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발·책꽂이·방바닥

 


 하루 해가 저물고 두 아이를 씻기고 나서 이제 한숨을 돌리는 저녁나절. 둘째는 어머니 품에 안겨 칭얼대고 놀다가 잠들고, 첫째는 방방 뛰며 놀다가 문득 그림책 하나 꺼내 무릎에 올려놓고 읽는다. 모처럼 맞이하는 조용한 저녁때. 작은 아이가 작은 손으로 책장 넘기는 소리는 조용하고, 곁에서 사진을 찍는 소리도 조용하다. 책은 손과 발로 함께 읽는다. 책들을 방바닥에 널브러뜨리기도 하지만 책꽂이에 얌전히 꽂기도 한다. 날마다 몇 차례씩 방바닥을 치우고 쓸며 닦지만, 그래도 먼지는 날리고 그래도 온통 어지러움투성이. 이 아이들이 몇 살쯤 되면 덜 어지럽히거나 스스로 씻거나 손수 빨래하는 삶을 누릴 수 있을까. 이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면 등허리 두들기며 한숨 돌리는 어버이한테 구성지고 해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듯 책을 읽어 줄 수 있을까. (4345.1.1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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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들보라 걸상 잡고 서기

 


 이제 꽤나 잘 걷는 산들보라가 서려고 용을 쓴다. 걸상이 되든 엄마 아빠 바짓가랑이가 되든 무언가 붙잡고 서려 한다. 무언가 붙잡고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설 때면 비틀거리는 모습이 마치 춤추는 아기 같다. 젖이랑 맘마 더 먹고 무릎과 팔에 더 기운을 붙여 씩씩하게 서 보렴. (4345.1.1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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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2-01-12 15:58   좋아요 0 | URL
우와, 이제 사고 시작이군요. 막 걷기 배울 때 아가는 정말 이쁘지만, 그만큼 정말 주의가 필요하죠. 얼마전 후배 아해도 그만 싱크대를 붙잡고 용을 쓰다 커피물이 쏟아져 화상으로 입원했답니다. 흑흑.

파란놀 2012-01-12 21:42   좋아요 0 | URL
네, 늘 붙어 지내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어요 @.@
 


 좋아하는 책들 꽂기
 [‘사진책 도서관’ 함께살기] 도서관일기 2012.1.7.

 


 책상자를 하나하나 끌를 때마다 그동안 잊던 내가 좋아하던 책들이 나온다. 그리 좋아하지는 않으나 책을 말하는 일을 하자면 어쩔 수 없이 간수해야 하는 책들도 나오는데, 이런 책이건 저런 책이건 모두 나와 함께 살아가는 책들이다.

 

 그림책 상자를 거의 다 끌를 무렵, 드디어 ‘어, 이 그림책들이 어디에 들어갔기에 여태 꽁지 하나 안 보이나’ 하고 생각하던 책들이 보인다. 백제와 문선사에서 나오던 ‘현대세계걸작동화’들. 한글판으로 읽어도 즐겁지만, 일본판으로 읽어도 즐거운 그림책을 들여다본다. 그림책 꽂은 책꽂이 앞은 이제 널브러진 것 거의 없이 말끔히 치운다. 이쪽 바닥에 갓난쟁이 둘째가 기어다니며 놀 만한 깔개를 깐다면, 날이 폭할 때에 네 식구 도서관 나들이를 하면서, 나는 책을 치우고, 아이들과 옆지기는 앉아서 책을 읽으며 쉴 수 있으리라.

 

 도서관 둘레에는 시멘트로 깔린 데가 얼마 없어, 아주 홀가분하게 흙을 밟을 수 있다. 논둑길을 따라 도서관으로 걸어오면 한결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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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 씻어내며 우리 말 살리기
 (164) -화化 164 : 의식화 1

 

.. 딸애는 다행히 지금 ‘여자도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엄마인 나의 생활을 보며 의식화된 것인데, 가끔 “나는 크면 회사 다닐 거야” 하곤 “회사에서 돈벌어서 엄마 이쁜 옷 사 줄 거야” 한다 ..  《김수미-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샘터,1987) 100쪽

 

