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graphy Three Landscapes - City Human Nature
구성수 지음 / 푸른세상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구성수 님 예전 사진책을 소개하려 하는데, 이 책은 알라딘에서는 뜨지 않기에 다른 사진책에 이 느낌글을 걸칩니다. 아무쪼록...

 

 


 서울에서 살아가며 사진 찍으면
 [찾아 읽는 사진책 45] 구성수, 《서울에서 살아간다는 것》(사진예술사,1998)

 


 서울에서 살아가기는 재미날까 궁금합니다. 서울에서 살아가면 신날까 궁금합니다. 서울에서 살아가며 하루하루 즐거운지 궁금합니다. 서울에서 살아가며 사귀는 사람들은 서로서로 기쁠는지 궁금합니다. 서울에서 일거리 얻어 살아가면 뿌듯한지 궁금합니다. 서울에서 보금자리 마련해 살아가면 보람찰까 궁금합니다.

 

 내가 서울에서 살았던 1994∼2003년을 떠올립니다. 사이에 군대에서 보낸 스물여섯 달을 빼면 열 해가 채 안 되고, 2003년 가을부터 2006년 2월까지 서울에서 반, 충청북도에서 반을 살았습니다. 주마다 오락가락 하면서 살았어요. 이동안 내가 서울에서 겪은 삶은 ‘책 만드는 일’과 ‘책방 나들이’와 ‘책방 찾아 골목 곳곳 누빈 일’이었고, 처음에는 ‘신문배달 하느라 골목집을 두루 꿰며 짐자전거로 누빈 일’입니다. 신문사 지국을 옮기면서, 나중에 홀로 자취집을 얻으면서, 이래저래 집 보러 다니며 서울살이를 새로 들여다봅니다. 그러나, 언제나 내가 느끼는 서울은, 서울은 사람이 지나치게 많구나, 예요.

 

 나도 서울에 사람이 지나치게 많게 한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나 한 사람부터 서울을 떠나야 서울은 조금이나마 홀가분합니다. 그래, 나는 씩씩하게 서울을 떠납니다. 서울을 떠나며 후련하고 숨통을 틀 만합니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복닥이다 보니까 바람이 매캐하고 자동차가 넘치며 햇살이 따숩지 않아요. 사람들이 지나치게 복닥이니까 무얼 해도 돈벌 자리는 있다지만, 돈을 벌고 쓰는 만큼 사랑을 살가이 나누거나 꿈을 애틋하게 키우는 쪽하고는 자꾸 동떨어져요. 사람을 돈으로 재도록 내몰고, 사람살이가 돈에 따라 휘둘리거나 휩쓸리기 일쑤예요.

 

 서울에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지나치게 많다 보니 어느 사람이든 마음을 착하게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마음을 착하게 다스리기 어려운 서울이다 보니, 또 너무 많은 사람이 복닥이다 보니, 쓰레기통 하나 변변하게 마련하지 않을 뿐더러, 쓰레기통이 있어도 금세 미어터져요. 서울에는 청소하는 일꾼이 아주 많이 있고, 아주 자주 치우지만, 이러하더라도 쓰레기가 흘러넘쳐요. 서울에도 쓰레기 파묻는 데가 있기는 있을 테지만, 이웃 인천으로 갖다 버리는 부피가 아주 대단해요.

 

 내가 ‘서울’을 사진감으로 삼는다면, 바로 이런 대목을 담고 싶어요. 서울은 쓰레기누리, 쓰레기나라, 쓰레기터라고요.

 

 그런데, 이런 쓰레기더미 서울이지만, 또다른 테두리에서 조그마한 살림집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 달라요. 하루하루 아파트 재개발로 밀려나지만, 조그마한 살림집 이루는 골목동네에서 예쁜 삶 예쁜 빛 예쁜 넋을 만나곤 해요. 또한, 조그마한 살림집 아닌 커다란 아파트라 하더라도, 이 아파트 안쪽으로 들어가서 이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면, ‘집 바깥에서 부대끼는 서울’하고는 또다른 삶이 있고 사랑이 있으며 살림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서울’을 사진감으로 삼는다면, 또다른 이 대목을 찍고 싶어요. 서울에도 사랑이 있고, 꿈이 있으며, 이야기가 있어요.

 

 

 어디이든 삶터입니다. 어디에서 살아가든 보금자리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되어 어루만진다면, 사랑스레 땀흘릴 삶터입니다. 사랑스레 내미는 손길로 어깨동무한다면, 사랑으로 빚는 보금자리입니다.

 

 사진은 참말 달라집니다. 내가 날마다 달라지는 꿈을 꾸면서 땀을 흘리는 동안, 사진은 참말 달라집니다.

 

 사진은 영 제자리걸음입니다. 나 스스로 제자리걸음을 걷는 동안, 내 사진은 그야말로 제자리걸음입니다.

 

 내가 선 자리에서 내 꿈길을 무지개빛으로 아로새기면, 내가 사진기를 손에 쥘 때에 무지개빛 가득한 사진이 태어납니다. 내가 선 자리에서 내 삶길을 무지개빛으로 일구면, 내가 손에 연필을 쥘 때에 무지개빛 그득한 글이 태어납니다.

