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흥이 다 깨져

 

.. 내 말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흥이 이미 다 깨져 버렸던 것이다 ..  《벤 마이켈슨/홍한별 옮김-나무소녀》(양철북,2006) 39쪽

 

 “남아 있던”은 “남았던”이나 “남은”으로 손봅니다. “깨져 버렸던 것이다”는 “깨져 버려 있었다”나 “깨져 버렸으니까”로 다듬습니다.

 

 흥(興) : 재미나 즐거움을 일어나게 하는 감정
   - 흥이 나다 / 흥을 깨뜨리다 /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우었다

 

 흥이 깨져 버렸던
→ 재미가 깨져 버렸던
→ 즐거움이 깨져 버렸던
→ 기쁨이 깨져 버렸던
→ 신바람이 깨져 버렸던
 …

 

 저는 ‘흥’이라는 말을 들으면, 콧방귀를 뀌는 “흥!”이 먼저 떠오릅니다. 어릴 때부터 이랬습니다. 그저 “흥! 흥! 흥!” 하듯 생각했습니다. 누군가 “흥을 돋운다”고 말하면 “흥흥거리며 무얼 돋운다구?” 하면서 썰렁한 말장난을 하곤 했습니다.

 

 흥이 나다 → 재미가 나다 / 신이 나다
 흥을 깨뜨리다 → 재미를 깨뜨리다 / 신바람을 깨뜨리다
 흥을 돋우었다 → 재미를 돋우었다 / 즐거움을 돋우었다

 

 외마디 한자말 ‘興’을 헤아려 봅니다. 국어사전을 뒤적이고 나서야 이 낱말이 한자말이었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아마 ‘흥’을 한자말로 깨닫는 분은 썩 많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한자말인 줄 안다 하여도 그저 이 낱말을 쓸 뿐, 달리 어찌어찌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으리라 느낍니다. 흥은 그저 ‘흥’이라고 여길 테니까요.

 

 조금이나마 생각이 깊은 분들은 한자말 ‘興’이 “재미 흥”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토박이말로는 ‘재미’요, 한자말로는 ‘興’이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리라 봅니다. 사람들이 한자말 ‘興’을 널리 쓴다면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일 테지만, 나 스스로 굳이 ‘興’을 쓰지 않아도 우리 말 ‘재미’가 있으니, 우리 말로 넉넉하게 이야기를 나누면 된다고 생각하리라 봅니다.

 

 여기에 ‘신’과 ‘신바람’이라는 다른 낱말이 있습니다. 자리에 따라 ‘기쁨’이나 ‘즐거움’을 넣을 수 있습니다.

 

 보기글에서는 ‘잔치판’이라고 적어도 어울립니다. “즐거운 잔치판”이나 “신나는 잔치”나 “기쁜 놀이마당”이라고 적어 볼 수 있습니다.

 

 잔치판은 벌써 다 깨져 버렸던
 즐거운 잔치는 벌써 다 깨져 버렸던
 신나는 잔치는 벌써 다 깨져 버렸던
 기쁜 놀이마당은 벌써 다 깨져 버렸던
 …

 

 한자말을 쓴다 해서 생각과 넋을 좁은 틀에 가두어 버린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한자말이 굴레가 되어 생각과 넋이 갇힌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다만, 누구나 익숙해지거나 길들고 맙니다. 한 번 두 번 쓰는 말이 더 익숙하고, 저도 모르게 어떤 말씨와 말투에 길들어요. 살갑고 싱그러운 말투에도 익숙하게 젖어들지만, 얄궂고 뒤틀린 말투에도 익숙하게 물듭니다.

 

 스스로 마음밭을 튼튼하게 일구려 하지 않는다면, 거친 물결에 아무렇게나 휩쓸리지 않도록 담금질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들 생각이며 넋이며 엉망이 되기 일쑤입니다. 얕고 추레한 말에 나도 모르게 젖어들고 맙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합니다만, 곰곰이 말삶을 돌아볼라치면, ‘興’이 쓰이는 만큼 ‘재미’와 ‘신’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재미나다’는 한 낱말로 국어사전에 실리지만, ‘신나다’는 아직까지 국어사전에 못 실립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스스로 즐겨쓰지 않으니까요. 나 스스로 우리 말을 북돋우거나 가꾸지 못하니까요.