 ‘다행(多幸)히’ 같은 말마디는 굳이 다듬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때와 곳에 따라 조금 더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고맙게도’나 ‘뜻밖에도’나 ‘반갑게도’로 다듬을 수 있어요. “-는 사실(事實)을 당연(當然)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그대로 두어도 됩니다. 그저 이 자리에서는 “-는 생각을 마땅하게 받아들인다”라든지 “-는 삶을 즐겁게 받아들인다”로 손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듬거나 손보면서 글흐름을 돌아볼 때에,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똑같은 느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굳이 이처럼 다듬거나 손보는 까닭은, 말하고자 하는 이가 어떤 이야기를 말하고자 하는가를 찬찬히 돌아보면서 말과 글을 다룬다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듣는 사람 자리에서 어떻게 말을 들려줄 때에 한결 알맞고 좋을까를 살피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활(生活)”은 “내 삶”으로 손질하고, “회사 다닐 거야”는 “회사 다닐 테야”나 “회사를 다니겠어”로 손질하며, “의식화된 것인데”는 “의식화되었는데”쯤으로는 손질해 줍니다.

 

 의식화(意識化) : 어떤 대상에 대하여 깨닫거나 생각하게 함. 특히, 계급 의식
    을 갖게 한다는 뜻으로 쓴다
   - 의식화 작업 / 노동자들이 의식화되면서 /
     조선의 농민들을 의식화한다는 것은 어려운 면도 있겠으나

 

 엄마인 나의 생활을 보며 의식화된 것인데
→ 엄마인 내 삶을 보며 생각한 셈인데
→ 엄마인 내 삶을 보며 느꼈을 텐데
→ 엄마인 내 삶을 보며 배웠을 텐데
→ 엄마인 내 삶을 보며 몸에 배었을 텐데
 …

 

 국어사전 뜻풀이에 잘 나오듯이 여느 사람들은 ‘의식화’라는 말마디를 “계급 의식을 갖게 한다”는 뜻으로 으레 씁니다. 그야말로 계급 의식을 느끼게 하도록 애쓰는 쪽이든, 이러한 쪽을 안 좋게 보는 쪽이든 똑같이 씁니다.

 

 그러면 ‘의식화’란 어떤 일일까요? 말 그대로 헤아리자면 “의식을 하도록 한다”는 이야기이겠지요. 다음으로 ‘의식(意識)’이란 무엇일까요? “세상을 보는 눈과 머리를 깨운다”는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좋게 보든 얄궂게 보든 ‘의식화’라고 하는 일은 “우리 누리를 제대로 파헤치거나 올바르게 꿰뚫어보도록 이끄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도 나쁘게 여길 말마디가 아니요, 조금도 얄궂게 돌아볼 말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자유민주주의 나라가 아닙니다. 정부에서는 이 땅이 자유민주주의라고 내세우지만, 속살을 들여다보았을 때에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자유도 민주도 죄 억눌리니까요. 왜냐하면 국가보안법이 도사리거든요. 국가보안법을 비롯해 초·중·고등학교 제도권교육이 오로지 입시지옥으로 친친 얽매고 뒤틉니다. 꿈을 펼치며 아름답게 살아갈 나날을 열어젖히는 사회살이가 아니라, 돈을 많이 벌지 않으면 뒤처지거나 나동그라질밖에 없는 사회 얼거리예요.

 

 곧, 이 나라에서 ‘의식화’라 한다면 겉과 속이 다른 우리 누리와 나라와 정부와 얼거리 모두를 샅샅이 깨우친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우리 누리뿐 아니라 내 삶터와 보금자리와 마을이 어떤 모습인가를 참답게 알고 깨우치고 느끼고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의식화’란 어떤 주의나 사상을 억지로 집어넣는 일이 아니라 나 스스로 아름답고 바르게 살아가자는 흐름이요 결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온누리를 올바르게 읽고 가슴에 새기는 흐름과 결이란 어쩔 수 없이 기득권이든 권력자이든 우리 삶터를 어떻게 짓누르거나 억누르면서 뒤트는가를 깨닫는 길이기 마련이고, 이렇게 깨닫고 나면 잘잘못을 바로잡도록 힘을 기울입니다. 잘잘못을 바로잡도록 힘을 기울이다 보면 기득권이든 권력자이든 싫어하거나 짜증스레 느끼기 마련이요, 이동안 저절로 ‘의식화’ 같은 말마디를 얄궂거나 나쁘게 받아들이도록 뿌리박아 버립니다. 말이 말다울 수 없도록 하고, 사람이 사람다울 수 없도록 한달까요. ‘의식화’가 말썽거리가 아니라 의식화를 가로막는 사람이 말썽거리입니다만, 말이 비틀리고 넋이 뒤틀립니다. 의식화를 어떤 밥그릇 지키기로 써먹으려는 사람이 골칫거리입니다만, 글이 짓눌리고 삶이 억눌립니다.

