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아가는 말 84] 가장 좋아

 

 아이랑 즐겨부르는 노래는 노래말을 슬그머니 바꾸곤 합니다. 〈달려라 하니〉를 부르다 보면, “난 있잖아,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하고 나오는데, 나는 아이랑 “세상에서 가장 좋아.”로 바꿉니다. ‘세상’도 바꿀까 하다가 이 낱말은 그대로 둡니다. 아버지가 이 대목을 바꾸면 아이도 차츰 바꾸어 부르는 노래말에 익숙해지겠지요. 우리 아이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가장 좋아” 하고 노래를 부를 텐데, 이 노래를 아는 다른 사람들은 “제일 좋아”가 맞다면서 우리 아이보고 노래말을 바로잡으라 이야기할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노래이기 때문이니까요. 그렇지만 나는 우리 아이하고 서로 좋아하며 즐기는 노래이기 때문에 참으로 사랑스러우면서 좋은 노래말을 붙이고 싶어요. 우리 입에 따사로이 달라붙으면서 싱그러이 북돋울 만한 낱말을 혀로 굴리고 싶어요. 아이도 어른도 서로서로 좋은 말로 좋은 넋을 보살피면서 좋은 날을 일구고 싶어요. 나와 아이는 논문을 읽는 사람이 아니에요. 나와 아이는 논문을 읽더라도 사랑스러울 말마디로 아름답게 읽고 싶어요. 서로를 따뜻하게 보살피는 말꽃과 말빛을 나누고 싶어요. (4344.12.2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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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83] 젖떼기밥

 

 일곱 달째 함께 살아가는 둘째한테 젖떼기밥을 먹입니다. 옆지기가 곡식가루를 따순 물에 살살 타서 조금씩 떠먹입니다. 위아래로 앞니가 둘씩 천천히 나는 둘째는 엄마젖이랑 젖떼기밥을 먹으며 씩씩하게 자랍니다. 때로는 무조각을 쥐어서 갉고, 배춧잎도 입에 넣으며, 미역줄기도 오물오물합니다. 귤은 다 으스러뜨리면서 입으로 쪽쪽 빨아먹으며, 감알이나 배알도 잘 빨아먹습니다. 첫째 아이 젖떼기밥을 끓여서 먹이던 일을 떠올립니다. 젖을 차츰차츰 줄이도록 하는 젖떼기밥을 실컷 먹을 무렵 둘째는 첫째가 했듯이 제 두 다리로 땅을 디디고 설 테지요. 제 두 손으로 젓가락과 숟가락을 쥘 테지요. 손가락에 힘을 주고 손목으로 힘을 받쳐 젓가락질과 숟가락질을 하겠지요. 젖먹이는 젖을 먹으면서 자라고, 젖을 떼면서 밥을 먹습니다. 밥을 먹으면 아기에서 아이로 거듭납니다. 아이는 밥 한 그릇으로 제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살찌웁니다. 아이는 몸을 살찌우는 밥을 받아서 튼튼하게 살아가고, 아이는 마음을 북돋우는 사랑을 받으며 씩씩하게 뛰놉니다. (4344.12.2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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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12-30 08:24   좋아요 0 | URL
일러주신대로 사진을 넣으면서 2mm 여백을 두었더니 보기가 좋군요.
고맙습니다~~ ^^

파란놀 2011-12-30 09:03   좋아요 0 | URL
그리 어렵지 않은 편집기술인데 알려주는 사람이 딱히 없고,
어찌저찌 하다 보니, 이걸 하면 참 좋더라고요~
 


 어머니 품에서 잠들기

 


 졸린 아이가 악악거리다가 어머니 품으로 파고든다. 아이는 그냥 자리에 눕지 않는다. 어머니 품을 파고들려 한다. 아이라서 그럴 테다. 아이라서 모르는 일이 많고, 아이라서 새로 받아들이면서 무럭무럭 마음밭이 자랄 테다. 몸뚱이 커다란 어른이라면 어머니 품에 파고들 수 있을까. 아마 몸뚱이가 파고들지는 못할 테고 머리통만 무르팍에 얹을 수 있으리라.