 

 구성수 님 사진책 《서울에서 살아간다는 것》(사진예술사,1998)을 읽습니다. 구성수 님은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로 입성’했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살아간다는 것》 첫머리를 채우는 ‘구성수 사진비평’을 쓴 장준석 님은 “서울 입성 이전과 그 이후 익명성을 담보로 살아가기까지”라는 이름을 붙여, 구성수 님 사진삶을 들려줍니다.

 

 ‘서울 입성’이라니, 참 케케묵은 계급사회 말마디 같습니다. 이씨 임금님들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다스리며 신분과 계급으로 사람들을 나누던 무렵, 서울을 둘러싼 성곽 안쪽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서울 입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홍제동이나 녹번동만 하더라도 ‘4대문 바깥’, 곧 ‘서울 입성’하고 먼 자리입니다. 이문동이나 휘경동이라면 마땅히 ‘서울 입성’하고 동떨어진 데예요. 강아랫마을 또한 ‘서울 입성’이라 할 수 없는 데예요.

 

 

 그러나저러나, 사람들은 왜 ‘서울 입성’이라는 말을 쓰고, ‘서울로 간다’는 말을 해야 할까 궁금합니다. 대구에서는 사진길을 걸을 수 없을까요. 춘천에서는 사진삶을 누릴 수 없을까요. 제주에서는 사진꿈을 키울 수 없을까요. 옥천에서는 사진빛을 나눌 수 없을까요. 수원에서는 사진사랑을 펼칠 수 없을까요.

 

 로버트 프랭크 님은 미국이라는 나라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미국사람들》이라는 사진책을 내놓았습니다. 구성수 님 사진책 《서울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적잖이 《미국사람들》 내음을 풍깁니다. 그러나, 로버트 프랭크는 로버트 프랭크요, 구성수는 구성수예요. 저마다 누리는 삶에 따라 사진이 달라져요. 누가 누구를 따를 수 없고, 누가 누구 내음을 풍길 수 없어요.

 

 사진책 《서울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다시금 들여다봅니다. 서울에서 살아가는 나날이란 어떤 빛이 될까요.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길은 어떤 사랑이 될까요. 서울에서 살아가는 나와 너는 어떠한 꿈을 함께 주고받을까요.

 

 서울이든 어디이든, 따분하거나 심심하거나 빛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서울이든 어디이든, 재미나거나 아름답거나 무지개빛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요. 《서울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나오는 사람들도 서울사람이고, 《서울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서울사람입니다. (4345.1.20.쇠.ㅎㄲㅅㄱ)


― 서울에서 살아간다는 것 (구성수 사진,사진예술사 펴냄,1998.2./판끊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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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고니의 하늘
테지마 케이자부로오 글.그림, 엄혜숙 옮김 / 창비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내리사랑과 치사랑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27] 테지마 케이자부로오(데지마 게이자부로), 《큰고니의 하늘》(창비,2006)


 

 살살 잠들었다 싶은 둘째가 울먹울먹하더니 으앙 하고 울어댑니다. 조금 더 잠들어 주면 얼마나 좋겠니, 삼십 분쯤 시원스레 잠들고 일어나면 얼마나 좋겠니, 한두 시간쯤 느긋하게 잠들고선 깨어나 주면 얼마나 좋겠니, 하고 생각합니다. 어쩜 이렇게 조금 잠든다 싶으면 깨고, 또 잠들었다 싶으면 일어나니.

 

 아침부터 쉴새없이 뛰고 달리고 노래하고 춤추던 첫째가 부엌에서 어머니 부침개 굽는 저녁나절 밥상에 엎드려 스르르 잠든 지 얼마 안 된 무렵, 아버지는 모처럼 두 아이한테서 홀가분하게 글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해 보지만, 둘째가 곧바로 깨어나 이 꿈은 물거품이 됩니다.

 

 그러나, 첫째 아이 이맘때에도 비슷했어요. 첫째 아이는 둘째 아이보다 훨씬 엉겨붙거나 달라붙었을 뿐 아니라, 밤새 어머니랑 아버지가 잠들지 못하게 했어요. 둘째 아이는 밤에 오줌을 적게 누고, 꽤 오래 새근새근 잔다고 할 수 있어요.

 

 아이를 안거나 업고서 한동안 돌아다니거나 일을 하면, 팔이며 등떼기이며 허리이며 없는 듯하곤 합니다. 나는 형이랑 둘만 있는 집에서 살았기에 나보다 어린 동생을 업거나 돌보며 지낸 일이 없어요. 어린이가 갓난쟁이를 돌보던 일이 없습니다. 아이들도 어린 동생을 곧잘 업으며 달래거나 어르곤 하는데, 아이들이 제아무리 어린 동생을 잘 업거나 달랠 수 있다 하더라도, 고 작은 몸으로 더 작은 동생을 업거나 안으며 달래면 얼마나 뻑적지근할까요.