 

 의식화 작업 → 생각 깨우기 / 생각 열기
 노동자들이 의식화되면서 → 노동자들이 깨어나면서 / 노동자들이 세상을 배우며
 농민들을 의식화한다는 것은 → 농민들을 깨우친다는 일은

 

 우리는 우리 말을 제대로 써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말을 올바로 써야 합니다. 우리 말을 제대로 느끼고 제대로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 말을 참답게 깨닫고 참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지식쪼가리를 머리에 쑤셔넣는 배움이 아닌 말 한 마디에 사랑과 믿음을 고이 담는 배움으로 이어가야 합니다. 지식부스러기를 먹고사는 사람이 아닌 삶을 살찌우는 넋과 얼로 빛나는 사람이 되도록 다스려야 합니다.

 

 한자말로 하자면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말로 하자면 깨어나야 합니다. 깨우쳐야 합니다. 일깨워야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알아내야 하며 알아채야 하고, 알아들어야 하고 알아보아야 합니다.

 ‘의식을 한다’이든 ‘의식을 하게 한다’이든 바로 ‘알도록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앎을 내 머리나 가슴에 품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앎을 받아들인다’는 소리요, 이 앎이 슬기로 거듭나도록 갈고닦는다는 셈입니다.

 

 삶이 삶답도록 갈고닦습니다. 말이 말답도록 갈고닦습니다. 넋이 넋답도록 갈고닦습니다. 그리고 우리 누리가 참누리다울 수 있게끔 갈고닦는 길에 내 한 손을 보탭니다. (4343.2.21.해./4345.1.12.나무.ㅎㄲㅅㄱ)

 

 


 '-화(化)' 씻어내며 우리 말 살리기
 (175) -화化 175 : 의식화 2

 

..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던 유아기를 의식화함으로써, 또 한 번의 인생을 살게 되는 셈이다. 자신의 아이가 울거나 싸우거나 할 때마다 아이의 기분에 감정이입함으로써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성격이 형성된 배경을 발견하거나, 어디서 실패했는지를 깨닫기도 한다 ..  《아이카와 아키코/장희정 옮김-흙에서 자라는 아이들》(호미,2011) 143쪽

 

 “자기(自己) 자신(自身)이 자각(自覺)하지 못하던”은 “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던”으로 다듬고, ‘유아기(幼兒期)’는 ‘어린 날’로 다듬으며, “또 한 번의 인생(人生)을 살게 되는 셈이다”는 “또 한 번 새롭게 살아가는 셈이다”로 다듬습니다. “인생을 살게”는 겹말입니다.

 

 “자신의 아이가”는 “내 아이가”로 손보고, “아이의 기분(氣分)에 감정이입(感情移入)함으로써”는 “아이 마음을 헤아리면서”나 “아이 마음을 들여다보면서”로 손보며, “자기 인생”은 “내 삶”으로 손봅니다. “자신의 성격(性格)이 형성(形成)된 배경(背景)을 발견(發見)하거나”는 “내 마음씨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알아채거나”나 “내 몸가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느끼거나”로 손질하고, “어디서 실패(失敗)했는지를”은 “어디서 잘못되었는지를”이나 “어디서 엇나갔는지를”로 손질합니다.

