! 화낼 일도 아니고 비웃을 일도 아냐. 뭣보다 네가 안 그러면 이불도 잘 안 갖다 널고, 커버도 누레질 때까지 안 빨거든.” (125쪽)


  어느 집에서 태어나 자라는 어느 아이라 하더라도 모두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느낍니다. 어느 마을에서 동무를 사귀며 어느 고장말을 쓰는 아이라 하더라도 저마다 어여쁜 아이라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유치원에 다녀야 사회를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거쳐야 똑똑해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초·중·고등학교를 밟아야 아이 스스로 좋아할 만한 삶길을 찾아나서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유치원이든 어린이집이든 학교이든 따로 안 다녀도 됩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사랑을 받아먹을 수 있으면 됩니다. 아이들은 더 똑똑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은 영어를 잘하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은 시험성적이 빼어나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은 자격증을 안 따도 되며, 아이들은 큰회사나 공공기관 일꾼으로 뽑히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은 누구보다 제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을 수 있으면 됩니다. 아이들은 이웃과 예쁘게 사귀고 동무랑 즐거이 어우러질 수 있으면 됩니다.


  책은 안 읽어도 돼요. 흙을 느끼고 바람을 마시며 물을 헤아릴 수 있으면 돼요. 학원은 몰라도 돼요. 햇살을 좋아하고 구름을 읽으며 별빛을 누릴 수 있으면 돼요. 사람들 복닥거리는 도시로 나아가야 하지 않아요. 스스로 먹는 밥과 스스로 입는 옷과 스스로 살아가는 집을 어떻게 건사하면서 어떻게 아낄 때에 좋은 삶인가를 깨달을 수 있으면 돼요.

 

 


- “애들은 어른들이 기분 안 좋으면 자기를 야단친다고 생각한다구.”(177쪽)
- “아빠가 된 게 아니라, 린에 대해서만 어찌어찌 맞춰 주게 된 거야. 다른 애들은 전혀 모르겠어.” (186쪽)


  우니타 유미 님 만화책 《토끼 드롭스》(애니북스,2007) 첫째 권을 읽습니다. 큰도시 여느 회사원으로 일하는 서른 살 아저씨가 갑작스레 만나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대여섯 살 어린이와 복닥이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서른 살 아저씨는 아이와 살아가는 나날이란 생각조차 한 일이 없습니다. 아이와 살아가기는커녕 아가씨와 사랑을 속삭이며 누리는 나날조차 생각을 못했다고 합니다.


  서른 살 아저씨는 보육원을 찾느라 애먹습니다. 바야흐로 초등학교에 들어가야 하는 줄 헤아리지 못합니다. 집구석 치우느라 바쁘고, 아이한테 무엇을 먹이고, 아이한테 무엇을 보여주며, 아이한테 무슨 말을 들려주어야 하는가를 놓고 이리 부딪히고 저리 깨집니다.


  그런데, 갑자기 맡아야 하는 아이라서가 아니라, 남녀가 사랑을 속삭여 낳은 아이를 놓고도, 오늘날 이 나라 여느 아저씨들은 이 아이들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좋은가를 좀처럼 생각하지 못하거나 아예 깨닫지 않으면서 지내지 않느냐 싶기도 해요. 아이들하고 어떤 밥을 먹고, 아이들하고 어떤 옷을 입으며, 아이들하고 어떤 집에서 살아야 서로 아름다우며 좋은가를 돌아보지 못해요. 아이를 낳기까지 어른으로서 어떤 삶을 꾸리며 어떤 넋으로 어떤 일을 했는가를 헤아리지 못해요.

 

 


- ‘허걱! 애 데리고 아침 지하철 타기도 참 못해먹을 짓이네.’ (52쪽)
- 엄마도 그런 말을 했었지.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희생해 왔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왠지 모르게 그 말이 가슴 한구석에 걸렸다. 곱씹어 보면 그건 엄마는 우리들을 건사하기 위해 희생을 감수했다는 뜻인데, 애 키우는 게 다 그런 건가? (87쪽)


  도시 한복판에서 아이를 데리고 전철을 타는 일이란 참 못해먹을 짓입니다. 겪어 보았으면 누구나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도시 한복판에서 아이를 데리고 전철을 타는 일뿐 아니라, 어른으로서 도시 한복판에서 전철을 타는 일마저 참 못해먹을 짓이 아니랴 싶어요. 느긋하게 오가는 전철길이 아닌 끔찍하다 여기는 지옥철이 된다면, 아이한테도 어른한테도 참 슬픈 길이에요. 아이가 먹기에 나쁜 밥이라면 어른이 먹기에도 나쁜 밥입니다. 아이가 보거나 듣기에 안 좋은 이야기라면 어른이 보거나 듣기에도 안 좋은 이야기이기 마련입니다.