 

 두 형제 가운데 동생이었던 나는 어린 나날부터 ‘어린 내가 동생을 업거나 안으며 달래는 일’이란 어떠한 느낌일까 하고 생각에 잠기곤 했습니다. 동생을 돌보느라 같이 놀지 못하는 동무라든지, 동생을 끼고 함께 노는 동무를 볼 때에, 또 언젠가 이야기책에서 동생을 업고 돌보는 언니 모습을 읽거나 들으며, 이렇게 동생을 돌보는 언니나 형이나 오빠 노릇이란 어떠한 나날일까 하고 궁금했어요.


.. 넓은 호수의 여기저기에서 반갈아 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오늘은 산에 쌓인 눈이 보통 때보다 더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봄이 아주 가까이 온 것이지요 ..  (4쪽)


 색색 소리내며 잠든 아이를 바라보면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고 예쁩니다. 눈물이 톡 떨어질 만큼 어여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잠든 아이를 한 시간쯤 안은 채 꼼짝을 못할라치면, 어버이 품에서 말고 바닥에서도 고이 잠들어 주면 얼마나 좋겠니, 하고 생각합니다. 사랑스럽고 예쁘지만 힘들기는 힘들거든.

 

 바깥에서 움직일 때에는, 이를테면 시골집에서 음성이나 일산으로 할머니 할아버지 댁을 찾아가는 먼길에서는 아이들을 안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버스나 기차나 전철을 탑니다. 이때에는 몇 시간씩 안거나 업으며 등허리와 다리에 힘이 풀려도 꿋꿋하게 다닙니다. 어디에서 이런 힘이 솟는지 모르나 참 씩씩하게 다녀요. 이러다가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닿아 아이들을 내려놓으면 어느새 눈이 감기거나 풀립니다.


.. 해질녘이 되었습니다. 어두워졌지만 아직 출발하지 못한 여섯 식구가 있습니다. 아이가 병이 나서 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동료들이 없는 호수는 조용합니다 ..  (9∼10쪽)


 저녁 열 시가 넘습니다. 둘째를 안고 첫째를 걸리며 동네 한 바퀴를 돕니다. 이 늦은 때에도 잠자리에 들지 않는 두 아이를 달래려고 밖으로 나옵니다. 자, 얘들아, 이렇게 깜깜한 밤이지, 다들 모두 코 자는데 너희는 왜 아직 안 자려 하니, 이제 너희들도 예쁘게 코 자자, 하고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둘째는 오줌기저귀를 한 장 갈고 나서 아버지 무릎에서 꾸벅꾸벅 좁니다. 고개를 까딱까딱 하다가는 아버지 팔에 기대고, 이내 목에 힘이 탁 풀리며 고개를 뒤로 젖힙니다. 둘째 겉바지와 웃옷을 벗기지 않았기에 잠자리에 눕히지 못합니다. 한동안 이렇게 눕히다가 옷을 벗기니 꼼틀 하며 실눈을 뜹니다. 옷을 마저 벗기고는 다시 그대로 무릎에 누인 채로 토닥이고 이불을 덮습니다.

 

 이제 슬슬 첫째 아이도 잠들면 좋겠지만, 첫째 아이는 더 놀 생각인지, 꽤 졸린 모습이지만 잠자리에 들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 그러면 네 마음대로 하렴. 아직 안 자겠다는데 억지로 재울 수야 없지, 우리 네 식구 이듬날 새벽부터 시골버스 타고 읍내에 가서 광주를 거쳐 충청북도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가야 하는데, 너 새벽에 두고보렴. 새벽에 못 일어나면 너만 두고 갈 테니. 크.

 

 어쩌면, 새벽에 잠을 못 깨는 두 아이를 하나씩 업거나 안고 길을 나서야 할는지 모르지요. 새벽부터 아이들 칭얼거림을 고스란히 받아들으며 먼길을 가야 할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어버이라면, 아버지이고 어머니라면, 이와 같은 아이들 매무새를 하나하나 받아들일밖에 없습니다. 잠든 아이는 포근하게 감싸서 재웁니다. 졸린 아이는 토닥거리며 재웁니다. 배고픈 아이는 밥을 차려 먹입니다. 지저분한 아이는 옷을 갈아입히고 씻깁니다. 아이들한테는 어버이 온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 산 위에서 날개를 치는 하얀 그림자가 나타났습니다. 식구들이 되돌아온 것입니다 ..  (25쪽)


 테지마 케이자부로오(데지마 게이자부로手島圭三郞) 님 그림책 《큰고니의 하늘》(창비,2006)을 읽습니다. 철을 따라 삶터를 바꾸는 큰고니들이 나누는 사랑을 찬찬히 보여주는 그림과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 이 이야기는 어릴 적부터 곧잘 들었구나, 하고 떠올립니다. 어디에서 들었더라, 내 어릴 적 나한테 그림책은 없었으니까 책으로 읽지는 않았을 테지만, 동화책에서 읽었을까, 텔레비전 만화영화로 보았을까, 아니면 학교에서 선생님한테서 들었을까,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틀림없이 어디에선가 보거나 읽거나 들었을 테지만 제대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아마, 일본에서건 한국에서건, 이들 큰고니 식구들 이야기는 차근차근 이어졌을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서양 어느 나라 옛이야기가 개화기라 하는 때에 슬그머니 들어와서 이때부터 두루 알려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일본이든 한국이든 철새가 있어요. 철새를 곁에서 지켜보던 여느 흙일꾼이나 고기잡이가 있었겠지요. 일본이나 한국이나 철새들 가운데 큰고니라든지 다른 철새들이 식구들하고 어떤 사랑을 이루는가를 애틋하게 지켜본 사람이 있었겠지요.