 

 유아기를 의식화함으로써
→ 어린 날을 느끼면서
→ 어린 날을 생각하면서
→ 어릴 적을 되새기면서
→ 어릴 적을 떠올리면서
→ 어릴 적을 헤아리면서
 …

 

 보기글을 잘 살피면, 첫머리에 ‘의식화’라는 낱말이 나오고, 뒤따라 ‘되돌아보다’와 ‘깨닫다’라는 낱말이 나옵니다. 이 세 낱말을 살피고, 이 세 낱말을 쓴 자리가 어떤 뜻이요 느낌인가를 곰곰이 짚으면, 세 낱말은 아주 다르게 쓴 낱말이 아니라, 같은 이야기를 하려고 넣은 낱말이라고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쓴 분은 세 자리 모두 ‘의식화’나 ‘의식하다’라는 낱말을 넣을 수 있습니다. 세 자리 모두 이러한 한자말을 털어내고는 다 다른 낱말을 다 다른 느낌과 말맛을 살려 알맞게 넣을 수 있어요.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o)
 자기 인생을 의식하게 된다 (x)
 어디서 실패했는지를 깨닫기도 한다 (o)
 어디서 실패했는지를 의식하기도 한다 (x)

 

 어떠한 낱말을 써서 어떠한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는가는 저마다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슬기로이 생각할 때에는 슬기로운 빛이 감도는 낱말과 말투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름다이 생각할 때에는 아름다운 꿈이 어리는 낱말과 말투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랑스레 생각할 때에는 사랑스러운 뜻이 깃드는 낱말과 말투로 이야기를 들려줘요.

 

 생각할 때에 살아나는 말이에요. 생각하지 않을 때에 스러지는 말이에요. 생각하는 사람들이 북돋우거나 일구는 말이에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망가뜨리거나 내팽개치는 말이에요.

 

 내 삶을 생각하고 내 사랑을 생각합니다. 내 사람을 생각하고 내가 나아갈 길을 생각합니다. 옳게 생각하고 착하게 생각합니다. 곱게 생각하며 즐거이 생각합니다. (4345.1.12.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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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꼬마 재봉사 네버랜드 세계 옛이야기 9
블라디미르 비노쿠르 그림, 임정진 글 / 시공주니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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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간이 나라에서는 얼간이로 살아가기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24] 블라디미르 비노쿠르, 《용감한 꼬마 재봉사》(시공주니어,2006)

 


 얼간이 나라에서는 얼간이가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들 말합니다. 사람들이 온통 외눈인 곳에서는 눈이 둘인 사람이 바보 소리를 듣는다고들 말합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른들이 들려주는 이 같은 이야기는 조금도 내키지 않았어요. 너무 못마땅할 뿐 아니라 앞뒤가 어긋난데다가 올바르지 않다고 느꼈어요. 다만, 이렇게 못마땅한 느낌을 어른들한테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이런 느낌을 드러내면 어른들은 ‘네가 뭘 안다고 그래!’ 하면서 머리통을 쥐어박기 일쑤였습니다. 학교에서는 ‘네가 선생한테 반항하느냐!’ 하면서 끔찍하게 두들겨패기 일쑤였어요.

 

 예나 이제나 《용감한 꼬마 재봉사》(시공주니어,2006)를 퍽 재미나면서 터무니없는 옛이야기쯤으로 들려주곤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얘기가 조금도 재미나지 않습니다. 이 얘기는 조금도 옛이야기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재봉사가 참 걱정스럽고, 재봉사가 만나는 사람마다 뭐 이리 바보스러우면서 못된 마음일까 싶어 슬퍼요. 그런데 재봉사마저 바보스러운 사람들 사이에 얼크러지며 스스로 바보가 되어 살아가니 더 딱해요.


.. 화가 난 재봉사는 옷으로 파리들을 힘껏 후려쳤어요. 그러고 나서 옷을 들어 보니 파리 일곱 마리가 죽어 있었어요. “한 방에 일곱 마리나 해치우다니! 난 정말 대단해!” 재봉사는 의기양앙하게 허리띠를 풀어 그 위에 수를 놓았어요 ..  (5쪽)


 어린 날, ‘그래, 바보스러운 나라에서는 나 스스로 바보가 되어야 살아남는가?’ 하고 생각하며 슬펐습니다. 모두들 바보짓을 하니까 나도 바보짓을 해야 살아남느냐 싶어 괴로웠습니다.

