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쏟은 어린이

 


 아이가 밥먹다가 딴짓을 하는 동안 아이 어머니가 밥상을 치운다. 빈 그릇이랑 아이 수저를 설거지 할 자리로 치운다. 배부르다며 그만 먹고 놀던 아이가 와서는 더 먹으려 하는데 수저를 왜 치웠느냐고 어머니한테 따진다. 이러다가 밥그릇을 엎는다. 밥그릇을 엎고는 운다. 수저랑 찍개를 주니 그제서야 울먹울먹하다가 울음을 그치고는 흘린 밥알을 하나하나 담는다. 부엌 바닥이 미끌덩하다. 쏟을 때에도 참말 어쩜 볶음밥을 해서 주었을 때에 쏟니. 부엌 바닥 여러 날 걸레질 안 했으니, 이참에 걸레질 좀 하라는 뜻이니. (4345.1.7.흙.ㅎㄲㅅ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BRINY 2012-01-07 19:19   좋아요 0 | URL
오징어숙회에만 눈이 갑니다. 맛나겠습니다.

파란놀 2012-01-07 20:37   좋아요 0 | URL
아... 고흥에서는 언제나 갓 잡은 갑오징어를
싱싱하고 값싸게 먹을 수 있어 좋답니다..
^^;;;

에구구 ~~ 미안해요~~
 


 산들보라 오징어 먹기

 


 위아래 앞니가 둘씩 제법 자란 둘째 아이가 오징어를 문다. 이제 다른 식구들이 무언가 먹으면 저도 먹고 싶은지 입을 짭짭거리며 다가온다. 무어든 손에 쥐어 주면 입에 넣으면서 갉거나 핥는다. 읍내에서 장만한 갑오징어데침 작은 발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한다. 어금니 아직 안 났으니 제대로 씹지는 못하고 앞니로 오물거린다. 옆에서 지켜보던 첫째 아이가 갑오징어데침 몸통 하나를 입에 넣고는 동생 모습을 따라한다. 둘 다 잘나셨어. (4345.1.7.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을 읽는 발바닥

 


 아이 발바닥을 들여다본다. 아이 발가락을 살핀다. 어제 겨우 내 손발톱을 깎았다. 엊저녁 내 손발톱 깎기를 더 미루다가는 안 되겠다고 여긴다. 내 손발톱을 깎는 몇 분이 아깝다고 여긴다기보다, 내 손발톱을 깎아야겠다고 생각할 만큼 느긋하게 쉬지 못한다. 그러나 나한테 하루에 몇 분이라도 느긋한 때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손발톱을 깎는다. 아마 오늘이나 모레쯤 아이들 손발톱을 또 깎아야 하지 싶다. 아이들 손발톱을 세 차례쯤 깎고서야 내 손발톱을 겨우 깎는다. 두 아이를 거의 날마다 씻기면서 내 몸은 이레에 한 차례쯤 가까스로 씻는다. 아이들을 날마다 씻기고는 싶은데, 바깥일을 하며 힘을 많이 쓴 날은 차마 엄두가 안 나곤 한다. 엄두가 안 나더라도 아이들 씻기고 보면 또 어디에선가 새 힘이 솟곤 한다. 그렇기는 한데, 두 아이를 나란히 씻기고, 아이들 씻긴 물로 빨래를 하노라면, 그야말로 온 등허리와 팔다리 안 쑤시는 데가 없다. 내 어머니는 두 아들을 어떻게 씻기면서 집살림을 돌보셨을까. 내 어머니는 언제부터 두 아들이 스스로 씻을 수 있으면서 조금이나마 집일에 한숨을 돌릴 수 있었을까.

 

 가만히 앉아 책을 읽는 아이 발바닥을 들여다본다. 아이가 책을 읽으며 조용하기에 나는 모처럼 기지개를 켜며 살그머니 방바닥에 모로 누워 손가락으로 등허리를 꾹꾹 누른다. 그러다가 다시 일어나서 사진기를 쥐어 들고 아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다.

 

 좀 쉴 만하다 싶더니, 이렇게 어여쁜 모습으로 책을 읽는 아이를 사진으로 안 담을 수 없잖아. 어느 어버이라도, 어여쁜 발가락 꼼지락거리며 앉아서, 어여쁜 손가락 볼볼 놀리며 책장을 넘기는 아이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 없으리라. 사진기가 없던 먼먼 옛날에는 종이에 그림으로 그렸겠지. 종이도 붓도 없던 더 아득한 옛날에는 두 눈으로 가득 담아 마음속에 깊디깊이 아로새겼겠지. (4345.1.7.흙.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밥상머리 책읽기

 


 가볍게 차린 저녁 밥상. 가볍게 차려 가볍게 먹는 만큼, 이때에는 아버지가 책 하나 손에 쥐어 읽으면서 천천히 먹는다. 아이도 아버지를 따라 만화책을 펼친다. 그런데 아이는 만화책을 펼치며 밥먹기를 잊는다.