.. 그러자 그때, 북쪽 나라의 추운 하늘에 죽은 아이의 모습이 반짝반짝 빛나며 떠올랐습니다 ..  (37∼38쪽)


 어버이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하던가요. 그러나 이 내리사랑이라는 어버이 사랑이란, 가만히 헤아리면 내 어버이한테서 받은 내리사랑이 나한테서 내 아이한테 이어집니다. 내 어버이는 당신 어버이한테서 내리사랑을 받았을 테며, 내 어버이는 치사랑을 당신 어버이하고 나누었겠지요. 나는 내 어버이한테서 내리사랑을 받고 내 아이한테는 치사랑을 받습니다. 내 아이는 나한테서 내리사랑을 받고 나중에 저희 아이한테서 치사랑을 받겠지요.

 

 곧, 서로서로 사랑입니다. 가고 오는 사랑이 아니라 한결같이 흐르는 사랑입니다. 주고받는 사랑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랑이에요.

 

 어느 큰고니 식구는 철이 바뀌었지만 새 터로 떠나지 않고 아픈 아이하고 남았겠지요. 어느 큰고니는 애틋한 짝꿍이랑 떨어지지 않고 둘이 그대로 남았겠지요. 어느 큰고니 식구는 가슴으로 눈물을 삭이며 떠났겠지요. 어느 큰고니는 애틋한 짝꿍을 뒤로 남기고 홀로 떠났겠지요.

 

 남는대서 더 큰 사랑이 아니에요. 떠났다가 돌아왔대서 더 큰 사랑이 아니에요. 아주 떠난대서 모진 사랑이 아니에요. 모두 같은 사랑입니다. 어버이도 아이도 가슴에 깊이 아로새기는 슬픔과 아픔과 눈물이 얼룩지는 사랑이에요. 어버이도 아이도 가슴으로 얼싸안는 빛나는 사랑입니다.

 

 늦은밤, 아이 손과 얼굴을 씻깁니다. 손톱과 발톱을 깎습니다. 이제 잠자리에 누입니다. 이마와 머리카락을 쓸어넘깁니다. 나는 내 아이들 이마와 머리카락을 쓸어넘깁니다. 나는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내 이마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을 테니까, 이 느낌이 내 몸과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졌겠지요. 나로서는 언제 얼마나 쓸어넘겼을는지 조금도 떠올리지 못하더라도, 몸과 마음으로 깊이 스며든 사랑이 있어 내 아이들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겠지요.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요, 말해도 사랑입니다. 함께 있어도 사랑이며, 떨어져도 사랑입니다. 편지를 띄워도 사랑이고, 아련한 눈빛으로 그려도 사랑이에요. (4345.1.20.쇠.ㅎㄲㅅㄱ)


― 큰고니의 하늘 (테지마 케이자부로오 글·그림,엄혜숙 옮김,창비 펴냄,2006.11.15./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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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가운 상말
 600 : 동병상련

 

.. 데어의 글에 웃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실은 동병상련의 웃음이랄까 ..  《폴 콜린스/홍한별 옮김-식스펜스 하우스》(양철북,2011) 83쪽

 

 “데어의 글에”는 “데어가 쓴 글에”나 “데어가 남긴 글에”나 “데어가 책에 적은 글에”로 손질합니다. ‘하지만’은 ‘그러나’나 ‘그렇지만’으로 손보고, ‘실(實)은’은 ‘따지고 보면’이나 ‘알고 보면’이나 ‘가만히 보면’으로 손봅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 :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긴다는 뜻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김을 이르는 말. 《오월춘추》의
   〈합려내전(闔閭內傳)〉에 나온다
   - 그들은 전쟁터에서 동병상련한 사이다 /
     그 당시엔 그와 동병상련할 처지가 아니었다

 

 동병상련의 웃음이랄까
→ 나 또한 아팠기에 짓는 웃음이랄까
→ 아픈 마음에 짓는 웃음이랄까
→ 쓰겁게 짓는 웃음이랄까
→ 쓴웃음이랄까
→ 아픈웃음이랄까
 …

 

 중국 옛글에 나온다고 하는 ‘동병상련’입니다. 곧, 이 말마디 ‘동병상련’은 한국말 아닌 중국말입니다. 예부터 중국과 한국이 가까웠으며, 중국 문화가 한국 문화에 크게 그늘을 드리웠대서 이러한 중국말이 한국말 곳곳에 스며들었다 할 테지만, 한국사람은 한국땅에서 한국말로 넋과 얼을 빛내야 알맞아요. 한국사람이 굳이 일본말이나 미국말이나 독일말을 써야 하지 않듯, 애써 중국말을 써야 하지 않아요. 중국 옛책에 나온다는 말을 부러 외우거나 널리 쓸 까닭이 없어요.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새말을 빚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이를테면, “같은 병을 앓는(同病)” 사람이 “서로 가여이 여긴다(相憐)”는 뜻이라 한다면, “함께 + 앓이”처럼 새말을 빚을 만해요. 내 이웃 아픔을 내가 함께 앓으면서 아픔을 달랜다는 뜻이 돼요. “슬퍼하는 내 오랜 동무하고 함께앓이를 했다”처럼 쓸 수 있어요.