 

 네 살 아이는 어머니 무릎에 앉아서 어머니가 보는 책을 함께 들여다본다. 멍한 눈길로 바라본다. 졸음이 가득한 눈길로 쳐다본다. 아이는 이내 눕는다. 어머니 한팔을 베개로 삼는다. 어느 만큼 지나, 아이를 안아 자리에 눕힌다. 아이는 깨지 않는다. 깊이 잠들어 오래오래 색색 숨소리를 낸다. 아이를 낳아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라면, 아이가 졸립거나 고단할 때에 언제라도 넉넉하면서 포근히 품을 수 있어야 한다. (4344.12.2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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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 삼베 치마 - 권정생 동시집
권정생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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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곱게 즐거운 꿈을 글줄에 담아서
 [어린이책 읽는 삶 17] 권정생, 《동시 삼베 치마》(문학동네,2011)

 


- 책이름 : 동시 삼베 치마
- 글·그림 : 권정생
- 펴낸곳 : 문학동네 (2011.7.14.)
- 책값 : 14800원

 


 (1) 동시꾸러미 《동시 삼베 치마》 읽는 삶


 아이가 밤에 쉬 마렵다며 잠에서 깨면, 옆지기는 이때에 아이보고 스스로 일어나서 오줌그릇으로 걸어가서 누이도록 시킵니다. 옆방에 불을 켜거나 손전등을 켜라고 시킵니다. 오줌을 누고 난 아이가 스스로 불을 끄고 잠자리에 다시 들며 이불을 스스로 여미도록 시킵니다. 아이는 제 어머니가 이처럼 시키면 잘 따릅니다.

 

 아이는 곁에 아버지가 있으면 아버지를 불러 안아 달라 이야기합니다. 오줌을 누고는 바지를 올려 달라 이야기합니다. 아버지는 아이를 안쓰러이 여기고, 이 아이가 앞으로 한두 살 더 먹으면 이렇게 안기도 벅차도록 자라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아이를 안고 다닐 수 있는 날이란, 밤오줌 누는 아이를 안고 자리에 눕히는 일이란, 그야말로 몇 번 안 남았으리라 느껴요.

 

 아버지가 잘한다고 느끼지 않아요. 아이가 스스로 씩씩하게 크도록 이끌어야 할 어버이로서 제대로 못한다고 느껴요. 제대로 아이 마음으로 다가서지 못할 뿐더러, 아이 키높이에 맞추며 바라보지 못하는구나 싶어요.


.. 그라곤 / 고것 말있다 / 한창 보리고갯때 / 칡뿌리떡 쫌 안 준다꼬 / 쌈한 뒤 / 상굿 말 안 하고 지난 / 가스나아야! ..  (쑥절편)


 집안일을 한대서 더 낫다 싶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집안일을 안 한대서 더 못난 아버지가 아닙니다. 집안일을 군말없이 맡으면서 아이들도 알뜰히 보살핀다면 더 낫다 싶은 어머니일까요. 집안일은 허술하고 아이들도 알뜰히 아낄 줄 모른다면 더 못난 어머니일까요.

 

 사람이 먹는 감알을 주렁주렁 달 때에 좋은 감나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 먹을 감알을 거의 맺지 못하니까 밉거나 나쁜 감나무이지 않습니다.

 

 가을걷이 코앞에 노란 들판을 휩쓰는 메뚜기는 나쁜 벌레일까요. 한창 무리익는 논에 무시무시하게 찾아오는 드센 비바람은 나쁜 자연일까요. 한겨울 찬바람이나 한여름 뙤약볕이 나쁘다고 느끼지 않아요. 여름날 끝없는 빗줄기나 겨울날 펑펑펑 흰눈이 나쁘다고 느끼지 않아요. 밭을 금세 집어삼키는 풀포기이든, 나무를 타고 오르는 덩굴줄기이든, 저마다 살아가는 뜻과 꿈과 넋이 있다고 느껴요.


.. 난 이렇게 / 눈이 커다만 말라굉이고 / 그래도 / 고까옷 입은 새야 / 나하고 동무해 줄래? ..  (고까운 입은 새야)


 나는 어떤 마음이 되어 우리 집 살붙이를 바라보는가 헤아립니다. 내 옆지기는 어떤 마음으로 나와 두 아이를 바라보는가 돌아봅니다. 두 아이는 저마다 어떤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저희 어버이를 바라볼는가 곱씹습니다.

 

 어떤 꿈이 우리 보금자리에 깃들도록 하는가요. 어떤 사랑이 이 보금자리에 감돌도록 하는가요. 어떤 빛이 이곳과 이 마을에 서리도록 하는가요.

 

 날마다 아침·낮·저녁으로 아이들 기저귀를 빨아 말리고 걷어서 갭니다. 첫째 아이는 세 해 남짓 기저귀를 내놓았고, 첫째 아이 기저귀 빨래가 끝나니, 곧이어 둘째 아이 기저귀 빨래가 나옵니다. 아침에는 엊저녁 기저귀 빨래를 갭니다. 낮에는 아침 빨래 기저귀를 갭니다. 저녁에는 낮 빨래 기저귀를 갭니다.

 

 아주 마땅히 날마다 집식구 밥을 헤아립니다. 오늘 하루 네 식구 무얼 먹으며 좋은 숨결 몸뚱이에 깃들도록 할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기쁘게 먹으며 즐거이 살아가면 좋겠다고 꿈꿉니다. 그런데, 나는 이 밥을 조금 더 살뜰히 돌아보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밥을 깊이 헤아리지 못한 지난날이었기 때문일까요. 밥을 찬찬히 사랑하지 않던 나날이 오래도록 쌓였기 때문일까요.