 

 외마디 한자말 ‘興’을 쓰겠다면 쓸 노릇입니다. 다만, 우리가 ‘興’이라는 낱말을 쓰는 동안 ‘재미’와 ‘재미나다’라는 말마디는 자취를 감춥니다. 우리가 ‘興’이라는 낱말로 우리 모습을 가리키는 만큼 ‘신’과 ‘신나다’라는 글줄은 가뭇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4340.2.26.달./4342.5.4.달.4344.12.20.불.ㅎㄲㅅㄱ)

 

 

 

ㄴ. 흥이 절로 났다

 

.. 이어도라는 상상 속의 유토피아라는 희망이 있는 한, 헐벗고 굶주려도 섬의 토박이들은 흥이 절로 났다 … 공부 열심히 해 부모보다 사람답게 살아가길 기원하노라면 힘든 노동에도 그저 신바람이 난다. 이어도라는 상상 속의 섬이 존재하는 한 신바람이 절로 난다 ..  《김영갑-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하날오름,1996) 196쪽

 

 “상상(想像) 속의 유토피아(Utopia)라는 희망(希望)이 있는 한(限)”은 “꿈나라라는 희망이 있는 동안”이나 “꿈 같은 나라를 생각하는 동안”이나 “꿈나라를 그리워하는 동안”으로 다듬어 봅니다. “섬의 토박이”는 “섬 토박이”나 “섬사람”으로 손보고, ‘열심(熱心)히’는 ‘힘껏’이나 ‘바지런히’로 손봅니다. ‘기원(祈願)하노라면’은 ‘바라노라면’으로 손질하고, ‘노동(勞動)’은 ‘일’로 손질하며, “상상 속의 섬이 존재(存在)하는 한”은 “꿈나라가 있는 동안”으로 손질합니다.

 

 흥이 절로 났다 (x)
 그저 신바람이 난다 (o)
 신바람이 절로 난다 (o)

 

 보기글을 살피면 처음에는 “흥이 절로 났다”라고 적고, 다음에는 “신바람이 난다”고 거듭 적습니다. ‘흥’이나 ‘신바람’이나 같은 낱말이니 이렇게도 적고 저렇게도 적을 수 있습니다. 적는 사람 마음이요, 적는 사람 나름입니다.

 

 그러나, 앞이나 뒤나 한결같이 ‘신바람’으로 적었다면 어떠했을까 싶습니다. 꼭 ‘興’이라는 낱말을 한 번쯤이라도 적어야 했을까 궁금합니다.

 

 신이 절로 났다
 그저 재미가 난다
 신바람이 절로 난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면, 세 자리 모두 다른 낱말을 넣어 줍니다.

 

 신이 절로 난다
 그저 즐겁기만 하다
 덩실덩실 춤이 절로 나온다

 

 또는, 첫마디는 “신이 절로 난다”로 적은 다음, 뒷자리에서는 아예 다른 말로 풀어내면서 느낌과 뜻을 살려냅니다. “마냥 기쁘기만 하다”라 적어도 괜찮고,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라 적어도 괜찮습니다. “그예 들뜨기만 하다”라 적어도 되며, “춤과 노래가 절로 나온다”라 적어도 됩니다.

 

 우리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니, 우리 땅과 삶과 사람을 한 번 더 살피면서 들려준다면 한결 나으리라 봅니다. 우리 모습을 가리키는 글이니, 우리 터전과 이웃과 겨레를 곰곰이 헤아리면서 적어 준다면 훨씬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4342.5.4.달./4344.12.20.불.ㅎㄲㅅㄱ)

 

 

ㄷ. 흥興 3 : 흥겨움

 

.. 찰리는 두 관악대가 동시에 서로 다른 곡을 연주했던 그날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그날을 가득 채운 소리들과 흥겨움을 작품 속에 표현했습니다 ..  《모디캐이 저스타인/천미나 옮김-찰리는 무엇을 들었을까?》(보물창고,2006) 31쪽

 

 ‘동시(同時)에’는 ‘함께’나 ‘같은 자리에서’로 다듬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동시에’를 덜어도 이 다음에 나오는 ‘서로’라는 낱말이 있어 글흐름이 보드라이 이어지기도 합니다. ‘연주(演奏)했던’은 그대로 둘 수 있고, ‘들려주던’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작품 속에 표현(表現)했습니다”는 “작품으로 담았습니다”나 “작품으로 그렸습니다”나 “작품으로 빚었습니다”나 “작품으로 보여주었습니다”로 손질합니다.