 

 곰곰이 생각하면 ‘어깨동무’라는 낱말에 새로운 뜻을 넣을 수 있습니다. 이 나라 국어사전은 아직까지 ‘어깨동무’라는 낱말뜻으로 “(1) 상대편의 어깨에 서로 팔을 얹어 끼고 나란히 섬 (2) 나이나 키가 비슷한 동무” 두 가지만 싣지만, 사람들은 ‘어깨동무’라는 낱말을 “서로 돕는다”는 자리에서 쓰곤 해요. 그러니까, “어깨동무 (3) 서로 돕는 일”이 되어야 하고, “어깨동무 (4) 아픔을 서로 달래는 일”처럼 될 수 있어요.

 

 전쟁터에서 동병상련한 사이
→ 전쟁터에서 서로를 달래며 살아남은 사이
→ 전쟁터에서 함께 어려움을 이겨낸 사이
 …

 

 “싸움터에서 서로를 달랜” 사이를 가리킬 때에도 “싸움터에서 어깨동무한” 사이라 적을 수 있습니다. 비슷한 뜻과 느낌으로 살린다면, “싸움터에서 서로 어깨를 기댄” 사이라 적어도 돼요. “어깨를 맞댄”이라든지 “어깨를 겯은”이라든지 “어깨를 토닥인”처럼 적을 수 있어요.

 

 이 자리에서는 “함께 아파한”을 넣어도 되고, “함께 눈물웃음 쏟은”을 넣을 수 있으며, “함께 웃고 함께 운”을 넣을 만해요. 하나하나 생각을 기울이면 말문과 말씨와 말길을 차근차근 열 수 있어요.

 

 그와 동병상련할 처지가 아니었다
→ 그와 함께 아파할 처지가 아니었다
→ 그와 같이 아파할 때가 아니었다
 …

 

 “그와 함께 울 겨를이 아니었다”처럼 적어도 어울립니다. 함께 운다고 하는 일은 서로 겪어야 하는 아픔을 서로 달랜다는 뜻이거든요. 함께 아파하기, 함께 울기, 함께 부둥켜안기, 함께 얼싸안기, 이렇게 뜻과 느낌을 곰곰이 헤아립니다. 서로서로 즐거이 나눌 말을 찬찬히 톺아봅니다.

 

 온 마음 기울여 사랑할 말을 찾습니다. 온 넋 담아 아낄 말을 살핍니다. 온 꿈 실어 주고받을 말을 가다듬습니다. (4345.1.2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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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님과 알라딘 사이에 뭔 일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서로서로 저작권이 어떠한가를 제대로 바르게

알지는 못하는구나 싶어

이 글을 쓴다.

아무쪼록 모두한테 도움이 되길 빈다.

 


 저작권


 저작권을 제대로 알거나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나는 2003년 9월부터 2006년 3월까지 이오덕 님 책과 글을 갈무리하는 일을 맡으면서 비로소 저작권을 제대로 알았다. 이오덕 님이 살던 나날, 당신 책을 펴낸 출판사 모두 저작권을 어기면서 당신 책을 펴냈을 뿐 아니라, 몇 억에 이르는 글삯을 떼먹은 출판사까지 있는 줄 깨달았으며, 이 골치아픈 일을 푸느라 나 스스로 신나게 저작권 공부를 해야 했다.

 

 곰곰이 돌이키면, 나부터 그동안 저작권을 꽤나 ‘짓밟으’며 글을 썼다. 이와 함게, 내 저작권 또한 꽤나 ‘짓밟히’며 내 권리를 빼앗긴 채 살았다.

 

 책마을에서 일하며 책이야기를 글로 쓰는 사람 가운데 저작권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으로 적힌 저작권으로 살피자면, 어느 책에서든 ‘한 줄 한 낱말’을 따서 ‘내 글에 넣어서 쓰려’고 한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출판권자한테 서면으로 허락’을 받아야 한다. 전화로는 안 된다. 말로는 안 된다. 법으로 이렇다.

 

 ‘이름이 없다는 개인’이든 ‘언론사’이든 똑같다. 대통령이든 흙일꾼이든 똑같다. 누구라도 ‘글을 쓰면서 책에 적힌 한 줄’을 따서 쓰려 하면, ‘저작권자와 출판권자’한테서 허락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대가를 치러야(저작권 사용료) 한다. 라디오에서 책을 읽을 때에도 저작권 사용료를 치러야 할 뿐 아니라, 서면으로 허락을 받아야 한다. 교실에서 시를 읽어 줄 때에도 저작권자한테 허락을 받아야 할 뿐더러, 저작권 사용료를 치러야 한다. 법으로 이렇다.

