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삶
 ― 사진을 찍어랏


 

 춤추고 노래하며 하모니카를 부는 네 살 딸아이가 작은 사진기를 들고 아버지한테 달려옵니다. 아버지가 쓰는 ‘큰’ 사진기로 찍지 말고, 아이가 쓰는 ‘작은’ 사진기로 찍어 달라 합니다. 아버지가 쓰는 큰 사진기에는 동영상찍기가 없고 아이가 쓰는 작은 사진기에는 동영상찍기가 있습니다. 아이는 작은 사진기로 동영상을 담아 달라고 바랍니다.

 

 “벼리야, 사진을 안 찍어도 되잖아. 그냥 즐겁게 노래하고 춤추면 돼.” 그러나 아이는 애써 제 모습을 찍어 달라 바랍니다.

 

 새벽 한 시 오십오 분. 잘 자던 아이가 낑낑댑니다. 쉬 마려워 낑낑댑니다. 옆에서 어머니가 아이보고 일어나라 합니다. 아이는 아버지를 부릅니다. 아이 어머니는 아이 스스로 일어나서 쉬를 누도록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버릇처럼 잠을 깨고 일어나고 맙니다. 아이가 되든 옆지기가 되든, 깊은 밤이건 한낮이건 곁에서 무얼 거들라며 부르면 달려가 버릇합니다.

 

 아이는 쉬를 누고 자리에 눕습니다. 이불을 여밉니다. 아버지는 다시 눕지 않습니다. 기지개를 켜고, 셈틀을 켭니다. 오늘 하루 찍은 사진을 갈무리합니다. 어제 찍은 사진은 어제 갈무리하지 못했습니다. 이틀치 사진이 이백팔십 장이 넘습니다. 어디 멀리 나다니지 않고 집에서 네 식구 복닥이는 삶을 담은 사진입니다. 세 식구일 때에도 세 사람 삶을 사진으로 날마다 백 장 즈음 담았고, 네 식구일 때에도 네 사람 삶을 사진으로 나날이 백 장 남짓 담습니다. 엊저녁에는 딸아이가 춤과 노래와 하모니카를 실컷 보여주는 바람에 사진을 더 많이 찍었습니다.

 

 아이가 춤추고 노래하며 하모니카 부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하나하나 들여다봅니다. 참 밝고 귀엽습니다. 참 웃기고 재미납니다. 이 아이가 아버지보고 사진을 찍어 달라고 달려오는 일을 번거롭게 여긴 적은 없습니다. 너무 많이 찍을 수는 없고, 애써 모두 찍을 수 없으니, 때때로 손사래를 칩니다. 그런데, 아이를 찍은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좀 달리 생각합니다. 아니, 이렇게 즐거이 노는 아이라 한다면 더 찍을 수 있지 않나. 아이가 무대를 스스로 만들어 놀 때에는 따사로이 바라보면서 찍고, 아이를 업거나 아이 손을 잡으며 놀 때에는 사진기를 들 수 없으니 서로 따사롭게 바라보며 마음으로 아이 삶을 담으면 돼요.

 

 아버지가 “이제 그만 찍자, 그만 찍어.” 하고 손사래를 치니, 아이는 한손으로 하모니카를 불면서 한손으로 사진기를 들이밉니다. 그래, 내가 어떻게 너한테 이기겠니. 왼손으로는 작은 사진기를 들고 동영상을 켭니다. 오른손으로는 큰 사진기를 들고 단추를 누릅니다. 작은 사진기 동영상에는 오른손으로 단추를 누르며 내는 소리 ‘찰칵’이 함께 담깁니다. (4344.12.1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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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으로 보는 삶
 ― 사진에 찍히다


 늘 세 식구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 아버지입니다. 모처럼, 아주 모처럼 아이 어머니가 아버지 사진을 찍습니다. 둘째를 품에 안고 첫째랑 노닥거리자면 아버지는 사진기를 손에 쥘 수 없습니다. 뜨개질을 하던 어머니가 뜨갯감을 살짝 내려놓고는 ‘어머니를 뺀’ 세 식구 노닥거리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사진으로 찍히면서 ‘아, 나도 이렇게 사진으로 찍히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아이 어머니가 바라보는 아이 아버지는 어떤 모습 어떤 이야기가 될까? 아니, 내가 저 사진기 빛을 잘 맞춰 놓았나?