 

 어릴 적, 밥상머리에서 만화책을 볼 수 없었으나, 이렇게 밥상머리에서 책을 읽으려 했다면 흠씬 얻어터지듯 꾸지람을 들었겠지. 그런데, 여느 아버지는 으레 밥상머리에서 신문을 펼치곤 한다.

 

 신문도 책도 텔레비전도 없던 옛날에는 사람들이 밥을 어떻게 먹었을까. 양반집 말고 여느 흙일꾼 살림살이에서는 밥상이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내가 궁금하게 여기는 대목은 신분과 계급과 푸대접과 따돌림이 늘 감돌던 양반집 모습이 아니라, 풀과 흙으로 빚은 집에서 땅을 파서 살아가는 여느 사람들 수수하고 자그마한 집 밥상머리 모습이다.

 

 언제부터 여자들은 부엌에서 밥을 먹도록 하거나 따로 밥상을 받아 남자 아래쪽에서 먹도록 했을까. 고려 때에 흙을 일구던 사람들도 밥을 이렇게 먹었을까.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와 가야 때 흙일꾼 밥상머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옛조선 흙일꾼 밥상머리는 어떠한 그림이었을까.

 

 나는 ‘이씨’ 조선 때 밥상머리 모습으로만 우리네 옛 밥상머리 모습을 이야기하는 틀이 못마땅하다. 우리한테 옛날은 이씨 임금들이 다스리던 조선에 머물 수 없다. 임금 이름이 누구인지 몰라도 흙을 사랑하며 아끼던 사람들 수수한 밥상머리가 내 옛 발자취요, 내 옛 어른들이며, 내 오늘로 이어지는 삶이라고 느낀다. (4345.1.7.흙.ㅎㄲㅅ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BRINY 2012-01-07 19:20   좋아요 0 | URL
간식상인가요? 방금 전에 밥을 먹었는데도 또 배가 고파지는 밥상입니다.

파란놀 2012-01-07 20:33   좋아요 0 | URL
아, 저녁 밥상이었어요 ^^;;;;

집에서 옆지기가 손수 구운 빵이랑 미역국이에요~
 


 나는 ‘칭찬 안 하는 리뷰’를 쓴다?
 ― 최규석 님 만화책 느낌글에 달린 댓글을 읽다가

 


 최규석이라는 분이 내놓은 만화책 《울기에 좀 애마한》이 있다. 나는 지난 2011년 11월에 이 만화책을 장만했고, 차근차근 읽고 나서 내 나름대로 느낀 이야기를 달아 2011년 12월 4일에 느낌글을 하나 적었다.

 

 나는 이제 어떠한 누리신문에도 글을 보내지 않으니까 ‘책소개 기사’라든지 ‘리뷰’라든지 ‘서평’을 쓰지 않는다. 나는 내가 바라보는 책을 내가 살아가는 나날에 비추어 헤아리면서 ‘느낌글’을 쓴다.

 나는 책을 읽는 사람 누구나 ‘서평’이든 ‘새책 소개’이든 ‘리뷰’이든 ‘독후감’이든 ‘서평단 숙제하기’ 같은 재미없는 글을 쓰지 않기를 바란다. 누구나 저마다 좋아하는 삶에 비추어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책을 읽고, 이러한 느낌을 글이라는 밭에 예쁘게 실으면 아름다우리라 생각한다. 한 번 누리고 흙으로 돌아가는 삶인데, 왜 숙제하기 같은 글을 쓰느라 시간을 흘리는가. 너무 안타깝고 슬픈 노릇이다.

 

 오늘 2012년 1월 6일 낮, 첫째 아이랑 마당에서 공차기 놀이를 하다가 방으로 들어와 살짝 셈틀을 켰다가, 누군가 내 느낌글에 붙인 토를 읽는다. 내 느낌글에 토를 단 이는 “사랑이 없으면 다 훌륭하지 않은 만화입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마땅히 “네.”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나는 만화뿐 아니라 사진도 그림도 글도 노래도 춤도, 사랑을 실어 펼쳐 보이며 나누지 않는다면 훌륭할 수 없을 뿐더러 쓸모도 값어치도 없다고 느낀다. 사랑 없는 영화를 무슨 재미로 보나? 사랑 없는 영화가 어찌 훌륭할 수 있는가?

 

 내 느낌글에 토를 단 이는 “최규석 씨 만화에도 소외받는 자, 억압받은 자, 잊혀진 자들에 대한 사랑이 철철 넘치게 있습니다” 하고 말한다. 모르는 일이 아니다. 최규석 님은 당신 만화에 이런저런 사람들 이야기를 담는다. 그러면 궁금한데, 따돌림받는 사람이랑 억눌린 사람이랑 잊혀진 사람들 이야기를 그리면 다 ‘훌륭한’ 작품이거나 ‘사랑 깃든’ 작품이 될까?