.. 다섯 밤 자고 나서 / 양돼지 잡던 날 / 분홍치마 입은 누나는 / 꼬꼬재배 절하고 / 시집갔다 // 지난밤 / 꽃주머니랑 / 종이배랑 / 만들어 주며 / 찔끔찔끔 울던 누나 ..  (꽃가마)


 국민학생 때에는 노느라 바쁘니, 틈틈이 심부름을 한다지만 막상 부엌일을 선뜻 나서며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사내 아닌 가시내였을 때에도 바깥에서 뛰놀기만 할 수 있었을까 궁금하지만, 나 스스로 날마다 먹는 밥을 스스로 마련하거나 살붙이하고 나누도록 품과 땀과 겨를을 들인다는 대목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으로 지내는 동안, 오직 더 높다 하는 대학교에 붙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도시락만 날름 받아먹을 뿐, 스스로 도시락을 싼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에는 바깥밥 사먹기에 빠져듭니다. 그나마 신문보급소 배달 일꾼으로 지내면서 도시락을 손수 쌉니다. 그러나 안 하던 일은 익숙하지 않기 마련이라, 도시락 싸기는 이내 그만두고, 신문자전거를 타고 대학교와 보급소를 싱싱 달리면서 신문보급소에서 손수 낮밥을 차려 먹었어요.

 

 출판사에서 일하며 도시락 싸기를 다시 하는데, 밥이야 어릴 적부터 늘 했으니 어려울 일 없는데, 반찬 해서 싸는 일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밥하기에 마음과 품과 겨를을 내 버릇하지 않는 삶이었으니, 내 입맛이든 함께 밥먹는 사람들 입맛이든 돌아보지 못해요. 기쁘게 나눌 밥상을 꿈꾸지 못합니다.


.. 탑촌 마을에 / 봄이 와도 / 누나가 없어 / 쑥나물이 귀해졌단다 ..  (쑥나물)


 무엇보다도 아름답게 꾸릴 삶을 생각하지 못해요. 착하게 누릴 삶을 꿈꾸지 못해요. 고맙게 즐길 삶을 헤아리지 못해요. 밥이라 한다면, 아름답게 꾸리는 삶에 아름답게 나누는 밥입니다. 옷이라 한다면, 착하게 누리는 삶에 착하게 입는 옷입니다. 집이라 한다면, 고맙게 즐기는 삶에 고맙게 보듬는 집이에요.

 

 나는 어린 나날부터 아름답게 꾸릴 삶과 밥, 착하게 누릴 삶과 옷, 고맙게 즐길 삶과 집을 듣지 못하고 배우지 못했으며 느끼지 못했어요.

 

 밥상에 반찬을 열 몇 가지 올려야 하지 않아요. 반찬은 소금과 간장으로도 넉넉해요. 들판과 멧자락에서 풀을 뜯어서 먹을 수 있어요. 곡식가루를 알맞게 오래 씹으며 먹을 수 있어요. 누런쌀을 백 번 넘게 야금야금 씹으며 먹을 수 있어요.

 

 가만히 돌이키면, 날쌀 그대로 먹을 때에 어떤 맛인가를 겪지 못했습니다. 둘레 어른 가운데 이렇게 먹는 사람이 없기도 했지만, 왜 나는 나 스스로 이 쌀을 굳이 물에 끓이지 않고 날로 먹어도 되는 줄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감이든 오이이든 능금이든 다들 날것 그대로 먹는데. 다만, 무와 배추를 왜 고추가루를 잔뜩 넣어 맵고 시큼하게 먹어야 하는가 궁금했습니다. 절이지 않고 날것으로 먹으면 될 텐데. 왜 김치로만 먹어야 하지?


.. 나랑 살잖고 혼자 갔기 때매 / 나 없이도 누난 좋아 갔기 때매 // 코딱지 동네 / 코딱지 동네! ..  (누나 사는 동네)


 인천에서 태어난 나와 형은 내 어버이 태어난 충청남도 당진이나 예산에 찾아가곤 했습니다. 인천에서는 달걀이 ‘닭이 낳은 알’인 줄을 알기는 해도, 달걀이라는 이름 때문에 알 뿐, 막상 닭이 알을 낳는 모습이라든가, 닭이 알을 품는 모습이라든가, 닭우리에서 달걀을 꺼내어 먹는다든가, 달걀을 품은 암탉이 스물하루 만에 새끼를 까서 병아리로 키우는 모습이라든가, 찬찬히 바라본 적이 없습니다. 내 어버이를 낳은 어버이가 태어나 자라던 시골집에서 ‘닭이 낳은 알’을 처음으로 느꼈어요.