 

 나는 디지털사진기도 수동으로 맞춰서 찍습니다. 언제나 빛과 그늘을 살펴 조리개값과 셔터빠르기뿐 아니라 화이트밸런스나 색감까지 그때그때 바꾸면서 찍습니다. 마침, ‘아버지를 뺀’ 세 식구 복닥이는 모습을 찍은 지 얼마 안 된 때에 ‘어머니를 뺀’ 세 식구 노닥거리는 모습을 찍는 터라, 아이 어머니가 사진기를 그냥 들어 그냥 찍어도 빛이 잘 맞습니다.

 

 사진으로 찍히면서 고맙습니다. 사진으로 찍히면서 즐겁습니다. 몇 천 장 넘는 아이들 사진이 나올 때에 아주 드물게, 용케 한두 장 섞이는 아버지 사진을 아이들도 나중에 들여다보겠지요. 우리 아이들은 어머니 옛날 모습은 차근차근 사진으로 바라보겠지만 아버지 예전 모습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텐데, 이렇게 가까스로 한두 장 섞인 사진을 ‘알뜰히’ 느껴 줄까요. 내가 찍힌 우리 식구 사진을 바라보고 또 바라봅니다. (4344.12.1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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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마당은 초록풀 바다
짐 호우즈 지음, 사과나무 옮김, 롤렌드 하베이 그림 / 크레용하우스 / 2000년 8월
평점 :
절판



 도시를 떠나 너른 마당 누려요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05] 롤란드 하베이·짐 호우즈, 《우리 집 마당은 초록풀 바다》(크레용하우스,2000)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고픈 꿈을 서른일곱 해 만에 이루며 살아갑니다. 올가을까지 살던 멧골집에도 마당은 있었지만 온갖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드나드는 조금 어수선한 데였습니다. 마당이 있다지만 자동차가 드나들며 배기가스를 내뿜거나 시끄러운 소리를 내뱉으면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 만하지 않아요. 빨래를 널기에도 그닥 좋지 않습니다.

 

 나는 아마 일곱 살 무렵부터 아파트에서 살았지 싶습니다. 일곱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 한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이곳은 열석 평짜리 작은 집이고, 다섯 층짜리 보금자리였습니다. 한 동에 모두 쉰 살림집이 길게 들어선 층층집이었고, 예전에는 자가용 있는 사람이 적어 동과 동 사이는 널따란 놀이터였습니다. 마당이 없기로는 어느 아파트라고 다르지 않으나, 열여섯 살에 다른 아파트로 옮길 때까지 퍽 신나게 뛰놀 수 있었습니다.

 

 열여섯 살에 내 어버이가 옮긴 새 아파트는 마흔여덟 평이었습니다. 형과 나는 방을 따로 얻습니다. 이곳은 열다섯 층으로 이루어졌고, 마당이나 놀이터 없이 자동차 대는 곳만 널따랗습니다. 자동차는 바깥에 대기로도 모자라 땅밑까지 파고듭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는 내 어버이 집을 떠나 여러 곳을 떠돌며 ‘마당이나 놀이터 누리는 집’에서 지내지 못합니다. 서울에서든 군대에서든 인천에서든 어디에서나 똑같습니다. 도시에서 마당 누리는 집이란 돈 없이 얻을 수 없는 꿈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헤아리지 못해서 누리지 못한 ‘마당 있는 집’이로구나 하고 요즈막 되뇝니다. 내 살가운 살붙이랑 오붓하게 하루 스물네 시간 복닥일 조그마한 시골집을 꿈꾸며 삶길을 열려고 애쓴다면, 퍽 수월하게 ‘마당 있는 집’을 누릴 수 있어요. 그리 크지 않은 도시에서든, 퍽 작다 싶은 도시에서든, 조그마한 방 한두 칸 얻을 살림집이나 살림방 전세돈이면, 시골마을에서 마당 널따란 보금자리를 내 집으로 마련할 수 있더군요.