- “그렇구나. 할아버진 이 꽃을 제일 좋아했지.” (19쪽)


  만화책 《토끼 드롭스》 첫째 권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이 만화책을 그린 분은 그림을 참 못 그리는구나 싶습니다. 어설프며 어수룩한 그림이 곳곳에 드러납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 만화책을 즐겁게 읽습니다. 그림은 못 그려도 되니, 이야기를 담아 주면 되거든요. 이야기는 없으면서 그림만 예쁘장하대서 만화책을 즐거이 읽지는 못해요. 그림결은 삐뚤빼뚤하거나 엉망진창과 가깝다 하더라도 이야기가 살가우면서 빛난다면 기쁘게 넘기는 만화책으로 삼을 수 있어요.


  초점이 어긋나거나 흔들린 사진이라 하더라도 이야기 예쁘게 담았으면 아주 아름답습니다. 초점이 잘 맞고 안 흔들린 사진이라 하더라도 이야기 하나 밍숭맹숭하거나 아예 없다면 조금도 볼 만하지 않습니다.


  삶은 빈틈이 하나 없는 나날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빠짐없이 갖추어야 어버이 노릇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빠짐없이 잘 해내야 예쁜 아이가 아닙니다.


  사랑스레 살아가면서 사랑을 물려주는 어버이입니다. 사랑을 받아먹으며 사랑스레 웃고 떠들며 노는 아이입니다.


  오줌을 싸 주니 이불을 빨아요. 낑낑거리니 한 번 더 안아요. 졸립다 하니 자장노래를 불러요.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하니 내 배에 엎드리도록 한 뒤 토닥토닥 재워요. 배고프다고 울어대니 젖떼기밥을 먹이고 어머니젖을 물려요. 심심하다고 하니 함께 손을 맞잡고 춤도 추고 공놀이도 하고 달리기도 하며 들판을 누벼요.


  좋아하는 마음으로 서로 빙긋 웃으며 살아가는 좋은 삶벗인 살붙이예요. (4345.3.13.불.ㅎㄲㅅㄱ)


― 토끼 드롭스 1 (우니타 유미 글·그림,양수현 옮김,애니북스 펴냄,2007.12.5./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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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읽는 책

 


  2002년부터 2004년 사이에 장석봉 님이 한국말로 옮긴 “시튼의 야생동물 이야기” 여섯 권이 나왔다. 《쫓기는 동물들의 생애》, 《회색곰 왑의 삶》, 《뒷골목 고양이》, 《위대한 늑대들》, 《표범을 사랑한 군인》, 《다시 야생으로》인데, 이무렵 이 책들을 하나하나 사서 읽으면서, 이 아름다운 문학이 새로 옷을 입고 나온 일은 더없이 기쁘고 고맙지만, 틀림없이 이 책들은 오래 살아남지 못하고 새책방 책시렁에서 사라질밖에 없겠다고 느꼈다. 나는 이 책들이 아주 아름답고 좋아서 기쁘게 장만하기도 했으나, 이때에는 나 혼자 살아가던 나날이었지만, 나중에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 하면, 우리 아이들이 시튼 문학을 맛보도록 하고 싶다는 마음에, 더 알뜰히 이 책들을 건사하자고 다짐했다.


  이렇게 다짐하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참말 이 책들은 하나하나 사라졌다. 그나마 몇 가지 책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모르는 일인데, 아직 살아남은 책들도 창고에 있던 책이 띄엄띄엄 다 팔리고 나면 다시 찍는 일 없이 그야말로 조용히 잊혀지지 않을까. 이렇게 잊혀지고 나서 스무 해쯤 뒤, 이를테면 2030년이나 2040년에 또다시 새로 옷을 입고 태어날는지 모르리라.