 

 국민학교 다니던 때에 학교 사육장을 사학년부터 돌보고 청소하는 일을 맡았어요. 이때에 두 번째로 달걀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어요. 닭한테서 고맙게 얻는 달걀이지, 공장에서 찍어내는 달걀이 아니었어요. 닭공장에서 암탉이 알 낳는 기계처럼 부린다지만, 공장에서 척척 뿜어내는 달걀이 아니라 ‘목숨 있는 암탉’이 ‘제 목숨을 나누어 내놓는 달걀’이었어요.

 

 사육장 청소당번을 육학년으로 끝내지 않고 중학생 때에도 이었다면, 내가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먹는 목숨’을 더 깊고 더 넓게 살피는 눈썰미를 스스로 찾으려 했을 수 있겠지요. 아니, 나 스스로 내 삶을 더 너그럽게 아끼며 사랑했다면, 나 스스로 ‘먹는 목숨’과 ‘먹는 삶’을 옳게 깨우치려고 힘썼겠지요.


.. 매운 바람은 불고 / 곡식은 거두어졌는데 / 허수아비 그대로 / 지키고 섰다 ..  (허수아비)


 인천에서 다닌 초·중·고등학교(1982∼1993)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교사들이 몽둥이를 휘두르고 손찌검과 발길질이 춤추었습니다. 동무들은 툭하면 다툼질이자 주먹질이고, 따돌리기와 괴롭히기는 끝이 없었어요. 교사들은 시험성적 높이는 데에만 마음을 쓸 뿐, 푸른 사람이 푸르게 빚는 꿈을 다독이지 못했어요. 둘레 어른들은 내 또래 동무들한테 버젓이 까치담배를 팔고 술을 팔았어요. 또래 동무들은 ‘아버지 심부름’이라는 핑계조차 안 대었어요. 그냥 ‘술 주세요.’ 하면서 술을 사다가 보충수업과 자율학습 땡땡이 치고는 어디에선가 숨어서 마셨어요. 나는 중·고등학교 여섯 해를 다니며 ‘생각하기’를 스스로 멈추었어요. 도시락도 밥도 옷도 집도 삶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폭력과 바보짓과 시험공부로만 가득하고, 햇볕 한 줌 쬘 수 없는 여섯 해를 따돌리기와 괴롭히기에서 홀가분하게 살아남자면, 아니 이런 구렁텅이에서 용케 살아남자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 생각하기’로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루 빨리 이곳(인천)을 떠나자, 어서 자라 이곳(인천)하고 멀리 떨어진 데에서 살자, 앞으로 이곳(인천)에서 무슨 돈을 벌 수 있겠니, 동네 깡패와 건달이 싫으며 무섭고, 그렇다고 스스로 자연을 찾아 길을 나선다는 꿈은 듣도 보도 못한 채 스무 살로 건너뛰는데, 이렇게 건너뛰면서 거쳐야 하는 곳은 군대입니다.

 

 남자이니까, 남자라서, 군대라는 스물여섯 고개를 어떻게 넘어야 하는가로 까마득한 나머지, 삶을 살리는 밥이든 삶을 북돋우는 옷이든 삶을 사랑하는 집이든, 하나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푸른 나날을 흘리고 말아요. 사람을 죽이는 재주를 가르친다며 주먹다짐과 우격다짐이 넘실거리는 스물여섯 고개 군대에서 젊은 나날을 보내면서, 또다시 ‘삶·사람·사랑’하고는 등을 진 채 생각을 또 멈춥니다.


.. 곰방대로 얻어맞고 / 담뱃재만 뒤집어쓰고 // “그래도 넌 좋니?” // “안 좋으면 어쩌니 / 본래 재떨이가 된 걸 뭐” ..  (재떨이)


 삶으로 읽는 책입니다. 지식으로 읽는 책이 아닙니다. 내 삶에 걸맞게 내 삶을 이끄는 책을 만납니다. 내 삶을 스스로 일굴 줄 아는 사람이라면, 애써 책에 기대지 않아요. 스스로 땀을 흘리고 스스로 두 다리로 우뚝 서면서 살아가요.

 

 누군가는 종이책을 읽습니다. 누군가는 흙책을 읽습니다. 누군가는 전자책을 읽는다지만, 누군가는 호미책이나 괭이책이나 부엌칼책이나 기저귀책을 읽어요. 훌륭하다는 이름 박힌 종이책이나 전자책을 읽는대서 책읽기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들 ‘독서’는 ‘지식읽기’예요. 책읽기라는 이름은 ‘삶읽기’일 때에 비로소 걸맞습니다.

 

 나는 아직 삶읽기를 올바로 할 줄 모릅니다. 삶읽기를 하고픈 꿈으로 하루하루 맞이할 뿐입니다. 그래서 나 또한 아직 삶읽기 아닌 지식읽기에 얽매인다고 느껴요. 지식읽기를 말끔히 털지 못했구나 싶어요. 먼저 삶읽기를 할 수 있어야 사람읽기를 합니다. 사람읽기를 한다면 바야흐로 사랑읽기를 할 수 있어요.

