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옷 선물받기

 


 옆지기 앞으로 소포꾸러미 하나 온다. 두꺼운 비닐로 싸인 말랑말랑한 소포꾸러미이다. 무엇일까. 옆지기는 뜨개질하느라 바쁘기에 내가 가위로 살살 뜯는다. 두꺼운 비닐이니까 나중에 어디엔가 되쓰면 좋겠다 싶어 살살 뜯는다.

 

 봉투를 다 뜯고 알맹이를 꺼낸다. 알맹이는 뜨개옷. 뜨개옷을 뜨는 옆지기한테 뜨개옷 선물이라니. 마치 ‘책 만드는 일’을 하는 나한테 책을 선물하는 일하고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소포꾸러미에서 옷이 나오니 첫째 아이가 달려든다. 어쨌든 아이가 집어 보고는 예쁘다 싶으면 “이거 내 거야? 이거 벼리 거야?” 하고 말하기 무섭게 누가 입어 보라 하지 않았어도 신나게 재빨리 입는다. 다른 때에는 추운 날씨에 옷 좀 입어라 입어라 백 번 이백 번 노래를 해도 들은 척을 않더니.

 

 아침부터 뜨개질을 해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무렵 “이런, 잘못했어. 다 풀어야 해.” 하고 말하기 일쑤인 옆지기는 첫째 아이 조끼를 뜨느라 이레 넘게 품을 들이지만 이제 겨우 앞판을 끝냈단다. 옆지기 앞으로 소포꾸러미를 보내신 분은 이 옷을 뜨는 데에 얼마쯤 품을 들이셨을까. 이 옷을 뜨면서 이 옷을 입을 아이들 생각에 얼마나 설레고 기뻤을까.

 

 나는 내가 만들거나 쓴 책을 선물하면서 언제나 내 마음으로 생각하고 사랑한다. 이 책 하나가 태어나기까지 수많은 집일을 치르면서 밤과 새벽마다 틈을 쪼개어 글 하나 바지런히 쓰고 또 써서 열매를 맺는다. 나는 내 사랑열매 땀열매 꿈열매를 책으로 여미어 선물한다. 나한테 책값을 미리 주는 분이 있고, 때로는 나한테 살림돈이 될 만한 목돈을 건네는 분이 있다. 나는 거저로 책을 보내기도 하고, 값을 받고 팔기도 한다. 선물로 준 책에 내 이름 석 자 적어 달라는 분이 있으면, “이름을 적으려면 책값을 주셔야 해요.” 하고 덧말을 붙인다.

 

 뜨개옷을 꼼꼼이 살피지는 못했는데, 뜨개옷을 짓는 분들 가운데 어느 한켠에 당신 이름 석 자를 새겨넣는 분이 있을까. 누구한테 선물하는 뜨개옷이라 하더라도 뜨개질한 사람 이름 석 자를, 또는 닿소리를 따 ‘ㅈㅇㄱ’처럼 떠 넣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ㅈㅇㄱ 4344’라든지 ‘ㅈㅇㄱ 2011’ 같은 글을 넣을 수 있겠지.

 

 네 살 아이는 단추를 아주 잘 꿴다. 돌이 되기 앞서부터 제 옷 단추를 제가 꿰고 끌르려 했으니, 네 살이라면 얼마나 잘 꿰겠나. 이 예쁜 아이한테 예쁜 뜨개옷을 보낸 분은 오늘 하루 어떤 예쁜 아이들하고 예쁜 삶을 일구셨을까. 우리 집 예쁜 아이가 밤에 뒤척이면서 아버지를 깨우고, 또 혼자서 중얼중얼 잠꼬대를 한다. 아버지는 이불을 아이 목덜미까지 여며 주고 일어나서 새벽 글쓰기를 한다. (4344.12.18.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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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화 바로 읽기 - 어머니가 알아야 할 어린이문학 소년한길 어린이문학 3
이재복 지음 / 한길사 / 1995년 7월
평점 :
품절



 어린이문학 평론이 싹트지 못하는 한국
 [어린이책 읽는 삶 13] 이재복, 《우리 동화 바로 읽기》(소년한길,1995)

 


- 책이름 : 우리 동화 바로 읽기
- 글 : 이재복
- 펴낸곳 : 소년한길 (1995.7.15.)
- 책값 : 11000원

 


 (1) 어린이책과 이야기


 어린이책이 참 많이 나옵니다. 이제 청소년책도 제법 많이 나옵니다. 어린이책을 펴내는 출판사는 무척 많으며, 해마다 나오는 좋다 싶은 어린이책을 추천한다면 두툼한 책 한 권이 될 만합니다.

 어린이책 많고 청소년책 또한 많은데, 막상 어린이책과 청소년책을 말하는 자리는 그닥 넓지 않습니다. 칭찬과 책소개와 홍보와 추천은 넘치지만, 책과 어린이 삶결을 견주는 이야기나 책과 청소년 삶자락을 맞대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른문학을 다루는 비평이든 평론이든 꽤 많이 나옵니다. 어른문학 비평은 적잖이 책으로 묶입니다. 또 어른문학을 다루는 비평책이나 평론책은 여러모로 소개되거나 이야기됩니다. 이와 달리, 어린이문학과 청소년책 비평·평론은 너무 푸대접이나 따돌림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린이문학 비평과 평론은 아직 너무 적고, 제대로 이야기되지 못하며, 몇몇 전문가만 다룰 수 있는 글인 듯 여기곤 합니다.