 

 신문기사도 저작물이다. 출판사에서 내놓는 보도자료, 이른바 신간소개글 또한 저작물이다. 인터넷책방에 올라온 ‘출판사 신간소개글’을 따서 내 글에 넣어 느낌글(서평, 리뷰)을 쓰려 한다면, 이때에는 반드시 출판사 편집자한테서 문서로 허락을 받아야 하고, 저작권 사용료를 치러야 한다. 법으로 이렇다. 더욱이, 신문사에서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기사를 쓰더라도 출판사한테 허락을 받고 저작권 사용료를 치러야 옳다. 법으로 이렇다. 신문기사를 ‘나온곳(출처)’ 밝히고, 인터넷주소를 붙인다 해서 일이 풀리지 않는다. 신문사에서 이러한 글을 내용증명으로 ‘저작권 침해한 사람(신문기사 따서 쓴 사람)’한테 한 번 보내면, 이 내용증명으로 법 문서 효력이 나서, 법원에 명예훼손이라든지 저작권침해 소송을 걸면, 100% 피해배상을 해야 한다. 법으로 이렇다. 출판사에서는 신문사에 저작권침해소송을 걸 수 있다. 그러나, 신문사에 소송을 거는 출판사는 없다. 이렇게 하다가는 미운털 박힐 테니까.

 

 거꾸로, 내가 쓴 느낌글(서평, 리뷰)을 신문사에서 ‘내 허락을 안 받고 나한테 저작권 사용료 치르지 않고’ 실었다면, 이때에도 얼마든지 내용증명과 함께 피해배상 소송을 걸어 100% 내 권리를 되살릴 수 있다. 그뿐인가. 신문 1쪽 머릿기사로 사과글을 싣도록 할 수 있다. 법으로 이렇다.

 

 내가 ‘이름 안 난’ 사람이라서 피해배상을 못 받지 않는다. 피해배상을 받거나 물어야 하는 돈은 늘 같다. 다만, 법원에서 소송을 걸고 마무리짓자면 꽤나 오래 걸린다. 이러한 소송은 으레 저작권자(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을 빚은 사람)가 출판권자(출판사)한테 거는데, 출판권자는 흔히 3심까지 버틴다. 3심까지 버티면 피해배상할 돈이 부쩍 줄어들 뿐 아니라, 짧아도 서너 해나 대여섯 해까지 걸리기도 하니까, 소송을 거는 저작권자만 돈과 시간과 땀과 마음으로 끔찍하게 생채기를 받는다. 이리하여, 적잖은 출판사들, 게다가 이름났을 뿐더러 훌륭하다는 소리마저 든는 출판사들까지, 저작권법을 어기면서 저작권자 권리를 짓밟곤 한다.

 

 사람들이 제대로 모르기도 하고, 책마을 일꾼조차 잘 모르지만, 책을 내며 굳이 계약서를 안 써도 된다. 왜냐하면, 저작권법에서 지켜 주니까. 출판사에서 마련한 계약서에 도장을 쾅쾅 찍어도, 이 계약서는 저작권법에 따라 ‘아무 효력이 없’다. 왜냐하면, 출판사에서는 저작권법에서 밝히는 대로 계약서를 마련하지 않고, 출판사한테 좋도록 계약서를 요리조리 고치니까, 이렇게 고친, ‘표준계약서 틀’에서 벗어난 계약서는 나중에 법정 소송으로 가면, 아무런 효력을 내지 못한다. 이를테면, 표준계약서 틀로 밝히는 저작권법으로는, 출판계약은 ‘출판권 기간 기본 3년, 자동재계약 없음’이다. 그런데 출판사들은 출판사 편의에 따라 ‘출판 계약 5년, 자동재계약’이라는 글월을 집어넣는다. 곧, 이러한 계약서는 처음부터 출판사가 법을 어긴 채 쓴 계약서이기 때문에, 아무 효력을 내지 못한다. 저작권자가 도장을 찍었어도 법정에서는 무효로 친다. 왜냐하면, 출판권자가 처음부터 법을 어겼을 뿐 아니라, 저작권자한테 법을 옳게 알리지 않았으니까.

 

 저작권법은 어찌 보면 무섭다.

 

 저작권법은 찬찬히 살피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는’ 모든 사람들한테 마지막 버팀나무이자 든든한 울타리이다.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부디 저작권법을 스스로 익힐 노릇이다.

 

 스스로 저작권리를 지키고, 스스로 저작권리를 아낄 노릇이다.

 

 참말 마땅한 노릇인데, 내 느낌글(서평, 리뷰)이든 비평글이든 무슨 글이든, 글을 쓰면서 ‘내 글에 다른 사람(저작권자)이 쓴 글’을 다른 사람 허락을 받지 않고 실을 때에는 저작권법 위반이 된다. 저작권법 위반은 여러 가지이다. 첫째, 저작권리 침해, 둘째, 사후보고와 사후보상 침해, 셋째, 성명표시 위반, 넷째, 인신공격.