 

 권정생 할아버지 옛날 동시꾸러미를 책으로 만나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나는 이 동시꾸러미를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나는 이 동시꾸러미를 읽으며 우리 살붙이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동시꾸러미를 다 읽고 나서 내 삶을 얼마나 돌볼 수 있을까.

 


 (2) 권정생 할아버지와 안도현 시인


 권정생 할아버지가 할아버지 아닌 젊은이였을 때에 적바림해 두었다는 동시를 그러모은 《동시 삼베 치마》를 읽습니다. 권정생 할아버지가 흙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비로소 책으로 나온 《동시 삼베 치마》인데, 아마 흙으로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도무지 책으로 나올 수 없었을 테지요. 권정생 할아버지와 이오덕 할아버지가 주고받은 편지 또한 두 분 모두 흙으로 돌아가고도 한참 지나고 또 한참 지나고 나면 책으로 나올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혼자서, 또 동무하고 나누기만 할 뿐,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얘기일 때에는, 책으로 내지 않는 일이 아름답다고 느껴요.

 

 어떻든 《동시 삼베 치마》는 우리 앞에 선보입니다. 이 글꾸러미가 책으로 나왔대서 ‘빛을 보았다’고는 할 수 없어요. 권정생 할아버지는 부러 이 글꾸러미를 내놓지 않았으니까요. 선보일 마음이 아니라 가슴에 묻을 마음이었고, 드러낼 뜻이 아니라 곱게 아로새기려는 뜻이었겠지요.


.. 돌담 너머 / 대추나무 밑이 / 따사해서 / 아이들이 꼬마 살림 차렸다 ..  (소꼽놀이)


 책끝에 안도현 시인이 덧단 글을 읽으며 가슴 한켠이 싸합니다. 권정생 할아버지가 흙으로 돌아가고 난 다음에도 권정생 할아버지 마음을 이토록 몰라주어도 되나 싶어 가슴 한켠이 싸합니다.

 

 안도현 시인은 “남안동IC로 빠져나가면 단박에 조탑동 선생님 댁에 닿는다. 하지만 그냥 지나친 적도 많다.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 마음으로 반성문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두세 평쯤 되는 선생님의 방은 딱 한 사람이 누울 만한 잠자리, 천장에 닿을 정도로 높게 쌓인 책, 조그마한 휴대용 가스레인지와 소반 하나(185∼186쪽)” 하고 말하는데, 권정생 ‘선생님’ 아닌 ‘할아버지’가 수수하게 살아간대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 앞에서 부끄럽다고 느낄 까닭이 없어요. 가난하게 산대서 더 거룩하지 않으니까요. 스스로 돈과 물질문명을 안 누린대서 더 훌륭하지 않으니까요.

 

 권정생 할아버지는 권정생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결대로 사랑하며 살아가요. 권정생 할아버지는 당신 몸에 맞게 당신 마음을 돌보면서 살아가요. 권정생 할아버지로서 가장 마음이 홀가분하면서 따뜻하고 넉넉한 살림을 꾸릴 뿐이에요. 안도현 시인은 안도현 시인대로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며 누리고픈 대로 삶을 일굽니다.


.. 바위 꼭대기에 올라서 보면 / 아랫바닷물도 파아랗고 / 윗하늘 빛도 파아랗고 ..  (바다와 하늘)


 안도현 시인은 “나는 나의 아파트 평수와 승용차, 냉장고 속에 든 식탐의 덩어리들, 그리고 신발장의 수많은 신발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자꾸 높은 곳을 쳐다보며 사는데 선생님은 자신을 낮추기 위해 살고 계신다는 생각! 그래서 나는 괴로웠다(185쪽).” 하고 또 이야기하지만, 이 말도 참 안타깝습니다. 안도현 시인이 ‘높은 곳’을 바라본다고요? 아니에요. 안도현 시인은 물질문명만 바라보잖아요.

 

 물질문명은 높은 곳이 될 수 없어요. 그리고, 권정생 할아버지처럼 살림을 꾸리는 일은 ‘낮은 곳’이 되지 않아요. 더더구나, 권정생 할아버지처럼 살림을 돌보는 일이 ‘높은 곳’이라 할 수 없어요.

 

 저마다 꾸리는 삶이에요. 저마다 제 마음과 꿈과 사랑에 따라 살아가는 나날이에요.

 

 안도현 시인이 ‘승용차를 버리지 않는’대서 나쁜 사람일 수 없어요. 어떤 넋과 얼과 마음으로 승용차를 타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권정생 할아버지는 안도현 시인을 나무라지 않아요. ‘텅텅 빈 마음으로 허우적거리듯 물질문명에서 맴도는 사람’을 슬프게 바라볼 뿐이에요. 찬찬히 타이르면서 ‘좋은 곳’으로 함께 가자고 손을 내밀 뿐이에요.