.. 이주홍은 〈비오는 들창〉을 통해 어린이의 삶은 어른의 삶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동심천사주의 문학과 계급주의 문학, 양쪽의 한계를 모두 극복하는 전형을 제시하고 있다 … 이주홍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그 고통에서 해방되는 전망을 제시한다는 방식이 너무나 안이하게 우연성에 의존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목마 아저씨〉의 감동을 떨어뜨렸다 ..  (168, 176쪽)


 잘 생각해 보면, 아이들은 스스로 책을 찾아서 읽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책방마실을 하면서 책을 사들이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늘 어른들이 사 주는 책을 읽고,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들이 내미는 책을 읽습니다. 아이들이 ‘출판사에서 펴낸 책을 저희 깜냥껏 골라서 갖춘’ 어린이책방부터 없고, 어린이책방에서 아이들이 ‘저희 마음결대로 읽고픈 책을 골라서 살’ 돈이 아이들한테 없으며, 아이들이 학교나 학원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마음밥 살찌울 책을 느긋하게 읽을 겨를’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런 한국땅 흐름에서 어른들이 쓰는 어린이문학 비평은 ‘아이들하고 함께 읽을 비평’이 아닙니다. 어른들은 어린이문학을 만들고 팔고 읽힐 뿐 아니라 비평과 평론까지 몽땅 도맡아요.

 

 비평이나 평론이라는 이름이 붙기 때문에 어린이문학 비평을 아이들이 읽을 만한 높낮이로 맞추어야 할 까닭은 없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린이문학을 말하는 글이라 한다면, 어린이도 함께 읽을 수 있도록 생각하고 돌아보면서 써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어른문학 비평을 하듯 어린이문학을 비평한다면, 어른문학 비평하는 글처럼 딱딱하고 메마르며 따분한 글투로 어린이문학을 이야기한다면, 이러한 어린이문학 비평으로는 참다이 어린이문학을 밝힐 수 없을 뿐더러, 즐거이 어린이문학을 살찌울 수 없다고 느껴요.

 

 예배당에서 신부님이나 목사님이 신학교에서 배운 대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습니다. 절집에서 스님이 어려운 한문 그대로 이야기를 욀 수 없습니다. 산부인과 의사가 전문 의학용어라면서 당신 혼자 아는 낱말로 이야기를 하려 한다면, 아이 밴 어머니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신부님이나 목사님은 예배당을 찾는 ‘글 모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말만 들어도’ 깨우치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열도록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절집 스님도 산부인과 의사도 이와 매한가지예요. 누구나 넋·말·삶을 가장 쉬우면서 착하고 아름다운 결에 맞추어야 해요.


.. 이렇게 한 인간에 대한 일방적인 증오의 감정이 드러나는 노래 속에서 어떤 감동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 요즘 남쪽의 아동문학은 점점 삶을 멀리하고, 공상·귀신·공허한 말장난의 세계로만 빠져드는 듯하다. 감동적인 창작동화를 보기가 하늘에 별을 따기 만큼이나 어렵게 되어 버렸다. 참으로 큰일이다. 모두가 삶에서 이야기를 만들려 하지 않고, 삶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 남한에서 나오는 그림동화를 보면 대개가 서양의 그림동화를 옮겨 놓은 다음에 화려하게 치장하여 아이들의 눈을 끌고 있다. 북한의 작가들은 아이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도덕적인 관념을 심어 주려다가 다양하고 새로운 주제를 담아내지 못한 한계가 있었지만, 남한의 작가들은 자본주의 유통구조 아래서 아예 아이들을 상품의 대상으로만 보고 그들을 철저하게 병들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겠다 ..  (204, 224, 241쪽)


 어린이문학을 다루는 잡지가 여럿 있습니다. 다달이 나오거나 철마다 나오는 어린이문학 잡지에 어린이문학을 이야기하는 글이 여럿 담깁니다. 이 글들은 어느 주제에 맞게 어린이책 묶음읽기를 하거나 역사에 따라 비평을 하거나 작가 한 사람 발자국을 톺아봅니다. 작품 하나를 찬찬히 짚는 글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이야기는 아직 좀처럼 찾아 읽기 힘듭니다. 드문드문 찾아 읽기는 하지만, ‘아이와 함께 꾸리는 삶’으로 바라보는 어린이문학 비평이 얼마 없습니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나 어른’으로서 헤아리는 어린이문학 비평이 너무 적습니다. ‘글을 쓰는 내가 어른이 아닌 어린이’라 할 때에 어느 작품 하나를 어떻게 느끼며 읽을까 하는 글도 적지만, 한국에서 태어나는 어린이문학 비평은 하나같이 논문 같습니다. 학위를 따려는 논문 같고, 대학교수가 되고픈 마음에 쓰는 논문 같습니다. 어린이 삶을 북돋우는 비평이 되지 못합니다. 어른 삶을 살찌우는 평론이 되지 못합니다.