.. 우리 집 마당은 초록풀 바다예요. 종이상자로 만든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지요. 초록풀 바다에는 작은 섬들이 떠 있어요. 섬에는 내 친구들이 살고요 ..  (3쪽)


 시골로 옮기면 돈벌이를 어떡하느냐고 걱정해 주는 분이 많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에요. 시골살이를 하며 도시처럼 돈벌이를 하려고 꿈꾸는 일은 참 바보스러워요. 몇몇 사람은 시골살이를 하면서도 도시에서와 엇비슷하게 돈벌이를 이루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도시에서 이루는 돈벌이는 무엇을 하는 돈벌이가 되나요. 도시에서 돈을 벌면 이 돈을 어디에서 무얼 하며 쓰나요.

 

 내가 김치를 못 담그기도 하지만, 이웃 할머니들이 김치를 선물해 주십니다. 마당 가장자리 텃밭이나 집 뒤꼍 땅뙈기에 푸성귀를 심어 기를 수 있습니다. 마당 한켠에 열매 얻을 나무를 심을 수 있습니다. 씨앗부터 심으면 열매를 얻기까지 꽤 여러 해를 기다려야 하고, 어쩌면 내 나이 쉰을 넘어야 비로소 열매를 맛볼는지 몰라요.

 

 그러나 나는 즐거워요. 내가 내 마당 나무열매를 누리지 못하더라도 우리 집 아이들이 푸른 나이를 뽐낼 무렵 신나게 나무열매 누릴 수 있어요. 우리 집 아이들이 푸른 나이를 뽐낼 무렵 영차 하고 올라탈 만큼 나무가 자랄 수 있고, 우리 집 아이들이 나중에 저희 아이를 낳는다면, 이 아이들이 고개를 꺾어 높이 우러러볼 만한 나무가 우리 집 마당에 우뚝 설 수 있습니다.

 

 아직 씨앗 하나 알뜰히 심지 못한 우리 마당이지만, 마당을 바라보며 흐뭇합니다. 처음 이 시골집을 얻어 쓰레기를 치우고 집 안팎을 손질할 때에, 옆지기 어버이가 찾아와 주어 크게 힘쓰며 일을 거드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일을 거드셨다기보다 일을 맡아 주셨다고 하겠어요. 널브러진 짐과 쓰레기를 치웁니다. 어지러운한 꽃밭과 텃밭을 갈무리합니다. 이제 뒤꼍 땅뙈기를 잘 건사하면 됩니다. 아흔일곱 평짜리 터에 스무 평쯤 될 집자리를 빼면 일흔일곱 평이 온통 마당이자 뒷밭이며 꽃밭입니다. 처마와 후박나무 가지 사이에 빨래줄을 잇습니다. 자전거와 손수레를 마당에 놓습니다. 시멘트로 바른 마당이지만, 아이는 이 마당에서 걱정없이 뛰고 달리며 구를 수 있습니다. 대문을 열지 않아도 집 앞 논밭이 넓게 보입니다.

 

 서울에서는 한강을 바라보는 아파트가 비싸다 하는데, 두 손으로 떠서 마실 수 없는 냇물을 바라보기보다는 언제라도 시원하고 푸른 바람을 베푸는 들판을 바라보거나 너른 바다를 마주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기쁘며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푸른나무 우거진 멧자락을 바라봅니다. 땅거미가 지고 난 다음,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동이 트는 어스름을 맛봅니다. 자동차 오가는 소리 아닌 바람이 나뭇가지 흔드는 소리 듣습니다. 사람들 손전화나 가겟집 유행노래 소리 아닌 멧새와 들새 지저귀는 소리 듣습니다.