 

 흥겨움
→ 즐거움
→ 신남
→ 신바람
→ 재미
 …

 

 즐거운 일을 떠올리고 기쁜 꿈을 생각합니다. 잃은 기운을 북돋우고 스러지는 힘을 끌어올립니다. 신바람이 나도록 손길을 내밀고, 신이 날 만한 일거리를 찾습니다. 재미난 놀이를 함께하고 서로서로 웃을 만한 놀이감을 헤아립니다.

 

 즐거이 말하면서 즐거이 꿈꿉니다. 신나게 노래하면서 신나게 춤을 춥니다. 재미나게 이야기하면서 재미나게 삶을 일굽니다.

 

 말과 넋과 삶은 늘 한동아리가 됩니다. 말과 넋과 삶은 저마다 아름다이 가꾸고픈 꿈을 바라보면서 씩씩하게 걷는 이 길에서 환하게 빛납니다. (4344.12.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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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1-12-21 15:44   좋아요 0 | URL
국어선생님의 유익한 말씀을 잘 듣고 갑니다.

파란놀 2011-12-21 20:52   좋아요 0 | URL
아이고... 뭘요 (__)
 


 알리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싶어

 


 내가 오늘 쓰는 글이 가장 빛나는 글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나는 하루하루 더 즐거이 누리면서 새로 맞이하는 모레나 글피에 더 빛나는 꿈과 사랑을 실어 글 하나 여밀 수 있으니까. 그러나 어제 쓴 글이 오늘보다 못하거나 아쉽다고 느끼지 않는다. 나로서는 모든 넋과 얼을 기울여 쓴 글이니까, 모자라거나 어수룩하다 느낄 글이란 없다. 하루하루 조금씩 가다듬는다. 날마다 차근차근 북돋운다. 언제나 곰곰이 되새긴다. 늘 기쁘게 받아들인다.

 

 노래하는 알리 님이 어제 부른 노래가 가장 빛나는 노래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앞으로 부를 노래가 한결 빛날 노래라고는 느끼지 않는다. 그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든, 연습실에서 목청을 돋우든, 또는 집에서만 노래를 흥얼거리든, 깊은 멧골이나 사람 발길 없는 바닷가에서 노래를 외치든, 노래 하나로 일구는 삶이라 한다면 어디에서나 언제나 노래사랑과 노래꿈을 펼치리라 믿는다. 더 가다듬어야 할 노래가 아닌 더 사랑하고 아낄 노래를 부르리라 생각한다.

 

 아름답다 여길 만한 좋은 책을 벗삼아 살아가는 사람은 시나브로 깨닫는다. 이 좋은 책을 곁에 골고루 둘 수 있어 아름다운 삶이지 않다. 책을 곁에 두면서 내 목숨을 잇거나 내 생각을 북돋운다고 여길 수 없다. 책이라는 징검돌을 밟고 삶을 사랑하는 길을 헤아리거나 느꼈을 뿐이다.

 

 아름답다 여길 만한 좋은 노래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은 시나브로 깨닫겠지. 이 좋은 노래로 마음을 달래거나 보듬기에 아름다운 삶이지 않다. 노래를 늘 부르면서 내 목숨을 잇거나 내 생각을 북돋운다고 여길 수 없다. 노래라는 섬돌을 밟고 삶을 사랑하는 길을 헤아리거나 느낄 뿐이다.

 

 책이란 없어도 된다. 노래란 없어도 된다. 사랑이 꽃피우는 삶이 있으면 된다. 사랑을 씨앗으로 심는 꿈이 있으면 된다.