 

 문학이란 삶을 사랑하면서 아름다이 일구는 길을 찾는 마음밥이라고 느낍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문학을 다루는 글이라 한다면, 문학작품 하나가 내 삶을 어떻게 사랑하도록 이끌고 얼마나 사랑하도록 도우며 아름다이 일구는 길을 어찌저찌 찾게끔 어깨동무하는가를 밝힐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참삶을 밝히고 참길을 여는 글이 바야흐로 비평이나 평론이라고 생각해요.


.. 현덕은 좀더 참을성 있게 아이들에게 자기의 목소리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보여주는 데 만족했던 것이다 … 싸움은 또 다시 싸움을 부를 뿐이라는 사실을 권정생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또 다른 악에 의존하는 현대인의 모순적인 삶의 구조에 몸으로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  (214, 296∼297쪽)


 표현법을 따진다거나 문장분석을 한다거나 주제읽기를 한대서 비평이나 평론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줄거리를 살피거나 재미를 알아보는 일 또한 비평이나 평론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글 저런 글이란 ‘감상평’쯤 되겠지요.

 

 비평, 곧 이야기라면, 어린이문학 비평, 그러니까 ‘어린이문학 이야기’라면, 어린이문학 하나를 둘러싸고 ‘어린이와 어른(어버이)이 어떤 삶을 함께 일구고 서로 사랑하며 같이 돌보는가’ 하는 꿈누리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느껴요. 길을 보여주고 삶을 톺아보며 사랑을 찾을 때에 참다이 ‘어린이문학 이야기’ 자리에 선다고 느낍니다.

 

 작품분석은 말 그대로 분석입니다. 작품해설은 말 그대로 해설입니다. 작품평은 말 그대로 평가예요.

 

 이야기는 분석도 해설도 평가도 아닙니다. 이야기는 파헤치거나 풀이하거나 값매기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사랑하는 삶을 들려주는 보따리입니다. 이야기는 따사로운 넋을 나누는 꾸러미입니다. 이야기는 아름다운 꿈을 여는 실마리입니다.

 

 나라밖에서 돋보이는 숱한 ‘어린이문학 비평·평론’은 어린이문학 작품 하나를 잘 뜯어살피(분석)거나 잘 풀이하(해설)거나 잘 값매기(평가)기 때문에 돋보이지 않아요. 폴 아자르 님, 페리 노들먼 님, 우에노 료 님, 마츠이 다다시 님, 이런 분 저런 분 글은 뜯어살피기·풀이하기·값매기기하고 멀찍이 떨어집니다. 아니, 처음부터 이 세 가지는 헤아리지 않아요. 생각하기·사랑하기·살아가기, 이 세 가지만 찬찬히 짚습니다.

 

 문학도 문학비평도 뜯어살피기·풀이하기·값매기기가 될 수 없습니다. 문학이든 문학비평이든 생각하기·사랑하기·살아가기로 이루어집니다. 문학을 빚는 사람과 문학을 이야기하는 사람, 여기에 문학을 즐기며 누리는 사람 모두 생각하기·사랑하기·살아가기로 어우러져요.


.. 대부분의 일반문학 작가들이 그들의 소설이나 시에서는 우리 민족의 문제·삶의 문제를 깊이있게 다루면서, 동화에서는 그러한 치열한 정신을 버리고 단지 아이들에게 피상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수준에서 스쳐 지나간다 … 아동문학이라고 해서 겉으로 슬쩍 사회 문제를 구경시키는 차원에서 보여주고 넘어가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태도야말로 무책임하게 천사주의적인 환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문학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  (313쪽)


 이제 이 나라에서도 뜯어살피기·풀이하기·값매기기로만 짜인 논문보다는 생각하기·사랑하기·살아가기로 이루는 이야기가 태어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재거나 따지거나 줄세우지 말고, 즐기고 좋아하며 아낄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문학작품만 ‘고전’이 있어야 하지 않아요. 문학평론도 ‘고전’이 되어야 해요. 문학작품만 쉰 해 백 해 오백 해를 읽혀야 하지 않아요. 문학평론 또한 쉰 해 백 해 오백 해를 읽히면서 사람들 가슴을 촉촉히 적시거나 울리거나 흔들거나 사로잡거나 어루만지는 글이 되어야 해요.

 

 지식씨앗이나 지식조각을 다루는 어린이문학 비평·평론은 이제 그만 나오면 좋겠어요. 사랑씨앗과 사랑꿈을 돌보는 어린이문학 이야기를 새록새록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2) 아직 사랑을 담지 못하는 평론


 어린이문학과 어린이책을 찬찬히 다루는 평론책인, 이재복 님이 쓴 《우리 동화 바로 읽기》(소년한길,1995)를 읽습니다. 어린이문학과 어린이책을 찬찬히 다루는 평론책으로는 이오덕 님이 내놓은 《시정신과 유희정신》만 한 책이 아직 없구나 하고 다시금 느끼며 읽습니다. 어린이문학이나 어린이책을 놓고 깊이 돌아보는 비평책으로도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만 한 책을 써낼 만한 분이 아직 없다 할 만하구나 하고 거듭 느끼며 읽습니다.