.. 고물섬에는 누가누가 있을까요? 벌레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요, 거미가 예쁘게 짜 놓은 거미줄이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요 ..  (13쪽)


 롤란드 하베이 님이 그리고, 짐 호우즈 님이 글을 쓴 그림책 《우리 집 마당은 초록풀 바다》(크레용하우스,2000)를 읽습니다. 책이름 “초록풀 바다”는 엉터리이지만, 어린이책 번역에서 엉터리 아닌 말마디란 퍽 드무니 어쩔 수 없겠거니 하고 생각합니다. ‘초록’이란 ‘풀빛’을 일컫습니다. 그러니까 ‘초록풀’이면 “풀빛 풀”인 셈입니다. 풀은 모두 풀빛이지 풀빛이 다른 빛깔일 수 없습니다. 이 그림책 이름은 “초록풀 바다”가 아닌 “푸른 바다”로 붙여야 걸맞았으리라 봅니다.

 

 어쨌든, 도시 한복판에 있는 집인데 마당이 있고, 마당에는 풀이 마음대로 자라며, 풀이 마음대로 자라는 귀퉁이마다 온갖 놀잇감이 널립니다. 이 마당을 누리는 아이들은 저희 멋대로 푸른 바다를 누빕니다. 풀을 만지고 흙을 밟습니다. 풀내음을 맡고 흙내음을 맡습니다. 푸른 바다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푸른 바다에 둥둥 떠서 흰구름을 먹습니다. 푸른 바다에서 함께 살아가는 온갖 벌레하고 인사합니다.


.. 나는 우리 집 마당이 정말정말 좋아요! ..  (25쪽)


 아파트에서 전세나 월세로 살든, 빌라나 다세대주택에서 전세나 월세로 살든, 아이를 낳아 살아가는 어버이라면 조그맣게 꿈을 꿀 수 있으면 기쁘겠습니다. 아이들하고 더 오래 복닥이고 더 오래 살을 맞대며 더 오래 이야기꽃을 피우며 지낼 만한 예쁜 시골마을을 찾아 도시를 떠날 수 있으면 반갑겠습니다.

 

 대단한 이름을 붙이는 귀농·귀촌이 아니에요. 즐겁게 복닥이면서 ‘아이 삶’ 못지않게 ‘어른 삶’을 곱게 돌보는 시골살이입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부터 스스로 재미나게 누리면서 일구는 시골살이예요.

 

 너른 마당은 아이한테뿐 아니라 어른 누구한테나 고마운 쉼터입니다. 너른 마당은 즐거운 놀이터이자 일터입니다. 너른 마당은 오붓한 만남터이자 어울림터입니다.

 

 너른 마당을 누려야 내 사람다운 빛이 살아납니다. 너른 마당을 누리지 못하면 내 사람다운 꿈이 억눌립니다. 너른 마당을 누리면서 북돋울 내 착한 사랑이라면 내 이웃과 동무를 착하게 아낄 수 있습니다. 너른 마당을 누리지 못하며 억눌리는 넋이라면 너무 고단하며 괴롭습니다. (4344.12.16.쇠.ㅎㄲㅅㄱ)


― 우리 집 마당은 초록풀 바다 (롤란드 하베이 그림,짐 호우즈 글,사과나무 옮김,크레용하우스 펴냄,2000.8.10./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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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겹말 손질 330 : 버림받은 유기견

 


.. “그 개는 버림받은 유기견인데, 나쁜 녀석들이 괴롭히는 걸 보고, 사쿠라 형이 말리러 갔다가 싸움이 벌어져서.” ..  《후지모토 유키/김진수 옮김-녀왔어 노래 (1)》(대원씨아이,2011) 16쪽

 

 “괴롭히는 걸 보고”는 “괴롭히는 모습을 보고”나 “괴롭히는 짓을 보고”로 다듬습니다.