 

 나는 글을 쓰면서 살아가겠지. 책이 없어지고 종이가 사라져도 글을 쓰며 살아가겠지. 글은 종이에만 쓰지 않으며, 글은 책으로만 묶이지 않으니까. 살붙이를 쓰다듬는 따스한 손길로 쓰는 글이고, 집식구 옷가지를 정갈히 빨래하고 바느질하는 손자락으로 엮는 책이며, 맑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활짝 펼치는 품으로 일구는 이야기이다.

 

 노래꾼 알리 님은 오래오래 노래하며 살아가리라 생각한다. 노래꾼 알리 님이 온몸과 온마음으로 아로새길 곱고 향긋하며 보드라운 노래결로 온누리를 싱그러이 어루만지리라 생각한다. 무대가 없고 텔레비전이 없으며 음반이 없더라도, 멧새들 노니는 바람결을 타며 이 땅과 이 햇살과 이 바다에 넘실거릴 사랑스러운 노래를 언제 어디에서나 예쁘게 부르리라 생각한다. (4344.12.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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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려받는 책읽기 (김정일)

 


 재벌회사는 으레 아들이나 딸한테 회사와 돈과 주식과 이것저것 골고루 빈틈없이 물려줍니다. 구멍가게는 으레 딸이나 아들한테 가게를 물려줍니다. 시골 흙일꾼은 으레 아들이나 딸한테 논이랑 밭이랑 집이랑 몽땅 물려줍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여느 어버이는 제금 나려는 아이들한테 으레 전세 얻을 돈을 물려주거나 아파트를 한 채 사 주거나 냉장고나 빨래기계나 자가용이나 무어든 한두 가지나 몇 가지를 새로 장만해 줍니다.

 

 모든 푸나무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씨앗을 남깁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고, 믿음은 믿음을 낳습니다. 꿈은 꿈을 낳으며,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습니다.

 

 옛 시골 초등학교 건물 여러 칸에 온갖 책을 빽빽하게 모시는 나는 우리 아이한테 책을 물려줄까요. 책을 읽는 삶을 물려줄까요. 책을 읽으며 빚는 착한 마음결을 물려줄까요. 책으로 담는 아름다운 삶을 물려줄까요. 책으로 적바림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물려줄까요.

 

 북녘땅 사회와 정치를 이끄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북녘땅 사회와 정치를 이끌던 사람은 ‘정치권력 물려받기(세습)’를 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죽은 사람을 헤아립니다. 누구이든 죽음은 슬픕니다. 죽음 앞에서는 웃을 수 없습니다. 다만, 죽음이란 끝이 아닌 이어짐입니다. 누구 한 사람 죽었다 해서 모든 이야기가 묻히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둘레로 살그마니 이어집니다. 한 사람 죽음이 다른 사람한테 어떠한 넋으로 이어질까를 헤아릴 때에 반가울 수 있고 안쓰러울 수 있습니다.

 

 슬픔이 기쁨을 낳는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곱게 죽을 때에는 고운 목숨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어여삐 죽을 때에는 어여쁜 꿈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습니다. 우람한 빗돌을 어마어마하게 세우는 죽음일 때에 슬픕니다. 무거운 빗돌을 보드라운 흙에 단단히 박는 죽음일 때에 안쓰럽습니다. 지렁이는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고, 씀바귀는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며, 해오라기는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갑니다. 사람 또한 흙에서 태어나기에 흙으로 돌아가면서 맑은 넋을 내 아이들과 동무들한테 물려준다면, 싱그러운 빛이 되어 언제라도 다시 태어나며 웃을 수 있어요.