.. “난 누렁 물감 가지고 / 농사꾼 아빠들이 지어 논 / 곡식들로 갈 테야” // 가을바람들이 / 가만가만 얘기하고 / 제각기 흩어져 갔다 // 산이랑 들판을 / 곱기곱기 칠했다 ..  (가을바람)


 안도현 시인은 커다란 아파트에서 살아가는가 보지요. 그래, 커다란 아파트이든 작은 아파트이든 무엇이 대수롭겠습니까. 하나도 대수롭지 않아요. 큰 아파트에서 살면 나쁘고, 작은 아파트에서 살면 좋은가요.

 

 오늘날은 거의 모두 아파트에서 살며, ‘아파트에서 아직 못 사는’ 사람은 아파트에서 살아가려 합니다. 그러면, 안도현 시인은 이런 사람들 마음을 달래면서 타이를 만한 글을 쓰면 되지요. 스스로 부끄럽다고 여길 일이 없어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요. 스스로 좋아하는 곳에서 스스로 사랑할 사람을 아끼며 글을 써서 사랑꽃을 피워야지요.


.. 딴 아이들이 두 자 쓸 동안 / 한 자밖에 못 쓰는 / 몽당연필 ..  (몽당연필)


 권정생 할아버지‘처럼’ 산다든지, 권정생 할아버지‘와 똑같이’ 살아야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에요. 안도현은 안도현처럼 살고 권정생은 권정생처럼 살 뿐이에요.

 

 권정생 할아버지가 늘 말씀하셨잖아요. 그렇게 ‘권정생이 부럽고 거룩하며 훌륭하다’면 ‘나처럼 아파’해 달라고요. 권정생 할아버지가 받아들여야 하는 아픈 몸뚱이를 함께 물려받으면서 아파해 달라고 말씀하셨어요.

 

 권정생 할아버지가 읊은 이야기만 듣고 부끄러이 여길 까닭이 없어요. 권정생 할아버지는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이에요. 이 나라 아이들이 걱정스럽고, 이 나라 아이들을 보살피는 어른들이 근심스러우니까, 해야 할 말을 했을 뿐이에요.

 

 해야 할 말을 할 뿐이니까, 에돌아 말하지 않아요. ‘승용차를 버려야 이라크 파병을 안 할 수 있다’는 말이 고갱이예요. 한미자유무역협정은 어떠할까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미자유무역협정을 떨칠 수 있을까요. 4대강사업은 어떻지요. 국가보안법은 어떠한가요. 사람들 스스로, 그러니까 나 스스로 무엇을 어디에서 어떻게 해야 이 모든 슬픈 쇠사슬을 훌훌 털거나 벗을 수 있을까요.


.. 들길 바람 부는 숲 그늘에 / 코스모스 엄마도 없이 / 혼자 핐다 // 코스모스 고향은 / 서양 먼 나라 / 바다 건너 산 너머 / 아득히 먼 곳 // 달빛 고운 밤이면 / 고향 생각나 / 엄마 보고 싶어 / 울기도 하고 // 헤어진 동무들 / 꿈도 꿔 보고 // 그러다가 / 아침 해 화안히 뜰 때 / 여태껏 키워 준 / 이곳 강변이 고마워 // 코스모스 / 엄마 아빠 없어도 / 혼자 배시시 웃는다 ..  (코스모스)


 권정생 할아버지는 대단한 어른이 아니에요. 권정생 할아버지는 온삶을 아픔을 붙안으며 누린 어른이에요. 당신과 살가웠던 이오덕 할아버지라든지 전우익 할아버지 또한 대단한 어른이 아니에요. 이오덕은 이오덕대로 온삶을 수많은 일을 붙잡으며 누린 어른이고, 전우익은 전우익대로 온삶을 흙땅을 붙들며 누린 어른이에요. 저마다 가장 잘 할 수 있고, 가장 사랑할 수 있으며, 가장 누릴 수 있는 길을 걸었어요. 이 마음바탕이 삶바탕이 되고, 이 삶바탕이 사랑바탕이 되면서, 동무와 이웃을 곱게 껴안거나 어루만지는 빛줄기를 보았어요.


.. 아아니? / 호박 넝쿨 서로 고개 숙이고 / 사알짝 비키며 간다 ..  (호박 넝쿨)


 나는 《동시 삼베 치마》라는 동시책이 널리 읽히거나 두루 알릴 만한 동시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가만히 보면, 권정생 할아버지는 당신이 쓴 글을 더 널리 읽히거나 더 두루 알리려 한 적이 없어요. 몽당연필로 글을 쓰듯 겨우겨우 원고지 한두 장을 채운 권정생 할아버지는 이토록 아픈 몸으로도 꼭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말이 술술 흘러나왔어요. 술술 흘러나오는 말을 하나하나 그러모으면서 사랑꽃을 피우려 했어요.