 

 그러나, 이만큼 애쓰는 분이 있으니 고맙습니다. 이렇게 힘쓰는 분이 있어 반갑습니다. 다만, 짚어야 할 대목을 좀처럼 못 짚고, 느껴야 할 대목을 살가이 못 느끼는구나 싶어 아쉬워요.


.. 그분 말이 내 이야기는 내가 겪은 거니까 쓰겠는데 동화는 도대체 못 쓰겠다는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동화라는 게 별 게 아니고 그저 자기가 보고 겪은 이야기를 그대로 아이들의 입맛에 맞게 써 내면 되는 건데 왜 자기 삶의 이야기는 잘 쓰는 분이 동화 쓰기는 그렇게 어려워하는 걸까 ..  (85쪽)


 동화는 “별 게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린이문학이든 어른문학이든 “대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어린이문학이나 어른문학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어린이문학이든 어른문학이든 “읽는 이 입맛에 맞게 써 내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의 이야기는 잘 쓰는 분이 동화 쓰기는 그렇게 어려워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내 삶을 이야기 한 자락으로 살뜰히 풀어낼 줄 안다면, 이 이야기가 고스란히 어린이문학이나 어른문학이에요. 따로 ‘문학’이라는 틀로 글을 다시 쓸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동무가 어린이라면 어린이문학으로 태어나고, 내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벗이 어른이라면 어른문학이 태어나요.

 

 곧, 내 삶을 이야기 한 자락으로 살뜰히 풀어낼 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문학인가 문학이 아닌가라는 대목이 갈립니다.

 

 이재복 님은 “그저 자기가 보고 겪은 이야기”를 쓰면 동화가 된다고 밝히지만, 스스로 보거나 겪은 이야기를 쓴다 해서 동화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동화 시늉을 낸다고는 하겠지요. 이른바 생활동화라는 시늉을 낸다고 할 만합니다.

 

 참말 요즈음은 생활동화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오는 작품이 적잖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한국 생활동화 가운데 그야말로 ‘삶’과 ‘동화(어린이문학)’라는 이름이 걸맞는 작품이 얼마나 될는지 궁금해요. 너무나 “아이들 입맛에 맞게” 쓰기만 할 뿐 아닌가 싶어요. 할 말을 모르고 나눌 넋을 모르며 물려줄 사랑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이재복 님 평론책 《우리 동화 바로 읽기》를 비롯해서, 한국땅 수많은 어린이문학 평론가들 글과 책이 아직까지 《시정신과 유희정신》하고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랑 어깨를 견줄 수 없다고 느낍니다. 안타깝지만, 이재복 님이든 다른 평론가 분들이든, 아이들과 함께 할 말·아이들과 나눌 넋·아이들한테 물려줄 사랑을 좀처럼 건드리지 않아요. 아이들과 함께 할 말을 따사로이 돌보지 못해요. 아이들과 나눌 넋을 포근하게 보살피지 못해요. 아이들한테 물려줄 사랑을 어떻게 담아야 좋을까를 깨닫지 못해요.


.. 동화는 아이들을 지도하는 문학이 아니라, 단지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 아이들에게 겸손하게 이야기를 통해 현실을 보여주는 문학일 뿐이다. 판단은 아이들이 한다. 아이들을 지도한다고 욕심을 내서 뭔가를 자꾸만 알게 하고, 느끼게 하고, 억지로 감동하게 하려고 훈계하는 문학은 그 의도가 지나치다 보면 아이들을 올바른 데로 이끈다는 허울좋은 명분 아래 결국은 더 큰 노예의 나라로 끌고 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  (111쪽)


 이재복 님 말처럼, “판단은 아이들이 한다”고 여길 수 없어요. 아이들은 ‘생각’하기 앞서 ‘느끼’면서 ‘받아들’여요. 아이들하고 어린이문학을 나누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무엇을 느끼면서 받아들일까를 깊이 생각하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이재복 님 또한 이 대목을 모르지는 않구나 싶은데, 이를테면 “북한의 동화는 어떤 것을 읽어 봐도 이런 엉터리 문장은 보기 힘들다. 문장에 멋을 낸다고 비비틀어서 이상하고 의미도 없는 문장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문장 하나를 이해하려면 이게 무슨 말인지 마치 어려운 외국어 문장을 해독하듯이 한 뒤에야, 아하 그런 말이었구나 하는 문장을 요즘 남한의 동화작가들은 즐겨쓰고 있다. 그래서 그런 문장을 본 아이들은 또 동화를 읽어 보니까 작가들이 이런 문장을 쓰던데 이게 좋은 문장인가 보다 하고 흉내를 내어 아이들까지 그걸 따라가게 되니, 참으로 엉터리 동화 한 편이 아이들을 이렇게까지 병들게 하는 것이다(24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참말, 아이들은 ‘생각’하면서 ‘흉내’내지 않아요. 아이들은 재미있거나 좋다고 ‘느껴’서 ‘흉내’를 냅니다. 그래서 어린이문학을 섣불리 “판단은 아이들이 한다”고 여기면서 내어주지 않습니다. 어느 어버이도 아이가 아무 책이나 골라서 읽도록 하지 않아요. 어느 도서관도 아이한테 아무 책이나 빌려주지 않습니다. 어느 어버이라도 아이들한테 아무것이나 먹으라고 내밀지 않아요. 어느 어버이라 하더라도 아이들한테 아무 데서나 자라 하지 않고, 아무 옷이나 입히지 않아요.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생각’해서 저마다 읽을 책을 고르기는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천천히 ‘느끼고 살아가’며 이루어지기 때문에, 퍽 자주, 아니 늘 ‘느끼며 받아들이’며 살아간달 수 있으니까, “아이들에게 겸손하게 이야기를 통해 현실을 보여주는 문학”만 쓸 수 없어요. 아이들이 지식밥 아닌 사랑밥을 먹도록 참다이 일군 ‘마음밥인 이야기책’을 건넬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 앞에서 고개숙이는(겸손) 어른이어서는 안 돼요. 아이들하고 어깨동무하는 어른이어야지요. 아이들을 참다이 사랑하고 착하게 아낄 줄 아는 어른이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사랑스러운 터에서 살아가야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어른들부터 사랑스러운 터에서 살아가야 아름다운 줄 느껴야 합니다.