 

 군대에 끌려가던 스무 살 젊은 나이에, 나는 군대에서 사람 죽이는 재주를 배우면서 사람한테 욕지꺼리 마구 내뱉는 버릇을 들여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주먹이든 군화발이든 개머리판이든 삽자루이든 마구마구 날아와서 두들겨패요. 비무장지대 지오피 조그마한 연병장에서 스물여덟 시간 물 한 모금 밥 한 술 먹지 못하며 얼차려를 받기도 했습니다. 완전군장을 지고 철책을 따라 행군을 하는 얼차려를 받기도 했습니다. 눈이 수북하게 쌓인 겨울날, 영 도 밑으로 이십 도가 훌쩍 내려간 날씨에 ‘뒤로 기기’를 하며 사격장부터 내무반까지 가야 하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젊은 나이부터 바보로 뒹굴도록 하는 곳에서 웃음을 찾거나 고운 말씨와 마음을 건사하기란 몹시 힘듭니다. 나는 군대에서 나 스스로 착한 마음을 지킬 수 없겠다고 생각하며 슬펐고, 이 슬픔 그대로 착한 마음을 버리며 내 목숨을 건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백이면 백, 이백이면 백아흔아홉이 웃음을 잃고 고운 말씨와 마음을 버리고야 맙니다.

 

 그러다가 꼭 한 사람, 이백 가운데 백아흔아홉이 바보스러운 짓과 끔찍한 욕지꺼리와 주먹다짐으로 물들거나 찌드는데 꼭 한 사람이 이러한 바보짓과 동떨어진 채 견디었어요. 아니, 견딘다는 말은 올바르지 않아요. 바보짓 굴레에서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꼭 하나 있었어요.

 

 나는 열여섯 달을 견디다가 열일곱 달째부터 바보짓을 함께 하고 말았는데, 꼭 한 사람 바보짓을 않는 이를 처음으로 보면서 ‘한 사람부터 바보짓을 거스르며 사람짓을 한다면, 사람사랑을 한다면, 이 바보스러운 굴레는 달라질 수 있구나.’ 하고 뒤늦게 깨달았어요. 내 목숨만 건지려고 똑같이 바보짓 굴레에 달겨드는 일이란, 나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하지 않는 일이며, 내 목숨을 참다이 살리는 길도 아니라고 느끼며 부끄러웠어요.


.. “땅꼬마, 나처럼 해 봐.” 거인이 돌을 주워 손으로 꼭 쥐자, 돌에서 물이 찔끔 나왔어요. 재봉사는 “그까짓 것쯤이야!” 콧방귀 뀌며 주머니에서 치즈덩어리를 꺼내 돌인 척, 꼭 쥐었어요. 그러자 치즈에서 물이 주르륵 흘러나왔지요 ..  (9쪽)


 곰곰이 생각하면, 남자들이 어쩔 수 없이 겪거나 치러야 한다는 군대에 앞서, 중·고등학교 입시지옥은 모든 푸름이들을 바보짓 구렁텅이로 밀어넣습니다. 게다가 중·고등학교 입시지옥은 푸름이뿐 아니라 푸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들마저 바보짓 수렁으로 몰아세워요. 서로서로 똑같이 바보짓 벼랑에서 뛰어내리는 꼴입니다.

 

 왜 사람사랑을 할 수 없을까요. 왜 도시에서만 살아야 할까요. 왜 회사나 공공기관에 일자리를 얻어 펜대를 굴리는 일을 해야 먹고살 수 있다고 여기는가요.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에 걸쳐 어느 어른이나 교사나 이웃이나 살붙이 가운데 나한테 ‘시골에서 흙을 일구며 스스로 살림을 꾸리는 착하고 아름다운 길’을 걸으라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동무 가운데에도 ‘우리 함께 시골로 가서 흙을 일구며 살자.’ 하고 말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거꾸로, 나 스스로 ‘나는 시골로 가서 흙을 일구며 살래.’ 하고 꿈꾸지 못했습니다. 나 스스로 동무들한테 ‘우리 이런 바보짓 굴레에서 벗어나자. 우리 시골에서 흙이랑 살자.’ 하고 먼저 말할 줄 몰랐습니다.

 

 나는 바보짓 하는 사람으로 뒹굴기 싫습니다. 나는 사람사랑을 꽃피우는 사람으로 살림을 돌보고 싶습니다. 우리 식구들 먹을 푸성귀를 우리 땅뙈기에서 일구고, 좋은 책과 좋은 말과 좋은 꿈으로 내 살붙이들 마음자락을 아끼고 싶습니다.

 

 온통 물질문명 피바람이 몰아치는 터전이라 하지만, 물질문명이 아닌 사람삶을 헤아리고 싶어요. 내 몸을 움직이고 내 마음을 다스리는 고운 삶길을 찾고 싶어요. 정치·경제·사회·문화가 아닌 삶·사랑·사람·꿈을 아끼고 싶어요.