 

 유기견 : x
 유기(遺棄) : 내다 버림
   - 시체를 유기하다 /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지성인의 사회적 책임을 유기하는 행위이다

 

 버림받은 유기견인데
→ 버림받은 개인데
→ 버려진 개인데
 …

 

 요사이 퍽 쉬 들을 수 있는 ‘유기견’이라는 낱말인데, 이 낱말은 국어사전에 안 실립니다. 국어사전 올림말 다루는 법을 살피면, 국어사전에 안 실린 ‘유기견’은 띄어서 적어야 알맞습니다. 그러나 이 낱말을 ‘유기 견’처럼 띄어서 쓰는 사람은 없어요. 어쩌면 ‘유기견’은 붙여서 적어야 알맞다 할는지 모르는데, “버려진 고양이”를 가리킬 한자말 ‘유기猫’는 어떻게 될까요. 소를 버릴 사람은 없을 테지만, ‘유기牛’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유기鳥’나 ‘유기豚’은 또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사람이 집에서 예쁘게 여기면서 기르다가 내다 버렸기에 ‘버린 짐승’이라 일컫습니다. 곰곰이 생각하자면, ‘유기견’을 한 낱말로 삼아서 쓰는 말법이라 할 때에는 ‘버린짐승’ 또한 한 낱말로 삼는 말틀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버린짐승’에서 가지를 칠 ‘버린개’와 ‘버린고양이’도 새로운 낱말로 삼을 수 있어야 올발라요.

 

 시체를 유기하다 → 주검을 버리다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지성인의 사회적 책임을 유기하는 행위이다
→ 나쁜 짓에 입다문다면 지성인으로서 질 몫을 내다 버리는 셈이다
→ 나쁜 짓에 눈감는 모습은 지성인이 짊어질 몫을 내팽개치는 꼴이다
 …

 

 개나 고양이는 처음부터 그저 개나 고양이입니다. 길개나 길고양이 아닌 개나 고양이입니다. 들개나 들고양이 또한 아닌 개나 고양이예요.

 

 사람들은 개와 고양이를 집개와 집고양이로 바꿉니다. 이러다가는 내다 버려 ‘버린개’와 ‘버린고양이’로 바꾸고 말아요.

 

 다시금 생각한다면, 말짓기를 돌아볼 때에는 ‘버린짐승’과 같은 꼴을 세우는 일이 걸맞다 할 터이나, 굳이 이렇게 말틀을 세우기보다는 “버림받은 개”처럼 적바림하기만 하면 넉넉하리라 느낍니다.

 

 “그 개는 버림받았는데”나 “그 개는 버려졌는데”처럼 적으면 돼요. “그 개는 기르는 임자가 없는데”라든지 “그 개는 돌보는 사람이 없는데”처럼 적을 수 있어요. (4344.12.1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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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이 함께 읽는 책

 


 따지고 보면 넷이 함께 읽는 책이다. 그러나 넷째 사람은 으레 슬그머니 빠져나와 사진기를 손에 쥔다. 셋이 함께 책을 읽는 모습을 사진으로 적바림한다. 넷째 사람은 함께 책을 읽지 못하더라도, 우리 세 사람이 살가이 책을 읽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마음이 부르니까.

 

 둘째가 스스로 설 줄 알 뿐 아니라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을 줄 알 때에는, 넷이 함께 흙땅을 박차면서 씨앗을 심고 풀을 뜯으며 나무를 쓰다듬겠지. 이때에는 넷이 함께 흙과 풀을 쓰다듬을 텐데, 이때에도 틀림없이 넷째 사람은 살그머니 빠져나와 사진기를 손에 들리라. 셋이 함께 흙과 풀을 어루만지는 모습을 사진으로 적바림하리라. 넷째 사람은 함께 흙과 풀을 보듬지 못하더라도, 우리 세 사람이 사랑스레 흙과 풀을 돌보는 모습을 빙긋이 웃으며 쳐다보는 동안 마음이 벅찰 테니까. (4344.12.1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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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2-15 16:41   좋아요 0 | URL
너무 심각하게, 너무 집중해서 세분이 책을 보는군요. 와아.
그런데 아드님의 얼굴에 머가 많이 났나봐요, 간지럽겠다, 어쩜 좋아..

파란놀 2011-12-15 18:16   좋아요 0 | URL
모두들 가만히 들여다보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아요~

이제 아이 어머니가 생채식으로 몸이 바뀌니
아이도 차츰차츰 나아지리라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