 

 어른문학도 이와 다르지 않아요. 어른문학이라고 “생각은 어른들이 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욕심을 낼” 일이 아니에요. 어른문학이든 어린이문학이든 문학이 될 때에는 이 문학을 읽을 사람(어린이와 어른 모두)이 어떻게 느끼며 받아들일까를 생각합니다. 도덕이나 교훈이나 훈계나 지식이나 정보가 아닌 ‘느끼고 받아들일 문학’을 생각해요.

 

 이러한 생각 알맹이가 없이는 아무런 문학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이오덕 님이 어린이문학에서 “교훈을 빼면 안 된다”고 거듭 되풀이하며 이야기하는 까닭은 ‘교훈’이라는 낱말을 빌어 ‘생각 알맹이’를 말씀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억지스러운 도덕 가르침이 아닌, 사람이 사랑하며 살아갈 아름다운 길을 아이들이 배우며 느끼고 받아들이도록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을 이오덕 님은 그냥 교훈이라는 낱말로 이야기했을 뿐이에요. 지난날에는 사람들이 ‘교훈’이라는 낱말을 써야만 알아들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오덕 어린이문학 비평을 옳게 읽는 어른이 퍽 드뭅니다. 또한, 어린이문학이란 무엇이고 문학이란 또 무엇인가를 찬찬히 생각하며 살아가는 어른부터 드물어요.

 

 이재복 님은 “참으로 엉터리 동화 한 편이 아이들을 이렇게까지 병들게 하는 것이다” 하는 말만 해서는 안 됩니다. 엉터리 동화가 왜 태어나고, 이 엉터리 동화가 아이들한테 어떻게 스며들 뿐 아니라, 어른들은 왜 자꾸 엉터리 동화를 쓰고 팔아치우는데다가 돈을 많이 벌려 하는가를 밝혀야 합니다. 밝히면서 따져야 하고, 꾸짖어야 하고, 바른 길을 들려주어야 해요. 이러한 엉터리 동화를 교사들이 걸러내지 못하는 흐름을 짚으면서, 아이들이 엉터리 동화 아닌 사랑스러운 동화를 받아들이는 길을 들려줄 수 있어야 해요.


.. 어린이들이 이원수 동화를 체계적으로 읽으면 해방 전후의 역사를 그대로 알 수 있다. 이원수 동화를 읽는다는 것은 곧 우리 역사를 읽는거나 마찬가지이다 ..  (255쪽)


 아이들은 동화를 읽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동화라는 밥을 마음으로 먹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차려 주는 밥을 ‘생각(의심)’하면서 먹지 않습니다. 신나게 받아들입니다. 맛나다고 느끼면서 받아들여요.

 

 아이들 앞에 놓이는 어린이책은 아이들 누구나 ‘생각’이 아닌 ‘느낌’으로 저절로 손을 뻗어서 쥐거나 들거나 펼칩니다. 만화책을 읽든 그림책을 읽든 늘 같습니다. 이러한 어린이 삶과 사랑과 몸짓을 더 찬찬히 돌아보면서 어린이문학을 짚을 수 있다면, 이재복 님은 “우리 동화 바로 읽기”라기보다 “우리 동화 ‘즐겁게’ 읽기”나 “우리 동화 ‘따숩게’ 읽기” 같은 이야기밥을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재복 님은 ‘바로’ 읽기보다는 ‘즐겁게’ 읽기와 ‘따숩게’ 읽기라는 틀을 살피는 어린이문학 비평으로 나아가야 아름다우리라 생각해요. 아니, 이 나라에서 어린이문학을 ‘바로’ 읽자고 말할 만한지 궁금해요. 어쩌면, 이재복 님으로서도 아직 헤어나지 못하는 울타리나 굴레가 있고, 이재복 님 스스로 넘어서거나 거듭나야 할 사랑길을 찾는 걸음마가 《우리 동화 바로 읽기》일는지 모르지요.