 

 백만 사람이 읽든 천만 사람이 읽든 십만 사람이 읽든, 이렁저렁 널리 알려지거나 읽힐 만하지는 않다 싶은 권정생 할아버지 글이에요. 왜냐하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너무 껍데기와 겉치레에 얽매이잖아요.

 

 책은 지식이 아닌걸요. 책은 정보가 아닌데요. 책은 자격증이 아니잖아요. 책은 시험공부하고 동떨어져요.

 

 권정생 할아버지 동화책을 읽히는 어버이나 어른이 아이한테 독후감 숙제를 내놓으라 한다면, 권정생 할아버지 동화책을 왜 읽히는가 돌아봐야 해요. 동화책 독후감 숙제 때문에 권정생 할아버지 글을 읽힌다면, 얼마나 슬프며 모진 노릇인가요.

 

 명작이요 걸작이라서 권정생 할아버지 글을 읽히나요. 〈강아지똥〉을 그림책으로 만들고 만화영화로 만든다 해서 권정생 할아버지가 〈강아지똥〉에 담은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나요. 그림책과 만화영화를 보았기에 권정생 할아버지 넋과 눈물과 한숨을 읽나요.


.. 산은 숨을 쉬고 있다 / 산은 자라고 있다 // 그러길래 철마다 / 빨강 옷이랑 / 파랑 옷이랑 / 곱게 갈아입지 ..  (산)


 글과 그림과 만화로 민들레랑 강아지똥을 보아야 하지 않아요. 민들레와 강아지똥은 우리 둘레에 참 많아요.

 

 토박이 민들레는 얼마 없고 서양 민들레만 잔뜩 있다지만, 토박이 민들레는 언제부터 토박이 민들레였나요.

 

 박 아닌 호박은 언제부터 토박이 호박이었을까요. 감자는, 고구마는, 당근은, 토마토는, 배추는, 무는, 양파는, 고추는, 언제부터 이 나라 이 겨레가 즐기던 푸성귀나 먹을거리였을까요.

 

 권정생 할아버지 글을 새롭게 읽을 수 있기에, 고마우면서 반가운 《동시 삼베 치마》예요. 당신 목소리를 새삼스레 되돌아보면서 내 마음을 촉촉히 적실 수 있어, 기쁘면서 아름다운 《동시 삼베 치마》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이 동시책을 읽은 내 삶은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는가요.


.. 나팔꽃이 / 치마 입고 / 사진 찍어 달란다 // 해가 화다알짝 / 고울 때 찍어 달란다 ..  (나팔꽃)


 해가 화다알짝 곱습니다. 해님이 화안하게 예쁩니다. 해는 착하고 달은 착하며 구름은 착합니다. 누구한테나 똑같이 착한 손길입니다. 누구나 똑같이 착한 꿈과 사랑을 받아먹습니다. 그리고, 나는 누구한테나 똑같이 착한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 해님이 화안하게 / 쓸어 놓았다 // 두껍이가 외갓집 간다고 / 일찍 나섰다 ..  (아침길)


 1960년대에 쓴 글이든, 1980년대에 쓴 글이든, 2000년대에 쓴 글이든, 이 글이 더 좋거나 저 글은 좀 어수룩하거나 하고 가를 수 없습니다. 어떠한 글이든 읽는 그때에 나한테 가장 좋은 글입니다. 어떠한 글이든 내 눈으로 바라보고 내 귀로 들으며 내 가슴으로 스미는 그때에 가장 반가운 이야기예요.

 

 냉장고에서 며칠 묵은 시금치를 꺼내어 헹구고 무친다면, 오늘 먹는 시금치예요. 밭에서 막 따서 흙을 털어 곧바로 냠냠한다면, 이 또한 오늘 먹는 시금치예요.

 

 가게에서 산 시금치랑 밭에서 딴 시금치는 맛이 다르겠지요. 풀약과 비료를 머금은 시금치랑 흙하고 햇살을 먹은 시금치는 맛이 또 다를 테지요.

 

 스스로 어느 쪽이 더 좋은가를 생각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면 돼요. 어느 쪽으로 갔기에 더 모자라거나 바보스럽다 가를 수 없어요. 어느 쪽으로 갔으니까 더 훌륭하거나 거룩하다 여길 수 없어요. 내가 선 이곳에서 씩씩하며 튼튼하게 살아가면 즐거워요.


.. 설날은 / 착한 나라에서 / 오시는 손님 / 누구에게나 꼭 같이 / 나이 한 살 갖다주고 / 아름다운 꿈을 / 안겨다 준다 ..  (설날)


 곱게 즐거운 꿈을 글줄에 담아서 살아온 권정생 할아버지라고 느껴요. 밝게 따스한 넋을 글줄에 실으며 살아온 권정생 할아버지로구나 싶어요.