 

 논문을 쓰면서 ‘다른 사람 논문 몇 대목 따오기’를 해도 저작권 위반이 된다. 반드시 다른 논문을 쓴 사람한테서 하나하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다만,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면서 글을 쓰자니 너무 번거롭거나 힘들거나 머리가 빠개지니까 이렁저렁 넘어가고, 서로서로 이렁저렁 넘어가면서 서로서로 저작권이 뭔지를 살피지 않을 뿐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한 가지를 더 살펴보자. 내가 인터넷책방에 올린 느낌글 저작권리는 누구한테 있을까? 인터넷책방에서 이래저래 규약을 세우고 뭐를 한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이 저작권리는 글쓴이한테 있다. 인터넷책방 관리자가 이 글(저작물)을 쓰면서 저작권자한테 제대로 연락하지 않거나 저작물 사용료를 치르지 않을 때에, 저작권법에 따라 저작권자가 내용증명을 보낸 다음 가까운 법원에 피해배상 소송을 걸면 100% 인터넷책방이 피해배상을 해야 한다. 앞서 얘기했듯이, 시간과 품과 땀이 걸리며 마음이 다칠 뿐, 100% 피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저작권법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저작권법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법은 법일 뿐이니까.

 

 그렇다고 나는 ‘카피레프트’를 외치지 않는다. 내 글은 내 땀이요 내 삶이며 내 사랑이니까.

 

 그저 나는 내 온 삶을 들인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저마다 당신들 삶자리에서 좋은 사랑씨앗 뿌려 사랑열매 거두는 좋은 꿈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카피라이트나 카피레프트는 부질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삶을 누리면서 내가 지키고 싶은 좋은 꿈과 사랑을 착하고 예쁘게 지키고 싶다. 살아가다 보니 이래저래 하면서 법을 좀 골때리도록 배워야 했을 뿐이요, 법을 곰곰이 배우다 보니, 내가 어떻게 살아야 아름다운가 하는 길을 천천히 찾자고 다짐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말잔치를 떠나, 나 스스로 아름다이 살아가는 꿈을 실은 글을 빚을 수 있으면 즐겁다. 나눌 만한 글을 쓸 때에 즐겁다. 돈을 버는 글을 쓰면 덧없다. (4345.1.2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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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01-20 10:54   좋아요 0 | URL
저작권법이 뭔지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는데 된장님의 글을 읽어보니 정말 많은 도움이 되는군요. 인터넷의 발달과 블로그의 등장으로 사실상 '1인 출판'과 '1인 미디어'의 시대가 열리면서 (한편으로는) 법이 너무 뒤처져서 현실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가졌었는데, 된장님의 글을 읽어보니 '법은 법'이다 싶군요. 인터넷 공간에서 한때는 '퍼나르기'가 무슨 미덕처럼 아무런 거리낌없이 퍼져나갈 때도 있었고, 이 곳 알라딘에서조차 '펌글'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던 기억도 새삼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이번 일을 계기로 '남의 권리를 제대로 존중하고 지켜줘야 내 권리도 제대로 지킬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도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된장님 글의 마지막 문장은 정말 명언이네요.)

파란놀 2012-01-20 11:55   좋아요 0 | URL
'한국저작권위원회'라는 곳이 있어요.

이곳에서 저작권법 '전문'을 꼼꼼히 읽어 보시면 여러모로 저작권법이 무엇인지 조금은 짚을 수 있어요.

이런 다음, 저작권위원회에서 '표준으로 만든' 출판계약서를 읽으면, 출판사들이 얼마나 멋대로 저작권법을 어기면서 계약서를 만드는가를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출판사들이 쓴 계약서는 99% 이상 '원천무효'가 된답니다. (그런데 이건, 책을 내는 분들만 알 수 있겠네요. 이궁. 그래도 알라딘서재에는 책을 내는 분이 퍽 있으시니까, 부디 저작권위원회 표준출판계약서를 읽어 보시면 좋겠어요)

이러한 여러 법조문과 표준계약 사항 들을 보면, 온라인매체나 포털사이트에서 만드는 규정과 규약 또한 '소비자인 우리들'이 법으로 따질 때에 우리가 누릴 권리가 무엇인가를 환히 알 수 있어요.

저작권법에는 어떠한 '편의'도 봐주지 않아요. 오직 '법'에 따라 모든 사람한테 고르게 '권리 지키기'를 할 뿐이에요.

다만, 이 저작권법을 잘 써야지, 악용하면 그야말로 입에 재갈을 물리는 꼴이 되기 때문에 몹시 위험할 수 있어요. 우리 나라는 기본법을 살피면, 법으로는 꽤 잘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다들 편의라든지 다들 그렇게 하니까 따라한다는 투로 하면서, 법을 어기거나 비트는 일이 너무 많기 일쑤예요.