 

 ‘바로 읽기’란 ‘바로 살기’입니다. ‘바로 살기’가 있은 다음에 ‘바로 읽기’와 ‘바로 쓰기’, 이러면서 ‘바로 하기’와 ‘바로 사랑하기’와 ‘바로 말하기’와 ‘바로 생각하기’와 ‘바로 먹기’들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4344.12.17.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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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을 깨우는 책읽기

 


 둘째가 우는 소리에 다른 세 식구 모두 잠에서 깬다. 새벽 다섯 시. 오줌 눈 기저귀를 가는데 참 모질게 운다. 기저귀갈이가 이토록 서럽니. 잘 자는데 왜 건드려 깨우냐고 우니. 간지러운 얼굴 긁고 싶은데 두 손을 꼭 붙잡아서 우니.

 

 동생 우는 소리에 네 살 누나는 새벽 다섯 시부터 두 시간째 다시 잠들지 못한다. 네 살 누나는 자꾸 뒤척인다. 그렇다고 이 어둡고 추운 새벽에 딱히 일어나 무언가 놀이를 할 수 없다. 어머니랑 노래 몇 가락 부르다가 어머니는 조용해진다. 네 살 아이는 함께 조용해지지 못한다. 혼자 나즈막하게 흥얼거리다가는 발로 방바닥을 탁탁 치면서 엉기적밍기적한다.

 

 나는 어제 하루 읽은 책을 돌아본다. 곧 어스름이 걷히면서 동이 트면 맞이할 새날, 아침에 빨래를 몇 점 하고 아침으로 무엇을 차리며 아이들하고 어떤 놀이를 즐기며 집 안팎 치우거나 갈무리하는 일은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오늘은 얼마나 기운을 내어 움직일 수 있을는지 가늠한다. 오늘은 어떤 삶 어떤 사랑 어떤 마음으로 누릴 수 있을까 곱씹는다.

 

 고단한 몸이기에 자리에 드러눕거나 모로 누워 그림책을 펼친다. 빈책을 꺼내어 조용히 볼펜으로 깨작대면 네 살 아이도 어느새 제 빈책을 챙겨서 아버지 곁에 앉아 제 볼펜으로 깨작댄다. 나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마음책을 읽고, 아이는 어버이를 마주하면서 몸책을 읽는다. 잠들지 못하는 아이 곁에 살그머니 누워 이마를 쓸어넘겨 주어야겠다. (4344.12.17.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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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유교수의 생활 애장판 1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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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아끼며 살아갈 수 있으면
 [만화책 즐겨읽기 92] 야마시타 카즈미, 《천재 유교수의 생활 (애장판 1)》

 


 온누리 사람들이 서로를 알뜰히 아끼며 살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꿈꿉니다. 미워하거나 괴롭히거나 따돌리거나 등치거나 들볶지 않는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꿈꿉니다.

 

 사랑받지 못하며 태어나고 자라고 크고 어른이 된 사람들이, 둘레 사람들한테 사랑을 곱다시 나눌 때가 있으나, 둘레 사람들한테 사랑보다 미움과 차가움과 비아냥을 흩뿌릴 때가 더 잦다고 느낍니다. 사랑받지 못하며 살아온 나머지, 사랑을 밟거나 깨거나 부수거나 흔드는 일이 얼마나 슬프며 아픈가를 못 느끼는구나 싶습니다.

 

 어른이 아이한테 해 주어야 할 일이란 사랑입니다. 사랑을 담아 밥을 차리고, 사랑을 실어 옷을 입히며, 사랑을 모아 잠자리를 마련합니다.

 

 아이들한테 비싼 밥을 먹여야 아이들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값나가는 옷을 입혀야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이들한테 으리으리한 아파트를 베풀어야 아이들이 새근새근 잠들지 않아요.

 

 아이들은 자가용을 타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은 무등을 타도 됩니다. 아이들은 자전거에 타도 됩니다. 아니, 아이들은 저희 어머니 아버지랑 신나게 들판을 달음박질할 수 있으면 즐겁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랑 무엇을 해야 즐거울까요. 아이들을 자가용에 태워 그럴듯한 밥집을 찾아가 비싸구려 밥 한 끼니를 사거나 커다란 놀이공원에서 자유이용권을 끊으면 즐거울까요. 아이들이랑 비행기 타고 유럽이나 미국이나 일본에 다녀와야 무언가 해 준 셈이라 할 만한가요.


- ‘왜 모두들 시간이 있는데 그렇게 달리는 걸까? 또 없는데 그렇게 헛되이 낭비하는 걸까? 왜 토하면서까지 포기하지 않고 또 술을 마시는 걸까? 왜 모두들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그리고 농땡이를 치는 걸까? 나는 그 이유를 모른다.’ (8쪽)
- “창피해? 왜 그럴까? 여기까지 오면서 내가 한 일은 전부 올바른 일이었는데. 왜지?” (19쪽)


 예쁜 목소리 흐르는 노래테이프를 트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귀여운 목소리 흐르는 만화영화를 트는 일은 나쁘지 않아요. 그러나, 투박하거나 수수한 어버이 목소리로 잔잔하게 부르는 노래가 훨씬 좋습니다. 가락이 어긋나거나 노랫말을 몰라도 어버이 목소리로 아이한테 사랑 담아 불러 주는 노래 한 자락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이들은 맨밥을 먹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랑밥을 먹습니다. 아이들은 밥만 잘 먹는다고 무럭무럭 자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랑밥을 잘 먹어야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랍니다.