 

 이래저래 가르지 말아요. 요리조리 금을 긋지 말아요. 참말 가장 맑은 물을 마셔요. 참말 가장 빛나는 햇살을 먹어요. 참말 가장 구수한 밥을 먹어요.

 

 밤마다 번쩍번쩍 빛나는 서울이라지만, 서울이 이토록 밤별을 밀어내며 전깃불만 가득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서울에서도 밤하늘 빛무지개가 넘실거리던 때는 아주 먼 옛날이 아니에요. 아름다움이 몽땅 시멘트랑 아스팔트 밑에 묻혔다지만, 사람들 가슴에서까지 꽁꽁 묻히거나 갇히지는 않아요. 마음속에서 조용히 살아숨쉬는 사랑씨 곱게 보듬으면 좋겠어요. 서로서로 아끼면서 보살피는 어여쁜 사랑씨 착하게 보살피면 좋겠어요. 《동시 삼베 치마》를 고맙게 읽으면서 내 손길이 내 둘레 살붙이랑 동무랑 이웃 누구한테나 따사로우면서 너그럽도록 빙긋 웃으며 살아가면 좋겠어요. (4344.12.2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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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으로 쓴 시를 타자로 옮기기

 


 우리 집 두 아이가 앞으로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함께 읽어야지 생각하면서 동시를 썼다. 출판사에 보내려고 보름쯤 걸쳐 손으로 원고지에 정갈하게 옮겨적었다. 옮겨적으면서 처음 쓴 글을 손질하고 줄 나누기를 새로 했다. 오늘 아침 겨우 일을 마무리짓고 봉투에 넣어 부치기 앞서, 출판사 주소를 제대로 알아보려고 전화를 건다. 내가 동시꾸러미를 보내려 하는 출판사는 서울과 파주에 따로 일터를 두고 나누어졌기에. 전화를 받은 분은 손 원고를 따로 받지 않는다며, 복사한 것이라면 보내도 된다고 하지만, 셈틀을 아예 못 쓰는 나이드신 분들 글이 아니라면 파일로 받는다고 이야기한다. 전화를 끊고 곰곰이 생각한다. 어차피 책으로 나올 수 있다면 다시 파일로 꾸며야 하는 글일 테지. 그렇다면 처음부터 시를 셈틀을 켜고 썼어야 했을까. 아니다. 나는 아이들과 복닥이면서 수첩이 되건 한쪽만 빈 종이가 되건 어디에건 끄적여 놓았다. 이렇게 끄적인 시를 나중에 자그마한 빈책에 하나하나 정갈하게 옮겨적었다. 이렇게 옮겨적은 시를 원고지에 하나하나 다시 옮겨적었다. 띄어쓰기를 옳게 맞추며 글을 넘겨야 할 테니까.

 

 글꾸러미는 나한테 남는다. 바지런히 타자로 옮긴다. 파일을 출판사 편집자한테 보낸다. 이제는 기다리면 된다. 예쁘게 사랑해 줄는지, 이만 한 글은 책으로 낼 만한 그릇이나 깜냥이 못 된다고 이야기해 줄는지는 알 길이 없다. 나와 옆지기와 두 아이가 사랑해 줄 만하면 넉넉할는지, 우리 형과 음성 어버이와 일산 어버이가 함께 즐거워 해 준다면 흐뭇할는지, 가까운 여러 벗과 이웃이 살가이 헤아린다면 고마울는지 모르겠다. 이제 내 손을 떠난 글꾸러미이기 때문에 나는 이 동시꾸러미가 더는 내 글이라고 여길 수 없다. 엊그제부터 101번째 새 동시를 쓴다.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면서 마음을 느긋하게 다스리면서 글 하나 여밀 겨를이란 참 빠듯하다. 아이들은 저희를 바라보고 저희와 얘기하기를 바라겠지. 그러고 보면, 아이들뿐 아니라 옆지기 또한 서로서로 마주보며 사랑스러운 마음길을 열기를 더 좋아하지 않겠나. 밤 열한 시가 가깝도록 잠들지 못하는 둘째를 억지로 씻겼다. 아이가 얼굴을 너무 간지러워 하니, 졸음이 쏟아지더라도 울음소리를 들으며 씻겼다. 새근새근 잠든 아이들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이렇게 울며 불며 한다면 노래를 조곤조곤 부르며 더 부드럽고 상냥한 몸짓과 말씨로 다독여야지, 우격다짐하듯 씻겨서 되느냐고, 언제나 뒤늦게 이런 모습을 돌아본다고, 참 어리석고 어설픈 아버지라고 다시금 느껴 부끄럽다. (4344.12.2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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