내가 어느 매체에 쓴 글을 알라딘서재에 올리려 한다면, '매체에 실릴 때'에 신문사에서는 신문사대로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바꾸니까, 매체에 보내기 앞서 '내가 쓴 원글'을 올리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_-;;;;

그러니까, 로쟈 님은 굳이 어느 매체에 올린 글이라 밝히지 말고, 인터넷주소도 걸지 않으면 돼요. 그냥 로쟈 님이 쓴 원글 그대로 알라딘서재에 스스로 띄우면 저작권법이고 뭐고 아랑곳할 일이 없기도 하답니다 @.@

..

더 생각해 보면, 언제나 '내 새로운 글'을 쓰면 돼요. 다른 사람 글을 인용하느라 땀흘리지 말고, 내 생각을 밝히면 되지요.

그리고, 저작권법에서 인용 예외에 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를테면,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풀이를 인용하는 일은 '저작권 인용'에서 예외가 돼요...

oren 2012-01-20 13:11   좋아요 0 | URL
세세한 살명을 덧붙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순수한 '나의 창작글'이야 문제가 안되겠지만, 저같은 경우는 창작글을 써봐야 대체로 '잡문' 수준밖에 쓸 수가 없으니, 자꾸만 훌륭한 글과 좋은 글들을 찾아 인용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템플턴경의 평생 결심 한가지가 "출판하고 싶지 않은 글은 절대 쓰지 않는다. 독자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독자들의 수준을 높여주는 것이어야 하며, 결코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는데, 그런 글을 쓸 수 있을 때까지는 그저 조용히 책이나 읽어야 하는 게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

마립간 2012-01-20 17:3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마립간입니다. 처음 인사드리는 것 같습니다.
로쟈님의 글에 대한 알라딘의 해석은 저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학계에서는 자신이 쓴 글이라고 해도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자기 표절'이라고 하며 저작권의 침해로 보는데, 어떤 근거를 바탕으로 신문사에 기고한 글이 아래*와 같은 해석이 나왔을까요. 특정 신문사의 예외적인 경우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된장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쓴 원 글'을 게제해서 저작권 시비를 피한다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여쭙고 싶은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자기)표절 시비와 무관할까하는 의문이 남아 글을 남깁니다.
* http://blog.aladin.co.kr/mramor/5368534 ; Box안에 있는 알라딘의 답변

파란놀 2012-01-20 18:34   좋아요 0 | URL
내가 쓴 글을 놓고까지 신문사가 그렇게 따지려 들면, 이렇게 하면 그런 그물은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신문사에서는 신문에 글을 앉힌 모양새를 갖고 '편집권'이라고 따질 수 있는 노릇이니, 글을 쓴 사람은 신문에 앉혀지지 않은 원글 모습 그대로(텍스트로만) 올리면 아무런 시빗거리조차 될 수 없다는 말이에요. (극한 상황을 이야기한 대목인데, 다행스럽게도 극한 상황까지는 가지 않고, '내가 쓴 글은 그렇게 올려도 괜찮다'고 알라딘에서 답변해 주었으니 참 고마운(?) 셈 아닌가 하고 생각해요)

마립간 2012-01-21 09:06   좋아요 0 | URL
답변 감사합니다.
 


 바닥에 두꺼운종이 깔고 앉기
 [‘사진책 도서관’ 함께살기] 도서관일기 2012.1.14.

 


 바닥깔개가 틀림없이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 집에도 도서관에도 없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아이가 느긋하게 앉아서 책을 읽으며 놀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데 참 힘들다. 그러다 문득, 두껍고 큰 골판종이가 있다는 생각이 난다. 커다란 골판종이를 바닥에 깔아 본다. 꽤 괜찮다. 여러 겹 깔아 본다. 썩 좋다. 깔개를 바닥에 대어 찬기 올라오지 않도록 막은 다음 골판종이를 위에 깔면 훨씬 좋겠다고 느낀다.

 

 내가 쓰는 책으로 글삯을 많이 벌면, 이리하여 이 초등학교 건물과 운동장을 통째로 장만할 수 있을 때에는, 바닥을 새로 하면서 불을 넣는 무언가 마련해서 누구나 신을 벗고 들어와서 드러누워 책을 읽을 자리를 꾸미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고 꿈을 꾼다. 그때까지는 이렇게 어설프나마 책갈무리를 하면서 아이가 놀 자리를 꾸미자.

 

 이렁저렁 하루치 책갈무리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논둑길을 걷는다. 조금 돌아 찻길을 거닐 수 있지만, 난 이 길이 더 좋다. 흙을 밟을 수 있는 길이 즐겁다. 흙을 밟을 때에는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아주 싱그러운 기운이 올라온다고 온몸으로 느낀다. 우리 아이들부터 좋은 흙기운을 듬뿍 누릴 수 있기를 꿈꾼다. 나는 늘 꿈을 꾼다. 이 꿈 저 꿈 신나게 꾼다. 생각해 보라. 꿈을 꾸었기에 사진책도서관을 열었고, 좋은 옆지기를 만났으며, 아이를 둘 낳고, 시골에서 살아갈 수 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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