 

 더없이 마땅한 노릇입니다만, 사랑밥·사랑옷·사랑집입니다. 아이한테나 어른한테나 사랑밥·사랑옷·사랑집이 삶을 살찌웁니다. 사랑밥·사랑옷·사랑집이 아니라면 아이뿐 아니라 어른 누구라도 슬프거나 힘들거나 괴롭거나 고달픕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번다 하더라도 사랑을 느낄 수 없고 사랑을 나눌 수 없는 일터는 안 즐겁습니다. 돈을 아주 많이 번다 하지만, 내 좋은 살붙이랑 동무랑 이웃이랑 어울릴 겨를을 내지 못하는 일터라면 조금도 안 기뻐요.

 

 사랑하면서 꾸릴 내 삶이지, 돈만 벌다 떠날 내 삶이 아니거든요. 사랑을 받고 사랑을 물려줄 내 삶이요, 돈을 벌어 돈만 쓰다 떠날 내 삶이 아니에요.


- “아가씨, 안달할 거 없습니다.” “예?” “이 꽁치는 눈이 탁합니다. 조금 오래된 겁니다. 느긋하게 찾으십시오. 그럼, 싸고도 싱싱한 생선을 살 수 있을 겁니다.” “다, 당신은 누구시죠?” “저 말입니까? 싸고 싱싱한 전갱이를 찾으러 다니는 사람입니다.” (77쪽)
- “유 교수. 지금 가시는 길입니까? 중간까지 같이 가시죠. 태워다 드릴 테니.”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걸어서 지하철을 타고 가는 편이 빠르더라구요.” (121쪽)


 야마시타 카즈미 님 만화책 《천재 유교수의 생활》(학산문화사,2009)을 애장판으로 새롭게 읽습니다. 아직 글을 모르는 아이가 나중에 무럭무럭 자라 이 만화책을 함께 즐길 만할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이 만화책을 장만해서 새롭게 읽습니다.

 

 만화책 《천재 유교수의 생활》에 나오는 유택 교수는 ‘바른이(바른 사람)’입니다. 어느 하나 똑부러지지 않은 구석이 없습니다. 어느 하나 비틀어지거나 비뚤어지거나 모나거나 어수룩하지 않습니다. 곧고 바른 삶입니다. 참다우며 착하고자 하는 사랑입니다. 일흔을 코앞에 둔 나이라 하지만 언제나 새롭게 배웁니다. 옆지기랑 딸 넷하고 어울릴 겨를보다는 책을 읽는 겨를이 훨씬 많은 유택 교수이지만, 유택 교수 깜냥껏 스스로 할 수 있는 온힘을 내어 삶을 일굽니다.

 

 유택 교수한테는 샛길이 없습니다. 유택 교수한테는 곁다리를 걸칠 까닭이 없습니다. 아름다우면서 즐겁고 좋은 한길이 있기에, 누가 무어라 하건,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건, 요모조모 꼬투리를 달건, 스스로 가장 아름다우면서 즐겁고 좋다고 여기는 한길을 걷습니다. 누구보다 유택 교수 스스로를 아낍니다. 누구보다 유택 교수 스스로를 아끼면서 이 마음결을 가장 가까운 살붙이부터 이웃과 동무한테 차근차근 이야기합니다.

 

 유택 교수는 언제부터 바른이 삶을 꾸렸을까요. 유택 교수는 누구한테서 어떤 사랑을 받았기에 오늘과 같은 삶을 일굴 수 있을까요. 유택 교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랑을 받으면서 어떤 이웃이나 동무랑 어떤 사랑을 나눌 수 있을까요.


- ‘어둡고 시끄럽고 담배냄새가 지독히 나고 환기도 나쁘다. 회사원도 있는 것 같은데, 과연 이런 데서 스트레스가 풀릴까? 나의 뇌세포가 파괴될 것 같다. 이런 상태는 태평양전쟁 이후 처음이다.’ (130쪽)
- “아빠가 우리랑 안 놀아 줘. 아빤 저 방에서 안 나오셔? 왜?” “공부하느라 바빠서 그래.” “하지만 옷짱네 아빤 일요일엔 같이 놀아 주는걸.” “아빤 쉬는 날에 책을 읽으셔. 그게 아빠가 쉬시는 거니까. 엄마랑 가자.” (209쪽)
- “나츠코, 이제 들어오라고 해도 되지 않겠니?” “안 돼요!” “나츠코, 내 생각엔 네가 아버지의 책과 싸워 온 나보다는 훨씬 나아 보여. 내 라이벌은 40년 이상 계속 말 한 마디 안 하는 책이었어.” (255쪽)


 옳고 그름이 아닙니다. 좋고 나쁨이 아닙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닙니다. 왼쪽이냐 오른쪽이냐가 아닙니다.