.. 거인은 창피하고 화가 나서 재봉사를 해치우기로 마음먹었어요. 거인은 재봉사를 동굴 집으로 데려가 침대에서 자게 했어요. 하지만 침대가 너무 커서 재봉사는 그냥 바닥에서 잠을 잤지요. 한밤중이 되자 거인은 커다란 쇠몽둥이를 가져와 침대를 쿵, 내리쳤어요 ..  (16쪽)


 블라디미르 비노쿠르 님이 일군 그림책 《용감한 꼬마 재봉사》를 읽습니다. 옛이야기 틀을 고스란히 살리며 예쁘장하게 빚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비노쿠르 님 나름대로 다시 풀이하거나 읽어낸 대목은 따로 없구나 싶어요.

 

 책끝에는 어린이문학을 비평한다는 김서정 님 덧말이 붙습니다. 김서정 님은 《용감한 꼬마 재봉사》를 두고 “이 이야기가 주는 중요한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에는 정말이지,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36쪽).” 하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고, 가정과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를 이보다 더 잘 말해 주는 옛이야기는 흔치 않을 것입니다(36쪽).” 하고도 말합니다.

 

 어쩌면,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주제읽기’로 《용감한 꼬마 재봉사》를 읽거나 가르치지 싶어요. 초등학교에서건 어린이집에서건 여느 살림집에서건 《용감한 꼬마 재봉사》를 이러한 틀에 맞추어 읽히거나 이야기하지 싶어요.

 

 그런데, 참말 《용감한 꼬마 재봉사》가 이러한 이야기인가요. 《용감한 꼬마 재봉사》가 ‘집과 나라를 잘 다스리는 길’을 보여주는 이야기인가요.

 

 나는 이 그림책을 아무리 읽어도 ‘얼간이 나라에서는 얼간이로 살아갈밖에 없구나’ 하는 슬픈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느낍니다. 얼간이 나라에서 얼간이로 살아가면서, 사람들 누구나 스스로 얼간이인 줄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비꼬거나 비웃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재봉사는 조금도 멋있지 않습니다. 재봉사는 조금도 씩씩하지 않습니다. 재봉사는 조금도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저 얼간이들 눈높이에 맞추어 스스로 얼간이가 되면서 ‘바보짓 가운데 가장 꼭대기’인 임금님 자리까지 가고야 맙니다.


.. 온힘을 다해 달려오던 유니콘은 그대로 나무를 들이받아 나무에 뿔이 박히고 말았어요. 재봉사는 유니콘을 산 채로 잡았지요. 하지만 왕은 이번에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사나운 멧돼지를 잡아 오라고 했어요 ..  (25쪽)


 나는 생각합니다. 온누리에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가 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온누리에는 참말 믿을 사람이 많다고 느낍니다. 나 스스로 내 둘레 사람들한테 믿음직하며 사랑스레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는 얼간이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좋은 나라에서도 살고 싶지 않습니다. 굳이 ‘어떤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디디는 흙땅이 살갑고 아리따운 보금자리면 넉넉합니다. 내가 디디는 이곳이 아리따운 보금자리이듯, 내 이웃들이 살아가는 보금자리 또한 서로서로 아리따우면서 아늑하기에, 이러한 보금자리가 예쁘게 모이고 얼크러지는 아리따운 마을이면 흐뭇하다고 여깁니다.

 

 아리따운 보금자리에는 따로 우두머리가 없어도 됩니다. 공무원이니 국회의원이니 교사이니 무어니 무엇 하나 없어도 돼요. 마을에서도 마을 우두머리란 없어도 됩니다. 서로서로 제 삶을 지을 줄 아는 착한 삶이면 흐뭇해요.

 

 아주 어린 나날 처음 《용감한 꼬마 재봉사》를 들었을 때부터 생각했어요. ‘나는 착한 집에서 착한 일꾼이 되어 착한 꿈을 키우는 착한 사랑을 나누며 살겠어.’ (4345.1.12.나무.ㅎㄲㅅㄱ)


― 용감한 꼬마 재봉사 (블라디미르 비노쿠르 글·그림,임정진 옮김,시공주니어 펴냄,2006.6.1./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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