 

 나는 내 어버이한테서 돈이나 집이나 지식을 물려받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내 어버이한테서 사랑과 믿음과 꿈을 물려받고 싶습니다. 나는 내 아이들한테 책과 사진과 일거리를 물려주고 싶지 않습니다. 나 또한 내 아이들한테 사랑과 믿음과 꿈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내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씩씩하게 살아가며 저희 아이들을 낳을 때에도, 우리 아이들이 저희 아이들한테 정갈한 사랑과 따스한 믿음과 너그러운 꿈을 물려주면 참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나라에서 좋은 보금자리를 일구며 좋은 마을살이를 누리고 싶어요. 나부터 좋은 이야기를 오순도순 나누고 싶습니다. (4344.12.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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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하고 책을 읽는 삶

 


 낯을 찡그리는 어버이는 아이한테 찡그린 얼굴을 듬뿍 보여줍니다. 보드라이 웃음꽃 속삭이는 어버이는 아이한테 보드라운 웃음꽃을 잔뜩 보여줍니다. 저녁이 깊어지니 이제 더는 몸을 못 버티겠구나 생각하며 자리에 드러눕습니다. 갓난쟁이 둘째를 내 배에 올려놓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함께 놀기에는 몸이 힘드니까, 드러누워서 갓난쟁이 둘째를 비행기 태웁니다. 좋다며 입을 쩍쩍 벌리는 아이는 까르르 웃습니다. 비행기 태우던 아버지는 몸이 찌뿌둥한 줄 잊습니다. 이렇게 좋아라 하며 웃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몸이며 마음이며 어떠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시계로 따지면 퍽 늦었으니 아이들이 자야 할 때라고 여깁니다. 둘째를 포대기로 업습니다. 바깥으로 나옵니다. 퍽 따스한 밤입니다. 업힌 아이한테 말을 겁니다. 이렇게 캄캄한 밤이잖니, 달빛 밝고 별빛 밝은 밤인데, 너희들 어서 자야 하지 않겠니, 중얼중얼 뇌까립니다. 그러나 업힌 아기는 아버지 머리카락을 한손으로 꾹꾹 잡아당깁니다. 보아 하니 더 놀겠다는 투입니다.

 

 첫째 아이 또한 두 눈에 졸음 가득인데 좀처럼 잠자리에 누울 생각을 안 합니다. 방에 아직 불을 켜고, 어머니는 아직 뜨개질을 하며, 동생 또한 잠들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잠들려던 동생은 첫째 아이가 깨웠어요. 잠들어서 새근새근 토닥일 즈음 첫째 아이가 떠드는 바람에 깼어요.

 

 부엌을 치우고, 첫째 아이 입과 낯과 손을 물로 씻깁니다. 첫째 아이가 늦은 저녁에 감을 먹고 싶다며 손에 쥡니다. 아버지는 그만 얼른 내려놔, 이렇게 늦었는데 무얼 먹니, 아침에 일어나면 줄게, 하고 빽 소리를 지릅니다. 아이는 눈앞에 감이 보여 집었을 뿐인데 아버지는 아이를 생각하지 않고 빽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이가 울먹입니다. 울먹이며 어머니한테 갑니다. 울먹이는 아이를 불러 쉬를 누입니다. 이대로 잠자리로 가면 틀림없이 쉬 마려워, 물 마실래, 하면서 다시 불을 켜고 일어나게 하거든요.

 

 아이들과 어머니와 아버지가 잠자리에 듭니다. 불을 끕니다. 어떻게 생각하든 아버지가 잘못했습니다. 아이한테 미안하다고 나즈막히 말합니다. 내 거친 손으로 아이 볼과 머리를 쓰다듬으며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건넵니다. 이 착하고 예쁜 아이한테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옳게 못하는 일을 뉘우치며 새 아침에는 씩씩하고 어여쁜 아버지 노릇을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좋은 삶을 누리는 아버지일 때에 좋은 책을 읽는 아버지이고, 좋은 책을 읽는 아버지일 때에 아이한테 굳이 책 하나 내밀지 않는 아버지이며, 아이한테 굳이 책 하나 내밀지 않는 아버지일 때에 우리 집 살림살이 알뜰살뜰 여밀 수 있어요. (4344.12.2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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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2-20 16:52   좋아요 0 | URL
감 먹고 싶다고 하건가요? 그런데 된장님께서 소리를 지르셨다구요?
아하하, 저 그 모습이 잘 떠오르질 않는걸요. 항상 잔잔하게 글을 쓰셔서.

자는 모습 참 이쁘네요, 첫째 아가씨.