 

 사랑인가 아닌가 한 가지입니다. 믿음인가 아닌가 두 가지입니다. 착함인가 아닌가 세 가지입니다. 참다움인가 아닌가 네 가지입니다. 아름다움인가 아닌가 다섯 가지입니다.


- “팽이는 안 변했어. 꽃도 마찬가지고, 내 보물이지. 다른 건 모두 변했어도 이것만은 안 변했어.” “저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입니다.” (181쪽)
- “여보.” “응?” “제게도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래? 잘 자요.” (311쪽)


 사랑받으며 자란 아이들이 사랑씨앗을 심습니다. 사랑받지 못하며 자란 아이들이 그만 미움씨앗을 심습니다. 사랑씨앗은 곱게 돌보면서 사랑꽃을 피우고 사랑열매를 맺습니다. 미움씨앗이라지만 사랑어린 손길로 보살피면서 미움꽃 아닌 사랑꽃이 피도록 이끌고, 미움열매 아닌 사랑열매 맺도록 거들 수 있다고 느낍니다.

 

 나와 옆지기가 우리 아이들을 제도권학교이든 대안학교이든 굳이 보낼 생각이 없는 까닭은, 어느 학교라 하든 학교라는 울타리가 되면 사랑을 가르치거나 보여주거나 함께하거나 겪도록 이끌지 않아서예요. 오늘날 한국땅에서는 제도권학교나 대안학교나 사랑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디에서나 학력과 지식과 졸업장과 자격증과 정보와 돈입니다. 사랑을 말하고 삶을 찾으며 사람을 아끼는 길을 나누려는 배움마당을 만나기 너무 힘듭니다.

 

 다시금 곰곰이 생각하면, 오늘날 사람들 모두 내 가장 따사롭고 넉넉한 보금자리가 될 살림집부터 사랑이 어린 꿈터가 되어야 할 텐데, 너무 옥신각신 돈다툼질에 휘말리고 말아서 살림집이며 배움마당이며 엉터리가 되는지 몰라요. 모두들 따사로운 살림집에서 사랑을 먹으면, 따사로운 작은 마을에서 사랑을 나누고, 따사로운 작은 배움터에서 사랑을 주고받는 꿈을 빚으리라 믿습니다.

 

 학교는 서로를 아끼는 마음씨를 보드라이 어루만지는 터여야 합니다. 회사나 마을이나 공공기관이나 시민사회단체나 언론사 모두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결을 곱게 다스리는 곳이어야 합니다. (4344.12.17.흙.ㅎㄲㅅㄱ)


― 천재 유교수의 생활, 애장판 1 (야마시타 카즈미 글·그림,학산문화사 펴냄,2009.3.25./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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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줍다

 


 간밤에 눈이 내렸다. 언제 내렸을까. 새벽 너덧 시에 내다 볼 때에 벌써 눈이 쌓였을까. 글쎄, 서너 시까지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고 느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마당에 눈이 얇게 깔렸다.

 

 전라남도 고흥에서는 눈을 구경하기 참 힘들다고 했는데, 뜻밖에 처음으로 눈을 구경한다. 다른 시골에는 눈이 제법 쌓였을까. 멧골마을은 꽁꽁 갇히도록 눈이 내렸을는지 모른다. 내 어버이 살아가는 음성 시골집에도 눈이 펑펑 내렸을 수 있다.

 

 아이가 마당으로 나간다. 혼자 커다란 비를 들어서 쓰는 시늉을 한다. 가만히 바라보면, 쓰는 시늉만 하지는 않는다. 고 비로 마당에 아주 얇게 쌓인 눈을 쓴다. 그런데말야, 아이야, 이만 한 눈은 안 쓸어도 금세 녹는단다.

 

 한참 비를 들고 놀던 아이는 이제 맨손으로 눈을 쓸어서 모은다. 조물조물 조물락거리며 작은 손바닥에 작은 눈덩이를 얹어서 방으로 들어와 보여준다. “눈이가 저기 있어요. 눈이가 차가워요.”

 

 지난겨울에는 눈 내린 날 얼마나 추운가를 뼈저리게 느꼈을 텐데, 올겨울에는 눈을 주우면서 논다. 지난겨울 멧골집에서 펑펑 내리는 눈을 끝없이 쓰는 아버지를 으레 보았기에 아주 얇게 깔린 눈을 비질하며 놀려 했겠지. 야무지구나. (4344.12.17.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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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1-12-17 11:58   좋아요 0 | URL
사금벼리를 보면, 옛날 이야기 `만석군 며느리`가 생각나요~^^

전 사금벼리에게 홀딱 반해서 더 자주 들락거리는 것 같아요.
이가 참 고르게 났네요.
눈을 조물락거리는 손도 이쁘구요.
추운 겨울, 이보다 뜨뜻한 난로가 없지 싶어요.
부러워요~^^

파란놀 2011-12-17 16:31   좋아요 0 | URL
사름벼리가... 만 석을 질 수 있어서
아버지랑 어머니를
흐뭇하게 할 수 있겠군요 ㅋㅋㅋ

그러자면, 만 석을 지을 땅부터
마련해야겠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