  그러나, 나는 새옷이 썩 반갑지 않다. 아름다운 문학인 만큼 아름다운 번역이 되도록 아름답게 느낄 말글로 꽃피우는 책이 되어야 반갑다. 껍데기만 새롭다 해서 새로운 책이 아니다. 알맹이가 새로울 때에 비로소 새로운 책이다. 옷을 새로 입힌다 해서 새로 태어나는 책이 아니다. 알맹이를 새롭게 일구면서 가꿀 때에 바야흐로 새로 태어난 책이다. (4345.3.1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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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2-03-13 11:36   좋아요 0 | URL
덧붙이면, 잿빛곰 이야기는 재판을 찍으며 겉그림이 달라졌다.
넷째 이야기는 늑대들부터는 겉그림 짜임새가 달라졌다.
넷, 다섯, 여섯, 이 책들도 하나, 둘, 셋 책들처럼
겉을 꾸미면 한결 멋스러웠으리라고 나 혼자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이궁...
 

엊그제부터 <뒷골목 고양이>를 읽는다. <뒷골목 고양이> 번역이 아주 훌륭하다고는 느끼지 않으나, 우리 나라에서 생태환경 책 번역으로 나온 책으로 보자면, <수달 타카의 일생>과 맞먹을 만큼 번역을 잘 했다고 느낀다. <뒷골목 고양이>는 <회색곰 왑의 삶>과 <쫓기는 동물들의 생애>와 나란히 나왔던 시튼 동물기 가운데 하나로, 2003년에 장석봉 님 번역으로 선보였다. 2012년에 나온 김성훈이라는 분 번역은 얼마나 읽을 만할까? 2012년 번역책이 1970년대 박화목 님 번역보다 한결 말끔하거나 살가울 수 있을는지 궁금하다. 시튼 님 책이 나오는 일은 늘 반갑지만, 어떤 번역이요, 얼마나 마음을 기울인 번역인지가 더 살필 대목이다. 번역이 시원찮으면 너무 슬프다. 이 아름다운 글과 문학과 삶과 사랑이 깃든 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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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학자 시턴의 아주 오래된 북극- 야생의 순례자 시턴이 기록한 북극의 자연과 사람들
어니스트 톰프슨 시턴 지음, 김성훈 옮김 / 씨네21북스 / 2012년 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2년 03월 13일에 저장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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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2-03-13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언제부터 '톰슨'이 '톰프슨'으로 바뀌었나...'톰프슨'이 맞는구나 싶기도 하면서, 어째 영 씁쓸하다. 이렇게 이름을 고쳐 준다면, 왜 '반 고흐' 이름은 제대로 바로잡지 않을까? '반 고흐'라는 이름은 국적도 정체도 알 수 없는 한국 이름이다. 어쩌면, 일본사람 입을 거쳐 들어온 뚱딴지 이름인지 모른다.

네덜란드사람 'Van Gogh'는 네덜란드말로 '퐌 호흐'라 읽는다.

요즈음은 어떠한가 모르겠으나, 1994년에 한국외대 네덜란드말 학과에 들어갔을 때에, 교수들이 맨 처음 가르쳐 준 말이 딴 학생은 몰라도 네덜란드말 학과 학생들은 'Van Gogh' 이름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마이리스트는 고치기(수정)가 안 되어 덧글로 덧붙여 적는다.

페크pek0501 2012-03-13 13:13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경우 봤어요.
<고독의 위로>의 저자가 조선일보에선 엔서니 스토, 로 돼 있는데,
알라딘에선 앤터니 스토, 로 돼 있는 거예요.
이럴 땐 어떤 게 맞는 건지... 이런 것 좀 통일했으면 해요.

파란놀 2012-03-13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립국어원 통일안은 있어요.
그런데 모든 외국사람 이름을 '영어 발음식'으로 통합을 하다 보니까
'통일'이 아니라 해서
출판사에서는 이를 잘 안 받아들이곤 해요.

일본사람도 프랑스사람도 독일사람도 에스파냐사람도...
영어투로 이름을 적어야 한다면
참 짜증스럽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