파란놀 2011-12-20 17:21   좋아요 0 | URL
자야 할 때에 먹겠다고 하니까요 @.@

에구궁.... ㅠ.ㅜ
 

ㄷ. 사진으로 걷는 길
 ― 사진문화와 사진예술에 앞서

 


 더 많이 더 자주 돌아다니는 사람이 더 남다르거나 더 돋보이는 사진을 낳는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온누리 수많은 나라를 골고루 돌아다녔기에 온누리 구석구석 잘 알거나 읽거나 생각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사진이고 삶은 삶이거든요. 사진은 문화가 아닌 사진입니다. 사진은 예술이 아닌 사진입니다. 문화는 문화이지 사진이 아닙니다. 예술 또한 예술이지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문화나 사진예술이나 사진삶이란 따로 없습니다. 사진으로 즐기는 문화일 때에 사진문화이고, 사진으로 빚는 예술일 때에 사진예술이며, 사진으로 일구는 삶일 때에 사진삶이에요. 그러나, 사진을 찍으면서 이것은 문화요 저것은 예술이요 그것은 삶이라 나누지 못합니다. 문화로 누리면서 사진을 함께할 때에 사진문화이고, 예술을 즐기면서 사진을 꽃피울 때에 사진예술이며, 삶을 사랑하면서 사진을 사랑할 때에 사진삶이에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사진을 찍는다 할 때에 앞을 보는 사람보다 ‘못난 사진’이 나오지 않으나, 더 ‘잘난 사진’이 나오지 않아요. 그저 ‘사진이 태어납’니다. 이름난 사진쟁이가 사진을 찍는대서 ‘이름난 사진’이나 ‘거룩한 사진’이나 ‘훌륭한 사진’이 나오지 않아요. 그저 ‘사진을 찍을’ 뿐입니다.

 

 우리 집 네 살 아이가 아버지 사진기로 사진을 찍는다 할 때에도 ‘사진을 찍는’ 일입니다. 예술도 문화도 삶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가 사진놀이를 신나게 즐긴다면, 아이로서는 좋은 사진삶이 돼요. 이 사진삶은 앞으로 사진문화로 달라질 수 있고, 사진예술로 가지를 뻗을 수 있어요.

 

 이렇게 찍어도 좋은 사진입니다. 저렇게 찍어도 즐거운 사진이 돼요. 이렇게 찍으란 법이 없는 사진이듯, 더 많이 더 자주 돌아다닌대서 더 나은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저렇게 써야 아름다운 문학이 되지 않듯이, 조그마한 집에서 아이들하고 복닥이는 나날을 담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라 해서 어설프거나 어수룩하거나 어줍잖은 글·그림·사진일 수 없어요.

 

 마음을 열어야 사진눈을 엽니다. 생각을 키워야 사진빛을 키웁니다. 사랑을 나누어야 사진사랑을 나눕니다.

 

 사진으로 가는 길은 사진이 문화인가 예술인가를 따지는 자리가 아닙니다. 사진으로 가는 길이 즐거울 수 있도록 애쓰는 자리입니다. 사진으로 가는 길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마음을 쏟는 자리입니다.

 

 즐거운 문화이면서 사진입니다. 아름다운 예술이면서 사진입니다. 사랑스러운 삶이면서 사진이에요.

 

 다큐멘터리 사진은 가난한 사람들 머나먼 나라에서 찾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패션사진은 예쁘장한 모델들 예쁘장한 옷을 입히는 스튜디어오에서 만들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예술사진이라면서 아직 아무도 안 찍었다 싶은 모습을 애써 꾸며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비평이라면서 수많은 대학논문처럼 딱딱한 한자말과 영어를 잔뜩 채우면서 도무지 한국말인지 한글인지 알쏭달쏭한 글을 짜깁기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좋은 삶을 아끼면서 좋은 사진을 아끼면 넉넉합니다. 고마운 사람을 사귀면서 나 스스로 고마운 이웃으로 삶을 북돋우면 됩니다. 맑은 바람과 밝은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씩씩하게 자라듯, 맑은 눈길과 밝은 손길로 내 사진기를 돌볼 수 있으면 즐겁습니다. (4344.12.1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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