 

 그림감, 곧 ‘소재’를 무엇으로 고르느냐는 하나도 대수롭지 않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그림감으로 다룬다고 더 사랑스럽지 않다. 발레하는 사람 이야기를 그린 《moon》은 사랑스럽지 않은 만화라 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 아이들 마음밭을 깊이 다루는 《너에게 닿기를》은 한낱 ‘연애’ 만화이고 ‘사랑 보여주는’ 만화가 아니랄 수 있을까. 데즈카 오사무 님은 《불새》라는 마무리 못 지은 만화에서 삶과 죽음과 사랑과 미움과 하늘과 우주를 그렸기에 ‘훌륭한’ 작품으로 손꼽을 수 있는가. 《블랙잭》이나 《우주소년 아톰》을 손꼽는 까닭은 무엇일까.

 

 대수로이 돌아볼 대목은 ‘소재’, 곧 “누구를 그리느냐”가 아니다. 한진중공업 일꾼을 그린대서 “따돌림받는 사람”을 애틋하게 그리는 작품이 아니다.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를 다룬대서 “억눌린 사람”을 올바로 보여주는 작품이 아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는 할머니들 삶을 보여준대서 “잊혀진 사람”을 착하게 그리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까.

 

 더 빗대자면, ㅈㅈㄷ이라 하는 신문에서도 수요집회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면 ‘기사로 다루었’으니 훌륭한 셈인가?

 

 사람들이 김관식 시집을 좀 읽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권정생 동화를 좀 읽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이원수 동시를 좀 읽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박경리 소설을 좀 읽으면 좋겠다. 우리는 생각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삶이어야 한다. 지식으로는 목숨을 지키지 못한다. 소재주의라든지 이름을 내세우는 진보나 개혁이라는 껍데기로는 아름다운 삶을 함께하지 못한다.

 

 우체국 일꾼은 ㅈㅈㄷ 신문사로도 편지를 나른다. 햇살은 대통령한테든 어린이한테든 떨꺼둥이한테든 곱고 따스하게 내리쬔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픈 사람들 이야기를 그리는 작품이란 무엇인가? 사랑스레 마주하며 사랑스레 나눌 만화책이란 무엇인가?

 

 전태일을 말하는 사람이기에 모두 훌륭하지 않다. 전태일 이름 석 자를 모르면서도 훌륭하게 삶을 짓는 사람이 많다. 전태일처럼 살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나 스스로 내가 선 땅에서 튼튼하고 씩씩하며 아름다이 삶을 지어야 할 사람이다.

 

 나는 ‘칭찬하는 리뷰’를 도무지 쓰지 못한다. 왜 칭찬을 하는가?

 

 나는 ‘비판하는 서평’ 또한 도무지 쓸 수 없다. 왜 비판을 하는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삶을 아끼는 하루하루를 담아 책을 읽는다. 이 이야기를 내 느낌을 고이 실어 글을 하나 쓴다. 내 삶에 비추어 최규석 님 만화책 《울기에 좀 애매한》은 최규석 님이 쓴 말마디 ‘애매한’이라는 말뜻 그대로 ‘어설프’다. 더구나 최규석 님은 책끝에 당신이 내놓은 이 만화책이 ‘어설픈’ 작품이라고 밝히기까지 했다.

 

 스스로 어설프거나 부끄러이 여긴대서 어슬프거나 부끄러울 작품은 아니지만, 참말 어설프며 부끄럽다 싶은 작품이라고 느낀 나는, 이 느낌을 고스란히 글에 실었다. 왜냐하면, 앞으로 최규석 님이 더는 어설프거나 부끄럽다 싶은 작품을 우리한테 내놓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까. 얼마 앞서 최규석 님이 새로 내놓은 《지금은 없는 이야기》도 한참 앞서 사 놓고 아직 느낌글을 쓰지 않았다. 이 작품도 《울기에 좀 애매한》보다 나아지지 않았다고 느낀다. 최규석 님은 스스로 세운 울타리를 넘어서지 않는다. 왜 스스로 사랑스러운 삶을 붙잡지 않을까. 왜 스스로 더 좋은 누리에서 즐거이 꿈꾸는 삶짓기로 나아가지 못할까.

 

 나중에 할 말이었으나, 먼저 몇 마디 늘어놓는다면, 우리가 함께 사랑할 이야기는 “이제는 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이곳에 있는 이야기”일 때에 아름답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서 나누는 사랑”을 눈물겹고 웃음짓도록 누리면서 예쁘게 어깨동무하는 만화를 그린다면 얼마나 기쁠까. 최규석 님이 칭찬이나 상패보다는 ‘다른 목소리’와 ‘여러 목소리’를, 아니 햇살과 같은 목소리와 바람과 같은 목소리와 흙내음 나는 목소리와 바다 품 같은 목소리와 멧골짝 같은 목소리와 들새와 같은 목소리와 풀벌레 목소리를 곱게 들으면서 어여삐 만화로 빚는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빈다. 아니, 최규석 님 만화책을 읽는 사람들부터 풀벌레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작고 낮으며 예쁜 삶을 사랑하면 좋겠다. (4345.1.6.쇠.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